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613~614년 고구려-수 전쟁
3. 613~614년 고구려-수 전쟁
1) 수의 군단 편성과 전략 수정
612년 고구려-수 전쟁에서 참패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정벌의 꿈을 버리지 못한 양제는 613년과 614년에 계속해서 고구려 원정을 나섰다. 613년 수군의 군단 편성 양상을 보면, 왕인공과 방언겸(房彦謙)이 이끄는 부여도군(『수서』 왕인공전·방언겸전), 어구라(魚俱羅)와 조재(趙才)주 003가 이끄는 갈석도군(『수서』 어구라전·조재전), 양언광(梁彥光)이 이끄는 노룡도군(『수서』 양언광전), 설세웅(薛世雄)이 이끄는 답돈도군(蹋頓道軍)(『수서』 설세웅전), 내호아와 이자웅(李子雄)이 이끄는 창해도군(『수서』 내호아전·이자웅전), 주법상이 이끄는 조선도군(朝鮮道軍)(『수서』 주법상전) 등 6개 군이 확인된다. 이 가운데 창해도군과 조선도군은 지휘관인 내호아와 주법상이 ‘주사(舟師)’로서 참전했다는 기록을 감안하면 수군(水軍)이었다고 볼 수 있다. 노룡도군을 제외한 나머지 군명은 612년 전쟁 당시 군명에서도 확인된다. 이로 볼 때 612년 전쟁 때의 군명을 그대로 연용하였다고 여겨진다.
한편, 『수서』 기록을 보면 심광(沈光)이라는 인물이 양제를 따라 요동성 공격에 참여했다고 하는데, 그의 소속 군명은 나오지 않는다(『수서』 심광전). 또한 요동성전투 관련 기사를 살펴보면 위의 6개 군명이나 지휘관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이를 감안하면 6개 군 외에 요동성을 공격한 군대가 따로 편성되어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양의신과 우문술이 군대를 이끌고 압록수를 거쳐 평양으로 향했다고 하는데, 이들 또한 소속 군명이 나오지 않는다(『수서』 양의신전·우문술전). 우문술의 경우 612년 전쟁 때 별동대의 지휘관이었다. 이들이 이끌었던 군의 진군로(압록수-평양성)는 별동대의 진군로와 일치한다. 이로 볼 때 이들이 이끌었던 군대 또한 평양성으로 곧바로 진군하고자 했던 별동대로 추정된다. 이상을 종합해본다면 613년 고구려-수 전쟁 당시 수군은 육군으로 부여도군, 갈석도군, 노룡도군, 답돈도군, 요동성을 공략한 군대, 별동대 그리고 수군(水軍)으로 창해도군과 조선도군이 편성되어 있었다고 여겨진다.
반면 614년 고구려-수 전쟁 당시 수군의 군단 편성에 대해서는 사료가 소략하여 자세한 면모를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육군으로 양제, 곽영(郭榮)(『수서』 곽영전), 설세웅(『수서』 설세웅전) 등이 참전하였고 내호아가 수군(水軍)을 지휘하였는데(『수서』 내호아전), 이를 통해 당시 수군이 육군과 수군(水軍)으로 편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613·614년 고구려-수 전쟁 당시 수군의 병력 규모와 관련해서 우선 수군(水軍)은 관련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아 파악하기 어렵다. 육군은 앞에서 언급한 우문씨의 증언을 토대로 한 군 병력의 규모를 추정할 수 있다. 전술하였듯이 우문씨는 이민과 이혼을 반역자로 몰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한 바 있다. 증언 중에‘다시 요를 건넌다’는 것은 614년 고구려-수 전쟁 종결 이후 재개될 수 있는 ‘수의 고구려 원정(양제의 4차 고구려 원정)’을 의미한다. 만약 고구려 원정이 재개되어 이혼과 이민이 참전한다면 각각 2만 5,000명의 병력을 이끌 수 있다는 예상하에 이와 같은 증언을 꾸며낸 것이다.
2만 5,000명이라는 병력 수는 분명 614년 고구려-수 전쟁의 상황을 토대로 예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614년 전쟁 당시 육군 한 군의 병력 수는 2만 5,000명 정도였다고 볼 수 있다. 612년 전쟁 때에도 2만 5,000명 정도였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613년 고구려-수 전쟁 또한 2만 5,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613·614년 고구려-수 전쟁 당시 수 육군의 한 군 병력 수는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지만, 수군이 동원한 전체 병력 수는 관련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612년 고구려-수 전쟁 때 많은 인적 피해를 입었다는 점, 612년 전쟁 때보다 군명이 적게 확인된다는 점, 그리고 농민 봉기의 확산으로 병력 동원이 어려웠다는 점을 감안하면 612년 전쟁보다 훨씬 적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양제는 612년 전쟁의 패배를 거울삼아 몇 가지 전략을 수정하였다. 첫 번째로 효과(驍果)를 선발하여 전쟁에 투입시켰다(『수서』 제기 양제 대업 9년 춘정월). 효과는 모병을 통해 선발한 군인이다. 즉, 의무적으로 참전한 부병과 달리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군인이었는데, 나이 제한 없이 무예가 뛰어나고 출세를 꿈꾼 사람들이 지원하였다.
효과의 선발은 양제가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선발 배경은 612년 요동성전투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양제는 요동성 함락이 지지부진하자 직접 행차하여 장수들에게 분발을 요구하였는데, 특히 요동성 공략에 힘을 다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였다(『자치통감』 수기 양제 대업 8년 6월). 요동성을 함락하지 못하는 이유를 장수들의 소극적인 전투 수행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양제의 책언은 비단 장수들에게만 해당함은 아니었을 것이다. 동시에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군사에게 전하는 책언인 것이다. 요동성에서의 책언을 감안한다면 양제는 612년 고구려-수 전쟁의 패배 요인 가운데 하나로 ‘적극적인 전투 수행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군사’를 인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양제는 전쟁 수행에 대한 의욕이 앞서는 사람을 효과로 선발하여 전쟁에 투입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수군(水軍)을 2개 군으로 편성하고 전투보다는 육군에게 군량을 수송·보급하는 역할에 비중을 두었다. 612년 전쟁과 비교하여 613년 전쟁에 동원된 병력 수가 적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수군(水軍) 병력 수 또한 612년보다 적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수군(水軍)의 병력 수는 줄어든 채 군의 수만 늘어났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배경은 612년 전쟁 당시 수군(水軍)이 수행한 평양성전투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당시 수군(水軍)의 대장이었던 내호아는 육군 각 군의 대장이 거느린 병력 수보다 훨씬 많은 7만 명을 거느렸다. 내호아는 육군 대장에 비해 보다 막강한 군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호아는 당시 부총관이었던 주법상의 의견을 무시한 채 군대를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였다가 대패를 당하였다. 자신의 막강한 군권을 바탕으로 독단적으로 행동하였다가 수군(水軍)에 커다란 피해를 입힌 것이다.
양제 입장에서는 독단적인 행동으로 패배를 자초한 내호아에게 책임을 물어야 함이 당연하다. 하지만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을 별동대 작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장수들에게 돌리려 했고, 또한 내호아를 유독 아꼈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처벌하지 못하면서 613년 전쟁에서도 군장(軍將)주 004으로 임명하여 수군(水軍)을 이끌도록 하였다(『수서』내호아전). 하지만 그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인하여 평양성전투에서 패배하였음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수군(水軍)에 대한 전권을 맡기는 대신 수군(水軍)을 두 군으로 나누어 한 군의 지휘를 주법상에게 맡겼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전술하였듯이 수군(水軍)은 육군에게 군량을 수송·보급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데 비중을 두었다. 수군(水軍)은 612년 전쟁에서도 육군에게 군량을 수송·보급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평양성전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해전 및 육상 전투 수행도 주요 역할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당시 고구려군은 해전에 임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수군(水軍)은 육군의 지원 없이 자체 병력으로만 평양성으로 진입하여 전투를 수행하다가 대패한 바 있다. 아마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서 수군(水軍)의 역할을 축소시키지 않았나 싶다.
한편, 육군이 2월에 탁군을 출발하여 4월 말부터 고구려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던 데 반해, 수군(水軍)은 6월까지도 고구려로 출발하지 않고 수군(水軍) 기지인 동래에 머물고 있었다.주 005 이는 612년 고구려-수 전쟁 당시 수 육군이 고구려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을 때 수군(水軍)은 이미 평양성 인근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있는데, 군량을 수송·보급하는 역할에 비중을 둠에 따라 육군의 진군 상황에 맞추어 일정을 계획해야 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늦은 행보를 보였다고 여겨진다.
세 번째로 각 군을 통솔하는 지휘관에게 전투 상황에 따라 편의대로 처리할 수 있는 권리, 즉 편의종사권(便宜從事權)을 부여하였다. 612년 전쟁 당시 양제는 임해돈에 머물면서 전장의 지휘관에게 전투에 대한 모든 상황을 자신에게 보고하게 한 후 지시를 따르도록 하였는데, 양제와 지휘관 사이의 공간적 거리로 인하여 원활한 연락이 이루어지지 않음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전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한편으로는 각 군 지휘관들이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문제도 있어서 양제가 각 군 지휘관에게 편의종사권을 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네 번째로 고구려 강역에 근접해 있던 ‘요동의 옛 성(遼東古城)’을 최전방 군수물자 보급기지로 삼았다(『자치통감』 수기 양제 대업 9년 정월). 612년 전쟁 때 양제는 회원진과 노하진에 최전방 군수물자 보급기지를 두고 군사들에게 고구려 강역으로 진입하기 전 최종적으로 군수물자를 보급하였다. 하지만 두 진은 고구려의 서쪽 강역, 즉 요하를 기준으로 보면 그리 가깝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수군 병사들은 긴 진군로만큼 많은 군수물자를 짊어져야 했고, 그 무게를 버티지 못해 군량을 버림으로써 진군 도중에 군량이 떨어지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인지한 양제는 새로 수리한 ‘요동의 옛 성’을 최전방 군수물자 보급기지로 삼고 군사들에게 고구려 강역으로 진입하기 전 마지막으로 군수물자를 보급하였다.
613년 전쟁 당시 수군의 최전방 군수물자 보급기지였던 ‘요동의 옛 성’ 위치에 대해서 일찍이 호삼성(胡三省)은 고구려의 요동성으로 비정하였다(『자치통감』 수기 양제 대업 9년 정월). 하지만 당시 수는 요동성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다(이정빈, 2018). 북연·북위시기 요서에 설치되었던 ‘요동군’으로 보고 고동하(顧洞河)와 대릉하 합류지점인 조양 동북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는데(劉向東, 2015), 고구려 강역과의 거리를 볼 때 기존의 최전방 군수물자 보급기지인 노하진이나 회원진보다 더 멀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요동의 옛 성’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요동(遼東)’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당시 이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명으로 612년 수가 고구려의 무려라를 차지하고 설치하였다는 ‘요동군’을 들 수 있다. 만약에 요동이 요동군을 의미한다면 옛 성은 요동군 관할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요동군은 의무려산·대릉하 하류 이동부터 요하 이서까지 관할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일대는 예전부터 고구려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던 지역이었다. 그렇다면 요동군에 수가 축조한 성이 있었다고 보기 힘들고, ‘옛 성’은 고구려가 축조한 성이었다고 추정된다. 즉, 수가 요동군을 설치하면서 그 관할범위에 있었던 기존의 고구려 성을‘옛 성’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실제 요동군 관할범위에서 고구려의 성인 ‘라(邏)’가 확인되는데, 사료에는 요령성 신민 경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무려라만 전해지고 있다. 수는 무려라를 차지한 후 통정진을 설치하였다. 그렇다면 통정진은 고구려의 강역에서 가장 가까이 위치한 수의 군사기지로서 수군의 최전방 군수물자 보급기지로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양제는 612년 전쟁 때 차지한 무려라에 통정진을 설치하고 최전방 군수물자 보급기지로 삼으면서 군사들에게 고구려 강역으로 진입하기 전 최종적으로 군수물자를 보급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2) 전쟁의 전개와 종결 후 정세
양제는 612년 고구려-수 전쟁 수행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토대로 군단 편성, 수군(水軍)의 편제 및 역할, 지휘체계, 군수물자 보급 등에 변화를 주면서주 006
각주 006)

613년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613년 1월 정축일(2일)에 탁군에 집결한 수군은 2월에 임유관과 유성을 거쳐 고구려로 진군하였다. 양제는 이번에도 친정을 결정하였는데, 3월 무인일(4일)에 고구려로 출발하여 4월 경오일(27일)에 요수를 건넜다.전반적으로 양제는 613・614년 고구려 원정에 나서면서 612년 고구려-수 전쟁 당시 장수나 군사에게 패배 책임을 돌렸던 전략에 대해서는 수정하여 채택한 반면, 본인이 주도한 전략은 그대로 채택하였다. 612년 고구려-수 전쟁에서 자신이 세운 전략을 수정하여 원정에 나선다면 612년 전쟁에서의 전략적 착오를 인정하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에게 전가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즉, 613・614년 고구려-수 전쟁에서 수군이 구사한 전략의 이면에는 612년 고구려-수 전쟁 패배의 책임을 회피함으로써 황제권의 약화를 막으려고 했던 양제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군과 수군 간의 전투는 4월부터 시작되었다. 수군은 여러 경로를 통해 고구려로 진군하면서 동시다발적으로 고구려의 성들을 공격하였다. 먼저 양제가 이끄는 군대는 요동성을 공격하였는데, 공성도구를 총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함락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왕인공이 이끄는 부여도군은 신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신성은 고구려 군사 수만 명이 지키고 있었는데, 일부 고구려 군사는 밖으로 나와 성을 등지며 진을 치고 있었다. 이때 왕인공이 기병 1,000기로 성 밖에 진을 치고 있던 고구려군을 격파하였는데, 이에 고구려군이 성 안에서 웅거하고 왕인공의 군대가 신성을 포위하면서 양군이 팽팽하게 대치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수서』왕인공전).
이 외에도 병부시랑 곡사정(斛斯政)이 고구려로 망명하여 백암성[요령성 등탑(燈塔) 백암성]에 머무르자 염비(閻毗)가 기병 2,000기를 이끌고 백암성을 공격하였고(『수서』 염비전), 설세웅이 이끄는 답돈도군은 오골성에 이르렀다(『수서』 설세웅전). 한편, 양국이 성곽전을 벌이고 있는 사이 우문술과 양의신이 이끄는 별동대는 고구려의 성들을 우회하면서 평양성으로 진군하였다.
이와 같이 양국이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수 내부에서 커다란 사건이 발생하였다. 6월에 예부상서 양현감(楊玄感)이 10만 명의 백성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수도인 낙양(洛陽)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이에 양제는 경오일(28일) 밤 비밀리에 장수들을 소집하고 요동성에서 철군할 것을 명하였는데, 고구려군이 철군한 사실을 모르게 하기 위하여 군수물자, 기계, 공격용 도구 등을 그대로 남겨 두었다. 이와 같은 수군의 계략에 말려든 고구려군은 이틀이 지나서야 수천 명의 군사를 보내 수군을 추격하였는데, 이경(李景)이 이끄는 후군이 고구려군을 격퇴함으로써 안전하게 철군할 수 있었다(『수서』이경전).
오골성 근처까지 진군하였던 설세웅의 답돈도군, 압록수에 이르렀던 우문술·양의신의 별동대 또한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동래에서 대기하면서 고구려로의 진군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던 내호아의 창해도군과 주법상의 조선도군 등 수군(水軍)은 고구려 정벌이 아닌 양현감의 반란 진압을 위해 출병해야만 했다. 이렇게 613년 고구려-수 전쟁은 종결되었다.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한 양제는 614년 2월 신미일(3일)에 조서를 내려 다시 고구려 원정에 나설 것을 선언하였다. 이 원정 선언에 대해 조정 신료들은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조정 신료 대부분이 양제의 잦은 고구려 원정에 대해 불만을 품고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조정 신료 대부분의 암묵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정을 강행한 양제는 3월 임자일(14일)에 탁군으로 행차하였다. 하지만 7월 계축일(17일)에 이르러서야 회원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농민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양제가 국내 사정을 무시한 채 고구려 원정에만 집중할 수 없었고, 적지 않은 군사가 원정에 반발해 대열에서 이탈하여 정상적인 행군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양제가 회원진에 도착한 7월 이후 수군은 내호아가 이끄는 수군(水軍)이 비사성[요령성 대련(大連) 대흑산산성]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다(『수서』 내호아전). 하지만 전국적으로 발생한 농민 봉기가 전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고, 군량 운송 차질에 따른 군대 내 기아와 전염병 유행 등으로 인해 많은 군사들이 죽으면서(『수서』 고려전; 『태평환우기』 고구려국)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한편, 고구려 또한 장기간 수군과 전쟁을 수행하면서 많은 인적·물적 피해를 입었고, 피로도 극에 달하면서 상황이 좋지 않았다(『수서』 고려전). 이에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외교적 돌파구를 모색하였는데, 613년 양현감의 반란 때 고구려로 망명했던 곡사정을 수로 송환하기로 결정하였다. 고구려가 곡사정을 송환하면서 항복 요청을 해오자, 양제는 이를 받아들여 8월 기사일(4일)에 회원진에서 군사를 돌렸다. 고구려의 항복을 명분으로 철군하였지만, 농민 봉기로 인한 전쟁 수행의 어려움과 봉기 진압이라는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었다.
이후 양제는 농민 봉기를 진압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농민 봉기는 612년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부담을 지웠던 산동(山東)과 하남(河南) 지역에서 제일 먼저 일어났는데, 이때의 농민 봉기는 일부 지역에 국한되었다(苗威, 2000). 그러나 계속된 전쟁 준비 및 수행으로 인하여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많게는 십수 만의 백성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농민 봉기가 계속 확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제는 615년에 또 다시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중 같은 해 8월 양제는 북쪽 변방을 순시하였는데, 돌궐의 시필가한(始畢可汗)이 자신의 어가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안문(雁門)으로 피신하였다가 돌궐에게 포위를 당하였다. 이와 같은 위기상황에서 민부상서 번자개(樊子蓋)와 내사시랑 소우(蕭瑀)는 양제에게 “고구려 정벌 중단을 선포하면 군사들이 구원하러 올 것”이라고 주청하였다. 결국 양제는 이를 받아들여 고구려 원정 중단을 선언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군사들이 구원하러 오면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수서』제기 양제 대업 11년 8월; 『자치통감』수기 양제 대업 11년 8월).
양제는 안문에서 고구려 정벌 중단을 선언하였지만, 이를 깨고 다시 고구려 원정을 결심하면서 민심을 배반하였다. 결국 양제는 617년 11월에 외가의 일족이었던 이연(李淵)에 의해 폐위되어 태상황으로 옹립되었다가 618년 강도(江都) 순행 중에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시해되었다. 이후 이연이 공제(恭帝)로부터 양위 형식을 빌어 황제로 즉위하고 당을 세움으로써 수는 40년도 넘기지 못한 채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수 전쟁은 고구려와 중원 왕조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군사 충돌로 양국의 인력과 물자가 총동원된 사건이었다. 그런 만큼 양국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고구려는 수를 막아냄으로써 일원적인 천하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던 수로부터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는데 성공하였고, 6세기 중반부터 흔들렸던 국제적 위상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이은 전쟁 수행으로 많은 군사가 죽고 피로에 시달리면서 군사력에 타격을 받았다. 또한 고구려 강역의 상당 부분이 전쟁터가 되어 황무지로 변모하면서 재건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백성이 생산활동에 종사하지 못함에 따라 경제적으로도 타격을 받았다. 이와 같은 군사·경제적 쇠퇴는 이후 고구려가 당에 의해 멸망하는 데 한 요인이 되었다.
수 또한 연이은 전쟁 수행으로 많은 군사가 죽는 등 군사력에 타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전쟁 이전 수는 조세물자를 보관하는 창고가 가득 차서 한시적으로 조세 징수를 그만둘 만큼 경제력이 풍부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결정된 후 많은 백성과 가축이 전투 수행 혹은 병참 보급품 운송을 위해 징발됨으로써 안정적인 농경생활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백성은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백성과 가축을 징발하는 과정에서 이에 반발한 많은 백성이 봉기를 일으키고 참여함에 따라 국내적 혼란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이는 곧 수가 멸망하는 데 한 요인이 되었다.
수가 멸망한 후 동아시아의 정세는 급변하였다. 새로운 왕조로 당이 들어서고 돌궐이 흥기하면서 다원적인 국제질서가 형성된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고구려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가운데, 주도권을 둘러싼 삼국의 다툼이 보다 치열해졌다.
고구려-수 전쟁은 군사적으로 새로운 전술 변화를 야기하기도 하였다. 이 전쟁에서 수는 5호16국시기부터 유행하였던 중장기병 활용 전술을 구사하였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는데, 고구려가 쇠뇌를 이용한 전술로 적극 방어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고구려-수 전쟁에서 쇠뇌가 대거 활용되고 부각됨에 따라 7세기 이후 동아시아 국가들은 대체로 중장기병보다 쇠뇌를 활용하는 전술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기병 및 중장기병을 활용한 전술의 쇠퇴와 맞물려 보병을 활용하는 전술이 대거 구사되었다. 즉, 고구려-수 전쟁은 기병 및 중장기병 중심 전술에서 쇠뇌와 보병 중심 전술로의 변화를 추동하였던 것이다.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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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6)
전반적으로 양제는 613・614년 고구려 원정에 나서면서 612년 고구려-수 전쟁 당시 장수나 군사에게 패배 책임을 돌렸던 전략에 대해서는 수정하여 채택한 반면, 본인이 주도한 전략은 그대로 채택하였다. 612년 고구려-수 전쟁에서 자신이 세운 전략을 수정하여 원정에 나선다면 612년 전쟁에서의 전략적 착오를 인정하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에게 전가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즉, 613・614년 고구려-수 전쟁에서 수군이 구사한 전략의 이면에는 612년 고구려-수 전쟁 패배의 책임을 회피함으로써 황제권의 약화를 막으려고 했던 양제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