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불·도 삼교와 정치변동
1. 유·불·도 삼교와 정치변동
1) 고구려 후기의 불교
4~6세기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았다. 유교와 불교를 받아들여 통치사상을 확립하고 요동과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다. 문자명왕을 이어받은 안장왕 때까지만 해도 전성기가 계속 이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고국양왕-광개토왕-장수왕-문자명왕-안장왕으로 이어지는 왕위 직계가 안장왕 때 무너졌다. 안장왕의 다음 왕위는 동생 안원왕에게 넘어갔다. 『삼국사기』는 안장왕이 자기에게 아들이 없어 키가 크고 도량도 넓은 동생을 사랑했다고 하면서 왕위 계승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서술하였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백제본기』를 인용하여 531년 3월 고(구)려가 안(안장왕)을 시해했다고 하였다.
고구려는 371년 백제와의 전쟁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 광개토왕은 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라는 교서를 내리고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였다. 평양 천도 이후 장수왕은 정릉사를 창건하고 문자명왕 때 금강사를 창건하기도 했다. 안장왕 이후 구체적인 절의 창건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여러 고구려 불상을 통해서 고구려 불교신앙을 유추해볼 수 있다.
고구려를 대표하는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은 기미년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439년(장수왕 27년) 또는 539년(안원왕 9년)에 제작된 불상으로 추정되는데(문명대, 2003), 보통 539년으로 보고 있다. 연가(延嘉) 원년은 533년(안원왕 3년)이다. 안장왕의 3년상이 끝나는 해에 연가 연호를 반포한 것으로 여겨진다. 불상의 광배에는 ‘고려국낙랑동사’에서 40여 명의 승려들이 1,000개의 불상을 만들어 유포하였으며, ‘인현의불(因現義佛)’이라 쓰여 있다. 인현의불은 천불 가운데 29번째 부처이다.

그림1 |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고려국’의 ‘고려’는 고구려를 말한다. 고구려는 광개토왕·장수왕 때를 전후하여 ‘고려’로 나라 이름을 바꾸었다고 보기도 한다(조경철, 2018). ‘동사(東寺)’는 원래 절 이름이 아니라 광개토왕이 세운 9개의 절 가운데 동쪽에 세운 절의 별칭인 것 같다. 형의 뒤를 이은 안원왕은 왕자 평성을 태자로 임명하고 광개토왕이 세운 동사를 기반으로 하여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과 같은 불상 1,000개를 만들어 왕실과 국가의 번영을 빌었다. 천불신앙은 1,000명의 부처가 국토 어디에나 있듯이 왕의 권위도 나라 어디에나 있다는 걸 상징한다. 그러나 안원왕의 다음 왕위는 순조롭게 평성(양원왕)에게 이어지지 않았다.
(1) 추군과 세군의 권력다툼
안원왕의 다음 왕위는 양원왕에게 넘어갔지만 순조롭지 않았다. 『일본서기』에서 인용하고 있는 『백제본기』에는 추군과 세군의 치열한 왕위 계승 다툼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 긴메이(欽明)천황 6년(545년) 12월 20일(갑오) 고려국(고구려국)에서 세군과 추군이 궁궐 문 앞에서 북을 치며 싸웠는데 세군의 자손들이 거의 살해되었다. 12월 24일(무술)에 박곡향강상왕(안원왕)도 죽었다.
해를 넘긴 546년에는 더 자세한 사항을 싣고 있다.
정월 3일(병오)에 중부인의 아들을 왕으로 삼았는데 나이가 8세였다. 박왕(안원왕)에게는 세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정부인에게는 아들이 없고 중부인과 소부인에게 아들이 있었다. 중부인의 아들이 나중에 세자가 되었는데 그 장인 쪽 사람들을 추군이라고 부르고 소부인 장인 쪽을 세군이라고 불렀다. 박왕이 병에 걸리자 추군과 세군이 각기 자기 부인의 아들을 왕위에 세우려고 다투었는데 이때 죽은 세군의 수가 2,000여 명에 달했다.
양원왕이 추군과 세군의 치열한 싸움 과정에서 즉위하였기 때문에 이때 입은 정치적 타격은 이후 고구려의 정치와 사상 등 여러 방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양원왕 때 이후 고구려의 정치와 사상계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추군과 세군의 정체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고구려의 귀족들이 크게 둘로 나눠 싸웠다면 당시 대립되는 두 그룹을 설정해야 한다. 그럴 때 맨 처음 떠오르는 것은 국내성 세력과 평양 세력이다. 장수왕의 평양 천도 이후 주류는 평양 세력이었지만 국내성에도 나름대로 세력이 남아 있었고 국내성 출신의 평양 세력도 상당수 포진하고 있었을 것이다.
추군은 평양을 근거지로 한 귀족이고 세군은 국내성을 기반으로 한 세력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안원왕 다음의 왕위 계승을 놓고 평양을 근거지로 한 중부인(中夫人) 세력인 추군과 국내성을 기반으로 한 소부인(小夫人) 세력인 세군이 격돌했는데, 평양을 근거지로 한 세력이 이겼다고 본 것이다. 양원왕 13년(557년) 10월 환도성의 간주리(干朱理)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또한 세군의 환도성(국내성) 세력이 추군의 평양성 세력을 밀어내고 세력을 만회하기 위한 반란으로 보고 있다(임기환, 1992). 두 세력을 평양성과 국내성 세력으로 볼 수는 있는데, 왜 이 두 세력을 추군과 세군이라 불렀는지는 설명하고 있지 않다.
추군과 세군을 정치사상적 입장에서 고찰한 연구가 있다. 추군과 세군이 겉으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외척 간의 싸움이지만 다른 한편 내부적으로는 정치 지향의 다툼이라는 것이다. 즉, 세군은 한문식(중국식) 군주체제를 지향한 반면, 추군은 고구려식 욕살(褥薩)체제를 추구하는 입장을 가졌던 것으로 보았다. 왕위계승전에 머물지 않고 고구려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결정하는 싸움으로 파악하였다. 추(麤, 麁)는 거칠다는 의미이고 세(細)는 가늘고 세련된 의미로 파악하여 고구려식 욕살체제를 지향하는 세력을 추군이라고 불렀고 한문식 군주체제를 지향하는 세력을 세군이라 불렀다(주보돈, 2003). 추군과 세군의 뜻풀이를 포함하여 고구려식과 한문식으로 나눈 것은 타당하나, 실제로 고구려에 ‘고구려식 지향 세력’과 ‘한문식 지향 세력’이 대표적인 두 세력이고 두 세력이 대립적이었는지는 논의가 필요하다.
추군이 평양 세력이고 세군이 국내성 세력이거나, 추군이 고구려 지향이고 세군이 한문(중국) 지향이라고 하면,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고구려 지향은 국내성에 가깝고 중국 지향은 평양에 가깝기 때문이다.
한편, 추군과 세군을 평양과 국내성으로 보긴 하는데 반대로 추군을 국내성, 세군을 평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추군과 세군에 관한 내용은 『일본서기』에서 인용하고 있는 『백제본기』에 나오므로 추군과 세군이란 용어를 고구려인의 관점이 아닌 백제인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하면서 추는 멀다, 세는 가깝다는 뜻이 있으므로 백제의 입장에서 멀리 위치한 국내성이 추군이고 가까운 평양이 세군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불교적 의미도 덧붙였다. 먼저 『일본서기』에는 안원왕이 ‘박국향강상왕(狛國香岡上王)’ 또는 ‘박곡향강상왕(狛鵠香岡上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여기에서 곡(鵠)은 부처가 열반한 곡림(鵠林)이고 여기에 향(香)을 붙인 곡향이란 의미는 ‘부처에게 향을 태우면서 기원을 드리는 의식’으로 풀었다. 그래서 안원왕이 곡향왕이란 불교식 이름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곡향왕의 뒤를 잇기 위해 싸운 추군과 세군에게서도 불교적 의미를 찾았다. 보통 군(群)이 글자의 앞에 오기 때문에 추군과 세군도 글자 순서를 바꾸어 군추와 군세로 볼 수 있고 불교 경전에 군추와 군세가 나온다고 하였다(남무희, 2007).
그런데 군추와 군세를 불교적 용어와 연관시켰지만 군추와 군세 둘 다 같은 경전 또는 같은 구절에 대구로 동시에 나오는 것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군(群)이 들어간 추군과 세군을 찾을 것이 아니라 군이 공통으로 들어가 있으므로 추와 세가 서로 대립 또는 비교되는 불교용어를 찾아야 한다. 『십지경론』에 보면 일체 중생에게는 추세차별(麁細差別) 등 6종의 차별이 있다고 한다. 추세차별의 추는 유색(有色)을 말하고, 세는 무색(無色)을 말한다. 『십지경론』에는 이 밖에 추와 세를 대립 또는 비교하는 미세심염해(微細心念害)와 추중신행뇌해(麁重身行惱害), 일세이추(一細二麁) 등의 용례가 여럿 보이고 있다.
『대지도론』에는 ‘추인즉추죄(麁人則麁罪), 세인즉세죄(細人則細罪)’라고 했는데, 추인은 소승행자, 세인은 대승행자로 보기도 한다. 추죄와 세죄의 용례에서 보듯 추와 세는 정도 차이가 있지만 모두 덜어내야할 번뇌이다. 『대신기신론』에는 추를 상응심(相應心), 세를 불상응심(不相應心)으로 풀었다. 추와 세의 전개상황을 설명하면서 추중지추(麁中之麁)를 범부의 경계, 추중지세(麁中之細)와 세중지추(細中之麁)를 보살의 경계, 세중지세(細中之細)를 부처의 경지라고 했다.
추와 세의 비교는 『십지경론』(麤細分別), 『대지도론』뿐만 아니라, 『대승의장』(麤細分別), 『대승열반경의기』(麤細分別), 『인왕반야경소』(麤細分別) 등 광범위하게 보인다. 추군과 세군의 ‘추’와 ‘세’가 불교에 나오는 용어라는 것을 고구려 사람들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추세차별’이란 용어가 나오는 『십지경론』과 추인(麁人)과 세인(細人), 추죄(麁罪)와 세죄(細罪)가 나오는 『대지도론』은 고구려의 승상 왕고덕이 의연을 북제에 보내 법상에게 물어보라고 한 경전으로 고구려에서도 널리 읽힌 경전이었다.
안원왕-양원왕의 왕위계승전과 추군, 세군과 관련된 내용은 이문진이 편찬한 『신집』이나 고구려 승려 도현이 편찬한 『일본세기』 등 고구려 관련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반면, 『일본서기』에서 인용한 『백제본기』에는 보인다. 특히 추군과 세군이란 용어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추군과 세군은 자칭이 아닌 타칭일 수도 있다. 추군이나 세군 특히 ‘추’와 같은 부정적인 단어를 추군 세력의 지원을 받은 양원왕이나 양원왕의 계보를 잇는 이후 왕대에서 스스로 사용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백제의 관점에서 고구려의 중부인과 소부인 사이에서 벌어진 권력투쟁을 비하하는 측면에서 두 세력에 부정적인 의미가 들어간 추군과 세군이란 이름을 붙였을 수도 있다. 『일본서기』에서 인용한 『백제본기』에서 중부인 세력을 추군, 소부인 세력을 세군이라 하면서 싸움 과정을 설명한 것은 백제의 부정적인 관점이 들어간 서술방식으로 여겨진다.
물론 고구려에서 이미 명명한 것을 『백제본기』에서 그대로 실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긴 쪽 세력을 부정적인 의미가 담긴 추군이라 명명한 것에서 고구려 안에서도 이 시기 정변에 대한 반성의 의미가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불교의 두 그룹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분되는지는 추군과 세군이란 용어만 갖고 알 수는 없고 이후 전개되는 고구려 불교사의 전개 과정과 결부시켜 살펴보아야 한다.
추군과 세군이 불교에서 온 용어라면, 안원왕의 장지 이름이 들어간 왕호인 박곡향강상왕의 곡향도 불교적 의미를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앞서 곡향을 ‘부처에게 향을 태우면서 기원을 드리는 의식’이라 하면서 곡향왕을 불교식 왕명으로 풀었는데, 이보다는 ‘강상’이라는 장지 앞에 ‘곡향’이란 부처의 열반을 상징하는 이름을 붙여 마치 왕의 죽음을 부처의 죽음처럼 상징하는 효과를 의도했을 수도 있다. 안원왕은 인현의불(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등 천불상을 만들어 널리 유포한 왕이기도 하다. 함경남도 신포에서 발견된 금동판 명문에는 천손(先王)을 미륵의 도솔천에서 만난다고 하였다. 왕이 묻히거나 죽어 머무는 곳을 곡림이나 도솔천 등 불교적 의미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2) 혜량의 신라 망명
신라 거칠부는 머리를 깎고 사방을 돌아다니다 염탐하기 위하여 고구려 땅에 들어가 혜량을 만나 가르침을 청하였다. 혜량은 거칠부에게 다시 안전하게 신라로 돌아갈 길을 알려주며 나중에 군사를 거느리고 올 때 자신을 부탁한다고 하였다. 백제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가 한강의 하류 지역을 차지할 때 신라의 거칠부는 군사를 이끌고 한강 상류에 속하는 죽령 바깥, 고현 이내의 십군을 취하였다. 이때 혜량이 무리를 이끌고 나왔다. 거칠부가 말에서 내려 군례(軍禮)로 맞이하였다. 혜량은 거칠부에게 “지금 우리 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바라건대 나를 그대 나라로 데려가기 바란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거칠부가 혜량을 신라에 데리고 왔고, 진흥왕은 그를 국통으로 삼았다. 혜량은 신라의 불교계를 이끌어 나갔고 백고좌회(百高座會)와 팔관회(八關會)도 처음 시행하였다.
혜량이 신라로 망명한 해는 551년이다. 이는 고구려 안원왕이 545년 추군과 세군의 싸움 중에 죽고, 추군의 양원왕이 즉위한 지 6년째 되는 해이다. 혜량이 거칠부를 따라 신라로 망명한 해가 551년이지만 이미 이전에 거칠부가 혜량을 찾아갔을 때부터 혜량은 고구려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는 545년 추군과 세군의 싸움이 벌어지기 전이었다.
『삼국사기』 거칠부전에는 거칠부와 혜량의 첫 번째 만남을 서술한 다음, 거칠부가 545년(진흥왕 12년) 『국사(國史)』를 편찬했다는 기사가 이어지고 551년 기사에 거칠부가 혜량과 함께 신라로 돌아왔다고 서술하고 있다. 545년 추군과 세군의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 혜량이 망명의 뜻을 비쳤음을 알 수 있다. 아마 545년 이전에 이미 고구려 불교계 내에 갈등이 쌓여 있었을 것이다. 혜량이 ‘지금(551년) 우리 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져 멸망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 것은 바로 545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추군과 세군의 싸움이 벌어져 2,000명 이상 사상사가 나온 사건의 여파가 불교계 내에서 551년까지 계속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551년 백제와 신라가 북진하고 있는 외적 상황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혜량이 고구려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졌던 승려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신라 거칠부가 혜량의 명성을 듣고 찾아갔고 그가 신라로 망명하자 신라 불교의 총책임자인 국통에 임명된 것을 보면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던 승려로 추정된다. 혜량의 고구려 불교에서의 영향력과 관련하여 그가 주로 활동한 지역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551년 거칠부가 혜량을 만난 곳은 거칠부 등이 취한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의 한강 상류 유역이다. 일부에서는 혜량이 머물고 있었던 지역을 구체적으로 〈충주고구려비〉가 세워진 중원(충주)으로 보기도 한다. 551년 이전 거칠부가 정탐을 위해 승려로 가장한 다음 고구려에 잠입하여 혜량의 문하에 몰래 있었을 때 위험한 중앙보다는 지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거칠부가 정탐한 지역도 나중에 신라가 쳐들어간 지역이었을 것이라는 점, 신라군이 침공하였을 때 혜량 자신의 안위를 염려하였다면 중앙보다 한강 유역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 그리고 당시 불교사원이 주로 수도나 주요 거점이 되는 성에 세워졌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혜량이 주석하였던 사원은 한강 상류 지역 중 국원성(충주)에 있지 않았을까 추정하였다(노태돈, 1999). 처음에는 중앙무대에서 활약하였던 혜량이 545년 정변 이후 평양에서 충주에 내려왔다고 보기도 한다(정선여, 2007). 거칠부가 처음 혜량을 만났을 때와 다시 만났을 때의 장소를 같은 한강 상류로 보면서 거칠부가 이 지역 지리에 익숙하여 죽령 바깥, 고현 이내의 십군을 쉽게 취할 수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주보돈, 2014).
그런데 거칠부가 545년 이전에 처음 혜량을 만난 곳과 551년에 만난 곳이 같은 지역이었을까. 545년 이전에 만났을 때는 평양 부근이었고 551년에 만났을 때는 한강 상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529년 이전 금강산 장안사에서 거칠부와 혜량이 처음 만났다고 보기도 한다(김수진, 2019).
『삼국사기』 거칠부전에는, 거칠부가 두 번째로 혜량을 만났을 때 “지금 우연히 서로 만났다(今邂逅相遇)”라고 하였다. 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주몽이 비류수를 따라 올라가다 송양왕을 만났는데 송양왕도 예전에 보지 못한 사람을 만났다고 하면서 ‘우연히 서로 만났다(邂逅相遇)’라고 하였다.
거칠부와 혜량의 두 번 만남이 같은 지역에서 이루어졌다면 혜량의 은혜를 입었던 거칠부의 입장에서는 그를 직접 찾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거칠부는 ‘우연히’라고 하였다. 혜량을 만날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 왜 우연이라고 했을까. 평양 혹은 그 근방에 머무르고 있던 혜량이 직접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551년 한강 상류에 진출한 거칠부를 찾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거칠부가 처음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까지 찾아가 혜량을 만났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지만 거칠부가 승려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김춘추가 고구려에 잡혀 있을 때 고구려 첩자인 승려 덕창(德昌)은 신라 경주에 머물면서 김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고구려는 추군과 세군의 다툼 이전에 불교계의 갈등이 존재했고 545년 추군과 세군의 싸움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혜량을 중심으로 한 불교세력은 주변 상황에 따라 다른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러다 551년 한강 유역이 신라와 백제에 넘어가자 혜량은 그의 무리와 함께 거칠부를 따라 신라로 망명하게 되었다. 혜량은 신라로 건너가 백고좌회와 팔관회를 시행하였다. 이로 보아 혜량은 고구려에서 활동했을 때도 백고좌회와 팔관회를 시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고좌회는 『인왕경』에 근거한 법회로 100명의 승려를 모시고 100일 동안 국가의 안녕을 위해 여는 법회를 말한다. 팔관회는 하루 동안 신도들이 8계를 지키는 것을 말하는데, 삼국시대에는 전몰장병의 위령제적 성격이 강했다. 신라 팔관회의 경우 혜량에 의해 551년 처음 실시되었고 572년(진흥왕 33년) 전몰장병을 위하여 외사(外寺)에서 7일 동안 개최된 적이 있다.
추군과 세군의 싸움으로 2,000여 명의 사상사를 내는 등 정치적 혼란과 불교적 갈등이 폭발하였지만, 양원왕이 즉위한 이후 이를 수습하기 위한 여러 조처가 시행되었을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인왕경』에 근거한 호국법회 성격의 백고좌회와 추군과 세군의 싸움으로 죽은 사람들에 대한 위령제적 성격의 팔관회도 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혜량은 이러한 고구려의 백고좌회와 팔관회를 신라에 보급시켰다.
(3) 왕고덕과 의연의 북제 구법
545년 추군과 세군의 싸움, 551년 한강 유역 상실과 혜량을 비롯한 불교계의 이탈, 557년 환도성의 반역 등 당시 고구려는 내우외환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안장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안원왕도 추군과 세군의 싸움 와중에 죽고 추군의 지원을 받은 양원왕이 왕위에 오르는 등 왕위 계승이 불안했다. 다행히 양원왕의 다음 왕위는 그의 맏아들인 평원왕에게 순조롭게 넘어갔다. 평원왕 때 대승상 왕고덕은 신심이 깊은 재가불자였다. 왕고덕은 대승의 가르침을 받들었고 부처의 가르침이 나라 곳곳에 퍼지기를 바랐다. 대승상은 막리지와 같은 높은 관직을 말하며 왕고덕의 성씨가 왕씨인 점을 고려하면 평양 천도 이후 새롭게 대두된 중국 또는 낙랑 계열의 인물로 추정된다. 왕씨로 유명한 인물은 거문고를 잘 다룬 재상 왕산악이 있다.
왕고덕은 승려 의연으로 하여금 중국 북제의 업성(鄴城)에 가서 법상에게 불교의 여러 문제에 대해 알아오게 하였다. 첫째, 석가모니가 열반에 드신 지 지금까지 몇 년이 되었나? 둘째, 천축의 불교가 언제 한(漢)에 들어왔나? 셋째,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었을 때 어느 황제였고 연호는 무엇이었나? 넷째, 제(齊)와 진(陳) 중 어느 나라에 먼저 불교가 들어왔나? 다섯째, 이후로 지금까지 얼마나 지났으며, 몇 명의 황제를 거쳤나? 여섯째, 『십지론』, 『지도론』, 『지지론』, 『금강반야론』 등을 쓴 사람과 그 내용은 무엇인가? 등에 관한 것이었다.
북제의 법상을 만나러 간 의연의 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해동고승전』에 의하면,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계율을 닦았으며, 유교와 현학(도교)도 널리 공부하여 도를 닦는 사람이나 속인 할 것 없이 모두 찾아왔다고 한다.
의연이 찾아간 북제 정국사(定國寺)의 법상은 경전에 능통할 뿐 아니라 계율을 강조하여 도통(都統)에 임명되기도 했다. 40년 동안 불교 교단의 총책임자가 되어 그가 통솔한 승려만 200만 명이었다. 특히 문선제는 일찍이 땅에 엎드려 머리를 풀어헤치고 법상으로 하여금 밟고 가게 하기도 하였다. 문선제는 법상을 대승통에 임명하는 한편 국사로 추대했다. 황제와 황후, 여러 중신이 그에게 보살계를 받았다. 법상의 행적은 널리 알려져 그 명성이 멀리 외국에까지 전해졌다. 법상의 스승 혜광 역시 북제의 승통이었고 『사분율(四分律)』을 중시하였다.
법상은 의연에게 다음과 같이 답해주었다.
석가는 희씨의 주나라 소왕 24년 갑인년에 출생했고 19세에 출가하고 30세에 깨달았다. 49년 동안 세상에 계시다 열반에 들었다. 열반 이후 제나라 무평 7년(576년) 병신년에 이르기까지 1,465년이 지났다. 불법이 중국에 들어 온 때는 후한 명제 영평 10년(67년)이다. 이후 위나라와 진나라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_ 『속고승전(續高僧傳)』
고려 각훈이 지은 『해동고승전』에는 여러 논서의 저자와 번역자 등에 대한 답변이 덧붙여져 있다. 『지지론(보살지지론)』은 아승가(阿僧伽,無着) 비구가 미륵보살에게서 받은 것으로, 진나라 때 담마참(曇摩讖, 曇無讖)이 번역하였고, 『지도론(대지도론)』은 용수보살이 지은 것으로 진나라의 구마집파(鳩摩什波, 鳩摩羅什)가 번역하였으며, 『십지론』과 『금강반야론』은 아승가의 동생인 세친이 지은 것으로 위나라 때 보리유지(菩提留支)가 번역하였다고 하였다. 또 『속고승전』에는 법상이 의연에게 상세히 답변했다고 하면서 책에는 일부만 실었다고 하였다. 아마도 의연은 법상에게 앞에 언급된 것 말고 여러 가지를 질문했고 법상은 그에 대해 자세히 답변한 것으로 여겨진다.
왕고덕과 의연은 법상에게 부처가 열반에 든 해를 물었다. 부처가 입멸한 연대는 불교 교리 가운데 가장 기초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시까지 통일된 견해가 없었다. 법상이 알려준 입멸 연대를 고구려도 사용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9세기 신라에서 사용한 입멸 연대와도 서로 다르다. 법상의 말을 따르면 부처가 입멸한 연대는 기원전 889년이다(신동하, 1999).
당시 고구려는 자국 연호와 중국 연호를 사용했는데 혹여 입멸 연대에 기준한 불멸 연대를 사용하자는 고구려 불교계의 상황을 반영한 것인지 모르겠다. 551년 혜량이 신라로 망명한 사건은 고구려 불교계에 큰 충격이었다. 침체된 불교계를 일신하는 차원에서 적어도 불교계에서 불기 연대를 사용할 것을 제안했을 수도 있다.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연대와 이후 전개상황을 물어본 것도 고구려 불교의 반성 차원에서 입멸에서 현재까지에 이르는 중국 불교의 역사를 살펴보자는 데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부처의 입멸 연대는 미륵신앙과도 관련이 있다. 부처가 열반에 든 이후의 시기를 정법(正法)시대, 상법(像法)시대, 말법(末法)시대로 나눈다. 보통 정법 500년, 상법 1,000년을 말하고, 그 이후가 말법시대에 해당한다. 부처 입멸 기원전 889년에서 1,500년이 지난 해는 611년 즈음이니, 7세기 전반이다. 의연이 법상을 만난 576년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기이다. 545년 추군과 세군의 싸움으로 2,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므로 사람들은 말법시대가 가까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7세기 백제 익산에 미륵사가 세워진 것도 말세에 미래의 부처 미륵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6~7세기 불상으로 추정되는 영강7년명금동광배와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은 미륵신앙을 잘 보여주는 불상이다. 평양에서 출토된 영강7년명금동광배는 죽은 어머니를 위해 미륵존상을 만들어 망자가 자씨(慈氏: 미륵)의 세 번 설법에 참여하기를 바라고 있다. 보통 자씨삼회(慈氏三會)란 미륵이 하생하여 세 번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지상이 아닌 미륵이 머무는 도솔천에서 세 번의 설법 듣기를 바란다고 한 것이 특징이다.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은 죽은 스승과 부모를 위해 만든 불상으로 미륵을 만나기를 기원하고 있다. 아미타상(阿彌陀像, 無量壽像)을 조성하면서도 아미타불의 서방 정토가 아니라 미륵이 있는 도솔천에 왕생하기를 바라고 있다. 1988년 함경남도 신포시 오매리에 있던 절골에서 발견된 금동판 명문에도 도솔천에 올라 미륵을 뵙고 아울러 앞서 죽은 고구려의 선왕들을 만나기를 바란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그림2 |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
왕고덕과 의연의 또 다른 질문은 당시 중국의 불교 이론이었다. 『십지론』, 『지도론』, 『지지론』, 『금강반야론』 등의 저자와 역자 그리고 내용 등이었다. 『십지론(십지경론)』은 화엄부의 『십지경』에 세친이 주석을 단 것으로 인도의 승려 늑나마제와 보리유지가 번역하였다. 그런데 법상은 보리유지만 언급했다. 『지도론(대지도론)』은 『대품반야경』의 주석서로 인도의 대승불교 승려인 용수(龍樹)가 저술한 불교 논서로 구마라집이 번역하였다. 『지지론』은 무착이 미륵에게서 받았다는 책으로 담무참이 번역하였다. 『금강반야론』은 세친이 지었고 보리유지가 번역하였다.
이 가운데 당시 불교에서 가장 유행한 경전은 『십지론』이었는데, 고구려에서 가장 궁금해한 경전이기도 했다. 『십지론』에 근거한 지론종이 북제에 유행하고 있었다. 『십지론』을 북제의 수도 업성에서 늑나마제(勒那摩提)와 보리유지가 번역했는데 서로 차이가 있었다. 업성의 북쪽에 살고 있던 보리유지의 번역을 따랐던 파를 지론종 북도파라고 하고, 업성의 남쪽에 살고 있던 늑나마제의 번역을 따랐던 파를 지론종 남도파라고 불렀다. 북도파는 도총에 의해서 일어났다. 법상의 스승 혜광은 늑나마제로부터 『십지론』을 배웠으므로 법상은 지론종 남도파의 계보를 잇고 있었다. 세친은 『십지론』을 쓰면서 『십지경』 원문에 없는 아뢰야식(阿賴耶識)과 아타나식(阿陀那識)을 언급했는데, 이 아뢰야식과 아타나식의 정체를 둘러싸고 의견을 달리하는 북도파와 남도파가 발생하게 되었다.
천태종의 담연은 북도파는 아뢰야식을 상정하여 의지처로 삼는 반면, 남도파는 아뢰야식을 진여(眞如)로 헤아려 의지처로 삼는데, 둘 사이는 물과 불처럼 격렬했다고 하였다. 또 북도파는 아뢰야식을 상정하여 이것이 일체법을 생성한다고 하고, 남도파에서는 법성을 상정하여 이것이 일체의 것을 낳는다고 하였다. 북도파는 나중에 아마라식(阿摩羅識)을 주장하는 섭론종(攝論宗)에 흡수되었다.
그런데 법상은 의연의 물음에 대한 답변에서 『십지론』의 번역자를 자신의 계보에 속하는 남도파의 늑나마제가 아니라 북도파의 보리유지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법상은 보리유지의 여러 저술도 접했기 때문에 특별히 『십지론』의 번역자를 구분하지 않았다고 하였다(이만, 1996). 『십지론』의 번역자가 보리유지라는 언급은 『속고승전』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고 『해동고승전』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해동고승전』에서 법상이 『십지론』의 번역자로 보리유지를 언급한 것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전해지는 과정에서 늑나마제가 보리유지로 바뀌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왕고덕과 의연이 『십지론』의 번역자를 물어본 것은 번역자에 따라 『십지론』의 해석이 달랐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론종 남도파와 북도파의 대립은 중국뿐만 아니라 고구려에서도 발생했을 수 있다. 따라서 법상의 대답을 보리유지로 변경시킨 것은 고구려의 지론종 북도파나 북도파를 이은 섭론종 계열일 수도 있다. 의연의 귀국 여부에 대해선 말이 없지만 법상의 대답을 들은 다음 왕고덕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귀국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법상을 만난 이듬해인 577년 북제가 멸망했으므로 이즈음 귀국한 것으로 본다(김상현, 2005).
의연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지황도 지론종과 연관되었다. 지황은 건강의 도양사(道場寺)에서 담천과 함께 활동한 승려였다. 담천은 진나라와 수나라 때 활동한 섭론종의 대가로 섭론학설을 받아들이기 전에 늑나마제의 제자인 담준에게 『십지론』을 배웠다고 한다. 담천이 도양사에서 지황을 만나 유식(唯識)에 대해 논하였는데, 아마도 이때 『십지론』이 주논의 대상이었을 것이라고 한다(정선여, 2007).
평원왕 때 고구려는 이전 안장왕의 피살, 추군과 세군으로 대표되는 귀족들의 싸움 등으로 왕권이 실추되고 불교계의 통제가 이완되어 있던 상황에 대한 타개책이 필요했다. 의연이 만났던 법상은 『사분율』에 입각한 계율을 강조한 북제의 승통이었다. 『사분율』에 따르면 세간의 싸움이 있으므로 이의 중재자로 국왕을 세웠으며, 따라서 국왕이 세운 법을 만인이 떳떳이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국왕이 법을 어기는 이에게는 법을 알게 하고 법을 잘 지키는 이에게는 상급을 주듯이, 법과 계율은 단지 편의상 민과 승려에게 구별되어 적용될 뿐이며 법, 계율 모두 부처의 정법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별개가 아니라고 하였다(조경철, 2015).
고구려로 귀국한 의연은 왕고덕과 함께 교학과 계율에 입각한 불교 승단 정비에 나섰을 것으로 여겨진다. 『사분율』이 소승계라면 의연이 법상에게 물어봤던 『지지론』은 『보살지지론』으로 대승계(유가계)까지 포함한 계율을 설한 경전이다. 『보살지지론』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은 의연은 귀국하여 왕과 귀족들에게 보살계를 행한 것으로 추정된다(정선여, 2007). 577년(평원왕 19년)부터 642년 연개소문의 정변이 일어나기 전까지 고구려의 정치와 불교계는 안정을 찾았다(민철희, 2002).
(4) 일본과 중국에서의 활동, 삼론종과 법화신앙
538년 또는 552년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나라는 백제였다. 일본에서 백제 승려의 활약은 대단했지만 고구려 승려의 활약도 이에 못지않았다. 일본에서 활동한 고구려 승려로 혜자, 담징, 혜관, 도등, 도현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혜관은 일본 삼론종의 시조로 추앙받았다. 고구려의 삼론학에 대한 이해는 역사가 깊다. 삼론학은 공사상을 담고 있는 『중론』, 『백론』, 『십이문론』 등 세 논서에 대해 공부하는 학파를 지칭한다. 고구려의 승랑은 이미 6세기를 전후하여 중국에서 활동했으며 중국 삼론학의 기초를 놓았다. 공(空)을 무(無)로 인식했던 격의불교(格義佛敎) 단계를 벗어나 속제(俗諦)와 진제(眞諦)가 아닌 중도(中道)를 지향했다. 삼론종을 대성한 중국의 길장은 승랑을 매우 높게 평가하였다. 길장은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섭령의 승랑과 흥황의 법랑을 계승했다(攝嶺興皇相承)”고 하였다.
고구려 승려 혜관은 수에 들어가 가상사(嘉祥寺) 길장에게 삼론의 종지를 전해 받았다. 혜관은 길장의 제자이기도 하지만, 멀리 고구려 승랑의 계보를 이은 것이다. 혜관은 625년(스이코천황 33년, 영류왕 8년) 중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천황이 칙명으로 간고사(元興寺, 法興寺, 飛鳥寺)에 머물게 했다. 그해 여름에 가뭄이 들어 혜관에게 비 내리기를 빌게 하였다. 혜관이 푸른 옷을 입고 삼론을 강설하자 비가 곧장 내렸다. 천황이 기뻐하여 곧바로 혜관을 승정으로 삼았다. 첫 번째 승정은 백제의 관륵이었는데, 두 번째 승정은 삼론의 혜관이 맡았다. 혜관은 주로 삼론을 강의하였고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 일본에서 활동한 백제의 승려 가운데 삼론에 능통한 이가 많았지만 고구려의 혜관이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된 것은 승랑으로 이어지는 고구려 삼론의 권위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혜관의 제자 오관은 중국 오나라 사람으로 삼론에 능했다. 혜관의 아들 지장도 혜관의 제자이다. 고구려 승려 도등도 당나라에 들어가 길장의 문하에서 삼론을 배우고 일본에서 삼론을 강의하였다. 중국에서 활동한 실법사와 인법사도 삼론에 능했다.
수가 중국을 통일한 589년에서 6년 뒤인 595년 고구려 승려 혜자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수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는 적극적인 대일외교를 펼쳤다. 혜자는 일본 쇼토쿠태자(聖德太子)에게 내전(불교 경전)을 가르치고, 태자와 『법화경(法華經)』 얘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과 수의 외교관계에도 도움을 주었다. 일본에서 수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오간 서신 가운데 “하늘의 아들(天兒)”, “왜왕은 하늘을 형으로 삼고, 해를 아우로 삼는다”라는 표현의 ‘천(天)’과 ‘일(日)’은 고구려 건국설화에 보이는 “천제의 아들(天帝之子)”, “해와 달의 아들(日月之子)”의 사상적 배경으로 보기도 한다(이성시, 1990).
596년 호코사(法興寺)가 완성되자 혜자는 백제 혜총과 함께 이 절에 머물렀다. 사람들은 혜자와 혜총을 삼보의 동량이라 칭했다. 호코사는 고구려의 1탑 3금당 가람 배치 양식을 따랐다. 그만큼 고구려의 영향력이 컸다. 영양왕은 호코사 금당에 안치할 불상 조성에 사용할 황금 300냥을 보내기도 하였다.
혜자는 일본에 20여 년간 머물다 615년 고구려로 귀국했다. 일본에서 활동한 승려들의 귀국 여부는 특별히 언급되지 않았다. 혜자가 귀국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혜자는 622년 2월 5일 세상을 떠났는데, 쇼토쿠태자가 죽은 621년 2월 5일의 1주기에 맞춰 죽은 것이라고 한다(『일본서기』). 중국을 통일한 수가 등장하고 신라의 압박이 심해지는 정세 속에서 고구려는 혜자를 통해 일본과의 관계를 더욱 더 돈독히 하고자 하였다. 쇼토쿠태자는 『법화경』, 『열반경』, 『유마경』, 『승만경』 등에 관심이 많았고 혜자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쇼토쿠태자가 지었다고 전하는 『승만경의소』, 『유마경의소』, 『법화경의소』 삼경의소는 혜자나 혜총이 지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구려에서도 이 경전들이 유행했을 것이고, 혜자가 고구려로 귀국한 이후 주로 설법한 경전도 이러한 경전이었을 것이다. 『유마경』은 재가신자인 유마거사가 주인공으로, 고구려에는 유명한 재가신자 왕고덕이 있었다. 『열반경』은 보덕으로 계승되었다.
이 밖에 고구려 승려 혜편은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의 스승이 되었고 선신니 등 비구니 3명을 득도시켰다. 고구려 승려 담징과 법정은 일본으로 건너가 채색·지묵·맷돌의 제조법을 전해주었다. 담징은 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담징은 승려이자 학자이며 공예기술자로서 일본 불교문화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일본에서는 불교계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10사(師)를 임명했는데, 고구려의 박대(狛大)와 도등 두 명도 포함되었다. 10사 가운데 한 명인 복량은 혜관에게 삼론을 배웠다. 고구려 승려 도현은 불교와 유교 전적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는 일본에 건너가 다이안사(大安寺)에 머물며 『일본세기』를 찬술하였고 고구려 멸망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중국에서도 고구려 승려의 활동은 활발하였으며, 중국인 제자들도 배출하였다. 중국에서 배우고 일본으로 건너간 혜관도 있다. 중국으로 건너간 고구려 승려는 이른 시기부터 있었다.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인 4세기 중반 중국의 지둔도림과 편지를 나눈 승려가 있었고, 500년을 전후한 시기 삼론에 능통한 승랑이 중국으로 건너가 이름을 떨친 적도 있었다. 의연은 570년대에 북제로 건너가 법상을 만나 부처의 열반 연대 등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귀국하였다. 이 밖에 고구려 실법사(實法師)는 수에서 삼론을 강의하였고 법민과 혜지는 그의 강의를 들었다. 인법사(印法師)는 수의 촉 지방으로 가서 삼론을 강의했는데, 영준이 그의 제자였다.
반야(波若)는 596년 천태산 지의를 찾아가 선법을 전수받았다. 597년 입적한 지의의 말을 따라 598년 지의가 머물렀던 천태산 화정봉에서 두타행을 닦고 613년 국청사(國淸寺)로 하산하여 입적하였다. 고구려 승려 지황은 살바다부(薩婆多部, 說一切有部)에 능통했다. 현유는 사자국(獅子國: 스리랑카)에서 활동하였다. 지덕은 돈황석굴에서 발견된 선종 자료에서 신수, 혜능, 지선 등과 함께 선종의 5조 홍인의 제자로 병칭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고구려의 법화신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대표적인 대승 경전인 『법화경』이 고구려에서도 널리 읽혔을 것은 당연하다. 혜자에게 불교를 배운 쇼토쿠태자가 『법화경』에 능통했기 때문에 당연히 혜자도 능통했을 것이다.
법화의 주된 사상 가운데 하나가 ‘회삼귀일(會三歸一)’인데, 통합과 통일의 원리에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수의 주홍정이 수 문제에게 “천태산 국청사에서 법화의 회삼귀일 법문을 홍포하면 천하가 하나 될 것”이라 했고, 정말로 문제가 그렇게 하니 천하가 하나 되었다고 한다. 고려 초의 승려 능긍도 천태의 법화사상을 받아들여 세상에 널리 행하면 삼한(후삼국)이 합하여 하나가 될 뿐 아니라 왕업도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국청사금당주불석가여래사리영이기(國淸寺金堂主佛釋迦如來舍利靈異記)」).
고구려의 승려 반야는 천태의 제자로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법화경』에 능통한 혜자는 615년 일본에서 고구려로 귀국했다. 혜자가 귀국하기 1년 전인 614년 수가 영양왕의 입조를 요구했으나 거절하였다. 고구려도 법화의 회삼귀일 원리에 입각해 국내성 세력이나 평양 세력 등에서 비롯되는 여러 갈등을 해소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법화의 또 다른 사상 가운데 하나는 모두가 불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법화경』은 여성의 성불을 인정하고 있는데, 이는 모든 사람이 불성을 갖고 있고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불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은 모든 사람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였다. 이 사상은 열반사상(涅槃思想)에서 구체화된다.
(5) 연개소문의 집권과 보덕의 망명
642년 연개소문의 정변에 의해 고구려의 정치상황은 돌변했다. 연개소문은 도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여 유·불·도 삼교의 균형을 꾀하면서 통치제제를 정비해 나갔다. 삼교의 균형은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하였던 불교계에 대한 통제를 가져왔다. 이에 일부 승려가 반발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열반종의 보덕이었다. 보덕은 완산주(전주)로 망명하여 열반사상을 널리 퍼뜨렸다. 보덕이 망명한 연대에 대해서는 650년과 667년 두 견해가 있는데, 650년이라면 백제의 완산주로 이주한 것이고, 667년이라면 백제가 멸망한 이후이므로 신라의 완산주가 된다.
보덕은 자(字)가 지법(智法)으로, 고구려 용강현 사람이다. 평양성에 기거할 때 산방의 노승들이 찾아와 강경을 청하자 『열반경』을 강했다고 한다. 그가 머문 사찰은 반룡산(盤龍山) 연복사(延福寺)이다. 연개소문 집권 당시 고구려는 정책적으로 도교를 앞세웠다. 도교의 불교 탄압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 절을 도관(道館)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드는데, 이는 단지 절에 도사를 머무르게 했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다(방용철, 2013). 보덕이 나라가 머지않아 망할 것이라고 하면서 피할 곳을 묻자 제자들은 완산주 고달산이 좋다고 하여 고달산 경복사에 주석하였다. 보덕은 11명의 고명한 제자가 있었는데, 모두 완산주 인근에 절을 짓고 주석하였다.

그림3 | 보덕이 활동한 평양, 대보산, 용강 부근(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대동여지도〉)
보덕은 평안도 용강현 출신이지만 주로 머무른 곳은 평양성, 반룡사 또는 반룡산 연복사, 대보산(大寶山) 영탑사(靈塔寺) 등이었다. 도교를 앞세우고 불교를 뒤로하는 연개소문과 보장왕의 도선후불(道先後佛) 정책에 대하여 보덕이 왕에게 누차 간한 것으로 보아, 보덕이 활동했던 지역은 평양성 인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반룡사를 평남 용강군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거나(강인구 외, 2003), 반룡산 연복사를 함경도 덕원 또는 평안도 상원에 위치한 것으로 보거나(노용필, 1989), 반룡사가 영탑사보다 멀리 떨어진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정선여, 2007), 고려시대 기록에 ‘서경 반룡산(西京盤龍山)’으로 나오므로(조법종, 2014), 보덕이 머문 반룡사 또는 반룡산 연복사는 평양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대보산 영탑사는 평양 서쪽에 위치한다.
보덕이 망명한 연대도 기록에 따라 650년 또는 667년으로 달리 나온다. 김부식이나 일연 등 대부분은 650년을 따르고, 667년은 최치원의 인식이다. 최치원은 668년 고구려의 멸망을 667년 보덕의 신라 망명과 연결 지어 해석했다(김주성, 2003). 650년은 보덕이 남하를 시작한 시점이고, 667년은 경복사가 완공되어 이주가 마무리된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노용필, 1989). 어느 견해를 따르든지 대부분 보덕이 고구려를 떠난 시기를 650년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반면 최치원과 이규보가 보덕의 망명 시기로 언급한 667년 3월 3일의 ‘3월 3일’은 서왕모(西王母)가 태어난 날이기도 하여 도교에서 중요하게 여긴 날이라고 하면서 667년을 보덕의 신라 완산주 망명시기로 보기도 한다. 직접적인 망명 동기는 보덕의 주석처인 반룡산의 사찰 부근에 용언성(龍堰城), 용언저(龍堰邸), 용언궁(龍堰宮)을 지어 도관 또는 도관 관련 공간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 한다(조법종, 2014). 고구려는 매년 봄 3월 3일 낙랑언덕에서 사냥대회를 여는데, 이때 어수선한 틈을 타서 완산주로 넘어갔을 수도 있다.
연개소문의 불교 탄압으로 보덕이 망명했다면 왜 적국인 신라 땅으로 망명하지 않고 백제 땅으로 망명하였을까? 650년 보덕이 백제 완산주 고대산으로 가려면 한강 유역의 신라 땅을 거쳐야 한다. 과거 고구려의 승려 혜량이 신라로 망명한 사례를 참작한다면 당연히 신라 망명이 순조로웠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연결을 경계하고 있었는데, 고구려의 승려 일단이 백제로 건너가는 것을 그대로 놔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 멸망기를 전후하여 많은 사람들이 신라로 망명한 것을 감안한다면 보덕의 망명도 백제가 멸망한 이후 고구려 멸망을 1년 앞둔 667년일 가능성이 더 높다. 신라 입장에서는 당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할 때 이미 점령한 백제 지역에 대한 안정도 필요했다. 신라는 보덕을 옛 백제 땅 완산주에 안착시켜 백제인의 인심을 달랬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는 674년 고구려의 왕족 안승을 익산에 불러들여 보덕국을 세워주기도 했다. 신라는 보덕과 안승 등을 끌어들여 옛 백제 지역에 대한 지배를 강화해 나가고자 하였다.
보덕의 완산주 망명을 650년으로 보는 입장은 권신 연개소문과 승려 보덕의 대립, 도교와 불교의 대립을 강조하면서 이를 고구려 멸망과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고려 왕조의 이자현, 김부식, 일연 등은 연개소문과 같은 무력을 기반으로 한 권신의 발호를 경계하고 불교에 대한 도교의 탄압을 강조했다. 도교를 맨 앞에 내세우는 도교 우위의 삼교일치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그런데 650년 보덕의 백제 망명과 668년 고구려의 멸망은 19년의 격차가 있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 조건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 백제도 아직 망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백제가 망하지 않는 한 당 혼자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것은 수의 경우나 당 태종의 패배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667년 보덕의 신라 망명은 보는 관점에 따라 도교에 대한 직접적인 반대보다 고구려가 멸망 조짐을 보이자 취한 행동으로 보이기 쉽다. 660년 백제 멸망 이후 고구려는 앞으로 당과 신라의 협공이라는 새로운 전쟁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고, 신라가 당의 보급로를 책임지는 한 당과의 싸움에서 이길 자신감도 많이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연개소문이 죽은 후 연개소문의 세 아들 남생, 남건, 남산의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권력투쟁에서 밀린 남생은 666년 당으로 망명하고, 667년 12월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로 망명했다. 668년 남건이 끝까지 저항하였지만, 정치·군사 자문역을 맡았던 승려 신성이 성문을 열고 당에 항복했다. 연개소문이 도교를 앞세운 이래 불만을 품고 있던 보덕은 남생, 연정토와 마찬가지로 망명을 택했고, 그곳은 옛 백제 지역인 완산주였다. 보덕은 650년보다 667년 신라 땅인 완산주로 망명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보덕이 완산주로 망명하기 전 고구려에서의 불교 활동은 두 가지 정도 알려져 있다. 영탑사에 8각 9층탑을 세운 것과 사람들에게 『열반경』을 강(講)한 것이다. 보덕이 대보산 동굴 아래에서 참선을 하고 있는데, 어떤 신인(神人)이 와서 땅 밑에 8면 7층석탑이 있다고 하였다. 땅속을 파보니 말 그대로여서 이곳에 영탑사(靈塔寺)를 지었다고 한다. 이는 고구려의 성왕이 요동성에 행차했다가 아육왕(阿育王)이 불탑을 세웠던 땅속 자리에다가 다시 7층목탑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아육왕은 인도에서 이상적인 전륜성왕으로 떠받드는 아소카왕을 말한다. 『삼국유사』 요동성육왕탑(遼東城育王塔)조에서 7층목탑을 세운 고구려의 성왕은 동명성왕이 아니고 광개토왕으로 추정되는데(조경철, 2012), 보덕도 아소카왕이나 광개토왕처럼 불법을 수호하는 전륜성왕이 나타나 다시 고구려의 불교를 흥하게 해달라고 기원한 것으로 생각한다.
보덕은 산방의 노승들이 찾아오면 40권 『열반경』을 강했다고 한다. 『열반경』은 진나라 때 북량의 담무참이 맨 처음 번역하였는데, 나중에 40권 『열반경』과 36권 『열반경』이 유통되었다. 전자를 북본열반경, 후자를 남본열반경이라고 한다. 『법화경』과 『열반경』은 석가불신앙을 위주로 하며 일체 중생의 성불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다만 보덕의 경우는 달리 보기도 한다. 『열반경』은 일체 중생의 성불을 말하고 있고 일천제(一闡提)의 성불 가능성도 말하고 있지만, 불법을 없애려 하는 일천제의 경우 성불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연개소문의 도교 우위, 불교 탄압에 대항한 보덕은 연개소문과 같은 일천제의 성불을 부정하는 열반사상을 갖고 있다고 보기도 하지만(김주성, 2003),이는 과도한 해석으로 보덕의 열반사상은 일천제 성불론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보덕이 사상적으로 대립각을 세운 대상은 도교뿐만 아니라 불교일 수도 있다. 당은 도교를 앞세우는 한편, 645년 인도에서 돌아온 현장의 신유식(新唯識)인 법상종(法相宗)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신라의 원효와 의상도 현장의 신유식을 공부하기 위해 당 유학을 시도한 적이 있다. 신유식은 오성각별(五性各別)에 입각하여 일천제는 성불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당의 법상종이 고구려에 유입되면서 보덕을 중심으로 한 일천제 성불론의 열반사상과 대립했을 수도 있다.
보덕이 망명의 거주처로 옛 백제 지역을 택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지역에 이미 『열반경』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는 성왕 19년(541년) 중국 양에 사신을 보내 모시박사와 『열반경』 등의 주석서를 요청한 적이 있다. 이때 당시 백제에는 『열반경』이 이미 들어와 있었고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양에 유통되고 있었던 『대열반경집해』 등 『열반경』 주석서를 요청할 정도로 『열반경』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이후 백제의 『열반경』에 대한 관심은 중국으로 유학 간 백제 승려가 길장의 『열반경』 주석서를 가지고 귀국해서 중국에 남아 있는 책이 없다는 중국 측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조경철, 2015).
보덕에게는 11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 가운데 명덕은 완산주 고대산(고달산)에 보덕의 거처를 주선했다. 11명의 제자는 완산주 인근에 절을 짓고 보덕의 열반사상을 널리 퍼뜨렸다. 무상은 제자 김취와 함께 금동사를, 적멸과 의융은 진구사를, 지수는 대승사를, 일승, 심정, 대원은 대원사를, 수정은 유마사를, 사대와 계육은 중대사를, 개원은 개원사를, 명덕은 연구사를 세웠다. 개심과 보명은 전기(傳記)가 따로 있다.
보덕의 열반사상은 고구려와 백제의 열반사상을 통합하였으며, 신라의 원효가 받아들였다. 원효는 『열반종요(涅槃宗要)』란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보덕은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는 열반사상으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정신적 통합을 추구하였고, 원효는 이를 화쟁사상(和諍思想)으로 발전시켰다.
2) 고구려 후기의 도교
도교가 고구려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정치·종교적 영향을 끼친 시기는 영류왕과 보장왕 때로, 실질적으로는 연개소문이 집권한 기간이다. 도교는 『도덕경』, 『장자』 등의 경전을 위주로 하여 노장사상으로 알려지다가 후한 때 장릉(張陵)의 오두미교(五斗米敎)와 장각(張角)의 태평도(太平道)에 의해 종교적 요소를 더하면서 중국에 널리 퍼져 나갔다. 도교는 유교 또는 불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지만 대립하기도 하였다.
도교가 한국에 들어온 시기는 매우 이른 편이다. 이미 4세기 백제가 『도덕경』을 인용하고 있고, 고구려에도 고분벽화 등을 통해 국내성시기에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당이 들어선 이후 이전 수와의 전쟁 양상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유화책을 시도했으며, 그 방법 중 하나가 영류왕 때 당의 도교를 수용하는 것이었다. 영류왕이 연개소문에 의해 시해되고 보장왕이 옹립된 이후 도교는 연개소문의 독재체제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이용되었다. 그는 유교·불교·도교의 삼교 정립이라는 구실을 달아 불교 교단을 통제하였다. 이에 보덕은 연개소문의 도교진흥책에 대항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옛 백제의 완산주로 이주하였다. 결국 연개소문의 도교진흥책은 고구려 멸망의 한 계기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지금까지 고구려의 도교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연개소문의 도교와 보덕의 불교와의 대립 관점에서 이루어졌는데, 근래 도교와 불교의 대립이 과장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절을 도관으로 삼았다는 부분과 보덕의 이주 시기이다. 절을 도관으로 삼았다는 것은 도교와 불교의 대립을 극단으로 몰고 갔다는 것인데, 이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덧붙여 보덕의 이주 시기가 백제 멸망 이전인지 이후인지의 문제도 당시 불교와 도교의 대립양상을 달리 볼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한다.
고구려에 도교가 들어온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문헌기록으로는 을지문덕이 612년 고구려에 쳐들어온 수의 장수 우중문에게 보낸 시에 『도덕경』을 인용한 것이 가장 이르다. “신묘한 계책은 천문을 꿰뚫었고”로 시작해서 “만족할 줄 안다면 그치면 어떠할까”라는 시의 마지막 구는 『도덕경』 44장의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을지문덕이 인용한 위 구절은 이미 4세기 백제 장군 막고해가 인용한 바 있다. 병법서로도 활용된 『도덕경』이 장군들에게 널리 퍼져 읽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연개소문이 당에서 도교를 받아들인 것도 평소 『도덕경』에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내성시기 고분벽화에 보이는 복희·여와·비선(飛仙)·서왕모 등 신화적 인물과 별자리 등도 넓은 범주에서 도교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광개토왕릉비〉에 보이는 ‘天帝之子’, ‘河伯之孫’의 천제(天帝)나 하백(河伯)도 도교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고구려 후기에는 도교의 영향을 받은 사신도도 유행하였다. 하지만 고구려의 도교가 도관이나 도사 등을 둘 정도로 교단화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백제의 경우에도 승려와 절과 탑은 많은데 도사는 없다고 하였다.

그림4 강서대묘 사신도의 현무(평안남도 강서)
수와의 싸움에서 전쟁영웅이었던 영류왕은 배다른 형 영양왕의 뒤를 이었다. 619년 수는 당에 의해 멸망하였다. 영류왕은 이전 수와의 대결양상을 피하고 새로 들어선 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영류왕이 당에 사신을 보내 책력을 청하자, 당은 우호와 견제의 의미를 담아 황실이 받들고 있던 도교를 전해주었다. 당에서 보낸 도사들은 고구려에 천존상(天尊像)과 도법(道法)을 가지고 왔으며, 왕과 국인들은 그들이 강의하는 『도덕경』을 들었을 뿐 아니라 이듬해에는 당에 사람을 보내 불교와 도교의 교법을 배워오게 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한편 영류왕과 대신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모의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연개소문은 642년 왕을 죽이고 새로 보장왕을 옹립하였다. 정권을 잡은 연개소문도 일단 당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구려에 유교와 불교는 성하지만 도교가 아직 성하지 않으니 삼교는 솥의 세 발과 같다고 하면서 당에 도교를 청하여 널리 퍼뜨리고자 하였다. 당 태종은 도사 숙달(叔達, 敍達) 등 8명을 보내고 『도덕경』도 보내주었다. 왕은 기뻐하여 절을 도관으로 삼아 이들을 머무르게 하였다. 연개소문은 유교·불교·도교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도교를 들여왔지만, 불교 측에서는 상대적으로 불교를 탄압하는 것처럼 여겼을 것이다. 특히 ‘절을 도관으로 삼은 행위’는 불교계로서는 상당한 타격이었다.
당과 고구려의 우호관계는 얼마 가지 못했다. 645년 당은 고구려를 침략했지만 안시성싸움에서 패퇴하였다. 고구려에 와 있었던 도사 8명의 행방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연개소문의 삼교 균형 정책은 계속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도교를 받드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반룡사의 보덕은 완산주 고대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불교계의 이반이 심상치 않았음을 짐작하고, 654년 “마령(馬嶺)의 신인(神人)이 나타나 ‘임금과 신하들의 사치함이 한도가 없으니 패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하고 사라졌다”고 한다(『삼국유사』).
보덕이 도교진흥책에 반대하여 남쪽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이야기는 『삼국유사』 흥법(興法) ‘보장봉노(寶藏奉老) 보덕이암(普德移庵)’ 항목에 자세히 전한다. 이에 의하면, 보장왕과 연개소문이 도교를 받들고 불교를 멀리하여 보덕이 고구려를 떠났고 결국 고구려가 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조하였다. 이 항목에서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은 자신의 말과 다른 사람의 말을 빌려 고구려 멸망을 수차례 언급하면서, 도교 신봉이 가져온 부정적 결과를 특히 강조하였다(정호섭, 2018).
『삼국사기』는 650년 보덕이 나라에서 도교를 받들고 불교를 믿지 않아 거처를 완산주 고대산으로 옮겼다고만 했는데, 『삼국유사』는 여기에 “얼마 되지 않아 나라가 망하였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얼마’라고 했지만 650년과 667년은 19년이나 떨어져 있다. 또 도교를 신봉한 연개소문이 실은 수나라 사람 ‘양명(羊皿)’인데,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환생했다고 하면서 ‘연개소문(양명)=도교=고구려 멸망’이란 등식으로 파악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대각국사 의천의 시구 가운데 “보덕이 거처를 옮긴 후 동명성왕의 옛 나라 위태로워졌네”를 인용하면서 『삼국사기』의 고구려가 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마령 신인의 말을 덧붙였다. 654년 고구려가 멸망할 거라는 마령 신인의 말은 『삼국사기』에서는 650년 보덕의 완산주 이주와 별개로 언급된 말인데, 『삼국유사』는 이 둘을 연결시키고 있다.
보통 도교의 불교에 대한 탄압의 예로 절을 바꾸어 도관으로 삼았다는 기록을 들곤 한다. 그런데 이 기록의 해석에는 문제점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모두 언급하고 있지만 같은 내용에 대한 서술 방식에 차이가 있다.
『삼국유사』에 “연개소문이 유교·불교·도교 삼교의 정립을 위해 당에서 도사 8명을 들여왔는데, 절을 도관으로 삼았다(以佛寺爲道館)”라는 구절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이 구절이 “取僧寺館之” 또는 “取浮屠寺館之”라고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해석을 ‘절을 빼앗아 이들을 머물게 하였다’라고 한 것이다(정구복 외, 2012). 도교와 불교의 극렬한 대립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당에서 도사 8명을 보내자 왕이 기뻐하여 취한 조치가 절을 빼앗아 도관으로 삼는 단계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의 ‘取僧寺館之’란 구절을 ‘以佛寺爲道館’으로 바꾸어 기술하였다. 문장을 ‘以-爲-’ 구조로 바꾸어 건물 자체의 기본 용도를 바꿨다. 또 『삼국사기』의 관(館)을 도사가 머물며 도를 닦는 ‘도관(道館)’으로 바꿔버렸다.
‘取僧寺館之’는 도사 8명이 오자 ‘절을 취하여 그들을 머물게 했다’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방용철, 2013). 김춘추가 고구려에 왔을 때 김춘추를 머물게 했다고 할 때도 ‘館之’라고 했기 때문이다(『삼국유사』). 또 『신당서』나 『송고승전』에서도 ‘맞이하여 머무르게 했다’는 ‘迎而館之’라는 표현이 보인다.
‘取僧寺館之’는 어구만 볼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 있는 ‘王喜’라는 두 글자를 붙여 해석하면 좀더 명확해진다. ‘王喜取僧寺館之’에서 ‘왕이 기뻐한다(王喜)’와 ‘절을 빼앗아 도관을 삼았다(取僧寺館之)’는 두 구절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굳이 절을 뺏는 것을 기뻐한다고까지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에서는 ‘館之’를 ‘도관(道館)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여 도관(道館)을 ‘道觀’의 의미로 사용하였지만,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문 편이고 국내 기록에서는 잘 확인이 되지 않는다. 또한 ‘觀’이라고 해서 모두 도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건물을 말하는 ‘館’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사기(史記)』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봉선문(封禪文)의 “鬼神接靈圉賓於閒館”라는 구절에서 ‘한관(閒館)’은 『한서』에서 ‘閒觀’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한서』 한관의 ‘觀’은 도교의 도관이 아닌 집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즉, ‘觀’은 도관(道觀)의 관으로 쓰일 수 있지만, 도관(道觀)의 뜻을 담고 싶을 때 ‘觀’이 아닌 ‘館’을 쓴 경우는 거의 없다.
『속고승전』의 “승사를 취하여 비구니의 거처로 삼았다(取僧寺爲尼所住)”는 구절은, ‘爲’가 있어 ‘비구니의 거처로 삼았다’라고 풀이되지만, ‘取僧寺館之’에는 ‘爲’란 글자가 없고 ‘館之’라 했기 때문에 ‘머물게 했다’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절을 도관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면서 연개소문과 보덕, 도교와 불교의 관계를 극히 대립적인 관계로 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
연개소문의 도교진흥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추진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도사 8명을 당으로부터 청한 이후 고구려 자체적으로 도사를 배출했는지도 알 수 없다. 도사 8명이 고구려 불교계를 마치 없애버리려고 했다는 식의 비판은 『삼국유사』 등 불교계의 입김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유사』는 고구려의 멸망을 도교의 불교에 대한 탄압으로 보았다. 일연이 도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불교가 주축이고 도교는 보조 역할을 하는 정도라고 인정하였다. 일연이 활동한 고려시대에도 도교는 널리 퍼져 있었다. ‘보장봉노’, 곧 보장왕이 노자를 받들어 나라가 망했다는 메시지는 당시 고려왕에게도 유효했다. 이런 측면에서 『삼국유사』의 ‘보장봉노 보덕이암’이란 항목의 제목도 특별하다. 사실 고구려에서 도교를 앞장서 받아들인 장본인은 보장왕이 아니라 연개소문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흥법 ‘보장봉노 보덕이암’이란 항목은 도교의 불교에 대한 탄압을 다룬 대목이다. 일연은 보장왕이 노자(도교)를 받들고 불교를 멀리하자 보덕이 완산주로 거처를 옮겼고 이로 인해 고구려 또한 머지않아 멸망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보장왕은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이 옹립한 왕이다. 이미 영류왕은 당나라에 도교의 가르침을 요청한 적이 있었고, 보장왕은 도교를 받아들이자는 연개소문의 청에 따랐을 뿐이다. 보덕이 누차 왕에게 불교에 대한 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청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왕의 뜻이라기보다 연개소문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항목의 내용 대부분도 보장왕의 ‘봉노’보다 연개소문의 ‘봉노’에 대한 비난이다. ‘보장봉노’가 아니라 ‘연개소문봉노’가 사실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장봉노’라고 한 것은 연개소문에 의해 옹립된 보장왕을 나무란 것이라기보다는 일연이 살고 있던 당대 왕들에 대한 경계적 성격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고려시대 귀족들이 널리 받아들이고 있던 도교에 대한 견제를 왕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이 밖에도 도교에 대한 비판을 언급하고 있다(방용철, 2012). ‘아도기라(阿道基羅)’ 항목에서는 척발도가 관중과 낙양에 위세를 떨치고 있을 때 최호가 좌도(左道: 도교)를 조금 익혀 불교를 시기하고 미워하고 구겸지(寇謙之)와 함께 불교를 폐하려고 하였는데, 나중에 최호와 구겸지는 악질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경덕왕(景德王) 충담사(忠談師) 표훈대덕(表訓大徳)’ 항목에서는 혜공왕이 도류(道流: 도사)와 더불어 놀다가 큰 난리가 있어 마침내 왕은 선덕왕과 김양상에게 살해되었다고 하였다.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 항목에서는 송의 휘종이 좌도(도교)를 받들어 사람들이 금인(부처)이 나라를 망친다는 참언을 퍼뜨렸다고 한다. 또 황건의 무리가 불교를 파멸시켜 승려를 파묻고 경전을 불사르려 한다고 하였다. 보장왕과 연개소문의 도교의 대한 과도한 비판도 이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영류왕·보장왕·연개소문이 받아들인 도교의 성격은 어떠했을까? 고구려가 당에서 받아들인 것은 천존상, 『도덕경』, 도사라고 하면서 더 이상의 구체적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천존상은 도교의 최고 신인 천존 또는 원시 천존의 상을 말한다. 당의 천존상은 높이 3자 5치로 운관을 쓰고 손잡이가 달린 향로를 들고 있었다고 한다. 당에서 도교를 받아들이기 이전에 이미 고구려에 『도덕경』이 들어와 있었고, 도교의 한 형태인 오두미교가 유행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구체적인 도교의 신상이 들어온 것은 이때가 처음인 것으로 추정된다.
을지문덕이 612년 수의 장수 우중문에게 보낸 시에 『도덕경』이 인용되어 있다. 『도덕경』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병법서로서도 널리 활용되었다. 『수서』 예문지(藝文志)에 『노자병서(老子兵書)』란 책이 실려 있기도 하다. 을지문덕 등 장군들이 주로 관심을 보였던 『도덕경』이 병법서 측면에서 주석이 달린 책이었다면, 당에서 고구려에 들어온 『도덕경』은 이전 병법 주석과 다른 계통의 주석본이 주종을 이뤘다고 추정된다. 『도덕경』의 주석본으로 유명한 것으로는 왕필(王弼)의 주석본과 하상공(河上公)의 주석본이 있다. 왕필본은 노자의 철학적 문제에 집중한 반면, 하상공본은 양생술에 치중하였다(박승범, 2019). 물론 왕필본과 하상공본도 싸워서 이기는 법을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도덕경』의 핵심사상이기도 한 ‘무위(無爲)’는 병법의 핵심이기도 하다. 왕필은 적의 도발에 쉽게 전쟁에 나서지 말라고 하였고, 하상공은 교묘하고 은밀한 전법을 활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오두미교는 무덕(武德, 618~626년)·정관(貞觀, 627~649년) 연간에 고구려 사람들이 앞다투어 믿었다고 한다. 오두미교는 중국 후한 말 장릉이 창시하여 그 아들 장형, 손자 장로의 계보를 이어받은 원시 도교의 한 교단으로, 말 그대로 오두의 쌀을 내고 교단에 입단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두미교의 주된 관심사는 질병의 퇴치였다. 오두미교는 고구려의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음사(淫祀)의 형태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고구려에는 『도덕경』은 물론 이에 대한 여러 주석서가 들어와 있었고 여러 사람들이 오두미교란 형태로 민간에 어느 정도 퍼져 있었다.
그럼 연개소문이 도교에 특히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연개소문도 병법서로서 『도덕경』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도교가 추구하는 정치는 ‘무위(無爲)’의 통치인데, 이를 『한서』에서는 군주의 통치를 도와주는 “군인남면지술(君人南面之術)”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유교나 불교와 달리 도교가 갖고 있었던 특별한 가르침이 연개소문의 독재체제에 특별한 장점을 부여한 것은 아니었다. 당도 『도덕경』의 특별한 통치술에 관심을 가졌다기보다는 당 황제의 성씨가 이씨이고, 이씨의 기원이 노자까지 이어진다고 하면서 당 황실의 신성성을 고양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연개소문이 도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가문과 관련해서이다. 물에서 태어났다거나(生水中) 샘에서 태어나서(出於泉) 그의 선조가 연(淵, 혹은 泉)씨 성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도덕경』은 도의 원리를 물에 비유해서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고 한다. 연개소문은 도교를 널리 퍼뜨려 자기 가문이 물에서 태어난 신성한 가문임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연개소문은 도사들을 동원하여 국내의 유명 산천을 돌아다니며 도교를 널리 퍼뜨리고 정권의 안정과 국가의 운을 빌게 하였다. 평양성의 지형지세는 신월성(新月城) 모양이었는데 남하(南河)의 용으로 하여금 더 쌓아 만월성(滿月城)으로 만들고 이름을 용언성이라고 하였다. 따로 참서를 지어 용언도라고 하고, 또 천년 동안 번영할 천년보장도(千年寶藏堵)라고 하였다. 그런데 중국에서 온 도사들의 경우 한편으로 고구려의 명맥을 끊기 위한 은밀한 시도도 하였던 것 같다. 옛날 고구려의 성제(聖帝)가 상제에게 조회할 때 타고 갔던 돌이라고 전해지는 신비로운 영석(靈石)을 파서 깨뜨리기도 하였다(『삼국유사』).
연개소문의 의도와 달리 고구려에는 멸망을 암시하는 여러 참언이 돌아다녔다. 아마도 중국에서 온 도사들이 민심을 불안하게 하기 위하여 퍼뜨렸을 것이다. 당의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은 『고구려비기』의 말을 인용하여 “고구려는 900년이 되지 못하여 팔십(八十)대장에게 멸망한다”라고 말하였다. 그에 따르면, 고구려 건국은 기원전 1세기가 아니라 기원전 3세기이고, 팔십대장은 당의 장수 이적(李勣)이라는 것이다.
연개소문이 유교·불교·도교 삼교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도교를 받아들이겠다고 하였지만, 도교를 널리 퍼뜨리기 위한 도사의 보급과 도사가 머물기 위한 도관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교단을 형성하고 있던 불교와의 충돌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불교는 왕실이나 귀족과 연결되어 있었다. 귀족연립정권의 통치체제를 지탱하는 사상적 기둥은 불교였는데, 추군과 세군의 싸움, 혜량의 신라 망명으로 불안정을 초래하였다. 이후 왕고덕과 의연의 활동으로 안정을 찾아가는 듯하였으나 연개소문의 급작스런 도교진흥책은 불교와 도교와의 갈등뿐만 아니라 도교에 대처하는 불교계의 갈등을 초래하였다. 그 결과 보덕은 도교와 정면충돌하여 다른 나라로 망명하였고, 연개소문의 뒤를 이은 남건의 군사참모로 활동했던 승려 신성은 고구려 멸망 때 평양성의 문을 열어주기도 했다.
결국 삼교 정립의 실패, 도교와 불교의 불화, 불교계 내부의 갈등 등 사상적인 대립이 고구려 멸망을 초래한 한 요인이 되어버렸다. 다만 7세기 중엽 현상적인 측면만 본다면 고구려는 멸망 직전까지도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비교적 효과적으로 대응했다고 한다(여호규, 2018). 연개소문이 당에서 도교를 도입한 사실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선입관에서 벗어나 다양한 논의를 전개할 필요가 있다.
3) 고구려 후기의 유교
고구려에 유교가 들어온 시기는 이른 시기로 추정된다. 한자로 쓰인 중국의 유교 경전이나 유교 사상을 담은 여러 책을 통해 자연스럽게 유교에 접했을 것이다. 유교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는 소수림왕 때 태학(太學)을 건립한 이후이다. 태학이 중앙에 건립되었다면 평양 천도 이후에는 지방에 경당(扃堂)이 건립되었다. 『한원』에 국자박사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태학 위에 국자학이 있었고 이곳에서 보다 상층의 귀족 자제를 가르친 것 같다. 태학과 경당에서는 유교 경전을 비롯하여 역사책, 문학책 등을 읽고 활쏘기도 병행하였다. 태학에서는 성년의 귀족 자제가 주로 공부했고, 경당에서는 하급 귀족과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미혼 자제가 공부했다(이정빈, 2012; 2014). 온달이 지방에서 글과 활쏘기를 익힐 수 있었던 것도 경당과 같은 지방교육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집』을 편찬한 이문진도 태학박사였다. 고구려 사람들이 즐겨 읽은 책으로는 오경·『사기』·『한서』·『후한서』·『진춘추』 등이 있었고, 특히 『문선』을 좋아했다. 책을 읽고 글쓰기에 필요한 한자사전류인 『옥편』, 『자통』, 『자림』등도 갖추고 있었다.
고구려의 덕흥리벽화고분에는 주공과 공자를 언급하였고, 광개토왕 때 영락(永樂) 연호를 사용하였다. 사직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한 일은 보통 고국양왕 때의 사실로 여기나, 일부에서는 광개토왕 때의 일로 보기도 한다(조경철, 2012). 장수왕은 유교적 이념에 입각해 〈광개토왕릉비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비문에 표기된 백제의 비칭인 백잔(百殘)의 잔(殘)과 왜의 비칭인 왜적의 적(賊)은 『맹자』에서 인을 해치는 것을 적, 의를 해치는 것을 잔이라고 한 것에서 따온 것 같다.
고구려 후기에도 유교가 널리 보급되었다는 것은 『구당서』에 오경 등 유교 경전과 『사기』 등 역사책을 즐겨 읽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특히 각 지방의 경당에서 배운 유교적 기본소양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600년 영류왕이 이문진을 시켜 기존의 『유기(留記)』를 대신한 새로운 역사서 『신집』을 편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발전된 고구려의 유교 수준이 뒷받침되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고구려 사람들이 특히 즐겨 읽었다는 『문선』은 양의 소명태자가 편찬했는데, 노장사상의 글도 포함되어 있지만 유교적 소양을 기본으로 한 책이다. 이 책은 신라의 강수가 배운 책이기도 하고 신라의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에 들어가 있기도 했다.
역사서나 문학서를 읽고 글을 지을 때 필수적으로 갖춰 놓아야 하는 것이 사전이다. 고구려에서 『옥편』·『자통』·『자림』 등의 사전을 읽었다는 것은 그만큼 한문 수준과 유교 수준이 높았음을 반영한다.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증보한 사전 『자림』은 『후한서』나 『문선』 등 중국의 고대 전적을 읽는 데 매우 유용했다. 한편, 글씨의 서체가 전서 다음에 예서와 해서가 사용되는 추세가 유행하자 다시 자서(字書)를 편찬하게 되었는데, 고야왕(顧野王)의 『옥편』이 유명하다. 이후 불교용어까지 참조하여 어휘가 늘어난 『자통』은 『자림』에 비해 상세한 설명이 곁들여졌다(노용필, 2013).
‘유교와 불교는 성한데 도교가 성하지 않아 삼교가 정립되지 않았다’는 연개소문의 말도 고구려 후기 유교 수준이 불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연개소문의 도교진흥책이 불교계의 반발을 불러와 승려 보덕이 완산주로 망명했으며, 보장왕은 도사를 존중하여 유사(儒士) 위에 두었다. 그렇다면, 유교는 도교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이 대목에서 주목되는 것이 고구려 사람들이 즐겨 읽었다는 손성(孫盛)의 『진춘추(晉春秋)』이다.
『진춘추』는 『진양추(晉陽秋)』로도 불리는데, 동진 간문제(재위 371~372년)의 생모 정태후의 이름 ‘아춘(阿春)’을 피휘하여 춘(春) 대신 양(陽)을 썼기 때문이다. 공자가 지은 『춘추』라는 책명을 따와 진의 역사책이란 의미에서 『진춘추』라고 하였는데, 편년체로 234년부터 420년에 이르는 시기를 다루고 있다. 『진춘추』의 역사로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유학의 도의를 앞세워 상고의 예제를 회복할 것을 주장하면서 현학(玄學: 노장)에 대하여 반대하는 명확한 입장을 표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유교 입장에서도 『진춘추』처럼 연개소문의 도교진흥책에 대하여 반대 입장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노용필, 2013).
유교의 예제 가운데 구체적인 것으로 상장례가 있다. 고구려의 상장례를 기록한 『수서』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빈(殯)을 치르고 3년이 지나면 길일을 택하여 매장한다고 하였다. 고구려에서 3년상이 치러진 구체적인 사례는 광개토왕이다. 광개토왕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412년 10월에 죽었고, 〈광개토왕릉비〉에 의하면 414년 9월 29일에 묻혔다. 죽은 날과 묻힌 날의 달수를 계산하면 24개월이고 햇수는 3년이다. 그래서 보통 광개토왕의 상장례 기간을 3년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전통적인 3년상에 의하면 그 기간은 25개월 또는 27개월이고 특별한 경우 36개월이다. 광개토왕의 장례 기간은 24개월이고 3년에 걸쳐 있다. 3년이 지나면 길일을 택한다고 했으므로 24개월도 3년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3년을 지난다’는 표현은 적어도 대상(2주기)을 치르고 난 후를 말하는 것이다. 3년상의 예로 25개월이 아닌 24개월 3년상이 치러진 적은 없다. 따라서 광개토왕의 24개월 장례 기간은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 고국양왕의 죽음과 광개토왕의 즉위 사이에는 연대 논란이 있는데, 영락 연호가 유년 칭원이라면 광개토왕의 즉위 연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391년보다 1년 앞선 390년이 된다. 죽은 해도 412년이 아니라 411년으로 1년이 앞당겨질 수 있다. 411년 10월부터 414년 9월 23일까지 달수를 계산하면 36개월이 된다. 당의 왕원감(王元感)과 청의 모기령(毛奇齡)도 36개월 3년상을 주장했다(조경철, 2012).
광개토왕 이후 3년상이 치러졌는지 알 수 있는 확실한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구려 후기에도 3년상이 치러졌을 가능성은 남아 있다. 안원왕의 연가 연호 반포와 안원왕의 죽은 연대가 한 사례이다.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의 조성 연대는 일반적으로 안원왕 9년(539년)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연가 1년은 안원왕 3년(533년)이 된다. 안장왕은 531년 5월에 죽었으므로 25개월 또는 27개월 3년상이 끝나는 시기는 533년 5월이나 533년 7월이 된다. 이때 연가 연호를 반포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기간을 조금 앞당겨 533년 정월 태자를 책봉하면서 연호를 반포했을 수도 있다. 신라 선덕여왕의 경우도 비슷하다. 진평왕이 632년 1월에 죽었고, 선덕여왕은 634년 정월 인평(仁平) 연호를 반포하였다. 진평왕의 3년상은 25개월일 경우 634년 정월에 끝나고 27개월일 경우 634년 3월에 끝난다. 선덕여왕이나 안원왕이나 3년상이 끝나는 해 정월에 새로운 연호를 반포한 셈이다.
다음은 안원왕의 죽은 연대와 관련해서다. 안원왕이 병들어 누워 있을 때 다음 왕위를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졌다. 중부인이 낳은 세자를 미는 추군 세력과 소부인이 낳은 왕자를 미는 세군 세력의 싸움이었다. 이 와중에 안원왕은 죽고 추군의 세자 양원왕이 다음 왕위를 이었다. 이때 세군 사람 2,000여 명이 죽었다고 한다. 한편 안원왕이 죽은 시기도 당시 정세를 반영하듯 기록마다 다르다. 『삼국사기』는 안원왕이 죽은 때를 545년 3월이라 했고, 『일본서기』에서 인용한 『백제본기』는 545년 12월이라고 하고 양원왕이 즉위한 때를 546년 정월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는 단지 안원왕이 죽은 사실만 언급한 반면, 『백제본기』는 추군, 세군의 싸움에 대한 자세한 정황을 설명하고 있다. 한편 『양서(梁書)』와 『남사(南史)』는 안원왕이 죽은 해를 548년이라고 하여 앞의 두 책과 3년간의 차이가 난다.
백제 위덕왕의 즉위 연대도 기록마다 차이가 난다. 『삼국사기』는 554년 7월에 성왕이 관산성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했으므로, 위덕왕은 554년 8월 이후 즉위한 것이 된다. 부여 왕흥사터 사리감에는 555년에 즉위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성왕이 죽은 때를 554년 12월이라고 하고, 위덕왕이 즉위한 해를 557년 3월 1일이라고 하여 3년간의 차이가 난다. 한편 무령왕과 무령왕비의 3년상은 28개월 3년상이었다(조경철, 2009).
신라 지증왕의 경우 『삼국사기』는 500년에 즉위했다고 하였고, 『삼국유사』는 기이편 ‘지철로왕(智哲老王)’ 항목에서 500년 또는 501년이라고 하였다. 전왕 소지왕은 500년 11월에 죽었다. 503년에 세워진 〈포항냉수리신라비〉에서는 지증왕을 정식 왕을 칭하지 못하고 갈문왕(葛文王)이라고 칭했다. 소지왕의 마지막 기사 등으로 유추하여 소지왕과 지증왕 사이에 정변이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지증왕이 즉위한 연도도 3년의 차이가 난다.
고구려의 안원왕-양원왕, 백제의 성왕-위덕왕, 신라의 소지왕-지증왕에 이르는 왕위 계승에 정변적 요소가 보이고, 그들의 사망 혹은 즉위 연대도 3년의 차이가 난다. 겉으로 보면 3~4년간의 불완전한 왕위 계승 정황으로도 보일 수 있지만, 다음 왕위를 이어갈 왕이 왕위 계승의 혼란을 유교적 예제의 3년상으로 포장하여 자신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고자 한 의도로 해석할 수도 있다.
고구려, 신라의 경우 확실히 3년상을 밝히긴 어렵지만, 백제 위덕왕의 경우 554년 12월 성왕의 사망부터, 정확히는 온전한 시신의 수습부터 557년 3월 1일에 이르기까지 즉위한 기간이 유교의 전통 예제인 27개월 3년상에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고구려 안원왕의 뒤를 이은 양원왕은 추군과 세군의 싸움 와중에 아버지 안원왕이 죽은 사실을 당분간 숨겼을 수도 있다. 545년 3월에 죽었는데 12월에 죽었다고 발표했을 수도 있다. 추군의 양원왕은 왕위에 오른 후 아버지 안원왕의 추모 분위기로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 아버지 안원왕의 장례를 3년상으로 치른 뒤 548년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을 수도 있다. 안원왕은 545년에 죽었고 548년에 양원왕이 즉위했다면 『양서』와 『남사』에 양원왕이 548년에 죽었다는 기사는 전후 문맥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태청 2년(548년) 연(안원왕)이 죽자 그 아들(양원왕)로 하여금 연의 작위를 잇도록 하였다(太淸二年, 延卒, 詔以其子 襲延爵位)”에서 548년은 연이 죽은 해를 말하는지 아들(양원왕)이 연의 작위를 이은 해인지 확실하지 않다. 두 사건이 같은 해에 일어났을 수도 있지만, 연이 죽은 것은 이전이고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른 해가 548년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고구려와 신라의 경우 3년상의 장례가 백제처럼 정확히 28개월 또는 27개월은 아니지만 25개월 또는 36개월 등 다양한 경우의 수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 후기 귀족연립정권기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한 상황에서 3년상의 장례 절차는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3년상은 고구려의 유교에 대한 이해와 예제 질서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