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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3. 수의 중원 통일과 영주총관부의 설치

3. 수의 중원 통일과 영주총관부의 설치

589년 수가 진을 멸망시키면서 동아시아 전체에 큰 파장을 일으키자 고구려도 기존의 대외정책을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수와 외교관계를 단절한 상태에서 계속 세력 확장을 도모하면 강력한 통일제국과 군사적 충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수와 직접 만나게 된 요서 지역이 문제였다.
수는 진을 무너뜨린 후 영주총관부를 새로 설치하고 유주총관부에서 관할하던 요서 지역을 따로 분리하여 통할토록 했다. 영주총관부의 설치 시점에 대해서는 580년대 후반설(이정빈, 2018)과 590년경설(여호규, 2002)로 나눠져 있다. 영주총관부 설치는 수가 요서 지역을 좀 더 적극적으로 지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수서』 위예전(韋藝傳)에 의하면 위예는 초대 영주총관으로 부임하여 산업을 크게 일으켰다. 그는 북이(北夷)와의 교역을 통해 재산을 많이 축적했다는 이유로 수 조정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여기서 북이는 북방 이민족을 범칭한 것으로 요서의 거란과 말갈을 포함한 북방의 여러 종족을 말한다. 즉 위예는 영주총관으로 부임한 후 요서 지역의 여러 북방 종족들과 조공을 통한 교역을 하고 호시를 개설해 화이(華夷) 교역을 허용함으로써(日野開三郞, 1991; 이성제, 2005a), 요서의 제종족을 포섭해나갔던 것이다. 위예가 부를 축적한 것은 개인적 욕심에 따른 치부라기보다는 화이교역의 부산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영주총관으로서 요서 지역 제종족을 회유하고 관할하기 위한 통치방식의 일환이었다. 화이교역은 물자가 부족한 유목·수렵민들의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었으므로 영주총관부의 이러한 요서정책은 요서 제종족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이는 수가 요서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이정빈, 2018).
위예는 이적의 조알을 받을 때 반드시 의장(儀仗)과 시위(侍衛)를 정돈하고 옷을 잘 갖춰 입었으며, 홀로 걸상 하나(一榻)을 차지하고 앉았다고 한다. 수 영주총관으로서 권위를 과시하고자 한 것인데, 이 때문에 번인(番人) 즉 이적(夷狄)으로부터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이 지역의 여러 종족에게 수의 위상을 보여주며 그들을 회유하고 잘 관리하는 것이 영주총관을 둔 이유임을 알 수 있다.
영주총관부가 북이 제종족을 관할한 방식은 직접 지배는 아니었다. 수는 돌지계나 출복처럼 내부한 말갈과 거란을 매개로 요서 제종족을 관할했다. 요서 지역 말갈과 거란에 대한 지배방식과 관련하여 당(唐) 전기 때 변경지역 번족정책을 참고할 수 있다(李錦繍, 1998; 王永興, 2003; 鄭炳俊, 2005; 李永哲, 2010). 당은 귀부한 번족을 군진(軍鎭) 주변에 안치하고 부락조직을 보존하도록 했다. 번족은 형식적으로만 당의 지방통치체제에 편입되어 있었을 뿐 당의 호적에 편입되지 않았고 조세의 의무도 없었으며(程尼娜, 2002; 李永哲, 2011), 단지 전시에만 번병(蕃兵)으로 동원되었다. 영주총관부의 요서정책도 이와 유사했다(李錦繍, 1998; 이정빈, 2018). 고구려의 말갈과 거란 지배방식 역시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이처럼 수가 영주총관부를 두고 화이교역을 통해 요서 제종족을 회유하고 관리하자, 자진해서 수로 들어오는 세력이 많아졌다. 593년 1월에 거란이 해, 습, 실위와 함께 수에 사신을 파견했다. 당시 거란은 서요하 남쪽의 노합하(老哈河) 지역, 습은 서요하 북쪽, 실위는 대흥안령산맥 동록과 눈강 일대에 분포하고 있었다. 이들이 수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것은 수가 서요하와 대흥안령산맥 일대를 영향력 아래 두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지역은 고구려가 몽골 초원지역으로 나아갈 때 이용하는 교통로였다. 따라서 이 지역 세력이 고구려를 등지면 실위와의 철 교역에 차질이 생기고 그 아래 있는 말갈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권도 침해당할 우려가 있다(여호규, 2002). 그런데 595년 위예를 이어 영주총관이 된 위충(韋沖)은 거란과 말갈을 위무하고 해와 습까지 조공을 하도록 했다. 이로 인해 고구려의 우려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수 문제는 이와 같이 요서 지역에 대한 지배 강도를 서서히 높여 나가면서 고구려 평원왕에게 엄중 경고를 하는 새서를 보냈다. 이 새서의 작성 시점에 대해서는 590년 설과 597년 설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이를 평원왕 32년, 즉 590년으로 편년했고, 『수서』와 『자치통감』에는 597년에 새서가 전해진 것으로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수서』와 『자치통감』에 고조가 조서를 개황 17년에 내려주었다고 한 것은 잘못”이라고 분주(分註)를 달아 놓았다. 기왕에는 중국 사서에 따라 597년 설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지만(신채호, 1975; 김택민, 2014), 근래에는 590년설이 더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日野開三郞, 1996; 여호규, 2002; 이정빈, 2018; 정동민, 2022). 새서를 받은 이후 고구려왕이 서거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새서는 590년에 평원왕이 받았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수 문제는 새서의 첫머리에 “(자신이) 천명을 받아 온 세상을 사랑으로 다스리매, 고구려왕에게 바다 한 구석을 맡겨서 조정의 교화를 선양하여 각자 저마다 뜻을 이루게 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그다음에 “왕은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매년 조공을 바치며 번부(藩附)라고 하지만, 정성과 예절을 다하지 않았다”며 고구려가 수에 저지른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먼저, “왕이 남의 신하가 되었으면 모름지기 짐과 덕을 같이 베풀어야 할 텐데, 오히려 말갈을 마구 부리고 거란을 억제했다”고 하면서 “여러 번국이 머리를 조아려 나에게 신첩 노릇을 하는데, 착한 사람이 의리를 사모하는 것을 분개하여 끝까지 방해하려 한다”고 질책했다.
이를 통해 새서를 보낼 당시 수 문제의 최대 관심이 말갈과 거란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가 말갈을 마구 부렸다는 것은 속말말갈을 세력권 아래 넣었고 그 과정에서 돌지계 집단처럼 반발하는 세력이 나오도록 한 것을 말한다. 또 거란을 억제했다는 것은 수로 이탈할 가능성이 높은 거란 부들을 단속한 것을 가리킨다(李龍範, 1959; 日野開三郞, 1991; 노태돈, 1999; 임기환, 2006). 거란을 금고했다는 것은 거란부들이 수와 자유롭게 화이교역을 하는 것을 막았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이성제, 2005b). 화이교역을 허용할 경우, 수로 이탈할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에 고구려가 이를 가로막았을 것이다(이정빈, 2018). 즉 수 문제는 580년대 후반 고구려가 요서 지역의 거란과 말갈을 수하에 넣은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새서에서는 또 고구려가 첩자를 수에 파견해 쇠뇌 기술자를 꾀어서 데려갔고, 고구려로 간 수나라 사신을 공관(空館)에 앉혀두고 활동을 통제했던 것을 지적했다. 종종 기마병을 보내 변경 사람을 살해하고, 여러 차례 간계를 부려 사설(邪說)을 지어냈으며, 불신감에 젖어 언제나 의심하여 사인(使人)을 보낼 때마다 소식을 밀탐했다고 질책하기도 했다.
이것은 진이 멸망한 후 고구려가 수의 공격에 대비하여‘수거지책(守拒之策)’을 세웠던 것을 가리킨다. 고구려는 진이 멸망하자 수의 침공을 염두에 두고 병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모으는 등 대책을 세웠다. 수 문제는 새서에 이 점을 거론하면서 고구려가 수에 대항하여 대책을 강구한다든가 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는 듯 경고를 했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대책을 세우는 일은 인근에 통일된 초강대국이 들어섰을 때 어떤 나라라도 응당 강구했음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에 새서를 보내 경고까지 한 것은 5세기 대처럼 고구려의 독자적인 세력권을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며, 수 중심의 일원적인 국제질서를 구축할 것이란 의지를 강하게 표명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새서의 다음 부분에서는 고구려의 이런 여러 행위에 대해 “순수한 신하의 도리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소? 이는 모두 짐의 훈도(訓導)가 밝지 못한 연유이므로, 왕의 잘못을 모두 너그러이 용서하겠으니, 오늘 이후로는 반드시 고치기 바라오. 번신(藩臣)의 예절을 지키고 조정의 정전(正典)을 받들어, 스스로 그대 나라를 교화시키고 남의 나라를 거스르지 않는다면, 길이 부귀를 누릴 것이며 진실로 짐의 마음에 드는 일이오”라고 했다. 지금까지 고구려가 했던 일은 용서할 테니 이후 같은 일을 반복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즉 580년대 중반 고구려가 돌궐의 약화를 틈타 요서 지역의 거란 일부와 말갈을 편입한 것에 대해 문제 삼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후에는 남의 나라를 거스르지 말라고 엄중하게 경고를 했다.
사실 중국과 고구려의 관계는 새서에 나오는 “왕은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매년 조공을 바치며 번부라고 하지만 정성과 예절을 다하지 않았다”는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중국 왕조는 진한 이래 자국의 어법과 자국 중심의 대외교류 방식으로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를 설정해왔다. 이에 대해 상대국들도 자국의 필요와 처한 상황 및 국력에 따라 중국 왕조들이 요구하는 대로 응해주었다. 하지만 중국의 사정과 국제적 역학관계가 변화되면 그러한 관계는 의미가 없게 된다. 고구려의 경우 특히 그런 면이 두드러진다. 고구려에서는 중국 왕조의 요구에 따르면서도 그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자국의 필요와 정책에 따라 대외활동을 전개했다. 이런 상황을 지적해서 ‘정성과 예절을 다하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金鍾完, 2004; 김택민, 2014). 수와의 관계에서 고구려는 외교를 통한 우호관계를 추구하면서도 필요한 경우 선공도 불사했다. 외교관계도 상황에 따라 끊기도 하고 필요하면 낮은 자세로 조공하고 책봉을 받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고구려는 주도적인 입장을 취했다.
영양왕은 즉위년(590년)에 수로부터 종전보다 한 단계 낮은 상개부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 요동군공(遼東郡公)이란 책봉호를 받았다. 이것은 584년 거란의 막하불이 받았던 대장군보다 낮고, 백제 위덕왕과 급이 같은 책봉호였다. 그러나 새서에서 고구려가 피책봉국의 의무를 범했지만 그것이 고구려만의 잘못이 아니라 자신이 훈도를 분명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므로 종전 잘못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으므로, 고구려로서는 새서의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비록 새서의 뒷부분에서 진과 고구려를 비교하며 협박을 하는 등 매우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고구려로서는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안정을 도모하면서 기존 세력권을 지키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여호규, 2002; 李成制, 2005; 이정빈, 2018). 이에 따라 영양왕 2년(591년) 정월 고구려는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려 왕으로 봉해줄 것을 청했다. 이해 3월 수 문제는 영양왕을 고구려왕으로 봉하고 수레와 의복을 보냈다.
590년경부터 양국의 관계가 회복되어 사신을 보내고 작호를 내려주고 한 것은 새서 내용을 수용하기로 한 결과로서, 수는 고구려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고 고구려는 다른 나라를 범하지 않겠다는 상호 간 약속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와 수의 관계가 회복된 직후인 591년 12월부터 말갈은 견수사를 다시 파견했다. 이는 새서에 담긴 수 문제의 주문에 대한 고구려의 화답이었고(여호규, 2002), 수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고구려의 노력이었다.
하지만 고구려와 수의 우호관계는 오래 가지 않았다. 수는 패권국으로서 자국 우위의 일원적인 국제질서를 구축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고구려는 통일제국의 위협 아래 자국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외교정책을 우선적으로 구사했지만, 교역로가 막힐 위기에 처하거나 세력권을 침해당할 위험이 있으면 군사활동을 불사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는 우선적으로 문제가 된 요서 지역 제종족에 대한 영향력을 축소할 의사가 없었다. 고구려와 수, 두 나라는 결국 충돌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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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의 중원 통일과 영주총관부의 설치 자료번호 : gt.d_0006_0010_001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