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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고구려-당 전쟁의 개시와 전개

2. 고구려-당 전쟁의 개시와 전개

1) 당군의 첫 공격
당 태종은 645년 1월, 육군 총사령관 이적과 수군 총사령관 장량에게 출정을 명하고, 3월에는 자신도 정주를 출발하였다. 2월에 유주에서 결집하여 요동으로 향한 당군은 요하선에 배치된 고구려의 방어망을 뚫기 위해 공격선을 여러 갈래로 나누었다.
당시 요서에서 요하를 건너 요동으로 이어지는 길은 대체로 세 길이 있었는데, 그중 요서 회원진(懷遠鎭)에서 요하를 건너 고구려 요동성으로 이어지는 길이 주된 교통로였다. 이 길은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이용한 교통로로서 요하 중로(中路)이다. 이보다 북쪽으로는 통정진(通定鎭)에서 요하를 건너 고구려 신성(新城)으로 향하는 요하 북로(北路)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요하 하구를 건너 고구려 건안성으로 향하는 요하 남로(南路)가 있다. 당시 당군은 이 세 교통로를 모두 이용하였다. 당군의 진격 및 고구려군과의 전투 양상에 대해서는 주로『자치통감』및 『책부원구』의 관련 기사에 의거하여 정리하였다.
당 육군의 선발대를 지휘하는 대총관 이적과 부총관 이도종은 고구려의 요하 방어망을 돌파하기 위하여 일부 군대를 통상 사용하는 교통로인 회원진에서 요하를 건너는 것처럼 위장하고, 실제로는 주력 군대를 북으로 돌려 통정진에서 요하를 건넜다. 이때가 4월 1일이었다. 그리고 신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현도성(玄菟城)을 공격하였다.
한편, 영주도독 장검은 남로를 이용하여 요하를 건너 건안성을 공격하였다. 이적군의 이동로와 달리 장검군의 이동로는 다소 불분명한데, 요택(遼澤)의 서쪽 가장자리를 따라 남하하여 현재 반금시(盤錦市) 서우고성촌(西牛古城村)에서 요하를 건너고 다시 남하하여 대석교시(大石橋市) 기구진(旗口鎭), 고감진(高坎鎭)을 거쳐 어니하(淤泥河)를 건너 남진하여 건안성에 이른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崔豔茹, 2012).
그리고 장량이 거느린 수군도 평양을 직공하지 않고, 요동반도 남단에 자리잡은 비사성을 공격하였다. 정작 주 교통로인 요하 중로는 비워 놓았는데, 나중에 당 태종이 본군을 이끌고 이 길을 이용하여 요동성으로 진군하였다.
이렇게 당군은 공격로부터 수 양제의 침공 때와 전혀 다른 전략을 구사하였다. 사실 양제는 오직 요동성을 직공하는 길만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요하를 건너는 과정에서 시일이 지체되고 병력상으로도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또한 주력을 요동성 공략에만 집중하는 바람에 신성 등 다른 요충성들이 외곽에서 요동성을 지원하면서 결과적으로 요동성 공격에 실패하였던 것이다.주 001
각주 001)
645년 전쟁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주요 성 위치는, 신성은 요령성(遼寧省) 무순(撫順)시 고이산성(高爾山城), 현도성은 요령성 무순시 노동공원산성(勞動公園山城), 건안성은 요령성 개주(蓋州)시 고려성산산성(高麗城山山城), 요동성은 요령성 요양(遼陽)시, 비사성은 요령성 금현(金縣) 대흑산산성(大黑山山城), 개모성은 요령성 심양(瀋陽)시 탑산산성(塔山山城), 백암성은 요령성 등탑(燈塔)현 연주성(燕州城), 안시성은 요령성 해성(海城)시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 오골성은 요령성 봉성(鳳城)시 봉황산산성(鳳凰山山城)으로 비정하는 것이 통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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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당군은 수 양제와는 달리 요하 중로는 비워 놓고 북로를 이용하여 신성을 제압하고 남로를 이용하여 건안성을 제압함으로써 일단 주변 성들이 지원할 수 있는 후환을 없앤 후에 요동성을 공격하는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수 양제 때 정벌의 실패를 거울 삼아 주도면밀하게 짠 것이다. 사실 이런 당의 전략에 의해 첫 전투에서 신성과 건안성이 제압당한다면 고구려의 방어망이 매우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당군의 공세 과정에서 고구려가 당군의 침공 가능성을 의식하고 631년부터 16년에 걸쳐 주요한 방어시설로 축조한 천리장성의 존재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천리장성의 위치와 성격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대체로 세 견해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서부 국경지대에 배치되어 있던 산성들을 연결하는 방어벽을 세웠다는 ‘산성연결방어선설’, 국경지대 산성들의 전면에 위치한 요하 동안의 평원지대에 장벽을 세웠다는 ‘평원토벽설’, 장벽을 별도로 쌓은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산성들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마치 선상의 방어선과 같은 방어체제를 구축했다는 ‘산성방어강화설’ 등이다(이성제, 2023).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8장 3절을 참고하기 바란다.
여기서는 그중 이적군이 요하를 건너 현도성을 공격한 기사에 주목하여 산성방어강화설을 주장한 견해를 살펴보자. 이 주장은 『책부원구』권117 제왕부(帝王部) 친정(親征) 2 정관 19년 4월 무술삭(戊戌朔)조에 “이적이 군대를 이끌고 통정진으로부터 요하를 건너 현도성에 이르는 경로상의 봉수(烽燧)와 성보(城堡)를 모두 함락시켰다”라는 기사에 주목하고 있다. 즉 천리장성의 축조는 기존의 산성방어체제를 강화하면 서 봉수나 성보 등의 축조 등이 포함된다고 본 것이다(이성제, 2023). 어쨌든 이적군이 요하를 도하하고 고구려 방어망의 최전선 중 하나인 현도성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천리장성의 존재는 나타나지 않는다.
4월 1일 요하를 건넌 이적과 이도종의 군대는 현도성을 공략한 뒤, 4월 5일에 먼저 부총관인 이도종이 병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신성에 이르렀는데, 신성의 고구려군은 나가 싸우지 않고 굳건하게 성을 지키기만 하였다. 신성은 고구려 서북의 요충지로서, 고구려 방어망에 있어서 그 위상이 요동성에 못지않았다.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서 현도성, 신성 전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이적이 본군을 모두 거느리고 신성을 공격하는 흔적은 사료상 보이지 않는다.
4월 15일에 이적과 이도종은 군대를 남으로 돌려 고구려 개모성(蓋牟城)을 공격하였다. 개모성은 신성에서 요동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 중간에 있는 중형급 성곽이었다. 당군은 개모성 공략에 총력을 기울였다. 당군은 원정하기 전부터 이미 갖가지 공성도구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밤낮으로 포차(砲車)를 쏘아 돌이 비처럼 성안으로 떨어지고, 운제(雲梯), 충차(衝車)가 번갈아 공격에 나섰다. 결국 10여 일 만인 26일에 개모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당군은 2만여 명의 군사와 주민을 포로로 삼고 군량 10여만 석을 얻었다. 그런데 개모성에서 주민을 포함하여 포로가 2만 명이라고 하였으니 그중 군사의 수는 수천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6만 명에 가까운 당군이 개모성 공략에 10여 일이 걸린 셈이다. 게다가 당군도 행군총관 강행본(姜行本, 姜確)이 전사하는 손실을 입었다.주 002
각주 002)
『구당서』 강행본전(姜行本傳)에 의하면, 정관 17년(643년)에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하자 강행본은 아직 군사를 움직일 수 없다고 간언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고, 강행본은 개모성에 이르러 화살을 맞아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방향숙(2008)과 정원주(2020)는 이 기사의 개모성 공격을 643년의 일로 파악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자치통감』 권197, 당기(唐紀)13 태종(太宗) 정관 18년 11월 경자(庚子)일(30일) 기사에 행군총관 강행본이 등장하고 있으며, 『책부원구』 권425 장수부(將帥部)86 사사(死事) 강확(姜確), 『구당서』 권59 열전9 강행본전에 의하면 645년 개모성전투에서 강확, 즉 강행본이 전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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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군이 비록 승리를 거두었지만 개모성 공방전부터 고구려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당군의 행보가 그리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당시 당군은 앞서 신성을 쉽게 공략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이적 군대의 행로를 보면, 애초에 신성 공략 자체를 목표로 삼았던 것 같지는 않다. 4월 1일에 요하를 건너 현도성을 공략한 뒤 신성 공격에 나섰고, 15일에 개모성을 공격하였으니, 신성을 공격하였다고 해도 그 기간은 10여 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적이 거느린 당군 선발대의 목표는 신성이 아니라 요동성이었다. 5월 초에는 당 태종이 본군을 거느리고 요동성에 도착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 이전에 요동성을 고립시키고 태종의 본군이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주변을 확보하고, 요동성 못지않은 중진인 신성으로부터 구원군을 차단하는 것이 애초 목적이었던 듯하다.
그래서 신성에서 요동성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는 개모성 공략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이적은 개모성을 함락시킨 후 위정에게 지키게 하여 신성의 고구려군이 배후를 공격해오지 못하도록 방어케 하였다. 역사서에 이후 전황이 기록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고구려군의 공격에 대해 위정이 매우 두려워하며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였다고 한 기록을 보면 신성에서 출진한 고구려군이 공세가 강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4월 5일 이도종이 신성을 공격할 무렵, 영주도독 장검은 또 다른 군사를 거느리고 남로를 통해 요하를 건너 고구려 건안성을 공격하였다. 첫 전투에서 장검군에게 고구려 수천 군사가 죽는 패배를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어쨌든 고구려군은 건안성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다. 사실 장검의 군대 역시 건안성에 대해 본격적인 공세를 펼치지는 못한 듯하다. 장검 군대의 목적도 건안성의 고구려군이 요동성을 지원하는 것을 막는 데 있었다고 추정한다.
한편, 장량이 이끄는 수군은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요동반도 끝단의 비사성을 공격하였다. 비사성은 사면이 절벽이어서 오직 서문으로만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러한 문헌상의 기록은 현재 비사성으로 비정되는 대련 대흑산산성의 형세와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행군총관 정명진(程名振)이 밤에 병사를 이끌고 절벽을 기어올라 기습하였다. 방심하고 있던 고구려군은 패배하고 비사성은 함락되었으며, 남녀 8,00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5월 2일이었다.
이렇게 당군의 기습적인 공격과 첫 전투에서 개모성, 비사성은 함락되었지만, 고구려는 중진인 신성, 건안성을 지켜냈다. 따라서 신성과 건안성의 고구려군은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로 남아 이후 당군의 요동 작전은 큰 제약을 받게 되었다.
 
2) 요동성전투, 백암성전투
4월 6일 당 태종은 유주성 남쪽에 장막을 쳤으며 6군 군사들을 크게 대접하고 조서를 내렸다. 4월 10일 유주를 출발한 당 태종의 본군이 5월 3일에 요하 일대의 저습지대인 요택(遼澤)에 도착하였다. 뻘밭이 200여 리에 펼쳐져 있어 사람과 말이 통과하기 쉽지 않은 지형이었다. 하지만 이미 당군은 요택 통과를 위해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장검이 이미 지형을 상세하게 살펴서 보고한 바 있으며, 일종의 공병부대를 이끌던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펼치고 다리를 놓아 길을 확보하였다. 그래서 이틀 만인 5일에 요택을 지났다. 요하를 건너면 바로 요동성이었다.
5월 2일, 개모성을 함락시킨 이적, 이도종의 군대가 요동성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태종의 본군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요동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런데 5월 8일, 신성과 국내성에서 동원된 고구려 군사 4만 명이 이적과 이도종의 당군을 배후에서 압박하였다. 앞서 당군이 개모성을 함락하여 신성으로부터 요동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제압하였는데, 요동성에 나타난 고구려군은 이와는 다른 경로로 요동성을 구원하기 위해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군의 선발대를 이끄는 이적과 이도종은 매우 당황했을 것이다. 이들 선발 군대의 주된 임무는 당 태종이 요동성에 도착하기 이전에 당 태종의 요하 도하 및 이동로를 안전하게 확보하고, 동시에 주변 고구려 성으로부터 구원군을 차단하여 요동성을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적과 이도종은 당 태종의 본군이 도착하기 전에 고구려 구원군을 제압해야만 했다. 물론 고구려군의 수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도랑을 파고 성채를 갖추어 태종의 본군을 기다리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이도종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본래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나라 측 기록에는 이도종이 기병 4,000기를 거느리고 선봉에 서서 고구려군과 맞섰으며, 이적의 군대가 뒤를 받쳐 공격하여, 고구려군 1,000여 명을 전사시키면서 구원군을 격퇴했다고 한다. 태종이 요동성에 도착한 직후에 고구려 구원군 격퇴에 공을 세운 이도종과 마문거(馬文擧)를 포상하고, 군사를 후퇴시킨 행군총관 장군예(張君乂)를 사형에 처한 것을 보면 당시 치른 전투가 결코 간단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5월 10일, 요하를 건넌 당 태종의 본군이 요동성에 이르러 마수산(馬首山)에 본영을 설치하였다. 요동성 일대에 도착하자마자 태종은 기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요동성의 전황을 살피기 위해 나섰다. 그때 요동성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해자를 메우기 위해 흙더미를 지고 나르는 병사들을 보고, 태종 자신이 직접 말에다 흙더미를 지어 나름으로써 군사들을 격려하였다고 한다. 태종이 고구려군의 원거리무기 사정거리 밖에서 지휘했다는 점에서, 이 해자는 성벽 아래에 가까이 위치한 해자가 아니라, 당군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양수(梁水) 즉 태자하의 물길을 끌어들여 요동성 외곽까지 넓게 확장한 해자로 추정할 수 있다(서영교, 2013).
당 태종이 이끄는 본군의 도착으로 전력이 몇 배나 강화된 당군은 요동성에 대한 본격적인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이하 요동성전투의 전황은 『자치통감』, 『책부원구』의 기록을 종합하여 재구성하였다, 당시 당군은 출정 이전부터 최신 공성무기를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장작대장 염입덕은 각종 공성기구의 제작 등도 책임을 맡았다. 고대 전투는 어떤 공성도구 등을 동원하는가 하는 점이 승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다. 수 양제의 2차 고구려 원정 및 645년 당 태종의 원정에서는 공성무기에 의한 성 공격이 승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였다. 다만 그동안 사서에 보이는 공성구 및 공성전술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부족하여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은 생략하도록 한다(송영대, 2022).
앞서 개모성 공격 때에도 포차, 운제, 충차 등의 공성도구들이 효과를 발휘한 바 있다. 그런데 요동성 공격에는 또 다른 신무기가 등장했다. 1리 밖에서 300근의 돌을 날리는 최신형 포차가 대표적이다. 이적이 포차를 나란히 세우고 일제히 큰 돌을 날려 요동성 성벽을 무너뜨렸다. 고구려군은 무너진 성벽 위에 나무를 쌓고 끈으로 그물을 엮어 묶어서 마치 누각처럼 만들어 날아오는 포차 돌에 맞섰다. 그러자 당군이 당차(撞車)를 동원하여 성벽 위의 나무 성벽을 부수면서 공격하였다. 이러한 공방전이 밤낮없이 7일여 동안 계속되었다. 요동성은 평지성이라서 이러한 공성무기의 공격에 아무래도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요동성민들은 시조 주몽(朱蒙)을 모신 사당에서 미녀를 치장하여 여신으로 만들어 놓고 기원하였는데, 이에 무당이 “주몽이 기뻐하여 성이 안전할 것이다”라고 응답하였다고 한다. 이 요동성 주몽사당에는 철제 갑옷과 창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전연(前燕)시대부터 전해오는 하늘이 내려준 신물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들 신물은 주몽과 관련 없는 것으로 고구려가 요동성을 차지하기 이전부터 요동성 주민들이 모시고 있던 신물인데, 그 뒤 고구려가 이 지역을 차지하고 주민이 이주하면서 주몽신앙이 퍼지면서 그 이전 이 지역 주민들이 모시던 신물과 주몽신앙이 결합하여 주몽사당에 함께 모시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요동성이 한(漢)대 양평성 이래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이 지역에 여러 계통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이들을 고구려인으로 융합하는 데 주몽신앙이 일정한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노태돈, 2009).
5월 17일, 요동성의 함락이 눈앞에 있다고 판단한 당 태종은 직접 철갑기병 1만여 명을 이끌고 이적과 요동성 아래에서 만나 총공격을 명령하였다. 마침 거센 남풍이 불어오자 당군은 화공을 시작하여 요동성 위에 나무로 구축한 방어시설을 불태우고 포차로 돌을 날려 성벽을 파괴하였다.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요동성도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당군 측 기록에서는 고구려군 전사자 1만여 명, 포로가 된 고구려 군사 1만여 명, 주민 4만 명, 곡식 50만 석, 이외 다량의 가축을 전과로 기록하고 있다.
당 태종은 정주를 출발하면서 요동성에서 승리하면 정주까지 봉화를 올리겠다고 태자에게 약속하였다. 그래서 정주로부터 동쪽으로 수십 리마다 봉화대를 세워 요동성까지 이어지게 하였다. 5월 17일 태종은 요동성 함락이 눈앞에 오자, 승전 소식을 태자에게 전하기 위해 봉화를 올리게 하였다.
요동성은 고구려 요하선 방어체계에서 핵심고리 역할을 하는 가장 중요한 성이었다. 북으로 개모성에서 신성으로 연결되고, 남으로 안시성, 건안성으로 연결되는 최전선의 중심고리이며, 교통로상으로는 태자하를 따라 동쪽의 백암성을 거쳐 오골성(烏骨城)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의 입구를 막는 요충성이었다(여호규, 1999). 따라서 요동성의 함락은 고구려 최전선 방어체계의 일부가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5월 28일, 요동성 함락 이후 충분한 휴식을 취한 당군은 요동성 동쪽의 백암성(白巖城)으로 진군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오골성에서 1만 명 군사가 백암성을 구원하러 도착했지만, 당의 장수 글필하력(契苾何力)에게 격퇴당했다. 6월 1일, 백암성을 포위한 당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성주 손대음(孫代音, 孫伐音)이 사람을 보내 항복 의사를 전하였고, 당군 깃발을 성안에 세우니 이미 당군이 성안에 들어온 것으로 생각해서 모두 성주를 따라 항복하였다. 이렇게 해서 백암성은 당 태종의 침공 시에 스스로 항복한 유일한 성이 되었다.
백암성 항복 후에 당 태종은 특별한 조처를 취하였다. 성안의 남녀 만여 명을 붙잡아 물가에 장막을 치고 항복을 받고 음식을 내렸으며, 80세 이상 된 자에게는 비단을 차등 있게 내렸다. 그리고 백암성에 있던 다른 성의 군사들을 위로하여 타이르고 양식과 병장기를 주어 그들이 가는 대로 보내주었다. 이는 황제의 은덕과 아량을 베품으로써 다른 고구려 성 주민들의 민심을 얻고 항복을 받으려는 일종의 심리전술이라고 짐작된다(임기환, 2022).
이제 당군은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을 중심으로 넓은 지역을 장악하여 확실한 교두보를 확보한 셈이 되었다(노태돈, 2009). 이제부터 당군의 행보는 이 전쟁의 판세가 어느 방향으로 바뀌는지를 결정짓게 되었다. 『자치통감』 등 여러 중국 측 기록을 보면 백암성을 차지한 직후 당 태종과 이적은 다음 공격대상을 놓고 의논하는 장면을 전하고 있다. 태종은 안시성이 험준하고 성주가 유능한 반면 건안성은 군사가 약하고 식량도 적으므로 건안성을 먼저 공격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적은 안시성이 북쪽에 있고 건안성이 남쪽에 있는데, 안시성을 지나 건안성을 공격하다가 요동성에서 이어지는 군량 보급로가 끊기면 어려움을 겪게 되니 안시성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당 태종도 그 의견에 동의하였다.
 
3) 주필산전투, 안시성전투
당군은 6월 11일에 요동성을 출발하여 20일에 안시성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21일에 고구려 구원군이 안시성 외곽에 나타났다. 당시 고구려군을 지휘한 인물은 북부욕살 위두대형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 대형 고혜진(高惠眞)이었다. 북부욕살과 남부욕살은 수도의 구획인 5부의 부장이었다. 아마도 이 두 지휘관은 연개소문 정파에 속한 인물일 것이다. 다시 살펴보겠지만, 기록상 고구려 구원군의 규모는 15만 명이라고 하였다. 두 지휘관의 관등은 위두대형과 대형으로 15만 대군을 지휘할 관등으로는 부족해 보이기에 상대적으로 젊은 장수들로 짐작된다(노태돈, 2009). 물론 젊은 지휘관을 보완하기 위해 고구려군 내부에 나이 많고 경험이 풍부한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라는 인물이 있었지만, 실제 지휘권은 고연수가 갖고 있었다.
이제 안시성 방어를 놓고 성 밖에서 당의 대군과 고구려군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졌다. 중국 측 기록에서는 이 전투를 주필산전투라고 부르며, 전투를 지휘한 인물로 당 태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먼저 태종이 장손무기나 이적 등 숱한 군신들을 앞에 놓고 자신이 지휘하는 이 전투의 승리를 예언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군이 취할 수 있는 세 방식, 즉 상책·중책·하책을 모두 제시한 뒤 고구려군 지휘관 고연수는 태종과 대결하는 제일 하책을 선택하여 포로로 잡힐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다.
그런데 고구려군 내에서 고정의가 당 태종이 말한 상책을 주장하였다. 이는 곧 고구려군의 전통적인 방어전술로서, 정면에서 당군과 회전을 벌이는 것을 피하고 방어에 주력하면서 별동대를 동원해 당군의 보급로를 끊으면서 지구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젊은 패기의 고연수는 이를 무시하고 당군과 직접 대결하기 위하여 안시성의 40리 가까이까지 진군하였다.
게다가 당 태종은 혹 고구려군이 정면대결을 하지 않을까 우려하여 유인작전을 꾀하였다. 태종은 돌궐군 1,000명을 보내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하여 당군이 싸우기 유리한 곳으로 고구려군을 유인하도록 하였는데, 고연수는 여기에 걸려들어 안시성 동남쪽 8리 가까이 진군하여 산 아래 진을 쳤다. 게다가 태종은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회유하여 고연수가 방심하도록 하고, 야간에 몰래 군대를 이동시켜 고구려군의 배후에서 공격을 준비하였다.
이렇게 고연수가 이끄는 고구려군이 전통적인 방어전술과 달리 평원에서 정면대결로 한 데 대해 몇 가지 해석이 있다. 고연수·고혜진의 대평원전술이 독자적인 전황 판단을 근거로 수립된 전술이라기보다는 이미 연개소문 등 고구려 지휘부가 당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전통적인 청야수성전술 외에 새로 개발한 다양한 군사전술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는 당군과의 대결에서 본래 연개소문이 전개하려던 전술로서 고연수 등이 구원군으로 출정할 때 이미 수립된 전술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동시에 천리장성의 축조 역시 이러한 대평원전술과 관련되어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여호규, 2000). 그리고 고연수 등 젊은 지휘부가 자신감과 패기를 갖고 당군과 일대 회전을 통해 승부를 결정지으려는 욕망이 있었을 것이고, 이런 화끈한 대승이 새로운 집권세력인 연개소문 정권을 안정시키는 데에 정치적 선물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으리라고 보기도 한다(노태돈, 2009). 또한 장기전을 취하려면 안시성의 군대와 유기적으로 협력해야 하는데, 당시 안시성주가 반연개소문파라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으로 본다. 실제로 안시성의 군대와 고연수가 거느린 고구려군 사이에 유기적으로 협력하여 군사작전을 전개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노태돈, 2009).
이튿날인 22일에 고구려군은 서쪽 편에 진을 치고 있는 이적의 당군만 보고 진격하였다. 이때 배후에 숨어있던 당군이 뒤를 쳤으며, 양쪽으로 적을 맞게 된 고구려군은 2만 명(혹은 3만 명)주 003
각주 003)
주필산전투에서의 고구려군 전사자 수에 대해 『책부원구』 권126 제왕부(帝王部)126 납항(納降)조, 『책부원구』 권117 제왕부117 친정(親征)2, 『자치통감』 권197 당기(唐紀)13 태종(太宗) 정관(貞觀) 19년 6월조, 『신당서』 권220 고려전에는 2만여 명, 『책부원구』 권125 제왕부125 요적(料敵)조에는 3만여 명, 『구당서』 권199상 고려전에는 1만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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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숨을 잃는 참패를 하였다. 계속해서 당군이 고구려군의 퇴로를 끊고 압박하자, 결국 고연수, 고혜진 등이 나머지 병사 3만 6,800명을 이끌고 당 태종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렇게 주필산전투는 태종의 호언대로 하루 만에 당군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당군의 승리에는 태종의 매복과 기습 전술이 유효한 면이 있으며, 동시에 당시 당군과 고구려군의 부대 구성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 고구려군은 중장기병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에 반하여, 고구려군을 정면으로 상대한 이적의 군대는 보병 장창대였다. 이들 보병 장창대가 돌격하는 중장기병 중심의 고구려군을 효과적으로 제어한데다, 고구려군의 배후에서 당군이 포위 공격하면서 고구려군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당 기병의 주력은 경장기병으로 기습 등에 효율적이었다(노태돈, 2008).
다음 주필산전투에 투입된 당군과 고구려군의 병력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선 당군의 병력 수에 대해서는 자료상 논란이 적지 않은데, 이는 안시성 공격에 투입된 전체 병력 수와 관련된다. 당시 당 육군의 총 병력은 이적의 군대 6만 명과 당 태종의 본군 10만 명 등 16만 명에 이르는데, 이적군은 신성, 현도성, 개모성 전투를 치루면서 병력 손실이 있었을 것이고, 더욱이 개모성 등을 수비하기 위한 병력이 따로 차출되었을 것이다. 당 태종의 본군 중에서도 요동성 공격에 따른 병력 손실 및 요동성 수비군은 제외해야 할 것이다. 이런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10만 명 이상의 군사력이 안시성 일대에 투입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건안성을 공격하던 장검의 군대 또한 안시성 일대에 투입되었다는 점도 고려할 수 있다. 다만 주필산전투에서는 안시성을 포위하는 군대를 제외한 병력이 투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전당문(全唐文)』 권7 태종황제파고려사포조(太宗皇帝破高麗賜酺詔)는 주필산전투 시에 이적이 마보군(馬步軍) 14명의 총관을, 장손무기가 마보군 26군 총관을 지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총관 1명당 4,000명 정도를 지휘하였다고 보면 대략 16만 명 전후의 당군이 투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노태돈, 2009). 이와 달리 구체적으로 당시 주필산전투에 투입된 병력의 일부를 기록한 중국 측 사서도 있다. 고구려군에 정면으로 맞선 이적 부대는 1만 5,000명, 후방을 급습하는 병력인 장손무기 부대는 1만 1,000명, 당 태종이 직접 이끌었던 친위부대는 4,000명 정도로 기록하고 있다. 이 병력을 합하면 3만여 명 정도가 된다. 이런 기록에 의문을 갖고 더 많은 병력이 투입되었다고 보기도 하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당시 당군이 매복과 기습이란 전술을 구사했기 때문에 기록대로 3만여 병력을 실제 투입 병력으로 파악하고 있다(문영철, 2021).
그런데 당군의 병력 수는 전투 상대인 고구려군의 병력과 대응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다수의 중국 측 기록에는 고구려 구원군의 수가 15만 명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다소 의문이 있다. 우선 15만 명이라는 기록이 대부분이지만, 10여 만, 20만, 25만이라는 기록도 있어 기록상으로도 다소 불분명한 점이 있다.주 004
각주 004)
『구당서』 권83 열전33 설인귀(薛仁貴)전에는 25만 명, 『신당서』 권111 열전36 설인귀전에는 20만 명, 『책부원구』 권117 제왕부117 친정(親征)2에는 10만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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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당시 고구려군의 총군사력을 고려하거나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과연 15만 명이라는 대군이 안시성 구원전에 투입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당시 고구려의 인구나 군사력을 고려하면 이렇게 많은 군사가 안시성 구원전에 투입될 여력은 없다고 보인다. 아마도 고연수 등이 이끄는 병력은 본래 압록강 전선을 지키던 군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동성이 함락되고 백암성이 당군의 손에 들어간 뒤에도 당군이 오골성과 압록강 방면으로 진군하지 않자, 압록강 수비군의 일부를 안시성 구원전에 투입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이때 투입된 고구려 구원군 병력은 전사자와 당군에 항복한 군사를 합하여 대략 5~6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임기환, 2022; 문영철, 2021). 고구려군의 총병력을 이런 규모로 상정한다면, 이에 대항하는 당군의 규모도 기록대로 3만 명을 크게 상회하지 않았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안시성으로 비정되는 해성 영성자산성 인근에서 양측 도합 30만 명 정도의 군사가 진을 치고 대결할 수 있는 대평원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주필산전투 이후 당군은 안시성 공격에 주력하였을 것이다. 다만 전투 양상에 대한 기록이 소략하여 전황을 제대로 알기는 어렵다. 7월 5일에 당 태종이 안시성 동쪽 고개로 군영을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부터 안시성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주필산전투 이후 곧이어 안시성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별 성과가 없자 태종이 독려하기 위하여 안시성 가까이로 군영을 옮긴 상황인지는 확실치 않다. 만약 주필산전투 이후 안시성 공격이 시작되었다면, 이미 7일 가까이 공방전이 계속된 것이다. 어쨌든 7월 5일에 당 태종의 군영을 안시성 동쪽으로 옮기면서 공격이 본격화되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중국 측 사서에서 7월 중 당군의 안시성 공격 기사가 보이지 않고, 『구당서』 권199 고려전에 “8월 군영을 안시성 동쪽으로 옮기고 이적이 안시(安市)를 공격했다”는 기록에 의거하여, 8월 10일 직후 동쪽으로 군영을 옮긴 이후에야 안시성 공격에 나선 것으로 보고, 6월 23일에서 8월 10일 직후까지 40일 이상 소강상태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서영교, 2014). 하지만 『구당서』 권3 본기3 태종 정관 19년조에 “가을 7월에 이적이 군대를 진격시켜 안시성을 공격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또한 토산(土山) 축조가 7월 15일 이전에 시작되었음을 고려하면 7월 중에 당군의 공세가 없었다고 판단할 수 없다.
중국 측 사서에 이적은 안시성 서쪽을 공격하고, 이도종은 안시성 동남쪽에서 전투를 벌이며 공격용 토산을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당군은 언제부터 토산을 쌓기 시작하였을까? 이 토산을 쌓는 데 60일이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 토산이 완공되었을 무렵 토산이 안시성벽 쪽으로 무너지면서 고구려군이 재빨리 토산을 점령하고 벽을 깎고 참호를 파서 지켰다. 이에 당군이 토산을 빼앗기 위해 3일간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9월 18일에 회군하기 시작하였다. 다시 말해서 회군 시점에서 최소한 63일 전에 토산 축조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니, 대략 7월 15일 이전이 된다.
주필산전투 직후부터 공성전이 전개되었다면 20여 일쯤 뒤에, 7월 5일 당 태종이 안시성 동쪽으로 군영을 옮기고 공격이 본격화된 지 10일이 채 안 되어 토산 축조를 시작한 셈이다. 이 시점이 당시 당군의 전략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된다(임기환, 2022).
구체적인 시점이 명기되지 않고 7월 중에 있었다고 하는 당군 지휘부의 작전회의 장면이 『자치통감』 권198 태종 정관 19년조 및 『책부원구』 권991 외신부36 비어(備禦)4에 전하고 있다. 그 자리에서 태종에게 항복한 고연수, 고혜진이 하나의 방책을 건의하였는데, 안시성을 쉽게 함락시키지 못하니 오골성으로 진격하면 오골성 욕살이 나이가 들어 제대로 방어하지 못할 것이고, 그 뒤에는 평양 공격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다른 군신들도 고연수의 군대가 격파되어 고구려군 전력이 취약해졌으니, 비사성에 있는 장량의 군대까지 불러들여 오골성으로 진격하고 압록수를 건너 평양을 공격하자고 건의하였다. 이에 대해 장손무기가 “천자가 친정하고 있기 때문에 만전을 기해 진군해야 하는데, 건안성과 신성의 고구려 군사 10만이 오골성으로 진격하는 당군 뒤를 공격하면 위험하기 때문에 안시성과 건안성을 취한 뒤에 진군해야 한다”며 반대하였다. 이에 안시성 공격이 다시 계속되었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작전회의에서 안시성 공격을 계속한다는 방침을 확정한 뒤에야 토산을 구축하는 공격전술을 채택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토산 축조가 시작된 7월 중순 이전에 위 작전회의가 열렸을 것이다. 아마 당 태종이 안시성 동쪽 고개로 군영을 옮긴 7월 5일 직후가 아닐까 추정한다. 어쨌든 안시성 공격이 더이상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이때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는 작전회의가 열렸던 것이고, 이 자리에서 최종적으로 안시성과 건안성 공함 이후 진군한다는 기존의 전략이 재확인된 것으로 파악한다.
그런데 토산 축조라는 새로운 공성전술이 채택된 점은 이때 당군 전략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왜냐하면 토산 축조는 장시간이 걸리는 공격전술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적은 계속해서 안시성 성문 쪽을 공격하였고, 이도종이 동남쪽을 공격하면서 토산을 축조하였으니, 당군이 전적으로 토산 축조에 매달린 것은 아니다. 이는 일종의 보조전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도 이적의 성문 공격이 아무런 성과가 없자, 토산 축조에 승부를 걸었던 듯하다. 그리고 중국 사서에 8월 10일에 당 태종이 군영을 안시성 남쪽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당 태종이 직접 나서서 공격을 독려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토산 축조가 시작된 지 한 달여가 지난 시점이니 아마도 이 무렵부터 토산 축조에 더 많은 공력을 투입하였을 가능성도 크다.
당군이 토산 축조라는 전술을 취하게 된 배경에 대해 서역에서 설연타의 공세에 따른 당 군사력의 보존을 위한 전략이라는 견해가 있으나(서영교, 2014),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안시성에서의 승부는 고구려 원정 전체의 최종 승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전투인데, 저 멀리 설연타의 공세에 대비해서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는 토산 축조 전술을 구사한다는 상황을 상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당시 당군이 안시성에서의 승부가 여의치 않자 장기전 전략으로 전환한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즉 안시성과 그 뒤 건안성을 확보하면 결과적으로 개모성에서 요동성, 안시성, 건안성, 비사성으로 이어지는 고구려 최전선의 주요 거점성들을 확보하게 되고, 이들 성을 기반으로 이듬해에 본격적인 공세를 취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임기환, 2022).
 
4) 안시성과 주필산 전투지의 위치
근대에 들어 역사지리학 연구를 통해 안시성에 대한 새로운 위치 비정이 시도되면서 여러 견해가 나왔다(문영철, 2020). 그중에 중국 요령성 해성시의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 대석교시의 해룡천산성(海龍川山城), 개주시의 고려성자산성(高麗城子山城)이 안시성의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다. 이 가운데 고려성자산성은 건안성으로 비정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영성자산성과 해룡천산성이 남는데, 그동안은 영성자산성이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지지를 받았다(金毓黻, 1976; 島田好, 1927).
다만 영성자산성은 그 규모에서 과연 당 태종의 대군을 3개월이나 막을 만한 성곽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 연구자들이 적지 않다. 영성자산성은 아직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현장을 일시 조사한 연구자들마다 성곽의 규모와 구조에 대한 보고가 제각각이다. 성곽의 구조에서도 하나의 성곽으로 보는 견해, 본성의 서북쪽 외곽으로 긴 방어용 성벽이 구축되었다는 견해, 이 외부 성벽이 또 하나의 성곽을 이루어 본성과 외성 즉 복곽식 성곽이라는 견해 등이 있다. 이렇게 성곽의 구조를 다르게 파악하기 때문에 전체 성곽의 크기도 다르게 보고되고 있다. 대략 본성의 규모를 2.7km 정도로 파악하고, 여기에 외부 성벽 혹은 외성의 성벽을 더하여 4~4.5km 규모로 파악하기도 한다(여호규, 1999; 양시은, 2016).
본성 외부로 이어지는 성벽의 존재는 확인되지만, 아직 외성의 존재는 불분명하다. 안시성전투 기록을 보면 이적의 군대는 안시성 서쪽 즉 서문 쪽을 공격하고, 이도종은 동남쪽에서 토산을 구축하며 공격하였다고 하는데, 이 기록이 당시 안시성의 구조를 보여주는 기록이 될 수도 있다. 안시성의 서북쪽에 외성이 있다고 해도 현재 지형으로 볼 때 상대적으로 본성에 비하여 방어상 취약한 상태로 추정되는데, 당군의 공격이 서북쪽에 집중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외성의 존재를 고려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현재로서는 보다 본격적인 조사를 기다린 후에야 정확한 상황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치통감』 권202 고종(高宗) 함형(咸亨)2년조에 의하면 고구려가 멸망한 뒤 671년 7월에 안시성에서 대규모 부흥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요동 일대에서 안시성의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짐작케 하는데, 본성을 기준으로 보면 현재 건안성에 비정되는 고려성자산성의 규모와 비교해도 제법 차이가 있기 때문에, 영성자산성을 안시성에 비정하는 데 부정적인 입장이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주목한 산성이 해룡천산성이다. 이 산성의 규모는 중국 측 보고자마다 차이가 있는데, 대략 둘레 3~4km 정도이다. 산성의 입지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아 서문이 기본 성문이며, 성 내부의 경사면이 완만하고 평탄한 점 등은 영성자산성의 입지와도 유사한 면이 있다. 해룡천산성을 안시성으로 주장하는 견해를 보면, 주필산전투가 벌어진 지형, 지세를 해룡천산성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고, 당 태종의 대군에 대응하여 항전할 수 있는 10만 대군이 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산성의 규모가 크며, 무엇보다 산성의 동남쪽에 당군이 쌓았다는 인공 토산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馮永謙, 1996; 王咏梅, 2000; 王綿厚, 2002).
사실 주필산전투가 전개된 지형을 충족하는 곳은 영성자산성 주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 영성자산성 동남쪽에서도 인공 구조물인 토산을 확인할 수 있다고 그동안 알려져 있었다. 물론 최근에는 이 토산을 자연지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다시 말해서 지형적 요소는 두 산성의 입지가 비슷한 점을 고려하면 결정적인 근거가 되기 어렵다. 다만 해룡천산성의 규모가 영성자산성보다 대형이라는 점에서 보다 유력한 근거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산성 자체의 규모나 입지만으로 어느 산성을 안시성으로 확정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있다. 이때 고려해야 할 점이 교통로 문제이다. 해룡천산성도 교통로상의 요처에 해당한다. 수암시와 개주시로 이어지는 길이 지나고 있는데, 대청하(大淸河)를 따라 개주 방향으로 교통로 연결이 보다 수월한 위치이다. 영성자산성은 천산산맥을 넘어 수암으로 이어지는 주 교통로의 입구에 해당한다. 그동안에도 영성자산성을 안시성에 비정하는 주된 이유는 바로 이 점이었다. 요동성을 장악한 당군이 고구려 영역 내부 압록강 방면으로 연결되는 또 다른 교통로를 확보하려는 전략에서 보면 역시 영성자산성이 최적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다(여호규, 1999; 양시은, 2016). 그리고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요동성으로 철군할 때 2~3일 걸렸다는 기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근대시대에 일반적으로 1일 행군거리는 최대 30km 내외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 더 먼 거리를 이동할 수도 있으며, 통상의 행군 거리를 20km 이하로 보기도 한다. 따라서 당시 당군의 철군 상황을 보면 안시성은 요동성에서 대략 60km 범위 정도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 위치는 해성의 영성자산성이다(정호섭, 2020).
안시성을 영성자산성으로 본다면 주필산전투지의 위치도 이 근방에서 찾아야 한다. 근래 주필산전투지를 사료에 나타난 단서와 영성자산성 부근의 자연지형을 토대로 영성자산성 동남쪽 3km 거리의 북철광업(北鐵鑛業)유한회사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이곳은 동남 방향에서 영성자산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좁은 길목에 해당하는데, 주변에 여러 산줄기가 뻗어 있어 매복작전을 벌이기에 적합한 지형으로 본 것이다(문영철, 2021).
 
5) 당 태종의 퇴각과 설연타의 동향
645년 9월 18일 안시성에서 철군한 태종과 당군은 요동성을 거쳐 요하에 도착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9월 21일경이었다. 요하에는 늪지대인 요택이 200여 리에 펼쳐져 있었다. 이 요택은 당 태종이 고구려를 원정하러 올 때 지나온 길이다. 당시 당군 공병대가 미리 요택에 흙을 덮고 다리를 놓아 길을 만들어 두어 이틀 만에 통과하였다. 그때 요택을 통과한 태종은 설치한 다리를 모두 거두라고 명령하였다. 그래서 되돌아올 때는 요택을 지나는 데 10여 일이 걸렸다. 요택을 어렵사리 통과한 당군은 10월 1일 요하의 지류인 발착수(渤錯水)를 건넜는데, 눈보라가 몰아쳐 많은 병사들이 얼어죽어 갔다. 이런 요하 중로보다는 고구려 공격 시에 이적군이 경유했던 북로가 보다 평탄한 길이었는데, 서쪽 설연타의 동향이 우려되어 신속하게 철군하기 위해 중로를 택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노태돈, 2009).
10월 11일에 당 태종은 영주에 도착하였다. 18일에 이곳에서 군사를 돌이킨 데 대한 반사(班師)조서를 내렸는데, 자신의 고구려 원정이 승리했음을 선포하고 그 성과를 자랑하는 내용이었다. 21일에 태종은 임유관에 도착했고, 마중 나온 태자와 만났다. 그리고 11월 7일에 유주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바로 장안으로 가지 않았다. 북쪽 설연타에서 진주가한(眞珠可汗)의 뒤를 이은 다미가한(多彌可汗)이 태종의 군대가 고구려 원정에서 돌아오지 않은 상황을 틈타 당의 하주(夏州)을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종은 12월 14일 병주(幷州: 태원 일대)에 행차하여 설연타와의 전쟁을 후방에서 독려하였다. 고구려 원정을 다녀온 이도종, 설만철 등을 쉴 틈도 없이 설연타와의 전선에 투입시켰다. 설연타의 대군을 격퇴시킨 뒤에야 비로소 장안으로 향하였다. 태종이 장안으로 돌아온 때는 3월 7일이었다. 요하를 건넌 때로부터도 5개월 가까운 시일이 흐른 뒤였다. 태종은 장안에 도착하자마자 승전의 예를 행하였다. 당의 입장에서는 고구려 정벌의 애초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645년 고구려 원정을 당 태종의 승전 목록에 추가하는 절차를 밟은 것이다.
그러면 고구려 원정에서 철군한 이후 당 태종이 설연타와의 전쟁에 나섰다는 점에서 태종의 철군 배경과 설연타의 동향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자. 고구려군이 주필산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연개소문이 말갈을 통해 설연타와 연결하여 당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하는 전략을 구사했기 때문에, 태종의 철군과 설연타의 당 공격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동안에도 여러 견해가 있었다. 우선 태종이 안시성에서 철군하게 된 직접적인 배경이 당 북방에 있는 설연타가 당의 하주를 침공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서영교, 2014). 또는 9월 시점에서 아직 설연타가 당을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설연타의 동향에 당 조정과 당군 지도부의 우려가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태돈, 2009).
이 문제의 가장 중요한 점은 설연타가 언제 당의 하주를 침공했느냐이다. 태종의 철군 명령 이전에 설연타의 침공이 있었다면, 당 철군의 주요 요인의 하나로 설연타의 침공을 거론할 수 있지만, 설연타의 침공이 철군 이후라면 이를 철군의 직접적인 배경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록상 설연타의 침공 시점이 다소 애매한 점이 있다.
설연타의 당 최초 침공은 진주가한에 의해 645년 7~8월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을 떠나면서 돌궐 출신인 번장(蕃將) 집실사력(執失思力)에게 금산도에 주둔하여 설연타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신당서』 집실사력열전에 의하면, 설연타의 수만 기병이 하남(河南: 지금의 오르도스) 지역에 침공하여 집실사력이 이를 격퇴하고 600여 리를 추격하였는데, 이 무렵(8월경) 설연타의 진주가한이 죽어서 설연타군이 돌아갔다고 한다(서영교, 2014).
그런데 다수의 기록은 이와는 다른 양상을 전하고 있다, 즉 연개소문이 설연타와의 연계를 시도했지만 “진주가한이 두려워해서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 기록은 앞서 집실사력열전의 내용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집실사력 열전의 내용은 『신당서』 회홀(回鶻)전의 기사와도 시간 흐름이 맞지 않는다. 역시 다수의 기록에서 보이는 위 기사를 부정할 만한 뚜렷한 근거는 없기 때문에 7~8월의 설연타 침공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설사 7~8월의 설연타 침공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때는 안시성전투가 한참 진행 중이었는데 당시 당 태종이 설연타의 동향에 주의를 기울이는 흔적은 사료상으로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해 8월경에 진주가한이 죽고 적자(嫡子)이지만 둘째인 발작(拔灼)이 이복형인 예망(曳莽)을 죽이고 다미가한으로 즉위하였다. 당은 내심 설연타가 후계자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에 빠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다미가한이 빠르게 권력을 장악해 갔다. 새로 등장한 다미가한은 이전 진주가한과는 다르게 당의 하주를 공격하였다. 이 공격 시점이 불분명한데, 여러 사서에 “태종이 아직 요동에 있을 때”라고 막연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점을 당군이 요하를 건넌 10월 1일 이전으로 보고 있으며, 다만 태종이 철군 조서를 내린 9월 18일 이전인지 이후인지를 검토하고 있다(여호규, 2018). 그러나 “태종이 아직 요동에 있을 때”라는 사서의 기록을 요하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이 기사의 ‘요동’을 지리적 관점에서만 파악한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태종이 아직 요동에 있을 때”이란 문구는 아직 태종이 요동 원정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함이 합리적이다. 이는 이듬해 3월 당 태종이 장안에 도착했을 때 사서에서 “요동에서 돌아왔다”라고 기록한 점에서 방증된다. 따라서 설연타의 당 공격 시점을 태종이 요하를 건넌 시점인 10월 1일 이전으로 상정하는 것은 맥락상 타당하지 않다.
당시 설연타의 동향과 당의 대응을 보여주는 여러 기록을 종합해볼 때 설연타 다미가한이 당의 하주를 공격한 시점은 645년 11~12월 초 무렵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이는 앞서 언급한 당 태종의 귀환 과정을 보아도 짐작된다. 10월 1일에 요하와 요택을 지나온 태종은 21일에 임유관에 도착해 마중 나온 태자와 만났고, 11월 7일에 유주에 도착하였다.
당 태종의 본군이 고구려로 출정할 때에는 4월 10일에 유주를 출발하여 5월 3일에 요택에 도착하였다. 대략 22~23일이 걸린 것이다. 귀환길은 21일 만에 임유관에 도착하고 36~37일 만에 유주에 도착하였으니, 거의 보름 가까이 더 걸릴 정도로 행군 속도가 많이 느렸다고 볼 수 있다. 군사들의 피로를 고려하면 당연한 행군 일정이다. 이러한 귀환길을 보면 당 태종이 설연타의 침공을 의식해서 서두르는 기색이 전혀 없다. 더욱이 10월 이전에 설연타가 침공했다면, 당 태종의 원정 시에 국내 통치를 위임받은 태자가 10월 21일에 임유관으로 태종을 마중 나갈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보면 적어도 태종이 유주에 도착할 때까지는 설연타의 침공이 없었다고 보는 게 맞다.
즉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철군하게 된 배경은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반사조서에도 나오듯이 겨울철 추위가 다가오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성곽 중심의 고구려 요동방어체계 및 산성의 험준함, 고구려군의 수성능력 등이 결합하여 당군의 진격을 최전선에서 가로막았던 결과였다. 전적으로 안시성을 비롯하여 고구려의 방어력이 당 태종의 철군을 초래한 것이지, 설연타 동향 등 어떤 외적 변수가 철군의 요인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나서기 전부터 설연타의 침공에 대비책을 따로 마련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진주가한의 사망과 다미가한의 등장이 가져올 새로운 여파에 대해 태종이 상당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태종은 12월 14일 병주에 도착하였다. 설연타와의 전쟁을 후방에서 지휘,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태종은 설연타의 침공을 물리치고 장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3개월 뒤인 6월에 당은 철륵(鐵勒)·복골(僕骨)·동라(同羅) 부족과 연대하여 설연타에 대한 대공세를 펼쳐서 결국 궤멸시켰다. 8~10월에는 태종이 직접 영주(靈州)에 가서 철륵 여러 부족의 투항을 받았다. 한때 초원지대를 호령하던 설연타를 당이 패망함시킴으로써 다시금 주변 국가들에게 당의 위력을 과시하는 효과를 불러왔다.

  • 각주 001)
    645년 전쟁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주요 성 위치는, 신성은 요령성(遼寧省) 무순(撫順)시 고이산성(高爾山城), 현도성은 요령성 무순시 노동공원산성(勞動公園山城), 건안성은 요령성 개주(蓋州)시 고려성산산성(高麗城山山城), 요동성은 요령성 요양(遼陽)시, 비사성은 요령성 금현(金縣) 대흑산산성(大黑山山城), 개모성은 요령성 심양(瀋陽)시 탑산산성(塔山山城), 백암성은 요령성 등탑(燈塔)현 연주성(燕州城), 안시성은 요령성 해성(海城)시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 오골성은 요령성 봉성(鳳城)시 봉황산산성(鳳凰山山城)으로 비정하는 것이 통설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2)
    『구당서』 강행본전(姜行本傳)에 의하면, 정관 17년(643년)에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하자 강행본은 아직 군사를 움직일 수 없다고 간언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고, 강행본은 개모성에 이르러 화살을 맞아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방향숙(2008)과 정원주(2020)는 이 기사의 개모성 공격을 643년의 일로 파악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자치통감』 권197, 당기(唐紀)13 태종(太宗) 정관 18년 11월 경자(庚子)일(30일) 기사에 행군총관 강행본이 등장하고 있으며, 『책부원구』 권425 장수부(將帥部)86 사사(死事) 강확(姜確), 『구당서』 권59 열전9 강행본전에 의하면 645년 개모성전투에서 강확, 즉 강행본이 전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주필산전투에서의 고구려군 전사자 수에 대해 『책부원구』 권126 제왕부(帝王部)126 납항(納降)조, 『책부원구』 권117 제왕부117 친정(親征)2, 『자치통감』 권197 당기(唐紀)13 태종(太宗) 정관(貞觀) 19년 6월조, 『신당서』 권220 고려전에는 2만여 명, 『책부원구』 권125 제왕부125 요적(料敵)조에는 3만여 명, 『구당서』 권199상 고려전에는 1만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구당서』 권83 열전33 설인귀(薛仁貴)전에는 25만 명, 『신당서』 권111 열전36 설인귀전에는 20만 명, 『책부원구』 권117 제왕부117 친정(親征)2에는 10만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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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구려-당 전쟁의 개시와 전개 자료번호 : gt.d_0006_0020_00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