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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1. 598년 영양왕의 요서 공격과 배경

1. 598년 영양왕의 요서 공격과 배경

598년 봄이었다. 고구려의 영양왕(재위 590~618년)은 말갈의 기병 1만여 명을 이끌고 수의 요서(遼西)를 공격하였다. 수에서는 영주총관(營州總管) 위충(韋沖, 540~605년)이 대응하였다. 위충은 고구려의 군대를 공격해 패주시켰다고 한다. 영주총관이 대응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공격하였다고 한 요서는 구체적으로 수의 영주총관부였다고 파악된다. 영주총관부의 치소인 유성(柳城: 遼寧省 朝陽) 내지 그로부터 머지 않은 지점에 대한 공격이었던 것이다(이성제, 2005a).
수의 대응은 영양왕의 군대를 격퇴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수 문제(文帝, 재위 581~604년)는 598년 2월 3일에 고구려의 공격을 보고받았는데, 크게 분노하였다고 한다. 즉각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지시하며 전시 지휘관을 임명하였다. 598년 2월 4일에 한왕(漢王) 양량(楊諒)과 왕세적(王世積)을 행군원수(行軍元帥)로 삼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고경(高熲)을 한왕의 장사(長史)로 삼았으며, 주라후(周羅喉)를 수군총관(水軍總管)으로 삼았다. 이들이 고구려 공격을 위한 전시 지휘관의 수뇌부였다. 이외에도 수많은 장수와 관인이 전시 지휘관으로 기용되었는데, 문헌사료와 묘지에 보이는 주요 지휘관과 활동은 〈표1〉에서 확인할 수 있다(정동민, 2022).
표1 | 598년 고구려 공격을 위해 편성된 수의 주요 지휘관
성명직위 및 주요 활동출처
당직(唐直)요동행군총관사마(遼東行軍總管司馬)〈당직묘지(唐直墓誌)〉
장연(張淵)요동행군총관(遼東行軍總管)〈장초현묘지(張楚賢墓誌)〉, 〈장옥묘지(張璬墓誌)〉
원포(元褒)행군총관(行軍總管)/유성(柳城)에서 회군『수서』권50, 원포
한승수(韓僧壽)행군총관『수서』권52, 한승수
두언(杜彦)행군총관/총통오십영사(總統五十營事)『수서』권55, 두언
우문필(宇文㢸)원수한왕부사마(元帥漢王府司馬)/행군총관『수서』권56, 우문필
장윤(張奫)행군총관/유일한 부대 보존[獨全]『수서』권64, 장윤
이경(李景)마군총관(馬軍總管)『수서』권65, 이경
수의 주요 지휘관은 행군(行軍) 단위로 편성하였다. 북주(北周)에서 시작해 수·당대까지 전시 야전군의 부대와 편제를 행군이라고 하였는데, 최고 사령관이 원수(元帥)였고 각 단위부대의 지휘관이 총관(總管)이었다. 장사(長史)와 사마(司馬) 등은 지휘관의 참모였다. 『수서』 두언전(杜彦傳)에 보이듯 육군의 경우 모두 50개의 행영(行營)이 있었다고 하였다. 행영은 행군총관의 단위부대인 총관영(總管營)을 의미하였다(孫繼民, 1995). 598년 수의 육군은 대략 50개 내외의 부대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육군과 수군(水軍)을 합친 야전군은 30만 명이었다. 이와 같은 전시 야전군의 병졸은 상비군만 아니라 예비 병력도 다수 포함된 것으로, 예비 병력은 임시적인 군역을 부과받아 출전했다. 전시를 맞아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한 것이다. 이를 운용하기 위한 군량 등 막대한 군수물자도 필요하였다. 따라서 인력과 물자의 징발·수송에 적지 않은 시일이 소요되었다. 수 문제가 반격을 지시한 것은 598년 2월 4일이었지만, 조서를 내려 고구려 영양왕의 관직을 삭탈한 것은 그해 6월 27일이었다. 이때 본격적인 공격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대략 4개월 동안 전쟁을 준비하였던 셈이다.
4개월 동안 추진된 수의 전쟁 준비 사실은 고구려에도 알려졌을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수의 본격적인 공격이 개시되기에 앞서 방어체계를 정비하고 군대를 동원하며 군사물자를 확보하는 등 전쟁에 대비하였다고 짐작된다. 양국 간의 전면전이 예고된 것이다. 이 무렵 당시 양국의 변경이었던 요서 지역에서 이미 소규모의 국지전이 발생하였을 수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아 598년 고구려와 수의 전면적인 전쟁은 발발하지 않았다. 수의 군대는 고구려의 영역 안으로 진군하지 못한 채 회군하였다. 장마와 전염병 그리고 태풍이 주된 이유였다.
수의 육군은 임유관(臨渝關)을 통해 영주총관부의 치소인 유성(柳城)에 집결하였고, 일부 부대는 요하 방면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이 무렵 장마가 발생하였다. 당시 지금의 중국 하북성(河北省) 지역에서 요령성(遼寜省) 서부 지역까지의 육상교통로는 요서주랑(遼西走廊)이 유일하다시피 하였다(권오중, 2012). 해안가의 좁고 긴 도로를 통과해야만 대규모 군대와 물자를 요동으로 수송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서주랑은 지대가 낮았기 때문에 장마에 취약하였다. 예컨대 207년 후한(後漢)이 오환(烏桓)을 공격하였을 때에도 장마가 발생하였는데, 진창이 생겨 교통로가 두절되어 어려움을 겪었다. 598년에도 마찬가지였다. 교통로가 차단되었고, 군량 수송이 이어지지 못했다.
이미 유성에 집결한 수의 육군은 고립된 처지였다. 군량이 수송되지 못하였기에 심각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많은 수의 군사가 영양 부족 상태에 놓였고 면역력이 저하되었다. 더욱이 다수의 부대가 유성 일대에 밀집해 있었다. 전염병이 유행하기 쉬운 환경이었다. 실제 유성에서 전염병이 유행하였고, 높은 치사율을 보인 것으로 추정된다(이정빈, 2021a). 수의 육군은 598년 9월 21일에 귀환하였는데, 오직 장윤의 부대만 온전하였다고 하였다. 열에 여덟아홉이 사망하였다고 하였다. 수의 육군은 병력의 대부분을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의 수군은 내주(萊州)에서 집결하였다. 지금의 중국 산동성(山東省) 연태(烟台) 지역이었다. 내주는 동북아시아 해상교통의 요지로, 묘도군도(廟島群島)를 경유해 요동반도-한반도 서해안으로 통할 수 있었다. 수군총관 주라후는 이러한 해상교통로를 통해 평양으로 향하였다. 수의 수군은 육군의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한편, 고구려의 평양을 직접 위협할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의 수군 역시 자연재해에 직면하였다. 태풍을 만나 표몰(漂沒)되었다고 한다.
후일 당에서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까지 올랐던 봉덕이(封德彛)도 젊은 시절에 수의 수군으로 참전하였는데 배가 대해(大海)에서 침몰되었다고 한다. 대부분 죽었지만 자신은 판자를 잡고 사력을 다해 버틴 끝에 간신히 구조되었다고 한다. 구사일생(九死一生)의 귀환이었다고 회고하였다. 봉덕이의 사례를 통해 보건대 수의 수군 역시 본격적인 전투를 수행하지 못한 채 선박과 병력의 상당수를 잃은 채 회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수의 육군과 수군이 모두 회군하자 고구려의 영양왕은 수에 사신을 파견해 사죄하고 표문을 보내 수에 신속(臣屬)할 뜻을 밝혔다. 사죄사(謝罪使)를 보냄으로써 수에 전쟁을 중단할 명분을 제공한 셈이다. 수 문제는 고구려의 제의를 수용하였다. 598년 백제의 위덕왕(재위 554~598년)은 장사(長史) 왕변나(王辯那)를 수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고구려 공격이 추진되자 다시 사신을 보내 군도(軍導) 즉 군대의 길잡이를 자청하였다. 고구려 공격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백제의 길잡이 자청은 수의 군대가 회군한 이후로, 수 문제는 백제의 요청을 사양하였다. 이미 고구려를 사면하였다고 하였다. 공식적으로 수의 고구려 공격 계획은 전면 중단된 모습이었다.
이처럼 598년 전쟁은 장마와 전염병 그리고 태풍이란 예측 불가의 변수로 인해 수의 공격이 불발되며 종결되었다. 그런데 수의 고구려 공격 불발이 단지 장마와 전염병 그리고 태풍 등 자연재해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구려와 수를 연결한 육상·해상 교통로가 미비하였고, 수의 영역 내지 세력범위에서조차 군수 보급이 용이하지 않았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이정빈, 2019).
애초부터 대규모 군대를 동원한 수의 고구려 공격은 성공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이미 고경(高熲)과 같은 수의 군사지휘관 중 일부는 이러한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고경은 수 조정의 고구려 공격 논의에서 강력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98년 수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보다 먼저, 고구려는 어떠한 이유에서 수의 요서총관부를 공격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고구려가 공격한 수의 영주총관부는 580년대 후반~590년에 설치되었다. 583년 수는 한(漢)대 이후 지방관제의 전형이었던 주–군–현의 삼급제를 주·군–현의 이급제로 전환하였다(濱口重國, 1966). 그리고 변경지대에는 주·현의 상급 통치단위로 총관부를 두었다. 총관부의 기원은 조위(曹魏)의 도독제군사(都督諸軍事)에서 찾을 수 있는데, 수대의 총관부는 북주의 제도를 계승한 것으로, 당대(唐代) 기미주(羈縻州)에 설치된 도호부·도독부의 전신이었다. 총관부는 일반 주·현의 행정적 통치기구가 아니라 이른바 변주(邊州)의 군사적 통치기구였는데, 변주에는 한인(漢人)과 이인(夷人)이 혼재되어 있었다(鄭勉, 2009). 영주도 마찬가지였다.
초대 영주총관은 위예(韋藝)였다. 그는 595년 사망할 때까지 영주총관으로 재직하였다. 위예는 거란·말갈 등 요서 지역의 제종족을 관할하였고, 화이교역을 통해 제종족을 포섭하였다. 북이(北夷)와 교역하여 가산(家産)을 축적해 치부(致富)하였다고 한다. 요서 지역의 제종족 중 일부는 이와 같은 수의 화이교역에 호응하였고, 수를 지지하였다. 590년대를 전후해서 거란 별부(別部)의 출복(出伏) 집단과 속말말갈(粟末靺鞨)의 돌지계(突地稽) 집단은 고구려의 세력범위에서 이탈해 수의 세력범위 안으로 들어갔다. 이로써 수는 요서 지역에서 세력범위 확장의 기반을 마련하였다(이성제, 2005a).
위예의 사후에 후임 영주총관으로 임명된 것은 그의 동생 위충이었다. 위충은 595년부터 603년까지 재직했다. 그는 북주(北周)대부터 군사와 외교 분야에서 활동하였는데, 주로 변경의 지방관 내지 군사령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분주자사(汾州刺史)와 석주자사(石州刺史)를 역임하며 제호(諸胡)를 회유하고 환심을 얻었다고 한다. 장성(長城) 축조에 징발된 남분주호(南汾州胡)가 이탈하자 지방관의 신망(信望)과 회유책을 강조했다고 한다. 위충은 영주총관으로 재직하면서 역시 말갈·거란을 회유하고 위무하여 신임을 얻었다고 하였다. 요서 지역 북방에 거주하던 해(奚)·습(霫)의 조공도 끊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위충의 활동으로 요서 일대에서 수의 세력범위가 더욱 넓어지고 강력해진 것이다.
그림1 | 590년대 중·후반 영주총관부의 세력범위
5세기 이후 고구려는 요하를 경계로 하여 그 동쪽은 대성(大城)과 제성(諸城)을 두고 영역을 지배하였고, 서부에는 라(邏)와 같은 군사기지를 두고 말갈·거란 등의 제종족을 관리하며 세력범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580년대 후반~590년 이후 수가 영주총관부를 통해 요서 지역의 제종족을 포섭하며 점차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온 것이다. 고구려 서방 변경에서는 위기감이 고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의 영주총관부를 방치할 경우 요서 지역에서 유지해 오던 세력범위를 상실할 수 있었고, 자칫 요하의 동쪽까지 위협받을 수 있었다. 요서 지역의 세력범위를 완전히 상실하면 서북방의 돌궐 등 유목사회의 제세력과 교섭·교역이 차단되어 국제관계에서 고립될 위험성마저 있었다. 위기를 타개할 방책이 요청되었다(이성제, 2005a).
598년 수의 영주총관부 공격은 말갈병을 동원하였다고 하는데 영양왕이 직접 지휘하였다. 말갈병을 동원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추정이 있지만, 아직 분명한 설명은 없다. 다만 영주총관부 공격을 주도한 인물이 영양왕이었다고 생각하는 데에는 대부분이 동의하는데(김진한, 2020), 6세기 후반 평원왕 대(559~590년)부터 마련된 정치적 안정 속에서 가능하였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평양왕·영양왕 대 고구려는 정치적 완정을 회복한 가운데 6세기 중반 이전의 세력범위를 회복하고자 노력 중이었다(임기환, 2004). 적극적인 대외정책과 전쟁을 추진하였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온달(溫達)의 아단성(阿旦城) 출정이 바로 그와 같은 노력의 일환이었다(임기환, 1994; 2006 ; 정호섭, 2016).
일찍이 지적된 것처럼 온달은 유력한 귀족가문 출신이 아니었다(李基白, 1996). 그는 군사적 능력을 바탕으로 관직에 진출하였고 전공을 통해 승진하였다. 온달의 출세 과정으로 보아 그는 대외전쟁의 전공을 바탕으로 성장한 신진 귀족세력의 하나였다고 생각된다(임기환, 2004; 정호섭, 2016). 온달은 평원왕의 사위이자 영양왕의 매제였다. 온달과 같은 신진 귀족이 왕실의 인척이 된 사실은 평원왕·영양왕의 정치적 지향을 짐작케 한다. 즉 평원왕·영양왕은 적극적인 대외정책과 전쟁을 추진하고자 이를 바탕으로 성장한 신진 귀족세력과 결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598년 영주총관부 공격을 영양왕이 주도하였다고 한다면, 이는 온달과 같은 신진 귀족세력의 지지에 기반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김진한, 2020).
수 측의 동향은 어떠하였을까. 고구려의 영주총관부 공격에 수 문제는 즉각 대대적인 공격을 지시하였다고 하였다. 고경이 강력히 반대하였다고 하지만, 수의 조정에서 그와 같은 의견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가령 『수서』 유현전(劉炫傳)을 보면, 개황 연간의 말년에 수가 은성(殷盛)하였을 때 조야(朝野)에서는 모두 고구려 공격을 생각하였다고 하였다. 유현은 고구려 공격이 불가하다고 판단하고 「무이론(撫夷論)」을 지어 반대의 뜻을 풍간(諷諫)하였고 하지만, 당시에는 깨닫는 자가 없었다고 하였다. 조야란 표현처럼 조정만 아니라 재야에서까지 지배층의 상당수가 598년 이전부터 고구려 공격을 구상하였다는 것이다.
수대의 지배층은 크게 관중·대북귀족(북주계)과 산동귀족(북제계) 그리고 강남귀족(남조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山崎宏, 1965; 柳元迪, 1989), 이 중에서 관중·대북귀족은 북위의 무천진(武川鎭: 內蒙古自治區 武川) 군벌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들을 이른바 관롱집단(關隴集團)이라고도 한다(陳寅恪, 1966). 관롱집단은 호한(胡漢)융합의 지배집단으로, 주로 무관 계통에서 활동하였다. 수의 주국(柱國)·대장군(大將軍)을 비롯한 중앙군의 고위직은 물론이고, 문제 대 총관을 역임한 100명만 놓고 보아도 관롱집단에 속한 자만 86명이었다고 한다(山崎宏, 1958; 甘懷眞, 1991). 관롱집단은 수의 군사권을 장악한 핵심적인 지배층이었던 것이다. 영주총관을 역임한 위예·위충 형제 역시 명망 높은 관우(關右)의 귀족이었다.
수의 지배층 상당수가 고구려 공격을 추구하였고, 지배층의 핵심이 관롱집단이었다고 보면, 598년 수의 고구려 공격은 관롱집단이 주도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관롱집단은 호한융합의 지배집단이었다고 하였는데, 대체로 선비(鮮卑) 계통이었다. 그런 만큼 유목·수렵사회의 지배집단이 그러하였듯 관롱집단은 교역과 전쟁에 적극적인 경향이 있었다. 교역과 전쟁을 통해 얻은 경제적 이득을 재분배함으로써 정치권력을 유지·보장받고자 하였던 것이다. 605년 수의 임읍(林邑) 공격이 그러하였다. 임읍 공격은 기이한 보물 즉 경제적 이득의 확보를 위한 것으로, 역시 관롱집단이 주도한 것으로 파악된다(이정빈, 2018).
위예는 영주총관으로 재직하며 북이와 교역하여 치부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조정의 비판을 받았다고 하는데, 한편으로 위예의 치부 사례는 수의 관롱집단이 요서 지역을 통한 교역에 관심을 갖게 한 계기를 제공하였을 것이다. 나아가 고구려에 눈길을 두게 하였다고 짐작된다. 5세기 이후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권적 국가로서 주변 제국(諸國)의 교역을 통제하고 있었다. 교역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관롱집단은 비단 요서만 아니라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동북아시아의 교역권까지 관심을 두었고, 위예가 영주총관으로 재직하던 590년대 전반부터 고구려 공격을 구상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므로 598년 수 문제가 고구려 공격을 지시하자 지지하며 호응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598년 고구려와 수의 전쟁 위기는 요서 지역을 둘러싼 양국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는데, 고구려에서는 영양왕과 신진 귀족세력이 수에 강경한 입장이었고, 수에서는 관롱집단이 고구려 공격을 구상하고 있던 가운데 전쟁에 호응하였다. 비록 전면적인 전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양국의 주요 정치세력은 대립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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