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장안성 외성의 가로구획과 동아시아 도성제
3. 장안성 외성의 가로구획과 동아시아 도성제
1) 정전에서 가로구획으로의 인식 전환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외성 내부의 도시유적에 대한 인식은 기전유지(箕田遺址)이다. 『고려사』 지리지 평양부조에는 당시 평양에 기자 때 쌓은 성과 고려 성종 때 쌓은 성, 이렇게 두 개의 옛 성터가 남아 있는데, 이 중 기자 때 쌓은 성은 내부가 구획되어 정전(井田)으로 쓰였다고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양부고적조에는 외성에 기자가 구획한 정전유적이 잘 남아 있다고 하였다.
이 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1607년 한백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유적의 전체적인 형태를 분석하면서 전(田)자는 4구(區)로 되어 있고 각 구는 70묘(畝)이며, 종횡으로 4전 8구로 64구가 정정방방(正正方方)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파악하였다. 이를 은제(殷制)에 따른 역학(易學)의 〈선천방원도(先天方圓圖)〉와 같은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이 유적의 형태를 〈기전도〉라는 이름의 도면으로도 작성하였는데, 개별의 전을 동서로 긴 장방형의 구획으로 표현하였다. 이후 『평양속지』에는 이 유적에 대한 현황을 3묘9묘로(三畝九畝路)를 기준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인용한 『기자지』의 〈정전도〉에는 정방형으로 그려져 있어 이후 논란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 더하여 이전에는 법수(法樹)라는 나무를 세워 표식으로 삼았는데, 이후 목표(木標)가 없어진 것을 대신하여 1691년에 구획을 개리(改釐)하여 사우(四隅)에 돌을 세워 경계를 짓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 석표(石標)를 새로운 시각에서 본 것은 20세기 초 한국에 온 세키노 다다시였다. 1902년부터 시작된 그의 한국에 대한 유적 조사는(김란기, 2007) 당시 일본제국의 의도적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실시되었는데, 이 중 평양 지역에 대한 조사는 그가 한국에서 한 마지막 조사라고 할 수 있는 1926년까지 여러 차례 진행되었다. 그의 평양 지역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이후 건축학, 고고학, 문헌학, 그리고 지리학 연구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고구려 평양성과 장안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그 중 하나이다. 세키노 다다시에 대해서는 건축사 또는 고고학 관련 조사와 연구가 많았던 관계로, 평양 지역 유적에 대한 관심이 도성보다 고분에 쏠려 있다고 본 견해도 있지만(기경량, 2017), 그는 일본 고대 도성으로 박사를 받은 전공자였다.

그림5 | 장안성 외성 석표(『조선고적도보』 2)
세키노 다다시는 1899년 일본의 고대 도성인 헤이조쿄(平城京)의 헤이조(平城)궁지를 실제 조사하여 나라현에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1905년 추가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한 헤이조쿄 관련 논문을 시작으로 1907년에는 헤이조궁 대극전의 기단 위치를 발견하기에 이른다(奈良新聞, 1907). 같은 해 이를 바탕으로 연구를 확대하여 정식 논문을 발표하고(關野貞, 1907), 이를 바탕으로 1908년 도쿄제국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일본 도성제 연구수준에서 보면 세키노 다다시의 연구는 많은 부분에 오류가 있음이 증명되었지만, 일본에서 고대 도성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그가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도성제 연구의 최선봉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당시 자신이 조사·연구하였던 헤이조쿄와 헤이조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고구려 도성이었던 평양성을 조사하였던 것이다.
세키노 다다시의 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제기한 것은 기존의 정전 또는 둔전으로 이해되었던 외성 내부의 구획을 고대 도성의 조방제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1908년 공학박사를 획득한 이후 1909년 한국에 두 번째 유적 조사를 오게 된다. 이 조사에는 평양 지역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거기에서 고구려의 유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발견하고 한국에서 평양성에 대한 새로운 가설을 발표하였다(關野貞, 1909). 그 유적이 바로 기자정전유적이었다. 그는 당시 역사가들의 연구를 빌어 기자와 평양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여 기존의 기전유제를 비판하였다. 그보다는 당시 “평양의 외성 내 대동강에 면하는 곳에 종횡의 도로가 정연하게 지나며 바둑판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고 “이 정연한 도로는 매우 오래된 것인데 그 교차하는 네거리에 석표를 세워 그 넓이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도로는 종횡으로 넓은 도로와 좁은 도로를 번갈아 관통”시키는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세키노 다다시가 두 번째로 제기한 것은 현재의 평양성이 평원왕대의 장안성이고, 장수왕대의 평양성은 대성산성과 안학궁이라는 것이었다. 앞에서 평양 외성 지역을 답사하면서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던 조방제, 즉 가로구획과는 달리 이 패러다임은 완성하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 시작은 안학궁과 청암리토성에 대한 조사가 기본이었지만, 청암리토성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1911년 평양 지역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확인한 두 비석에서 출발하였다.
그는 목멱산 서쪽 8정(町) 지점에서 “皇宮基址 自浮碧樓大同江坊上一里至 光武三年立”이라는 내용의 비를, 청암리토성의 서쪽 대동강가의 구릉에서 “皇宮基址 自牡丹峰興盃後山上至 光武三年立”이라는 내용의 비를 각각 확인하였다. 그는 이 중 목멱산의 비를 목멱산황성이라고 정리하였는데, 이는 이후 평양동황성 추정지 중 하나가 되었다. 청암리토성 역시 이후 장수왕대의 평양성으로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 비를 세운 사람에 대해 특별한 역사적 가치를 부여하기 어렵다고 한 견해도 있지만(기경량, 2020), 실제로 이를 조사한 세키노 다다시는 기존 조선의 평양성 연구자들과 전혀 다른 탁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다(關野貞, 1928).
그런데 이 광무 3년은 일본의 건축기사였던 세키노 다다시가 헤이조궁지를 조사하고 나라현에 보고서를 제출하여 일본 도성제 연구의 근대적 연구가 시작된 해와 같은 1899년이다. 같은 해 대한제국의 평양 지역에 황궁지비라는 이름의 비석 2개가 평양성과 안학궁지가 아닌 각기 다른 두 곳, 현재 일부 연구자에 의해 중기 도성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는 청암리토성, 또 평양동황성으로 추정되는 목멱산황성에 세워진 것이다. 이는 당시 평양 지역에서 기존의 평양성과 안학궁지가 아닌 또 다른 곳에 도성이 존재했다는 인식이 이미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같은 시기 새롭게 논의되던 낙랑토성 문제와 함께 향후 고구려 도성제 연구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2) 장안성의 가로구획과 동아시아 도성제
세키노 다다시는 평양 지역을 답사하면서 외성의 내부 여러 곳에 일정한 간격을 가지고 세워진 석표를 발견하였다. 이는 1908년 통감부 건축기사였던 이마이즈미(今泉)가 실측한 평양 정차장 부근의 도면을 바탕으로 추가적인 분석을 통해 일본에서 자신이 조사하였던 헤이조쿄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1907년 치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고 일본 중세시기에 제작된 〈경북반전도(京北班田圖)〉와 각종 부지도(敷地圖) 등의 자료를 참고하고, 당시 일본 참모본부 육지측량부에서 제작한 지형도와 지적도를 바탕으로 헤이조쿄의 조방을 복원한 바 있었다. 그는 이때 사용하였던 방법론을 그대로 평양성에 활용하였다. 그리고 이들 도로유적을 척도 기준으로 비교 검토한 후 동후위(東後魏) 이후 고구려시대에 계획된 도성의 것으로 보았다. 나아가 자신이 헤이조쿄 복원에 비교 대상으로 설정하였던 당 장안성의 전신이라고 생각한 수의 대흥성을 고구려 도성의 비교 대상으로 상정하였다(關野貞, 1909).
이후 그는 추가적인 검토를 통해 가로구획에 대한 고증을 시도하였다(關野貞, 1914). 우선 이들 석표 사이의 간격이 큰 것은 곡척(曲尺)으로 약 46척, 작은 것은 약 17척이라는 것을 통해 가로구획을 확인하고, 이것이 일본의 고대 도성에서 조사하였던 도로와 같으며, 그 간격은 도로의 폭임을 추정하였다. 이 간격을 고구려척으로 환산하면 각기 40척, 15척의 정수로 구획되며, 따라서 이 석표는 고구려가 도성을 만들 때 도로 폭을 규정하면서 세운 것에서 유래한다고 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이 유적을 기자의 정전유적이 아닌 고구려의 도로 유적으로 확정하였다(關野貞, 1928). 그리고 1구획을 동위척 600척(약 213.6m)으로 보고 양측 도로 폭을 제외하면 사방 500척(약 178.19m)이 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 동위척은 이후 도량형에 대한 연구를 통해 고구려척으로 재인식된다(박찬흥, 1995).
이러한 세키노 다다시의 연구는 이후 북한에서도 받아들여졌는데, 채희국은 평천동 일대에서 고구려척으로 40척, 15척의 폭을 가진 동서와 남북으로 뻗은 구획 내 한 지점의 지하 70~100cm 깊이에서 자갈돌이 깔려 있는 유구를 발견하였다. 그는 이를 고구려 도시 유적의 하나인 도로유구로 보았다.
이후 중앙력사박물관의 조사를 통해 1953년에는 남북으로 거피문(영귀루)을 통과하는 대로(大路)의 석표 사이 폭은 약 13.8~13.9m였고, 함구문에서 중앙대로로 통하는 도로의 석표 사이 폭은 13.9~14m였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1954년 김책공업대학 청사 기초공사장에서 드러난 도로 폭은 12.6~12.8m이고, 도로 좌우측에는 약 60~70cm 폭의 배수로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최희림은 이곳에서 드러난 도로유구의 폭을 『평양속지』에 나오는 9묘로의 폭이라고 추정하고, 이 길을 나성의 서문인 다경문에서 동문인 고리문으로 뻗은 중앙대로라고 보았다(최희림, 1978). 이 조사에서는 3묘로나 1묘로를 찾지 못하였지만, 그는 9묘로의 폭이 12.6~12.8m인 것을 기반으로 한백겸이 말한 3묘로는 그의 1/3인 4.2m이고, 1묘로는 1/9인 1.4m라고 추정하였다. 정리하면 그는 장안성의 외 성가로구획이 9묘로는 고구려척으로 36척이고, 3묘로는 12척, 1묘로는 4척으로 설계되었다고 보았다. 또 한백겸이 그린 장방형구획을 동서 대 남북이 10 대 7의 비례로 보고 이를 중성벽에서 외성 안 동서대로까지의 실측치를 바탕으로 1개의 구역을 4등분한 소구획인 1구의 동서 폭을 120m, 남북 길이를 84m로 보았다. 결국 그는 한백겸의 〈기전도〉에 나온 구획과 도로의 개수를 실제 외성의 가로구획 모습과 동일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장방형의 가로구획으로 추정한 최희림과는 달리 리화선은 1930년대의 〈평양시가도〉를 바탕으로 평천리(平川里) 일대의 방(坊) 형태를 정방형으로 보았다(리화선, 1989). 한백겸의 그린 〈기전도〉는 개념도에 가까운 데 비해 〈평양시가도〉에 의하면 1930년대까지 정방형의 모습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방증 자료로 정방형으로 구획된 『평양속지』의 〈정전도〉를 들기도 하였다. 그는 한백겸의 1구(區)를 한 변의 길이가 85m인 작은 방으로 이해하고, 1전(田)을 한 변의 길이가 170m인 1방으로 보았다. 나아가 이를 고구려척으로 환원하여 작은 방은 250척, 방은 500척, 한백겸의 전(甸)을 리로 보고 2,000척으로 상정하였다. 이렇게 리화선은 한백겸의 구획 개념과 『평양속지』의 정전제 형태를 통합적으로 볼 수 있는 틀을 만들었다.
이후 한인호는 최희림과 리화선의 안을 통합하여 장안성의 지형 조건에 맞게 장방형과 정방형의 구획이 적절히 배합된 것으로 보았다(한인호·리호, 1993). 최희림과 같이 외성 안의 방 전체를 장방형으로 복원하면 정양문(正陽門) 서쪽 구간의 실측치와 맞지 않고, 리화선과 같이 정방형으로 복원하면 정양문-함구문(含毬門) 구간의 실측치와 맞지 않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인호는 정양문-함구문 구간에는 동서 장방형의 방으로 1구가 동서 120m, 남북 84m이며, 정양문 서쪽 구간에는 정방형의 방으로 1구의 한 변이 84m인 것으로 보았다. 한인호는 이렇게 외성의 가로구획을 복원하고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이러한 가로구획이 중성에도 있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다양한 견해는 일본의 가메다 히로시에 의해 조금 더 정리된다(龜田博, 2000). 우선 1930년대보다 이전 자료인 1903년에 발간된 『高句麗時代之遺蹟圖版(上冊)』의 부도(付圖)를 바탕으로 평천리 일대의 가로구획을 동서 폭 182m, 남북 길이 181.5m의 정방형 형태로 산출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대로(大路) 약 14m, 중로(中路) 약 5m, 소로(小路) 약 1m로 도로 폭이 정형화되어 있다는 점도 추정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 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고구려 장안성과 관련된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여 연구의 방향을 대폭 변화시켰다. 고해상, 고화소의 위성사진과 항공사진을 제공함으로써 사진측량학(photogrammetry)적인 연구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또한 구글 등에서 제공하는 GIS 기반 위성사진인 구글어스를 바탕으로 장안성에 대한 보다 정확한 수치를 기반으로 한 복원이 시도되었다(정원철, 2010). 2014년에는 구글어스에 추가하여 새롭게 한국의 V world가 제공하는 API를 기반으로 평양 지역의 지형을 디지털로 구현하고 이를 시기별 사진 분석과 기존의 각종 도면 등 지리정보를 통합하여 평양 지역의 고지형을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가로구획 등을 포함한 장안성 1차 추정 복원도가 제시되었다(양정석, 2014). 이를 통해 기존의 조사와 연구를 통해 이루어진 장안성 외성의 가로구획에 대한 추정이 상당히 정교한 수준으로 이루어졌음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장안성 외성의 가로구획은 어떻게 조성될 수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어디서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다.
정전유지가 아닌 고구려 장안성으로 인식하고 이 장안성의 축조에 중국의 도성제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처음 추론한 연구자는 세키노 다다시였다(關野貞, 1928). 그는 수의 대흥성이 장안성의 모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후 후지타 모토하루는 수가 아닌 당 장안성의 영향이라고 주장하였다(藤田元春, 1929). 이와 달리 야모리 가즈히코는 평원왕 28년에 이루어진 장안성의 축조를 처음으로 중국식 나성(羅城), 즉 도시위곽(都市囲郭)을 채용한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장안성 축조 계획은 기존의 고구려 산성과 북위 낙양 도성 축조 계획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도성제로서 중요한 특징을 가진다고 보았다(矢守一彦, 1962).
이후 다나카 도시아키는 한국의 고대 삼국의 도성제를 검토하면서 고구려 장안성은 북위 낙양성을, 백제 사비성은 남조 건강(建康)을, 그리고 신라 왕경의 개량은 당 장안을 모델로 하였다는 논지를 전개한 바 있다(田中俊明, 1991). 이에 대해 센다 미노로는 고대 한국에 있어서 중국형 도성의 성립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千田稔, 1991).
6~7세기 동아시아 도성제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가로구획된 개별 공간, 즉 방의 존재이다. 방의 형태는 동서 장방형이나 정방형 중 어느 한 형태로 다양하게 설정되었고 그 규모 또한 각기 다르게 설정되었다. 고구려 장안성의 경우 이 방의 형태가 현재는 정방형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 장안성의 방은 일정한 크기로 분할되어 있는데, 그 형태가 전(田)자형의 4분할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방식은 북위 낙양성, 신라 왕경, 그리고 일본 후지와라쿄(藤原京)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당 장안성과는 다르다. 이들 도성의 도로는 각각 대로, 중로, 소로로 유형화되었고, 도로의 규모 또한 일정한 유사성을 나타내고 있다. 게다가 고구려 장안성, 신라 왕경, 그리고 일본 후지와라쿄에서는 고구려척을 구획의 기준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고구려 장안성, 신라 왕경, 일본 후지와라쿄에는 실제적인 중심대로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같은 양상은 북위 낙양성에서도 확인되는데, 이러한 점이 주작대로가 있는 당의 장안성과 확연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연구를 통해 가로구획방식에 있어서도 당 장안성과 여타 도성 간에 일정한 차이점이 확인되었다(김희선, 2006). 북위 낙양성을 비롯한 고구려 장안성, 신라 왕경, 일본 후지와라쿄는 도로 폭을 포함하여 방을 구획함으로써 도로의 너비에 따라 방의 실제 면적이 달라졌던 것이다.
한편 고구려 장안성에는 정연한 가로구획방식 외에 나성도 새롭게 만들어졌다. 이 특징을 북위 낙양성과 연결하여 이해한 견해도 이미 제기된 바 있다. 그런데 장안성에 채용된 나성은 중국의 나성과는 성격이 다르며 경관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백제 사비도성의 나성과 친연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사비도성의 축조가 고구려 장안성보다 이르기 때문에 영향관계를 논한다면 백제의 영향이라는 측면도 간과하기 어렵다. 장안성의 나성이 수의 침입을 대비한 것이라면 이를 중국 도성제의 영향으로 보는 것보다는 고구려 산성 축조의 전통이나 백제 나성과 관련하여 보는 것이 더 타당할 수 있다.
이와는 다르게 최근 고구려 중기까지의 도성제를 평지성과 산성의 세트관계로 이해하였던 것을 잘못된 통설이라고 부정하는 견해가 나온 바 있다(기경량, 2017; 임기환, 2021). 이러한 견해에서는 장안성의 외성이 만들어질 때 가로구획도 함께 만들어졌기 때문에 시간상으로 볼 때 수 대흥성의 영향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 수의 영향이 있기 전까지 가로구획이 확인되지 않는 고구려의 도성제는 진정한 의미의 중국적 도성제를 적용하지 못하였다고 보았다. 이 견해는 기본적으로 고구려사의 성격을 그들의 고유 문화를 상당히 오랜 기간 유지하고 있다고 보는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강진원, 2015). 고구려 도성제에 있어서도 과거의 모습이 6세기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는데, 고구려 중기까지 고구려 도성은 일종의 성채(城砦)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 왕도의 의미가 한정된다는 것이다(기경량, 2017). 이는 장안성 외성이 축조되기 이전까지 도성제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정체적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어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한편, 최근 외성과는 다른 종류의 가로구획을 중성에서도 확인하였다는 연구가 나온 바 있는데(양정석, 2014), 이는 고구려 당시 중성의 존재와 관련하여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하였다(기경량, 2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