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 말의 혼란과 당의 재통일
1. 수 말의 혼란과 당의 재통일
1) 수 말의 여러 반란과 수의 멸망
수의 멸망에서 당이 중원을 재통일하기까지 10여 년간 중국 전역은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알려진 것만 헤아려도 200개가 넘는 반란 집단들이 봉기하였는데, 그 규모에 대해 『수서(隋書)』는 “천하의 인구 10분의 9가 군도(群盜)가 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이들 반란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은 수 양제의 폭정에 있었다.
주요 폭정으로는 동도(東都)인 낙양성(洛陽城)의 조영, 이궁(離宮) 현인궁(顯仁宮)의 조영, 대운하 통제거(通濟渠)·한구(邗溝)·영제거(永濟渠)의 공사, 장성(長城)의 축조 등 대규모 토목사업이 있었으며, 동돌궐·강도(江都: 현재의 揚州)·토욕혼(吐谷渾)·하서(河西) 방면으로 연이어 행차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양제는 수많은 백성을 동원하여 혹사시켰다. 여기에 더해 612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강행한 고구려 전쟁은 백성들이 군도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까지 몰아갔던 것이다(다니가와 미치오 등, 1996).
양제의 ‘양(煬)’이란 ‘예를 버리고 민심을 멀리한다’, ‘하늘에 거역하고 백성을 학대한다’라는 뜻의 시호로 악한 군주라는 의미다. 그는 수도였던 장안을 서경으로 삼고 낙양에 동도를 조영하였다. 이를 위해 동원된 인원은 매월 200만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아울러 부유한 상인 수만 가를 이곳으로 이주시켰으며, 도읍 조영을 위해 목재를 멀리 강남에서 운반하였는데, 동원된 인원의 반수가 죽어 나갔다고 한다. 또한 현인궁이라는 별궁을 짓고 각지의 진기한 동물과 나무를 모아 대규모 ‘동식물원’을 만들었는데, 그 둘레가 수백 리에 이르렀다. 이 밖에도 각지에 별궁을 세워두었다.
대운하는 중국 대륙을 남북으로 관통하며 오늘날의 북경(北京) 부근에서 남쪽으로 양자강(揚子江)을 지나 항주(杭州)에 이르는데 양제 때 완성되었다. 통제거는 회수(淮水)와 황하(黃河)를 연결하는 운하로, 문제 때 만든 산양독(山陽瀆: 회수~양자강)과 연결되어 양자강과 장안에 이르는 물길을 완성하였다(605년). 한구는 산양에서 양주까지의 운하였다. 또한 608년에는 황하와 탁군(涿郡)을 연결하는 영제거를 건설하였다. 특히 영제거는 곧 있을 고구려 전쟁을 위한 것으로 기존의 수로와 운하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 새로 만들어졌다. 이 대운하의 건설은 남북조의 분립을 끝낸 수 왕조가 남북을 연결하여 실질적인 통일을 이루고 강남의 물산을 중앙으로 모으기 위해 필요한 과제였다고 할 수 있지만, 이를 위해 부역의 대상자는 물론 면제 대상인 부녀자까지 강압적이고 과도한 부역에 동원되어야 했다.
이러한 폭정과 과도한 부역에 더하여 양제는 고구려 침공을 추진하였다. 611년 2월 양제는 대운하를 이용하여 탁군까지 와서 고구려 침공을 위한 준비에 나섰다. 고구려 토벌의 명령을 내리고 전국에서 병사와 식량, 무기를 징발하였는데, 이를 운반하는 배가 1천여 리를 메웠으며 도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십 만의 사람들로 가득 찼다. 게다가 이해에는 황하의 범람으로 산동과 하남에 홍수가 발생하여 30여 개 군이 수몰되기도 하였으나, 전쟁 준비는 계속되었다(『자치통감(資治通鑑)』 권181).
이에 폭정에 지친 백성들은 군역을 피해 무리를 지어 반란을 일으켰다. 산동의 농민 왕박(王薄)은 ‘요동에서 억울하게 죽지 말자’는 노래 〈무향요동랑사가(無向遼東浪死歌)〉를 지어 무리를 포섭하였고, 이 같은 농민반란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듬해 정월 양제는 113만의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이 대군의 보급을 위해 그 배의 인원이 동원되었다고 하니, 300만 이상의 인원이 직간접적으로 이 전쟁에 종군하였던 것이다. 대군을 동원했음에도 1차 침공은 대실패로 끝났다. 뒤이어 강행한 두 차례의 침공도 소득 없이 실패로 끝났다.
특히 두 번째 침공은 후방에서 일어난 양현감(楊玄感)의 난으로 철군했는데, 이때 양현감은 양제의 고구려 침공을 비난하고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그의 부친 양소(楊素)는 수의 창업 공신으로 양제가 즉위하는 데 공을 세운 이였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예부상서(禮部尙書)이면서 후방 수송기지의 하나인 여양(黎陽: 河南省 濬縣)에서 보급을 책임지고 있었다. 이런 이조차 반란을 꾀했다는 사실은 위기에 직면하여 지배체제가 무너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양제는 급히 침공군을 되돌려 양현감 토벌에 나서 2개월 만에 이들을 진압하였지만, 이 반란을 계기로 지방관들이 다투어 반란을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양제는 국내의 반란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한번 고구려 침공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철군하고 만다. 이로써 수는 완전히 피폐해졌고, 수습할 수 없는 동란 속에 빠지게 되었다.
한편, 615년 무렵까지의 반란은 가혹한 징발에 고통받고 있던 백성들이 어쩔 수 없이 일으킨 경향이 강하였다. 그러나 617년에 이르면 그때까지의 소규모 반란집단들이 점차 통합되어 10여 개의 세력이 군웅할거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다니가와 미치오 등, 1996; 누노메 조후 등, 2001). 중원에는 낙구(洛口: 河南省 鞏縣)를 중심으로 이밀(李密)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으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출동한 왕세충(王世充)은 오히려 낙양에서 반기를 들었다. 한편, 남방에서는 역양(歷陽: 安徽省)의 두복위(杜伏威), 예장(豫章: 江蘇省)의 임사홍(林士弘)이 각각 농민군을 이끌고 있었고, 동방에서는 임성(任城: 山東省)의 서원랑(徐圓朗), 낙주(樂州: 河北省)의 두건덕(竇建德)이 반란 농민을 이끌고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또한 북방에서는 마읍(馬邑: 山西省)의 유무주(劉武周), 삭방(朔方: 陝西省)의 양사도(梁師都)가, 서방에서는 무위(武威: 甘肅省)의 이궤(李軌), 금성(金城: 甘肅省)의 설거(薛擧)가 각각 반란군을 이끌고 있었다(丸山松幸, 2002).
수 말의 혼란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던 무렵, 훗날 당 고조가 되는 이연도 태원에서 난을 일으켰다. 태원은 북으로는 동돌궐에 인접하고 남쪽으로는 장안과 낙양에 연결되는 군사상의 요충지로, 이연은 태원유수(太原留守)의 지위를 이용하여 세력을 모으고 있었다. 은밀히 세력을 규합하던 이연은 617년 7월 행동에 나서, 장안을 향해 남하하였다. 양제가 즉위한 이래 낙양이 실질적 도읍이 되어 반란세력들의 각축도 이 일대에 집중되었고, 장안 부근은 상대적으로 큰 세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3만의 병력으로 태원을 출발한 이연은 가로막는 수군을 격파하고 황하를 건너 관중으로 들어가 10월에는 장안을 포위, 11월에 함락하였다. 이어 양제를 태상황으로 올리고, 장안에 있던 대왕 양유(楊侑)를 황제(恭帝)로 추대하고 스스로 대도독·상서령·대승상의 자리에 올라 군사, 행정의 전권을 장악하였다(丸山松幸, 2002; 氣賀澤保規, 2005).
한편, 군웅할거의 초기에 가장 세력이 컸던 것은 이밀의 집단으로, 이들은 수가 대운하 근처에 세운 대형 곡물창고의 하나인 낙구창(洛口倉)을 차지하여 수십만 군대를 이끌었다. 이들이 낙양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자, 617년 7월 난을 피해 강도(江都)에 머물고 있던 양제는 왕세충을 보내 대적하게 했고, 낙양을 둘러싸고 양군의 격전이 이어졌다.
이 무렵 양제는 사태를 외면한 채 강도에 머물며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이연이 장안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관중 출신자로 구성되어 있던 그의 친위군이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618년 3월 양제는 우문술(宇文述)의 아들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살해되었다. 양제의 살해 소식이 알려지자, 후량(後梁)의 후예인 소선(蕭銑)이 강릉에서 황제를 칭하였고, 낙양에서는 왕세충이 월왕(越王) 동(侗)을 황제로 추대하였다(누노메 조후 등, 2001; 辻正博, 2022).
2) 당의 건국과 국내 통일
양제의 시해 소식이 장안에 전해진 것은 4월이었고, 5월 20일 이연은 공제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아 제위에 올랐다. 연호는 무덕(武德)으로 정하였고, 이달 28일에는 율령의 편찬을 명하였다. 이로써 당 왕조가 창업되었으나 전체로 보아서는 여전히 군웅할거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건국 초기 이연의 당 정권은 근거지였던 태원을 유무주(劉武周)에게 빼앗긴 채 관중 지역만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남성 동부지역을 차지했던 이밀은 북상해온 우문화급에게 패하여 많은 병력을 잃었고, 618년에는 다시 왕세충에게 패하였다. 이연이 당을 건국하자, 투항했다가 얼마 뒤 배반하여 처형되었다. 한때 최대 세력이었던 이밀을 제거했지만, 당은 건국 직후부터 9년 동안 다른 군웅과 대결해야 하였다.
이연은 장안에 입성한 뒤, 우선 서북으로부터 압박해오는 설거와 그 아들 인고(仁杲)의 군대에 맞섰고, 이어서 태원을 빼앗고 남하해 오는 유무주 등의 군대에 반격, 산서(山西) 일대를 회복하였다. 620년에는 최대의 강적이었던 낙양의 왕세충을 공격하였으나, 왕세충이 하북 최대의 농민군을 이끌고 있던 두건덕에게 원조를 청하였고, 두건덕은 10만의 병력으로 구원에 나섰다. 당은 이세민의 활약에 힘입어 왕세충·두건덕의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두건덕은 황하를 건너는 호뢰관(虎牢關) 부근에서 당군을 막아섰으나 이 전투에서 패해 포로가 되었다. 불리해진 왕세충은 항복하였다(621년 5월). 이로써 당은 최대의 군사적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당의 패권이 대세가 되었다(최희준, 2021).
당에게 최대 적수였던 두 세력이 무너진 뒤에도 두건덕의 부하였던 유흑달(劉黑闥)이 하북에서 돌궐과 연결되어 한때 당을 위협하는 등의 위기가 이어지다가 624년에 이르러 수습되었다(624년 4월, 천하 평정 선포). 628년에는 최후까지 남았던 군웅 양사도를 멸함으로써 국내 통일이 일단락되었다. 이로부터 당은 내정의 정비에 착수할 수 있었는데, 현무문(玄武門)의 정변으로 이세민이 집권한 뒤였다(누노메 조후 등, 2001; 氣賀澤保規, 2005).
고조 이연은 장남 건성(建成)을 황태자로, 차남 세민(世民)을 진왕(秦王)으로, 4남 원길(元吉)을 제왕(齊王)으로 삼았다. 이세민은 당의 건국 과정에서 유능한 무장으로 활약하였다. 여기에 왕세충과 두건덕을 한번에 평정하자, 그 활약에 자극받은 황태자 건성이 자원하여 유흑달의 토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러한 자식들의 움직임에 대해 고조는 건성을 황태자로 삼은 뒤에도, 세민의 지위를 ‘천책상장(天策上將) 섬동도대행대상서령(陜東道大行臺尙書令)’으로 올려주었다. 섬동도대행대상서령이란 장안을 중심으로 한 관중에 대해 낙양 이동 동방지역의 민정·군사를 통할하는 전권을 부여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 황태자 측은 불안감을 품게 되었고, 양측의 긴장감이 고조되다가 정변이 일어났다(626년 6월 4일).
정변 전날, 이세민은 황태자와 원길이 후궁들과 음란한 일을 벌였다고 고조에게 고발하였고, 고조는 다음 날 이를 밝히기 위한 심문의 자리를 열도록 하였다. 이날 아침 이세민은 수하를 거느리고 현무문을 장악하였고, 이건성과 원길이 고조를 알현하러 궁성으로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가 이들을 주살하였다. 그 뒤 황태자·원길 측 잔존세력의 반격을 무력화시키는 한편, 심복 위지경덕(尉遲敬德)을 보내 무력으로 황제를 구속하였다. 이로써 이세민은 전권을 장악, 며칠 뒤 황태자에 오르고 2개월 뒤인 8월에 황제에 즉위하였다(氣賀澤保規, 2005).
한편, 태종 이세민이 즉위한 그달에 동돌궐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이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침공하여 장안 근처 70리까지 진격해왔다. 현무문의 변에 따른 당의 동요를 틈탄 행동이었다. 이때 당은 많은 재물을 돌궐에게 주고 화의를 요청하였고 결국 위수(渭水)에 걸린 편교(便橋) 부근에서 태종과 힐리가 맹약을 맺고 돌궐은 철군하였다. 위기를 모면한 태종은 국내 안정에 힘을 쏟는 한편, 돌궐에의 반격을 꾀하였다.
이후 태종은 전란과 가혹한 부역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안정시키고, 통치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이른바 정관(貞觀)의 치(治)였다. 태종은 행정기구를 간소화하고, 경제·재정제도를 확립하였으며, 인재 등용을 위한 과거제도의 정비에 힘썼다. 이들 정책은 ‘정관율령(貞觀律令)’으로 명문화되어 전국에 널리 시행되어 실질적인 통일을 가져왔다. 요역을 가볍게 하고 적은 세금을 거두는 정책을 계속하면서 국가 재정을 긴축한 결과 피폐했던 민생도 점차 회복되어 갔다. 그 결과 정관의 통치 기간 20여 년 동안에 “행상인들이 벌판에서 잠을 자더라도 도적질당할 염려가 없고 감옥은 늘 비어있으며 마소는 들에 놓아 기르고 대문은 잠그지 않고 지내기 일쑤이며 자주 풍년이 들어 쌀은 한 되에 3, 4전”이라는 시대가 도래하여 가구 수도 380만 호까지 증가하였다(丸山松幸, 2002). 다만 정관 연간이 태평스러운 시대였는가에 대해서는 상당한 윤색이 들어가 있다고 보인다. 632년 백관이 태종에게 봉선(封禪)을 청했을 때, 위징(魏徵)은 “수 말 대란의 뒤를 이어 호구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고, 곡물창고는 텅 비어 있습니다.… 지금 낙양에서부터 바다에 이르기까지 밥 짓는 연기는 드물고 잡초만 무성합니다”라고 반대하였다(누노메 조후 등, 2001).
이세민이 현무문의 변을 일으켰던 원인과 관련하여, 제위를 둘러싼 권력투쟁을 배경으로 하여 당시 심각해지고 있던 돌궐 문제가 정변을 촉발시켰다는 견해도 있다(石見淸裕, 1998). 이 점에서 수 말의 혼란 시기부터 당의 건국을 전후한 시기까지 중국의 정세 변화와 관련하여 돌궐의 동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