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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4. 후기 도성으로서 장안성의 의미

4. 후기 도성으로서 장안성의 의미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평원왕 28년(586년) 도읍을 평양성에서 장안성으로 옮겼다. 이로부터 668년 멸망할 때까지 장안성은 70여 년간 고구려의 수도로 운용되었다. 고구려사와 같이 700년이 넘는 긴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기를 크게 몇 단계로 나누어 구분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기구분에는 도성의 천도를 기준으로 시기를 나누는 경향이 많은데, 이전 일본 연구자들의 경우 비류시대·환도시대·평양시대로 나누거나(末松保和, 1962), 국내성을 전기 도시, 청암리토성·안학궁·평양성(장안성)을 후기 도시로 나누기도 하였다(藤島亥次郞, 1980). 이후 고고학적인 성과를 바탕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졸본시대, 국내성시대, 평양·장안성시대로 구분하기도 하였다(東潮·田中俊明, 1995). 이러한 일본 연구자들과는 별도로 중국 연구자들도 졸본 지역을 초기 도성, 집안 지역을 중기 도성, 그리고 평양 지역을 후기 도성으로 나누어 보았다(魏存成, 1985).
이들 연구는 두 시기로 나누거나 세 시기로 나누는 등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평양 천도를 시기구분의 중요한 획기로 인식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조금 더 세분한 경우도 평양 천도를 기본으로 하고 그 아래 분류에서 전기 평양성과 후기 평양성으로 나누어 보는 견해(田中俊明, 2004)가 일반적이다. 오랜 기간 이어온 이러한 견해는 지금도 평양 천도를 세 번째 도성(권순홍, 2019), 또는 후기 왕도(기경량, 2017)로 이해하는 견해 등을 통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으로 보면 도성을 같은 평양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평양성에서 장안성으로 옮긴 것은 장수왕대 도성을 평양성으로 옮긴 것에 비하면 그 중요도가 시기를 구분할 정도는 아니게 된다.
이러한 인식과는 달리 국내성과 안학궁성을 하나의 틀에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일찍부터 제기된 바 있다(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1975). 고구려 발전에서 도성의 역할과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초기와 후기 도성으로 나눌 수 있는데, 국내성과 안학궁이 초기 도성이며, 평양성(장안성)이 후기 도성이라는 것이다. 이를 조금 더 세분하여 도성 위치에 따라 흘승골성기, 국내성기, 안학궁성기, 평양성(장안성)기, 이렇게 네 시기로 구분한 연구도 있다(민덕식, 1989). 여기서는 기존에 모호하게 설정되었던 홀승골성(紇升骨城) 단계를 조기 도성으로 구분하면서 국내성과 안학궁성을 각기 전기와 중기 도성으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견해는(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민덕식) 기본적으로 평양 천도를 대구분으로 하고 그 아래 전기 평양성과 후기 평양성(장안성)을 세부구분으로 하는 위 견해들과 달리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의 도성인 평양성(장안성)을 온전히 하나의 시기인 후기 도성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고구려 도성의 시기구분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던 평양 천도와 다른 기준으로도 시기를 설정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렇게 시기구분을 할 경우 각기 시간대의 폭은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고구려 정치체제의 변천 과정을 초기 또는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보는 시기구분(노태돈, 1999; 임기환, 2004; 김현숙, 2005)과 매우 유사하게 된다. 이와 연결하여 보면 중앙집권적 관료체계가 성립하였던 중기는 국내성과 전기 평양성시기가 되는데, 도성의 위치가 크게 변화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그동안의 논의 과정에서 모호하게 다루어졌던 평양동황성의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부각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 후기, 즉 양원왕부터 보장왕 시기(노태돈, 1999),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이완(김현숙, 2005) 또는 귀족연립체계(임기환, 2004)로 이해되는 시기의 도성이 착공까지 포함한다면 장안성이 된다. 이렇게 볼 수 있다면 고구려 도성의 연구 과정에서 평양 천도를 중심으로 한 시기구분과는 별도로 장안성을 기존의 왕도와는 다른 새로운 의미의 도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견해(기경량, 2017)도 비로소 새롭게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이들 연구는 왜 장수왕대에 새롭게 만든 수도 평양성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바로 옆에 장안성이라는 신도시를 조성하였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으로 정치적인 의미뿐 아니라 시야를 외부로 돌려서 비슷한 시기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였던 백제 사례와의 비교를 통해서도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대성산성과 안학궁을 중심으로 한 평양성이나 공산성과 그 주변을 중심으로 한 백제의 웅진도성에서는 해결할 수 없었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랜 기간 축성과 도시공간의 구축이라는 준비 기간을 거쳐 새롭게 장안성과 사비도성으로 천도하였던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 후기 도성인 장안성의 축조와 이도가 갖는 의미를 대내적으로 정치적 상황이나 대외적으로 군사외교적인 상황뿐 아니라 보다 복합적인 방향에서 살펴보는 것은 앞으로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최근 도성의 공간구성요소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한 경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오기 시작하였다(권순홍, 2020; 김현봉, 2021). 이러한 연구 역시 발굴조사 등 실제적인 조사가 쉽지 않은 현재 상황에서 장안성의 공간적 특징을 보다 명확하게 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장안성시기 평양 지역의 고지형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분석도(허의행·양정석, 2021) 향후 장안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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