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 건국 이전 요서 지역의 상황
1. 수 건국 이전 요서 지역의 상황
6세기 중엽 돌궐이 초원 유목지역의 패자가 되었다. 돌궐은 알타이산을 본거지로 대대로 야철업에 종사하던 부족으로 5세기 중반부터 유연에 복속되었다. 돌궐은 사서에 ‘흉노별종(匈奴別種)’, 혹은 ‘평량잡호(平凉雜胡)’라 되어 있다. 흉노 북쪽에 거주했던 정령(丁零)의 한 갈래로 고차(高車), 철륵(鐵勒)과 동일한 민족에 속한다.
돌궐이 유연을 대신해 북방의 강자로 부상하자 당시 전쟁이 끊이지 않던 북제와 북주는 서로 먼저 돌궐과 화친을 맺으려 했다. 돌궐은 주위세력의 견제 없이 더욱 성장하여 몽골초원에서 지금의 카스피해에 이르는 곳까지 세력을 확장했고, 주변의 에프탈(嚈噠)과 사산조페르시아 등을 격파하고 동로마제국과 직접 교섭을 도모하는 한편, 소그드 상인을 이용하여 동서 교역을 주도했다(강선, 2006). 돌궐은 이때 교역에 필요한 물자, 특히 비단을 중국에서 약탈이나 공납 등의 방법으로 획득하였다.
타발가한(佗鉢可汗) 시기 돌궐이 중원을 침공하려 하자 북주는 매년 온갖 종류의 비단 10만 단(段)을 바치고 겨우 침략을 모면하였다. 당시 북주가 경사(京師)에 체류한 돌궐인을 극진히 예우하였기 때문에 그들 중 상당수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북제 역시 그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많은 비단과 물자를 바쳤다. 『주서(周書)』에“남방의 두 자식(북주, 북제)이 효성스럽고 순종하니 어찌 물자 부족을 근심하랴” 했다는 타발가한의 의기양양한 언급은 당시 돌궐과 중원세력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돌궐에 제공할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백성들의 힘을 고갈시키고”, “부고(府庫)의 재물을 모두 소진할” 정도였다고 『수서(隋書)』북적전(北狄傳)에 나올 정도였다(정순모, 2012).
유목국가는 엄혹한 환경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주변 정착민들과 교역을 하거나 약탈을 하여 생계를 유지해갈 수밖에 없었다. 중국으로서는 진한대 이래 유목세력의 침입과 약탈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두고 고심해왔다. 6세기 대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돌궐과 가까운 중국의 북방 지역은 유목민들이 필요한 물자를 획득하는 곳이었다. 중국 왕조들은 유목민들의 약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호시(互市)를 개설하여 교역을 하거나 공물(貢物)을 주는 유화책을 쓰기도 하고, 때로는 군사 행동을 통해 침략을 저지하는 강경책을 쓰기도 했다. 당시 돌궐은 일상용품의 획득에 그치지 않고 동서 중계무역에 사용할 물건을 중원으로부터 조달하려 했으므로 더 많은 물자가 필요했다(정순모, 2012). 북주와 북제의 분열은 중국에서 물자를 획득해야 하는 돌궐에게 유리한 상황을 제공했다.
6세기 중후반경 요서 지역에는 강대세력인 돌궐과 그 영향력 아래 있던 거란, 해, 습, 말갈, 북제의 영주자사(營州刺史)인 고보녕(高保寧) 세력, 그리고 이곳에 거점을 마련하고 세력권을 확장하기 위해 들어와 있던 고구려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 중 고보녕 세력은 지금의 중국 요령성 조양(朝陽)에 있던 황룡성(和龍城)에 웅거하고 있었다.
고보녕은 『북제서(北齊書)』에 대인(代人)으로 그 내력을 알지 못한다고 나온다. 그는 북제 무평(武平, 570~576년) 말엽 영주자사가 되었는데, 이하(夷夏)가 그의 위엄과 신망을 귀중히 생각했다고 한다. 또 『수서』 음수전(陰壽傳)에는 고보녕이 북제 왕실의 먼 친척이었는데, 사람됨이 사납고 교활하며 속셈이 있어서 북제 때 황룡성을 오래도록 진수하고 있었고, 북제가 멸망하자 북주의 무제로부터 다시 영주자사직을 수여받았고, 화이의 마음을 깊이 얻었다고 나온다. 『북제서』에 이하가 고보녕의 위엄과 신망을 귀중히 생각했다고 한 것과 『수서』에 그가 화이의 마음을 깊이 얻었다는 것은 모두 고보녕이 북제와 북주의 영주자사로 있으면서 한인(漢人)뿐 아니라 거란 등 요서 제종족을 잘 다스려서 그들로부터 지지를 얻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보녕은 북제의 영주자사였지만 북제 멸망 후 북주로부터 영주자사직을 다시 받아 북주의 관인으로서 요서에 계속 주둔하고 있었다. 그는 578년 6월 노창기(盧昌期)가 북주 무제의 사망을 틈타 범양성(范陽城: 河北省 涿州)을 점거하고 북제 부흥운동을 벌일 당시 그에 호응하여 이하의 기병 수만 명을 이끌고 갔다. 그러나 노창기의 봉기가 실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회군했다(이정빈, 2018). 고보녕은 실제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북제 부흥운동에 동참할 뜻이 있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고보녕은 581년에 돌궐의 사발략가한(沙鉢略可汗, 581~587년)과 연합하여 582년과 583년에 수를 침공했으나 실패했다.
요서 지역에 웅거했던 고보녕 세력과 고구려의 관계를 두고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당시 돌궐, 고보녕 세력, 고구려가 연합하여 북주에 맞섰다고 보는 설이다(김택민, 2014). 즉 570년대 후반에 돌궐, 고보녕 세력, 고구려가 반북주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고구려와 돌궐이 오랫동안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우호적인 관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관한 근거 사료는 온달이 평원왕(559~590년) 대에 후주(後周) 무제의 요동 정벌에 맞서 이산(肄山)의 들판에서 전투를 하였다고 나오는 『삼국사기』 온달전의 기사가 유일하다. 온달전에 나오는 후주를 북주라고 본 것이다(李基白, 1996; 김진한, 2020).
그런데 당시 고구려와 북주는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양국이 직접 군사적 충돌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고구려가 말갈병과 거란병을 보내 고보녕 세력을 지원했다고 보는 설이 나왔다(韓昇, 1995; 王小甫 주편, 2003; 金鎭漢, 2010; 趙娟, 2011; 鄭媛朱, 2013). 고보녕이 동원했다는 말갈병과 거란병이 원래 고구려 세력 아래 있던 병력이었다고 이해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당시 국제적으로 돌궐·고보녕·고구려 연합세력과 북주가 대결구도를 이룬 것으로 보았다.
다른 하나는 온달전에 나오는 후주를 고보녕 세력으로 본 설이다(여호규, 2002; 이정빈, 2018; 정동민, 2021). 이 설의 경우, 북주의 무제(560~578년)가 고구려를 공격한 사실이 온달전에만 보인다는 점, 당시 두 나라가 영역을 마주한 적이 없다는 점, 이때 요서에 고보녕 세력이 웅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와 북주가 고보녕 세력을 배제한 채 직접 전투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이정빈, 2018) 등을 감안할 때, 온달전의 후주는 북주가 아니라고 보았다. 평원왕이 북주를 계승한 수로부터 높은 책봉호를 제수받았다는 점, 돌궐이 최강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국제정세 속에서 고구려가 대립관계에 있었던 돌궐과 연합하여 북주와 싸울 이유가 없다는 점, 수 문제가 583년 돌궐 토벌에 나서면서 내린 조서에 돌궐과 갈등을 빚고 있는 대상으로 고구려가 언급된 점(정동민, 2019; 2021)도 근거로 삼았다. 이 설의 경우 돌궐·고보녕 세력과 고구려가 당시 요서 지역에서 서로 대결하고 있었다고 본다.
온달전에 나오는 후주를 북주라 보는 설과 고보녕 세력으로 본 설 모두 근거 사료가 다른 사서에 전혀 나오지 않고 『삼국사기』 온달전에만 나온다는 점에서 취약점이 있다. 온달전 자체가 설화 형태로 구성되어 있으며, 당시 국제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온달전의 내용이 사료로서 신빙성을 갖기 위해서는 그렇게 볼 수 있는 근거를 더 제시해야 한다.
수 건국 이전 시기에 요서 지역을 둘러싼 세력들의 역학구도가 어떠했는지는 수 건국 이후 상황과 직접 연결되는 문제다. 추후의 상황 전개를 통해 이전 시기의 상황을 유추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수는 북주 정권을 탈취하여 세운 나라였지만 정치제도나 정책 등 제반 면에서 북주를 승계한 나라였다. 그런데 수 건국 이후 고구려와 처음으로 외교관계를 맺을 때, 과거사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다. 물론 새로운 나라가 건국되었으므로 이전 왕조 때 일을 거론할 필요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북주와 싸웠다는 시기와 그리 멀지 않은 때이고 인적 구성이 거의 그대로 계승되었으므로 과거사에 대한 정리를 하고 새롭게 관계를 체결할 가능성이 더 많지 않을까 싶다. 이런 점에서 고구려와 북주가 직접 군사적 충돌을 한 적은 없었다고 보는 쪽이 더 타당하다.
이와 관련하여 고보녕이 577년 10월까지는 북주와 정면으로 대립하지 않았고, 대외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북주의 영주자사였으므로, 고구려 입장에서 볼 때 고보녕 세력이 북주로 인식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설명이 있다(이정빈, 2018). 고구려와 북주는 당시 지리적으로 거리가 있었고, 요서 지역에서 직접적으로 맞닥뜨리는 세력은 돌궐과 고보녕 세력이었다. 돌궐은 양원왕 대에 고구려의 서변 요충지인 신성(新城)을 포위, 공격해 왔다. 이로 인해 장기간 지속되어 왔던 고구려 서변지역의 안정이 깨지게 되었다. 돌궐과 고보녕 세력은 서로 힘을 모으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요서 지역에서 고구려와 군사적으로 충돌한 세력은 북주보다는 돌궐과 고보녕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렇다면 돌궐·고보녕 세력과 고구려는 왜 요서 지역에서 충돌했을까? 이와 관련해서 북제의 업성(業城)이 북주로부터 공격받자 고보녕이 한족으로 편성한 정예병과 거란·말갈 기병 만여 명을 이끌고 가서 구원하고자 했다는 대목이 주목을 끈다. 당시 고구려는 시라무렌강(Shira Müren) 유역에 거주하던 거란 부족 일부와 송화강(松花江) 일대에 거주하던 속말(粟末)말갈을 예하에 두고 있었고, 눈강(嫩江) 유역의 제제합이(齊齊哈爾)을 중심으로 흥안령(興安嶺)산맥 이동 이륵호(伊勒呼)산맥 이남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실위(室韋)에 철을 수출했다(李龍範, 1966).
거란과 말갈이 이 시기에도 여전히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되지 않고 여러 부족으로 나눠져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보녕이 이끈 거란·말갈과 고구려에 속해 있던 거란·말갈이 서로 다른 정치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거란과 말갈을 서로 자기 세력 아래 넣기 위해 고보녕 세력 및 그를 지원하는 돌궐이 고구려와 경쟁하는 과정에서 충돌한 것이 온달전에 나오는 이산전투였던 것이다. 이 정치세력들이 거란과 말갈을 두고 경쟁한 이유는 정치적인 목적 외에 경제적 이해관계도 걸려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