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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4. 말갈에 대한 지배방식

4. 말갈에 대한 지배방식

고구려에는 특수한 형태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있었다. 거주환경과 생활방식 등에서 다른 지역주민들과 성격 차이가 많이 나는 지역민들에게는 그에 맞는 지배방식을 적용해 통치했다. 영토 확장으로 다양한 성격의 주민들이 편입된 상태였으므로 그들의 생활방식에 맞는 지배방식을 적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일원적이고 보편적인 지방통치가 추구되는 가운데 다양성이 인정되는 이런 점들이 고구려를 다종족국가로서 국제적이고 개성적인 성격의 나라로 만들었다. 고구려민 가운데 생활방식 등에 있어서 가장 차이가 났던 사람들이 바로 말갈이었다.
고구려사에서 말갈 연구는 주로 수·당대 말갈 7부의 위치, 말갈 각 부와 고구려의 접점, 고구려와 관련을 맺었던 숙신, 읍루, 물길, 말갈의 위치 문제 등에 초점을 두고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이 만주에 주목하면서 말갈을 연구대상으로 삼았지만 주로 그들의 거주지역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말갈을 고구려인의 범주에 넣어 살피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부터였다. 고구려 후기의 조세 관련 기사에 나오는 유인(遊人)이 말갈이나 거란 같은 부용민이었다고 본 연구(김기흥, 1987)와 말갈이 고구려의 지방민을 폄칭하는 용어였다고 본 연구(한규철, 1988)는 말갈을 고구려인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일본 및 중국 학자들과 인식상 큰 차이를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고구려 기사에 나오는 말갈 관련 사료들을 상식선에서 순조롭게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이런 시각에서 말갈 혹은 말갈 계통 세력들과 고구려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고구려는 이들을 어떻게 지배했는지에 대한 연구가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김현숙, 1992; 2003; 2018; 권은주, 2009; 김락기, 2010; 2013).
사서에 말갈은 일정한 범위 안에서 계절성 이동을 하는 반농반수렵종족으로서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는 예맥족과 생활방식에서 현저한 차이가 나는 존재로 나온다. 말갈족은 이른 시기부터 고구려와 역사적 관계를 맺어왔는데, 고구려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그 지배권과 영향권 아래 들어오는 범위와 정도가 더 늘어났다. 6세기 이후 고구려에서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던 말갈 집단을 크게 7개의 지역단위로 구분하여 인식하게 되었다(권은주, 2009). 이것이 바로 수·당대 사료에 나오는 말갈 7부이다.
이 말갈 7부 가운데 흑수부를 제외한 6부가 고구려의 직·간접 지배권 혹은 영향권 아래 들어왔다(김현숙, 1992). 이 가운데 백산부와 속말부는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고구려 지배권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5세기 이후에는 완전한 고구려민이 되었다. 그러나 그 외의 부는 6세기 이후에야 고구려 세력권 안에 편입되었다. 이들의 경우 고구려 멸망기까지 속민집단 혹은 부용집단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말갈족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 정도는 복속된 시기와 위치 등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고구려와 인접해 있고 그 문화에 익숙해진 일부 말갈족에게는 고구려의 기본 지방통치방식인 성-촌 지배체제를 적용했지만, 대개의 경우 그들의 생활방식을 변경시키지 않으면서 부락 단위로 간접지배와 직접지배를 병행하는 식으로 통치했다. 이것은 전체적으로 보아 성-촌 지배체제 아래에서 행해진 특수한 지배였다(김현숙, 2003a; 2005).
고구려민으로 편입된 말갈에 대해 고구려 정부에서는 그 집단의 성격에 맞게 군사적 부담을 지우는 대신, 형식적인 수준에 그치는 소량의 세금만 부과했다. 즉 말갈족의 종족적 성격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5세기 말 이후 고구려 중앙정부에서는 이들을 특수부대로 편제하여 정복전쟁에 활용했다. 말갈병을 고구려 정규군으로 편제한 것은, 혹독한 추위에 시달리면서 민첩성을 담보로 한 약탈에 의존하며 부락별로 생활했던 호전적인 말갈족에 대한 적절한 지배방식이었다.
이들의 활동이 본격화된 것은 수·당과의 전쟁 때였다. 고구려 군대로 편제되어 수·당과의 전쟁에서 활약했던 말갈은 당대(唐代)의 말갈 7부 가운데 속말말갈과 백산말갈이 가장 중심이었다. 이 두 부족이 고구려와 지리적으로도 가장 가깝고 일찍부터 직접적인 접촉을 많이 하였으므로 오지에 있는 다른 말갈들보다 고구려문화권에 더 익숙해져 있고, 또 안정적으로 고구려 지배권 아래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이외 백돌부·불열부·호실부·안거골부 등의 말갈부족은 고구려 내에서 속민집단 혹은 부용적 속민집단으로 존재했으므로, 정규군으로 편제되기보다는 일정한 공물을 바치고 비정기적으로 군사활동에 동원되는 정도로 고구려정부에 대해 경제적·군사적 부담을 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국왕 직속 군대로 편제된 말갈족은 호전적이고 민첩한 종족적 성격에 걸맞게 고구려 멸망기와 부흥운동 과정에서 눈에 띄는 활동상을 보여주었다. 이 경우 말갈족들은 고구려 주민의 일원으로서 외부의 적을 맞아 나라를 지키는 고구려군으로 활동했다. 말갈족들이 부흥운동을 일으킨 것과 훗날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는 발해 건국에 적극 참여한 것은 그들이 고구려인으로 살았고 스스로도 고구려민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김현숙, 1992).
한편 말갈의 조세 부담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 차가 있다. 말갈이 군사적으로 동원되는 대신 세금을 다른 일반 고구려민들보다 적게 냈다고 보는 설은 6세기 이후의 조세 규정에 나타나는 ‘유인’에 말갈이 속한다고 보는 데서 비롯되었다. 즉 『수서』고려전에 나오는 “인세는 포 5필, 곡 5석이다. 유인은 3년에 한 번 세를 내는데 10인이 함께 세포 1필을 낸다. 조는 호 1석이고 다음은 7두, 그 아래는 5두이다(人稅布五匹穀五石 遊人則三年一稅 十人共細布一匹 租戶一石 次七斗 下五斗)”라는 기사에서 ‘인’과 구별되는 존재로 나오는 ‘유인’에 말갈이 속한다고 본 것이다.
이 기사에 보이는 조세의 구분과 내역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이 제시되어 있다. 이 중 인세의 내용인 포 5필과 곡 5석의 문제, 조호(租戶)의 부담 주체, 유인의 성격 문제 등을 둘러싸고 견해차가 나타났다. 이 중 유인에 대한 해석은 경제적 빈궁민이나 용작민, 유망민이나 몰락농민으로 보는 견해(백남운, 1933; 이병도, 1959; 강진철, 1965; 리지린·강인숙, 1976; 이인재, 1990; 이기백, 1976; 조상현, 2003; 전덕재, 2006)와 말갈과 거란 등 고구려 안의 이종족집단으로 보는 견해(김기흥, 1987; 김현숙, 1992), 놀이하는 사람, 악인(樂人), 매춘부, 상인, 농업 외의 직분을 가지고 별도의 적(籍)으로 관리되던 대상인, 상인, 공인 등 특수 직군의 사람으로 보는 견해(노중국, 1979; 권주현, 2000; 권오영, 2000; 유영박, 1987; 박남수, 2006; 나유정, 2020), 여·수전쟁 때나 북위 말에 고구려로 들어와 남게 된 중국인으로 보는 견해(김락기, 2000; 안정준, 2015a) 등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고구려의 말갈 지배와 관련된 견해가 유인을 말갈이나 거란 등의 이종족 부용민으로 본 설이다(김기흥, 1987; 1990). 이 경우 고구려가 경제생활방식과 수준면에서 차이가 나는 여러 세력집단이 혼재하는 다종족국가임을 고려하건대, 전체 민을 대상으로 재산 소유에 따라 일률적이고 개별적인 조세 규정을 설정하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인’과 구별되는 대상으로서의 유인, 그리고 조세의 집단적 수취라는 점에 착안하여 유인을 고구려에 부속된 이종족민, 특히 말갈·거란 등 자기들 나름의 집단사회를 운영하며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집단적 부용민이라고 본 것이다.
이 연구에서는 일반 고구려민의 부담에 비해 훨씬 적은 양의 세금이 부용민에게 책정된 이유를 후기로 갈수록 여러 이종족을 원활히 통치하기 위해 덕화(德化)를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는 데서 찾았다. 즉 이종족들을 선무함으로써 내외 안정을 도모해왔던 것으로 초기의 약탈적이고 가혹한 대복속민 시책이 수정되어, 고구려 대왕의 은덕에 피복속민들이 더욱 충성을 다하도록 유도했던 것이라 설명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김현숙, 1992). 고구려 당시 말갈의 독자적인 성격과 발해 멸망 이후 이종족으로서의 역사 전개에서 근본적으로 기인한 것이겠지만, 말갈이 고구려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상당히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것으로 보는 것이 지금까지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이것은 전체 ‘고구려민’이란 관념보다는 종족의 차이, 즉 이종족이란 관념이 더 강하게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런 선입견에서 벗어나 수·당과의 전쟁 기사나 발해 건국기 기사를 보면 말갈은 고구려군으로 편제된 고구려인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렇게 보면 유인은 고구려 후기에 그 종족적 특성에 따른 고구려의 지방지배방식의 하나로서, 군대조직으로 편성한 집단성이 강한 말갈과 일부 거란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유인은 군역이란 특수직역을 가진 집단민이라 할 수 있다.
말갈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방식 연구는 아직까지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고구려의 지배권이 미친 범위에 대해서도 아직 개략적인 범위만 거론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다. 백산말갈과 속말말갈 외 다른 말갈 부락들과 고구려의 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고구려의 동북지역 중진인 책성의 최고 지방관을 역임한 이타인의 묘지명이 발견됨으로써 관련 연구에 물꼬를 터주었다. 묘지명에 의하면 이타인은 책성도독으로서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동시에 통치했다. 이는 곧 고구려가 백산말갈 지역을 직접통치권역 안에 넣어 지방관을 통해 지배하되, 다른 일반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구분해서 통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때의 구분은 차별이 아닌, 성격에 맞는 지배방식을 적용했다는 의미이다. 즉 일원적이고 직접적인 지방통치라는 큰 틀 아래 생활방식 등에 차이가 나는 지역민들의 경우 그들의 존재양상에 맞는 지배방식을 적용하여 통치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제 사례인 것이다.
책성은 태조왕 이래 계속 고구려의 동북방 중진이었다. 〈고자묘지명〉에 의하면 이타인 이전에 위두대형(位頭大兄) 고량이 책성도독을 역임했는데, “방진(方鎭)의 영수(領袖)가 되어 실로 소속된 성(屬城)의 표준이 되었다”고 한다. 〈이타인묘지명〉이 발견되면서 책성도독의 업무를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이타인은 고구려 멸망 직전에 ‘책주도독겸총병마(柵州都督兼總兵馬)’를 역임하면서 “고구려의 12주를 관할하고, 말갈 37부를 통할했다(管一十二州高麗, 統卅七部靺鞨)”고 묘지명에 적혀 있다. 책성도독이나 책주도독의 ‘도독’은 고구려의 욕살이다. 고량과 이타인은 동북방 지방통치의 최중심인 책성 지역에서 최고위 지방관을 역임했던 것이다. 이타인이 관장했다는 ‘12주 고려’는 지방관이 파견된 12개 치소 성이나 지방행정구역을 지칭한다. ‘37부 말갈’은 백산말갈이다.
여기서 37부 말갈은 말갈인 추수(酋帥)가 부락원을 집단적으로 통솔하는 부락 상태로 존재했다고 보고, 고구려가 이들을 편적(編籍)하여 군사 징발 등 세역(稅役)을 간접적으로 수취한 것으로 추정한 견해가 있다(여호규, 2017). 〈고을덕묘지명〉에 의하면 그의 부친인 고부가 해곡부도독을 역임했다. 고부는 중리소형(中裏小兄)을 수여받은 다음 남소도사(南蘇道使)를 거쳐 해곡부도독을 역임했다고 하므로, 대체로 보장왕 재위 중·후반에 해곡부도독을 역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해곡은 3세기 후반 서천왕이 신성에 순행했을 때 고래 눈(鯨魚目)을 헌상했던 해곡태수의 관할구역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중기의 태수와 후기의 도독, 즉 욕살의 관할구역은 범위에서 차이가 난다. 해곡을 한성 지역으로 보는 설(이성제, 2018)도 있고, 태조왕 55년조의 ‘동해곡’이나 〈광개토왕비〉 수묘인연호조의 ‘동해가(東海賈)’와 같은 지역으로 보고, 이를 함경북도 청진 일대로 비정한 설도 있다(여호규·李明, 2017).
후자의 경우 3세기 후반부터 압록강 중·상류 연안로와 함경북도 해안로를 경유하는 동해로를 따라 지방통치조직을 정비했고, 5세기 초반에는 두만강 하류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동해안 지역을 하나의 권역으로 설정한 것으로 보았다. 이에 따라 고구려 말기에 책성과 해곡, 두 곳에 욕살이 파견되었으며, 해곡부도독은 두만강 하류를 제외한 청진-원산만(비열성)의 함경도 해안지대를 관할한 것으로 추정했다. 가능성이 높은 비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해곡이 고구려 초기의 해곡태수가 통치하던 그 지역이었다면 책성은 옛 북옥저 지역, 해곡은 남옥저(동옥저) 지역의 중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해곡을 함흥에 비정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요컨대 이타인이 통치했던 12주 고려나 37부 말갈의 분포범위는 대체로 두만강 유역 일대로 상정된다. 연변과 혼춘 일대의 성곽 분포현황을 바탕으로 12개 치소 성을 검출한 연구에 따르면, 고구려는 평원이 넓게 발달한 혼춘분지나 연길평원 일대에 평지성을 조밀하게 축조하고, 그 주변에 중대형 산성을 구축해 지방통치와 백산말갈에 대한 통제를 도모했다(여호규·李明, 2017). 이 경우 치소 성을 거의 축조하지 않은 혼춘하 중·상류 방면이나 알하하 중·상류의 왕청(汪淸) 지역을 백산말갈의 집단거주구역으로 추정했다. 즉 고구려가 두만강 유역을 평원이 넓게 발달한 중핵지역과 그 주변부, 백산말갈의 집단거주구역인 외곽지역으로 구분해 지방통치를 했다고 보았다. 이때 고구려인들은 주로 평원이 넓게 발달한 중심부에 밀집 거주했고, 37부 말갈은 그 주변과 외곽지역에 부락 단위로 산재하며 책성욕살의 통할을 받았다고 추정했다.
〈이타인묘지명〉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고구려의 말갈 지배방식에 대한 논의가 진전되는 한편, 새로운 궁금증이 대두되었다. 그럼 이타인은 고구려인인가, 말갈인인가 하는 것이다. 이타인이 관할한 대상이 ‘12주 고려’와 ‘37부 말갈’로 구분 서술되어 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모두 고구려인이지만 말기까지도 책성 일대 지역민들을 고려와 말갈로 구분하고 있다. 이타인은 이 중 어느 쪽이었을까? 그는 분명 중앙에서 임명한 지방관이지만 그 지역 유력층을 지방관으로 임명하여 지역을 관할토록 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타인의 종족, 출신지는 어디였는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때 떠오르는 인물이 대조영이다. 그는 속말말갈 출신의 고구려 장수였다. 속말말갈 역시 고구려 영역 안에 일찍이 들어왔고 오랫동안 고구려인으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 속말말갈 가운데 장수가 된 사람이 대조영이었고 그는 두말할 필요 없이 고구려인이었다. 그렇다면 이타인도 비슷한 경우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타인은 책성 지역에 형성된 상층 지배세력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 두만강 유역에도 일찍부터 여러 계통의 주민집단이 잡거했으므로 이타인 가문의 족속이 어느 계통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조부인 복추(福鄒)나 부친인 맹진(孟真)이 고구려 조정으로부터 고위 관등을 수여받았다는 점에서 일찍부터 이 지역 지배세력의 위상을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여호규·李明, 2017).
이타인 가문이 말갈 계통인지 여부와 상관없이 이 집안 사람들은 모두 고구려인이란 정체성을 갖고 있었고, ‘12주 고려’와 ‘37부 말갈’ 모두 고구려인이었다. 종족적 구분은 있지만 이종족이라고 배제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각자의 성격에 맞게 통치방식을 적용하는 것이 고구려 지방통치제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였다는 것을 〈이타인묘지명〉은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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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말갈에 대한 지배방식 자료번호 : gt.d_0005_0020_002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