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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3. 연개소문 정권과 고당전쟁의 배경

3. 연개소문 정권과 고당전쟁의 배경

고구려사에서 있어서 대체로 왕권의 약화와 귀족 중심의 정치운영을 보이는 6세기 이후의 양상을 대체로 귀족연립정권으로 이해하고 있다(노태돈, 1976). 통일신라 후기사에 적용되는 귀족연립정권의 개념을 고구려에 적용한 이해방식은 큰 비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귀족연립정권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나 구체적 정치양상에 대한 검토는 크게 진전되지 않았다. 귀족연립정권의 안정적인 정치운영체제로 대대로-막리지체제를 보기도 하지만(임기환, 1992), 귀족세력과 왕권의 관계를 밝히지 못하는 일정한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귀족연립정권 자체의 존부나 권력기반에 대한 이해는 마지막 단계에 나타나는 연개소문의 정변과 그 정권에 대한 이해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그 이전 귀족연립정권의 성격을 역으로 추적하는 면도 있다(임기환, 2003). 특히 고구려 후기 정치권력의 핵심 관직인 대대로 혹은 연개소문이 역임하였다는 막리지의 성격이 주목되어 왔다.
막리지의 성격에 대한 논의는 크게 막리지와 대대로가 동일하다는 입장과 막리지는 태대형(太大兄)과 동일하다는 입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에서는 막리지가 곧 ‘대(大)’의 뜻을 가지는 ‘마카리(マカリ)’로서 대대로와 동일하다는 언어학적 이해를 보이거나(末松保和, 1954; 이홍직, 1971), 연개소문이 막리지로서 국사를 전제하여 정치적 위상이 대대로를 방불한 점, 연개소문 가계의 관직 기록에서 대대로와 막리지가 혼재되어 나타나는 점 등을 근거로 양자가 동일하다고 본다(請田正幸, 1979).
후자의 견해에서는 언어학적인 접근을 비판하며 연개소문 집권기에 이전까지 최고위직이었던 대대로를 공동화시키고 새로운 권력 집중의 중심체로 태대형을 개칭한 막리지를 활용한 것으로 이해하거나(武田幸男, 1978), 막리지를 국왕의 근시직으로서 중리제(中裏制)의 최고위직인 중리태대형으로 보고, 평원왕 이후 귀족연립적 운영을 견제하기 위한 국왕의 권력을 뒷받침하였다고 이해하기도 한다(이문기, 2000). 약간의 견해 차는 있지만, 이렇듯 막리지가 태대형이라는 입장이 일반적 이해이다(임기환, 1992; 李成市, 1993; 노태돈, 1999).
막리지의 성격에 대한 이해는 고구려 후기의 정치운영방식이나 권력구조에 대한 이해 차이를 드러내는데, 이는 연개소문 정권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해석에도 마찬가지다. 특히 입장 차가 보다 분명한 지점은 연개소문 정권의 성격인데, 연개소문이 이전 귀족연립정권의 정치운영체제인 대대로-막리지체제를 붕괴시키고 사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것이 이 시기 내분의 주요 원인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임기환, 1992). 이와 비슷하게 연개소문은 정변 이후 귀족연립체제를 부정하였고, 보장왕 역시 연개소문과 이해를 달리하면서 정권의 불안정성이 드러나게 되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전미희, 1994). 연개소문은 정변 전에는 대대로, 정변 후에는 막리지로 지위가 변화하였고 족제적 성격의 구세력을 타도하고 집권화를 지향하여 국가체제를 재편하려고 했다고 보기도 한다(李成市, 1993).
이와 다르게 보장왕 대의 권력구조를, 기본적으로는 귀족연립정권의 성격을 유지하면서 실제적인 집권자인 연개소문과 상징적인 존재로서의 보장왕이라는 이원집정제로 파악하기도 한다(김기흥, 1992). 연개소문의 지위에 대해서는 정변 이전에는 동부욕살, 정변 후에는 막리지였다가 대대로에 취임하여 귀족회의 중심 귀족연립정권의 정상적인 운영방식을 따른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노태돈, 1999).
그러나 연개소문 정권이 당대에 대내외적으로 돌발적인 인상을 주었던 점이나, 이때 고구려가 멸망하게 되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임기환, 2003)는 점에서, 그 이전의 귀족연립적 권력구조와 일정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정변을 통한 정권 장악과 이후 사적 권력의 강화를 통한 무단적이고 세습적인 집권 형태는 고구려 전체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었다. 특히 연개소문은 사적인 권력 기반을 강화시키고자 남생, 남산 등을 대형(大兄)이나 위두대형(位頭大兄) 등으로 임명하고 권력 세습 기반을 다져 나갔다. 아울러 태대대로(太大對盧), 태막리지(太莫離支),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 등의 새로운 관명을 통해 명실상부한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족들의 상당한 반발이 있었다고 예상할 수 있다. 어쩌면 정변을 통해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모든 귀족세력을 완전하게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겠다. 대표적인 인물로 안시성주를 들 수 있다. 이는 반대세력이었던 안시성주가 연개소문 정변에도 복종하지 않았고, 연개소문이 공격해도 함락하지 못하였다는 『구당서』 고려전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연개소문은 안시성주를 계속 성주로 인정하였고, 안시성주도 연개소문을 새로운 집권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연개소문이 정권을 장악한 642년에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와 신라에서도 정치적 변동이 일어났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 의자왕은 자신의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 제왕자(弟王子)의 아들 교기(翹岐)를 비롯하여 모매여자(母妹女子) 4명과 내좌평 기미(岐味) 등 자신을 반대하는 왕족과 귀족들을 섬으로 추방하면서 왕권을 강화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또 직접 신라를 침공하여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으며, 장군 윤충을 보내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대야성의 성주는 김춘추의 사위인 품석이었는데, 윤충이 항복하면 살려준다고 맹세하자 부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항복하였다. 하지만 윤충은 약속을 어기고 먼저 나간 병사들을 죽였고, 뒤늦게 윤충의 계략을 알게 된 품석은 처자식을 죽이고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경남 합천 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대야성은 백제와 신라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를 잃은 신라는 낙동강 서안 지역에 대한 지배력이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 이에 신라는 대야성전투에서 김춘추의 친족이 죽은 것에 대해 백제에게 설욕하기 위해 주변국과 동맹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동맹을 통해 전쟁의 양상이 대규모 국제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대야성전투를 삼국통일전쟁의 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노태돈, 2009). 김춘추는 대야성전투에서 자신의 딸인 고타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채지 못하였다고 한다.
김춘추는 백제에 대한 복수심으로 직접 고구려에 가서 청병하였다. 이와 함께 신라와 고구려가 전쟁을 중단하고 양국에 평화를 정착시킬 것을 제안하였다고 하겠다. 김춘추는 고구려로 떠나기 이전에 김유신과 만나 60일 이전에 돌아올 것을 기약하였고, 김유신은 60일 이내에 김춘추가 돌아오지 않을 경우 반드시 고구려를 침공할 것이라고 피로 맹세하였다고 한다. 평양에 도착한 김춘추는 보장왕을 만나 백제를 칠 군사를 요청하였지만, 보장왕은 그 대가로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죽령 서북의 땅에 대한 반환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보장왕의 요청에 김춘추는 국가의 토지는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거절하였고, 노한 보장왕은 김춘추를 가두었다.
이때 김춘추의 요청을 거절한 인물은 표면적으로는 보장왕으로 나오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만남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연개소문이 김춘추와 만나 논의했을 것으로 보이며, 결정 과정에서도 최고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연개소문의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김덕원, 2007; 김덕원, 2016). 연개소문은 유혈정변을 통해 집권하였기에 대외적 긴장 강화가 빠른 시일 내에 자신의 집권체제를 안정시키는 데 유효하다고 판단하였을 개연성이 있고, 삼국 관계에서 고구려가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는 방향으로 재정비하고자 하였을 것이다(노태돈, 2009).
별관에 갇힌 김춘추는 보장왕의 총애를 받는 선도해(先道解)에게 청포(靑布) 300보를 몰래 주었다. 그러자 선도해는 김춘추에게 간을 육지에 두고 왔다며 거북이를 속여 도망칠 수 있었던 토끼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이에 김춘추는 깨달은 바가 있어 보장왕에게 신라에 귀국하면 땅을 돌려주라고 왕에게 청하겠다고 거짓으로 약속하였고, 마침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고구려로 들어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보장왕은 김춘추를 신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김춘추는 국경에 이르자 바래다준 사람에게 이전의 약속은 죽음을 면하기 위한 거짓 약속이었음을 밝혔고, 결과적으로 신라와 고구려의 회담은 결렬되었다.
김춘추와의 만남은 연개소문으로서도 집권한 후에 맞이한 최초의 대외적인 문제였다. 연개소문은 정변을 통해서 집권하였기 때문에 대내적인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대외적으로 강경책을 추진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전성기였던 5~6세기의 국제적 위치를 재확립함으로써 독자적인 세력권을 유지하려고 하였다(노태돈, 1989; 노태돈 1998; 노태돈, 2002).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당과의 대결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후방지역에 위치한 남쪽의 신라를 적으로 돌린 것은 고구려의 국익에 타격을 입힌 것이었다(노태돈, 1989; 노태돈 1998; 김덕원, 2016).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고구려와의 외교가 실패하자 이듬해 9월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백제가 40여 성을 빼앗고 고구려와 연합하여 입조하는 길을 끊으려 한다”라며 구원을 청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의자왕이 고구려와 화친하고 신라의 당항성을 빼앗아 당에 조공하는 길을 막고자 하였으나 신라 선덕왕이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으므로 군대를 철수하였다고 한다.
대체로 『삼국사기』에 전하는 ‘여제연화(麗濟連和)’는 역사적 사실로 이해되고 있다(이병도, 1959; 이만열, 1978; 노중국, 1981; 김은숙, 2007). 하지만 신라의 일방적인 주장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부정론 내지는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은 신라에 한정되는 것으로 신라 견제가 주요한 내용이라는 제한적 연화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이호영, 1982; 이호영, 1997; 정동준, 2006; 박윤선, 2007; 윤성환, 2011; 정원주, 2013; 최호원, 2014; 김지영, 2016; 방용철, 2016; 김덕원, 2016). 하지만 당이 신라의 주장만을 믿었다고 보기도 어렵고, 실제로 사료상에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는 점을 볼 때 연화 자체가 사실이 아니라고 이해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다만 고구려와 백제의 연화에 관한 기록 자체가 2회에 걸쳐 신라를 공격하는 기사를 제외하고는 보이지 않고, 당이 고구려를 침공하였을 경우나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하였을 경우 고구려와 백제에서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는 점에서 제한적인 연화일 여지는 있다고 보인다(정호섭, 2023).
한편, 연개소문의 정변 소식을 들은 당 태종은 바로 고구려 정벌을 논의했지만 장손무기(長孫無忌)가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또 『자치통감』에 따르면 영류왕이 시해되었을 당시 박주자사(亳州刺史) 배행장(裴行莊)이 당 태종에게 주문을 올려서 고구려를 정벌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상사(喪事)를 이용하고 혼란한 것을 틈타서 남을 정벌할 수는 없으며, 아직 산동이 피폐하기 때문에 시기상조라 하였다. 643년 6월에는 태상승(太常丞) 등소(鄧素)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귀국해서는 회원진(懷遠鎭)에 수자리 서는 병사를 늘려 고구려를 압박할 것을 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태종은 멀리 있는 사람이 복종하지 않으면 문덕(文德)을 닦아서 그들이 오게 해야 하며, 100~200명의 수자리 서는 병사가 위엄을 보일 수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당 태종은 643년까지는 적극적인 고구려 정벌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당 태종이 후계자 책봉이라는 대내적인 문제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점도 참고된다. 하지만 당이 641년에 진대덕을 파견한 이후 전쟁 직전인 644년까지 다섯 차례나 사신을 고구려에 보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당 초기부터 640년까지 18년 동안 사신 파견이 네 차례에 불과했음을 고려하면 이는 매우 빈도가 높은 것이다. 물론 그중에는 영류왕에 대한 조문을 목적으로 파견한 사신과 보장왕을 책봉하는 사신도 포함되어 있지만, 진대덕과 마찬가지로 고구려 내부 정세에 대해 파악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역시 연개소문의 집권과 함께 대당강경책만을 구사한 것은 아니며,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였다. 643년 정월에는 당에 조공사를 보냈으며, 같은 해 3월에는 3교 중 도교만 흥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당에 표문을 올려 도교를 요청하였다. 이에 태종은 도사(道士) 숙달(叔達) 등 8명을 보내고 『도덕경』을 하사하였다. 정치사상의 측면에서 도교는 전제 내지 독재를 위한 이념으로 활용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연개소문이 독재정치를 위해 도교를 수용하였던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이내옥, 1983). 『삼국유사』에 의하면 영류왕 때 고구려에 오두미교(五斗米敎)가 크게 유행하였고, 당에서 이를 먼저 알고 도사를 파견할 만큼 고구려와 당과의 관계가 일시적으로 우호적인 분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 고조(高祖)가 도사와 천존상(天尊像)을 보내, 그가 와서 『도덕경』을 강의하니 왕이 직접 들었고, 이후 당에 사신을 보내어 불교와 도교 배우기를 청하였다는 것이다. 보장왕이 즉위년에 연개소문의 요청으로 3교를 함께 진흥시키고자 도교를 수용하였다는 것인데, 특히 연개소문은 도교를 통해 불교 교단을 통제하려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반대하였던 보덕은 고구려의 적극적인 도교 진흥책에 대한 반발 차원에서 평양성으로부터 대보산의 영탑사와 반룡사 등을 전전하였고, 반룡사에 주석하고 있으면서 보장왕에게 도교를 진흥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여러 차례 건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불교정책이 변화되지 않자 650년 그는 고구려를 떠나 열반사상이 유행하던 백제로 이주하게 되었고, 완산 고대산에 경복사를 창건하였다. 이는 도교 진흥책에 대한 고구려 불교계의 반발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정선여, 2007; 정호섭, 2018). 고구려는 644년 정월에도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는데, 이러한 사신 파견은 당의 내부 정세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왜와도 외교를 재개하였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43년 6월에 대재부에서 역마를 달려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내조하였다고 알렸는데, 고구려가 기해년(639년)부터 조공하지 않다가 금년에야 조공한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는 백제와 더불어 그 동맹국에 가까운 왜를 통해 신라를 압박하여 남방의 문제를 해결하고, 당과의 일전에 집중할 여건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에서 고구려·백제·왜의 연합과 당·신라의 연합이라는 대결구도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신라는 643년 9월과 11월에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에 대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에서 보낸 사신은 대략 644년 정월경에 당에 도착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당 태종은 신라 사신의 요청에 대해 선덕왕 대신 자신의 종친을 신라의 왕으로 삼는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세 가지 계책을 내놓았다. 이는 신라 입장에서 굴욕적인 제안이었기 때문에 사신이 대답하지 못하자 당 태종은 그가 군사를 청할 만한 인재가 아니라며 탄식하였다고 한다.
이어 644년 당 태종은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을 고구려와 백제에 사신으로 보내 다시 신라를 공격한다면 내년에 병력을 출동시켜 공격할 것이라 하였다. 이에 의자왕은 표문을 올려 사죄하였다. 그런데 상리현장이 고구려의 국경에 들어왔을 때 연개소문은 신라를 공격하여 두 성을 격파한 상태였다. 보장왕의 명에 따라 고구려로 돌아온 연개소문은 수와의 전쟁 당시 신라가 빼앗은 고구려의 땅 500리를 돌려주지 않으면 전쟁을 그만둘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상리현장은 요동의 여러 성이 본래 중국의 군현이나 중국은 이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고 답하였으나, 연개소문은 끝내 듣지 않았다.
상리현장이 돌아가 그 사실을 자세히 보고하니, 당 태종은 연개소문이 영류왕과 대신들을 죽이고 백성을 잔인하게 학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명령을 어겼으므로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전쟁의 명분을 천명하였다. 당 태종은 고구려 정벌 의지를 어느 정도 굳힌 상태에서 다시 사신 장엄(蔣儼)을 보내 조서를 내렸으나 연개소문은 끝내 조서를 받지 않고 장엄을 위협하였으며, 장엄이 태도를 굽히지 않자 굴실에 가두었다.
당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개시하기 전, 여러 방면에서 고구려에 대한 정보 수집에 주력했다. 644년 7월에는 영주도독 장검(張儉)으로 하여금 유주(幽州)·영주(營州) 도독의 병력과 거란·해(奚)·말갈을 거느리고 먼저 요동을 공격하여 그 형세를 보게 하였다. 장검에게서 보고가 없자 강하군왕 이도종(李道宗)이 자청해 별도로 요동 정세를 정탐하기도 했다. 당시 장검은 요서에 이르러 하천이 범람하여 오래도록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당 태종은 장검이 두려워한다고 여겨 불러서 돌아오게 하였다. 장검은 태종을 만나 수초의 좋고 나쁨, 산천의 험하고 쉬움, 그리고 오래도록 나아가지 못한 상황을 진술하였다. 그러자 태종은 기뻐하여 행군총관에 임명하고 제번의 기병을 거느리게 하여 6군의 선봉으로 삼았다고 한다.
장검이 도독으로 있었던 영주도독부는 고구려와 접경하고 있는 최전방 지역으로서 고구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였다는 소식을 당 태종에게 보고한 것도 장검이었다. 645년 전쟁 개시 직전에는 당에서 고구려의 척후를 잡은 적이 있었는데, 연개소문이 장차 요동에 이를 것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에 당 태종은 장검에게 조서를 내려 신성으로 가서 요격하라고 하였으나, 연개소문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장검은 건안성으로 목표를 바꾸기도 했다.
당 태종은 수의 고구려 원정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관료들의 의견을 듣기도 했다. 당의 645년 고구려 원정에서 당군의 군량 수송 책임을 맡은 위정(韋挺)은 수 때 영주총관을 지낸 위충(韋沖)의 아들로 아버지가 고구려 원정의 경험을 기록한 글을 보고해 태종이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644년 7월 태종은 위정을 궤수사(饋輸使)로 삼아, 하북의 여러 주가 모두 위정의 명령을 받게 하고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위정은 후에 조거(漕渠)를 살피지 않아서 쌀을 운반하는 600여 척이 노사대(盧思臺) 옆에 이르러 나아갈 수 없었던 일에 연좌되어, 낙양으로 압송되어 제명된다. 11월에는 이미 치사한 전 의주자사 정천숙(鄭天璹)을 행재소로 불러 의견을 묻기도 했다. 그가 일찍이 수 양제를 따라 고구려 원정에 참전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천숙은 요동으로 가는 길은 멀어서 군량의 운반이 어려우며, 고구려는 성을 잘 지켜서 공격해도 빨리 함락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당 태종은 지금은 수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답하면서 고구려 침공을 계획하였다.
연개소문은 당을 달래기 위해 644년 9월에 백금을 바쳤다. 저수량(褚遂良)은 태종에게 신하 노릇 하지 못한 자의 뇌물을 받고 허물하지 않는다면 그를 정벌할 수 없다며 백금을 받지 말라고 하였고, 태종은 저수량의 말에 따랐다. 고구려 사신이 또 관리 50명을 들여보내 숙위할 것을 청하자, 태종은 영류왕을 섬겨 관작을 얻은 관리들이 연개소문에게 복수하지 않는 죄가 막대하다며 사신을 감옥에 가두었다.
644년에 마침내 당 태종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태종 정관 18년 12월에 조서를 내렸다. 조서의 내용은 대체로 연개소문이 왕을 시해한 것과 신라를 침입한 상황에서 고통받는 백성을 구하자는 데 명분을 두고 있다. 태종은 낙양으로 떠나기 전에 장안의 노인들을 불러 “요동은 예전에 중국 땅이었고 연개소문이 그 임금을 죽였으므로, 몸소 가서 다스리려고 한다. 그래서 여러 어른들과 약속하니 아들이나 손자로서 나를 따라가는 자는 내가 잘 위무할 테니 근심할 것 없다”라며 안심시켰다. 바로 전 왕조인 수가 고구려와의 전쟁 후에 멸망하였기 때문에 고구려와의 전쟁은 당의 백성들에게 큰 상처로 남아있었을 것이므로 노인들을 불러 위로한 것은 민심을 다스리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다.
태종은 낙양으로 옮겨 전쟁 준비를 독려했다. 그는 당의 군사뿐만 아니라 주변국인 신라, 백제, 해, 거란의 군사를 불러 길을 나누어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구했다. 645년 정월에는 백제의 태자 부여강신(扶餘康信)이 당에 와서 조공하였다. 이때 태종이 백제에 내린 조서를 살펴보면, 고구려와 백제가 늘 군사를 일으켜 당의 뜻을 따르지 않고 함께 신라를 침입한다는 내용이 있어 고구려와 백제의 연화를 의심하기도 하였으나, 의자왕의 표문과 부여강신의 말을 듣고 백제에 대한 의심을 풀겠다는 내용이 있다. 또 부여강신이 군사를 일으켜 당과 함께 고구려를 정벌하겠다는 의자왕의 뜻을 전하자 태종이 매우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백제가 당을 돕겠다는 표문을 보냈다고 하지만, 실제로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백제가 수와의 전쟁에서와 같이 실제로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양단책으로 일관하였을 개연성이 높다.
『구당서』에 따르면 태종은 신라에게도 군사와 말을 모집하여 당 군대에 응접하라고 하였다. 이에 신라는 대신을 파견하여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의 남쪽으로 들어가 수구성을 쳐서 항복받았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같은 해에 신라가 군사 3만으로 당을 도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때 백제는 오히려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신라 서쪽의 일곱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당 태종은 645년 2월에 낙양 궁궐을 떠나서 고구려로 직접 친정하였다. 태종은 고구려로 떠나며 황태자에게 정주(定州)에 남아 감국(監國)하도록 하였으며, 6군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향하였다. 11월에는 형부상서 장량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여 남부지역에서 징발한 병사 4만 명, 수도 장안과 낙양에서 모병한 3,000명, 전함 500여 척을 동원해 해로로 평양으로 진군하게 하였다. 그리고 병부상서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보·기병 6만 명과 난주·하주의 유목민 항호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진군하게 하였다. 마침내 고구려와 당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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