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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당의 재통일을 전후한 시기 동아시아 국제정세

2. 당의 재통일을 전후한 시기 동아시아 국제정세

1) 돌궐 제1제국과 대당 관계
동돌궐은 수 문제(文帝) 시기 후반 계민가한(啓民可汗) 때부터 수에 복속된 상태를 유지해왔으나, 그 아들 시필가한(始畢可汗) 대에 이르면 수 말의 동란을 틈타 관계가 역전된다. 615년 양제가 돌궐을 압박하려고 북방 순행에 나섰다가 도리어 돌궐의 공격을 받고 안문(雁門)에서 포위되었다가 겨우 위기에서 벗어났던 사건이 이를 보여준다. 이로써 동돌궐의 시필가한은 고구려 전쟁의 실패로 약화된 수에 치명타를 날렸다. 돌궐은 이를 계기로 수의 붕괴를 가져오게 했을 뿐 아니라 계민가한 이래 수에 종속되어 있던 관계를 반전시켜 오히려 중국을 압도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섰다(정재훈, 2016).
수 말에 난리가 일어나자 중국인으로 돌궐에 귀부한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드디어 돌궐이 크게 강성해져 그 위세가 중하(中夏)를 능가하였고, 소황후(蕭皇后: 양제의 비)를 맞이하여 정양(定襄)에 두었다. 설거·두건덕·왕세충·유무주·양사도·이궤·고개도(高開道)의 무리는 존호(尊號)를 참칭하면서도 모두 돌궐에 북면(北面)하여 칭신하였고 그 가한의 호령(號令)을 받았다. 사자의 왕래가 이어져 서로 길에서 만났다. _ 『수서』권84  
수 말 화북 각지에서 두각을 나타낸 군웅 대부분은 돌궐과 우호하거나 신속하는 형태로 돌궐에 연결되어 있었다. 두건덕과 그 수하였던 유흑달, 고개도와 유무주, 설거와 이궤 등이 다 그러하였다. 돌궐은 북쪽에서 이들을 원격 조종, 서로 다투게 하거나 견제하여 그 위에 군림하는 상황이었다.
각지의 군웅은 돌궐로부터 군마를 공급받고 때로는 병력도 지원받았다. 이에 돌궐의 위세는 더욱 강력하여 “그 족속이 힘 있게 성장함에 따라 동으로는 거란, 실위(室韋)로부터 서로는 토욕혼, 고창(高昌) 등 여러 나라가 모두 신하가 되었다, 기마궁사가 100여 만이라고 하니 북적(北狄)의 융성함이 이제까지 이런 적이 없었다”(『구당서』 권194)라고 평가될 정도였다.
태원에서 거병했을 때 이연은 돌궐에 칭신하고, 노획한 것을 모두 주겠다는 약속을 하며 돌궐의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 군마 1,000필을 지원받은 이연은 장안으로 남하하는 과정에서도 돌궐군의 지원을 얻어 수 방어군의 저항을 무너뜨렸다. 이연이 황제로 올라 자립했을 때, 마침 농우(隴右)의 설거도 대진(大秦) 황제를 칭하며 돌궐과 연계해 관중으로 진출하려 했기에 이연은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설거의 위협에 대해 이연은 이세민을 보내 방어케 하는 한편, 돌궐 시필가한에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 무렵 돌궐의 지원이 필요했던 당은 돌궐에 번례(藩禮)를 취하는 낮은 자세를 보였다.
그러던 당은 관동의 이밀이 618년에, 하서의 이궤가 619년에 투항해옴에 따라 관중 지역 대부분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당은 낙양의 왕세충과 하서의 두건덕 같은 강력한 세력들과 대항할 정도로 성장했던 것이다(정재훈, 2016). 이런 당의 성장에 대해 돌궐은 강하게 대응하였다. 고조가 즉위한 이듬해부터 626년까지 돌궐의 침입 빈도는 해가 갈수록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이 영토 깊숙한 곳까지 침입해 왔다는 점에서 당의 긴장도는 해마다 높아졌다(石見淸裕, 1998).
619년 6월 시필가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돌궐의 공세가 잠시 멈추자, 당 고조는 조문 사절을 보내면서 비단 3만 필을 주는 등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중국이 아직 통일되지 않은 상황에서 돌궐과 적대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당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았다. 또한 통일전쟁을 추진하기 위해 전력을 투입하려면 돌궐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시필가한의 죽음은 당이 세력을 강화할 수 있는 계기였다(정재훈, 2016).
시필가한이 사망하자, 계민가한의 둘째 아들 사리불설(俟利弗設)이 처라가한(處羅可汗)으로 계승하였다. 처라가한은 양제의 비였던 소황후와 손자 양정도(楊正道)를 맞아들여 그를 황제로 옹립하여 수의 망명 정권을 세워주었다. 이들을 이용하여 중국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던 것이다(石見淸裕, 1998; 정재훈, 2016). 또한 남은 군웅세력과 연계하여 성장하고 있던 당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620년 낙양의 왕세충에게 말을 보내주고 혼인관계를 맺으며 호시를 열었던 것이다. 또한 네 방면에서 장안을 공략하는 대규모 공격을 추진하였다. 자신은 태원에서, 아우 막하돌(莫賀咄: 나중의 힐리가한)은 원주(原州: 寧夏回族自治區 固原)에서, 양사도 등은 연주(延州: 山西省 延安)에서, 아들 돌리(突利)는 해(奚)와 거란·말갈 등을 이끌고 유주(幽州)에서 진격하여 두건덕군과 함께 장안을 포위하는 전략이었다(石見淸裕, 1998; 정재훈, 2016).
당에게 심각한 위협을 주었을 이 공세는 처라가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무산되었다. 처라가한의 동생이 새로운 가한에 올라, 힐리가한이라 하였다. 힐리가한은 당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본격화하였고, 당은 돌궐이 요구하는 물자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그 위협을 경감하려 하였다(『구당서』 권194상). 한편, 화북에 남은 군웅은 돌궐과 연합하여 당의 국내 통일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620년 서돌궐의 통엽호가한(統葉護可汗)이 당에 사신을 보내 우호하기를 바라자, 고조는 동돌궐을 견제하기 위해 이를 적극 받아들였다. 고조는 힐리가한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군사적 대응도 적극 추진하였다. 힐리가한은 당과 서돌궐이 교섭한 사실을 알고 협공을 우려, 당에 화의를 청하였다. 그 뒤 양국은 군사적 대치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화해하였는데, 당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621년 왕세충과 두건덕을 제압하였다. 622년 당은 유흑달 등 돌궐과 연계한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북벌에 나섰으나 실패하였고 돌궐의 공세가 이어졌다. 화북에서의 공방전 끝에 623년 당은 유흑달을 사로잡았고, 화북을 통일하였다. 이로써 당의 현안은 돌궐과 돌궐의 위세 속에서 생겨난 양사도 같은 세력을 상대하는 단계로 나아갔다(石見淸裕, 1998).
결국 군웅을 지원하여 당을 견제한다는 돌궐의 전략은 실패하였다. 이후 북변에서 당에 투항하는 세력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돌궐의 군사행동이 이어졌다. 624년 유주(幽州)에 있던 고개도의 부하가 그를 축출하고 당에 투항하자, 힐리가한은 군대를 보냈다. 5월에는 고개도의 잔여세력과 함께 삭주(朔州)를 공격하였고, 병주(幷州) 경내까지 침입하였다. 8월에는 돌리가한과 함께 남하하여 관중까지 압박하였다.
이 공세는 당에 위기감을 불러와 조정에서는 천도 논의가 벌어졌고, 이세민만이 반대하여 장안을 고수하자고 주장했다고 한다(『신당서』 권79). 이때 돌궐을 막기 위해 출전한 이세민은 돌리가한과 형제가 되기를 약속하여 힐리가한과의 사이를 이간하려 하였다. 돌궐 내부의 권력투쟁을 야기하려는 책략이었다(『구당서』 권194상). 돌리가한이 이를 받아들여 철군하자 힐리가한도 회군하였다. 힐리가한의 공세는 당의 이간책으로 내부의 갈등을 노출시키며 실패로 끝났다. 626년 현무문의 정변이 일어나자, 힐리가한은 또다시 당을 공격하였다. 직접 10여 만 기를 이끌고 장안 인근까지 위협했으나, 결국 화의를 맺고 철군하였다. 힐리가한은 당의 권력교체기를 틈타 공격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정재훈, 2016).
위세를 떨치던 돌궐은 이듬해부터 붕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철륵(鐵勒) 여러 부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를 진압하는 데 실패하였던 것이다. 당시 돌궐은 힐리가한과 돌리가한이라는 두 지도자 간의 미묘한 관계에 따라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힐리가한은 폭정으로 인심을 잃고 있었으며 시필가한의 아들인 돌리가한이 그 대항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당시 북방 초원지대는 “몇 해째 많은 눈이 와서 양과 말이 모두 죽고 사람들은 크게 굶주린”(『구당서』 권194상) 상황에 몰려 있었으나, 힐리는 가혹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이에 반발한 많은 부족들이 이반을 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金浩東, 1993).
이 틈을 노려 태종은 629년 이정(李靖)과 이세적(李世勣)을 장수로 한 10만 군대를 보내 돌리가한을 항복시켰고, 이듬해 힐리가한을 격파하여 사로잡고 돌궐인 10만여 명과 가축 수십만 마리를 노획하였다.주 001
각주 001)
나라를 잃은 돌궐인 일부는 북방의 설연타나 서쪽의 서돌궐로 도주하였지만, 다수는 당에 항복하여 그 수가 돌궐 이외의 족속과 망명 한인을 합해 120만 명이었다고 전한다(『구당서』 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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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북방세계에서 군림했던 돌궐제국은 멸망하였다. 돌궐제국의 멸망은 그 지배 아래 있던 여러 세력에게 충격을 주었다. 당의 위세에 놀란 여러 세력은 천가한(天可汗)의 칭호를 바치며 복종을 서약했다(丸山松幸, 2002; 氣賀澤保規, 2005).
돌궐 항호(降戶)를 지배 아래 두게 된 당은 수령층에게 당의 무관직을 주어 번장(蕃將)으로 삼고, 그 부락민을 번병(蕃兵)으로 조직하여 당의 주요 군사력으로 활용하였다. 이들 번장과 번병은 이후 당이 전개했던 각종 대외전쟁에서 활약하였는데, 고구려와의 전쟁도 예외는 아니었다(山下將司, 2011; 李孝宰, 2013).
돌궐이 무너지자 그 예하에 있던 철륵의 설연타(薛延陀)가 북방 유목세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였다. 이러한 설연타의 대두에 대해 당은 639년 돌궐 항호를 막남에 두는 조치로써 대비하였다. 나아가 태종은 645년 고구려 침공을 앞두고 번장이자 측근인 집실사력(執失思力)을 오르도스 남부의 하주(夏州)에 두어 고구려와의 전쟁을 틈타 설연타가 침입해 올 것을 대비하였다(李孝宰, 2013; 李成制, 2015).
돌궐을 무너뜨린 당은 서쪽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635년 청해(靑海) 일대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던 토욕혼을 격파하고, 638년에는 토번을 복속시켰다. 그리고 640년에는 실크로드의 요충인 투루판 지역의 고창국을 굴복시키고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설치, 이 지역을 당의 지배 아래 두었다.
 
2) 백제와 신라 그리고 왜의 대당정책
그러면 당의 건국과 돌궐 제1제국의 붕괴, 당 제국의 본격적인 세력 확장이라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해 인접 국가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을까. 특히 백제·신라 그리고 왜가 보인 반응은 이 시기 고구려와 당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들 국가들은 고구려와 함께 당이 전개했던 동방정책의 상대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백제가 당에 처음으로 사절을 보낸 것은 621년으로 당이 건국한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무왕 22년 10월의 일로(『삼국사기』 권27), 이후 백제는 645년까지 23회에 걸쳐 당에 사절을 보냈다. 이러한 사행의 횟수는 630년대 대당외교를 중단했던 고구려나 19회에 머물렀던 신라에 비해 백제가 더 자주 당에 사절을 보냈음을 알려준다.
626년 무왕이 당에 명광개(明光鎧)를 바치면서 고구려가 길을 막고 당에 조공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호소하자, 태종은 주자사(朱子奢)를 사자로 보내 두 나라가 원한을 풀라고 하였다. 또한 이듬해 8월에도 복신(福信)을 당에 보냈는데, 이때 태종은 백제의 신라 공격을 문제로 삼고 함께 우호하라고 하였다. 한편, 637·638·639년에는 금갑(金甲)과 조부(彫斧)를 바치기도 하였다. 의자왕 대에 들어서도 백제의 대당외교는 계속되었다. 의자왕은 태자 신분이었을 때 사절로 파견되기도 하였는데, 641년에는 당의 책봉(冊封)을 받고 감사의 뜻을 전하는 사절을 보냈으며, 644년에는 태종이 상리현장(相里玄奬)을 보내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하니 따르겠다고 하였다(『신당서』 권222; 『삼국사기』 권27·28).
백제는 정례적이었다고 할 만큼 빈번히 사절을 보냈으며 왕족은 물론이고 심지어 태자까지도 대당외교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 시기 백제가 대당외교를 매우 중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백제의 대당외교와 관련하여, 621년 백제가 당에 사절을 보낸 것은 고구려를 견제할 목적(盧重國, 1981; 金壽泰, 1991), 당이 고구려를 견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건국을 축하하는 사행(정동준, 2002)으로 보기도 한다. 이 무렵이면 당은 왕세충·두건덕의 연합군을 격파함으로써 군사적 위기에서 이제 막 벗어난 참이었다. 하북에서는 유흑달이 돌궐과 연결되어 당에 맞서고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 당이 고구려에 압력을 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왕조 창건 축하는 사절 파견의 명목일 수는 있겠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이 무렵이 되면 당 왕조는 더 이상 여러 군웅의 하나가 아니었다. 아직 중원을 통일하지는 못하였지만, 조만간 수를 대신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전해에 벌어졌던 왕세충·두건덕 연합군과의 대결이 보여주었던 것이다. 백제가 이때 당에 사절을 보냈던 것은 군웅할거 속에서 당이 독주하고 있던 중원의 정세를 주시하고 있었고, 당이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음을 보여준다. 수 말의 동란과 당의 등장이라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해 백제는 기민하게 대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은 백제에게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요구하였고, 고구려에게도 이 같은 요구를 거듭하였다. 삼국 간의 관계에 대해 당이 개입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당이 묵인하거나 협조해주기를 바랐다거나(金壽泰, 1991), 이를 완화시키기 위해 백제가 대당외교를 계속 추진했다는 견해도 있다(정동준, 2002). 대당외교를 통해 당의 간섭을 줄여 신라 공략에 집중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원 왕조가 삼국 간의 분쟁에 간섭했던 것은 이때만의 일이 아니었다. 바로 얼마 전 수가 삼국에 대해 그러하였다. 또한 무구인 금갑(金甲)과 함께 헌상된 조부(凋斧)는 장수의 지휘권을 상징하는 부월이라 여겨지는데, 군사적 의미가 농후한 이러한 물품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 보냈다는 것은 과거 백제가 수의 고구려 침공에서 향도가 되겠다며 출정 일자를 알려달라고 했던 일을 연상시키는 행동이다.
한편, 수와 고구려의 대결에서 백제가 양면외교를 전개했던 것과 달리 적어도 의자왕 초기까지 백제는 고구려와 당 사이에서 양단책을 구사하지 않았다는 해석(金壽泰, 1991)에 대해서도 동의하기 어렵다. 645년 사절로 간 태자 부여의자(扶餘義慈)가 백제는 고구려와 아당(阿黨)을 맺지 않았다고 해명했고, 당군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기를 바란다고 했다는 것(〈貞觀年中撫慰百濟王詔〉)은 백제가 양국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624년 당은 삼국의 국왕을 함께 책봉함으로써 삼국 간의 관계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이 점에서 상황이 호전되면 당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점은 삼국 모두에게 초미의 관심사였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당의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에 대한 정책이 백제·신라의 대당·대고구려 정책을 좌우했다는 시각(丁善溶, 2008)이 유력해 보인다. 또한 당이 언젠가 대외정책을 수정하여 침공하리라는 예견은 수의 집요한 침략을 겪은 고구려만 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백제는 당과의 군사적 연결을 염두에 두면서 대당외교에 나서 양국 관계를 강화해나가는 한편, 대고구려 관계도 모색했던 것이다. 다만 주자사를 파견하여 삼국을 순회케 했던 당의 행동과 관련하여, 태종이 조공을 방해한 고구려에게 백제·신라와의 화친을 종용하는 데 그쳤다는 것은 삼국의 세력관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이라 볼 수 없다는 해석은 이해하기 어렵다. 책봉호 수여에서 드러난 입장대로 삼국의 세력관계에 대해 개입한 사실로 보인다(여호규, 2006). 삼국의 국왕 모두를 책봉했다는 것은 고구려 우위의 세력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고, 삼국 간의 화해를 종용했다는 것은 그 분쟁에 개입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수와 고구려의 전쟁에서 양단책을 구사했던 백제와 달리, 신라는 수의 고구려 침공에 호응하여 500리의 고구려 영토를 탈취했었다(『삼국사기』 권21). 이처럼 수에 협력했던 신라의 대외정책은 침공 실패와 수의 멸망으로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丁善溶, 2008).
신라가 당에 사절을 보낸 것은 621년으로 백제의 대당외교가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진평왕은 625년 고구려의 조공 방해와 침략을 호소하였고(『삼국사기』 권4), 이후 645년까지 모두 19차례에 걸쳐 사절을 당에 보내었다. 특히 훗날 태종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가 642년 고구려에 가서 청병하였다가 실패한 뒤, 신라 선덕여왕은 당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645년에는 당이 고구려 침공 계획을 신라에 알리고 적극적인 협력을 요구했으며(〈貞觀年中撫慰新羅王詔〉), 당 태종이 고구려 침공에 나서자, 신라는 3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당과 행동을 함께 하였다(『삼국사기』권5).
신라의 대당외교는 결국 나당동맹으로 이어졌다. 이 점에서 당을 둘러싼 삼국의 외교전에서 초기부터 신라가 우위에 서 있었고 이러한 양국의 관계가 나당동맹으로까지 이어졌다고 보거나(徐榮洙, 1987b), 고구려 청병외교가 실패한 뒤 신라는 당에 적극적으로 원병을 요청하는 외교를 전개하게 되었다고 이해(朱甫敦, 1993)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라는 634~637년까지 4년 동안 당에 사절을 보내지 않았으며, 대야성(大耶城) 등 40여 성이 백제에게 함락당한 위기 국면에서 당이 아닌 고구려에 청병하였다. 이로 보아 양국이 시종일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최현화, 2004).
또한 신라가 당에 처음 사절을 보낸 해가 621년이라는 것은 중원의 정세 변화에 촉각을 세우고 예의 주시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최희준, 2021). 백제처럼 신라 역시 수 말의 동란과 당의 등장이라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신라와 당의 관계가 처음부터 긴밀하였다고 보거나, 신라의 적극적인 외교가 나당동맹의 결성을 가능케 했다는 견해에는 수긍하기 어렵다. 삼국의 대당외교에 대해 당이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621년에 들어서면 당이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이해 5월 왕세충과 두건덕 세력을 격파함으로써 당의 대세를 내외에 알렸던 것이다. 이러한 정세 변화에 대응한 나라는 신라·백제만이 아니었다. 고구려를 비롯하여 모두 25개국이 당에 사절을 보냈던 것이다. 인접국들이 다투어 사절을 보내온 상황에서 당 고조는 유독 신라 사절에게 직접 대화를 주고받는 특례를 베풀었고, 답방사도 신라에만 보냈다(최희준, 2021). 당의 행동은 이제부터 신라에게 과거의 수를 대신해줄 존재가 되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이성제, 2023).
신라가 당에 고구려의 조공 방해와 침략을 호소했다는 것은, 과거 수가 그랬던 것처럼 신라가 삼국 간의 세력관계에 당이 개입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주자사를 보내 삼국 간의 화친을 종용했던 당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위기는 해결되지 않았다. 특히 642년에는 대야성 등 40여 성을 백제에게 잃어 위기 상황에 몰리기도 하였다. 이 점에서 대야성 상실 직후 신라가 당이 아닌 고구려에 청병했다는 사실은 백제와는 또 다른 배경에서 신라의 대당외교를 바라보아야 함을 알려준다. 당의 간섭이 유효한 결과를 얻지 못하자 신라는 고립무원의 상황에 빠지게 되었고 고구려와의 관계 개선까지 시도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당의 동방정책에서 백제와 신라는 어떤 위치에 놓여 있었는가 하는 문제도 좀더 구체적인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이제 시야를 바다 건너 일본 열도로 옮겨보자. 618년 당이 건국했지만 왜국이 보인 반응은 622년에 처음 나타난다. 신라 사절과 함께 귀국한 유학생 혜일(惠日) 등이 “대당국은 법령과 의례가 정비된 훌륭한 나라이니 늘 왕래해야 합니다”(『일본서기』 권22)라고 상주했다는 기사가 그것이다. 그럼에도 왜 조정이 당에 사절을 파견한 것은 630년으로, 동아시아 제국 중에서는 가장 늦은 대응이었다.
왜국이 사절을 보내 방물을 바치자, 태종은 왜국이 멀리 떨어져 있음을 고려, 조공을 해마다 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표인(高表仁)을 왜국에 보내 위무케 하였다(『구당서』 권199상). 이때 고표인은 “멀리 떨어진 오랑캐를 어루만질 재주가 없어, 왕과 예를 다투어 끝내 조정의 명을 선양하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후 양국의 교류는 이어지지 못하고 648년까지 단절되었다.
이러한 양국의 관계에 대해, 일본사 연구자는 정치적으로 불안했던 국내 사정 때문에 왜의 대당외교가 뒤늦게 추진되었다고 본다. 이에 따르면 618년에 선박을 건조하는 조치가 있었다는 점에서 견당사를 보낸다는 계획은 일찍부터 세워졌었다. 그러나 고표인을 보낸 당에 대해 왜국이 책봉을 거부함으로써 양국의 교류는 이어지지 못했다. 당이 아직 동방정책에 전념할 수 없었던 사정도 이러한 양국 관계에 영향을 주었다(森公章, 2010).
이러한 견해는 이 시기 왜국이 수·당에 대해 대등한 관계에서 외교를 전개했다는 일본사 특유의 시각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왜국의 외교에 대해 당이 보인 반응은 과거 608년 수 양제가 왜의 사절 파견에 대해 배세청(裴世淸)을 보냈던 일(『수서』 권81)을 연상시킨다. 양제가 왜에 배세청을 보낸 것은 국서에 “왜국을 일출처(日出處)로 일컫고, 수를 일몰처(日沒處)로 지칭”한 왜국의 자존망대(自存妄大)한 자세에서 배후에 고구려가 있음을 의식했던 조치였다.
630년은 당이 돌궐 공격에 나선 해였고, 이듬해 힐리가한을 사로잡음으로써 동북아의 세력관계는 급격히 당 중심으로 기울고 있었다. 왜의 대당외교는 아마도 이러한 정세 변화에 따른 것으로 봐야 맞을 듯하다. 고표인이 한껏 오르고 있던 당의 위세를 내세워 왜를 상대했기에 왜왕과 예를 다투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여겨진다. 631년 고구려에 파견된 당의 사절이 전승기념물인 경관(京觀)을 파괴했던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당의 동방정책은 이 무렵부터 본격화하였고 그 대상에는 왜국도 포함되었던 것이다.

  • 각주 001)
    나라를 잃은 돌궐인 일부는 북방의 설연타나 서쪽의 서돌궐로 도주하였지만, 다수는 당에 항복하여 그 수가 돌궐 이외의 족속과 망명 한인을 합해 120만 명이었다고 전한다(『구당서』 권2).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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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의 재통일을 전후한 시기 동아시아 국제정세 자료번호 : gt.d_0006_0020_001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