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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3. 고구려의 대당정책과 당의 대응

3. 고구려의 대당정책과 당의 대응

이연이 당을 건국했던 그해 9월, 고구려에서는 왕제 건무가 영류왕으로 즉위하였다(『삼국사기』 권20). 그가 즉위하기 직전 고구려는 수 양제가 이끈 세 차례의 침공을 상대한 바 있었다. 612년의 전쟁에서 수의 100만 대군에 맞서 고구려가 거둔 승리는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고구려가 입은 피해 역시 적지 않았다. 614년의 침공 경과를 설명하며 “고구려 역시 극도로 피폐해져 있었다”는 수 측의 기록(『수서』 권81)은 이러한 사정을 알려준다. 고구려도 전쟁을 지속할 힘이 남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李成制, 2021).
이러한 상황 속에서 즉위한 영류왕은 이듬해 사절을 보내기 시작하여 629년 9월까지 620·627년을 제외하고는 매해 당에 사절을 보냈다. 624년에는 두 차례나 사절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고구려는 당에 대해 밀도 높은 외교를 전개했던 것이다. 이들 가운데 6건의 사행은 구체적인 활동 내용을 전하고 있어, 고구려가 적극적으로 대당외교에 나섰던 의도를 살필 수 있다.
622년 영류왕은 당 고조의 제안을 받아들여 수와의 전쟁에서 사로잡은 포로 1만여 명을 당에 보냈으며, 624년에는 당에 역서(曆書)를 요청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사절을 보내 불교와 도교의 교법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영류왕이 당에 요청했다는 역서는 매해의 달력인 책력이라기보다는 고조 초기에 왕조 창건에 따라 정삭(正朔)을 개정했다는 점에서 그 역법인 ‘무인력(戊寅曆)’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영류왕은 당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왕조의 정삭을 받들겠다는 저자세까지 보였던 것이다(이성제, 2023).
고구려가 대당외교에 나선 것은 619년으로 백제·신라에 비해 2년 정도 앞선다. 이에 대해서는 수를 계승한 당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목적(김진한, 2009), 요서 지역으로 진출해 오는 돌궐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정원주, 2011), 고구려가 수·당 교체의 정세를 주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윤성환, 2011), 당과의 관계 수립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김강훈, 2020)이라는 다양한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
고구려가 당에 처음으로 사절을 보낸 619년은 당이 나라를 세운 지 2년째 되던 해로 당시 중원의 정세로 보면 주요 군웅으로 보기에는 부족한 세력이었다. 특히 고구려가 당에 조공했던 619년 2월 무렵이라면 금성(金城: 甘肅省 蘭州)에 근거를 두고 장안을 위협해 왔던 설거·설인고 세력을 당이 이제 막 격멸한 시기였다. 따라서 이때의 사행이 당이라는 새로운 세력과의 관계 수립이나 개선을 의도했다거나, 혹은 돌궐에 대한 방책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수의 붕괴가 몰고 온 새로운 국제정세에 대해 고구려가 경계심을 갖고 그 변화상을 주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李成制, 2021).
수의 침공은 유례없는 병력의 규모와 전례 없는 양제의 집요함에서 고구려인들에게 두려움을 주었다(이강래, 2016). 그런 만큼 그와 같이 나라의 존망을 가를 위기의 재발은 피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여겨진다. 619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고구려가 당에 사절을 보낸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고 보인다. 당의 우세가 확실해진 621년에야 비로소 대당외교에 나선 백제·신라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위기의식이 있었던 것이다(이성제, 2023).
이러한 고구려의 대당외교에 대해 당은 어떠한 입장을 보였을까. 이와 관련하여 당의 초기 동방정책은 수 양제의 적극적인 대외정책과는 다른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즉 당은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한 여건이 갖추어지기 전까지 현상유지정책을 추진했고, 중원을 통일하고 돌궐을 격파한 뒤 비로소 행동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여호규, 2006; 丁善溶, 2008; 방용철, 2011). 622년 당 고조가 양국 포로의 교환을 제의하면서 “화목을 언급하고 서로의 강역을 유지하면 좋을 것”(『구당서』 권199상)이라고 했던 것이나, 624년 삼국 국왕을 동시에 책봉한 것은 당의 현상유지정책을 보여주는 실례로 제시되었다. 전자의 경우는 화해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사건(임기환, 1996)으로, 고구려는 당과의 새로운 관계를 기대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고구려의 대당외교에 대해 곧바로 당의 책봉이 이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양국이 책봉조공관계를 맺은 것은 624년이었고, 그 내용도 이전 시대 고구려와 중원 왕조 간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이때의 책봉 수수는 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에 대한 책봉과 짝한 것으로, 당은 삼국을 대등하게 인정한다는 입장을 밝혔다(여호규, 2006). 양국 관계에서 보인 고구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은 고구려와의 관계를 여는 것보다는 삼국의 세력관계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드러냈다. 특히 이러한 당의 입장은 이미 621년 신라에만 특례를 베풀고 답방사를 보낸 일에서 보인 바 있었다.
과거 신라는 수의 고구려 침공에 호응하여 고구려 남변을 공격, 500여 리의 영토를 차지한 바 있었다. 그런 신라에 대해 당이 후대했다는 것은 당의 동방정책이 신라를 끌어들인 수의 전략을 부정한다거나 그로 인해 생겨난 현재의 정세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당의 행동에 대해 고구려는 얼마 전까지 상대한 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여겨진다. 629년까지 고구려가 당을 상대로 밀도 높은 외교를 전개하게 된 배경은 여기에 있었다고 보인다(이성제, 2023).
이렇게 당의 입장이 드러나자 625년에는 신라가, 이듬해에는 백제가 각각 당에 사절을 보내 “고구려가 조공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음을 호소”(『삼국사기』 권4, 권27)하였다. 과거 수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에 대한 견제와 압박을 당에게 요청하였다. 고구려로서 보아서는 수가 무너진 지 10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벌써 과거의 위기 상황이 재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이성제, 2023).
이러한 상황에 대해 고구려와 당이 보인 반응은 626년 태종이 주자사를 보내 삼국 간의 화의를 종용했던 일에서 살필 수 있다.
조서를 내려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郎) 주자사를 보내 화해하도록 하니, [고구려왕] 건무가 표문을 올려 사죄하면서 신라와 더불어 [당] 사신과 대면하여 회맹(會盟)할 것을 청하였다. _ 『구당서』권199상  
당은 삼국의 세력관계에 개입하려 행동에 나섰고, 이에 대해 영류왕은 사죄의 표를 올렸다. 이를 형식적 조치로 보는 견해(여호규, 2006)도 있지만, 화해의 방법으로 회맹이라는 구체적인 안까지 제시했다는 점에서 간단히 다룰 문제는 아니라고 보인다.주 002
각주 002)
회맹을 수용한 의도는 한강 유역을 회복하려는 데 있었다고 보거나(김강훈, 2020), 현상 유지의 전략이라는 견해(이준성, 2021)도 있으나, 그렇게 볼 수는 없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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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를 거부할 경우 당이 반발할 것임은 예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회맹의 동의는 고구려가 신라 방면에 대한 공세를 중단한다는 것과 당이 주도하는 삼국 관계를 인정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고구려는 신라에게 빼앗긴 실지의 회복을 포기해서라도 당과의 갈등을 피하려 했던 것이다. 이 시기 고구려가 대외전략의 주안점을 어디에 두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이성제, 2023).
이후 국제정세는 당 중심으로 가파르게 변하였고, 고구려는 628, 629년에 연이어 사절을 당에 보냈다. 특히 628년의 사절에 대해 『삼국사기』는 당이 돌궐을 격파한 것을 축하하고 봉역도를 바쳤다고 사행의 목적을 밝히고 있어 관심이 간다. 물론 당이 힐리가한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은 것은 630년의 일이라는 점에서 이 기록 내용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다만 봉역도를 바쳤다는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해도 좋다고 본다.
이 봉역도에 대해서는 당이 요청한 것으로 지리정보를 담은 고구려 지도(임기환, 1996)라고 보거나, 실효성 없는 소략한 지도(윤성환, 2013), 국가 기밀에 해당하는 지리정보를 담은 지도(선봉조, 2009) 등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다. 한편, 봉역도를 제공한 것은 양국의 우호를 위한 유화책의 하나(徐榮洙, 1987a; 방용철, 2011)로 보거나, 고구려 세력권의 경계를 명확히 하여 영토를 보장받고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임기환, 2006; 정원주, 2011), 돌궐이 약화된 상황이었음에 주목하여 요서 지역 경략에 나서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한 것(윤성환, 2013), 한층 순응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정빈, 2017)이라고 본다.
봉역도 헌상의 의미와 관련해서는 돌궐 패망에 대해 그 휘하에 있던 유목세계의 여러 세력이 보인 반응을 참고할 수 있다. 돌궐을 격파한 당의 위세에 놀란 세력들은 천가한의 칭호를 태종에게 바치며 복종을 서약하였다(『구당서』 권3). 이들의 대응은 당의 돌궐 격파라는 정세 변화에 따른 것이었고, 고구려의 봉역도 헌상 역시 그러했다. 이 점에서 봉역도는 자구 그대로 ‘분봉된 강역의 도첩’으로, 고구려는 이를 바침으로써 당에 신속해 있는 나라임을 애써 강조했다고 여겨진다(이성제, 2023). 최대 강적인 돌궐마저 무너뜨린 당의 위세에 대해 고구려는 일단 저자세를 보임으로써 상황의 전개를 지켜보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619년의 첫 번째 사절 파견부터 봉역도 헌상까지 고구려의 대당외교는 저자세로 일관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일례로 영류왕이 당의 회맹 개최 요구를 수용했던 것은 644년 연개소문이 신라 공격을 중단하라는 당의 요구를 거부했던 일(『삼국사기』 권21)과 비교하면 현격한 입장의 차이가 있다. 전쟁 재발을 막겠다는 의도 아래 고구려는 당에 대해 저자세를 보였던 것이다.
그러던 고구려는 629년 9월의 사절 파견을 끝으로 한동안 대당외교에 나서지 않았다. 기록상 고구려 사자가 다시 당에 이르게 된 것은 639년의 일이다. 한편, 대당외교의 중단과 함께 고구려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기 시작하였다.
[정관] 5년 조서를 내려 광주도독부(廣州都督府) 사마(司馬) 장손사(長孫師)를 보내 수군 전사자들의 해골을 거두어 묻고, 고구려가 세운 경관을 허물도록 하였다. [고구려왕] 건무는 [당이] 그 나라를 정벌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장성을 쌓았으니 동북쪽 부여성(扶餘城)부터 서남으로 바다에까지 이르러 천 리가 넘었다. _ 『구당서』권199상  
장성의 축조는 사료상 고구려가 대당 관계에서 보인 거의 유일한 군사적 조치였다. 그동안 고구려가 대당 관계에서 보인 저자세와 달리, 장성의 축조는 강경한 입장을 드러낸 것이었다. 장성 축조는 당이 경관을 철거한 데 따른 대응 조치였다.주 003
각주 003)
『삼국사기』에는 영류왕이 장성 축조를 명한 시기를 2월로 전한다. 그런데 그 원인으로 지목된 경관 파괴는 8월(『구당서』 권3)이라는 점에서, 경관 파괴가 장성 축조의 직접적 배경이라기보다는 경관 파괴로 상징되는 당의 군사적 위협으로 고구려가 장성을 축조하게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余昊奎, 2000). 하지만 『구당서』 권199상 기록은 그 서술구조가 직접적 인과관계를 이루고 있으므로 적어도 찬자가 경관 파괴라는 당의 행위를 결정적인 원인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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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류왕이 “당이 그 나라를 정벌할까 두려워했다”는 언급에서 장성 축조가 전쟁 발발의 위기감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고구려가 세웠다는 경관이란 수군(隋軍) 전사자의 해골을 쌓아 만든 무덤으로, 수와의 전쟁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고 국민의 사기를 고양시키기 위해 만든 승전기념물이다(千寬宇, 1982). 언뜻 보아서는 영류왕이 어느 대목에서 경관 철거를 당의 침공 징후라고 여겼던 것인지 분명치 않다. 이와 관련해서는 『책부원구(冊府元龜)』(권42)에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살필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경관 철거와는 별도로 당의 사자가 고구려에 와서 수군 전사자 해골을 수습하고 제사와 장례를 치를 것을 요구하였다. 이해 2월에 태종이 전국에 명을 내려 각지의 모든 경관을 철거하도록 한 수예(收瘞)정책의 일환이었다(이정빈, 2017).
당이 고구려의 전승기념물을 파괴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수를 상대로 거둔 승리의 역사를 부정하는 행위였다. 또한 고구려에게 수군 전사자들의 제사와 장례를 치를 것을 요구해왔다는 것은 도를 넘는 행동이었다. 더욱이 그것이 당 내지(內地)에 대한 수예정책과 짝하여 요구되었다는 점에서 고구려를 당혹케 했다고 보인다. 태종은 고구려를 속국으로 대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고구려는 대당외교를 중단하겠다고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고구려의 입장 변화가 양국 관계를 악화시키고 나아가 개전의 빌미로 이어지리라고 예상하기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당의 경관 철거로부터 고구려가 전쟁 발발의 위기감을 느끼게 된 과정은 대체로 이러했다고 여겨진다(이성제, 2023).
천리장성은 고구려의 동북방 부여성에서 시작하여 서남쪽으로 바다에 이르는 방어선이었다. 기록대로라면 장성은 그 길이가 거의 500km에 이르는 방어물이다. 이런 규모라면 천여 년의 시간이 흘렀더라도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판단 아래 어디의 무엇이 장성 유적인가를 두고 세 견해로 나눌 수 있는데, 양국의 자연 경계선인 요하 동안(東岸)에 장벽을 세웠다는 평원토벽설(平原土壁說)(李健才, 1987; 申瀅植, 1997; 余昊奎, 2000; 田中俊明, 1995; 張福有·孫仁杰·遲勇, 2010), 국경지대의 산성들을 연결하여 장벽을 만들었다는 산성연결방어선설(山城連結防禦線說)(陳大爲, 1987; 梁振晶, 1994), 기존의 산성들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방어체제를 구축했다는 산성방어강화설(山城防禦强化說)(李成制, 2014)이 그것이다.
이들 견해에서 특징적인 것은 평원토벽설과 산성연결방어선설 모두 긴 장벽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장성은 산성방어선의 보조시설이었기에 당 태종이 침공해온 645년 전쟁에서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고 이해하는 점도 동일하다. 결국 장성은 고구려가 전쟁에 대비하여 세운 방어물이었지만, 실제 전쟁에서는 도움이 되지 못했던 셈이다.
그런데 『삼국사기』(권21)에 “16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는 기록이 있어 장성의 완공 시점을 알 수 있다. 즉 전쟁이 일어났던 645년까지 장성의 대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고,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64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완성되었던 것이다. 만일 실전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면 고구려는 공사를 재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전후 고구려가 공사를 재개하여 이를 마쳤다는 것은 장성이 당과의 전쟁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음을 알려준다. 무엇보다 전란의 피해 복구가 우선되어야 할 시기에 서둘러 장성 완공에 힘을 쏟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장성은 645년 전쟁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고, 기대한 역할을 다했다는 관점에서 그 실체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이성제, 2023).
또한 당 태종이 출전에 앞서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전에 종군했던 정원숙(鄭元璹)에게 그 경험담을 묻자 그는 “동이(고구려)는 수성(守城)을 잘하여 이를 공격하더라도 바로 함락할 수 없다”(『자치통감』 권197)고 한 것은 대군을 동원한 수의 맹공이 성곽에 의지한 고구려군의 방어전술에 가로막혔던 상황을 알려준다. 사정이 이러했다면 고구려는 당을 상대로 해서도 성곽에 의지한 방어전술을 보다 강화하는 방향으로 방어전략을 수립했다고 보는 것이 순리적이다. 이는 647년 고구려 재침을 놓고 당 조정에서 열린 회의에서 “고구려가 산에 의거하여 성을 쌓아 (공격해도) 바로 함락할 수 없다”(『자치통감』 권198)고 평가한 사실을 보아서도 그러하다. 645년 전쟁을 치른 당은 고구려의 방어전술을 수대의 그것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645년 전쟁에서 당군은 요동성을 함락하는 등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개전한 지 석 달이 지난 시점에도 요동 서북부에서 발목이 잡혀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10월 퇴각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16년간의 대역사를 통해 방어력을 정비했던 요동 지역의 성곽들이 당군의 침입을 가로막았던 것이다(이성제, 2023).
한편, 639년 고구려는 대당외교를 재개하였다(『구당서』 권3). 기록상 10여 년 동안 중단되었다고 보이는 대당외교가 이때 재개된 연유에 대해서는 북방 유목세계에서 설연타가 부상하게 된 정세 변화(김진한, 2009), 이듬해 태자 환권(桓權)의 파견을 위한 사전 조율(방용철, 2011), 귀족 자제의 국학 입학과 태자 파견을 통한 왕권 강화(윤성환, 2018) 때문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그런데 영류왕 대 대외정책을 국내 정치세력 간의 대결구도라는 시각 아래 평가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설연타의 등장이라는 국제정세 변화와 관련하여 태자가 당에 파견되었다는 것도 이상해 보인다. 태자 환권이 당에 나아가야 했던 사안이 639년 대당외교를 재개하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태종의 태산(泰山) 봉선(封禪) 추진과 대당외교의 재개를 연관 지워 본 견해(김강훈, 2021)가 주목된다. 640년 11년 태종의 태산 봉선이 결정되었다는 점에서 당이 봉선 참여를 요청하였고 영류왕이 이에 호응하면서 대당외교가 재개되었다는 것이다. 666년의 고종 봉선에 연개소문이 호응하여 봉선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태자 복남(福男)이 파견되었던 일련의 과정을 연상하면(李成制, 2019) 그렇게 생각해볼 수 있겠다. 다만 봉선 참여를 조건으로 침략하지 않을 것을 당에게 확약 받으려 했다거나 태자 파견에 대해 연개소문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는 견해에는 수긍하기 어렵다. 봉선이 무산되고 난 뒤의 양국 관계에 대한 이해도 필요해 보인다.
이렇게 볼 때 당의 직방낭중(職方郎中) 진대덕(陳大德)이 641년 고구려에 왔을 때 “이르는 성읍마다 성주들이 인도해주어 두루 살필 수 있었고, 남녀가 길에 늘어서서 그를 바라보았다”(『삼국사기』 권20)는 일화는 봉선 참여로 양국 관계의 변화를 기대했던 고구려 사회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해도 좋을 듯하다. 진대덕의 사행은 그동안 당이 사행을 통해 고구려의 허실을 탐지했음을 보여주는 일로 주목되어왔다. 『삼국사기』 찬자가 이 부분을 강조하여 고구려가 그 진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해석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과연 그랬을까. 진대덕의 본직인 직방낭중은 병부 소속으로 내외의 지리·풍속 관계 정보를 다루는 직방의 장관이었다. 고구려는 본직으로 보아 그가 사신의 역할을 빌어 군사적 가치가 높은 정보를 얻으려 할 것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즉, 진대덕이 정보 수집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 측에서 그러한 여지를 주었기에 가능했다.
고구려의 의도는 진대덕 일행이 평양에 도착했을 때 영류왕이 군대의 위세를 성대히 펼쳐 놓고 접견했다는 대목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군대를 대대적으로 배치해 놓고 사자를 맞이한 모습은 사절에 대한 일반적인 접대방식이라 보기 어렵다. 영류왕은 군사적 대비상황을 과시함으로써 고구려가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점을 당에게 주지시키려 했던 것이다(이성제, 2023). 물론 고구려의 바람과 달리, 양국 관계는 우호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당은 고구려 공략의 뜻을 포기하지 않았고, 연개소문의 정변은 그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 각주 002)
    회맹을 수용한 의도는 한강 유역을 회복하려는 데 있었다고 보거나(김강훈, 2020), 현상 유지의 전략이라는 견해(이준성, 2021)도 있으나, 그렇게 볼 수는 없다고 여겨진다. 바로가기
  • 각주 003)
    『삼국사기』에는 영류왕이 장성 축조를 명한 시기를 2월로 전한다. 그런데 그 원인으로 지목된 경관 파괴는 8월(『구당서』 권3)이라는 점에서, 경관 파괴가 장성 축조의 직접적 배경이라기보다는 경관 파괴로 상징되는 당의 군사적 위협으로 고구려가 장성을 축조하게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余昊奎, 2000). 하지만 『구당서』 권199상 기록은 그 서술구조가 직접적 인과관계를 이루고 있으므로 적어도 찬자가 경관 파괴라는 당의 행위를 결정적인 원인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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