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612년 고구려-수 전쟁
2. 612년 고구려-수 전쟁
1) 성곽전의 전개와 수의 고전
양제는 612년 1월 신사일(1일)에 고구려 원정에 나서는 모든 군사를 탁군에 집결시켰다. 그런 다음 고구려를 토벌하라는 조서를 내리면서 전쟁은 시작되었다. 수군은 한꺼번이 아닌 하루에 한 군씩 출발하였다. 그리고 북과 호각 소리를 크게 내며 요란하게 진군하였다(『수서』 예의지 대업 7년). 대군의 위용을 드러냄으로써 고구려군의 항복을 이끌어 내거나 전쟁 수행 의지를 꺾고자 한 것이다(韓昇, 1996; 張豔, 2015).
수군은 1월에 탁군을 출발한 후 임유관[臨渝關: 하북성(河北省) 진황도(秦皇島) 산해관(山海關) 일대]과 유성[柳城: 요령성 조양(朝陽)]을 지나 노하진 혹은 회원진에서 군수물자를 보급받고 3월 갑오일(15일)에 요수[遼水: 요하(遼河)]에 이르렀는데, 도하가 녹록치 않았다. 고구려가 요수 동쪽에 군사를 배치하면서 적극적인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수 도하로 가운데 하나인 대안(臺安) 손성자(孫城子)-안산(鞍山)의 중로(中路)를 통해 요동성으로 진군하고자 했던 양제는 공부상서 우문개(宇文愷)에게 명하여 부교(浮橋) 3개를 제작토록 하였다. 그리고 부교의 한쪽 끝을 요수 동쪽에 대고자 하였으나, 부교의 길이가 짧아 댈 수 없었다. 이때 고구려군이 나타나자 수군은 강물로 뛰어들어 교전을 펼쳤는데, 고구려군이 높은 언덕에 올라 수군을 공격함으로써 도하를 저지하였다. 도하에 실패한 양제는 부교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소부감 하조(何稠)에게 이전보다 긴 부교를 제작토록 명하였다. 그리고 완성된 부교를 요수 동쪽 기슭에 대는 데 성공함으로써 비로소 도하할 수 있었고 요수 동쪽에서 고구려군 만여 명을 전사시켰다.
한편, 『수서』 제기를 보면 수군이 3월 갑자일에 요수를 건넜다고 나온다(『수서』 제기 양제 대업 8년 3월). 그런데 612년 3월에는 갑자일이 없다. 일간지의 오류가 보이는 것이다. 『자치통감』을 보면 양제의 요수 도착, 수군의 요수 도하, 그리고 요동성 포위 모두 612년 2월에 이루어진 것으로 나온다(『자치통감』수기 양제 대업 8년 2월). 기본적으로 『수서』를 인용하였지만 3월의 일간지가 역법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 일간지를 적지 않고 생략해버린 것이다.
갑자일은 612년 3월에는 없지만 4월에는 있다. 그리고 『수서』 제기의 기사를 보면 3월 다음에 4월 없이 5월로 넘어간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수서』제기에 보이는 양제와 수군이 요수를 건넜다는 갑자일은 3월이 아닌 4월에 있는 일간지로 여겨진다. 『책부원구』를 보면 양제가 요수 도하 후에 행한 조서 반포가 4월에 있었다고 나오는데(『책부원구』 제왕부 사유 대업 8년 4월), 이 또한 수군의 요수 도하가 4월에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만약 수군의 요수 도하가 4월 갑자일(15일)에 이루어졌다면 수군은 요수를 건너는 데 한 달여가 걸린 셈이다. 요수를 지키던 고구려군은 비록 수군의 도하를 저지하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도하를 한 달 가까이 지연시킴으로써 후방에 있는 아군에게 전투에 대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벌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4월 중순에 수군이 요수를 건넌 이후에는 양국 간 성곽전이 전개되었다. 고구려군은 요수를 사이에 두고 수군과 전투를 벌이기는 하였지만, 성곽을 중심으로 한 방어에 중점을 두었다. 수군과 비교했을 때 병력 수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만큼 최대한 군사들을 노출시키지 않은 채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방어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료상으로는 양국의 성곽전이 요동성에서만 이루어진 것으로 나온다. 이 때문에 성곽전이 요동성에서만 이루어졌다고 보면서 수군이 단일 경로를 이용하여 고구려로 진군하였다고 파악하기도 한다(이동준, 2009). 하지만 고구려가 “각 성(城)을 잘 지키고 있어 수가 공격해도 함락되지 않았다”는 기록(『수서』 제기4 양제 대업 8년 5월), 양제가 장수들에게 “세 길로 나누어 공격한다면 반드시 서로 알리고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말며, 군대가 움직인다면 반드시 상주문을 올리고 회보를 기다리라”고 명했다는 기록(『자치통감』 수기 양제 대업 8년 5월), 수의 장수 왕인공(王仁恭)이 한 군을 이끌고 가서 고구려군을 격파하였다는 기록(『수서』 왕인공전), 수가 고구려의 성곽인 무려라(武厲邏)를 차지하였다는 기록(『수서』 고려전) 등은 수군이 여러 경로를 통해 진군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다수의 고구려 성곽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볼 수 있겠다.
고구려가 성곽전 위주의 전략·전술을 펼 수 있었던 것은 성곽 중심의 방어체계가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도성에 평지성과 산성을 동시에 두는 이원적 도성체계, 국경지대에서 도성에 이르는 교통로에 성을 촘촘히 배치하는 축선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다. 또한 도성으로 들어오는 길목마다 성곽을 축조하면서 호형 방어선을 구축하였는데, 이와 같은 여러 계통의 성곽 방어체계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고구려 영역 전체에 걸친 입체적 군사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다(여호규, 1999). 고구려는 바로 이러한 성곽 방어체계를 바탕으로 성곽전 수행은 물론, 청야전이나 유인전 등과 같은 다양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
양국의 대표적인 성곽전은 4월부터 벌어진 요동성전투이다. 요동성이 위치한 요령성 요양(遼陽)은 고대부터 동북 지방의 중심지로 요동평원과 천산산맥(千山山脈)의 점이지대에 자리잡고 있는데, 예로부터 요동평원을 따라 요동반도와 혼하(渾河) 방면뿐만 아니라 천산산맥을 넘어 압록강 일대로 나아가는 육상로가 발달한 교통의 요충지였다(여호규, 1999). 이와 같이 요양이 교통의 요충지로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였기 때문에 수군은 요동성을 함락하고자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지만 결국 함락하지 못하였다.
수군이 요동성을 함락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수서』에는 전투에 대한 모든 상황을 양제에게 보고하고 그 지시를 따라야만 했던 수군 지휘부가 양제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기다리는 사이에 고구려군이 전열을 재정비하였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수서』 고려전). 양제는 4월에 군사들과 함께 요수를 건너기는 하였지만 요동성까지 동행하지는 않았다. 임해돈(臨海頓)으로 이동해서 전장을 지휘하였던 것이다(『수서』 우작전·고려전).
양제가 머물렀던 임해돈은 망해돈(望海頓)이라고도 부르며(『자치통감』 수기 양제 대업 8년 7월 호삼성 주) 유성현(柳城縣)의 관할하에 있었는데, 대체로 대릉하 하류의 요령성 금주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譚其驤, 1982; 이정빈, 2011). 양제는 수군이 요수를 건너 요동성을 포위하였을 때 이미 승리를 확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요동성 주변이 아니라 후방인 임해돈에 머물면서 전쟁을 지휘하였다고 추정되는데, 이로 인해 양제와 전장에 있던 지휘관 사이에 공간적인 거리가 형성되어 지휘관과 양제 간 보고·지시의 신속성이 크게 떨어졌고, 전선에 있던 부대는 장기간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지휘관들이 양제에게 전투에 대한 상황을 보고하고 지시를 기다리는 사이에 전투 양상은 시시각각 변했지만, 수군은 그 변화에 바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결국 고구려군은 수군 지휘체계의 문제점으로 인해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었고 수군의 계속된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6월에 이르러서는 양제가 요동성에 직접 행차하여 전투를 지휘하였지만 수군은 끝내 요동성 함락에 실패하였다.
고구려의 뛰어난 방어술 또한 수군이 요동성을 함락하지 못한 이유로 빼놓을 수 없다. 590년 문제가 고구려에 보낸 새서(璽書)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6세기 후반 고구려는 수와의 외교적 마찰을 감수하면서까지 우수한 쇠뇌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결국 우수한 쇠뇌 제작에 성공하면서 수군과의 성곽전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고(『수서』 염비전), 관통 상처를 크게 낼 수 있는 넓고 두꺼운 촉두를 갖춘 화살촉을 대거 사용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수의 중장기병에도 대비할 수 있었다.
위와 같이 내부 지휘체계의 문제점, 그리고 쇠뇌로 대표되는 우수한 원사무기를 바탕으로 한 고구려의 성곽 방어전술이 맞물리면서 수군은 요동성 등 고구려 성들을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2) 수의 별동대 편성과 고구려의 대응전술
성곽전에서의 고전으로 인해 전체적인 원정 일정에 차질을 빚은 수군은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고 이에 새로운 계획을 마련하였다. 그 계획은 바로 함락하지 못한 고구려의 성들을 우회한 평양성 직공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실행할 별동대를 편성하였다.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별동대는 부여도군(扶餘道軍), 낙랑도군, 요동도군(遼東道軍), 옥저도군(沃沮道軍), 현도도군(玄菟道軍), 양평도군(襄平道軍), 갈석도군(碣石道軍), 수성도군, 증지도군 등 9개의 군으로 편성되었고 총 병력은 30만 5,000명이었다고 한다(『자치통감』 수기 양제 대업 8년 6월). 별동대로 편성된 군에 대해서는 요하나 대릉하 하류에 주둔하고 있었을 때 별동대 임무를 부여받았으며, 이후 노하진 혹은 회원진으로 이동하여 군수물자를 보급받고 다 함께 평양성으로 진군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김복순, 1986; 서인한, 1991; 이종학, 2010; 임용한, 2012).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 석연치 않은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 번째는 양제가 별동대 편성을 지시한 시기와 군량 부족에 직면한 시기의 문제이다. 양제가 별동대 편성을 지시한 시기는 성곽전에서 고전하고 있던 6월이었다. 그런데 후술하겠지만 별동대가 고구려로 진군하던 도중 군량 부족에 직면하였던 시기 또한 6월이었다. 『자치통감』의 기록처럼 군사 각 개인이 짊어져야 할 무게가 너무 무거워 군량을 몰래 버렸다 하더라도 별동대 임무를 부여받아 군량을 보급받은 6월에 군량 부족 문제에 직면했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두 번째는 별동대 임무를 부여받은 낙랑도군의 전투 대비에 대한 배치 문제이다. 낙랑도군은 압록강으로 진군하던 도중 오골성[烏骨城: 요령성 봉성(鳳城) 봉황산성]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때 군을 이끌었던 우중문은 고구려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약한 마려(馬驢) 수천 마리를 골라 군의 행렬 뒤쪽에 두고 이동했다고 한다(『수서』 우중문전). 만약 9개 군 30만 5,000명이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면, 병력이 우세한 상황에서 우중문이 굳이 이와 같은 변칙적인 전술을 구사할 필요가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세 번째는 별동대로 편성된 군의 구성과 관련한 문제이다. 낙랑도군은 결국 고구려군에게 습격을 받았는데, 마려 수천 마리가 끌고 있던 치중(輜重)이 공격대상이 되었다고 한다(『수서』 우중문전). 그리고 옥저도군은 살수(薩水: 청천강)전투 패배 후 백석산(白石山)에서 고구려군에게 포위를 당하였고 ‘파리한 군대(羸師)’로 방진(方陣)을 이루면서 기병 200기로 맞서 싸워 위기를 벗어났다고 하는데(『수서』 설세웅전), 파리한 군대는 치중융거산병 소속의 예비군으로 추정된다. 이로 볼 때 별동대로 편성된 낙랑도군과 옥저도군 모두 보병, 기병, 치중융거산병으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지는데, 만약에 별동대가 최전방 군수물자 보급기지인 노하진이나 회원진에서 편성되었다면 별동대의 편성 목적에 맞게 군 구성에 변화를 주지 않았을까? 예컨대 함락하지 못한 성을 우회해서 가는 만큼 기동 속도를 염두에 두면서 정예 군사로만 구성할 수 있는데,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를 고려해본다면 노하진이나 회원진을 떠나 각기 다른 경로를 통해 고구려로 진군하던 도중에 별동대 임무를 부여받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수 별동대의 병력과 관련하여 혼란스러운 점이 있다. 『자치통감』 기록에 따르면 수 별동대는 9개 군으로 구성되었고 병력은 30만 5,000명이었다고 하는데, 이 기록대로 계산하면 별동대 한 군은 약 3만 3,900명인 셈이다. 612년 1월에 양제가 반포한 조서와 『수서』 예의지 기록을 그대로 따른다면 수 육군은 24군과 천자 6군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총 병력은 113만 3,800명이었다고 하므로, 수 육군의 한 군은 약 3만 7,800명인 셈이다. 한편, 일부 연구자는 수의 장수 이민의 처인 우문씨(宇文氏)가 이민과 이혼(李渾)을 반역자로 무고하기 위해 거짓으로 지어낸 “이혼이 이민에게‘만약 다시 요(요수)를 건너면 너(이민)와 나(이혼)는 반드시 대장이 되는데, 각각 [거느린] 군은 2만여 병으로 5만 명이다’라는 말을 건넸다”(『수서』 이목자혼)는 증언을 토대로 한 군의 병력을 약 2만 5,000명이라고 보기도 한다(淺見直一郞, 1985; 정동민, 2016). 이와 같이 육군 한 군의 병력 수에 대해 사료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다.
별동대로 편성되었던 각 군의 병력 수가 늘어난 이유에 대해서는 기병 등 기동작전을 펼칠 수 있는 병력이 더해진 결과로 보기도 하나(熊義民, 2002),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수의 장수인 양의신(楊義臣)은 612년 고구려-수 전쟁 때 숙신도군(肅愼道軍)을 지휘하였는데, 압록수에 이르러 을지문덕과 싸웠고 다른 장수들과 함께 패배하면서 면직되었다고 한다(『수서』 양의신전). 그의 행보는 별동대의 행보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에서 별동대로 참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소속되어 있던 숙신도군은 별동대로 편성되었다는 9개 군명에서 볼 수 없다. 즉, 9개 군 이외에 다른 군이 별동대로 추가 편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만약 한 군이 약 2만 5,00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별동대는 9개가 아닌 12개 군으로 편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겠다.
점령하지 못한 성들을 우회하면서 평양성을 직공하는 별동대 파견 계획은 전방뿐만 아니라 후방에서도 고구려군을 맞이하여 협공받을 수 있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리수를 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양제는 전쟁이 장기간 이어지면서 발생한 군수물자 부족, 군사들의 사기 저하 등을 고려해야만 했다. 그리고 곧 다가올 장마와 말갈의 고구려 원병 또한 경계해야만 했다(『수서』 단문진전). 아마도 이러한 요인 때문에 별동대 편성을 계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별동대로 편성된 군은 압록강 서쪽에서 만나 평양성으로 함께 진군하고자 했다. 그런데 압록강 서쪽에 주둔하고 있을 때 커다란 문제점에 봉착했다. 노하진이나 회원진에서 군수물자를 보급받은 군사들이 압록강으로 진군하던 중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땅에 묻거나 버려 군량이 거의 다 떨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문술(宇文述)은 철군을 주장하였지만, 양제로부터 별동대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은 우중문은 그의 의견을 무시하고 계획대로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으로 진군하였다.
을지문덕은 직접 수 별동대의 군영으로 가서 동정을 살폈다. 이를 통해 수군 병사들이 식량 부족으로 인한 굶주림과 장거리 진군에 따른 피곤함에 시달리고 있음을 확인한 을지문덕은 청야전술을 펼치는 한편, 싸울 때마다 거짓으로 패배하고 도망치는 유인작전을 구사하여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수군의 전력을 소모·약화시키고자 하였다.
고구려의 유인작전에 걸려든 수 별동대는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불과 30리 떨어진 곳에 진영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을지문덕이 항복 요청을 하자 우문술은 군사들이 피곤함에 지쳐 있어 더 이상 싸울 수 없고 평양성이 험준하고 견고하여 함락시키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퇴각을 결정하였다. 이때 고구려군이 수 별동대에게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였고, 결국 살수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살수전투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구려군이 살수 상류에 임시 제방을 축조하여 강물을 저수한 후 수군이 강을 통과할 때 그 제방을 무너뜨려 강물에 휩쓸리게 함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신증동국여지승람』 안주목 칠불사), 일부 연구자는 이 기록을 신빙하기도 한다(서인한, 1991). 하지만 이 기록은 후대 전승이라는 점, 그리고 당시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고구려가 대규모 제방 축조 공사를 진행하기 어려웠다고 여겨진다는 점에서(임용한, 2001; 김성남, 2005)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보다는 당시 압록강-평양 사이에 성곽 방어체계가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살수 북쪽에 있는 성들이 연계하여 군사를 파견함으로써 살수를 건너고 있던 수군에 대한 전·후방 공격이 이루어져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살수전투에서 승리한 고구려군은 백석산에 주둔하고 있던 옥저도군을 공격하다가 패하기도 했지만, 수 별동대의 잔여 군사에 대한 추격을 계속하였다. 이에 수 별동대는 또 다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지만 양둔(楊屯)과 왕인공 등이 후군을 맡아 고구려군을 막아내면서 가까스로 요동성에 이를 수 있었는데(『책부원구』 장수부 용감 양둔; 『수서』 왕인공전), 요동성에 이른 군사는 단지 2,700명뿐이었다고 한다.주 002
한편, 평양성 인근에서는 고구려군과 수의 수군(水軍)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수의 수군(水軍)은 동래에서 출발해 발해만(渤海灣)의 묘도열도(廟島列島), 요동반도 남단,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대동강 하구에 이른 후 강을 거슬러 평양성에서 60리 떨어진 지점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때 평양성에서 나온 고구려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고구려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자 고무된 수군(水軍) 최고 지휘관 내호아(來護兒)는 정예군사 4만 명을 이끌고 평양성 공략에 나섰는데, 평양성 나곽(羅郭) 안으로 진입한 후 약탈을 감행하면서 대오가 흐트러졌을 때 고건무(高建武)가 이끄는 고구려 결사대가 급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결사대와 합세한 고구려군이 퇴각하는 내호아의 군대를 쫓아 그들의 본진까지 이르렀으나, 주법상(周法尙)이 진영을 정돈하고 고구려군을 맞이하면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군에게 패배하면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던 수의 수군(水軍)은 7월에 별동대가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결국 퇴각하였다.
성곽전에서의 고전, 그리고 평양성을 직공하고자 했던 별동대 및 수군(水軍)의 대패라는 결과를 맞이한 수군은 결국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에 분노한 양제는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을 장수들에게 돌리면서 면직 혹은 서민 강등 등의 처벌을 내렸다. 612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수는 막대한 손실을 입은 채 요수 서쪽에서 요수를 건너는 자들을 감시하고 요서 일부 및 제종족을 관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노태돈, 1999; 이성제, 2005; 이정빈, 2018) 무려라[요령성 신민(新民) 일대]를 차지하고 요동군(遼東郡)과 통정진(通定鎭)을 설치했을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