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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주변국의 동향과 갈등의 심화

2. 주변국의 동향과 갈등의 심화

598년의 전쟁 위기가 해소되고 고구려와 수의 관계는 곧 회복된 것처럼 보였다. 일시적이나마 고구려의 서방 변경은 안정되었다. 결과적으로 598년 고구려의 영주총관부 공격은 요서 지역에서 수의 세력이 확대되는 데 제동을 걸었던 셈이다(李丙燾, 1976). 여력이 생긴 고구려의 눈길은 남방으로 향하였다. 예컨대 598년 전쟁 위기 속에서 백제가 수에 길잡이를 자청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고구려는 백제의 변경을 자주 공격하였다. 603년 8월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600년대 후반까지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며 적극적인 남방정책을 추진했다. 6세기 중반 이후 중단된 것처럼 보였던 남방정책이 재개된 모습이었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남방정책은 한강 유역을 회복하는 데 있었다고 이해되는데 서방의 정세와 무관치 않았다(여호규, 2002).
이와 관련하여 수와 돌궐의 관계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돌궐은 581년 타발가한(佗鉢可汗, 재위 572~581년)이 사망한 이후 사발략가한(沙鉢略可汗, 재위 581~587년)의 동돌궐과 달두가한(達頭可汗, 재위 576~603년)의 서돌궐로 분열하였는데, 동돌궐은 다시 여러 가한 세력이 분립하며 경쟁하였다. 588년 사발략가한의 뒤를 이은 도람가한(都藍可汗, 재위 588~599년)이 동돌궐을 장악하였지만, 반대세력이 상존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동돌궐의 계민가한(啓民可汗, 재위 ?~609년)이 부상했다. 그는 수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597년 계민가한은 수와 혼인동맹을 맺고 한층 적극적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동돌궐의 도람가한은 서돌궐의 달두가한과 연합하였다. 598년부터 603년까지 서돌궐의 달두가한은 동돌궐의 도람가한과 함께 수와 동돌궐의 계민가한을 공격하였다. 수는 동돌궐의 계민가한을 지원하면서 적극적인 반격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동돌궐의 도람가한은 599년 12월 부하에게 피살되었는데, 이후 이 전쟁은 서돌궐의 달두가한이 주도하였다. 논의의 편의상 이를 수-서돌궐 전쟁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수-서돌궐 전쟁은 598년 수가 고구려 공격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의 하나였다(이성제, 2005a; 김진한, 2020). 만약 고구려마저 적으로 돌리면, 동북과 서북 방면에서 협공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술하였듯 수는 사죄사 파견을 명분으로 삼아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여호규, 2002).
예컨대 605년 거란은 수의 세력범위인 유성 주변에서 고구려와 동돌궐이 교역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거란인의 상황 판단은 605년을 전후해서 고구려와 동돌궐에 비상한 일이 아니었다고 여겼기에 가능했을 것이다(노태돈, 1999). 동돌궐과 수가 동맹을 맺고 있었고, 고구려와 동돌궐이 유성 주변에서 교역하였다고 보면, 당시 고구려와 수 역시 대립적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고구려와 수의 전쟁 위기가 벌어졌던 598년 이후부터 그랬을 것이다. 고구려와 수의 우호관계는 적어도 607년까지 유지되었다고 파악된다(菊池英夫, 1992; 李昊榮, 2001; 여호규, 2002). 그러면 수-서돌궐 전쟁에서 고구려는 어떠한 입장을 취하였을까.
현전 사료에서 수-서돌궐 전쟁에 대한 고구려의 움직임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598년의 전쟁 위기를 경험하였던 고구려가 수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고 보이진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580년대 후반부터 고구려와 돌궐의 일부 세력과 연대하였다고 본 견해(노태돈, 1999)가 주목된다. 고구려와 돌궐이 주변 제국(諸國) 즉 백제·토욕혼·왜와 함께 수에 대한 봉쇄동맹을 맺고 있었다고 본 견해도 있었다. 이른바 주변국동맹론이었다(鬼頭淸明, 1976; 李基白·李基東, 1982; 菊池英夫, 1992). 고구려와 돌궐이 반수(反隋) 연대를 결성하였을 가능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주변국동맹론에 대한 비판도 꾸준하였다(堀敏一, 1979; 이정빈, 2018).
실제 598~607년 무렵의 국제관계를 보면 수-서돌궐 전쟁에서 고구려와 돌궐이 연대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만약 고구려와 돌궐이 수를 견제하기 위해 연대하였다면, 그 대상으로 우선 주목되는 것은 동돌궐의 계민가한이다. 그러나 이 무렵 동돌궐의 계민가한은 수의 동맹이었다. 적어도 수-서돌궐 전쟁에서 반수 연대에 가담하였다고 할 수 없다. 다음으로 수와 동돌궐의 반대세력인 서돌궐과 접촉하였을 가능성이 고려된다. 그러나 고구려가 수·동돌궐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동돌궐의 영역 내지 세력범위를 통과해 비밀리에 서돌궐과 교섭하였을 것으로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고구려와 돌궐의 연대는 상정하기 어렵다.
6세기 중·후반 동서로 분열하기 전까지 동아시아의 최강국은 돌궐이었다. 가령 돌궐의 타발가한은 북주(北周)와 북제(北齊)를 두고 “단지 내가 남쪽에 있는 두 명의 아이를 효순(孝順)하게끔 하면 어찌 물자가 없음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북주와 북제를 두 아이에 비유하며 신속국으로 취급하였던 것이다. 돌궐은 북주와 북제를 분열·조정하며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주도하였다. 고구려 또한 돌궐의 흥기에 영향을 받았다.
예컨대 570~580년대 중반 동돌궐의 사발략가한은 거란에 토둔(吐屯)이란 징세·감찰관을 파견해 통제했다. 거란의 여러 부락이 거주하였던 요서 지역 서북부의 시라무렌강 유역까지 세력범위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돌궐은 580년대 후반 수가 동진해 오기 전까지 고구려 서방 변경을 위협하였던 주요 세력의 하나였다(노태돈, 1999).
이와 같이 보면 고구려는 수-서돌궐 전쟁에서 향후 어느 쪽이 우위를 점하든 부담스러운 상대일 수 있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두 세력이 지속적인 대립구도를 유지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고구려는 수와 서돌궐 중 어느 한쪽을 지원하기보다 양자 모두와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전쟁을 관망하지 않았을까 한다. 고구려가 수-돌궐 전쟁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것은 실제로 그에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상과 같이 보건대, 600년대 중·후반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방정책은 서방의 국제정세가 교착된 사정 속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서방의 국제정세가 교착되며 남방의 안정을 우선적으로 추구하였던 것으로 풀이되는 것이다(여호규, 2002). 그렇다고 해서 서방의 안정이 확립된 것은 아니었다. 598~607년 고구려와 수는 우호관계였다고 하였는데 고구려의 견수사 파견은 600년 1월이 마지막으로 나타난다. 이로 미루어 보아 비록 양국이 대립적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호관계가 진전되어 갈등의 여지가 축소되었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다. 598~607년 우호관계의 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598년 수의 고구려 공격이 실패한 이후, 요서 지역에 회원진(懷遠鎭), 노하진(瀘河鎭) 등과 같은 진(鎭)·수(戍)가 설치된 사실이 주목된다. 수의 진·수는 중소 규모의 군사기지였다. 진의 경우 300~500명 정도의 병력이 배치되었고, 수의 경우 30~50명 내외가 배치되었다. 다만 진·수가 단순히 군사기지만은 아니었다. 수의 진·수는 총관부 예하의 군정기구로, 변경지대의 이종족을 관할한 통치단위의 하나였다. 진·수는 진장(鎭將)과 수주(戍主)가 관할하였는데, 진장은 종4품~정6품으로 군태수와 대등하였고, 수주는 정7품~정9품으로 현령보다 약간 낮은 정도였다. 관품으로 보면 대략 군·현의 위상에 상응하였다.
회원진과 노하진의 구체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대체로 요서 지역의 동부에 소재하였다고 파악된다. 두 진은 612~614년 수의 고구려 공격에서 대표적인 군수보급기지로 운용되었다. 낙양(洛陽)에서 탁군(涿郡)으로 집적된 군수물자는 회원진과 노하진으로 보내져 축적되었고, 이로부터 수의 공격·보급로가 구축되었다. 요서 지역의 진·수는 주로 603~604년에 설치되었다고 추정된다(이정빈, 2018). 그러므로 진·수의 설치는 598년 이후 수의 요서 정책이 한층 치밀해진 면모를 보여준다. 수는 요서 지역의 동부에 진·수를 설치함으로써 동쪽으로 고구려를 압박해 간 것이다.
이처럼 598~607년 고구려와 수는 적대관계를 지양하고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하지만, 이는 공식적이고 표면적인 모습일 뿐이었다. 수의 동진은 고구려의 세력범위를 잠식해 갔고, 고구려의 위기의식은 한층 고조되었고, 이로 인한 양국의 갈등은 깊어져 갔다. 더욱이 605년 수 양제(煬帝, 재위 604~618년)가 즉위하면서 표면적으로나마 유지되던 양국 간의 우호관계는 파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수 양제는 즉위 직후부터 사이(四夷) 경략을 구상하였다고 하듯 대외정책과 전쟁에 적극적이었다. 607년을 전후해서 수의 대외정책은 배구(裴矩)가 총괄하였는데, 그는 『고려풍속(高麗風俗)』을 저술하였다. 606~607년 배구는 서역과의 교역을 관장하며 『서역도기(西域圖記)』를 저술하였는데, 풍속뿐만 아니라 산천의 험이(險易)를 담았다. 아울러 별도로 지도를 제작하고 요해(要害)를 연구하였다. 군사활동을 위한 지리정보를 수집한 것으로, 전쟁을 위한 기초 자료였던 셈이다. 실제 608년 수의 토욕혼(吐谷渾) 공격에서 『서역도기』가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풍속』도 『서역도기』처럼 고구려의 풍속뿐만 아니라 군사활동을 위한 지리정보를 담고 있었다고 짐작되며, 607~612년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에서 고구려 공격을 앞두고 진대덕(陳大德)을 사신으로 파견해서 군사활동을 위한 지리정보를 수집하고 『봉사고려기(奉使高麗記)』를 저술하게 하였듯(吉田光男·전상우 譯, 2019; 武田幸男·김효진 譯, 2019), 수에서는 배구가 『고려풍속』을 저술해 고구려 공격을 예비하였던 것이다(한원연구회 편, 2022). 고구려에서도 이와 같은 수의 내부 사정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었고, 따라서 수의 공격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607년 고구려와 동돌궐의 교섭이 주목된다.
607년 4~9월 수 양제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북방 변경지대를 순행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8월 6일에는 유림군(楡林郡: 内蒙古自治區 托克托縣)에서부터 금하(金河: 南黑河) 방면으로 이동하면서 동돌궐 계민가한의 영접을 받았다. 계민가한은 매우 순종적인 태도로 양제를 접대했다. 고구려의 사신은 이때 계민가한을 방문하고 있었다고 한다. 동돌궐과의 교섭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607년 고구려의 동돌궐 교섭은 수와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수의 고구려 공격에 대비해 동돌궐의 지원 내지 협조를 요청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계민가한은 고구려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고구려의 사신이 방문해 있다는 사실을 양제에게 알렸다.
계민가한은 고구려의 사신을 양제에게 데려가 대면하도록 했다. 『수서』 돌궐전에서는 고구려와 동돌궐의 교섭을 ‘사통(私通)’ 및 ‘경외(境外)의 교(交)’로 표현하였다. 즉, 수 중심의 국제질서를 위반한 것으로 적었는데, 이는 수 측의 인식을 반영한 서술이었다. 실제 이 자리에서 배구는 고구려 지역이 역사적으로 중원 왕조의 영역으로 국왕의 입조를 강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제는 고구려의 사신에게 내년에는 탁군에 가겠으니, 영양왕은 그때 와서 조현(朝見)하라고 했다. 친조(親朝)를 요구한 것이다.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면 동돌궐을 동원해 공격하겠다고 하였다. 배구의 주장처럼 철저한 복속을 강압한 것이다.
『수서』 배구전의 찬자는 영양왕이 양제의 요구를 거절하자 비로소 정요(征遼)의 계책, 즉 고구려 공격을 구상하였다고 적었다. 다수의 연구자 역시 고구려의 동돌궐 교섭이 수를 자극하였다고 해석하였다. 그런데 598~607년 요서 지역에서 수의 동진이 지속되었고, 양제의 즉위 이후 더욱 적극적인 대외정책 추진과 함께 수의 고구려 공격은 이미 구상되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다시 말해 607년 고구려의 동돌궐 교섭은 양제의 구상을 공표하게 한 구실에 불과하였다고 생각된다(이정빈, 2018).
결과적으로 607년 고구려의 동돌궐 교섭은 실패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와 같은 교섭 노력은 607년을 전후해 고구려가 수의 동맹이었던 동돌궐과 교섭을 시도할 만큼 위기의식이 높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주변 여러 나라와 다각적인 교섭을 시도하였던 사정을 말해준다. 실제 고구려의 외교적 노력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먼저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가 주목된다. 607년 백제의 무왕(재위 600~641년)은 사신 왕효린(王孝隣)을 보내 고구려 공격을 요청하였고, 611년 고구려 공격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자 사신 국지모(國知牟)를 보내 자국 군대의 파병 시기를 문의했다. 수의 고구려 공격에 적극적인 동참을 약속한 것이다. 수에서는 백제에 사신을 보내 파병 정보를 공유하기도 하였다.
600년대 중·후반 고구려는 적극적인 남방정책을 추진하였다고 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신라는 한강 유역을 두고 서로 경쟁하는 상황이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대립관계였으므로 수에서는 백제의 약속을 신뢰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612년 고구려-수 전쟁에서 백제는 군대를 국경에 배치하였을 뿐 실제 움직이진 않았다. 수에서는 백제가 612년 고구려-수 전쟁 중에 양단책(兩端策)을 구사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안으로 고구려와 통정하면서 수를 엿보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수의 평가는 백제와 수의 동맹이 공고하지 못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백제가 고구려와 통정하였다고 하듯 배후에서는 고구려의 외교공작이 펼쳐졌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제가 고구려의 동맹으로서 반수 연대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 백제는 국제정세의 추이 속에서 자국의 현실적 이해관계를 고려하면서 유동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신라의 경우 걸사표(乞師表)를 보내는 등 수의 편에 가담한 모습이었지만, 백제의 견제를 받고 있었기에 고구려의 남방을 위협하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삼국 상호 간의 경쟁 속에서 고구려의 외교적 노력이 펼쳐졌고, 남방은 어느 정도 안정된 것이다.
다음으로 고구려와 왜의 관계가 주목된다. 고구려는 570년대부터 왜와 본격적으로 교섭하였는데, 영양왕이 재위하던 시기에는 주로 불교를 매개로 삼아 교류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595~615년에는 고구려의 승려 혜자(惠慈)가 왜에 체재하며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스승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스이코천황(推古天皇, 재위 592~628년)이 불상을 조성하자 황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양국 간의 우호관계를 다지기 위해서였다고 하였다(김진한, 2020). 불교 교류는 외교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왜와 우호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한 고구려의 외교가 수의 위협에 대비한 것이었음은 물론이다(李成市, 1990).
예컨대 607년 왜는 수에 외교문서를 보내 자국을 “해 뜨는 곳의 천자(天子)”로 수를 “해 지는 곳의 천자”로 표현하였는데, 이와 같은 지리 감각은 고구려를 기준으로 한 것으로, 혜자와 같은 승려가 외교문서의 작성에 관여하였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수에서도 이와 같은 사정을 충분히 인지하였을 것이다. 즉 고구려의 우방으로 왜를 염두에 두어야 했을 것으로, 고구려와 왜의 관계는 수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기능하였던 것이다(李成市, 1990).
이처럼 607~612년 백제-수 관계와 수-왜 관계의 배후에는 고구려의 다각적인 외교가 발휘되고 있었다. 수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한 고구려의 필사적인 노력이 펼쳐진 것이다. 그러나 607~608년 동아시아 국제정세에서 수의 우위가 더욱 확고해지면서 이제 수의 공격은 노골적으로 추진되었다. 다시 고구려와 수 양국은 전쟁 국면으로 돌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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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변국의 동향과 갈등의 심화 자료번호 : gt.d_0006_0010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