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수의 건국과 고구려의 상황 변화
2. 수의 건국과 고구려의 상황 변화
581년에 수가 건국하면서 요서 지역의 상황은 급변했다. 수의 연이은 공격으로 돌궐 세력이 약화되었고, 고보녕 세력도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두 세력의 영향력 아래 있던 요서 제종족이 새로운 강대세력인 수의 그늘에 들어가 생존을 유지하고자 애를 쓰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수는 예상과 달리 초기에는 본격적으로 요서 지역을 장악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기존세력이 물러나고 새로운 세력이 아직 들어오지 않은 힘의 공백기가 생겼고, 고구려는 이를 틈타 요서 지역 거란과 말갈 등에 대한 지배권을 더 확대하고 강화하려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구려와 수는 요서 지역에서 직접 대면하게 되었다.
수가 건국하자 고구려는 사신을 파견하여 축하했다. 581년 12월부터 584년까지 여덟 차례나 사신을 파견하고 조공을 하는 등 외교 활동을 발 빠르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런 한편으로 수의 내부 정세를 파악하려는 노력도 병행했다(金善昱, 1984b; 여호규, 2002). 수는 고구려에 훈관과 작호로 구성된 책봉호를 내렸다. 이 책봉호에는 군사권의 위상과 범위를 나타내는 지절호(持節號), 장군호(將軍號), 도독제군사호(都督諸軍事號) 등이 없고, 동이교위(東夷校尉)나 동이중랑장(東夷中郎將)도 없다. 이는 고구려가 그동안 유지해왔던 독자적인 세력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수의 입장을 보여준다(여호규, 2002).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수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585년에 갑자기 수에 대한 조공을 중지하고 진(陳)에 사신을 파견했다. 이를 두고 고구려, 돌궐, 진이 연대하여 수를 포위하려는 전략이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정순모, 2012). 고구려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대외정책의 방향을 급전환했을까?
건국 초기 수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돌궐이었다. 돌궐은 북주와 북제가 갈라져 있을 때 두 나라를 조정하면서 생존과 교역에 필요한 물품을 얻어냈다. 그러나 수가 건국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수는 북주와 달리 돌궐에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수는 북주 때 돌궐에 바쳐왔던 세공(歲貢)을 중단하고, 장성을 중심으로 군사시설을 보수하고 유주(幽州)와 병주(幷州)에 군사를 주둔시키는 등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때마침 자연재해까지 발생하여 돌궐의 생산기반은 더 약해지게 되었다(정재훈, 2016). 그러자 돌궐 지배 아래 있던 복속민들도 반란을 일으켰다. 돌궐은 총체적으로 난국에 처하게 되었다.
가장 큰 어려움은 내부에서 발생했다. 581년에 타발가한이 죽은 후 돌궐은 사발략가한과 그 동생인 처라후(處羅侯), 숙질형제인 아파가한(阿波可汗), 달두가한(達頭可汗), 돌리가한(突利可汗)이 서로 나눠져 대립하고 있었다. 수는 이간책을 써 돌궐 세력을 분열시키면서 동시에 군사활동을 통해 압박을 가했다. 사발략가한은 고보녕과 연계하여 임유진(臨渝鎭)을 공략했다. 이에 수는 장성을 수리하고 둔병을 두어 대비했다. 돌궐과 고보녕 세력은 582년 5월에 평주(平州)와 장성을 공격했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583년 4월 수 문제(재위 581~604년)는 돌궐에 대한 공격을 명하는 조서를 내리고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돌궐을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시켰다. 수는 또 유주총관 음수(陰壽)를 파견하여 고보녕을 공격했다. 고보녕은 거란과 말갈을 동원하여 맞서 싸웠지만 황룡에서 대패했다. 고보녕은 거란으로 달아났다. 그러자 음수가 그 부하들에게 뇌물을 공여하며 이간책을 벌였다. 그 계책이 성공하여 고보녕은 결국 휘하 부하인 조수라(趙修羅)에게 살해되었고(김진한, 2020), 수는 영주(營州)를 차지하게 되었다.
584년 9월 동·서 돌궐 중 상대적으로 힘이 약했던 동돌궐의 사발략가한이 아파가한과 연합한 달두가한의 공격을 받자 수에 신하를 칭하며 항복했다. 585년 7월에는 사발략가한이 “대수 황제가 사해에서 유일한 황제임을 인정하고 영원히 번부(藩附)하겠다”는 표문을 바쳤다. 그리고 다음 달 사발략가한의 아들 굴함진(屈含眞)이 입조했다. 그러자 수 문제는 양국이 군신관계를 맺었다는 조서를 내리고 굴함진을 주국·안국공(柱國·安國公)에 봉하였다. 수와 돌궐이 군신관계를 체결하게 된 것이다(여호규, 2002). 돌궐의 내부 분열을 이용한 수의 이간책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수는 사발략가한에 이어 즉위한 막하가한(莫何可汗)을 지원하여 아파가한을 사로잡게 하는 등(정동민, 2022) 이간술과 이이제이책을 활용하여 돌궐을 계속 약화시켜 나갔다.
수는 그동안 요서 일대에서 영향력을 강하게 행사하던 돌궐과 고보녕 세력을 몰아냄으로써 이곳에 거점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돌궐의 남은 세력도 경계해야 하고 서부지역으로 중심지를 옮겨간 토욕혼과도 여러 차례 공방전을 주고받고 있는 상황인 만큼 581~584년 경에는 아직 요서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할 여력이 없었다. 문제 시기에는 남조의 진을 공격하여 통일을 달성하는 것이 최고의 과제였으므로, 북방의 최대 적인 돌궐과 전쟁을 하는 동안에는 서쪽의 토욕혼과 동쪽의 고구려와 최대한 정면 대결을 피하면서 현상을 유지하려 했다(黃約瑟, 1994).
이런 수의 의중 및 상황과 달리 고구려는 돌궐과 고보녕 세력이 사라지고 수가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전 힘의 공백기를 이용해 요서 지역으로 세력 확대를 도모했다. 돌궐·고보녕 세력과 고구려가 충돌한 이유도 서로 이 지역에 있는 거란과 말갈 세력을 수하에 넣고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 데 있었다. 그런데 그 두 세력을 제거한 수가 요서 지역에 직접 지배권을 행사할 의지가 없어 보였기 때문에 고구려로서는 이곳에 세력을 부식할 절호의 기회라고 본 것이다.
당시 대표적인 요서 지역 거주세력인 거란은 여전히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부족별로 나뉘어 있었다. 요서 지역에 영향을 행사하고자 하는 세력은 부족별로 나눠져 있는 이들과 개별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돌궐과 고보녕 세력, 고구려가 요서 지역에서 각축전을 벌일 때 거란은 하나의 방향으로 거취를 정하지 않았다. 어떤 부는 돌궐, 어떤 부는 고보녕 세력, 또 어떤 부는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들어있었다. 이들을 지배하려는 외부의 강대세력도 그랬지만, 거란 자체도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주변세력들과 유대관계를 맺거나 그 지배권 아래 들어가거나 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을 둘러싼 각축전이 더 오래, 더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사발략가한은 동돌궐을 통솔하기 시작한 572년 이후 토둔(吐屯) 반질(潘垤)을 파견하여 거란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돌궐의 토둔은 신속집단에 파견되어 징세와 감찰을 담당했다(李在成, 1996; 동북아역사재단 편, 2010). 따라서 돌궐이 반질을 파견했다는 것은 570년대에 돌궐이 거란의 주요 거주지인 요하 상류, 시라무렌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수가 돌궐과 고보녕 세력을 공격했다. 돌궐이 수에 밀리고 고보녕 세력이 몰락하자, 그 예하에 있던 거란이 반질을 죽이고 달아났다. 이들은 새로운 세력인 수의 등장을 기회로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돌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수 역시 이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거란이 필요했다. 거란은 수가 돌궐을 공격할 때부터 수에 도움을 주었다. 581년 장손성(長孫晟)이 돌궐을 이간시키기 위해, 동쪽지역을 관장하던 처라후를 유인할 때, 거란이 해, 습과 함께 그를 인도했다. 이후 수가 돌궐과 고보녕 세력을 공격해 몰아내자 돌궐 지배하에 있던 거란주(契丹主) 막하불(莫賀弗)이 수에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했다. 수는 막하불을 대장군에 임명하였다. 막하불은 585년 4월 수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친 거란주 다미(多彌)와 동일인으로, 거란 제부(諸部)연맹의 대표자였다(李在成, 1996). 거란은 587년 수에 입조했다.
거란은 고구려의 영향력에서도 벗어나고자 했다. 돌궐이 약화된 후 요서 지역으로 진출해오는 고구려를 피해 수에 의지하는 길을 택했다. 586년 고구려 세력 아래 들어와 있던 거란인 출복(出伏) 일파가 수로 넘어갔다(여호규, 2002). 개황(開皇) 말에는 4,000여 가(家)가 수에 귀속했는데 부락이 점차 증가하여 동서 500리, 남북 300리에 걸쳐 10부로 나누어 거주하였다. 병(兵)이 많은 경우 3,000명, 적은 경우 1,000명으로 유목생활을 했다. 수는 병력이 필요할 때 거란 부족의 우두머리들과 상의하여 그들을 군대로 동원하였다(이성제, 2005b).
이런 일들은 요서 지역에서 수의 영향력이 크게 강화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거란 전체가 안정적으로 수의 지배 아래 들어간 것도, 요서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한 것도 아니었다. 수에 귀부한 후 고지(故地)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받았지만 거란 제부(諸部)의 상쟁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 때문에 수에서 사신을 파견해 질책했고, 거란에서 사신을 보내 사죄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거란 부들이 서로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싸울 때 수가 이들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을 갖고 있지 않아 거란 부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어려웠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요서 서북부에서 수의 세력이 여전히 제한적이었던 것이다(이정빈, 2018). 583년 고보녕 세력을 몰아낸 다음에도 영주 지역에 총관부를 설치하지 못하고 유주총관에서 총괄토록 한 것도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수는 영주 지역 토착세력의 협력을 얻어 영향력을 확대했는데, 이때에도 가장 중요한 협력자는 영주 북방에 있던 거란이었다(이정빈, 2018).
수는 막하불이 사신을 파견해왔을 때 그에게 고구려왕에게 준 것과 같은 대장군을 제수해주었다. 이는 일부 거란 세력을 예하에 두고 있고 또 다른 거란 세력을 세력권 아래 넣고자 하는 고구려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는 행위였다. 즉 요서 지역에서 고구려의 상대적 우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수도 이제 영주 회복과 거란의 내부(來附)를 계기로 요서로 진출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이처럼 수가 요서 지역으로 본격 진출하려는 의지와 움직임을 보이자, 고구려는 사신 파견을 중단하고 외교를 단절했다(정동민, 2022).
이후 589년까지 요서 지역의 상황은 수 문제가 고구려에 보낸 새서(璽書)에 간략하게 나와 있다. 수는 새서에서 고구려가 말갈을 마구 부리고(驅逼), 거란을 억제(固禁)했다고 꾸짖었다. 이것은 고구려가 수에 사신 파견을 중단하고 남조의 진과 연결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고구려는 거란에 대한 수의 태도를 보고 수와 외교를 통한 우호관계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수가 본격적으로 요서 지역을 장악하기 전에 이곳의 거란과 말갈에 대한 영향력을 더 확대하는 편이 낫다고 보았다. 그래서 584년 5월 이후 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거란을 억제함으로써 수와의 연계를 차단했다. 그리고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통해 아직 수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말갈 부족을 예하로 편입시켰다.
말갈은 6세기경 비로소 중국 사서에 이름이 나타나는 존재로 거란과 마찬가지로 통일세력을 이루지 못하고 부족별로 나눠져 있었다. 6~7세기경 가장 두드러진 세력이 속말(粟末), 백돌(伯咄), 안차골(安車骨), 불열(拂涅), 호실(號室), 백산(白山), 흑수(黑水)의 일곱 부족으로, 이를 말갈 7부라 불렀다. 이들 가운데 요서 지역과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던 부가 속말말갈이었다. 이들은 부여성이 있는 북류 송화강 일대에 거주했다. 고구려는 580년대 중반 돌궐이 쇠퇴하고 고보녕 세력이 몰락하는 가운데 요서 동북부 지역으로 강하게 밀고 들어가 속말말갈을 세력권 아래 편입했다(李龍範, 1959; 日野開三郞, 1991; 노태돈, 1999; 임기환, 2006).
이 과정에서 북류 송화강 유역 서쪽에 있던 속말말갈 일파인 돌지계(突地稽) 세력이 고구려의 압력에 반발해 8부와 승병(乘兵) 수천 명을 이끌고 본거지에서 이탈해 수에 의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수는 고보녕 세력의 중심지였던 유성(황룡성)에 이들을 안치했다.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는 이들을 ‘영주의 경계’에 두었다고 나온다. 그리고 『신당서(新唐書)』 지리지에는 영주의 경계인 여라고성(汝羅故城)에 속말말갈의 항인(降人)을 거주하도록 하였다고 되어 있다. 여라고성은 요령성 의현(義縣) 왕민둔(王民屯) 일대로 비정되고 있다(이정빈, 2018). 돌지계 집단을 이곳에 거주토록 한 것으로 보아 6세기 후반 수의 동쪽 경계는 의무려산(醫巫閭山)~대릉하(大凌河) 하류까지였다고 볼 수 있다.
속말말갈 역시 여러 세력으로 나눠져 있었다. 고구려의 지배를 거부하고 이탈한 돌지계는 570년대 후반부터 580년대 전반까지 요서 말갈 중 고보녕 세력을 지원한 일파였다. 고보녕 세력이 돌궐과 연합했으므로 돌지계 역시 친돌궐파였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가 우호적인 말갈부들을 지원하는 한편, 돌지계 등 친돌궐 성향의 부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자, 이들이 결국 이탈해 수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이정빈, 2018).
고구려의 이 작전은 성공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일탈한 돌지계 일파를 제외하고 다른 속말말갈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고구려 지배권 아래 들어왔기 때문이다. 수가 건국했을 때 말갈도 자신의 이름으로 사신을 파견했다. 그러나 이후 사신 파견을 중단했다가 다시 계속하는 등 변화를 겪었다. 말갈의 경우 수에 사신을 보내고 중단하는 시점이 고구려와 거의 같은 흐름을 타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의 관할과 조정 아래 말갈의 사신 파견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여호규, 2002). 이는 거란과 달리 속말말갈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력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구려가 남실위까지 무거운 철을 수출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요컨대 581년 수가 건국하자 고구려는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보내고 책봉을 받으며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수 역시 건국 초기에는 고구려보다 남조의 진, 북방 초원지대의 돌궐, 서부지역의 토욕혼 등과의 문제가 더 우선이었으므로 고구려에 대해서는 현상유지 정책을 추구했다. 돌궐을 공격하고 이간질로 분열시켜 세력을 약화시키고 고보녕 세력을 소멸시키면서도 요서 지역을 본격적으로 지배하려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요서 지역에 잠시 힘의 공백이 생기자 고구려가 이를 틈타 이 지역으로 진출을 도모했다.
고구려는 돌궐을 공격하고 고보녕 세력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수가 보여준 수 중심의 일원적 세계 구축의 의지를 확인하고 사신 파견을 중단한 뒤 진과의 교섭을 도모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요서 동북부 지역으로의 진출을 적극 추진한 결과, 거란 일부 세력과 속말말갈을 세력권 아래로 편입시켰다. 이에 따라 6세기 후반 고구려와 수는 의무려산과 대릉하 하류를 기준으로 각각 동부와 서부를 세력범위로 두게 되었다(이정빈, 2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