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당의 고구려 원정 선포와 원정군의 규모
1. 당의 고구려 원정 선포와 원정군의 규모
1) 전쟁 준비와 원정 선포
당은 640년 5월에 서역의 고창(高昌)국을 정복하고, 641년에는 새 강자로 흥기하던 설연타(薛延陀)마저 대파하여 서역 일대를 안정시켰다. 이렇게 서방에서 후환을 없앤 이후에 당은 동방의 고구려로 눈길을 돌렸다. 640년 2월에 고구려 태자 환권(桓權)이 외교사절로 온 것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641년 7월에 병부 소속인 직방낭중(職方郎中) 진대덕(陳大德)을 고구려에 사절로 보냈다. 직방낭중의 직무는 국내외의 군사 등 정보를 얻어 지도나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이런 직무를 갖는 인물을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냈다는 것은 향후 고구려를 원정할 때 필요한 여러 지리정보 등을 얻으려는 의도임이 분명하다.
그 후에도 전쟁 직전인 644년까지 4년 동안 당은 네 차례 더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당 초기인 622~640년까지 18년 동안 사신 파견이 네 차례에 불과하였음과 비교하면 빈도가 매우 높다. 더욱이 양국 사이에 적대적인 분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때의 사신 파견이 양국의 교섭보다는 고구려 내부 정세를 파악하려는 데 주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당 태종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고구려를 원정할 의지를 굳히고 있었지만, 이런 태종의 뜻이 당시 당의 조정 내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고구려 원정 자체를 반대하는 중신들이 적지 않았으며, 원정에 찬성하더라도 태종의 친정(親征)에 반대하는 입장이 대부분이었다. 『자치통감』 권197 태종 정관(貞觀) 18년 2월 을사(乙巳)조에 의하면, 고구려 원정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644년 2월에 사신 상리현장(相里玄奬)이 고구려를 다녀와서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는 당의 요구를 연개소문이 거절하였다고 보고한 뒤부터였다. 상리현장의 보고 직후 어전회의에서 태종은 고구려를 정벌하는 데 직접 나서겠다는 뜻을 표명하였다. 이에 간의대부 저수량(褚遂良)은 신중론을 폈고, 병부상서 이적(李勣)은 태종의 전쟁 의지를 적극 지지했다.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으로 마음을 굳히자, 이를 바꾸기 힘들다고 판단한 신하들은 친정만큼은 만류했지만, 태종은 듣지 않았다. 심지어 태종은 조정의 결정을 자신의 의지대로 하기 위해 대신들의 구성을 바꾸기도 했다. 즉 태종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모색하였던 정관 17년 이후 재상과 같은 자격으로 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관료를 확대하여 자신의 심복들을 참여시키고 장하어전회의(杖下御前會議)에서 고구려 원정을 결정했다고 추정된다(방향숙, 2008).
원정 반대세력을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당 태종은 전쟁 준비에 주력했다. 먼저 전쟁 실행을 위한 정보 수집에 관심을 기울였다. 644년 7월에 영주도독 장검(張儉)으로 하여금 번병들을 이끌고 요동으로 먼저 진격하여 교통로 등 여러 형세를 정탐하도록 했다. 영주도독부는 고구려와 접경하고 있는 최전방 지역으로서 고구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입수한 곳도 영주도독부였다(방향숙, 2008). 645년 전쟁 개시 전에는 연개소문이 요동에 온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장검이 연개소문과 맞서기 위해 신성(新城)으로 출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연 개소문이 나타나지 않자 목표를 건안성(建安城)으로 바꾸기도 했다.
한편, 당 태종은 수의 고구려 원정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관료들의 의견을 듣기도 했다. 645년 원정에서 당군의 군량 수송 책임을 맡은 위정(韋挺)은 수 왕조 때에 영주총관을 지낸 위충(韋沖)의 아들로서 아버지가 고구려 원정의 경험을 기록한 글을 보고하여 태종이 매우 기뻐하였다고 한다. 또 수 양제의 고구려 원정에 참여했던 정천숙(鄭天璹, 鄭元璹)은 644년 11월에 당 태종에게 고구려 정벌이 어려운 이유로 거리가 멀어서 군량 수송에 어려움이 있고, 또 고구려가 성곽을 잘 지켜 공격하기 어려움을 직언하기도 했다.
644년 7월에는 홍주(洪州)·요주(饒州)·강주(江州) 세 주에 명령을 내려 배 400척을 만들어 군량을 싣게 하고, 대리경(大理卿) 위정을 궤수사(饋輸使)로 삼아 하북의 여러 주에게 모두 위정의 명령을 받게 하고, 또 소경(少卿) 소예(蕭銳)에게 하남 여러 주의 식량을 싣고 바다로 가게 하였다. 그런데 8월 8일에 소예가 상주하기를 “바다 가운데에 옛 대인성(大人城)이 있는데, 서쪽으로 황현(黃縣)과 22리, 북으로 고구려와 470리에 다다르니, 이곳에 군량을 쌓아두면 더욱 편리할 것”이라고 제안하여, 하남도에서 군량을 옮겨 이곳에 모두 쌓아두게 하였다.
664년 10월, 마침내 당 태종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미 7월에 홍주·요주·강주 세 주에 배 400척을 만들어 군량을 싣게 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영주도독 장검에게 요동을 공략하여 형세를 살펴보게 명령하였으니, 사실상 전쟁은 이미 시작된 셈이었다. 그러면 『자치통감』, 『책부원구』에 의거하여 당 태종이 고구려로 출정하기까지 과정을 살펴보자.
태종은 국정을 태자에게 맡기고 낙양(洛陽)으로 옮겨 전쟁 준비를 독려하고자 했다. 태종은 장안(長安)에서 낙양으로 떠나기 전 10월 계묘일(3일)에 장안의 노인들을 불러 “요동은 예전에 중국 땅이었고 막리지가 그 임금을 죽였으므로, 짐이 몸소 가서 다스리려고 한다. 그래서 여러 어른들과 약속하니 아들이나 손자로서 나를 따라가는 자는 내가 잘 위무할 테니 근심할 것 없다”라며 안심시켰다고 한다. 수 양제가 고구려 원정에서 실패하여 결국 왕조마저 무너져 버린 것을 지켜본 어두운 기억은 당의 조정 신료와 일반 백성을 두렵게 했다. 태종은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철저하게 전쟁 준비를 했다. 그리고 방현령(房玄齡)에게 수도 장안을 지키라고 명령하고 10월 갑인일(14일)에 낙양을 향해 출발하여, 11월 임신일(2일)에 낙양에 도착하였다. 그 달 갑오일(24일)에 군대 편제 등을 담은 출정 조서를 내렸다.
645년 정월에는 백제와 신라의 사신을 통해 각각 고구려 원정에 대해 지원군 파견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냈다. 이미 당 태종은 644년에 귀국하는 신라 사신 김다수(金多遂) 편으로 선덕여왕에게 국서를 보내어 신라군이 고구려와의 전쟁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 당의 요청에 대해 신라 조정에서 논란이 계속되었는지 별다른 소식이 없자, 태종은 645년 2월에 다시 신라에 국서를 보내어 당군이 4월 상순에 고구려 경내에 진공할 것인데, 신라군도 당의 수군대총관 장량(張亮)의 지휘를 받을 것이며, 장량의 주둔처에 신라의 군관을 파견하여 군사 기일을 합의하라고 요구하였다(노태돈, 2008). 당시 신라는 642년 김춘추의 평양 방문에서 고구려와의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고, 백제가 신라에 대한 공세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부득이 당과의 동맹에 힘을 쏟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의 요구에 따라 참전하기 위해서는 백제의 공격에 대한 군사적 방어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섣불리 참전을 결정하기 어려웠다(최희준, 2022). 결국 신라는 참전을 결정하고 고구려 남쪽 국경으로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태종은 고구려 남쪽에서 신라군을 동원함으로써 고구려 군사력의 분산을 꾀했던 것이다.
그런데 당 태종이 백제왕에게 보내는 국서에는 신라에 보내는 국서와 달리 파병 건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음을 보면, 당시 당이 백제의 입장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신라군을 포함하여 거란(契丹), 해(奚)와 같은 주변 유목민족 등을 대상으로 한 국제적인 동원전략도 수 양제 때에는 전혀 시도하지 않았던 점이다.
2월 경술일(12일)에 당 태종은 낙양을 떠나서 3월 9일 정주(定州)에 이르렀고, 황태자로 하여금 정주에서 국사를 통괄하게 하고, 자신은 그 달 24일에 정주를 출발하여 요동으로 향했다.
2) 당 원정군의 규모
645년에 당 태종이 고구려를 원정하기 위한 군대의 편성이나 군사력의 규모에 대한 중국 역사서의 기록은 불분명하고,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이에 따라 당 원정군의 규모를 추정하는 견해도 다양하다. 따라서 645년 당군의 규모와 관련된 중국 측 역사기록은 다각도로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일단 역사서에 나와 있는 몇몇 기록을 종합하여 추정해보자. 『신당서』, 『자치통감』 등에 의하면 645년 1월, 당 태종은 육군 총사령관 이적으로 하여금 보·기병 6만 및 난주(蘭州)와 하주(河州)의 항복한 호족(胡族) 군사들을 거느리고 유주(幽州)에서 요동으로 진격하도록 하고, 수군 총사령관 장량으로 하여금 500여 척의 전함과 4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산동반도 동래(東萊)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을 향하게 명령하였고, 3월에는 태종 자신도 정주를 출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 태종이 직접 거느린 본대의 병력 수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없지만, 한 가지 유추가 가능한 단서는 태종의 본대에서 장손무기가 26명의 총관을 통령하였다는 기록이다. 『신당서』 태종본기에 의하면 이적 휘하에 행군총관(行軍摠管)이 16명(혹은 14명)에 군사가 6만 명이었다고 하였다. 행군총관은 일종의 단위부대 지휘관에 해당하는데, 그렇다면 총관 1명이 4,000명 정도의 병력을 거느렸다고 볼 수 있다. 또 4만여 명 군사를 거느린 수군 사령관 장량의 휘하에는 10명의 총관이 있었는데, 이 역시 총관 1명당 4,000명의 병력 규모가 된다. 따라서 이들 사례를 적용하여 계산하면, 당 태종의 본대는 26명의 총관이니 대략 10만 명이 넘는 병력 수가 된다(노태돈, 2008). 여기에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겠지만, 태종의 친위군을 따로 상정하면 10만이 넘는 규모의 군사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신당서』 고려전에 장손무기가 태종의 시종이 10명에 불과 한점에 대해 천자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고 간언하자, 태종이 “군사들이 10만 명이나 집을 떠나 요하를 건너왔는데” 운운하는 기사가 있는데, 이 10만 병력이 곧 태종이 거느린 본대를 가리키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으로 장량이 거느린 수군의 경우 병력 수가 4만 명이라는 기록이 다수이고 신빙성이 높지만, 『당회요(唐會要)』 정관 19년 12월조, 『책부원구』 제왕부 친정조, 『신당서』 고려전 등에서는 7만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644년 편성에서는 4만 명이었다가 645년 편성에서 7만 명으로 증가했다고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이민수, 2018). 애초에 수군에게 부과된 임무는 육군이 요동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평양으로 직공하는 전략이었고, 처음에는 이도종(李道宗)을 수군 사령관으로 삼았다. 그런데 막상 당 태종이 원정길에 나서면서 부대를 개편하여 이도종을 부대총관으로 삼아 행군대총관인 이적과 더불어 육군을 통솔케 하고, 수군의 행군대총관으로 장량을 임명한 것이다. 이러한 지휘관의 교체는 수군의 공격 목표를 달리하는 전략 변화에 따른 결과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4만 혹은 7만이라는 수군 병력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은 이와 같은 수군의 전략 변화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4만 명이든 7만 명이든 이 정도의 병력으로 평양 공격이 가능하다고 태종이나 당군의 수뇌부가 판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평양을 직공하는 수군의 목적은 고구려 중앙군 병력이 요동 지역으로 지원을 나올 수 없게끔 압록강 이남이나 평양 일대에 묶어두려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전략은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수군 자체를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 원정에서는 육군과 같은 전선에서 수군을 운용하기로 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 결과 장량의 수군은 고구려 비사성(卑沙城) 공격을 1차 목표로 하였다.
이렇게 보면 이적의 육군 선발대가 6만 명, 장량의 수군이 4만 명, 당 태종이 거느린 본대가 10여만 명 등 도합 20여만 명의 병력이 된다. 그리고 영주도독 장검이 영주도독부 소속의 군사와 거란, 해 등 유목민의 군대를 별도로 거느렸다. 이 장검의 군대를 이적의 선발대 6만 병력의 일부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645년 전쟁 이전부터 장검의 동태를 보면, 상당수의 병력을 따로 거느린 양상을 볼 수 있다.
장검은 644년에 영주(營州: 조양 일대)와 유주의 군사 및 거란, 해, 말갈 군사를 이끌고 먼저 요하 방면으로 진군하였다가 요하가 범람하면서 멈춘 적이 있다. 또 645년 전쟁 직전에도 연개소문이 요동에 온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연개소문과 겨루기 위해 신성 쪽으로 진군하려다가, 연개소문이 나타나지 않자 경로를 바꾸어 건안성으로 공격로를 바꾸었던 것이다. 이처럼 장검이 거란이나 해의 군사를 포함한 독자적인 군대를 통솔하여 이적의 군대와는 별도의 진공작전을 수행하고 있음이 유의된다. 다만 장검이 대총관이 아니었음을 고려하면 이적의 군대 6만 명, 장량의 군대 4만 명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독자적으로 고구려 건안성 공격이 가능한 병력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뒤 안시성전투를 벌이기 전에 당군의 수뇌부가 작전회의를 하는 과정에서 “신성과 건안성의 군사가 10만 명”이라는 언급이 나온다. 다소 과장되었다고 하더라고 건안성의 군사 규모 역시 그리 적지 않았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요동성의 군사가 2만 명 이상이었음을 고려하면 건안성 역시 최소한 2만 명 정도의 군사력을 갖고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렇다면 2만 명이 지키는 건안성을 공격하려는 장검의 군대 역시 그 이상을 훨씬 넘었으리라 능히 짐작할 수 있다(임기환, 2022).
이렇게 보면 645년 전쟁에서 당 태종이 동원한 병력은 대략 25만 명 전후의 규모였음을 추정할 수 있겠다. 수 양제가 2차 원정에서 요동성을 공격할 때 동원한 병력이 30만 명 정도라는 점과 비교하면 그리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이다. 그런데 수 양제의 2차 원정 때에는 평양 공격을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고 요동성 공격 자체가 목표였던 듯하다. 그런데 645년에 당 태종은 최종적으로는 평양 공격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때 동원된 당군의 25만 명 내외의 군사는 양제가 동원한 군사보다는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태종을 비롯한 당군의 지휘부는 수 왕조 멸망 이후 할거하던 중국 대륙의 군웅을 군사적으로 제압한 주역들이며, 중국 통일 이후에는 주변의 돌궐이나 설연타, 고창 등을 모두 굴복시키며 승승장구한 지휘관들이다. 이들의 전투 경험이나 능력은 수 양제의 군대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물론 앞서의 추정과 다른 연구도 있다. 우선 앞서 총관의 수에 따른 병력 수 추정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면서, 645년 고구려 원정군의 행군총관 구성은 종1품부터 정4품하까지 다양하기 때문에 관품의 차이에 따라 행군총관 1명당 일괄적으로 동일한 규모의 병력이 아니라고 전제한다. 그리고 644년 원정군 편성 때보다 실제 645년 출정 시에 병력 규모가 증가하여 이적이 거느린 군사가 10만 명, 장량의 수군이 7만 명, 태종의 본대가 40만 명, 도합 57만 명의 병력 규모로 파악하고 있다(이민수, 2018). 이러한 주장은 당 원정군의 병력 규모에 대해 사서마다 다른 기록을 남기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 비판의 방식이 달라지면서 나타난 결과이다.
또한 중국 사서에 보이는 당군의 규모에 대한 기록이 사서마다 다르고 불완전한 점을 지적하면서, 새로운 방법론으로 전쟁 기간 동안 당군의 군량 소비량으로 군사의 규모를 추정한 연구가 있다. 이 연구에 의하면 당군이 개모성과 요동성 등으로부터 회득한 군량의 수를 통해 대략 개모성 함락 때부터 요동성에서 퇴각할 때까지 141일 동안 당의 군사들이 소비한 군량의 양을 가정하여 전체 군사의 규모를 추산하였다. 물론 당군이 고구려로부터 얻은 군량의 양은 기록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그 결과 안시성 일대의 당군이 33만 3,334명(『신당서』 기록에 의거) 혹은 35만 2,000명(『책부원구』 기록에 의거)이고, 여기에 장량이 지휘한 수군 7만 명을 포함하여 40만 3,000명 혹은 42만 2,000명으로 추정하였다(최진열, 2022). 이러한 연구는 방법의 타당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당군이 후퇴할 때에 요주, 개주, 암주 세 주에서 이주시킨 호구가 7만 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의 식량 소비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연구결과에 의문이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