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졸본·국내성기 도성의 구성과 군사방어체계
1. 졸본·국내성기 도성의 구성과 군사방어체계
1) 졸본시기 도성의 구성과 군사방어체계
고구려는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서 발흥했는데, 한의 현도군을 요동 방면으로 쫓아내면서 국가적 성장을 이룩했다. 첫 번째 도성인 졸본(卒本)은 압록강 지류인 혼강(渾江) 유역의 환인분지(桓仁盆地), 두 번째 도성인 국내지역(國內地域)은 압록강 본류 연안의 집안분지(集安盆地)로 비정된다. 졸본에서 국내로의 천도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한데(노태돈, 2012; 김현숙, 2017; 임기환, 2018), 천도의 주요 목적은 압록강 수로망을 활용해 국가체제를 정비함과 더불어 집안분지를 감싼 노령산맥(老嶺山脈)을 천연방어벽으로 삼아 군사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함으로 파악된다(여호규, 2005). 고구려를 건국 초부터 중원 왕조의 침공에 대비해 방어체계를 정비한 것이다.
대무신왕 11년에 한나라 군대가 침공하자, “바위산에 위치한 위나암성(尉那巖城)으로 들어가 수십일 동안 농성하며 방어했다”는 기사는 초기 도성의 방어체계를 잘 보여준다. 고구려가 험준한 요새지에 방어성을 축조해 적군이 침공하면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방어한 것이다. 이에 일찍이 고구려가 건국 초부터 평지성·산성의 도성방어체계를 구축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는데(關野貞, 1914), 한·중·일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魏存成, 1985; 차용걸, 1993; 김경삼, 1998). 다만 최근 고구려가 건국 초기에는 산성을 도성으로 삼았다며, 평지성·산성의 도성방어체계라는 통설을 비판하기도 했다(王志剛, 2016; 기경량, 2017).
〈광개토왕릉비〉(이하 ‘능비’로 줄임)는 고구려 초기 도성의 방어체계를 잘 보여준다. 능비에 따르면 “추모왕은 홀본(忽本, 卒本)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고 한다. 추모왕이 축조했다는 산 위의 성곽은 환인분지에서 가장 웅장한 오녀산성으로 비정된다. 오녀산은 신석기시대부터 주거지로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고구려가 건국 초부터 도성으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다만 오녀산은 해발 820m로 사방이 수직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평지와 격리되어 있다. 이러한 입지조건은 도성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방어성으로는 천혜의 입지조건이지만, 일상 거주지로는 적합하지 않다.

그림1 | 환인분지의 지형과 고구려 유적(여호규, 2014a)
그러므로 오녀산으로 비정되는 능비의 ‘산상 성곽’은 비상시 군사방어성이며, 평상시 거점은 별도로 존재했다고 파악된다. 능비에 나오는 ‘홀본’,즉 졸본은 ‘산상의 성곽’과 추모왕이 승천했다는 ‘동강(東岡)’의 위치를 표시하는 기준점에 해당한다. 고구려어인 ‘홀(忽)’이 고을이나 성(城)을 뜻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홀본(卒本)은 ‘평지에 위치한 평상시 거점’이라고 생각된다. 종래 졸본의 평지성을 하고성자고성(魏存成, 1994; 王綿厚, 2002; 박순발, 2012)이나 나합성(東潮·田中俊明, 1995; 노태돈, 1999b)으로 비정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하고성자고성은 오녀산의 서남쪽에 자리했는데, 홀본이 ‘산상 성곽’의 동쪽에 위치했다는 능비의 기술과 부합하지 않는다. 나합성은 오녀산 동쪽에 위치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뿐 아니라 고구려 성곽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오녀산의 동쪽에서 ‘홀본’으로 비정할 만한 가장 유력한 곳은 초기 고분군이 밀집한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 일대이다. 현재 고력묘자촌 일대는 환인댐에 수몰되었는데, 본래 남북 약 3km, 동서 1km의 평지가 혼강 연안을 따라 기다랗게 펼쳐져 있고, 사방이 산줄기로 둘러싸여 있었다. 남북 양쪽의 산줄기가 혼강 연안까지 뻗어 있어서 범람의 위험도 적었다. 다만 고력묘자촌 일대에서 고구려 성곽의 흔적은 발견된 바 없다. 이로 보아 고구려가 졸본 도성의 평지에는 성곽을 축조하지 않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충적대지를 평상시 거점으로 삼았던 것으로 추정된다(여호규, 2005; 2014; 양시은, 2014b; 2016; 권순홍, 2018).
초창기 연구처럼 고구려가 졸본시기에 평지도성을 축조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일찍부터 평상시 거점과 산성을 세트로 하는 도성방어체계를 구축했다고 추정된다. 다만 능비 찬자들이 ‘산상의 성곽’을 도읍이라고 인식한 것으로 보아 오녀산성은 군사방어성 이외의 기능도 지녔다고 보인다. 오녀산은 환인분지 어디서 보더라도 웅장하고 신비로운 모습을 띠는 상징적 존재이다. 이에 추모왕으로 대표되는 주몽 집단(계루 집단)은 맹주로 부상한 다음, 이곳에 임시 궁궐을 조영하고 각종 의례공간을 마련해 맹주로서의 위상을 표출했다고 여겨진다. 오녀산성은 비상시 군사방어성인 동시에 각종 의례를 거행하던 성소(聖所)였던 것이다(노태돈, 2012).
2) 국내성시기 도성의 구성과 군사방어체계
고구려는 국내 천도 이후에도 평상시 거점과 산성을 세트로 하는 도성방어체계를 구축했다. 2세기 말경 공손씨(公孫氏) 정권의 침공이 임박하자, 환도성(丸都城)을 축조해 이도(移都)했고(209년), 조위(曹魏)의 침공 시에도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방어했다(244~245년). 4세기 전반 전연(前燕)과의 긴장이 고조되자, 국내성을 축조하고 환도성을 보수한 다음 환도성으로 이거했다(342년). 3세기 전반에 평상시 거점에서 군사방어성(환도성)으로 옮긴 사실이 확인되고, 4세기 전반에는 국내성과 환도성을 세트로 하는 평지성·산성의 도성방어체계가 확립되었다.
현재 집안분지에는 국내성지와 산성자산성이 있다. 국내성지는 압록강·통구하 합류지점의 동북쪽 평지에 위치해 있는데, 둘레 2,686m로 많은 건물지가 확인되었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a). 국내성지 서북 2.5km에 위치한 산성자산성은 가파른 산비탈과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이다. 둘레 6,951m의 대형 산성으로 장대, 군사주둔지, 저수지, 대형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b). 이로 보아 국내성지는 평상시 도성인 국내성, 산성자산성은 비상시 군사방어성인 환도성으로 비정된다.

그림2 | 집안분지의 지형과 고구려 유적(여호규, 1998a)
다만 ‘국내성(國內城)’이라는 명칭은 4세기 전반에 처음 나오므로 언제부터 평상시 도성으로 기능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국내성지에 대한 1970년대 발굴에서는 고구려시기 이전의 토벽이 확인되었다고 했지만(集安縣文物保管所, 1984), 2000~2003년 발굴에서는 토벽과 석벽이 동시에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었고(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a), 2009~2011년의 동벽 조사에서는 토축 기초부와 석축 성벽이 4세기 초 이후에 함께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12a). 실제 국내성지에서 건물지 30여 곳을 조사했지만, 3세기 중반 이전의 고구려 유물은 출토된 바 없다(여호규, 2012). 현전하는 국내성지 성벽이 4세기 초 이전에 축조되었다고 보기 힘들다(심광주, 2005a; 2005b; 양시은, 2014b; 2016; 王志剛, 2016).
국내 천도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늦어도 3세기 전반에는 현재의 집안분지를 도성으로 삼았고, 국내 천도 초기부터 평상시 거점을 구축한 사실도 확인된다. 4세기 전반 현재의 국내성지를 축조하기 이전에 집안분지 어디엔가 평상시 거점이 존재한 것이다. 필자는 문헌사료에 집안분지 서쪽의 마선구(麻線溝) 일대가 ‘고국(故國)’으로 불린 사실에 주목해 국내 천도 초기에는 이곳을 평상시 거점으로 삼았다고 보았는데(여호규, 2005; 2014), 마선하(麻線河) 서쪽 평지에서 2세기 전후의 건강(建疆)유적이 조사되어(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集安市博物館, 2012b; 吉林大學邊疆考古硏究中心 외, 2015) 고고학적 논거를 확보할 수 있었다(강현숙, 2015; 여호규, 2019). 이에 대해 마선구 일대는 평상시 거점으로 삼기에 너무 협소하다며(임기환, 2018), 집안분지 중앙의 평지 일대를 평상시 거점으로 삼다가 4세기 전반에 국내성을 축조했다고 보기도 한다(王志剛, 2016; 기경량, 2017).
이상과 같이 고구려가 일찍부터 평상시 거점과 군사방어성을 세트로 하는 도성방어체계를 구축했지만, 처음부터 평지도성을 축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여호규, 2014; 양시은, 2021). 필자는 졸본시기나 국내 천도 초기에는 고력묘자촌이나 마선구 일대처럼 산줄기로 둘러싸인 곡간(谷間) 충적대지에 평상시 거점을 조성했다고 추정하지만, 논거가 충분한 상태는 아니다. 고구려가 4세기 전반에 국내성과 환도성으로 이루어진 평지성·산성의 도성방어체계를 구축한 것은 명확하지만, 그 이전의 도성 구조와 방어체계에 대해서는 더욱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