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연개소문 가문과 정변
2. 연개소문 가문과 정변
연개소문 가문의 성씨와 관련해서는 중국 측 기록으로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과 〈천남생묘지명〉 및 〈천헌성묘지명〉 등 금석문에 천씨(泉氏)로 나오며, 『삼국사기』에도 천씨(泉氏)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가 중국 측 기록을 충실하게 따른 결과일 것이다. 한편, 『구당서』 권199 고려조에는 전씨(錢氏)라는 기록도 보이며, 『신당서』 권220 고려전에 연개소문의 동생으로 연정토(淵淨土),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6년조 등에도 연정토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현재 기록으로는 연(淵), 천(泉), 전(錢)이 있는 셈이다. 본래의 성은 연(淵)이지만, 당 고조인 이연(李淵)의 휘를 피하여 천(泉)으로 표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고려고기(高麗古記)』에서는 자칭하여 성을 개(盖), 이름을 금(金)이라 한 것이나 같은 책의 『신지비사(神誌秘詞)』 서문을 인용하면서 소문(蘇文)은 직명(職名)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인식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이홍직, 1971). 최근에는 『구당서』에 성이 ‘전(錢)’으로 되어 있는 점을 착안하여 ‘전(錢)’과 ‘천(泉)’은 모두 고대 화폐의 이름으로 ‘천(泉)’을 ‘전(錢)’으로도 썼다는 사실을 주목하기도 한다. 즉 ‘錢’과 ‘泉’이 서로 통용될 수 있었던 것은 두 글자가 고대에 같은 음가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구당서』 고려전에는 연개소문의 성씨가 “물속에서 나왔다(生水中)”라고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전승은 보이지 않아, 연개소문 가문의 성씨를 단순히 ‘生水中’에서 비롯된 ‘泉’ 또는 ‘淵’으로 이해하는 것에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구당서』의 연개소문 성씨 기록은 고구려 측에서 전해진 정보를 수용한 것으로 오히려 고구려에서는 ‘錢’을 연개소문의 성씨로 표기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였다(박승범, 2016). 한편, 『일본서기』의 이리가(伊梨柯)와 연개(淵蓋)가 통한다고 보아 이를 성씨로 보기도 하였다(李丙燾, 1955; 이병도, 1996).
하지만 연개소문의 동생으로 연정토를 기록하고 있는 점이나 당 고조 이연의 휘를 피하여 성을 ‘泉’으로 표기한 것을 보면 본래 연(淵)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아울러 『일본서기』에 연개소문과 관련한 기록에서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의 ‘イリ(이리)’가 ‘淵’의 음독(音讀)에 해당한다는 점에서도 고구려 당시의 성씨는 연(淵)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이홍직, 1971; 정호섭, 2018).
한편, 일연은 『삼국유사』 흥법(興法)편 보장봉로보덕이암(寶藏奉老普德移庵)조에서 『당서(唐書)』와 『고려고기』를 인용하여 성은 개(盖)이고 이름은 금(金)이었다고 하였고, 또한 『신지비사』를 인용하여 개금은 성명(姓名)이고, 소문(蘇文)은 직명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인식으로 보인다.
연개소문 가문은 물과 관련된 출자 전승을 가지고 있었다. 샘이나 천(川) 또는 호수의 정령을 두려워하고 공경하여 자신들의 시조와 연결시키는 것은 고대 동북아시아 여러 민족의 설화와 신화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천남생묘지명〉 등에서 동일한 출자의식을 공유하고 묘지명을 쓸 때도 이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점이 일단 주목된다. 연개소문 가문이 물과 관련한 출자 전승을 가지고 그것을 성씨로 삼은 것을 보면 고구려 후기 유력한 귀족가문은 나름대로 독자적인 출자 전승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귀족연립체제하에서 유력한 귀족들이 독자적인 출자 전승을 통해 가문별로 상당한 유대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을 개연성도 있다고 하겠다. 애초에는 동일한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가문이 세력화되고 점차 분지화되면서 정치적 입장도 상반되게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정호섭, 2018).
한편, 〈천남생묘지명〉에 의하면 남생은 679년 4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기에 634년경에 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대 간 격차를 20~30년 정도로 가정할 경우 연개소문의 증조는 대략 6세기 초반, 조부인 자유는 6세기 중반경, 아버지인 태조는 6세기 후반에 출생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따라서 연개소문의 증조는 안원왕(531~545년)~양원왕(545~559년) 대에, 조부인 자유는 평원왕(559~590년)~영양왕(590~618년) 대에, 부친인 태조는 영양왕(590~618년)~영류왕(618~642년) 대에 걸쳐 주로 활동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연개소문 역시 남생의 출생 시점을 고려하면 대체로 610년경 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정호섭, 2018).
〈천남생묘지명〉에 의하면 연개소문의 조부인 자유와 태조는 막리지를 역임하였는데, 연태조는 영류왕의 즉위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영류왕은 영양왕의 이복동생으로 영양왕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고구려와 수의 전쟁 때 많은 공을 세운 그의 활약상을 감안하면 영양왕 사후에 연개소문 가문을 포함한 다수 귀족들의 합의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을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개소문의 증조부터 세군과 추군의 왕위쟁탈전에서 추군 세력의 편을 들어 양원왕을 즉위시키는 데 일정한 공헌을 하였고, 부친인 태조 대에도 영류왕을 왕으로 추대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선봉조, 2009). 이러한 과정을 통해 연개소문 가문은 적어도 연개소문의 증조 때부터는 중요한 귀족가문으로 성장하였고, 조부와 부친 때에 이르러서는 막리지를 역임할 만큼 실질적인 최고의 가문이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정호섭, 2018).
표1 | 문헌과 금석문에서 확인되는 연개소문 가문의 인물(정호섭, 2018, 일부 수정 보완)
| 세대 | 성명 | 생몰년 | 가계 | 혼인 | 비고 |
| 1 | ?(失名) | 6세기 초반경 출생 | 연개소문 증조 | 안원왕~양원왕 대 | |
| 2 | 子遊 | 6세기 중반경 출생 | 연개소문 조부 | 평원왕~영양왕 대 | |
| 3 | 太祚 | 6세기 후반경 출생 | 연개소문 부친 | 영양왕~영류왕 대 | |
| 4 | 蓋蘇文 | ?~665 | 610년대 출생 | ||
| 부인(失名) | ?~682 | 연개소문 부인 | 682년 사망 | ||
| 淨土 | 610년대 출생 | 연개소문 동생 | 보장왕의 딸(?) | 신라에서 당으로 사행 후 정착 667년까지는 생존 | |
| 5 | 男生 | 634~679 | 연개소문 첫째 아들 | 안동도호부에서 사망 | |
| 男建 | 635~638 출생 | 연개소문 둘째 아들 | 검주로 유배 후 사망 | ||
| 男山 | 639~702 | 연개소문 셋째 아들 | 702년 장안에서 사망 | ||
| 安勝 | 650년대 출생 | 연정토의 아들 | 보장왕의 외손 보장왕의 서자 | ||
| 6 | 獻誠 | 650~692 | 남생의 첫째 아들 | 모함으로 사망 701년 장례 | |
| 獻忠 | ?~665 650년대 출생 | 남생의 둘째 아들 | 665년 남건, 남산 등에 의해 사망 | ||
| 光富 | 685~? | 남산의 아들 혹은 손자 | 남산과 46세의 나이 차이 | ||
| 大文 | ?~684 | 안승의 조카(族子) | 신문왕 4년 반란 후 주살 | ||
| 7 | 玄隱(隱) | 680년대 출생 | 헌성의 첫째 아들 | 729년 천비묘지 撰 | |
| 玄逸 | 680년대 출생 | 헌성의 둘째 아들 | |||
| 玄靜 | 680년대 출생 | 헌성의 셋째 아들 | |||
| 同濟 | ?~? | 현은과 동일 세대(?) | 천씨부인묘지 大父同濟 | ||
| 8 | 毖 | 708~729 | 현은의 아들 | 왕위의 딸과 혼인 | 왕위의 사위 |
| 泉氏夫人 | 726~807 | 현은의 딸 | 馬府君과 혼인 | 曾祖獻誠, 大父同濟, 烈考玄隱 | |
| 景仙 | ?~754 | 현일 혹은 현정의 아들 가능성 | |||
| 9 | 孺弘 | ?~? | 천씨부인의 종질(조카) | 천씨부인묘지 撰 | |
| 一族 | 伊梨渠世斯 | ?~642 | 연개소문 정변 때 주살 | 반연개소문 세력 | |
| 都須流金流 | ?~? | 연개소문 정변 후 大臣 | 친연개소문 세력 | ||
| 伊梨之 | ?~? | 656년 왜에 사신으로 파견 | 친연개소문 세력으로 추정 | ||
| 高提昔 | 649~674 | 증조부가 水境城 道使와 遼東城 大首領 역임 | 674년 천씨 가문과 혼인 | 국내성 출신 26세에 사망 |
그런데 연태조가 사망한 후 그 아들인 연개소문이 지위를 계승하는데 문제가 발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연태조는 630년 말~640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선봉조, 2009; 최호원, 2013), 『삼국사기』에 의하면 국인(國人)들은 동부대인·대대로의 아들인 연개소문이 당연히 그 지위를 이으려 했으나, 성격이 잔인하고 포악하다고 하여 그 지위를 계승하는 것을 막았다. 이에 연개소문은 머리를 조아리며 여러 사람들에게 섭직(攝職)을 청하여 간신히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후에 부친의 지위를 간신히 계승하기는 하였으나, 그 승계가 결코 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당시 계승한 지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를 고려해볼 수 있으나, 대인(大人)을 계승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請田正幸, 1979; 전미희, 1994), 막리지를 포함한 부직 전체를 계승한 것으로 보기도 하며(武田幸男, 1989; 임기환, 1992; 임기환, 2004), 대대로(大對盧)까지 상정하기도 하였다(이내옥, 1983; 전경옥, 1996; 이도학, 2006). 연개소문 가문이 국인들이 동의하는 절차를 통해 일정한 지위를 계승하고 있음은 확인할 수 있다. 대대로의 위상을 고려해본다면, 일단 부친인 태조가 가졌던 대대로의 지위를 계승한 것은 실질적으로 어려웠다고 보인다. 이에 대해 사료에 보이는 동부대인(東部大人) 혹은 서부대인(西部大人)을 수도의 행정구역인 5부(部)의 장(長)인 욕살로 보고, 이때의 관직 계승은 당시 세력관계와 연고 등에 의해 귀족세력의 동의를 얻는다면 특정 관직에 장기 재임하거나 한 집안에서 이어서 직을 맡는 경우는 가능했다고 보기도 한다(노태돈, 1999).
한편, ‘섭직’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그가 부직을 온전히 승계했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선봉조, 2009). 섭직이란 연개소문이 ‘불가함이 생긴다면 폐할 수’ 있는 어디까지나 ‘임시’·‘대리’의 직위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구당서』에서는 왕과 대신들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고 모의하게 된 계기에 대해 “섭직으로 법을 어긴 일이 있다”고 하는데, 그가 정변 직전까지 섭직에 머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연개소문은 연태조가 가졌던 권력 일체를 계승하지 못하고 제한된 권력만을 이어받았다는 것이다(이성제, 2021).
당시 연개소문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부직 승계를 하지 못하고 섭직했다는 것은, 고구려 후기 정치사에서 나름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영류왕은 연개소문 일가의 권력 계승을 막음으로써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되찾으려 했던 것이다. 기록상으로는 연개소문 일가의 권력 계승을 가로막은 것은 국인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이 무렵의 정국 운영에는 영류왕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생각된다. 연개소문이 부직의 승계를 당연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아, 연태조는 죽기 전에 아들의 권력 승계를 위한 조치를 마련해 놓았을 것이다. 그가 대대로에 재직하다가 죽었다는 것 역시 연개소문 일가의 세력이 다른 귀족들에 대해 우위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국인들이 연개소문의 부직 승계를 반대하여 일시적으로 연개소문의 승계가 좌절되었던 것은 연태조의 사전 조치가 무력화되고 세력관계가 뒤집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존재감을 되찾고 있던 왕권이 국인들에게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귀족연립정권하에서 대대로의 선임에 관여하지 못했던 이전 국왕들과 달리 영류왕은 그 관행에 제동을 걸었고, 유력 귀족이 대대로를 계승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이성제, 2021).
이후 영류왕 25년(642년) 정월, 영류왕은 연개소문에게 천리장성의 역사를 감독하게 한다. 대인 연개소문에게 명하여 장성의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먼저 영류왕과 귀족세력이 연개소문을 중앙정계에서 좌천시키고 견제하기 위해 장성 축조를 감독하게 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전미희, 1994; 노태돈, 1999; 김강훈, 2021). 연개소문이 발령 이후 머지않은 시점에 정변을 일으켰다는 데 주목하며, 정변 때는 동부대인이었다는 점에서 실제로는 부임하지는 않았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연개소문 내지 그의 가문이 천리장성 축조를 주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李成市, 1998; 임기환, 2004; 정호섭, 2018). 『삼국유사』 흥법(興法) 편에 인용된 『고려고기』를 보면, 연개소문이 천리장성 축조지에 상주한 것처럼 나오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의 성장은 천리장성 축조에 대한 감독과 관련해 살펴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연개소문이 천리장성 축조를 건의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천리장성은 631년에 축조를 시작하여 16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 연개소문은 610년대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천리장성 축조는 그의 부친 연태조 때부터 이루어진 것이었다. 실제로 642년이 되어서야 연개소문이 천리장성 축조를 감독하게 되었다. 따라서 연태조가 장성 축조에 큰 역할을 했고 연개소문은 부친의 사망 이후 그 직무를 계승하여 장성 축조를 감독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영류왕과 연씨 가문은 원만한 협조관계를 유지하다가 연태조의 죽음 이후 결합이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정호섭, 2018).
영류왕과 연개소문이 대립한 원인은 사료에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당시 고구려의 대외정책을 ‘북진남수(北進南守)’의 연개소문과 ‘북수남진(北守南進)’의 영류왕이 다툰 것으로 평가하였는데(신채호, 1948), 대체로 이러한 틀에 따라 대당온건파 영류왕과 대당강경파 연개소문이 대립한 결과 정변이 발생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노태돈, 1999; 김영하, 2000; 임기환, 2004). 하지만 연개소문이 집권 직후에 당에 사신을 보냈고 도교를 요청하거나 보장왕이 책봉을 받은 사례 등을 고려할 때 시종일관 대당강경책만을 구사한 것은 아니었다. 영류왕 또한 수와의 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수 군대를 격파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당과의 관계를 낙관적으로만 보지는 않았을 것이며, 무작정 대결 국면을 지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면 대외적 원인보다는 대내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던 왕의 의도에 연개소문이 장애가 되었다고 보거나(김기흥, 1992; 방용철, 2015), 연개소문이 정변 직후에 김춘추에게 영토 반환을 요구했으며, 직접 신라 공격을 주도하였다는 점에서 대신라강경책을 명분으로 삼아 정변을 일으켰다고 보기도 한다(최호원, 2013; 김강훈, 2021).
이러한 대외정책을 둘러싼 갈등이라는 측면에서 벗어나, 부직 계승 이후 연개소문의 행보에 주목하기도 한다. 〈유인원기공비(劉仁願紀功碑)〉에는 “연개소문이 홀로 딴마음을 먹고 망명한 자들을 한데 모으고 간사한 이들을 불러들여, 그 군장을 가두고 병사를 일으켜 난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섭직 후 연개소문의 행보는 가문의 군사력을 키우는 것이었고 볼 수 있다(전미희, 1994). 이러한 행동이 처음부터 정변을 의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섭직이라는 불안정한 지위에서 비롯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으며, 왕과 대신들의 우려를 사기에는 충분했다고 여겨진다. 영류왕과 대신들이 연개소문의 권력 승계를 제한하려던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했다는 점에서 볼 때 연개소문의 군사적 움직임이 양측의 갈등을 일으켰다는 것이다(이성제, 2021).
연개소문 정변은 642년에 발생하였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이 『자치통감』,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일본서기』에 보인다. 다만 중국과 일본 측 사료는 몇 가지 차이점이 보이는데, 먼저 정변의 시점이 다르다. 『일본서기』는 641년 6월이었다고 하고, 『자치통감』은 642년 11월 정사조에 전한다. 또한 정변에서 피살된 자의 수도 다르다.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에는 100여 명을 죽였다고 한 반면에 『일본서기』에서는 이리거세사(伊梨渠世斯) 등 180여 명을 죽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사료를 통해 정변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642년 10월 영류왕과 여러 대인이 연개소문을 죽이고자 모의하였으나 일이 사전에 새어나갔다. 이에 연개소문은 부병(部兵)을 모두 모아 마치 군대를 사열할 것처럼 꾸민 후 술과 음식이 성대히 차려놓고 귀족들을 초대하였다. 화려한 식이 거행되던 중 연개소문의 신호를 받은 부하들은 순식간에 참석한 귀족들을 처단했다. 그리고 그 길로 궁으로 달려가 고구려 영류왕을 시해하고는 시신을 몇 토막으로 잘라 시궁창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조카를 새로운 왕으로 삼아 보장왕이라 하고, 자신은 인사권과 군사권을 총괄하는 막리지에 올랐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연개소문의 성명이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로 나오는데, 그는 정변을 통해 영류왕과 이리거세사 등 180여 명을 죽였고, 같은 성씨인 도수류금류(都須流金流)를 대신(大臣)으로 삼았다고 한다. 연개소문이 같은 일족인 이리거세사도 죽인 것을 보면, 가문 내에서도 정치적 입장에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리거세사는 영류왕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연개소문과 반대 입장에 있었으며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비중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보인다. 『일본서기』 기록에서 왕과 함께 유일하게 성명이 거명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같은 일족이지만 왕과 모의하여 연개소문을 제거하고자 하였고, 이것이 사전에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였던 것이다. 이리거세사가 연개소문의 일가라는 점에서 당시 연개소문 가문의 세력이 컸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있지만(노태돈, 1999), 취임이 당연시되었던 연개소문이 아니라 제3의 인물이라는 점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이리거세사가 연태조의 후임으로 대대로에 오른 인물이라는 견해가 있다(이성제, 2021).
연개소문이 정변 후에 대신으로 삼았다는 도수류금류는 ‘이리도수류’, ‘이리금류’라는 두 사람으로 볼 여지도 있다. 이리거세사와 도수류금류가 뒤바뀐 채 서술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 바 있으나, 사료를 뒤바꿀 만한 명확한 근거는 없는 상태이다. 원래 기록대로 이해한다면 도수류금류는 연개소문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는 측근세력이라 할 수 있는데, 『일본서기』의 ‘같은 성씨’라는 표현은 혈연적 성씨를 뜻한 것이 아니라 같은 부(部)에 속한다는 의미로 보고 같은 부 출신의 인사를 대대로로 삼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노태돈, 1999). 여러 정황을 놓고 보면 이리거세사와 도수류금류 등은 연개소문보다 한 세대 위거나 동일 세대라고 볼 수 있다(정호섭, 2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