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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후기 고구려 지방관의 성격

2. 후기 고구려 지방관의 성격

후기 지방통치체제의 구조에 관해 서로 견해가 다른 것은 관련 사료에 지방관의 성격을 분명히 서술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고구려 고유의 명칭을 띤 지방관을 당시 중국 왕조의 지방관과 비교하여 명칭을 비정함으로써 혼란을 더 가중시켰다. 이것은 당시 고구려와 중국의 지방관이 명칭이나 성격, 직급 등에서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확히 같은 관직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슷한 관직을 들어 비정하는 바람에 더 복잡하게 된 것이다.
고구려의 지방지배는 주요 교통로에 축조된 크고 작은 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4~5세기에도 그러했고 6세기 이후 지방지배 역시 크고 작은 성을 단위로 조직되고 운영되었다는 것에는 기본적으로 변화가 없다. 그러나 시기와 국내외 상황이 달라진 만큼 중기의 지방제와 달라진 점이 없지는 않다.
후기 고구려 지방통치조직에 대해 개괄적으로 서술한 『주서』와 달리 『한원』과 『구당서』의 기사를 보면, 이전과 달라진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한원』 소인 『고려기』에는 대소성의 지방관으로 녹살, 처려근지, 가라달, 루초가 있었다고 나온다. 또 『구당서』 고려전에는 주현(州縣) 60여 성이 있었는데 대성(大城)에는 녹살, 제성(諸城)에는 도사(道使)가 있었고, 각각 요좌(僚佐)를 두고 일을 분장했다고 나온다. 이 두 사서의 기사는 서로 동일한 내용을 서술한 것이다.
그런데 이 사료들에서는 5세기 금석문에 나오는 ‘수사(守事)’라는 지방관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욕살, 처려근지, 가라달, 루초 등 이전 시기 사서에 나오지 않던 관직명이 보인다. 따라서 이 기사들을 통해 6세기에 들어와 지방통치제가 변화되었다는 것과, 그 결과 정립된 관사(官司)와 속료(屬僚)를 둔 수십 기의 대성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지방통치체제가 말기까지 지속되었다는 것 등을 알 수 있다.
 
1) 욕살의 성격과 치소
고구려 후기의 최상위 지방관은 욕살이었다. 욕살에 대한 자료는 다른 지방관 사료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긴 하지만, 모두 단편적인 기사들이기 때문에 욕살의 성격과 직무, 활동지역 등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학자들 사이에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신당서』 권220 동이열전145 고구려전에는 보장왕 4년(645년) 당 태종이 침략해왔을 때, 당나라군에 포위된 안시성을 구하러 1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갔다가 사로잡혔던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서는 고연수를 “고려 위두대형 이대부 후부 군주 고연수(高麗位頭大兄理大夫後部軍主高延壽)”, 고혜진을 “대형 전부 군주 고혜진(大兄前部軍主高惠眞)”이라고 기술했다. 『신당서』에는 두 사람이 욕살이었다고 나오는데, 『책부원구』에는 군주였다고 적혀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욕살이 곧 군주라고 볼 수도 있고, 욕살이면서 군주직을 겸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여·당전쟁의 최종전이었던 평양성전투 과정에서 끝까지 항거했던 고구려 군주 술탈(述脫)이 있다. 술탈이 지방관으로서 욕살이기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사료상에 나오는 바로는 그가 평양성을 지키기 위해 최후까지 싸웠던 군사령관으로 보인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군주가 곧 욕살이고 이는 지방관이었다고 결론 내리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고연수와 고혜진은 욕살이면서 군주직을 겸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한원』에서는 욕살을 도독에 비정해 놓았다. 실제로 멸망 후 유민이 된 고구려인의 묘지명에 욕살 대신 도독으로 표기한 경우가 많다. 책성도독 고량(高量), 책성도독 이타인(李他仁), 요부도독(遼府都督) 고과(高夸), 해곡부도독(海谷府都督) 고부(高孚) 등이 그 예다. 따라서 욕살이 곧 도독이었다고 보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지금까지 문헌이나 묘지명 자료를 통해 확인된 욕살은 위 네 명과 북부욕살 고연수, 남부욕살 고혜진, 그리고 이름이 명기되어 있지 않은 오골성욕살 등 7명이다. 이들 가운데 고연수와 고혜진은 북부와 남부라는 방위명부를, 오골성욕살과 책성도독은 성의 이름을 직명 앞에 표기하고 있다. 방위명부 욕살과 성 이름 욕살은 어떤 성격 차이가 있을까?
욕살의 성격을 규명할 수 있는 단서가 되는 인물 가운데 구체적인 활동 사실이 사서에 나와 있는 사람은 고연수와 고혜진이다. 이들은 지방 5부의 욕살이었을까? 왕도 5부의 욕살이었을까? 요동으로 침입해온 적군에 대응하기 위해 북부와 남부라는 방위명부를 붙인 욕살이 출동했다. 고구려 영역을 동·서·남·북·중의 광역으로 나눠볼 경우, 오골성은 안시성과 함께 서부에 속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중국 길림성 혼춘(琿春)에 있던 고구려 동북 변경의 중진인 책성도독은 동부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오골성욕살과 책성도독은 고연수, 고혜진과 달리 서부욕살, 동부도독이라 하지 않고 치소 성(治所城)의 이름으로 표기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앞에서 왕도와 경기를 포함한 내평과 그 외 지방에 해당하는 외평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거기에 각각 5부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정리한 바 있다. 내평과 외평에 모두 욕살이 있었다.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이 바로 내평 욕살이다. 이들은 15만 병력을 이끌고 안시성을 구하러 갔는데, 이때 동원한 병력에는 중앙군과 함께 지방군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즉 내평 욕살은 중앙군과 지방군을 이끌고 가 전투지역의 지방군과 합쳐 군사작전을 수행한 군단장 같은 성격을 가졌다.
그럼 그들은 중앙군의 최고위 사령관이었고 지방관이 아니었다고 보아야 할까? 사서에는 욕살을 최고 지방관으로 명기해 놓았다. 성격이 서로 다른 관인에게 동일한 관직명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내평 욕살과 외평 욕살은 내평과 외평에 파견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날 뿐 담당하는 업무는 동일했을 것으로 본다. 고구려의 지방관은 후기에도 역시 군사지휘관이자 행정관이었으므로 내평 욕살도 내평 지역을 통치하는 지방행정관이자 군단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외평 욕살은 말 그대로 바깥 지역, 즉 지방에 파견된 최고위 지방관이었다. 이들 역시 지방행정관이자 군단장이었다. 그럼 외평 욕살은 몇 명이 있었을까? 전국을 동·서·남·북·중으로 나누었다면 중인 내평을 제외하고 네 명의 욕살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역의 주요 전략지점을 중심으로 권역을 나누어 욕살을 파견했다면 그보다 많은 수의 욕살이 있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오골성욕살을 중심으로 분석해볼 수 있다. 오골성은 현재 중국 요령성 봉성(鳳城)에 있는 봉황산성(鳳凰山城)이라고 보고 있다. 오골성은 요동과 국내성, 요동과 평양을 연결하는 교통요지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까지 조사된 고구려 산성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성이다. 또 책성은 일찍부터 고구려의 동북방 중진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대성이다.
『구당서』에는 고연수와 고혜진이 당 태종에게 ‘오골성을 치면 그 도상(道上)에 있는 작은 성들이 저절로 무너질 것’이라며, ‘안시성보다 오골성을 먼저 공격하라고 건의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기사를 근거로 지방에 설치된 다섯 개의 군관구 가운데 하나의 도독으로서 오골성욕살이 군사력을 통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했다(山尾幸久, 1974). 물론 오골성욕살이 외평 5부의 하나인 서부욕살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고연수 등의 건의가 ‘오골성욕살이 고구려 서부의 군사력을 총괄하고 있으므로, 오골성을 치면 요동 지역 전체를 거둘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시 지방통치조직의 최상위 단위로서 지방 5부가 실제로 기능했다면 서부의 최고 지방관인 욕살은 오골성욕살 한 명만 존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 과정에서, 특히 요동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오골성욕살이 상당히 큰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당나라 군대가 백암성(白巖城)과 박작성(泊灼城)을 공격했을 때 오골성에서 구원병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중앙에서 파견된 관인이 다른 성의 병사를 이끌고 지원하러 간 기사나, 요동 지역의 대성으로부터 다른 성으로 구원군이 파병되는 예는 오골성이 아닌 다른 성의 경우에도 종종 발견된다. 보장왕 4년(645년) 이적(李勣)의 군대가 공격해왔을 때 국내성과 신성의 보병과 기병 4만 명이 요동성을 구원하러 가기도 했고, 개모성(蓋牟城)을 지키기 위해 막리지가 가시성인(加尸城人) 700명을 파견하기도 했다. 또 앞에서 보았듯이 안시성이 위기에 빠졌을 때 중앙에서 고혜진과 고연수를 수장으로 하여 15만 명을 원군으로 보냈다. 그리고 같은 해 당군이 요동성을 쳐 요주(遼州)로 만든 후 백암성으로 진군했을 때 오골성에서 병사 만여 명을 구원병으로 보내기도 했다. 보장왕 7년(648년) 당군이 박작성을 공격했을 때 장수 고문(高文)이 오골(烏骨)과 안지성(安地城)의 병사 3만여 명을 이끌고 와서 지원한 적도 있다. 총장(總章) 원년 이적 등이 부여성을 공격했을 때에도 남건이 병사 5만 명을 구원병으로 보냈다.
이런 사례를 볼 때, 오골성에서 다른 성으로 지원군을 파견한 기사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오골성욕살이 요동 전체를 관장하는 서부욕살이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667년과 668년 당과의 최후 항전에서 신성과 부여성이 함락되자 관련된 16성과 40여 성이 순식간에 붕괴되었으나, 오골성욕살의 활동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기사에 나타나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하는 최후의 전쟁에서 그것도 최전선 지역을 총괄해야 하는 서부욕살의 활동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역시 의아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정황이 이러하므로 요동 지역을 포괄적으로 통치하는 욕살 한 명이 존재했다고 보기보다는 오히려 다수의 욕살이 주변 수십 개의 대소성을 총괄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 듯하다. 즉 예컨대 신성과 부여성 등이 함락되자 그대로 항복한 수십 성이 두 성의 욕살 관할하에 있는 제성, 소성이라 보는 것이다. 『주서』에 나오는 “다시 요동·현도 등 수십 성이 있는데, 모두 관사를 두고 서로 통섭했다”는 기사도 그런 면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고연수 등의 건의도 오골성이 서부욕살의 치소이므로 이 성이 무너지면 요동 전체가 붕괴될 것이란 의미였다기보다는, 봉성 지역이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진격하는 교통 요지이므로(東潮·田中俊明 編著, 1995) 오골성이 무너지면 평양으로의 진격이 용이할 것이며, 평양이 함락되면 요동 지역의 다른 대성들도 쉽게 항복하리란 뜻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교통요충지의 전략지점에 구축된 주요 대성에 외평 욕살이 있어 광역별로 지역 지배와 방어를 책임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내평과 외평의 욕살을 합한 전체 수가 10명에 한정된다고 볼 필요는 없다. 중원과 북방 지역으로부터의 적침을 막아야 하는 요동 지역의 경우, 다른 곳보다 많은 수의 욕살이 파견되었을 것이다(김현숙, 1996).
그럼 욕살급 지방관이 파견된 대성은 현재 남아 있는 산성들 중 어디에 해당될까? 최근 요동 지역 산성 조사와 연구가 많아지면서 욕살이 주재했던 대성이 어디에 있는 어떤 성이었을까를 두고 논의가 진전되고 있다.
먼저 이에 대해 유추할 수 있는 문헌사료로는 『구당서』 권39 지리2와 『신당서』 권43 지리7하 도독부 편제 기사에 나오는 신성도독부(新城都督府), 요성주도독부(遼城州都督府), 가물주도독부(哥勿州都督府), 위락주도독부(衛樂州都督府), 사리주도독부(舍利州都督府), 거소주도독부(居素州都督府), 월희주도독부(越喜州都督府), 거단주도독부(去旦州都督府), 건안주도독부(建安州都督府)를 들 수 있다. 고구려 멸망 후 설치된 이 9도독부 가운데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신성도독부, 요성주도독부, 건안주도독부 정도이다. 각각 신성, 요동성, 건안성으로 보는 데 문제가 없다. 나머지는 구체적인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다.
또 다른 사료로는 『삼국사기』 지리지4에 미항성(未降城), 이항성(已降城), 도성(逃城), 타득성(打得城)으로 분류하여 기재해 놓은 목록이 있다. 여기에 북부여성주, 신성주, 요동성주, 옥성주(屋城州), 다벌악주(多伐嶽州), 국내주(國內州) 등 6개의 주가 나온다. 이 목록에 열거된 많은 성 가운데 이 6개 성만 주로 표기되어 있고, 이 가운데 신성주와 요동성주는 도독부가 설치된 곳으로 나오므로 나머지 4주도 욕살의 치소라 추정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다벌악주는 정확히 어디라고 지목하기 어렵지만 나머지는 북부여성, 신성, 요동성, 오골성, 국내성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비록 9도독부나 6개 주에는 들어 있지 않지만 현재 확인되는 산성유적의 규모로 보나 사서에 나타나는 비중으로 보나 황해도 재령의 한성(漢城)도 욕살의 치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고구려 유민 묘지명을 통해 확인된 책성도독, 요부도독, 해곡부도독이 있다. 이 중 책성은 혼춘의 성자산산성(城子山山城), 살기성(薩其城), 온특혁부성(溫特赫部城) 등이 대상지로 거론되고 있다. 요부도독과 해곡부도독은 〈고을덕(高乙德)묘지명〉을 통해 확인되었다. 요부는 요동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데 이의가 없지만(이성제, 2018), 해곡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뉜다. 즉 동해안의 청진(淸津)으로 보는 설(여호규, 2017)과 한성으로 보는 설(이성제, 2018)이 있다.
욕살급 대성의 치소를 현재 남아 있는 성유적에 비정하는 것은 여전히 확정적이지 않다. 먼저 현재 길림(吉林)에 있었던 북부여성과 혼춘의 책성, 봉성의 오골성, 무순(撫順)의 신성, 개현(蓋縣)의 건안성, 요양(遼陽)의 요동성, 집안(集安)의 국내성, 재령의 한성, 대련(大連)의 비사성, 농안(農安)의 부여성 등 10개 성을 대상지로 본 견해가 나왔다(김현숙, 1996). 지역적·전략적 중요성을 고려한 추정이었다. 반면, 이 중 비사성과 부여성을 제외하고 8개만 대상지로 본 견해가 제기되었다(노태돈, 1999). 이 견해는 문헌사료에 대한 정밀한 분석에 바탕하여 욕살의 치소를 상정했다. 그런 한편 최근 논의가 되고 있는 해곡부의 위치에 따라 욕살 파견지에 포함되는 도시가 달라지기도 한다. 해곡부가 청진에 있었다고 본다면 청진이 그에 포함되지만 한성으로 본다면 포함되지 않는다. 후자의 경우 요동성, 오골성, 국내성, 책성, 한성의 5곳만 욕살 파견지였고, 이곳에는 고구려 중앙군이 주둔한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기존 설들과 차이가 있다(이성제, 2018).
한편, 욕살은 고구려 중기에는 나오지 않는 지방관이다. 중기의 최고 지방관은 수사였다. 수사는 관등이 대사자 혹은 대형이었는데, 욕살은 위두대형과 대형이 되었으며, 그중에서도 위두대형이 더 다수였다. 따라서 욕살과 수사는 같은 관직의 다른 이름이라 보기 힘들 만큼 격차가 있다. 이런 점에서 수사가 곧 태수급으로서 중기의 지방관은 군급 지방관인 수사·태수·수 아래 현급 지방관이 존재하는 2단계 구조였다고 보는 설도 있다(임기환, 1995; 여호규, 1995). 그러나 이는 3세기 말부터 5세기 말까지 200여 년간 고구려 지방통치조직이 변화나 발전 없이 기존 조직을 그대로 유지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영역이 가장 확대되었을 당시에도 광역을 관장하는 최상위 지방관이 설치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지방조직의 운영상 무리가 있다.주 009
각주 009)
이에 대해서는 『고구려통사』 3권, 「5장. 지방제도의 구조와 대민 지배」에서도 살펴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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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중기에는 군급과 현급 행정단위를 주요 권역별로 분류한 다음 그 위에 상위 지방관인 수사를 두었는데, 후기에 와서 국내외 상황이 엄중해짐에 따라 지방통치조직 겸 군사방어체계를 재편하면서 최고위 지방관의 등급도 더 올려 비중 있는 자리로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즉 수사를 폐지하고 욕살을 새로 설치하여 최고 지방관의 비중을 더 높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이때 욕살의 관할구역은 수사의 그것보다 더 줄어들었던 것으로 본다. 보다 넓은 광역을 관할권으로 삼되 느슨하게 관리하던 수준에서 주요 전략지역을 중심으로 보다 책임감 있게 관할지역을 통치하도록 지방제를 변화시킨 것으로 보는 것이다(김현숙, 1996).
 
2) 처려근지의 성격
욕살 아래 지방관은 처려근지였다. 처려근지, 일명 도사(道使)는 교통로상의 요충지에 파견된 사자(使者)를 의미한다(武田幸男, 1981; 1989). 그렇다면 이는 3세기 말 4세기 초부터 있었던 지방관들의 본원적 성격에 가깝다. 지방관 관련 사료에 도사의 치소인 ‘비(備)’만 특별히 기록되어 있고, 욕살과 처려근지 둘 다 “그 아래 각각 요좌(僚佐)가 있어 일을 나누어 관장했다”는 것으로 보아, 후기 지방통치에서 욕살 못지않게 처려근지도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중기의 지방관과 대조해 본다면 그 비중이나 기능을 고려할 때 도사, 즉 처려근지는 태수의 후신이다(武田幸男, 1980). 태수는 군급 행정단위의 지방관이었으므로 처려근지도 주군현제에 비추어 본다면 군급 단위의 지방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원』에는 처려근지를 주의 장관인 자사에 비정해 놓았다. 처려근지는 일명 도사라 했는데, 도사는 백제와 신라에도 존재했던 지방관이었다. 하지만 백제에서는 군급 지방관이었고 신라에서는 현급 지방관이었으므로 주의 장관인 자사에 비정되는 고구려와 직급에서 차이가 난다. 『한원』에는 고구려 관제를 당의 그것과 비교하여 서술해 놓았다. 그런데 이전의 중국 왕조들이 주군현제를 실시했던 것과 달리 당은 변경의 요충지나 이민족 거주지역에만 도독부를 두고 일반지역에는 주현제를 실시했다. 그리고 현종(玄宗) 천보(天寶) 원년에 주를 군으로 개칭하고 주 자사를 군 태수로 개명했다가 후에 다시 군을 주로 고쳤다. 따라서 당에서 주로 비정한 지방통치단위는 주군현제에서의 최상급 단위였던 주와 성격이 달랐고 오히려 군급에 해당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서에 나오는 주들도 규모나 성격 면에서 균질적이지 않다. 『자치통감』 권197 태종 정관 19년 10월조에는 당 태종의 침공 당시 고구려 성을 주로 재편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전쟁에서 당은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을 차지한 후 각각 개주(蓋州), 요주(遼州), 암주(巖州)로 재편하고, 이 세 주의 주민 7만 명을 중국으로 데리고 갔다. 함락 당시 요동성에는 승병(勝兵) 1만 명과 남녀 4만 명이 있었고 50만 석의 양식을 비축하고 있었으며 전쟁 과정에서 죽은 자만도 1만 여 명이나 되었다. 요동성은 인구 1만, 2만 명의 백암성이나 개모성과는 규모나 비중에서 크게 차이가 났던 것이다. 따라서 비록 당에서 이 성들을 같은 주로 편제했다 하더라도 고구려의 지방조직에서는 동급의 성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세 성 가운데 백암성의 성주가 자사였다고 하므로, 백암성 정도 규모의 성이 처려근지의 치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개모성, 백암성, 안시성, 대곡성(大谷城)의 성주가 처려근지급일 것이라 보았다(노태돈, 1996). 그런데 최근 고을덕이 역임했던 귀단도사(貴端道使)에서 ‘귀단’을 혼하(渾河) 즉 귀단수에서 이름을 딴 성 이름으로 보고, 다시 이는 신성(무순 고이산성에 비정)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보아, 신성을 처려근지급 지방관의 파견지라고 본 설이 나왔다(이성제, 2018). 그동안 신성은 그 중요성과 규모에 따라 욕살이 파견되는 대성급 성이라고 보았다. 귀단이 곧 신성인지 여부가 확인된다면 지방통치단위로서 신성의 위상 문제도 확정될 것이다.
한편 대성과 제성에 파견된 지방관인 욕살과 처려근지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이에 대해 욕살과 처려근지가 대등한 성격의 지방관으로서 둘 사이에는 통속권이 없었다고 보기도 한다(노태돈, 1996). 이 설은 처려근지급으로 보이는 안시성과 백암성의 성주가 자력으로 수성(守成)을 했다는 것과 연개소문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안시성 성주가 연개소문에게 끝내 굴복하지 않았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는 것을 주요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적절한 예로 보기 어렵다. 연개소문의 난이 일어났을 때 보인 안시성 성주의 행위는 정변기의 혼란 상태에서 발생한 예외적인 현상이라 보아야 한다. 그리고 당나라군이 침입했을 때 안시성과 백암성이 자력으로 방어한 것도 욕살과 처려근지가 병렬적인 관계였다고 볼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다. 지방통치조직 자체가 군사조직과 일체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적의 공격을 받게 된 성은 일단 자력으로 수성을 하면서 지원군을 기다려야 했던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요동 지역에 있는 성이 적에게 포위되어 공격을 받고 있을 때, 주변의 대성이나 중앙에서 지원군이 파견되는 예는 빈번하게 발견된다. 이때 구원군의 파견이 각 성의 자체적인 판단에 따라 무계획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해당지역 상급 단위 지방관을 중심으로 주변의 대성급 지방관과 중앙군의 지휘자가 지원군의 차출과 이동, 지휘에 대한 작전을 수립하고 수행했을 것이다. 당 태종이 안시성을 포위했을 때 욕살인 고연수와 고혜진이 지원군을 이끌고 온 것에서도 군사작전의 수립과 시행에 욕살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욕살과 처려근지의 위상에는 차이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멸망 당시 고구려 행정단위의 수를 고려할 때 욕살과 처려근지는 대체로 60여 명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당서』와 『신당서』에 지방에 주현 60여 성이 있었다고 하고, 멸망 당시 5부 176성 69만 7,000호를 거두었다고 나온다. 이 176성 가운데 60여 개의 성이 욕살과 처려근지가 관할하던 대성과 제성이었다(김현숙, 1996; 임기환, 2015). 60여 명의 욕살과 처려근지들이 모두 수평적인 관계였다면 명령 계통이 서지 않아 외적의 침공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수와 당의 수차에 걸친 대대적인 침공에도 불구하고 요동 지역의 여러 성들이 잘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주요 교통로상의 대성을 중심으로 중·하위급 성들이 상호 연결되어 방어체계를 견고하게 구축하고 있었고, 또 주변 대성들 및 중앙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신성이 667년에 함락될 때 같이 몰락한 16성, 668년 부여성 함락 시 항복한 부여천(扶餘川) 주변의 40여 성, 욕이성 함락 후 달아나거나 항복한 여러 성들과 668년에 남생을 따라 당에 투항했던 국내성 등 6성과 목저성(木底城) 등 3성에는 처려근지와 루초·가라달이 관할하는 행정단위가 들어 있었다. 이 성들은 신성, 부여성, 욕이성, 국내성 등에 종속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당시 지방통치체제는 대성-제성-제소성으로 조직되었고 각 단계의 지방관들도 상하 통속관계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이때에도 각급 지방관들은 평상시 관할구역 내에서의 지역통치에 있어 사법권, 군사권, 행정권을 모두 행사했으므로 상급 지방관으로부터 통제를 많이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급 통치단위들은 중급 단위에 종속되는 면이 많았겠지만 중급 이상의 단위들은 관할지역 내부를 비교적 자율적으로 운영해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은 후대의 지방제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써 욕살과 처려근지가 통속관계에 있었다는 사실과 모순되는 현상은 아니다.
 
3) 가라달과 루초의 성격
처려근지 아래 하위 지방관은 가라달과 루초였다. 가라달은 중국의 장사에 비정되는 데 비해 루초는 현령에 비정되므로 이 둘은 성격이 다른 지방관임에 틀림없다. 이런 점에서 가라달을 욕살과 처려근지의 속료로서 욕살이나 도사의 직할지를 관장한 현령급 지방관으로 보는 설이 제기되었다(임기환, 1995). 이 경우 『자치통감』 정관 19년 6월조에 보이는 ‘요동성장사’를 그 예로 들었다. 그리고 요동반도에 있는 고구려 성의 규모와 분포현황을 통해 가라달이 욕살과 처려근지 치소 성 주변의 행정적 보조성을 관할하거나, 치소 성 주변의 군사적 성격의 성곽을 관장한 지방관이었다고 다시 한번 정리했다(임기환, 2015). 제대성-제성-제소성의 3등급으로 구성된 성에 각각 욕살-처려근지(도사)-루초가 임명되었고, 이들 지방관은 각각 중국의 도독부-주-현에 비정되는데, 이 모든 등급의 성에 지방관을 보좌하는 속료인 가라달이 배치되어 업무를 분장했다고 본 설도 있다(최희수, 2008).
그러나 요동성장사는 『구당서』고려전에 나오는 요동과 현도성에 설치된 관사(官司)에 소속되어 성주인 욕살이나 처려근지를 보좌하던 ‘요좌’였을 것이다. 이 사서에 욕살이란 고구려 관직명이 그대로 나오므로 만약 요동성장사가 관할구역을 가진 지방관이었다면 그도 가라달로 표기되었을 것이다. 『양서』 권54 동이열전 고구려전에 의하면 장사는 광개토왕대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따라서 장사라는 관직명을 사용하는 속료가 7세기 지방 대성의 관사에 있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한원』에 고구려 지방관으로 나오는 가라달은 중국의 장사에 비정된다고 했을 뿐 장사란 관직명 그 자체로 표기하지는 않았다.
가라달의 성격을 규정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가라달이 루초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관할구역을 가지고 있었는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가라달이 장사에 비정된다고 하여 그를 욕살이나 처려근지의 속료라고 본다면, 가라달은 자신의 관할지역이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지방관에 대해 설명하면서 욕살과 처려근지 다음에 가라달, 그다음에 루초를 거론한 것을 보면 가라달 역시 욕살, 처려근지, 루초와 마찬가지로 관할지역을 가진 지방관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왜 가라달을 장사에 비정했을까? 광개토왕대에 이미 장사를 설치했지만 이때 설치한 장사가 중국의 그것과 같은 성격이었고, 같은 역할을 수행했는지는 알 수 없다. 장사가 고구려 후기의 지방관을 설명하는 사료에서 갑자기 재등장한 배경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지방관 관련 설명을 하는 기사에 나오는 만큼 속료적인 성격이 있지만, 속료는 아닌 지방관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런 점에서 주목되는 기사가 612년 수 양제가 요하 서쪽에 있던 고구려의 무려라(武厲邏)를 둘러 뺀 뒤 요동군과 통정진(通定鎭)을 설치했다는 『자치통감』 권181 수 양제 본기의 내용이다. 여기에는 “고려가 요수의 서쪽에 라를 설치하고 요하를 건너오는 자를 감시했다”고 주석을 달아 놓았다. 여기에서 오늘날의 신민(新民)에 비정되고 있는 무려라를 요수의 나루를 감시하기 위해 둔 순라소(巡邏所), 즉 국경감시소였다고 본 연구자가 있다(井上秀雄 외 역주, 1974; 譚其驤 主編, 1988). 그러나 무려라를 함락시킨 뒤 요동군과 통정진을 설치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규모가 작은 초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진(鎭)이 설치되어 있었고 거기 부속된 초소가 있었을 것이다(김현숙, 1996; 이정빈, 2011; 이성제, 2013). 이런 점들에 착안했는지 가라달을 루초와 달리 군사적 성격이 강한 존재로 파악한 견해들이 일찍이 제출되었다. 군사적 견지에서 쌓은 진성(鎭城)에 파견된 관(官)이 가라달이었다고 보거나(리승혁, 1987), 가라(加邏)는 곧 대(大)이고, 달(達)은 군(軍)이란 뜻으로, 재지수장층에서 차출된 지방 군정관이라고 보았다(山尾幸久, 1974).
군사 요충지에 파견된 현급 지방관은 일반지역의 현령급 지방관과는 성격이 달랐을 것이라 보고, 가라달은 변경지역에 파견된 현령급 지방관이었고, 그 치소가 ‘나(邏)’였다고 본 견해도 나왔다(김현숙, 1996). 이 설의 경우, 『한원』에서 가라달을 제소성에 파견된 관할구역을 가진 지방관으로 기록하면서도 지방관의 속관인 장사에 비정한 것은 외적의 침공 위험이 상존하는 변경지역의 지방관이므로 다른 곳보다 상위 지방관들과의 영속(領屬)관계와 연락체계가 더 긴밀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대부분 전략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는 욕살급 대성과 처려근지급 제성이 있는 곳의 현급 행정단위에 가라달의 치소가 있었으므로 마치 상급자인 욕살이나 처려근지의 속료 같은 성격을 띠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가라달과 루초는 같은 급의 지방관인데 가라달은 변경의 군사적 긴장이 높은 지역의 현급 성, 루초는 일반지역의 현급 소성에 파견되었다고 분석했다. 후기에도 지방조직과 군사조직이 일체화되어 있긴 했지만 하급 통치단위에서는 행정적인 면이 더 강한 지역과 군사적 면이 더 강한 지역을 그 성격에 맞게 구분하여 통치했을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중국인들이 가라달의 성격을 장사에 비정했다는 점에 의거해서 속관 혹은 속료적인 면이 있었을 것이란 점도 배재할 수 없는 바, 이런 점을 종합하여 가라달은 욕살과 처려근지가 통치하는 권역 안에서 군사적인 역할만 담당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제기되었다(나동욱, 2009). 이 경우 루초는 행정관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일반 현급의 현령과 같은 지방관이라고 보았다. 가라달의 성격을 파악할 때 가장 주목되는 점이 속료인 장사에 비정한 것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가라달이 분명 각급 지방관을 논하는 사료에, 그것도 상위직부터 순서대로 적어 놓은 기사에 나온다는 것이다. 즉 가라달은 장사와 유사한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본질은 지방관인 것이다. 따라서 행정관으로서의 업무는 하지 않고 군사 관련 업무만 수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하튼 현재는 가라달이 루초와 달리 군사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보는 연구자들이 많다. 가라달을 욕살과 처려근지의 고위 보좌관으로서 군사적 소성을 총괄하였다고 본 설(노태돈, 1996)과 욕살과 처려근지 치소 성 주변의 행정적 보조성을 관할하거나, 치소 성 주변의 군사적 성격의 성곽을 관장했다고 본 설(임기환, 2015) 역시 모두 가라달이 군사적인 면과 연관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군사 관련 업무만 수행했다고 본 설 역시 같은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 각주 009)
    이에 대해서는 『고구려통사』 3권, 「5장. 지방제도의 구조와 대민 지배」에서도 살펴본 바 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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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후기 고구려 지방관의 성격 자료번호 : gt.d_0005_0020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