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동향
1.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동향
고구려의 27대 왕인 영류왕(618~642년)은 수와의 전쟁 당시 평양성에서 내호아(來護兒)를 격퇴시킨 인물로 이복형인 영양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영류왕이 즉위할 당시 수에서는 국내 정국의 혼란으로 인해 주변 이민족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각지에서 군웅들이 봉기하여 왕을 자처함으로써 중국 대륙은 다시 분열되었다. 그중 수의 북방 변경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이연(李淵)은 반란을 일으켜 618년 5월 수의 공제(恭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당을 건국하였다. 영류왕은 왕위에 오르자 곧바로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으며, 이후 629년까지 당과의 교류를 이어나갔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영류왕 7년(624년)에 당에서 보낸 도사가 고구려에 와서 노자를 강의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고구려가 당에 불교와 도교의 교법을 배우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고구려가 당시 일개 군웅에 지나지 않던 당과 교류를 맺은 가장 큰 이유는 대륙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중국 왕조와 북방 유목세력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양측을 이용해 견제하면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따라서 고구려에서는 국제정세 변화를 빠르게 파악하기 위해 중국 왕조와의 교류가 매우 중요하였는데, 당시에 당과 화친을 맺은 이유는 요해(遼海)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던 돌궐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요해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관심은 고구려가 요동 지역을 확보한 이래로 계속되었는데, 북위 시기에는 이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권을 인정받았고, 수와의 대립도 요해 지역에 대한 주도권 다툼에서 비롯되었다(박경철, 2005; 정원주, 2011).
당도 국초에는 돌궐에 칭신(稱臣)하고 있었지만 수도인 장안이 돌궐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돌궐을 평정하는 것이 국가 안위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당은 중원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돌궐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를 위해서 당의 입장에서도 고구려와의 관계를 평화롭게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돌궐에 대한 견제라는 이해관계에 의해 서로 사신을 교환하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가게 된 것이다. 당은 619년경 돌궐과 연계된 지역의 군웅을 진압하는 데 힘을 기울여 관내도(關內道), 하서도(河西道) 등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점차 관중 지방을 포함하는 산서(山西)·섬서(陝西)의 중남부 지역과 사천(四川)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군웅을 차례로 제압하였으며, 628년에는 마침내 반란세력을 완전히 진압하고 중국을 통일하였다(김진한, 2009; 김진한, 2020; 정원주, 2011).
중국을 재통일한 당은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재편하려 하였다. 이 당시 동돌궐에서 힐리가한과 계미가한 간의 내분이 지속되자, 동돌궐에 예속되어 있던 철륵(鐵勒)·설연타(薛延陀) 등은 동돌궐에 반기를 들었다. 당은 이 기회를 틈타 설연타와 동맹하였고 630년에는 동돌궐을 멸망시켰다. 이에 서북 제번(諸蕃)에서는 당 태종에게 돌궐의 최고 군주를 의미하는 ‘천가한(天可汗)’의 칭호를 올렸으나, 당 태종은 한 발 더 나아가 ‘황제천가한’을 칭하며 중원과 막북의 최고 군주임을 자처하였다. 아울러 북방 민족들을 도독부와 자사부로 편입시켜 기미체제(羈縻體制)를 설립하였다(김호동, 1989; 임기환, 2006).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와 당의 관계에도 위기감이 점차 고조된다. 일찍이 628년에 고구려는 당이 돌궐의 힐리가한을 생포한 것을 축하하며 당에 봉역도(封域圖)를 바친 바 있었다. 봉역은 사전적 의미로 ‘흙을 쌓아서 만든 경계’를 뜻하므로 봉역도는 그 나라의 강역을 표시한 지도라고 할 수 있으며, 고구려의 강역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대체로 당에 대한 고구려의 유화적인 태도를 보여준다고 이해하고 있는데(리지린·강인숙, 1976; 이호영, 1996; 노태돈, 2009), 세력 범위를 보장받을 목적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이용범, 1987; 임기환, 2006; 정원주, 2011).
당은 동돌궐을 격파한 후, 예속되어 있던 요해 제족(諸族)의 향방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정관 3년(629년) 영주(營州)에 동이교위(東夷校尉)를 재설치하였다. 동이교위는 요해 지역과 시라무렌강 방면의 유목민족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것으로 565년 신라 진흥왕의 동이교위 제수를 마지막으로 끊어졌다. 629년에 당이 이것을 재설치한 것은 요해 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영향력 확대를 위한 것으로, 이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력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는 오랫동안 이 지역을 통제하고자 하였던 고구려와의 갈등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윤용구, 2005).
아울러 631년에는 장손사(長孫師)를 파견하여 고구려와 수의 전쟁 당시 사망한 유골을 묻어주고, 또 고구려가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경관(京觀)을 헐어버렸다. 당에서는 경관을 파괴한 이유에 대해 수를 이은 국가로서의 인도적 차원이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하지만 결국 고구려의 패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다분한 것이었다. 당의 명분이 타당하더라도 그 장소가 타국의 영내라면 적절한 외교적 절차를 밟아서 행해져야 했다. 더욱이 경관은 고구려인들에게는 수의 대군을 맞아 싸워 절체절명의 국난을 이겨냈다는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당의 이러한 행동은 고구려를 독립적인 국가가 아닌 당의 패권하에 있는 국가임을 재확인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정원주, 2011). 이에 영류왕은 당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천리장성을 쌓았으며, 고구려의 대당외교는 단절되었다.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쌓은 것은 말갈에 대한 귀속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말갈은 돌궐, 당, 고구려에 각각 예속되어 있었는데, 돌궐이 멸망한 이후 돌궐에 예속되어 있던 말갈의 귀속 문제는 고구려 입장에서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또한 서쪽 방면의 강력한 위험이 제거된 요해 제족의 고구려 침략에 대해서도 방어해야 했다.
고구려가 쌓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천리장성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먼저 『삼국사기』에 기록된 천리장성의 실재 여부에 대한 논란이다. 『삼국사기』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천리장성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 차원에서 근래 토축으로 된‘노변강’을 고구려 천리장성 유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를 부정하기도 한다. 노변강은 자연적인 흙더미에 불과하거나 인공적으로 쌓은 것이라 해도 성벽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요동의 산성들을 연결하는 토루와 같은 성벽을 추가로 쌓아 장성을 만들었다는 산성연계방어선으로 보는 설도 현재 그 유구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성립되기 어려운 점이 있다(이성제, 2014). 한편,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기존의 산성을 단순히 연결한 산성연방선(山城聯防線)이 아니라 평원상에 구축된 군사방어선(軍事防禦線)일 것으로 보기도 한다(여호규, 2000).
그러나 천리장성은 이후 당과의 전쟁에서 방어선으로서 당의 군대를 저지하는 데 있어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천리장성은 당이 고구려를 공격한 과정에서 어느 기록에서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존재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하지만 천리장성이 축조된 이후에는 고구려 예하의 말갈이 당에 조공하거나 이탈한 사례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 천리장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일정 부분 참고할 여지는 있다(日野開三郞, 1991; 정원주, 2011).
영류왕 대의 대외관계는 대당 관계 이외에 대신라 관계에 대해서도 주목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영류왕 12년(629년)에 신라 장군 김유신이 동쪽 변경으로 쳐들어와 낭비성(娘臂城)을 깨트렸다고 하며, 영류왕 21년(638년)에는 고구려가 신라 북쪽 변경의 칠중성(七重城)을 침략하였으나 신라 장군 알천이 막아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영류왕 대에 고구려의 대신라 전선이 고착상태에 빠진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영류왕 9년(626년)에 신라와 백제는 당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길을 막아 입조할 수 없으며, 자주 침략한다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당 고조는 산기시랑(散騎侍郎) 주자사(朱子奢)를 고구려에 보내 신라·백제와 화친하도록 하였고, 고구려는 표문을 올려 사죄하고 화평할 것을 청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626년 이전에 영류왕은 신라를 여러 차례 공격해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 낭비성전투와 칠중성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동·남 방면으로의 안정화를 이루지는 못했다고 하겠다(정원주, 2011).
한편으로 영류왕 대에 고구려는 말갈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할 때 말갈병을 활용한다거나, 당의 1차 침략에 말갈병을 대거 이용하는 점은 고구려의 말갈 지배가 강화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아울러 고구려 말기의 영역에 대해 『수서』에는 “동서가 2,000리, 남북이 1,000여 리”라고 되어 있으나, 『구당서』에는 “동서가 3,100리, 남북이 2,000리”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영류왕에서 보장왕에 이르는 시기에 고구려의 영역은 『수서』에 기록된 것에 비해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특히 남북으로 2배가량 영토가 확장되었다는 것은, 남쪽 방면으로만의 확장이 아니라 북쪽 말갈 방면으로도 상당히 확장되었음을 시사한다(小川裕人, 1937; 이인철, 2004).
동돌궐이 멸망하자 고구려는 돌궐에 예속되어 있었던 말갈의 귀속 문제를 두고 당과 신경전을 벌였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는 앞서 영양왕 대에도 수의 침략을 감수하고 속말말갈 지역으로 진출한 바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당과의 대립을 감수하더라도 말갈에 대한 당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당과 관계를 단절했던 시기에 말갈에 대한 지배력 강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 고구려가 멸망할 때 말갈 역시 고구려와 같은 길을 걷게 되는 것도 이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가 좀 더 확고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류왕 시기의 이러한 노력은 동북아 지역에서 고구려의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의미도 있지만, 이후 전개될 당과의 관계에서 유리한 입장에 서고자 하는 점도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정원주, 2011).
639년에 이르러 고구려가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한 기록이 『구당서』에 보인다. 또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640년에 태자 환권(桓權)을 보내 조공하는 한편, 귀족의 자제들을 당에 보내 국학에 입학시켜주기를 청하였다. 당시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 신라, 고창, 토번 등 여러 나라의 추장(酋長)도 자제를 보내 입학을 요청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중요한 외교적 행위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고구려가 중단되었던 당과의 교류를 재개하게 된 배경에 대해 당의 고창 정벌에 주목하는 견해가 있다. 당은 북방의 돌궐을 멸망시킨 뒤 서역으로 눈을 돌렸고, 640년 8월에는 고창을 주현으로 편입시켰다. 이로써 당에 저항하는 세력은 당의 북방과 서북방 지역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서역 경략도 일단락되고 서북방의 주요 세력을 모두 제압한 상황에서 당이 중국 중심의 일원적인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남아있는 유일한 위협세력인 고구려에게도 강경책을 쓸 가능성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이에 고구려는 당의 다음 공격 목표가 될 것을 우려하여 대당 관계에 있어 새로운 대책을 수립하게 되었다(李成市, 1993; 정선용, 2008, 방용철, 2011; 정원주, 2011; 여호규, 2018). 이와 유사한 관점에서 동돌궐 멸망 이후 세력을 확대해 나가던 설연타에 대한 경계 차원에서 대당외교가 재개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김지영, 2008; 김진한, 2009; 김진한, 2020).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고구려 내부의 정치 변동에 주목하기도 한다. 『일본서기』에 보장왕의 아버지인 대양왕(大陽王)과 연개소문의 정변이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처럼 언급한 점에 주목하여, 보장왕과 대양왕계의 결합을 귀족연립체제를 지향하는 귀족들에 의해 밀려난 세력 간의 결합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개소문과 대양왕계의 결합은 영류왕에게 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조공 재개와 환권 파견 등을 통해 당과의 관계를 개선하면서 반대세력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으며, 또 여러 대신들과 함께 연개소문의 제거를 도모하였다는 것이다(전미희, 1994).
고구려의 대신라 관계에 주목하는 견해도 있다. 629년의 낭비성전투, 638년의 칠중성전투와 같은 요충지에서의 패배로 인해 고구려의 대신라 공세는 교착상태에 빠졌는데, 대당외교 재개는 이러한 정국을 만회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것이다(선봉조, 2009; 최호원 2013). 칠중성전투의 패배가 고구려의 대당외교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관점을 공유하면서, 당 내부의 사정에 주목하기도 한다. 당 태종은 봉선을 거행하기 위한 사전작업으로 주변국이 모두 당에 복속되었음을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했고, 그 일환으로 고구려에게 태자 입조와 지배층 자제의 국학 입학을 요구했다는 것이다(김강훈, 2021).
한편, 당 태종은 641년 태자 환권의 입조에 대한 답사로 직방낭중(職方郎中) 진대덕(陳大德)을 파견하여 고구려의 허실을 염탐하게 하였다. 직방낭중의 직무는 국내외의 군사 등 정보를 얻어 지도나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삼국사기』에는 진대덕이 고구려의 지방관리들에게 비단을 바치며 고구려의 경치를 살피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지방관리들이 인도하였으며, 진대덕이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기록대로라면 고구려에서는 진대덕의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하지만 이미 수와의 전쟁을 겪었던 고구려의 입장에서 당을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사신으로 파견된 진대덕에게 의도적으로 고구려의 견고한 방어태세를 보여줌으로써 당의 침공 의지를 꺾으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신당서』의 “영류왕이 사자에게 열병을 성대히 보였다”라는 기록에서도 그러한 측면을 엿볼 수 있다. 진대덕이 고구려에 고창국 멸망 소식을 전달하였을 가능성도 있다(노태돈, 2009).
어쨌든 이렇게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진대덕은 『고려기』를 지었다(吉田光男, 1977). 『구당서』와 『신당서』에 보이는 『봉사고려기(奉使高麗記)』가 진대덕의 저술로, 고구려 사행의 결과를 보고한 것이었다. 현전 『한원』에 인용된 『고려기(高麗記)』가 그 일문(逸文)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吉田光男, 1977; 武田幸男, 1994; 高福顺·姜维公·戚畅, 2003; 노태돈, 2009; 윤용구, 2018). 『봉사고려기』와 『한원』에 인용된 『고려기』가 모두 진대덕 한 사람의 저술이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지만(武田幸男, 1994; 童嶺, 2017), 그의 사행이 기초 정보를 제공했다고 보는 데는 대부분 동의한다. 이 책은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한원』에 『고려기』에서 인용한 기사가 있어 그 내용을 짐작해볼 수 있다. 현재 전하는 내용은 대체로 고구려의 지리와 특산물 등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진대덕이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는 기록을 볼 때 고구려 내부의 정보를 광범위하게 수집했음을 알 수 있다. 당으로 귀국한 진대덕은 고구려의 정세를 태종에게 보고하였고, 고구려가 고창이 망한 것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여 접대를 후하게 하였음을 이야기하였다. 이를 들은 태종은 기뻐하면서도 산동의 주현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점을 들어 고구려 정벌을 유보하였다. 하지만 고구려를 “본래 사군의 땅(本四郡地耳)”으로 인식한 점을 볼 때 언제든지 고구려를 정벌할 수 있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李成市, 1993; 김진한, 2009). 고구려에서는 642년 정월에 조공사를 재차 파견하는데, 이는 당의 침략의도를 달래기 위한 영류왕의 후속조치로 이해된다(김기흥, 1992; 방용철, 2015).
이렇게 당의 고구려 침공의지, 설연타의 부상, 신라와의 충돌 등으로 대외적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고구려에서는 큰 정치적 변동이 일어난다. 642년에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한 것이다. 〈천남산묘지명〉에 의하면 연개소문의 증조는 중리(中裏)의 지위에 있었다. 그는 안원왕 말기에 일어난 세군(細群)과 추군(麤群)과의 왕위 다툼에서 추군 측에 가담하여 양원왕을 옹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이홍직, 1974; 노태돈, 1999; 정호섭, 2018). 남생(男生)의 행적 등을 근거로 국내성시기부터 유력한 귀족가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해도 있긴 하지만(최일례, 2011; 정원주, 2013), 사료로만 한정시켜 보면 연개소문 가문은 고구려 후기에 실질적으로 성장한 평양계 귀족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연개소문 가문의 중앙정계 진출에 대해서는 평양 천도를 전후한 시기까지 소급해 보는 견해도 있지만(임기환, 1992), 현재까지 양원왕 대 이전의 기록에서 어떠한 연씨 세력도 찾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체로 이 시기부터 연개소문의 가문이 유력한 귀족가문으로 부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연씨 집안이 644년 정란에서 추군 측에 속하였다고 보고, 그것이 연씨 가문이 흥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고 이해하기도 한다(이홍직, 1974; 노태돈, 19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