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안성의 위치와 축조, 그리고 이도의 배경
1. 장안성의 위치와 축조, 그리고 이도의 배경
1) 평원왕이 이도한 장안성의 위치 비정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도성의 천도 과정이 고구려본기뿐 아니라 지리지 고구려조에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지리지에서는 “주몽(朱蒙)이 흘승골성(紇升骨城)에 도읍을 세움으로부터 40년이 지나 유류왕(孺留王) 22년에 도읍을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겼다. …국내(國內)로 도읍하여 425년이 지나 장수왕(長壽王) 15년에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기고, 156년이 흐른 후 평원왕(平原王) 28년에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천도 시기와 도성이었던 기간을 정리하였다. 고구려의 도성을 조기 도성, 전기 도성, 중기 도성, 그리고 후기 도성으로 구분한 견해(민덕식, 1989)는 이를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장수왕 이전에도 평양으로 천도한 기사가 확인된다. 즉, 동천왕 21년(247년) 평양성을 축조하였다는 기사와 고국원왕 13년(343년) 평양동황성으로 이거하였다는 기사이다. 이러한 장수왕 이전의 평양에 대해서 기존에는 북한 연구자 중심으로 현재의 평양 지역으로 보는 인식이 많았다(채희국, 1957; 정찬영, 1966; 남일룡, 2006). 반면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동천왕대에 평양성을 축조했다고 보거나(이도학, 2015), 평양동황성을 평양 일대 또는 주변으로 보는 견해가(민덕식, 1989; 김지희, 2016; 기경량, 2020)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이렇게 동천왕, 고국원왕, 장수왕에 걸쳐 평양 관련 기록이 전하지만,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기본적으로 장수왕대에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것을 획기라고 할 정도의 실질적인 천도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장수왕대의 평양성에서 평원왕대의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것을 이와 동등한 수준의 천도로 이해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지리지 고구려조에는 이러한 연대기적 인식과는 전혀 다른 내용도 함께 부기되어 있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석의 내용을 보면 『당서(唐書)』에는 “평양성은 또 장안이라고 불렀다”(불천설(不遷說))라고 되어 있는 데 반해, 『고기(古記)』에 “평양에서 장안으로 옮겼다”(이도설(移都說))고 하는 점을 들어 “이 두 성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멀리 떨어져 있는지 가까웠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찬자의 입장에서는 문헌자료를 검토한 결과 불천설과 이도설의 근거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를 검토하여 본기를 편찬할 때는 평양성과 장안성을 각기 다른 곳으로 보는 이도설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찬자는 『당서』로 대표되는 중국 자료와 『고기』로 대표되는 국내 자료를 비교하여 국내 자료를 채택하였지만, 그럼에도 의문이 남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겼던 것 같다. 이 중국 측 자료를 합리적이라고 보는 견해는 1950년대 일본 연구자에 의해 체계적인 불천설로 정리되었다(三品彰英, 1952).
어쨌든 『삼국사기』에서 연대기의 기준이 된 이도설은 비록 평양성과 장안성의 위치에 대한 획정은 되지 않았지만, 이를 기반으로 한 문헌 발간이 이어졌다. 이와는 별도로 15세기 후반이 되면 장안성의 위치를 새롭게 추정한 지리지도 나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평안도 평양부고적조에는 장안성을 “대성산 동북쪽에 있다.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5,161척이요, 높이가 19척이다”라고 정리한 후, 여기에 더하여 “고구려 평원왕 28년(586년)에 평양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다. 성 가운데에 안학궁(安鶴宮) 옛터가 있다”고 부기하였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찬자가 현재 평양시의 중심지역을 평양으로 보고, 대성산 동북쪽에 있는 토축 성을 장안성으로 보았으며, 그 가운데 안학궁이 있다고 여겼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은 1590년에 윤두수가 편찬한 『평양지』에도 이어져, 연혁(沿革)조에서는 장수왕 15년(427년)의 천도를, 성지(城池)조에서는 대성산성을 설명하면서 그 동북쪽에 586년에 이거한 장안성과 안학궁 고지(古址)가 있음을 간략하게 정리하였다. 19세기 전반 한치윤이 지은 『해동역사(海東繹史)』 궁실지에서는 “양원왕 8년(552년)에 장안성의 안학궁을 건축하였으며, 평원왕이 옮겨 도읍한 옛터가 지금 평양부 북쪽에 있는 구룡산(九龍山) 위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장안성의 안학궁’이라고 하여 좀 더 분명하게 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평양성과 장안성을 별개로 보는 인식은 지속되었지만, 장안성의 위치는 현재의 대성산 아래 안학궁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장안성에 대한 위치 비정과 달리, 장수왕대의 평양성에 대해서는 크게 이론이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양란 이후 18세기에 들어서 평양의 북성 등 관방시설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각석이 출토되자(『평양속지(平壤續志)』), 이것이 본격적으로 평양성의 위치에 대한 명확한 근거로 이야기되기 시작한다. 1830년 김정희(金正喜)는 병술년(丙戌年, 1766년)에 출토된 각석과 새롭게 외성오탄(外城烏灘) 아래서 출토된 각석에 쓰인 기년명을 ‘기축(己丑)’으로 판독하고, 이를 고구려 장수왕대인 449년에 이루어진 축성 내용이 담긴 ‘고구려고성석각(高句麗故城石刻)’이라 정의하였다(『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이후 오경석도 이 지역에서 추가적으로 각석을 발견하면서 평양성의 북성과 외성이 모두 고구려 장수왕대에 축성된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田中俊明, 1985).
이를 바탕으로 평양성의 폐기된 성벽은 고구려 장수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지만, 외성 내부에 보이는 독특한 구조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시각이 상존하였다. 바로 기자의 정전과 관련된 유적, 기전유제(箕田遺制)라는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 평양부조에는 “고성 유적 하나는 기자 때 축성된 것이며, 성안은 정전제(井田制)를 써서 구획하였다”는 기사가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양부고적조에서도 “외성 안에 정전이” 있으며 “정전유적이 완연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외성 내부의 소위 정전제 관련 유적을 직접 조사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인물이 한백겸이다(『구암유고(久菴遺稿)』). 그의 정전제설은 이후 많은 학자에게 평양성 내부에 있는 유적이 고구려 유적과 관련 있다기보다는 기자의 유적이라는 인식을 갖게 하였다. 물론 이와 달리 정약용은 이 유적을 기자의 정전이 아닌 고구려 멸망 이후 주둔하였던 당군의 둔전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고구려의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기경량, 2017).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세기까지의 평양성과 장안성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은 이도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장안성을 안학궁으로 보았기 때문에 평양성에서 확인된 각자성석(刻字城石)을 장수왕대로 비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근본적인 한계도 함께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적인 장안성 인식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19세기 말부터 진행된 일제의 평양 지역 진출은 20세기 초 본격적인 조사로 이어진다. 이때 새로운 방법론을 가지고 참여한 인물이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이다. 그는 기존의 정전 또는 둔전으로 이해되었던 평양성 외성 내부의 구획을 고대 도성의 조방제로 보고 이를 평원왕대의 장안성으로 이해하였다(關野貞, 1909). 이에 따라 장수왕대의 평양성은 기존의 장안성으로 여겨졌던 대성산성과 안학궁으로 변경하였다. 이후 추가적인 조사성과를 바탕으로 안학궁 대신 청암리토성을 하나의 세트로 바꾸기는 하였지만(關野貞, 1928), 기본적인 설정은 이때 완성된다. 이는 기존의 ‘평양성에서 안학궁으로 도성을 옮기는 이도설’과 정반대로 설정된 ‘안학궁에서 평양성으로 옮기는 이도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장안성의 위치에 대한 인식은 북한 학자들의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현재의 평양성으로 확정되었다.
2) 장안성 축조과 이도의 배경
이렇게 현재의 평양성으로 위치가 확정된 장안성의 축조 목적은 크게 고구려 도성의 발전이라는 측면과 내외정세에 대처하기 위한 군사적 측면으로 나누어서 검토할 수 있다(민덕식, 1989). 우선 고구려 도성의 발전적 측면을 중심으로 볼 때 장안성부터 본격적인 도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 단계라는 견해가 나온 바 있다(채희국, 1965; 최희림, 1978). 채희국은 장안성을 고구려 도성의 효시로 보았다. 장안성 축성은 고구려 성제의 발전에 큰 계기가 되었고, 이와 같은 도성의 발생은 성의 발전에서나 도시의 발전에서 획기적인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이전 시기에 산만하였던 도시 구성이 짜임새를 갖게 되었는데 이는 사회 생산력 발전의 결과라고 보았다. 최희림은 기존의 안학궁성과 대성산성과 같은 평지성과 산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도성제도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고, 산성의 이점과 평지성의 이점을 결합한 강력한 방어력을 가진 발전된 수도성이 필요했기 때문에 장안성을 축조하였다고 보았다.
이러한 도성 발전이라는 측면과 함께 최근에는 장안성 축조의 배경을 보다 다양한 시각에서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장안성 축조가 매우 긴 기간 동안 계획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견해에서는 외부 충격에 의한 갑작스러운 추진보다는 국내적인 상황을 근본적인 원인으로 이해하였다.
우선 장안성을 축조하였다는 양원왕대의 정세를 검토한 견해(김희선, 2006)에서는 이 시기가 왕권의 약화와 귀족세력 간의 분열로 인해 정국이 불안정한 시기였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 긴메이(欽明)천황 6년조, 7년조에는 양원왕의 즉위 과정과 관련하여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내용이 전한다. 당시 세자였던 양원왕이 추군(麤群)으로 불리는 정치세력의 도움으로 세군(細群)으로 불리는 반대세력을 숙청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외척세력이었던 추군과 세군 사이의 무력충돌로 2,000명이 희생되었다고 하니, 정치세력 간의 다툼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큰 정쟁이었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즉위 과정을 당시 정치상황의 변화, 고구려 왕권의 위상 하락과 귀족세력의 성장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나아가 양원왕 즉위 시 반대세력이었던 세군 세력을 구도(舊都)인 국내성을 기반으로 한 귀족세력으로, 이들과 대립하는 추군 세력을 평양을 지역 기반으로 하는 신진귀족세력으로 상정한 견해도 나왔다(임기환, 1992).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양원왕 2년 “왕도(王都)의 배나무 가지가 이어졌다”는 기사를 즉위 시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된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민철희, 2002)나 양원왕 4년 “환도(丸都)에서 가화(嘉禾)를 바쳤다”는 기사를 환도 지역의 귀족세력이 양원왕에게 복속한 것으로 보는 견해(임기환, 1992)가 제기되었다. 이와 같이 즉위 초반 정치적 안정과 왕권이 강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 외성의 축조와 도시 건설을 염두에 둔 장안성으로의 천도 또한 사전에 계획되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김희선, 2005). 나아가 즉위 시 혼란을 수습하고 자신의 즉위를 도운 추군 세력을 중심으로 중앙귀족세력을 재편성하기 위해 장안성 천도를 도모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양원왕 13년(557년)에 환도에서 간주리(干朱理)의 반란이 일어난 것을 볼 때, 여전히 즉위 반대세력의 중심지라고 생각되는 환도 지역은 정치적으로 안정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이러한 양원왕대의 국내 정세로 보아, 이전 도성과 달리 일반 거주민을 보호하는 외성과 일정한 구획을 갖춘 도시건설 계획을 포함한 대규모 신도(新都) 장안성 건설과 같은 국가적 사업을 추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장안성의 축조는 대규모의 천도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정국 전환용으로 한정적인 부분에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김희선, 2005).
양원왕대의 장안성 축조와 달리 평원왕대의 천도는 국내적 상황과 관련하여 전통적인 구귀족세력과 구분되는 신진정치세력이 대거 등장한 시기라는 점이 부각되기도 하였다(임기환, 1992). 장안성 축조 시작 직후 정국 불안은 새로운 신도 건설을 결정하고도 제대로 축성공사를 진행하지 못한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고 본 견해도 있다(김희선, 2006).
이러한 견해들은 장안성의 초축 시기와 내성 축조 시기 사이의 시간적 공백을 쉽게 설명해준다. 장안성은 축조가 개시된 지 근 14년 만에야 내성의 축조가 시작되었는데, 이를 단순히 성 자리를 정비하고 인원 징발과 같은 준비사업을 진행하는 데 걸린 시간이라고 보기에는 기간이 너무 길다. 이는 천도 전 왕궁만을 먼저 축성하였다고 보는 견해(민덕식, 1989)와는 차이가 있는데, 양원왕 8년(552년)에 축조가 개시된 이래 평원왕 8년(566년)에 이르기까지 장안성의 축조공사는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았다.
장안성의 본격적인 축성사업은 평원왕대에 이르러 추진된 것으로 보이는데, 평원왕대는 양원왕 말년의 정국 혼란과 달리 안정적인 정국 운영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평원왕 2년(560년)의 대사면(大赦免)에 관한 기사를 양원왕 말년 간주리의 반란에 가담했던 환도 지역의 귀족세력에 대한 일종의 정치적 사면으로 해석하여 당시 평원왕이 환도의 귀족들과 정치적인 타협을 모색하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임기환, 1992)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이와 함께 평원왕 13년(571년)에 패하(浿河) 벌판에서 50일 동안 행해졌다는 사냥에 관한 기사를, 당시 평원왕이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정치세력의 분열에 따른 혼란의 종식과 추락했던 왕권이 다시 안정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민철희, 2002)도 이를 방증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평원왕대의 정국 안정이 장안성 축성공사를 안정되게 추진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평원왕 8년(566년)에 내성이 축조된 것과 평원왕 11년(569년)에 외성이 축조된 것, 그리고 평원왕 28년(586년)에 천도가 단행된 것을 모두 평원왕대에 정국 안정이 이루어지고 내외통치권이 확립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한편 외성의 축조 시기를 평원왕 31년(589년)으로 보는 견해를 따를 경우 평원왕대의 정국 안정이 더 길었다고 보게 된다.
이러한 국내 정세와는 별도로 급격한 대외 정세 변화도 장안성의 축조와 이도(移都)의 배경으로 논의되기도 하였다. 그중 장안성 축조 배경의 하나로 논의된 것이 신라의 북상이다(이성시, 1990). 이는 장안성을 축성한 시기가 신라의 고구려 침입 직후였기 때문이다. 양원왕 7년(551년)에 신라와 백제의 동맹군이 연합하여 고구려의 남부지역을 점령하였다. 이후 신라는 백제의 점령지였던 한강 하류 유역마저 차지하고 신주를 설치하였다. 신라의 영역 확장과 그로 인한 군사적 대치는 고구려의 대응을 가져왔고, 그중 하나가 장안성 건설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당시 돌궐의 위협도 새로운 방비가 필요하였을 것이라는 가능성도 제기되었다(민덕식, 1992). 550년에 동위(東魏)를 계승한 북제(北齊)는 고구려를 압박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남하하는 돌궐에 군사적 대응을 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돌궐은 유연을 격파하고 흥안령을 넘어 동진하였는데, 이는 고구려에게도 큰 위협이 되었다고 한다.
양원왕 3년(547년)에 고구려는 돌궐의 위협에 대비하여 서북방 방어의 중요 거점인 신성과 백암성을 수리·개축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고구려가 중국의 정세와 주변 민족들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행한 대응이었다는 것이다(민철희, 2002). 실제로 신라가 한강 유역을 공취하던 양원왕 7년(551년)에 돌궐은 고구려의 신성과 백암성을 공격하였는데(護牙夫, 1967), 고구려는 이에 대한 대비를 하였던 것이다. 북제나 돌궐의 동향이 고구려의 주요 중심지인 요동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고구려가 장안성을 축조하였던 것이다(김희선, 2006).
김희선은 장안성의 초축 단계에서부터 이미 외성의 축조와 도시 건설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552년의 시축(始築) 이전에 이미 충분한 검토와 논의가 이루어졌을 것이며, 551년 이후 신라의 급격한 북상과 돌궐의 세력 확장 또한 수도 방비체제 강화의 필요에 따른 신도 장안성의 건설을 촉구하였다고 보았다.
다만 당시 신라와 돌궐의 위협이 심각한 상황으로 진전될 정도로 지속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보았다. 차츰 대외상황이 안정되면서 정치적으로 혼란하였던 고구려의 내분도 평원왕 즉위 이후 점차 수습되었다는 것이다.
김희선은 이러한 대내외적인 안정을 기반으로 평원왕대에 이르러 장안성으로의 천도 또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고 보았다. 내·외성의 축조와 궁궐, 정원, 관청 등의 건설, 그 밖의 일정한 구획선을 갖춘 도시건설사업, 그리고 전기 평양성을 포괄하는 도성 규모의 확대 등 장안성으로의 천도 준비가 계획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외성의 축조 과정에서 살펴보았듯이 평원왕 28년(586년)에 이루어진 천도는 장안성 완공 전에 미리 단행되었다. 뒤에서 다룰 장안성이 42년 걸려 완성되었다는 각석에 관한 기록을 긍정할 수 있다면, 장안성 건설공사가 완전히 마무리된 것은 영양왕 4년(593년)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공도 되기 전에 장안성으로 이도가 단행된 배경을 수(隋)의 출현 이후 진행된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로 이해하는 견해는 비교적 일찍부터 제기되었다(민덕식, 1992; 김희선, 2006).
수가 평원왕 23년(581년)에 건국되자 고구려는 즉각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였고, 이후 평원왕 26년(584년)까지 계속해서 매년 2~3회씩 사절을 수에 파견하였다. 584년에 수 문제가 고구려 사신을 궁궐의 정전인 대흥전(大興殿)에서 융숭히 대접하였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고구려뿐 아니라 수 역시 일단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고구려는 여러 차례 수에 조공 사절을 파견하며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앞으로 닥칠지 모를 수와의 대결에 대비하여 그 방비책을 마련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평원왕 27년(585년)에 남조의 진(陳)에 사신을 보내 수를 견제하고 다음 해에는 장안성이 완공되기 전인데도 불구하고 이도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김희선은 수의 팽창 의도에 대비하기 위해 방위체제가 강화된 장안성으로의 천도를 서두름으로써 수에 대한 방비책을 모색하였던 것으로 보았다. 실제 수는 진을 멸망시킨 이후 고구려에 보낸 조서에서 침공의 가능성까지 거론하고 있어(『수서』 권81 고려전), 당시 고구려가 수로부터 받고 있던 압력의 정도가 심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진의 멸망 이후 수에서 눈치챌 정도로 병사를 정돈하고 곡식을 축적하는 등 거수지책(拒守之策)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 속에서 장안성 마무리 공사가 영양왕 4년(593년)에 완료되었다.
민덕식은 이러한 국내외적인 정세 변화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처음 장안성 축조 계획은 내성 축조와 관련 있고, 이후 이도와 나성 축조는 처음부터 계획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민덕식, 1992). 이는 결국 『삼국사기』에 장안성 축조와 이도가 별개 기사로 수록되게 된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 장안성 구조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궁궐의 위치에 대한 문제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처음으로 장안성의 구조에 대해 검토하였던 세키노 다다시는 궁궐의 위치에 대해 장안성 내에서 장대한 규모의 대지와 다량의 고구려 기와가 확인된 내성에 한 곳, 북성에 한 곳, 그리고 외성에 접한 중성에 한 곳, 이렇게 세 곳의 후보지를 추정하였다(關野貞, 1928). 현재는 일제강점기 조사를 통해 고구려시기의 주춧돌 등을 확인하고 지형적으로도 건축물이 있었던 대지로 보이는 구역이 있어 내성 만수대 주변을 궁궐 후보지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민덕식, 1989). 나아가 내성과 같은 지형적 특징이 있는 공간에 고구려 궁궐이 위치하였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이를 고구려 특유의 궁궐 위치 선정 인식으로 보기도 한다(기경량, 2017). 이와는 달리 중성은 궁궐이 존재하는 내성을 방어하는 전략적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수·당의 장안성처럼 궁성 전면의 관청지구인 황성으로 삼았을 가능성을 고려하거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위진남북조 이래의 동아시아 도성의 궁궐 위치를 참고하여 중성 창광산 아래의 대지에도 고구려의 궁궐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였다(양정석, 2014).
따라서 당시 고구려의 궁궐 위치와 관련해서는 후보지 중 한 곳만을 궁궐로 봐야 할지, 두 곳만 궁궐로 봐야 할지, 아니면 세 곳 모두를 궁궐로 봐야 할지, 나아가 궁궐 위치가 시기에 따라 변경되었던 것인지 등에 대해 추가적인 조사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외성은 중성이나 내성과는 달리 일반 백성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이곳에서 상업·수공업을 비롯한 다양한 생산활동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여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