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당의 고구려 공격전략 변화와 재원정 준비
3. 당의 고구려 공격전략 변화와 재원정 준비
고구려 원정에서 돌아온 이듬해 10월 14일 당 태종은 조서를 내렸다. 그 내용인즉, 고구려가 방자해져 당에 대해 거만하고, 사신을 보내 올린 표문도 거짓이고,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는 명도 듣지 않으니, 앞으로는 조공을 받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조서는 고구려 재원정을 위한 명분 쌓기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사실 그 이전부터 태종은 고구려 재원정을 결심하고 있었던 듯하다. 5월에 보장왕이 사죄의 사신과 함께 보낸 미인도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 다만 북방의 설연타가 호심탐탐 넘보는 상황에서 고구려 원정의 뜻을 미루어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6월에 북방의 골칫거리였던 설연타도 멸하고, 9월에 영주에 순행하여 철륵 여러 부족의 투항을 받았으니, 고구려 재원정을 방해할 거리는 모두 없어진 셈이다.
당 조정에서 고구려 재원정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때는 647년 2월이었다. 이 자리에서 군신들은 고구려의 성곽은 험준한 산에 쌓아서 쉽게 함락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소규모 군대를 자주 파견하여 고구려를 피로하게 한 뒤에 정벌하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모으고, 태종도 동의하였다. 즉 당이 고구려 공격전략을 대규모 공격에 앞서 소모전략으로 수정한 것이다.
5월에 먼저 이적이 지휘하는 육군이 공격을 시작하였다. 기록에는 당시 이적이 2명의 부대총관과 함께 병사 3,000명과 영주도독부 관할 군사를 거느렸다고 하는데, 총병력 수는 기록되지 않았다. 영주도독부에는 당 소속 군대도 있지만, 거란, 해 등 영주도독부에서 관할하는 북방 종족의 군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통전(通典)』과 『당회요(唐會要)』 고구려조에는 이적이 남소성(南蘇城)전투 이후 회군하면서 거란에게 요수(遼水)의 근원을 묻는 대목이 나온다. 이적의 부대에 거란군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적은 신성도(新城道)로 나아가 5월 25일에 남소성, 목저성(木底城)을 차례로 공격하였다. 남소성은 지금의 요령성 무순시 철배산성(鐵背山城)으로 비정되는데, 신성과 더불어 요동 지역에서 고구려 졸본(卒本: 요령성 환인)이나 국내성(길림성 집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요충성이다. 목저성의 위치 비정은 다소 논란이 있는데, 지금의 소자하 유역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요령성 신빈현(新賓縣) 목기진(木奇鎭)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하지만, 철배산성에서 동남쪽으로 15km 거리에 있는 오룡산성(五龍山城) 혹은 신빈현의 구로성(舊老城)에 비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요하를 건너 남소성으로 가려면 반드시 신성을 거쳐야 한다. 신성은 난공불락의 요충성으로, 645년 첫 원정 때에도 당군은 신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때 이적은 신성에서 전투를 벌이기 보다는 이를 지나쳐서 남소성으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당 측 기록에 의하면 남소성, 목저성에서 고구려군을 크게 격파하였으나 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하고 외곽을 불태우고 파리성(頗利城) 쪽으로 회군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남소성에서 다시 신성 쪽으로 되돌아갔다가는 신성의 고구려군에게 퇴로를 차단당할 염려가 있어서 다른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남소성에서 지금의 요령성 철령(鐵嶺)시 쪽으로 빠지는 길이 유력하다. 철령에는 고구려 최진보산성(崔陣堡山城)이 있는데, 파리성이 이를 가리키는 게 아닌가 싶다. 이때 당군이 요하의 지류인 백랑(白狼)·황암(黃巖) 두 강을 건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철령을 지나 요하와 합류하는 시하(柴河)와 그 지류인 범하(汎河)에 비정해볼 수 있겠다.
이적이 거느린 당군이 신성을 지나쳐 남소성과 목저성까지 고구려 영역 내로 깊숙이 들어가 공격하고 철령 일대로 빠져나간 군사 행동은 일종의 기습공격이다. 다만 신성을 지나쳤기 때문에 퇴로가 끊길 경우 곤경에 빠질 수도 있는 위험한 작전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감행한 것은 신성 후방의 고구려 방어망을 뒤흔들어서 후방에 있는 고구려 주민들의 민심을 불안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싶다. 앞서 당의 조정에서 의도한 전략이 바로 그것이었다.
우진달(牛進達)이 거느린 수군의 행동도 이와 비슷하였다. 보통 수군의 행로는 산동반도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요동반도 끝에 있는 비사성에 이르게 된다. 645년 원정 때에도 이 비사성을 공격, 함락시켜 차지한 바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진달이 병사 1만여 명을 이끌고 7월 11일에 석성(石城)을 공격하였다. 석성은 지금의 요령성 장하시(莊河市)에 있는 성산산성(城山山城)에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성산산성의 위치는 고구려 건안성에서 천산산맥을 넘어 요동반도 남안에 이르는 교통로의 남단이며, 비사성에서 압록강 하구, 즉 지금의 단동시(丹東市)로 이어지는 요동반도 남쪽 해안도로의 중간거점에 해당하는 요충지이다. 그런데 645년 전쟁상황에서 보듯이 비사성이나 건안성이 최전방이고, 석성은 이들 성의 배후에 위치한 후방이다. 당군은 의도적으로 이런 후방 성을 공격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당시 우진달이 거느린 당군은 석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다시 적리성(積利城)에 이르렀고, 출진한 고구려 군사 1만 명 중 2,000여 명을 전사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적리성의 위치 역시 석성과 마찬가지로 요동반도 남단 일대로 석성에서 이어지는 교통로에 위치하였음은 분명하다. 그 위치 비정은 견해가 분분한데, 아마 보란점시(普蘭店市)의 위패산성(魏覇山城)이 아닐까 한다. 위패산성은 벽류하(碧流河) 서쪽에 위치하며, 성산산성과 함께 벽류하를 따라 건안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지키는 기능을 하고 있다.
이러한 당의 전략은 이듬해에도 이어진다. 당 태종은 648년 정월에 설만철(薛萬徹)에게 병사 3만 명과 군선을 이끌고 내주에서 고구려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본대의 출진에 앞서 4월에 오호진장(烏胡鎭將) 고신감(古神感)이 먼저 고구려 역산(易山)을 공격하였다고 한다. 역산의 위치는 비정하기 어렵다.
6월에 설만철이 본대를 이끌고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박작성(泊灼城)을 공격하였다. 박작성주 소부손(所失孫)이 보기 1만여 명을 이끌고 대적하였으나 패배하였고, 장수 고문(高文)이 오골성과 안시성 등 여러 성의 구원군 3만여 명을 이끌고 와서 한바탕 전투가 벌어지고 당군은 퇴각하였다. 645년 장량이 거느린 당의 수군이 비사성을 함락시킨 후 일부 군선을 압록강 하구로 보내어 시위를 한 적은 있으나,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 박작성을 공격한 것은 아마도 고구려 측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박작성은 지금의 단동시 호산산성(虎山山城)에 비정된다. 박작성은 압록강 하구를 공제하는 요충지로서 오골성에서 압록강을 건너 지금의 의주로 이어지는 교통로에 위치한다.
이처럼 647~648년 두 해에 걸쳐 당은 1만~3만 명 규모의 육군과 수군 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의 후방이라고 할 수 있는 남소성, 목저성, 석성, 적리성, 박작성 등을 공격하였다. 기록상으로는 육군 한 차례, 수군 세 차례 등 모두 네 번의 출정이 확인되는데, 모두 예기치 않은 후방의 요충성들을 기습공격하는 전략이었다.
이와 같은 몇 차례 당군의 공세가 애초 당의 군신들이 의도했던 고구려를 피로하게 하는 전략으로서 얼마나 효과를 거두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나동욱, 2009). 전략의 실효성 측면에서 고구려에 큰 타격을 주었다고 평가하는 견해가 있다(노태돈, 2009). 좀더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전술적 소모전을 통한 ‘여건조성작전’ 단계와 당 태종의 대규모 공격을 추진한 ‘단기정복전략’ 단계로 나누어 파악하면서, 당의 공세에 대해 고구려 방어체계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나동욱, 2009).
그러나 647년 2월 군신회의에서 논의된 이른바 소모전략은 공세 전략의 수정이라기보다는 당 태종과 군신 사이의 타협의 산물로 추정한다. 645년 고구려 원정 실패 이후 다수의 군신들과 달리 태종은 재원정하려는 의지가 매우 강하였다. 군신들도 원정을 무조건 반대할 수 없어서 소극적인 군사전략을 명분으로 내세우게 되고, 태종 역시 원정 준비를 위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에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소규모 군대를 보낸다는 전략을 채택한 것은 새로운 전략을 모색한 결과라기보다는 고구려 재원정을 놓고 당 태종과 군신들 사이의 입장 차를 일단 덮어두는 미봉책으로 논의한 결과로 볼 수 있겠다(임기환, 2022).
그 결과 648년 6월 군신회의에서 당 태종은 “이제 고구려가 곤궁하고 피폐해졌으니 이듬해에 30만 군대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정벌하겠다”고 공언하였다. 이미 충분히 예견된 상황이었다. 태종은 이미 647년 9월에 강남 12주에서 큰 배 350척을 건조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648년 9월에는 군량과 기계들을 삼산포(三山浦), 오호도(嗚呼島)에 저장해 두도록 명령하였다. 이 과정을 645년의 원정 준비 과정과 비교해보자. 즉 644년 7월에 배 400척을 만드는 명을 내리고, 10월에 영주로 군량을 나르고 고대인성에 곡식을 저장하도록 하였으며, 11월에 원정군을 편성하는 조서를 내리고, 645년에 원정에 나섰던 것이다. 두 과정을 비교해보면 태종이 649년에 고구려를 원정할 계획을 정해 놓고 구체적인 준비를 갖추어가고 있었음이 분명해진다. 게다가 645년 원정을 논의할 때에는 적지 않은 군신들의 반대가 있었는데, 648년 6월 조정에서의 논의 자리는 물론 그 이후에도 태종의 고구려 원정 의지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는 사료상으로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7월에 병이 깊어진 방현령(房玄齡)이 마지막으로 힘을 다해 올린 상소가 눈에 띌 뿐이다. 이는 당시 태종의 고구려 원정 의지가 매우 강력하였기 때문에 군신들이 아예 입을 다물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태종이 이듬해에 고구려를 정벌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한 준비를 강력하게 추진하는 상황에서 648년 윤12월에 신라 김춘추가 당 조정을 방문하였다. 김춘추는 태종의 고구려 원정이 임박해진 시점을 의도적으로 골랐을 것이다. 김춘추는 당시 신라 진덕왕 정권에서 실질적인 일인자였다. 647년 정월 상대등 비담(毗曇)의 난을 진압하고, 그 와중에 선덕왕이 죽자 진덕왕을 추대하여 정권을 잡았다. 김춘추는 사신이라기보다는 신라왕을 대신하여 당 태종과 담판을 지을 수 있는 모든 권한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태종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광록경(光祿卿)을 보내 교외에서 맞이하게 하는 등 후례를 베풀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당 태종이 김춘추를 사사로이 만나 후하게 예우하면서 밀담을 나누었다고 한다. 이때 두 사람 사이에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여 멸망시킨 후 그 땅을 어떻게 나눌지에 대해 밀약이 맺어졌다. 그 밀약의 내용이 문무왕이 671년에 당의 장군 설인귀(薛仁貴)에게 보낸 답서에 언급되어 있다. 당 태종은 김춘추와의 밀약으로 신라군을 동원하면 이번 고구려 재원정은 성공할 수 있으리라 나름 확신했던 듯하다. 그리하여 김춘추에 대한 예우가 각별했다. 김춘추에게 정2품 특진의 관작을 주고, 아들 문왕은 종3품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삼았다. 또한 김춘추가 귀국할 때 조정의 3품 이상 관리들에게 송별잔치를 열도록 조칙을 내리기도 하였다.
김춘추는 당 태종과의 협약에서 나당 간 군사연합을 맺고, 전쟁 이후 평양 이남 고구려 영역과 백제 토지도 할양받기로 약속받고 귀국하였다. 그때까지 신라가 당과의 외교에서 거둔 유례없는 성과였다. 아마 당시 신라가 기대한 대당외교의 최고치는 백제 병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 정벌이 시급했던 당 태종은 신라군을 동원하기 위해 평양 이남의 땅까지 주기로 약속한 것이다.주 005 하지만 당 태종이 곧 사망함으로써 신라의 고구려 원정도 물 건너갔다. 649년 5월 태종은 죽으면서 고구려 원정을 그만두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유언은 앞으로 고구려 원정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바로 그해의 원정계획에 맞추어 그동안 준비를 갖추어 왔고 이제 원정을 눈앞에 두고 있던 태종이 죽음을 맞으면서, 자신이 추진한 고구려 원정을 중단하라는 뜻이었다(임기환, 2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