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후기 지방제의 운용방식
3. 후기 지방제의 운용방식
1) 지방제의 재편과 방어력의 강화
앞에서 살펴본 내용을 바탕으로 후기 고구려 지방통치제의 재편 내용에 대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후기의 지방지배체제도 중앙집권적체제였다는 점에서는 중기와 기본적으로 같았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크고 작은 성들을 3단계로 조직했다. 이때 전략지역은 제대성(욕살)-제성(처려근지)-제소성(가라달), 일반지역은 제대성(욕살)-제성(처려근지)-성(루초)의 구조로 되어 있었다. 후기의 지방관을 중기 때의 그것과 비교하면, 중기의 재에 해당하는 가라달과 루초가 통치하는 현급 지방행정단위인 제소성과 성이 몇 개의 자연촌이 소속된 지배의 최하 단위였다. 소성 두세 개를 관할하는 상위 단위로 제성이 있었고 여기에 처려근지가 파견되었다. 처려근지는 전대의 태수급에 해당된다. 최상위 지방관은 수사에서 욕살로 대체되었다. 수사보다 더 상위 등급의 욕살을 주요 지역별로 신설해 하위 통치단위들과 긴밀한 연계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외적의 침공이 있을 때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수사를 욕살로 교체했다. 고구려의 전체 영역은 내평과 외평으로 크게 구분되었고 여기에 전국을 크게 구분한 지방 5부가 존재했다. 그러나 실제 지방지배는 제대성-제성-제소성으로 이루어진 조직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면 이렇게 재편된 후기 지방통치체제에서 각급 통치단위의 영속관계는 어떠했을까? 이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멸망 당시 성과 주현의 수를 통해 추정하거나, 당과 신라에서 그 조직을 계승했을 것으로 보아 양국이 설치한 행정구역을 통해 고구려의 통치단위 수와 영속관계 등을 추론하고 있는 정도다.
고구려 멸망기 성의 개수 및 당과 신라가 개정하여 설치한 통치단위 수에 관해 『구당서』 고려전에는 “바깥에는 주현 60여 성을 두었다. … 고려국은 옛날에 5부로 나눠졌는데 성이 176, 호가 69만 7,000이었다. 그 땅을 나누어 도독부 9, 주 42, 현 100을 두었다”고 되어 있다. 『신당서』 고려전에는 “주현이 60이었다. …5부 176성 69만 호를 거두었다. …그 당을 나누어 도독부 9 주 42 현 100으로 만들었다”고 나온다. 또 『삼국사기』지리4 고구려조에는 “신라 또한 그 남쪽 지경을 얻어 한주, 삭주, 명주 3주 및 군현을 두었고, 이로써 9주를 갖추었다. …이상은 고구려 주군현으로 모두 164이고 신라가 고친 이름과 지금 이름은 신라지에서 볼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이 사료에 나오는 176성이 멸망 시 행정단위의 총수였으며, 주현 60 혹은 60여 성이 『한원』에 나오는 대성과 제성의 수이고, 176성에서 60여 성을 뺀 110여 개의 성이 소성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성은 10여 개였고, 이 대성 각각에 제성 4~5개 정도가 속했으며, 제성에는 다시 소성 2~3개가 소속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권35와 권37의 지리지에도 한 군에 평균 2~3개의 현이 속하는 것으로 나오므로 무리한 추정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지역보다 전략 요충지의 명령 계통은 보다 긴밀했을 것이므로 대성이 관할하는 제성과 소성의 수에 조금씩 차이는 있었을 것이다.
내평 욕살도 그렇듯이 외평 욕살도 당대 최고 지방관으로서 행정장관이자 군단장적인 성격을 공유했다. 그런데 욕살은 수사보다 관등이 더 높았으나 관할구역 범위는 오히려 더 좁았다. 이처럼 최고 지방관을 욕살로 승급, 조정하고, 하부 통치단위에 대한 통속권을 더 강화하면서 상호 연결을 긴밀하게 하는 식으로 체제를 정비한 것은, 6세기에 들어와 한동안 유지되던 동북아 일대의 세력균형과 안정이 깨지자 위기위식을 느껴 방어체계를 강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적의 침공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주요 전략 요충지별로 독립적인 대처가 가능하게끔 주민동원체제를 갖추고 최고 지휘관의 지위를 높여 통제권을 강력하게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넓은 지역을 관할하는 최상위관이면서도 하위관보다 월등히 높지는 않아 지역 지방관의 대표자적인 성격이 강했던 수사를 폐지하고, 욕살을 신설한 것은 주요 지역별로 긴밀한 연계체계를 구축하여 관할권 내 하위 단위들을 강력하게 통제함으로써 위기 시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후기로 갈수록 하위 등급의 행정단위가 증가하고 또 행정단위가 아닌 방위성들도 증가하게 되므로, 총괄하는 최상위급 지방관을 더 고위관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욕살의 치소인 대성급에 해당됨 직한 대형 산성들이 후기에 많이 축조되었고, 또 요동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지방통치체제의 개편으로 인해 방어체계가 한층 고도화되었다는 것은 치밀한 작전에 의해 이루어진 수·당의 대대적인 침공이 여러 차례 좌절되었던 것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이런 점에서 3세기 중엽 관구검(毌丘儉)의 침입과 4세기 중엽 전연의 침입, 그리고 7세기 수·당과의 전쟁 시 고구려의 군사적 방어능력 차이는 해당 시기 지방통치체제의 발전 정도를 잘 반영해준다. 즉 동천왕대 관구검군이 쳐들어왔을 때에는 수도방어체계가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못해 오래 버티지 못하고 국왕이 북옥저 지역까지 달아나야 했다. 하지만 고국원왕대에는 전연의 수뇌부에서 진격로를 두고 진지하게 작전논의를 해야 할 만큼 이전보다 고구려의 방어력이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수도가 유린되는 피해를 입었다. 반면 후기의 대수당전 때에는 수와 당의 군대가 치밀한 구상 아래 작전을 개시했고 여러 방면에서 침공했지만 번번이 실패할 정도로 방어막을 튼튼히 구축하고 있었다. 이것은 고구려의 군사조직과 방어체계의 시대별 발전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며 동시에 지방통치체제의 발전과정을 잘 보여준다.
당나라군에 의해 최종적으로 평양이 함락되고 멸망한 것도 고구려 최고 집권층의 분열과 배신이라는 내부 요인이 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말기에도 군사방어체계는 매우 엄밀하게 구축되어 있었고, 적침에 대한 권역별 대처도 효과적으로 수행되었다. 이것은 곧 후기의 지방제가 대단히 조직적인 체제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시에 대비한 체제 개편이었으므로 욕살은 수사보다 제반 사항에 대한 재량권을 더 많이 부여받았을 것이다. 이처럼 재량권이 강화된 욕살 중심으로 방어 체계가 구축되었고 전투도 진행되었으므로 적절한 대처가 가능했던 것이다.
6세기 중반경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정비된 지방통치체제는 말기까지 유지되었으나 수·당과의 전쟁 위협이 대두하면서 각지에 방어성을 더욱 조밀하게 구축한 후 전략적으로 중요한 성들을 밀접하게 연결하는 등 상황에 따라 부분적으로 조정되었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러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었을 때에는 일원적, 중앙집권적으로 편성되어 있는 조직체계와 상관없이 지역별로 독자성이 강하게 표출되어 분리적인 경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방통치체제의 발전은 대체로 이전 제도를 계승한 위에서 재정비해 나가는 쪽으로 이루어진다. 일반적으로 행정구역의 편성은 지리적 조건이나 인구밀도 등을 고려하여 설정되므로 고대시기에 편성된 행정구역이 오늘날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곳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더구나 고구려의 지방통치조직은 교통로를 따라 그 주변에 설치된 크고 작은 성들을 중심으로 전략적으로 편성되었으므로, 통치구역의 규모나 등급이 시기에 따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부분적인 변동은 있었겠지만 3세기 말 4세기 초에 조직된 지방통치제의 골격을 유지하면서 발전시킨 것이 6~7세기의 제도였다. 따라서 후기의 지방관직 가운데 새로 신설된 것도 있지만 대개는 이전 시기의 관직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지방관의 명칭 자체가 태수, 재, 수사 같은 중국식 또는 중국풍이 강한 것에서 욕살, 처려근지, 가라달, 루초 같은 고유한 고구려식 용어로 변한 것을 보면 6세기 어느 시점부터 이전의 관직명을 모두 고구려풍으로 바꾸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성 중심 지방통치조직의 운용양상
1980년대 후반 중국의 개혁·개방에 따라 동북 3성 지역 소재 고구려 산성 조사 및 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얻은 생생한 정보는 고구려사 연구의 양적·질적 성장과 맞물리면서, 산성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지방지배 양상을 이전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고구려 산성에 대한 관심은 먼저 방어체계에 기울어졌다. 고구려 서북방 최전선이었던 요하선을 비롯한 요동 지역과 두 번째 수도였던 국내성을 중심으로 방어체계를 파악하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서북 방면의 1차 방어선은 부여성에서 비사성까지 이어지는 선이었고, 2차 방어선은 봉황산성을 중심으로 호선(弧線)으로 배치된 산성들이었다는 것, 환인과 집안 외곽에 있는 산성들을 잇는 선이 수도 외곽의 방어선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들 성들이 모두 하천과 강을 따라 배치된 성들과 종심으로 연결되어 종심방어체계를 구축했다는 것이 밝혀졌다(여호규, 1955; 田中俊明, 1999; 나동욱, 2009).
다음에는 고구려 산성이 군사적 기능과 지방통치 기능을 함께 수행했다는 것에 주목하고, 현재 확인되는 산성을 통해 중·후기 고구려의 방어체계와 지방통치조직을 파악하고자 한 연구성과물이 나왔다(여호규, 2002; 2012; 나동욱, 2009; 이경미, 2012; 이성제, 2009: 임기환, 2012; 2013; 2015). 2000년대 이후 중국 소재 고구려 산성 답사가 활발해지면서 지방통치조직과 현재 남아 있는 산성을 직접 연결지어 산성 간의 영속관계나 연락체계 등을 보다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 이를 통해 그동안 짧은 사료를 통해 개괄적으로 구조를 파악하던 단계를 벗어나 고구려 지방통치조직과 그것의 운용양상을 좀 더 생생하게 추론해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밝혀진 내용은 첫째, 고구려 산성은 산과 하천 등 자연경계를 따라 형성된 주요 교통로를 따라 축조되었고, 대평원 안쪽의 하곡평지나 산간분지를 따라 조성되었다는 것(여호규, 2012), 둘째, 그중에서도 전략 요충지와 결절점 혹은 분기점에 대형 산성이 구축되었고 그 인근에 중소형 산성 몇 기가 비치되어 있어, 문헌사료의 대성-제성-소성처럼 대형 산성과 주변의 중소형 산성들이 상하 영속관계로 조직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점, 셋째 이로 보아 고구려 산성 가운데 지역주민들의 입거가 가능한 포곡식 대형 산성이나 출입이 편리한 산성의 경우,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이자 지방관 거주 치소였다는 점, 넷째, 고구려 멸망 후 도독부 9, 주 42, 현 100을 두었는데, 이 중 9도독부는 욕살급 성, 42주는 처려근지급 성, 100현은 루초와 가라달급 성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임기환, 2015) 등이다.
현재 각 지역에 남아 있는 성들이 모두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가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역지배를 시작한 것이 3세기 말 4세기 초였다. 이때는 전략 요충지에 대표적인 산성을 조성하고, 성 주변에 거주하는 성민들과 곡에 거주하는 곡민들을 관할하는 거점지배를 실행했다. 이후 4세기 중·후반에는 거점지배의 단위가 늘어나면서 지방통치단위를 상하 조직으로 편성하여 권역지배를 실시했다(김현숙, 1996; 2005). 이런 변화 과정은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즉 지방관 파견 초기 단계에는 주요 전략지점에 거점성을 축조했다. 4세기 중·후반경에는 각 권역별로 전략 요충지에 대형 성곽을 하나씩 축조하고 행정구역을 ‘성(城)’으로 편제했으며, 나머지 소권역은 지류 연안의 하곡평지를 단위로 ‘곡(谷)’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5세기 이후에는 소권역에까지 중소형 성곽을 축조하여 지방지배를 더욱 강화했고, 후기에는 각 권역마다 중심 성곽과 중소형 성곽을 조성, 긴밀하게 연계하여 지방지배와 군사방어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지방통치조직을 갖추었다(여호규, 2012).
고구려 전체 영역을 주요 권역별로 나누면 요동 지역, 송화강 유역, 두만강 유역, 압록강 유역, 대동강 유역, 한강 유역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권역별로 욕살을 비롯한 처려근지, 가라달, 루초 등의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이 중 요동 지역, 압록강 유역, 두만강 유역 소재 고구려 성의 현황과 분포 양상을 기반으로 문헌에 나오는 성들과 연관성을 살피고, 이를 통해 각 산성의 위계와 성격, 상호관계를 지방제와 방어체계라는 측면에서 살펴 지방통치제의 구조와 실질적인 운용방식을 살폈다.
산성을 중심으로 지방통치조직이나 방어체계를 검토한 연구는 지역별 성의 배치상황이나 성벽의 둘레 길이를 기준으로 한 성의 규모, 그리고 교통로를 고려하여 진행되었다. 따라서 고구려 영역 가운데 산성이 제일 많이 조성된 요동 지역에 대한 연구가 당연히 가장 많다.
먼저 고구려가 요하 중·상류 동안 지역으로 진출하여 지방통치조직을 정비해가는 과정을 성 유적을 통해 살폈다(여호규, 2002). 이 지역은 대흑산맥(大黑山脈)과 길림합달령(吉林哈達嶺)산맥 사이에 위치하여 하나의 지역권을 이루고 있었다. 고구려 초기 중심지인 압록강 중류 일대에서 요동평원을 경유하지 않고 이곳을 통해 곧바로 송료분수령(松遼分水嶺), 더 나아가 서요하 일대로 나아갈 수 있었고, 요동평원에서 송화강 유역으로 나아갈 경우에도 거쳐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지역은 자연지형과 교통로상으로 대략 동요하 상류권, 구하(寇河)-청하(淸河) 유역권, 사하(沙河)-시하(柴河)-범하(汎河) 유역권 등 세 권역으로 나눠진다.
이 연구에서는 『삼국사기』 지리지4에 수록된 압록강 북쪽 고구려성 의 현황을 작성한 목록에서 항복하지 않은 11기의 성이 북부여에서 남쪽으로 차례로 기술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북부여성주(농안)와 신성주(무순) 사이에 기술된 절성(節城)과 풍부성(豊夫城)을 바로 이 지역에 있는 최진보산성(철령)과 성자산산성(서풍)에 비정했다. 이 두 성은 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가 4세기 중반경 요하 중·상류 동안 지역으로 진출할 무렵 이곳의 세 권역 가운데 구하-청하 유역권과 사하-시하-범하 유역권에만 둘레 5km 전후의 대형 산성을 하나씩 축조하여 지방지배와 군사방어력 강화를 도모했던 것으로 보았다. 다른 성들은 이보다 늦은 시기에 조성되었으며, 전략 요충지에 위치한 중심성곽인 서풍 성자산산성과 철령 최진보산성 사이의 소권역들에도 성곽을 축조하여 이 두 성에 상하관계로 종속시켜 지방행정을 실시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추론을 방증하는 것으로 성자산산성과 최진보산성은 5세기 이후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의 기능을 강화한 것이 확인되었다. 성자산산성은 대형 산성이면서도 거주용 공간이 협소한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본성보다 늦은 시기에 서쪽 골짜기를 감싸는 외위성(外圍城)을 축조하여 거점성의 기능을 강화했다. 최진보산성은 내부에 평탄한 평지가 넓은 편이지만 골짜기 입구 앞쪽으로 범하가 지나기 때문에 접근하는 데 제약이 있었다. 이에 서남쪽 5km에 청룡산성을 축조하여 군사 방어력과 거점성의 기능을 강화했다. 이 두 성은 후기에도 각 권역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방어성이자 지방행정 중심지로 기능했다. 이런 점에서 연구자는 이 두 성을 처려근지가 파견된 제성(諸城)으로 보았다.
이 지역은 다시 지류를 따라 형성된 하곡평지권이나 산간분지권을 중심으로 3~4개의 지역으로 나눠진다. 구하-청하 유역권에는 구하 본류의 하곡평지권을 관장할 수 있는 지점에 개원 용담사산성, 청하 상류의 하곡평지권을 관장할 수 있는 지점에 고성자산성이 각각 위치해 있다. 사하-시하-범하 유역권에는 사하와 시하 유역 일부를 관장할 수 있는 지점에 마가채산성이 있다. 연구자는 이와 같은 중소형 성곽이 대체로 각 권역의 소권역을 관장할 수 있는 지점에 위치하였다는 점에서 루초가 파견된 소성일 것으로 보았다.
또 동요하 상류권의 경우에는 요원분지에 용수산성, 공농산성, 성자산산성이 있는데, 공농산성과 성자산산성은 처려근지 주둔 성인 용수산성에 직속된 위성으로서 가라달 주둔 성이라 추론했다. 요컨대 고구려 후기 요하 중·상류 동안 지역의 지방통치조직이 각 권역마다 처려근지-루초, 또는 처려근지-가라달의 형태로 편제되었다고 본 것이다. 북방 거점성인 북부여성과 서방 거점성인 신성 사이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곳에는 욕살이 파견된 대성이 없었다고 보았다.
다음으로 요동 지역을 고구려 서부로 보고 이곳의 교통로를 크게 주선, 간선, 지선 도로로 구분하여 지방제와 방어체계를 살핀 연구가 있다(나동욱, 2009). 이 경우 주선도로는 건안성(개주)-수암-오골성(봉성)에 이르는 길, 요동성(요양)-백암성-본계-오골성으로 진출하는 길, 신성(무순)-개모성-소자하-부이강-집안으로 진입 후 압록강 하류 방향으로 내려가는 교통로였다고 보았다. 그리고 간선도로는 안시성-수암-오골성을 연결하는 도로, 개모성과 본계를 연결하는 도로, 본계에서 남하하지 않고 태자하를 거슬러 올라가 본계-환인에 이르는 도로, 혼하-유하(柳河) 수계를 통해 통화-집안에 이르는 길이라고 정리했다.
이 연구에서는 요동의 지리적 환경이 종적인 교통로 간 횡적 상호 연결을 제한하므로 각 교통로에 배치된 성곽은 종적 형태의 유기적 결합이 이루어졌고 군사운용체계 역시 종적 결합 위주로 구축되어 있었던 것으로 파악했다. 이에 따라 종심상에 있는 욕살의 성으로는 국내성, 오골성, 다벌악성을 지목했다. 국내성 욕살은 북으로 천산산맥, 남으로 압록강, 서로 천산산맥에서 뻗어 나온 줄기에 위치한 관전(灌甸)에서 포석하(浦石河)를 잇는 선, 동으로 압록강 상류의 고원지대를 관장했을 것으로 보았다. 또 오골성은 북으로 천산산맥 능선, 남으로 압록강, 동으로 국내성 권역의 서경인 포석하까지이고, 서쪽 경계는 다벌악성과 접한 것으로 보았다. 이때 다벌악성은 낭랑산성에 비정하고 관할지의 북계는 천산산맥 능선, 남계는 압록강, 동측은 오골성 권역의 서변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요서에서 고구려로 진입하는 주선도로에는 건안성, 요동성, 신성이 가장 초입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성들은 모두 욕살 주재 대성으로 천산산맥 이북의 각 주선도로를 책임구역으로 담당했다고 보았다. 또 처려근지의 제성으로는 안시성, 백암성, 개모성, 감물성, 박작성을 상정하고, 처려근지는 주선에 연결된 간선도로의 첨단을 방어했다고 보았다. 즉 처려근지는 단일도로를 책임졌고, 욕살은 주선도로와 처려근지 관할 간선도로의 외연을 연결하는 지역에 대한 광역방어를 책임졌다고 본 것이다. 처려근지의 제성은 주선도로상에서 욕살의 기능을 보조하는 배후 성이거나 간선도로에서 교통로를 통제했기 때문에 만약 제대성이 어렵다고 해도 원군을 파견하면 제대성과 제성이 동시에 무너지게 되어 종심방어선 형성이 불가능해지므로 자신의 제성을 독자적으로 방어한 것으로 보았다.
또 욕살과 처려근지의 예하 행정적 지방관으로 루초, 군사지휘관으로 가라달이 있었고, 가라달의 제소성들은 적의 침입을 조기경보하고 일차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제대성 및 제성 통제권역의 사각지역이나 도로의 주요 길목에 분포했을 것으로 파악했다. 이 경우 외평 5부 중 서부인 요동 지역에는 군사적 필요성에 의해 다른 4부와 달리 다수의 욕살이 편성되었던 것으로 보았다(나동욱, 2009).
다음으로 요동반도 고구려 성의 분포를 천산산맥을 기준으로 서북부지역과 동남부지역으로 나누고, 각 지역을 하천 유역권으로 나누어 산성과 지방제를 관련지어 살핀 연구가 있다(임기환, 2015). 이 연구에서는 주요 하천과 그 지류의 유역권에 각각 지방지배의 치소 성들이 분산 분포하고 있고, 전략적 거점성이 위치하는 주요 하천에는 대형 산성이, 그 주위에는 군사적 목적의 소형 산성이나 보루성이 분포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가라달은 욕살과 처려근지 치소 성 주변의 행정적 보조 성을 관할하거나, 치소 성 주변 군사적 성격의 성곽을 관장한 것으로 보았다. 요동반도 일대 성 가운데 욕살급 성은 건안성, 다벌악성(수암 낭랑산성), 처려근지급 성은 비사성, 와방점 남마권자산성(南馬圈子山城), 벽류하 유역 상류의 적산산성(赤山山城), 하류의 외패산성(巍覇山城)과 성산산성(城山山城)이라고 보았다. 그 외 각 하천이나 지류 유역에 독립적으로 분포하는 중형 산성 혹은 소형 산성은 루초급 지방성으로 파악하였다(임기환, 2015).
천산산맥 서북부지역 고구려 성의 배치를 보면 개현 건안성에서 대련 비사성까지 요동만으로 흘러드는 하천 유역을 끼고 성자구산성(城子溝山城), 분영촌산성(奮英村山城), 북와방점산성(北瓦房店山城), 득리사산성(得利寺山城), 남고산산성(嵐崮山山城)이 약 30여km 거리를 두고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이 중 건안성이 욕살급 성이고, 비사성과 남마권자산성은 처려근지급 성이라 보았다. 건안성 주위에 가라달급 성 2기가 조성되었고, 득리사산성에도 가라달급 지방관이 배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나머지 중형 산성 4~5개 정도에는 대체로 루초급이 파견되어 지방통치 및 군사상 방어를 동시에 수행하였을 것으로 보았다.
또 벽류하 유역 상류의 적산산성, 하류의 외패산성과 성산산성을 처려근지급 성, 손가와보산성(孫家窩堡山城)을 적산산성 휘하의 루초급 성으로 추정했다. 전둔촌(田屯村) 일대에 집중 배치된 고력성산산성(高力城山山城) 등 소규모 보루성의 경우, 군사초소로서 적산산성 성주의 직접 관할에 있었을 것으로 보았다. 위패산성의 처려근지 아래에는 사하 유역을 관장하는 노백산산성(老白山山城)과 벽류하 하류 우안을 관장하는 마둔촌(馬屯村) 고려성산성에는 루초급 지방관이 파견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성산산성 역시 처려근지급 성으로 가라달을 통해 후성산산성을 관장했고, 장하(庄河) 유역 선성산성(旋城山城)은 루초급 혹은 가라달급 지방관을 통해 관장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대양하 유역의 중심지는 다벌악주의 치소 성으로 비정되는 낭랑산성의 욕살이 관장하였고, 대양하의 또 다른 지류인 초자하(哨子河) 유역의 중심 성인 송수구산성(松樹溝山城)은 처려근지가 관할했던 것으로 보았다. 또 대양하의 큰 지류인 편령하(偏嶺河)와 초자하의 각 지류마다 1,500~2,000m 내외의 중형 혹은 소형 산성이 축성되어 있는데, 이들 성은 루초가 파견되어 각 지류 유역을 관장했던 것으로 보았다.
이 연구에서는 천산산맥 서쪽의 경우 욕살급 1개, 처려근지급 2개, 루초급 5~6개, 가라달급 3개 정도로서, 가라달급을 제외하면 대략 1:2의 비율에 해당하지만, 벽류하 유역은 처려근지급 3개, 루초급 3개 정도이고, 대양하 유역은 욕살 1개, 처려근지 1개, 루초급 성으로 8~10개 정도 설정된 것으로 보았다(임기환, 2015).
두 번째로 연구가 많이 진행된 곳은 두만강 유역의 연변-혼춘 일대다. 이 지역 소재 성 가운데 중국 학계에서 고구려 성이라 인정하고 있는 성들 다수는 평지성이다. 일반적으로 고구려는 산성을 중심으로 지역지배를 했는데, 연변 지역은 이와 달리 평지성이 지역지배의 중심이었다는 것이 특이점으로 지적되었다(이성제, 2009; 임기환, 2012).
연변 지역 소재 고구려 성의 분포를 통해 고구려와 발해의 성곽 운용방식에 대해 살핀 연구가 있다(이성제, 2009). 이 글에서는 현재 연변 지역 소재 성곽들 상당수가 발해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지만 방어력 강화 측면에서나 적대세력(당, 흑수말갈)과의 관계에서 보아도 이 시기에 많은 성곽을 세워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고구려시기에 주요 거점마다 조성된 성곽들을 발해 때 이어서 사용한 경우가 많았을 것으로 보았다. 연변 지역에서 고구려 성의 운용은 기본적으로 평지성을 위주로 했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는 평상시 거주성인 평지성과 주민 입거를 전제로 한 대형 산성을 결합하는, 중·후기 고구려 성곽의 보편적인 운용방식이 동일하게 적용된 것으로 보았다.
이 연구에서는 고구려 동북방의 최중진인 책성의 기능에 대해서도 주목했다. 책성이 지역의 통치거점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책성과 국내성을 잇는 교통로인 ‘옥저방면로’가 있어, 그 경로상에 축조된 여러 성을 징검다리 삼아 국내성과 연결될 수 있었고, 유사시 지원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옥저방면로는 집안에서 임강을 거쳐 무송의 산간지대를 경유하여 안도에 이르고 여기에서 포이합통하(布爾哈通河) 연안로를 따라 서진하는 경로였다. 무송에서 안도로 들어서는 지점에 위치한 동청고성지(東淸古城址)는 옥저방면로가 국내성과 책성을 잇는 간선이었고 이 경로상의 요지에 성곽이 축조되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책성에서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동해안에 이르는 경로가 추가되었는데, 두만강 북안의 조동산성과 남안의 운두산성의 조응 관계가 그 교통로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를 통해 책성이 고구려시기 연변 지역의 최대 거점이면서 두만강 이남의 함경도 동해안으로 진출하는 전진기지로도 기능하였다고 지적했다.
다음으로 문헌상에 보이는 책성과 신성에 초점을 맞추어 고구려의 연변 지역 지배양상에 대해 살핀 연구가 있다(임기환, 2012). 연변 지역은 3세기까지 북옥저의 중심지역이었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활발하게 이 지역으로의 진출을 모색했다. 그래서 태조왕 이후에는 책성을 중심으로 거점을 구축하였고, 서천왕대를 전후해 신성을 축조하여 또 다른 거점을 마련하였다. 북방의 숙신에 대한 방어 및 통제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 지역에 대한 완전한 영역지배는 광개토왕대에 이루어졌으며, 이를 거점으로 숙신을 통제하는 한편 부여 일파가 세운 동부여를 정벌하여 동북지역의 영역을 확정하였다. 이때 책성은 혼춘의 산성인 살기성과 평지성인 온특혁부성, 신성은 연길의 산성자산성과 평지성인 하룡고성이 하나의 세트였다고 보았다.
그리고 국내성에서 옥저를 통하여 북옥저에 이르는 동해안로가 책성까지의 주된 교통로(책성로)이고, 국내성에서 통화-백산-무송-안도로 이어지는 내륙 교통로(신성로)가 신성까지의 주된 교통로임을 확인하였다. 4~5세기 단계에는 연변 지역도 고구려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성·곡 지배체제를 통해 지배하였다고 보았다. 또 고구려 말기에는 〈고자(高慈)묘지명〉, 〈이타인묘지명〉과 성곽의 상황을 근거로 책성을 욕살이 파견되는 동북지역의 가장 중심적인 거점성, 신성을 처려근지급 지방 성으로 보고, 그 외 다수의 처려근지급 지방 성이 연변 지역에 분포하였을 것으로 보았다(임기환, 2012).
그런 한편, 두만강 유역을 지리적으로 크게 두만강 하류와 혼춘하 유역, 포이합통하와 그 지류 연안, 두만강 중·상류 본류 연안 등 세 권역으로 나누어졌다고 보고, 이 일대의 지방지배에 대해 살핀 연구가 있다(여호규, 2017). 이 연구에서는 고구려 멸망 직전에 책성욕살을 역임한 이타인이 “12주 고려를 관장하고, 37부 말갈을 통할한” 사실에 주목했다. 이타인이 관장한 ‘12주 고려’는 지방관이 파견된 치소 성이고, 37부 말갈은 백산말갈(白山靺鞨)이라고 보았다.
이 연구에서는 평지가 넓게 발달한 혼춘분지 및 포이합통하-해란강 하곡평지 중심부 일대에는 평지성을 조밀하게 축조하고, 그 주변에는 지역을 에워싸는 형태로 포곡식 산성을 축조한 반면 외곽인 혼춘하 및 알하하(嘎呀河) 중·상류 유역에는 치소 성을 축조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이에 근거하여 평지가 넓게 발달한 두만강 유역 중심부에는 평지성을 조밀하게 축조하여 지방통치의 중핵지역으로 삼은 반면, 그 주변에는 중대형 산성을 구축해 고구려인 통치와 백산말갈 통제를 도모했던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백산말갈의 집단거주구역인 혼춘하나 알하하 중상류 방면에는 치소 성을 축조하지 않고, 이 지역으로 나아가는 전략적 요충지에 포곡식 산성을 구축해 백산말갈에 대한 통제와 교류를 도모한 것으로 보았다(여호규, 2017).
이처럼 산성을 중심으로 지방제도를 정비한 요하 유역과 달리 두만강 유역에서는 평지성이 지방통치조직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었다는 데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또 후기로 가면 온특혁부성과 살기성처럼 평지성과 산성을 세트로 하여 지역지배를 하고 방어체계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고구려 다른 지역과 비슷한 양상으로 갔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국내성과 환도산성처럼 평지성과 산성을 세트로 운영하는 것이 고구려 다른 지역에서 많이 나타나지만 대개는 수도나 별도에 해당한다. 산성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고구려 서북 변경지역에는 그런 구성이 일반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지역 상황에 맞추어 그에 적합한 형태로 지방지배의 치소를 두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연변 지역의 경우, 평탄지에 조성된 평지성이 지역지배의 중심 치소였고 그 주변에는 방어체계상 필요한 전략 요충지에 산성을 축조했으며, 백산말갈처럼 다른 고구려인들과는 거주 양상을 달리하는 경우 그에 맞게 통치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겠다.
이 밖에 압록강 중·상류 유역과 황해도 지역 등 도성과 별도 주변의 성을 통해 방어체계와 지역지배 양상을 추론한 연구도 이루어졌다.
먼저 압록강 중·상류 연안에 있는 8기의 고구려 성을 통해 방어체계와 압록강 수로 및 ‘동해로’의 기능에 대해 살핀 연구가 있다(여호규, 2008). 이 연구에서는 국내성을 중심으로 성을 구축해 도성방어체계를 구축했는데, 특히 요동으로부터의 침공에 대비해야 하는 압록강 하류 방면에 산성과 차단성을 조밀하게 조성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당시 중요 교통로였던 압록강 수로와 국내성에서 동해안 방면으로 가는 일명 ‘동해로’의 경우 압록강 수로를 통해 각종 물고기와 소금 등 각종 물자를 도성까지 운송하는 교통로로서 전 시기 동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았다.
압록강 중·상류 유역의 고구려 성곽 40여 기를 대상으로 평양 천도 이후의 변화를 살핀 연구도 있다(이경미, 2012). 이 연구에서는 압록강 중·상류 지역을 집안분지권, 압록강 본류권, 국내성 진입로 일대권, 혼강에 연결되는 육도하 유역권, 부이강 유역권, 합밀하 유역권으로 구분하였다. 국내성이 최상급 지역 중심 성으로서 광역의 지방통치를 총괄했고, 그 아래에 상하 통속관계를 가지는 다수의 성이 영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파악했다. 양민고성, 하고성자성, 패왕조산성, 자안산성이 중간급이고, 이 각각의 성곽은 대체로 강이 합류하는 지점 부근에 위치하여 각 소권역의 중심 성으로 기능했으며, 화피전자고성, 와방구산성, 고검지산성, 전수호산성은 지방통치의 최하위 행정단위로 기능했을 것으로 보았다. 압록강 중·상류 지역 고구려 성곽들은 국내성이 도성이었던 시기에는 도성방어체계로 기능하였으나 평양 천도 이후에는 국내성의 하위 행정단위로서 지방통치의 중심 성이 된 것으로 이해했다.
평안남도 용강군 오석산(烏石山)에 있는 둘레 6.6km의 대형 산성인 황룡산성을 통해 주변 일대 지역 방어와 지배, 그리고 후기 수도 평양의 방어체계에 대해 살핀 연구도 이루어졌다(이성제, 2011). 이 연구에서는 고구려가 낙랑군시기 점제현(秥蟬縣)이었던 이 지역을 차지한 뒤 황룡산성을 축조하여 새로운 지방지배와 지역방어의 거점으로 삼은 것으로 보았다. 지리적으로 황해-대동강 연안로를 끼고 있고, 인근에 우산성, 동진성, 늑명산성, 보산성 등이 대동강 하류 북안과 서안을 따라 배치되어 황룡산성과 함께 유기적인 방어체제를 구축하여 황해-대동강 연안로를 통제하고 유사시 침입에 대처했던 것으로 파악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문헌사료와 묘지명에 나오는 지방관 기사와 산성유적을 관련지어 지방통치조직과 지역지배양상을 살핌으로써 보다 입체적인 분석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문제는 우리 학계의 산성 연구가 조사기간이 짧고 제약이 많으며 열악한 현지조사를 기반으로 한 것이어서 아직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파악된 산성 혹은 평지성의 경우, 발굴조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 많고, 조사결과가 발표된 경우에도 축조시기 등에서 논란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축조시기를 달리 보면 지배 내용도 달리 파악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두만강 유역 성곽 가운데 고구려시기 축조설이 제기된 성곽은 총 43기인데, 이 중 거의 모든 연구자가 고구려 성곽으로 보는 것은 9기에 불과하다. 이 성들은 주로 평지성으로 혼춘분지나 포이합통하-해란강의 하곡평지 중심부에 분포한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두만강 유역 중 상당히 좁은 지역만 직접 통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에 21기의 성을 고구려시기 성곽으로 추가해 파악하기도 했는데(여호규, 2017), 이렇게 보면 고구려가 두만강 유역 거의 전역에 치소 성을 축조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성곽의 편년에 따라 지방지배에 대한 이해가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산성유적을 통한 연구는 아직 유동적인 부분이 많다고 할 수 있다. 향후 여러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산성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그 결과보고서가 나오게 되면 새롭게 검토해야 할 부분이 더 많아질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