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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역사서 편찬과 문학 및 참언

2. 역사서 편찬과 문학 및 참언

1) 고구려 후기의 역사서
고구려는 광개토왕-장수왕-문자명왕 때까지 전성기를 이어왔다. 그러나 안장왕이 살해되고, 추군과 세군의 싸움 와중에 안원왕이 사망하고,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혜량이 신라로 망명하는 등 안팎으로 어지러운 시기를 겪었다. 다행히 왕고덕과 의연이 불교계를 정비한 평원왕 때를 전후하여 안정을 찾아갔다.
그런데 평원왕의 뒤를 이은 영양왕이 590년 즉위하기 전 중국에 큰 변화가 있었다. 오랫동안 5호16국, 남북조로 분열을 겪고 있던 중국에 새로운 강자 수가 등장하였다. 수는 589년 남조의 마지막 왕조인 진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고구려는 통일왕조 수와 우호관계를 맺으면서도 장차 수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평원왕은 남조의 진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훈련하고 군량을 쌓아 방어할 계책을 세웠으며 수비에만 머무르지도 않았다. 수가 중국을 통일한 다음 해에 왕위에 오른 영왕왕은 598년에 말갈의 무리 1만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공략하였다. 수가 수군과 육군 30만 명을 거느리고 반격하였으나 고구려는 이를 물리쳤다.
안장왕-안원왕-양원왕으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의 혼란기를 벗어나 양원왕-평원왕-영양왕의 안정기를 거친 후 수의 공격을 물리친 영양왕은 600년에 새로운 역사서의 편찬을 명하였다. 고구려는 국초(國初)부터 역사책을 편찬하는 전통이 있었으며, 중국 역사서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중국의 『구당서』에는, 고구려에서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 범엽의 『후한서』, 진수의 『삼국지』를 비롯하여 손성의 『진춘추』를 읽었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 언급되지 않은 다른 역사책도 있을 것이다. 고구려의 승려 도현이 편찬한 『일본세기』에서는 『춘추』를 인용하고 있다. 『진춘추』는 조금 생소한 역사책인데 도교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영양왕 11년(600년), 왕은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옛 역사를 요약하여(約古史) 『신집』 5권을 만들게 하였다. 국초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할 때 어떤 사람이 사실을 100권으로 기록하여 이름을 『유기(留記)』라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깎고 고쳤다고 한다. 국초에 『유기』를 편찬했다고 하는데 구체적인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나라를 세운 동명성왕이나 3대 대무신왕 때로 보거나, 어느 정도 나라 형태를 갖춘 기원 전후로 보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백제와 신라의 역사 편찬과 비교하여 소수림왕이나 광개토왕 때로 보고 있는 듯하다(이기백, 1978).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서술이 미천왕 때까지는 설화적 기사가 많은 반면, 고국원왕, 소수림왕 때부터 그렇지 않은 것도 『유기』 편찬을 소수림왕 때로 보는 한 이유이기도 하다(이기동, 1999). 한편, 봉상왕 때까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경우 중국 고전을 인용한 미사여구를 많이 사용한 반면 미천왕부터 그렇지 않다고 하여 미천왕 때 『유기』가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조우연, 2019).
『유기』의 성격은 신화, 전설이나 왕가의 계보 따위를 기록한 역사책으로 보고 있다. 『유기』란 책 이름도 훌륭한 조상의 신이한 일을 기록으로 남겨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 『신집』은 종래의 『유기』와 구별되는 현실적·실용적인 성격의 역사책으로 보고 있다. 100권이나 되는 『유기』에 비해 『신집』이 겨우 5권으로 줄어든 것은 『신집』이 『유기』의 단순한 요약이 아니라 성격 자체가 크게 달라진 것이라고 하였다(이우성, 1976). 『유기』는 기전체로 편찬되었으나, 이후 편년체나 기사본말체로 바뀌었다고 보기도 한다(조우연, 2019).
『신집』이 『유기』를 참조한 새로운 형식의 축약본이라면, 『유기』가 편찬된 이후부터 600년까지의 역사도 『신집』에 포함되지 않았을까? 옛 역사를 요약하여 『신집』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고사(古史)’는 말 그대로 ‘옛 역사’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옛 역사서’를 말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옛 역사를 요약하였다 하더라도 그 안에 옛 역사서를 참고했을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약고사’는 ‘옛 역사서를 참고하여 옛 역사를 요약하여’란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그래서 『신집』 5권을 편찬했다는 기록 뒤에 바로 이어서 ‘옛 역사서’에 해당되는 『유기』를 언급하여 “국초에 『유기』란 역사책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고사(古史)’가 전후 문맥상 국초의 『유기』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여 『유기』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신집』 이전에 『유기』가 대표적인 역사책이지만 국초에서 600년까지 이르는 사이 당연히 다른 여러 형태의 역사책도 편찬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국초’란 말 뜻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말 그대로 ‘국초’는 일반적으로 나라를 세우고 얼마 되지 않은 시기를 말한다. 아무리 넓게 잡아도 3대 100년을 넘어서진 않을 것이다. 고구려 건국이 기원전 37년이고, 주몽의 손자 대무신왕의 재위 연간은 18~44년이다. 앞서 신채호와 이우성이 언급한 동명성왕-대무신왕 시기를 전후하여 『유기』가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국초’란 용어는 한 번 더 보인다. 최치원의 문인들이 국초에 고려에 내조했다고 한다. 이 기사에 이어서 태조 왕건의 손자 현종이 최치원에게 문창후(文昌侯)란 시호를 내렸다고 한다. 고려 건국이 918년이고 현종의 재위 연간은 1009~1031년이다. 『고려사』에 나오는 국초는 대체로 성종 때 이전을 말하고 있다. 성종의 재위 연간은 981~997년이다. 현종은 태조 왕건의 손자로 3대에 해당되고 성종도 태조 왕건의 3대이다.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 때 박사 고흥이 『서기』를 편찬했고, 신라는 진흥왕 때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했다. 백제와 신라 모두 역사편찬자가 알려졌다. 그런데 근초고왕과 비슷한 시기인 고구려 소수림왕 때 『유기』가 편찬되었다면 그 편찬자도 알려졌을 것이다. 단지 어떤 사람(有人)으로만 나오는 것은 『유기』가 아주 오래전 ‘국초’에 편찬되었다는 것과 호응하는 서술 표현으로 보인다.
『유기』는 100권이고 『신집』은 5권이다. 참고로 『삼국사기』는 총 50권이고, 그중 고구려본기는 10권이다. 권수의 분량이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국초까지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의 분량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10배에 해당되는 100권에 이른다는 것은 매우 많은 권수이다. “國初 始用文字 時有人 記事一百卷 名曰留記”는 보통 ‘나라 초기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할 때 어떤 사람이 사실을 100권으로 기록하여 이름을 『유기』라 하였다’고 번역한다. ‘국초, 문자 사용, 어떤 사람, 100권, 『유기』’를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이 특정한 책을 만들었다고 보지만, 처음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할 때 곧바로 어떤 사람이 『유기』 100권을 지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이다. 국초에 비로소 문자를 사용할 때부터 때마다 지금까지 어떤 사람이 기사를 기록했는데, 100권에 이르렀다고 보면 어떨까. 책 이름인 『유기』도 ‘남겨진 기록’이라는 의미를 담아 국초부터 이름이 생겨 계속 이어져 온 것으로 생각된다(조경철, 2012; 조범환, 2015). 『유기』란 일종의 실록모음집 역할을 했다.
이문진이 편찬한 『신집』은 새로운 역사서라기보다 『유기』를 비롯한 여러 역사서를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요약한 것으로 보인다. ‘특정한 목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신집』의 ‘신(新)’이란 단어에서 새롭게 무언가를 해나가고자 한 의지는 읽을 수 있다. 국초의 『유기』를 산수(刪修: 깎고 고침)하고, 그 이후의 여러 역사책을 요약해서 분량이 5권이라면 『신집』은 왕실이나 왕계와 관련된 내용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안장왕이 그냥 죽었다고 하였으나 『일본서기』에는 시해되었다고 하였고, 『삼국사기』에는 양원왕의 왕위 계승이 순탄한 것처럼 되어 있으나 『일본서기』에는 추군과 세군의 싸움으로 2,000여 명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양왕은 안장왕-안원왕-양원왕으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의 난맥상을 삭제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노태돈, 1999; 임기환, 2004). 『신집』 편찬에는 동명성왕에서 자신까지 이르는 왕계를 정리하면서 왕실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은 덜어내기 위한 영양왕의 목적도 있었다.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이문진이 역사서를 편찬한 것처럼 승려들도 역사서를 편찬하였다. 고구려의 승려 도현은 불교 전적뿐만 아니라 유교 전적도 두루 섭렵하였다. 도현은 백제가 멸망하기 전에 일본으로 건너가 후지와라노 가마타리(藤原鎌足)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치·군사고문 역할을 수행했다. 도현은 다이안사(大安寺)에 머물며 불법을 전파하면서 『일본세기』 몇 권을 저술하였다. 『일본서기』는 네 군데에서 『일본세기』를 인용하고 있는데, 우리 사료에 없는 내용도 보인다. 도현은 『춘추』의 ‘초국(楚國)과 등국(滕國)의 고사’를 인용하여 661년 당의 침략을 격퇴할 때 여세를 몰아 당군을 섬멸했다면 고구려가 망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다(박재용, 2007).
 
2) 고구려 후기의 문학과 참언
고구려 사람들은 유교 경전이나 역사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학작품을 접하고 직접 짓기도 하였다. 특히 양나라 소명태자가 엮은 글모음집인 『문선』을 좋아하였다. 『문선』에는 진·한 이후 제(齊)·양(梁)의 시(詩)·서(書)·부(賦) 등이 수록되었다. 신라에서는 독서삼품과의 상품(上品) 시험과목이었다. 『문선』에는 도연명의 시 9편이 실렸고, 소명태자는 나중에 『도연명집』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에서 『문선』을 특히 좋아했다면 도연명의 시도 널리 읽혔을 것으로 짐작된다. 〈집안고구려비〉에 “古人之慷慨”란 구절이 보이는데, 이는 도연명의 〈감사불우부(感士不遇賦)〉에 나오는 구절이다. 두 구절의 연관성은 〈집안고구려비〉의 건립 연대와 관련하여 논란이 있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시 한 수를 지어 보냈다.
神䇿究天文 신묘한 계책은 천문을 꿰뚫었고,
妙筭窮地理 신묘한 계책은 지리를 다하였네.
戰勝功旣髙 싸워서 이긴 공이 이미 높았으니,
知足願云止 만족할 줄 안다면 그치면 어떠할까. _ 『삼국사기』(국사편찬위원회 번역)  
이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는 상대방을 치켜올리고 승리에 대한 자신감과 은근히 조롱하는 분위기를 담은 시였다. 마지막 구의 ‘知足’은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안장왕 때 한강 유역에 사는 한씨(漢氏) 미녀가 왕을 맞이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를 통해 안장왕의 남방 진출과 재지세력과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강진원, 2016). 평원왕 때 바보 온달(愚溫達)과 평강공주 이야기는 여러 사람에게 회자된 것 같다. 『삼국사기』 온달전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설화가 섞여 있다. 바보 온달이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공주를 만나 글과 활쏘기를 배워 나라에 공을 세운다는 이야기이다. 매년 봄 3월 3일에 열리는 낙랑언덕의 사냥대회에 참여하여 두각을 나타낸 온달은 위로는 북주의 침략을 물리치는 전공을 세우고, 아래로는 잃어버린 한강 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신라와 싸웠으나, 불행히 아단성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한다. 그의 관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다가 공주가 직접 내려와 관을 어루만지니 움직였다고 한다.
신라의 김춘추가 백제를 정벌할 군대를 요청하기 위해 고구려에 가서 일이 어긋나 억류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선도해(先道解)란 사람이 김춘추를 찾아와 거북이와 토끼 이야기(龜兎之說)를 해주었다. 토끼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간을 따로 숨겨놓았다고 거짓말을 했듯이 당신도 일단 거짓말을 해서 위기를 모면하라는 얘기였다. 김춘추는 왕(선덕여왕)과 상의하여 옛 고구려 땅을 돌려주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빠져 나왔다(『삼국사기』).
오늘날 〈별주부전〉으로 전하는, 이 이야기의 원전은 불교에 나오는 석가모니의 전생담과 관련 있다. 하지만 등장하는 동물과 이야기 전개는 우리식으로 바뀌었다. 고구려는 불교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를 나름대로 바꾸어 활용하였다.
연개소문이 중국에서 도사와 천존상을 받아들이고 도교를 유교와 불교 위에 두려고 하자 고구려 사회는 뒤숭숭해졌다. 때로는 서로서로 자신의 종교를 앞세우기 위해 상대방 종교를 알게 모르게 비방하였다. 도교를 비난하기 위해 참언을 활용하기도 했다. 승려 보덕은 도교 진흥에 반대하여 옛 백제 땅(신라 완산주)으로 망명하였다.
연개소문이 원래 수나라 사람 양명의 환생이라는 이야기도 퍼졌다.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당서』에 의하면, 수 양제가 요동을 정벌할 때 비장으로 참가한 양명은 죽으면서 ‘내가 반드시 고구려에 총신으로 태어나 저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다’라고 하였다. 연개소문의 개(盖)를 풀면 양명(羊皿)이 된다. 또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고구려본기에는 수 양제가 쳐들어왔을 때 고구려가 거짓 항복하는 체하면서 숨긴 활을 꺼내 양제를 쏘니 그 옆에 있던 우상(右相) 양명이 ‘신이 다음 생에는 고구려의 대신으로 태어나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중국의 도사 아니면 고구려의 불교계가 만들어 유포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전생에 수나라 사람이었던 연개소문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도교를 퍼뜨리고 있으니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했을 것이다.
연개소문의 전생이 수나라 양명이었다면, 김유신의 전생은 고구려 추남(楸南)이었다는 참언도 떠돌았다.
물이 아래에서 위로 흐르고 동물의 암컷과 수컷이 서로 바뀌는 일이 생겨 점쟁이 추남을 불러 연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대왕의 부인이 음양의 도를 역행하였기 때문이라 답했다. 왕과 부인이 놀라 다른 일로 추남을 시험해보았다. 상자 안에 쥐 한 마리를 넣고 무엇이 들어 있냐고 물었다. 추남은 쥐가 들어가 있는데, 모두 여덟 마리라고 하였다. 왕과 부인은 추남이 허튼소리를 한다고 하여 목을 베었다. 죽으면서 추남은 ‘내가 죽어 반드시 대장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리라’ 하였다. 사람들이 미심쩍어 쥐의 배를 갈랐더니 새끼 일곱 마리가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나중에 죽어 고구려를 멸망시킬 대장이 된다고 한 추남의 환생이 김유신이라고 여기고, 사람을 보내 김유신을 죽이려고 하였다. _ 『삼국유사』  
고구려를 지킬 연개소문은 고구려를 침략했던 수나라 사람 양명의 환생이고, 고구려를 멸망시킬 김유신은 고구려 왕에게 버림받은 추남의 환생이라거나, 900년이 되기 전에 당의 팔십대장(이적)에게 멸망할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는, 고구려 멸망 즈음에 고구려가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떠다니는 참언이었다. 이러한 참언은 고구려인들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서로 간의 믿음을 손상시켜 내분을 초래하기도 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한 고구려 승려 도현이 지은 『일본세기』에도 고구려 멸망과 관련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쥐가 말의 꼬리에서 태어났는데, 도현은 이것을 고구려가 일본에게 속한다는 길조라고 풀었다. 쥐는 삭방(북방)을 취한 것이고, 말은 건괘(乾卦)를 취한 것인데, 고구려는 서북이니 자(子: 쥐)에 해당하고, 일본은 동남이니 오(午: 말)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연개소문의 환생, 김유신의 환생, 쥐가 말꼬리에서 태어났다는 참언은 유교나 불교보다 도교에 가깝다. 고구려는 삼교 정립을 위해 도교진흥책을 펼쳤지만, 도교적 참언이 오히려 국가 멸망을 재촉하는 부정적인 역할로 기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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