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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1. 612년 수의 고구려 원정 준비

1. 612년 수의 고구려 원정 준비

고구려 원정을 결정한 수는 608년부터 군수물자 수송을 위한 운하를 건설하고 군마(軍馬)와 병장기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대본영(大本營)으로 임삭궁(臨朔宮)을 건설하는 등 일찌감치 전쟁 준비에 나섰고, 611년 2월 양제가 탁군[涿郡: 북경(北京) 남서쪽 일대]에서 고구려 토벌을 선언하는 조서를 내리면서 보다 본격화하였다. 수는 2월에 동래[東萊: 산동성(山東省) 내주(萊州) 혹은 등주(登州)]에서 배 300척을 건조하였다. 4월에는 장강(長江)과 회수(淮水) 이남에서 수수(水手) 1만 명과 노수(弩手) 3만 명, 영남(嶺南)에서 배찬수(排鑹手) 3만 명을 징발하였다. 5월에는 융거(戎車) 5만 승을 제작하여 고양(高陽)으로 보낸 후 군사들로 하여금 갑옷이나 천막 등의 군수품을 싣고 오도록 하였다. 그리고 7월에는 여창(黎倉)과 낙구(洛口)의 창고에 있던 미곡을 탁군으로 보냈고, 다시 최전방 군수물자 보급기지인 노하진[瀘河鎭: 요령성(遼寧省) 금주(錦州) 일대]과 회원진[懷遠鎭: 요령성 북진(北鎭) 일대]에 보내 비축하였다.
한편, 수는 고구려 원정 준비를 하는 와중에 611년 고구려의 무려성(武厲城)을 공격하였다(『수서』 이경전). 고구려 또한 요서(遼西)에 위치한 수의 진(鎭)·수(戍)를 공격한 바 있었는데(이정빈, 2018), 즉 양국은 612년 이전에 접경공간인 요서에서 국지전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양국의 국지전은 전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전 요서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전쟁 수행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기 위해 벌인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결국 수가 의무려산(醫巫閭山)·대릉하(大凌河) 하류 동쪽 인근을 세력 안에 두고 노하진과 회원진을 최전방 군수물자 보급기지로 활용함으로써 안정적인 군량 보급을 꾀할 수 있었다.
 
1) 군단 편성과 병력
수는 위와 같은 고구려 원정을 위한 제반 준비뿐만 아니라 군단 편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수의 군단 편성에 대해서는 ‘113만 3,800명’이라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의 병력이 동원되었고 꽤 자세한 기록으로 인해 많은 연구자의 관심 속에 적지 않은 연구성과가 배출되었다.
종래 수군의 군단 편성을 검토하는 데 있어 가장 주목했던 기사는 612년 1월 양제가 고구려 원정에 나서면서 반포한 조서, 그리고 수군의 행군 모습과 편제 양상이 담겨 있는 『수서』 예의지였다. 두 기사를 종합하면 육군은 24군과 더불어 양제와 문무백관을 호위하던 군대로 추정되는(寧志新·喬鳳岐, 2004) 천자[天子: 어영(御營)] 6군으로 편성되었다고 나온다(표1 참고). 이를 바탕으로 수 육군은‘24군+천자 6군’ 등 모두 30개 군으로 편성되었다고 별 의심 없이 이해해 왔다.
하지만 612년 고구려-수 전쟁에 참전한 인물의 열전이나 묘지명 등 사료의 폭을 넓혀 보면 24군 이외의 군명이 추가로 확인된다. 요동성 공략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수군이 평양성으로 곧장 진군시킬 목적으로 편성한 별동대를 보면 참전한 군대로 수성도군(遂城道軍)과 증지도군(增地道軍)이 나온다(『자치통감』 수기 양제 대업 8년 6월). 그리고 전쟁에 참전한 범안귀(范安貴)와 유원(遊元)이 각각 험독도군(險瀆道軍)과 개모도군(蓋牟道軍)을 이끌었다고 나온다(〈범안귀묘지명〉; 『수서』유원전).
한편, 612년 고구려-수 전쟁 때 편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군명도 확인된다. 이민(李敏)이 이끌었던 신성도군(新城道軍)은 612년 혹은 613년 고구려-수 전쟁에 참전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수서』 이민전), 군명에 보이는 신성[新城: 요령성 무순(撫順) 고이산성]이 고구려의 전략적 요충지로 그 중요성을 감안하면 612년 전쟁 때 편성되었다고 여겨진다. 613년 고구려-수 전쟁 당시 편성된 노룡도군(盧龍道軍)의 경우(『수서』 양언광전) 612년 전쟁 때 편성되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613년 전쟁 당시 편성되었던 군명을 살펴보면 노룡도군을 제외한 나머지는 612년 전쟁에서도 확인된다. 상대적으로 613년 전쟁의 병력 수가 적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613년 고구려-수 전쟁 때 새로운 군명으로 군대를 편성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즉, 노룡도군 또한 612년 고구려-수 전쟁 때 편성되었다고 여겨진다.
표1 | 『수서』 본기와 예의지에 보이는 612년 고구려-수 전쟁의 수 육군 편제 양상
군명군명 유래주요
지휘관
관직관등전거
좌1군
누방도(鏤方道)
낙랑군 속현
좌2군
장잠도(長岑道)
낙랑군 속현번자개
(樊子蓋)
대장
(大將)
섭좌무위장군
(攝左武衛將軍)
『수서(隋書)』 번자개
좌3군
해명도(海冥道)
낙랑군 속현두로실
(豆盧實)
부장
(副將)
호분랑장
(虎賁郎將)
〈두로실묘지명〉
좌4군
개마도(蓋馬道)
현도군 속현토만서
(吐萬緖)
대장좌둔위대장군
(左屯衛大將軍)
『수서』토만서
좌5군
건안도(建安道)
고구려 지명
좌6군
남소도(南蘇道)
고구려 지명단문진
(段文振)
대장좌후위대장군
(左候衛大將軍),
병부상서
(兵部尙書)
『수서』단문진
좌7군
요동도(遼東道)
고구려 지명형원항
(荊元恒)
대장좌효위대장군
(左驍衛大將軍)
『자치통감(資治通鑑)』 대업(大業) 8년
관덕왕웅
(觀德王雄)
대장검교좌익위대장군
(檢校左翊衛大將軍)
『수서』관덕왕웅
좌8군
현도도(玄菟道)
현도군신세웅
(辛世雄)
대장우둔위장군
(右屯衛將軍)
『자치통감』 대업 8년
좌9군
부여도(扶餘道)
고구려 지명우문술
(宇文述)
대장좌익위대장군
(左翊衛大將軍)
『수서』우문술
좌10군
조선도(朝鮮道)
낙랑군 속현
좌11군
옥저도(沃沮道)
옛 족속명설세웅
(薛世雄)
대장우익위장군
(右翊衛將軍)
『수서』설세웅
좌12군
낙랑도(樂浪道)
낙랑군우중문
(于仲文)
대장우익위대장군
(右翊衛大將軍)
『수서』우중문
류사룡
(劉士龍)
위무사
(慰撫使)
상서우승
(尙書右丞)
『수서』우중문
우1군
점제도(黏蟬道)
낙랑군 속현
우2군
함자도(含資道)
낙랑군 속현
우3군
혼미도(渾彌道)
낙랑군 속현이경
(李景)
『수서』이경
우4군
임둔도(臨屯道)
현도군 속현
우5군
후성도(候城道)
요동군 속현
우6군
제해도(提奚道)
낙랑군 속현
우7군
답돈도(踏頓道)
요서(遼西) 지명사상
(史祥)
대장좌효위장군
(左驍衛將軍)
『수서』사상
우8군
숙신도(肅慎道)
옛 족속명양의신
(楊義臣)
태복경
(太僕卿)
『수서』양의신
우9군
갈석도(碣石道)
요서 지명조(효)재
[趙(孝)才]
『수서』조재
우10군
동이도(東暆道)
낙랑군 속현육지명
(陸知命)
수항사자
(受降使者)
치서시어사
(治書侍御史)
『수서』육지명
우11군
대방도(帶方道)
낙랑군 속현
우12군
양평도(襄平道)
요동군 속현장근
(張瑾)
대장우어위장군
(右御衛將軍)
『자치통감』 대업 8년
천자6군
내군(內軍)
『수서』예의(禮儀)
천자6군
외군(外軍)
『수서』예의
천자6군
전군(前軍)
『수서』예의
천자6군
후군(後軍)
『수서』예의
천자6군
좌군(左軍)
『수서』예의
천자6군
우군(右軍)
『수서』예의
이와 같이 612년 고구려-수 전쟁 때 편성된 수 육군의 군명으로 기존의 ‘24군+천자 6군’ 외에 추가로 4개 또는 최대 6개를 포함한다면 모두 34~36개를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수군의 진군과 관련하여 탁군에서 “매일 한 군이 출발하여 40일이 되어서야 출발을 마쳤다”는 기록이 있는데(『수서』 제기 양제 대업 8년 춘정월),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수 육군이‘34군+천자 6군’ 등 모두 40개 군으로 편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겠다.
수 육군이 ‘24군+천자 6군’ 등 30개 군으로 편성되었다고 이해하여왔던 것은 612년 1월에 반포된 양제의 조서 내용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서는 612년 1월 이전에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하였기 때문에 612년 1월 이후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612년 1월 조서가 반포된 다음 탁군에서 노하진이나 회원진으로 진군하는 사이 혹은 이미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조서를 작성하고 있는 기간에 군단 편성의 변화가 있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전쟁 내내 수 육군이 ‘24군+천자 6군’ 등 30개 군으로 이루어졌다는 통설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한편, 수군(水軍)의 편제 양상과 관련하여 양제의 조서에 보이는 24군 가운데 낙랑군(樂浪郡)과 현도군(玄菟郡) 속현의 군명을 가진 군들을 수군(水軍)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서인한, 1991; 임용한, 2012). 이 견해는 군명이 실제 진군 목표지점을 가리킨다는 전제하에 한반도에 위치한 지역은 해로, 즉 수군(水軍)을 통해 건너갔다고 보는 것인데, 별동대로 편성된 군대의 진군 방향을 보면 군명이 꼭 실제 진군 목표지점을 가리키는 것 같지는 않다.
양제의 조서를 보면 24군이 언급된 다음에 ‘창해도군(滄海道軍)’이 나오는데, ‘창해(滄海)’라는 군명과 더불어 연이어 나오는 “주로(舟艫)가 1,000리이고 높은 돛은 번개가 내달린 듯하며 거대한 전함은 구름처럼 날아가 패강(浿江)을 가로질러 곧장 평양으로 나아갈 것이다”라는 기록을 감안하면, 창해도군이 수군(水軍)의 군명이었다고 추정된다. 수군(水軍), 즉 창해도군은 전투 수행과 더불어 평양성에서 육군과 만나 군량을 보급하는 임무를 맡았다(『수서』식화지 대업 7년).
이와 같이 수군은 육군과 수군(水軍)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육군과 수군(水軍) 각각의 병력 수, 나아가 육군 각 군의 병력 수는 어느 정도였을까? 611년 4월에 수는 장강과 회수 이남 그리고 영남에서 수수 1만 명과 노수 3만 명, 배찬수 3만 명을 징발한 바 있다. 수수는 노를 젓는 인력이었으므로 분명 수군(水軍)으로 참전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배찬수가 지니고 있었던 배찬(排鑹), 즉 짧은 창은(『자치통감』 수기 양제 대업 7년 호삼성 주) 육군보다는 수군(水軍)에 유리한 무기이다. 이를 감안하면 611년 4월에 징발된 수수, 노수, 배찬수 등 총 7만 명은 수군(水軍)으로 동원된 병력이었다고 추정된다(楊秀祖, 1996). 그렇다면 육군은 총병력 113만 3,800명에서 수군(水軍) 7만 명을 뺀 106만 3,800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주 001
각주 001)
『수서』 제기 양제 대업 8년 춘정월조에는 육군과 수군(水軍)이 모두 언급된 다음에 113만 3,800명이라는 병력 수가 나오는 반면, 『자치통감』 수기 양제 대업 8년 춘정월조에는 육군만 언급된 후 113만 3,800명이라는 병력 수가 나온다. 『수서』에는 육군과 수군(水軍)을 합해서 113만 3,800명, 『자치통감』에는 육군만 113만 3,800명이었다고 나오는 것이다. 『자치통감』은 『수서』를 인용·참고한 2차 사료이다. 그리고 『자치통감』에서 113만 3,800명을 육군의 병력 수로 기록한 것이라면 수군(水軍)의 병력 수도 따로 언급 해야할 텐데, 이와 관련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113만 3,800명은 육군과 수군(水軍)을 합한 병력 수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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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병종 구성
수 육군 각 군의 병종 구성에 대해서는 『수서』 예의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예의지의 기록을 토대로 각 군의 병종에 대해 살펴보면 육군 각 군은 기병과 보병 그리고 치중융거산병(輜重戎車散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먼저 기병은 4단(團)이 있었고, 1단은 10대(隊)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대마다 100기(騎)가 있었다. 1단과 3단에 속한 기사는 명광갑(明光甲)을 입었고 철구장(鐵具裝)을 착용한 말을 탔다. 반면 2단과 4단에 속한 기사는 서갑(犀甲)을 입었고, 수문구장(獸文具裝)을 착용한 말을 탔다. 612년 고구려-수 전쟁 당시 수군 기병의 가장 큰 특징은 기사뿐만 아니라 말에게까지 갑옷을 착용시킨 중장기병(重裝騎兵)이 주력이었다는 점이다. 중장기병은 북방 종족이 북중국 대륙으로 대거 진출하였던 5호16국시기에 급속도로 보급되어 각 국가의 주요 병종으로 자리잡았다. 수는 북주의 군제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중장기병 또한 그대로 활용하여 기병의 주력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보병을 살펴보면, 기병과 마찬가지로 4단이 있었다. 1단은 20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대마다 몇 명의 군사가 있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보병은 기본적으로 투구와 갑옷을 착용하였고 방패를 소지하였다. 기병과 달리 보병이 입은 갑옷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이는 기사가 입은 갑옷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겨지는데, 그렇다면 보병 또한 명광갑을 입었다고 볼 수 있다.
치중융거산병 또한 보·기병과 마찬가지로 4단이 있었다. 치중융거산병의 실체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보병이 끼고 행군하였으며(『자치통감』 수기 양제 대업 8년 정월), 보·기병과 교대로 번(番)을 섰다는 점에서(『수서』 예의지 대업 7년) 보·기병과는 구별되는 병종이었다고 여겨지는데, 부병(府兵)으로 이루어진 보·기병과 달리 모인(募人)들로 이루어진 병종으로서 숫자만 채우는 예비군(韓昇, 1996), 융거를 이용해 군수물자를 옮기는 보급병, 공성기계를 만드는 공인 등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 군 내 기병, 보병, 치중융거산병의 수에 대해서는 『수서』 예의지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보병 한 대의 군사 수, 치중융거산병의 실체, 육군 한 군의 병력 수 등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는데, 기병 4,000기, 보병 8,000명, 치중융거산병 8,000명 등 총 2만 명으로 보는 견해(서인한, 1991; 김성남, 2005), 기병 4,000기, 보병 1만 6,000명, 기타 5,000명 등 총 2만 5,000명으로 보는 견해(淺見直一郞, 1985), 기병 4,000기, 보병 8,000명, 치중(輜重)·융거(戎車)·산병(散兵) 1만 3,000명 등 총 2만 5,000명으로 보는 견해(이동준, 2009), 기병 4,000기, 보병 8,000명, 치중병 2만여 명 등 총 3만 2,000여 명으로 보는 견해(온창일, 2001), 기병 4,700기, 보병 1만 6,000명, 중장비 운송 및 예비병력 1만 6,000명, 기타 인원 300여 명 등 총 3만 7,000여 명으로 보는 견해(김창석, 2007) 등이 있다. 그리고 일반군과 천자군의 병력 수를 다르게 파악하면서 일반군은 기병 4,000기, 보병 8,000명, 치중융거산병 1만 3,000명 등 총 2만 5,000명, 천자군은 기병 5,000기, 보병 1만 명, 치중융거산병 2만 명 등 총 3만 5,000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정동민, 2016).
한편, 수군(水軍)의 병종 구성에 대해서는 전체 병력 7만 명 가운데 수수 1만 명을 뺀 6만 명이 전투병력이었고, 노수와 배찬수가 각각 3만 명이었다는 것 이외에 자료 부족으로 더 이상은 알 수 없다.
 
3) 지휘체계
문제(文帝) 시기에는 중앙과 지방에 표기부(驃騎府)와 거기부(車騎府) 등 군부(軍府)를 설치하여 부병을 관리하였고, 군부의 부병은 중앙 12위(衛)에 분속하였다. 그리고 양제 시기에는 중앙 12위에 각각 정3품 대장군(大將軍) 1명, 종3품 장군(將軍) 2명, 정4품 무분랑장(武賁郎將) 4명, 종4품 무아랑장(武牙郎將) 6명, 그리고 정5품 장사(長史) 1명 등을 배속하였다. 612년 고구려-수 전쟁에 참전한 주요 지휘관의 관명을 보면 대장군, 장군, 무분랑장, 장사 등이 확인되는데, 이를 통해 중앙 12위 소속 인물들이 대거 지휘관에 임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장군 혹은 장군은 각 군의 최고 지휘관인 대장을 맡았다. 무분랑장은 대장 바로 아래인 아장(亞將), 아장을 맡지 못한 무분랑장과 무아랑장은 단을 이끄는 편장(偏將)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장사는 개모도군으로 참전한 유원의 사례로 볼 때 감군(監軍)을 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수서』 유원전). 북주나 수 초기의 감군은 군사결정권을 가지면서 제군(諸軍)을 통솔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감군의 전업화가 이루어져 주로 위법을 감찰하는 역할을 맡았다(孫繼民, 1995).
한편, 각 군에는 대장, 아장, 편장, 감군 외에 특수 보직으로 수항사자(受降使者) 1명이 있었다. 수항사자는 그 관명을 감안하면 정식으로 고구려군의 항복을 받는 역할을 맡았다고 볼 수 있는데, 더불어 황제의 조서를 받들어 위무하는 역할도 맡았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대장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는 것인데(『수서』 예의지 대업 7년), 이는 수항사자가 대장을 보조하면서 명령을 수행하는 관직이 아니라 대장과 더불어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수항사자로 참전한 인물로는 육지명(陸知命)이 확인된다(『수서』 육지명전). 동이도군(東暆道軍)의 수항사자로 참전한 그는 당시 3대(臺) 가운데 하나인 어사대(御史臺) 소속으로 백관을 감찰·탄핵하고 옥안과 송사를 추국하는 일을 관장했던 정5품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였다. 한편, 낙랑도군(樂浪道軍) 소속으로 참전한 류사룡(劉士龍)은 군 내에서 위무사(慰撫使)를 맡고 있었는데(『수서』 우중문전), 위무사는 수항사자와 마찬가지로 612년 고구려-수 전쟁에서 처음 확인되고(寧志新, 2005), 관명에 보이는 ‘위무(慰撫)’는 수항사자의 임무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류사룡은 군 내 동정을 살피러 온 을지문덕의 생포 여부를 두고 대장인 우중문(于仲文)과 대립한 바 있는데, 우중문과 의견 충돌을 빚고 있는 모습은 대장의 통제를 크게 받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위무사는 수항사자였다고 여겨지는데, 위무사를 맡고 있던 류사룡은 당시 5성(省) 가운데 하나인 상서성의 6조(曹) 소속으로 관료들의 위반사항을 감찰하고 법제를 바로잡았던 정4품 상서우승(尙書右丞)이었다.
육지명과 류사룡의 사례로 볼 때 양제는 5성과 3대 소속 인물을 수항사자로 임명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중앙 12위 소속인 대장이 수항사자에 대해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여겨진다. 이와 같이 대장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는 12위 소속이 아니면서 감찰 업무를 맡았던 인물이 임명되었다는 점, 대장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대장과 더불어 권한이 막강하였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수항사자는 고구려군의 항복을 받고 황제의 조서를 받드는 공식적인 역할 이외에 대장을 감찰·통제하는 역할 또한 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고구려의 무리는 우리 한 군도 감당하지 못할 텐데, 백만여 명의 군을 이끌고 가면 당연히 승리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며 전쟁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자치통감』 수기 양제 대업 8년 정월). 이렇듯 전쟁 승리에 대한 확신 속에서 군 지휘관들에게 전투에 대한 모든 상황을 자신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따르도록 하였는데, 이는 황제의 일원적 명령체계하에 명문 출신의 장수부터 사병에 이르기까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게 함으로써 황제의 권위를 확인시키고 위엄을 과시하는 한편(김선민, 2003), 누구와도 전쟁 승리의 영광을 나누지 않고 공을 오로지 자신에게 돌려 승리를 거둘 줄 아는 군주임을 표출함으로써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로 볼 수 있다.
양제의 수항사자 파견 또한 같은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군의 항복을 군의 최고 지휘관인 대장이 아니라 자신을 대변하는 수항사자를 통해 받도록 함으로써 대장의 전공이 부각되는 것을 막는 한편, 자신의 지휘와 의도를 따르지 않으려는 대장을 견제·통제하여 군 내에 자신의 영향력을 강하게 행사함으로써 황제권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으로 일원화한 지휘체계를 갖춘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양제는 612년 1월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 각주 001)
    『수서』 제기 양제 대업 8년 춘정월조에는 육군과 수군(水軍)이 모두 언급된 다음에 113만 3,800명이라는 병력 수가 나오는 반면, 『자치통감』 수기 양제 대업 8년 춘정월조에는 육군만 언급된 후 113만 3,800명이라는 병력 수가 나온다. 『수서』에는 육군과 수군(水軍)을 합해서 113만 3,800명, 『자치통감』에는 육군만 113만 3,800명이었다고 나오는 것이다. 『자치통감』은 『수서』를 인용·참고한 2차 사료이다. 그리고 『자치통감』에서 113만 3,800명을 육군의 병력 수로 기록한 것이라면 수군(水軍)의 병력 수도 따로 언급 해야할 텐데, 이와 관련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113만 3,800명은 육군과 수군(水軍)을 합한 병력 수로 추정된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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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12년 수의 고구려 원정 준비 자료번호 : gt.d_0006_001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