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장안성 축성 시기와 과정의 복원
2. 장안성 축성 시기와 과정의 복원
1) 축성 시기 복원의 핵심, 각자성석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장안성과 관련된 두 사료가 전한다. 양원왕 8년(552년)조의 “장안성을 축조하였다(築長安城)”는 기사와 평원왕 28년(586년)조의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移都長安城)”는 기사가 그것이다.
이 두 사료에서 하나는 장안성을 축조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읍을 옮겼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 흐름상으로 보면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다만 장안성을 축조하였다는 기사를 완공으로 보면 완성된 후로 무려 34년이 흐른 후에 도읍을 옮긴 것이 되기 때문에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이에 따라 연구자들은 『삼국사기』 양원왕 8년조의 장안성 축조 기사는 완공이 아닌 시축으로 보는 경향이 많다. 이렇게 보면 장안성의 축조가 552년에 시작하여 586년에 이르러 일단락되어 도읍을 옮길 수 있었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다만 이 두 기록만으로는 앞에서 다루었던 외성, 중성, 내성, 그리고 북성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장안성이 어떤 성부터 만들어졌는지, 어떤 과정을 거친 것인지, 최종 마무리는 어떤 성에서 이루어졌는지 등 장안성의 축조 과정을 알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러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자료가 고구려가 멸망하고 1,000년이 지난 조선 후기에 평양 지역의 관방시설이 새롭게 정비되면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림2 | 장안성 추정 복원도(양정석, 2014, 동북아역사넷)
장안성의 축조와 관련하여 『삼국사기』의 내용을 보완해줄 수 있는 정보가 담겨 있는 자료는 평양성 각자성석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각자성석은 모두 6점인데, 실물이 전해지는 것은 3개(제2석, 제4석, 제5석) 뿐이다. 이 중 1점은 그 내용만 전하고 있고, 다른 것과는 성격도 조금 달라 별도로 이야기되고 있다. 각자성석은 그간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다루어졌는데, 여기서는 일단 축성 과정과 관련하여 각자성석이 제작된 시기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각자성석은 고구려 장안성의 축성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고구려 멸망 이후 오랜 기간 잊혀졌는데, 조선 숙종 40년(1714년)에 북성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다시 세상에 그 존재가 드러났다(『평양속지(平壤續志)』 권1 성지(城池)조). 이 성 아래의 석각(石刻)은 성벽의 면석에 “글자 새긴 성돌”(최희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는 “모성석각(某城石刻)”,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에는 “모성각자(某城刻字)”, 『조선금석총람』에는 “성벽석각(城壁石刻)”(다나카 도시아키), 박방룡은 “명문성석(銘文城石)”, 그리고 채희국과 최순희는 ‘각자성석(刻字城石)’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었지만, 최근에는 ‘각자성석’으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민덕식, 1992).
『평양속지』에는 1791년에 발견된 이 각자성석에 대해서 구성(舊城) 아래에 있는 석각에 “本城四十二年畢役”, 즉 이 성은 42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는 내용이 전하고 있다. 다만 전하는 것이 여덟 자에 불과하여 이것이 전체 기록인지 아니면 속지에서 요약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 각자성석이 북성에서 나온 것을 보면 북성이 고구려 때 축성된 것은 분명한데, 42년 동안 북성만 쌓았다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장안성 전체 공사 기간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정찬영, 1966; 田中俊明, 1985; 민덕식, 1992). 그런데 이렇게 보면 앞에서 언급한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양원왕 8년(552년)의 장안성 축조와 평원왕 28년(586년)의 장안성 이도 기간인 34년과는 다르게 된다. 만약 552년에 축성을 시작한 것으로 보고 그로부터 42년이 걸려 완공된 것으로 보면 593년이 되므로, 장안성으로 이도한 이후에도 축성은 계속된 것이 된다. 이에 대한 논의는 향후 장안성의 축성 과정과 기간을 이해하는 핵심이 된다. 한편 이 각자성석을 고구려 당대로 보지 않는 견해(기경량, 2018)도 있는데, 이에 의하면 42년간이라는 시간적 의미도 함께 사라진다.
북성에서 발견된 각자성석과는 달리 1766년 새로운 종류의 각자성석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일반적으로 연구자들이 이야기하는 각자성석 제1석이다.
제1석 : 己丑年五月卄八日始役西向十日里小兄相夫若牟利造作
각자성석 제1석은 『해동금석원』에만 실려 있는데, 김정희의 중서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실물이나 정식 탁본이 있는 것은 아니다. 1829년 김정희가 쓴 제발(題跋)에는 정확히 어디서 발견되었는지 밝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제1석의 위치를 추정하는 연구는 제2석, 제3석과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나오게 된다. 다만 여기에 쓰인 간지인 기축을 장수왕대의 기축년(449년)으로 본 것은 김정희가 이 각자성석이 확인된 성을 장수왕대에 천도하였다는 평양성으로 보았다는 데 기인한다. 이는 대성구역의 안학궁을 평원왕대에 이도한 장안성으로 여겼던 조선시대의 통설을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는 이 기축년을 평원왕 11년(569년)으로 보았다. 이는 세키노 다다시 등에 의해 이미 이 성을 장수왕대의 평양성이 아닌 장안성으로 보는 설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북한 학계에서도 이 성을 장안성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기축년을 552년 이후인 569년으로 보았다(최희림, 1978).
이후 일본 연구자 다나카 도시아키는 이와는 달리 기축년을 제2석 등에서 확인된 기유년의 오기로 추정하여 새로운 입론을 만들기도 한다(田中俊明, 1985; 2003).
이렇게 간지에 대한 해석은 연구가 진행되면서 달라지게 된다. 그런데 이 장안성의 각자성석에는 연월일로 명확하게 축성 시점이 밝혀져 있고, 축조 방향과 거리, 책임자 등이 기록되어 있어서 이후 연구자들은 연구방향을 바꾸어 장안성 축조 과정 자체를 어느 정도 복원할 수 있게 된다.
제2석 : 己酉年[三]月卄一日自此下向東十二里物苟小兄俳須百頭作節矣
각자성석 제2석은 『해동금석원』뿐 아니라 이후 『삼한금석록』에도 실렸다. 『삼한금석록』이 인용한 『평양지』에는 이 각자성석은 “기축년(1829년) 홍수로 구루성(九壘城), 즉 평양의 외성이 무너지면서 2개의 지석(誌石)이 나왔다”고 하는데, 그중 하나라고 한다.
제1석은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제2석의 경우 김정희는 “외성의 오탄 아래(外城烏灘下)”라고 했고, 『삼한금석록』의 편자인 오경석은 1855년 오탄 강기슭, 여기에 더하여 한사정(閑似亭)에서 직접 찾아보았다고 했다. 이후 최희림은 이곳을 양각도 위쪽 외성의 남벽으로 추정하였다(최희림, 1967). 이곳은 한사정의 주변으로 다나카 도시아키도 이 지역을 각자성석의 출토 지점으로 보았다(田中俊明, 1985). 그러면서 여기에 더하여 위치를 특정하지 못했던 제1석을 한사정의 서편에 있었다고 추정하였다. 이 견해로 원래 각자성석이 발견되었다는 오탄과 더 멀어지면서, 오탄 자체가 출토 지점 논의에서 빠지게 된다. 민덕식은 제1석의 축조 방향 표시방식이 다르고 서향이라는 것도 나성 내에서는 방향이 마땅하지 않다는 점을 들어 새롭게 추론하였다. 즉 각자성석 제1석의 내용이 중성의 남벽 동단인 대동교 부근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중성의 남벽과 비교하면 서로 합치된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이 각자성석 제1석이 대동교 부근 오늘날의 오탄 일대에서 발견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하였던 것이다. 더불어 제1석에만 ‘자차(自此)’라는 말이 없는데, 만약 생략된 것이 아니라면 각자성석 제3석과의 접합 지점인 나성 서벽의 다경문 북쪽 자성 동쪽에 위치하면서 내성의 서벽과 만나는 지점에서 서남쪽으로 쌓았다는 표시로 서향이라고 하였을 가능성도 제기하였다(민덕식, 1993).
이렇게 대동강의 오탄과 반대편 보통강까지 장안성의 동서로 출토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제1석의 위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민덕식이 오탄을 염두에 둔 것은 그 경우 중성의 남벽을 외성과 함께 고구려 때 동시에 축조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성과 제1석을 연계하여 이해하는 인식은 최근에 다시 제기되고 있다(기경량, 2017).
『해동금석원』과 『삼한금석록』은 모두 간지를 기축년으로 보았고, 북한의 연구자 채희국과 최희림도 기축년으로 판독하였다. 그런데 이 각자성석은 『삼한금석록』의 편자인 오경석의 아들 오세창이 소장하고 있었고, 이후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 수장되어 있었다. 당시 이를 새롭게 해독한 이노우에 히데오와 황수영은 기축이 아닌 기유일 가능성을 제기하였다(井上秀雄, 1976; 황수영, 1976). 그리고 제2석을 체계적으로 판독한 연구(최순희, 1979)가 나온 이후 대부분의 연구에서 이 각석의 간지를 기유년으로 판독하고 있다. 이는 이후 다른 두 각자성석에 대한 판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고 세부적인 판독도 연구자마다 상당히 다르게 진행된다(정원철, 2010). 여기서는 ‘자차’라고 하여 제1석의 ‘시역(始役)’과 차이가 나는데, 다른 각자성석에서 모두 ‘자차’로 되어 있어 제1석의 ‘시역’을 오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어떻게 보든 이들은 ‘여기서부터’라는 의미로 보아 축성이 시작된 지점을 분명히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3석 : 己丑年三月卄一里自此下向□[下]二里丙[中]百頭上位使尒丈作節矣
각자성석 제3석은 『해동금석원』에 실리지 않았지만, 『삼한금석록』이 인용한 『평양지』에 나오는 두 지석 중 또 다른 하나이다. 제2석과 달리 현재 전하지 않는다.
제3석의 간지에 대해서는 제2석과 달리 연구자 사이에도 의견이 갈린다. 제1석도 기축년이 아닌 기유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기 때문에 이를 세 개의 각자성석 간지에 대한 인식을 함께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제1석과 제3석은 기축년으로, 제2석은 기유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민덕식, 1992; 김희선, 2005). 다음으로 제1석, 제2석, 제3석 모두를 기유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田中俊明, 2003; 민덕식, 2003). 마지막으로 제1석은 기축년으로, 제2석과 제3석은 기유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여호규, 2005; 심정보, 2006). 이렇게 연구자마다 견해를 달리하는 이유는 각자성석의 위치나 내용의 관계를 고려하여 그려내는 당시 상황에 대한 인식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출토 위치를 통해 볼 때 제2석, 제3석은 나성, 즉 외성의 축조와 관련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데 비해, 제1석은 외성과 관련된 것으로 보거나(田中俊明, 1985), 중성과 관련하여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민덕식, 1993; 기경량, 2017). 반면 내성의 경우에는 출토 위치가 분명하기 때문에 다른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되었다.
제4석 : 丙戌二月中漢城下後部小兄文達節自此西北行涉之
각자성석 제4석은 1913년 모란대 아래의 도로를 개수할 때 발견하였는데(淺見倫太郞, 1914), 내성 동벽과 연결되는 옥류교 부근이라고 추정하고 있다(최희림, 1978).
현재 평양 중앙력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비교적 잘 남아 있어 판독에 대해 이견이 많지 않다. 다만 ‘二’자 앞에 ‘十’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12월로 보았고(최희림, 민덕식, 김희선), ‘十’이 없는 것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2월로 판단하였다(田中俊明, 여호규, 김창호, 정원철). 일반적으로는 『삼국사기』의 축성 관련 기사를 검토하여 고구려에서 12월에 축성을 한 경우가 없는 데 비하여 2월에 축성공사가 많았던 것을 근거로 하여 현재는 2월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어쨌든 552년 이후의 병술년은 566년이 되므로 이를 바탕으로 내성의 축조는 장안성을 쌓기 시작한 지 14년이 지나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때 축성이 시작된 것인지 아니면 완공된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남게 된다. 그보다 일찍 시작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내성의 성벽은 늦어도 566년에는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정원철, 2010)도 제기되었다. 이와 별도로 외성에서 발견된 각자성석의 기축년을 569년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내성이 그 이전에 완성되었다고 보았다(최희림, 1978).
어떻게 보아도 장안성을 축조하였다는 552년에서 본격적인 축성까지 14년의 차이가 있다는 점은 의문이다. 이에 대해 장안성 전체에 대한 구체적인 축조 계획의 수립과 노동력 징발, 식량, 숙소, 도구 확보 등 준비사업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가 먼저 나왔다(최희림, 1967). 하지만 계획만으로 14년을 소모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보다는 그 사이에 왕궁의 건설이 진행된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민덕식, 1992).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구려 내부의 정치적 상황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제기되었다(김희선, 2005).
제5석 : 卦婁盖切小兄加群自此東廻上□里四尺治

그림3 | 평양성 각자성석 제5석
각자성석 제5석은 최희림이 1964년 내성 서남모서리에서 발견하였다. 이곳은 한국 학자들에 의해 그 위치가 확인되었는데(고구려연구재단, 2005), 내성의 서남모서리가 아니라 동남모서리에 더 가깝다고 한다(정원철, 2010).
다른 각자성석은 현재 남아 있지 않거나 이전되어 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는 데 비해, 제5석은 현재 성벽 기저부에서 세 번째 단인 원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어 위치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아쉽게도 여기에는 간지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다.
2) 장안성 축성 과정의 복원
각자성석을 발견한 장소에 대한 추정과 이에 대한 판독이 여러 연구자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장안성의 축조 시점이나 범위에 대한 견해도 다양하게 제출되었다. 이에 따라 장안성의 축성 과정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오게 된다. 대다수 연구에서는 각자성석이 장안성의 내성, 외성, 북성에서 확인되었다고 보았지만, 연구자에 따라 북성에서 나왔다는 각자성석은 해석 근거에서 제외시키기도 하고 각자성석 제1석을 외성이 아닌 중성과 관련된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또 각자성석이 만들어진 시기에도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장안성 전체의 조성 과정을 이해하는 방식도 달라지게 된다.
이러한 장안성 축성 과정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제5석이 확인된 1964년부터 북한에서 시작되었다.
우선 채희국은 북성에 있는 영명사를 광개토왕 2년(392년)에 창건하였다는 9사와 연결하여 이해하고 있다. 이렇게 볼 경우 북성은 이보다 먼저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최근에는 청암리토성을 쌓은 시기(남일룡, 2001)로 여기는 247년을 북성 축성이 시작된 시기로 추정하였다. 이후 『삼국사기』 기록에 근거하여 장안성을 축조하였다는 552년부터 장안성으로 도성을 옮겼다는 586년 사이에 내성과 나성이 축성되면서 전체 도시를 포괄하는 대규모 도성건축으로까지 발전한 것으로 보았다(채희국, 1965).
정찬영은 『삼국사기』 기록에 더해 본격적으로 각자성석을 활용하였다. 『평양속지』에 나오는 북성 각자성석의 42년이 완공 시점을 보여주는 것이며, 오탄 출토의 각자성석 제1석과 제2석의 간지는 공사의 착공 시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 평양성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552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42년이라는 공사 기간이 걸려 평양성으로 천도한 586년보다 7년 늦은 593년경에 완공되었다고 추정하였다(정찬영, 1966).
최희림은 이러한 내용을 체계화하여 552년 평양성 축성 계획을 세우고 10여 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병술년인 566년부터 내성과 북성을 쌓기 시작하여 을축년인 569년경에 완성하고, 나성과 중성은 569년 경에 축성을 시작하여 570년대 말에 완공하였다고 보았다. 그리고 586년에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긴 이후에도 작은 규모의 공사를 몇 해 계속 보강하여 평양성의 축성에는 모두 42년이 걸렸다고 보았다(최희림, 1967; 1978).
이들 북한 연구자들의 세부적인 축성 과정에 대한 인식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내성에서 나온 각자성석의 병술년을 566년으로 보거나, 외성에서 나온 각자성석의 기축(己丑)을 569년으로 보는 것은 동일하다(葛城末治, 1935; 채희국, 1965; 정찬영, 1966; 최희림, 1978).
그런데 각자성석 제2석의 간지가 기축이 아니고 기유라는 견해가 1976년 한국과 일본에서 나오면서 북한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고구려 장안성의 축성 과정에 대한 연구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다. 이를 바탕으로 축성 과정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우선 최순희는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제2석을 조사하면서 간지를 기축이 아닌 기유(己酉)로 판독하였다. 이를 통해 각자성석의 간지를 병술, 기축, 기유 총 3개로 보고 이들의 순서를 조합하였다. 우선 병술(566년)-기축(569년)-기유(589년)로 나열하면 24년간이 되고, 기유(529년)-병술(566년)-기축(569년)으로 나열하면 약 41년간이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축성 연대를 결정하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추가적으로 발견된다면 새롭게 연대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제2석을 기유로 판독하고 편년하면 평원왕 31년(589년)으로 비정되므로 기축년과 짧게는 20년, 길게는 40년의 시간 차가 생긴다. 게다가 제2석과 제3석은 모두 외성 남쪽에서 발견되었으므로 양자 간의 시간 차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1985년 다나카 도시아키는 기존 장안성 축조 과정의 해석에 활용되고 있던 『해동금석원』의 제1석과 제2석, 『조선금석총람』의 제4석, 그리고 1964년 발견된 제5석, 『평양속지』의 성석, 이렇게 5개의 각자성석에 더하여 오경석의 『삼한금석록』에 실린 제3석을 추가하여 논의를 확장하였다. 여기에는 각자성석의 출토 위치를 서지 분석을 통해 비정한 것에 대한 문제점을 밝히고 새롭게 기성도병을 분석하여 위치를 재비정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필사로 전하는 제1석과 제3석의 간지를 실물에서 확인된 제2석의 기유년을 근거로 모두 기유년으로 변경하였다(田中俊明, 1985). 그 결과 장안성은 552년에 천도를 기도한 이래 566년에 이르러 내성이 축조되고, 586년에 이곳으로 천도한 뒤 589년에 이르러 나성이, 마지막으로 북성이 축조되어 42년 만인 593년에 완성되었다며 일련의 장안성 축성 과정을 복원하였다(田中俊明, 1990).
민덕식은 이후 다나카 도시아키가 생각한 장안성의 축조 과정을 바탕으로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였다. 우선 『삼국사기』의 장안성을 쌓았다는 기사를 552년에 국왕이 거주할 궁궐부터 짓기 시작하였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궁궐이 마무리되자 궁궐을 방어하는 내성이 축조되기 시작하였고, 내성은 제4석의 연대를 시축이 아닌 필역(畢役)으로 보아 566년에 완공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민덕식, 1992). 이후 586년에는 장안성으로 이도를 단행하였으며, 589년부터는 시가지를 두르는 나성을 축성하기 시작하고, 이후 북성도 수축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았다. 마지막 단계인 북성은 593년에 완공한 것으로 보았다. 552년에 시작하여 42년이 걸려 593년에 마무리된 것이다.
민덕식의 견해를 정리하면, 처음 장안성 축조 계획은 내성 축조와 관련된 것이었고, 이는 566년에 완성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내성이 축성된 지 21년 만인 586년에 신도인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기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도한 지 4년 만인 589년에 처음 계획에 없던 외성과 북성을 축조한 것이 된다(민덕식, 1992). 그렇다면 이도할 때의 장안성은 나성이 없는 도성이 된다. 이러한 다나카 도시아키와 민덕식의 축조 과정 인식은 이후 연구의 기본 축이 된다.

그림4 | 장안성 외성 성벽 전경(『조선고적도보』 2)
김희선도 장안성은 왕궁을 방어하는 내성이 먼저 축조되고 그 후에 시가지를 두르는 외성이 축조되었으며, 완성되는 데 42년이 걸린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 중간 과정은 우선 내성에서 확인된 각자성석을 바탕으로 하여 천도가 결정되고 부지 설정과 정비가 개시된 지 14년 만인 566년에 내성 축조가 시작되거나 완성되었다고 이해하였다. 다만 외성의 축조와 관련해서는 조금 유보적이었다. 기축과 기유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 552년과 593년 사이에 있는 569년의 기축년, 589년의 기유년 중 어느 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는 데 멈춘 것이다.
물론 어느 시기로 보든 실질적인 내성과 외성의 축조 시기는 552년의 장안성 축조 개시로부터 상당한 시간적 공백이 있다. 하지만 569년 기축년인 경우 566년 이후 3년 만이 되고, 589년이라면 23년이 지난 다음이 된다. 결국 이 부분은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데 전혀 다른 인식의 전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기존의 금석문 연구성과를 체계적으로 종합한 『한국금석문자료집(상)』 고구려편에는 각자성석 제1석을 569년으로, 제2석을 589년으로, 제3석을 569년으로 정리하였다.
앞에서 다룬 연구는 모두 각자성석의 대상으로 내성과 외성만을 검토하고 있다. 민덕식이 각자성석 제1석을 중성과 관련하여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추가적인 검토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중성을 각자성석과 본격적으로 연결하여 이해한 견해가 나왔다(심정보, 2006).
심정보는 제1석을 제2석, 제3석과 간지 차이만이 아니라 그 대상이 되는 성도 다른 것으로 보았다. 제1석을 외성이 아닌 중성의 서벽 구간을 축조하는 내용으로 본 것이다. 이를 토대로 새로운 축성 과정을 설계하였다. 우선 552년부터 566년까지는 성벽을 축조할 계획을 세우고 축성재료를 준비하는 기간으로 파악하였다. 성벽이 축조된 이후에는 성내에 건축재료를 반입하여 건물을 구축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따르기 때문에 그 사이에 궁궐과 묘사(廟社) 등을 건축하였을 것으로 본 견해(민덕식, 1989)를 받아들였다. 566년부터 569년까지는 내성을 축조하는 기간으로 파악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569년부터 중성 내의 관청건물을 완비하고 성벽을 축조하는 기간으로 보았다. 마지막으로 589년부터 593년까지 외성과 북성을 축조하는 기간으로 보았다. 공사가 끝나는 시점을 593년으로 파악한 것은 북성에서 발견되어 『평양속지』에 수록된 “본 성은 42년 만에 공사가 끝났다(本城四十二年畢役)”는 내용을 장안성 축조 시점인 552년부터 환산한 연도이다(심정보, 2006). 한동안 세키노 다다시와 다나카 도시아키의 중성고려축조론에 최희림만이 중성고구려축조론으로 대응하고 있던 상황에서 새롭게 심정보가 중성고구려축조론에 힘을 더한 것이다.
이렇게 축성 과정에서 중성의 존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정원철은 다시 새로운 방식으로 외성 쪽에서 나온 각자성석을 기축년과 기유년으로 나누어 보았다(정원철, 2010). 우선 그는 실물을 확인할 수 있는 제2석을 기유년으로 보는 것은 인정하면서, 더불어 금석학의 대가인 김정희가 제1석을, 역시 금석문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오경석이 제3석을 각기 기축년으로 본 것도 무시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즉 기유년과 기축년 두 가지가 모두 있었을 가능성도 크다는 견해를 제시한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기축년 간지의 제1석 출토 위치를 외성이나 중성이 아닌 내성으로 추정하였다. 즉 세 개의 각자성석을 모두 기유년으로 보면 내성의 축조와 외성의 축조 사이에 시간적 공백이 너무 큰데, 기축년인 569년에 내성부터 다시 축조되었다면 그 공백이 3년으로 준다. 정리하면 병술년인 566년에는 내성부터 성벽을 축조하기 시작하였으며, 기축년인 569년에 내성의 일부 구간이나 외성 남벽의 서쪽 구간 성벽을 쌓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장안성의 성벽은 고구려가 천도를 단행한 586년 이후에도 완성하지 못하였는데, 기유년인 589년에도 외성의 동쪽 구간으로 연결되는 성벽을 쌓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장안성의 성벽은 늦어도 566년 내성이 축조되기 시작하고, 이어서 외성은 589년 이후까지 쌓았으며, 593년 북성의 축조가 마무리된 착공으로부터 따지면 무려 42년이 걸린 대공사였다는 것이다. 이는 589년부터 593년까지 4년 만에 외성을 축조했다고 보는 견해와 매우 다르다. 나아가 중성의 존재도 상정할 필요가 없어져 버린다.
하지만 민덕식과 심정보에 의해 새롭게 부각되었던 중성의 존재는 이후 또 다른 연구를 통해 다시 부각된다(기경량, 2017). 여기서는 제4석에 의해 병술년, 즉 평원왕 8년(566년) 2월에 내성 축성이 시작되었으며, 외성은 제2석, 제3석에 의해 기유년, 즉 평원왕 31년(589년) 3월 21일에 축성이 시작되었고, 중성도 기유년으로 보는 제1석에 의해 같은 해 5월에 축성이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면 중성과 외성이 거의 동시에 축성되기 시작한 것이 된다. 민덕식은 외성과 함께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중성 남벽의 축조에 대해 전략적 고려가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민덕식, 2003). 한편, 제1석을 중성과 관련지어 본 것은 민덕식, 심정보와 같으나 그 출토 위치를 오탄으로 설정한 것은 심정보와는 달리 민덕식의 견해와 동일하다.
북성은 언제 축성을 시작하였나 하는 문제도 역시 논란의 대상이 되는데, 민덕식과 마찬가지로 북성의 축조를 마지막으로 장안성의 축조가 마무리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북성에서 나왔다는 42년이라는 기간을 전제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1964년 각자성석 제5석이 발견된 것을 시작으로 축성 과정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해석이 나왔지만 아직 장안성의 축성 과정을 확정할 정도로 의견이 모였다고 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들 연구는 내성의 축조 과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합의가 있지만, 외성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축조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단순히 외성의 성곽뿐 아니라 그 내부에 가로구획으로 불리는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방식의 도성 공간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축성 과정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 도성 공간이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그것이 아닌 매우 급박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인식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에서는 외성을 중심으로 장안성의 구조를 살펴보고, 그 구조가 같는 동아시아 도성제에서의 의미를 검토하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