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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3. 양국의 전쟁 결정과 국지전의 개시

3. 양국의 전쟁 결정과 국지전의 개시

이미 607년부터 고구려에 대한 수의 공격이 예고되었다고 하지만, 곧바로 전쟁이 발발하지는 않았다. 607~609년까지 수는 서방과 북방에 자리한 여러 유목세력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 607년에는 철륵(鐵勒)을 공격해 복속시켰고, 608년에는 철륵을 동원해서 토욕혼을 공격하였으며, 서돌궐로 하여금 양제의 조서를 받도록 해 우위를 확인하였고, 이오(伊俉: 新疆維吾爾自治區 唅密市)를 공격해 항복을 받았다. 그리고 609년부터 토욕혼에 대한 공세를 이어가 마침내 제압하였고 서역 제국(諸國)의 복속을 받았으며, 서역과의 교역로를 확보하였다. 배구의 제안으로 추진된 서역 경략이 완수된 것이다.
이제 수의 눈길은 고구려로 향하였다. 다만 서방과 북방의 제세력과 전쟁하며 수의 군대가 입은 손실도 적지 않았다. 610년 고구려 공격을 위한 군마를 확보하였고 병장기를 검열하였다. 그리하여 611년 2월 마침내 고구려 공격 조서를 반포하였다.
수 양제는 즉위 직후부터 사이 경략을 구상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서역의 사례에서 잘 드러나듯 동아시아 전역에 대한 교역권의 장악과 밀접하였다(김창석, 2013). 그런데 수에서 교역과 전쟁에 적극적이었던 것이 양제만은 아니었다. 예컨대 598년 고구려에 대한 반격 시도나 605년 임읍 공격은 관롱집단이 주도하였다고 하였다. 하지만 양제의 즉위 이후 대외정책과 전쟁은 대부분 그가 주도하였다. 이를 통해 양제는 관롱집단을 비롯한 주요 정치세력을 통제하고 집권력을 장악하고자 하였다(김선민, 2003; 丁載勳, 2004).
더욱이 양제는 제위 계승분쟁을 통해 즉위하였기에 정통성에 한계를 안고 있었다. 유목사회 계통의 군주는 이러한 불안정한 제위 계승의 한계를 대외적인 성과를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는데, 양제의 고구려 공격 역시 그러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고 분석된다(朴漢濟, 1988; 1993). 수의 고구려 공격 계획은 관롱집단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이제 양제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으로 변모하였다.
표2 | 수의 전쟁 준비 과정(610~611년)
연월내용징발 지역이동·공급 지역
610년군마 양육산동(山東)
610년양곡 비축 노하진・회원진
611년 4월 이전병사 징발천하(天下)탁군
611년 4월 이전수수(水手)・노수(弩手) 징발강・회(江・淮) 이남탁군
611년 4월 이전배찬수(排鑹手) 징발영남(嶺南)탁군
611년 5월융거(戎車) 제작하남(河南)・회남(淮南)・강남(江南)고양(高陽)
611년 5월의갑만막(衣甲幔幕) 수송하남・회남・강남고양
611년 5월민부(民夫) 징발하남・하북(河北)
611년 7월민부 징발강남・회남여양창(黎陽倉)・낙구창(洛口倉) → 탁군
611년 7월선박(船舶) 징발강남・회남여양창・낙구창 → 탁군
611년 7월미곡(米穀) 운송강남・회남여양창・낙구창 → 탁군
이처럼 수 양제의 고구려 공격은 황제권 강화라는 정치적인 목적이 담겨 있었다. 그러므로 양제는 612~614년 고구려-수 전쟁에서 실패하고 신료 대부분이 고구려와의 전쟁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용납치 못하고 지속적인 공격에 나섰다고 해석된다. 그러면 고구려 내부의 사정은 어떠하였을까.
607~612년 고구려는 수의 위협에 대비해 다각적인 외교를 전개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고구려는 수의 공세에 대해서는 유연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607년 양제의 입조 요구를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 중심의 국제질서에 순응하고자 노력하지 않았다. 물론 수의 요구가 무리하였고, 무엇보다 공격이 양제의 의지에 따라 일방적으로 추진된 것이기에 고구려의 선택지는 적었을 것이다. 이를 고려한다고 해도 후술하듯이 고구려의 대응은 강경한 편이었다. 607~612년 고구려의 대외정책은 수와의 대립을 전제로 추진된 것으로 풀이된다.
이와 관련하여 600년에 『신집(新集)』이 편찬된 사실이 주목된다(趙仁成, 1985; 朴成熙, 1999). 『신집』은 영양왕의 명으로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이 편찬하였다. 태학은 국립(國立) 유교교육기관으로 태학박사는 그 교수였다. 『신집』 편찬은 국왕이 주도한 국책사업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태학이 유교교육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신집』은 충(忠)과 같은 유교정치사상을 통해 국왕 중심의 정치를 강조하기 위한 목적을 담고 있었다고 짐작된다(李基白, 2011).
당시 고구려는 598년 수와의 전쟁 위기를 넘긴 직후였다. 비록 수와 우호관계를 맺었다고 하지만, 양국의 갈등은 잠재되어 있었다. 더욱이 이 무렵의 고구려는 남방의 백제·신라에 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서방의 긴장이 온전히 해소되지 않은 가운데 남방의 정세마저 불안정했다. 이와 같이 보면 『신집』 편찬을 통해 국왕 중심의 정치를 강조하고자 한 것은 왕권 강화의 결과였다기보다 오히려 그 필요성이 요청되었던 사정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왕권의 강화가 요청된 사정과 관련하여 고구려-수 전쟁의 주요 지휘관으로 왕제 건무와 대신 을지문덕이 활약한 사실이 참고된다. 건무는 평양성 공방전에서 내호아(來護兒)의 공격에 맞서 결사대를 이끌었고, 마침내 이 전투의 승리를 주도하였다. 그는 영양왕의 이모제(異母弟)로, 618년 영양왕의 사후 왕위를 계승한 후일의 영류왕(재위 618~642년)이다. 그런데 영양왕은 565년에 태자가 되었고 590년에 즉위하였다. 이로 보아 612년 고구려-수 전쟁에서 영양왕은 노년기였다고 짐작된다. 그러므로 건무가 왕위를 계승했다고 보면, 이 무렵 건무는 왕위계승 후계자 내지 유력한 후보자가 아니었을까 한다. 즉 건무는 왕실의 일원이자 대표자였다고 생각된다.
을지문덕은 우중문·우문술이 지휘한 30만 군의 평양성 직공을 방어하였고, 그를 추격해 살수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을지문덕은 대신이었다고 하는데, 수에서 그를 국왕에 버금가는 인물로 인식하고 있었다. 『통전(通典)』에서 을지문덕을 국상(國相)으로 표현하였던 것도 이와 같은 이해를 보여준다. 이로 보아 을지문덕은 대대로(大對盧)로서 영양왕대 귀족회의의 수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을지문덕은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그는 전통적인 귀족과 거리가 있는 신진 귀족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임기환, 2004).
이처럼 건무와 을지문덕을 통해 볼 때 고구려-수 전쟁은 왕실과 신진 귀족세력을 중심으로 수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평원왕·영양왕과 신진 귀족세력은 대외정책과 전쟁에 적극적인 면모를 보였고, 598년 영주총관부 공격 역시 그들이 주도하였다. 그렇다고 보면 『신집』을 편찬해 왕권 강화를 추구하였던 것은 적극적인 대외정책과 전쟁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 점에서 국왕과 신진 귀족세력은 수와의 관계에서도 대립을 마다하지 않은 강경노선을 추구하였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6세기 중반 이후 고구려의 정치체제는 이른바 귀족연립체제로 설명된다(노태돈, 1999; 임기환, 2004). 주요 귀족의 합의를 통해 국정이 논의되고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는 평원왕·영양왕 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국왕과 신진 귀족세력이 강경노선을 추구했다고 해도, 그에는 전통적인 귀족세력을 포함한 지배층 전반의 동의가 수반되지 않으면 곤란했다. 따라서 국왕과 신진 귀족세력이 강경노선을 주도하였지만, 여기에는 지배층 전반의 동의가 뒷받침되었다고 이해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고구려의 지배층은 왜 이와 같은 선택을 하였을까 궁금하다.
6세기 고구려의 사회경제적 상황과 정치체제의 변화가 고려된다. 4~5세기 고구려는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대외적인 영역 확장을 이루었으며, 이를 통해 6세기 중반까지 태왕(太王)으로 상징되는 국왕 중심의 정치체제를 운영하였다. 이와 같은 국가·정치체제의 변동은 3세기 이후 철기가 보급되고 농업생산력이 증대되며, 토지와 인민의 확보가 중시된 결과였다. 토지와 인민의 확보가 중시되면서 국왕과 귀족을 비롯한 지배층은 대외적인 정복전쟁을 추진하였고(여호규, 1995), 정복전쟁에서 획득한 토지와 인민에 대한 분배권을 국왕이 행사함으로써 국왕 중심의 정치체제가 마련된 것이다.
그런데 6세기 이후 고구려의 정복전쟁과 영역 확장은 지속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6세기 중반에는 백제·신라의 연합군으로부터 한강 유역을 상실했다. 농기구나 농법의 개량을 통한 농업생산력 역시 비약적인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와 비교해 주요 귀족을 위시한 지배층의 사회경제적 요구는 축소·중단되기는커녕 오히려 가중되고 있었다고 보인다. 그러므로 한정된 사회경제적 분배문제를 둘러싼 갈등의 소지가 컸다. 6세기 중반 왕위계승을 둘러싼 귀족세력 간의 분쟁이 그와 같은 갈등의 결과였다고 해석된다(임기환, 1996b).
그럼에도 불구하고 6세기 중반부터 7세기 중반까지 고구려의 정치체제가 급속히 동요하지는 않았다. 귀족연립체제 속에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정치체제를 유지해 나갔다(노태돈, 1999). 주요 귀족세력 간에 타협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타협은 정치적 결정이었지만, 한편으로 지배층의 사회경제적 요구가 일정하게 해소되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5세기 이후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동북아시아 지역의 교역권이 주목된다. 교역이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지배층의 사회경제적 요구를 해소하였던 통로의 하나였음은 인정해도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구려의 사회경제적 상황과 정치체제 운영을 보면, 6세기 후반 이후 수의 세력 확대와 교역권 위협은 지배층 전반에 위기의식을 공유하는 계기를 제공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지배층 다수는 국왕과 신진 귀족세력이 주도한 강경노선에 동의하고, 수의 공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612년 고구려-수 전쟁은 기본적으로 수의 일방적인 공격에서 비롯되었지만, 한편으로 고구려 지배층의 정치적 선택도 일정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이정빈, 2018).
607~611년 수에 대한 고구려의 강경노선과 관련하여 612년 수 양제가 반포한 고구려 공격 조서가 주목된다. 이를 보면 망반자(亡叛者)라는 존재가 보인다. 수에서 이탈해 고구려로 넘어간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수 내부의 반란세력도 있었을 수 있다. 그런데 요서 지역의 일부가 수의 세력범위에 있었고, 6~7세기 거란·말갈의 제종족이 시세(時勢)에 따라 유연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음을 떠올려 보면, 망반자란 비단 수 내부의 반란세력뿐만 아니라 거란·말갈을 비롯한 요서 지역의 제종족 중에서 이탈한 세력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가 수 내부의 반란세력 내지 요서 지역의 제종족을 포섭한 것은 동진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조서 내용 중에서 고구려가 “변방에 가득하여 봉후(烽候)를 매우 수고롭게 하였으니, 변방의 경계가 이로 인하여 조용하지 못하였다”고 한 사실도 주목된다. 물론 수 양제의 고구려 공격 조서는 전쟁 명분을 내세우기 위한 것으로, 수 측의 과장을 감안해 보아야 하지만, 이와 같은 내용은 요서 지역에서 고구려의 군사활동이 있었고, 그러한 활동이 일회적이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조서에서는 고구려가 598년 수의 공격이 실패한 이후 거란과 말갈을 통해 해수(海戍)를 죽이고 요서(遼西)를 침범하였다고 하였다. ‘해수’라고 하면 요서의 해안지역에 설치된 수의 진·수를 떠올려 볼 수 있다. 그리고‘요서’란 비교적 넓은 지역을 의미하지만, 이 무렵 요서 지역의 주요 교통로에 회원진과 같은 진·수가 설치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요서란 바로 그러한 군사기지를 가리킨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고구려가 요서에 있는 수의 진·수를 공격한 사실을 가리킨다고 이해된다.
이처럼 612년 수 양제의 고구려 공격 조서는 598년 이후 요서 지역에서 전개된 고구려의 대외정책과 군사활동, 구체적으로 수의 진·수를 공격한 사실을 담고 있다. 그런데 적어도 607년까지 양국은 표면적으로는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고 했다. 따라서 고구려가 수의 진·수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을 시도한 것은, 수의 고구려 공격 계획이 구상된 607년 이후였다고 생각된다. 598년의 전쟁 위기에서 드러난 것처럼 수의 군사적 약점이 군수 보급에 있었고, 요서 지역의 진·수는 이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구려는 그와 같은 수의 약점을 공략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607~611년 고구려는 요서 지역에 위치한 수의 진·수를 공격하며 전쟁에 대비하였던 셈이다. 수에 대한 강경 대응의 한 사례였다.
607~611년 고구려의 진·수 공격에 수가 방관하지만은 않았다. 예컨대 수의 세력범위로 들어간 속말말갈의 돌지계 집단은 양제 재위 초년에 고구려와 자주 전투하였다고 했는데, 이는 고구려의 요서 공략에 돌지계가 대응한 사실을 의미한다고 해석된다. 나아가 611년 수는 고구려의 무려성(武厲城)을 함락시켰다고 한다. 무려성은 무열성(武列城)·무려라(武厲邏)라고도 하는데, 『자치통감』 호삼성(胡三省)의 주(注)에서 무려라는 요하 서쪽에 소재한 것으로 나온다. 고구려는 요하 서쪽의 요서 지역에 무려라뿐만 아니라 다수의 군사기지를 운용하였는데(노태돈, 1999), 무려라는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거점의 하나였다고 이해된다. 611년 무려라의 함락에서 보듯 양국의 변경이었던 요서 지역에서는 이미 612년의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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