1. 후기 지방통치제의 구조
1. 후기 지방통치제의 구조
1) 지방통치단위의 편제를 둘러싼 논의
6세기 이후 고구려의 지방통치제 관련 사료는 다른 시기에 비해 많은 편이다. 하지만 해당 사료가 지방제도 전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단편적인 내용을 담은 몇 줄뿐이어서 그에 대한 해석과 당시의 지방통치제 자체에 대해 여전히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후기 고구려 지방통치조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료로는 다음 세 기사를 들 수 있다 첫째, “다시 요동, 현도 등 수십 성이 있는데, 모두 관사를 두고 서로 통섭했다”고 하는 『주서(周書)』 고려조의 기사,주 001 둘째, “또 제대성에는 욕살을 두었는데 도독에 비정된다. 제성에는 처려 구자사주 002를 두었는데 또한 도사라 칭한다. 도사의 치소를 이름하여 비라고 한다. 제소성에는 가라달을 두었는데 장사에 비정된다. 또 성에는 루초를 두었는데 현령에 비정된다”고 한 『한원(翰苑)』 고려조의 기사,주 003 셋째, “바깥에는 주현 60여 성을 두었다. 대성에는 욕살을 두었는데 이는 도독에 비정된다. 제성에는 도사를 두었는데 자사에 비정된다. 그 아래 각각 요좌를 두고 일을 나누어 담당하게 했다”고 한 『구당서』 고려조에 나오는 기사다.주 004 이 중 『주서』는 6세기 중·후반, 『한원』과 『구당서』는 7세기의 상황을 보여주는 사료다.
『한원』에 인용된 『고려기』의 기사는 후기 지방통치체제의 구조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지방통치체제를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한 듯 보임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이 기사를 둘러싸고 논의가 분분하다. 후기 고구려 지방지배체제를 둘러싸고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 중 하나가 당시 지방통치단위가 몇 단계로 편제되어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차가 발생한 이유는 바로 이 기사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후기 지방통치조직에 대해서는 2단계 편제설, 3단계 편제설, 4단계 편제설이 있다.
먼저 제대성(諸大城)-제성(諸城)-제소성(諸小城)-성(城)의 4단계로 편제하고, 제대성에는 녹살(傉薩), 제성에는 처려근지(處閭近支), 제소성에는 가라달(可邏達), 성에는 루초(婁肖)를 파견했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노중국, 1979). 『고려기』의 기사에 서술된 순서 그대로 지방통치조직이 구성되었다고 본 것이다.
다음으로 제소성에 파견된 가라달이 장사에 비정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를 욕살주 005과 처려근지의 속관(屬官)이라고 보아, 제대성(욕살-가라달)-제성(처려근지-가라달)-성(루초)의 세 단계였다고 파악한 설이 나와(武田幸男, 1980), 지지를 얻었다(임기환, 1995; 여호규, 2017; 최희수, 2008; 나동욱, 2009). 이 경우 지방통치조직이 3단계로 편제된 것으로 본다.
이와 달리 가라달의 ‘라(邏)’자가 내포하고 있는 ‘순찰하다’에 의미를 두어, 가라달이 변경지역이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의 하위 지방관이었다고 본 견해도 있다(김현숙, 1996). 이 경우 3단계 조직이었다고 보는 것은 같지만, 변경이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은 욕살-처려근지-가라달, 일반지역은 욕살-처려근지-루초의 3단계로 편제된 것으로 보았다.
그런 한편 욕살과 처려근지가 병렬적인 성격의 지방관이었고, 가라달은 욕살과 처려근지의 고위 보좌관으로서 군사적 소성을 총괄했다고 본 설도 나왔다(盧泰敦, 1996). 이 경우 당시 고구려 지방통치조직이 2단계 조직이었으며, 멸망기까지 3단계 조직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했다.
요컨대 고구려 후기에 지방 각 지역의 크고 작은 성을 피라미드식으로 편제한 뒤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여 일원적·직접적으로 통치했다고 보는 데에는 모두 견해를 같이하고 있다. 하지만 지방통치조직의 편제에 대해 여전히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 이래 고구려 지방통치제에 대한 연구가 확대, 심화되면서 3단계 조직이었으며, 군사적 성격이 강한 지역에 가라달이 주둔했다고 보는 것으로 의견이 수렴되어 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2절(후기 고구려 지방관의 성격)에서 다시 상세히 논하기로 하겠다.
2) 내평과 외평의 성격 및 지방 5부의 존부를 둘러싼 논의
고구려 후기 지방통치조직의 구조와 관련하여 논란이 되고 있는 또다른 문제는 내평(內評)과 외평(外評)의 위치와 지방 5부의 존부 문제이다. 이것은 후기의 최상위 지방관인 욕살의 성격에 대한 논의와도 관련되어 있다. 이 때문에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는데, 그 실상을 명확하게 파악하기에는 현존 자료가 너무나 소략하고, 서로 달리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많다.
내평과 외평의 위치에 대한 논란은 『수서』 권81 동이열전46 고려조에 나오는 “다시 내평 외평 오부 욕살이 있다(復有內評外評五部褥薩)”는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이 기사는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내평, 외평, 5부의 위치와 욕살의 파견 지역 등 여러 가지 사안을 둘러싸고 많은 논의를 생산했다.
이에 대해 내평은 내부(畿內)의 주현(州縣), 외평은 나머지 4부(畿外)의 주현을 지칭하며 내평과 외평을 총칭한 것이 5부라고 본 견해가 먼저 나왔다(池內宏, 1951). 위 구절을 “다시 내평과 외평, 즉 5부에 욕살이 있다”로 해석한 것이다. 이 경우 욕살은 내부(내평)를 포함한 전국 5부의 장이지만 오골성(烏骨城) 욕살의 존재로 보아 5부의 치소(治所) 외에도 중요한 성에는 욕살을 배치한 것으로 보았다.
이와 달리 기내와 왕도를 합한 내평과 외평의 5부에 각각 욕살이 파견된 것으로 보기도 했다(山尾幸久, 1974; 崔熙洙, 1990; 林起煥, 1995). “다시 [기내와 왕도인]주 006 내평과 [지방인] 외평의 5부에 욕살이 있다”로 해석한 것이다. 전국을 ‘내역(內域)=안 지역’과 ‘외역(外域)=바깥 지역’으로 크게 구분했던 것으로 보고, 안으로 관념한 지역은 왕도와 그 주위의 일정 지역인 기내로서 ‘내평’이고, 밖으로 인식한 곳은 그 외의 지방으로서 ‘외평’이라 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위 사료는 “다시 내평과 외평의 오부에 욕살이 있다”라고 풀이할 수 있다(김현숙, 1996).
반면 5부는 왕도, 내평은 기내지역이고, 외평은 지방을 지칭한 것으로 본 견해도 나왔다(今西龍,1970; 武田幸男, 1980b; 노태돈, 1999). 위 구절을 “다시 (기내지역인) 내평, (지방인) 외평, (왕도인) 5부에 욕살이 있다”로 해석한 것이다. 이들은 왕도 5부와 기내지역 및 지방의 주요 대성에 욕살을 파견했다고 보았다. 이 경우 왕도 5부만 존재했고, 지방 5부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본다.
이처럼 의견이 분분하므로 과연 중앙과 지방을 각각 5부로 지역 구분했는지, 그것이 실제 지방통치조직으로 기능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당서』 권220 동이열전 고려조에는 “5부와 176성 69만 호를 거두었다”고 한 기사가 나온다. 이 기사는 “(왕도의) 5부와 (지방의) 176성에 거주하는 69만 호를 거두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지방 5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학자들은 이를 주요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수서』에 나오는 5부 관련 기사는 내평과 외평에 각각 5부가 있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구당서』 고려조에는 “고려국은 예전에 [영토를] 나누어 5부로 했는데, 성이 176, 호가 69만 7,000호였다”고 나온다.주 007 이 기사는 고구려 전역이 다섯 개의 부로 나뉘어졌고, 그 5부 안에 176성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전국 5부의 존재를 인정하는 학자들은 이 사료를 가장 대표적인 근거자료로 들고 있다.
지방 5부의 존재 가능성을 보여주는 다른 사료도 있다. 연개소문의 아들인 천남생(泉男生)의 묘지명(墓誌銘)에는 “[평양성이 함락되자] 그 왕 보장(寶藏)과 남건(男建) 등이 다 포로가 되었으며, 높은 산과 깊은 바다가 함께 [당의] 경계로 들어왔고, 오부(五部)와 삼한(三韓)이 모두 신첩(臣妾)이 되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천남생은 “5부의 우두머리이자 삼한의 영걸”이었다는 표현도 나온다.
또 남생의 아들인 천헌성(泉獻誠)의 묘지명에는 “증조인 대조(大祚)는 본국에서 막리지(莫離之)에 임용되었으며, 병권을 장악하여 기세가 삼한을 제압하고 명성은 5부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나온다. 또 “처음 양공(襄公)이 밖으로 부(部)를 살피러 갔을 때 공(公)도 역시 따라갔다”는 구절도 나온다. 여기에서 양공은 천남생을 가리킨다. 이것은 천남생이 아버지를 이어 최고 권력을 차지한 후 지방 순시를 나갔을 때 상황을 보여주는 사료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전하는 기사가 『자치통감』에 나온다. 여기에는 “고려 천개소문이 죽자 장자 남생이 대신 막리지가 되었는데 처음으로 국정을 살피기 위해 출행하여 여러 성을 돌아보았다”주 008고 나온다. 즉 〈천헌성묘지명〉에는 바깥에 있는 부를 살피러 갔다고 나오는데, 『자치통감』에는 여러 성을 둘러보았다고 나오는 것이다. 〈천헌성묘지명〉의 부와 『구당서』와 〈천남생묘지명〉에 나오는 5부가 동일한 것이라면, 이 5부는 고구려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삼한은 〈광개토왕비〉에 ‘속민(屬民)’으로 지칭했던 백제와 신라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고구려 전역이 다섯 개의 부로 구획되었고, 그 지방 5부에 소속된 176기의 성이 지방행정단위로 설정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고구려 말기 당과의 전쟁 과정을 살펴보면 외평 5부가 실제 지방통치단위로 기능했다고 보기 어렵다(김현숙, 1996). 백제의 5방과 같은 개념의 5부가 있었다면 부의 장이 존재하고, 그가 전쟁 과정에서 활약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 활동상이 확인되는 존재는 외평 5부의 장이 아니라 욕살들이었다. 따라서 고구려 전역을 5개의 광역으로 나누고 이를 5부라 했지만 지방통치조직으로서 실질적인 기능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외평 5부의 존재는 후기의 최상층 지방관인 욕살의 치소와 직접 관련되어 있는 문제다. 따라서 다음 절에서 이 문제에 대해 다시 살펴보기로 하겠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