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4세기 전쟁 양상과 군사방어체계의 변천
2. 1~4세기 전쟁 양상과 군사방어체계의 변천
1) 요동~국내성 지역의 성곽 분포양상과 군사방어체계
고구려는 한의 현도군을 요동평원 방면으로 몰아내며 국가적 성장을 이룩했다. 1세기 말~2세기 초에는 소자하(蘇子河) 연안에 있던 제2현도군을 혼하(渾河) 연안으로 몰아내며 요동 동부 산간지대를 석권했다. 4세기 전반에는 혼하 연안까지 진출해 신성(新城: 撫順 高爾山城)을 축조하여 요동평원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으며, 5세기 초에는 요동평원 일대를 장악했다.
고구려 발흥지인 압록강 중상류에서 요동평원에 이르는 구간에는 고구려 성곽이 매우 조밀하게 분포한다. 다만 고구려가 요동평원 진출을 이룩한 직후인 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했으므로 요동평원 일대의 성곽은 국내성기보다 평양성기의 군사방어체계와 연관될 가능성이 더 높다. 요동평원을 제외하면 요동에서 국내성에 이르는 성곽은 대략 세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吉林省博物館輯安考古隊 외, 1964; 遲勇, 1993; 여호규, 1998b; 양시은, 2013; 2016).주 001
첫째 그룹은 두 번째 도성인 국내성(집안분지) 외곽의 노령산맥에 위치한 산성이나 관애인데, 교통로에 따라 5개 소그룹으로 묶을 수 있다(그림3 참조).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대라권구하(大羅圈溝河) 유역의 이도구문관애·석호관애, 청하(淸河: 葦沙河) 유역의 관마장관애·대천초소, 신개하(新開河) 유역의 패왕조산성·망파령관애, 환인 남부에서 집안으로 들어오는 통로의 성장립자산성·와방구산성·북구관애, 압록 강변의 칠개정자관애·노변장관애 등이다.

그림3 | 국내성기의 고구려 군사방어체계(여호규, 1998a)
- 21. 集安 國內城 22. 集安 山城子山城 23. 集安 覇王朝山城 24. 集安 望波嶺關隘 25. 集安 關馬墻關隘 26. 集安 大川哨所 27. 集安 七個頂子關隘 28. 集安 老邊墻關隘 31. 桓仁 五女山城 32. 桓仁 下古城子古城 33. 桓仁 喇哈城址 34. 桓仁 馬鞍山城 35. 桓仁 高儉地山城 36. 桓仁 城墻砬子山城 37. 桓仁 瓦房溝山城 38. 桓仁 北溝關隘 39. 桓仁 東古城・西古城 41. 新賓 黑溝山城 42. 新賓 四道溝山城 43. 新賓 轉水湖山城 44. 新賓 孤脚山山城 51. 通化 自安山城 52. 通化 赤柏松古城 53. 通化 建設山城 54. 通化 南台古城 55. 通化 太平溝門古城 56. 通化 依木樹古城 57. 通化 英戈布山城 58. 通化 二道溝門關隘 59. 通化 石湖關隘 61. 新賓 白旗堡古城 62. 新賓 二道河子舊老城 63. 新賓 永陵鎭古城 64. 新賓 頭道砬子山城 65. 新賓 櫃子石山城, 河西村古城 66. 新賓 五龍山城 67. 淸原 山城子山城 68. 撫順 鐵背山城 69. 撫順 高爾山城 71. 柳河 羅通山城 72. 輝南 釣魚臺古城 73. 輝南 小城子古城 74. 輝南 輝發山古城 81. 新賓 太子城 82. 新賓 杉松山城 83. 本溪 下堡村山城 84. 本溪 有官山城 85. 本溪 邊牛山城 91. 丹東 靉河尖古城 92. 寬甸 虎山山城 93. 寬甸 挂房子村東山山城 94. 寬甸 老孤山山城
- 21. 集安 國內城 22. 集安 山城子山城 23. 集安 覇王朝山城 24. 集安 望波嶺關隘 25. 集安 關馬墻關隘 26. 集安 大川哨所 27. 集安 七個頂子關隘 28. 集安 老邊墻關隘 31. 桓仁 五女山城 32. 桓仁 下古城子古城 33. 桓仁 喇哈城址 34. 桓仁 馬鞍山城 35. 桓仁 高儉地山城 36. 桓仁 城墻砬子山城 37. 桓仁 瓦房溝山城 38. 桓仁 北溝關隘 39. 桓仁 東古城・西古城 41. 新賓 黑溝山城 42. 新賓 四道溝山城 43. 新賓 轉水湖山城 44. 新賓 孤脚山山城 51. 通化 自安山城 52. 通化 赤柏松古城 53. 通化 建設山城 54. 通化 南台古城 55. 通化 太平溝門古城 56. 通化 依木樹古城 57. 通化 英戈布山城 58. 通化 二道溝門關隘 59. 通化 石湖關隘 61. 新賓 白旗堡古城 62. 新賓 二道河子舊老城 63. 新賓 永陵鎭古城 64. 新賓 頭道砬子山城 65. 新賓 櫃子石山城, 河西村古城 66. 新賓 五龍山城 67. 淸原 山城子山城 68. 撫順 鐵背山城 69. 撫順 高爾山城 71. 柳河 羅通山城 72. 輝南 釣魚臺古城 73. 輝南 小城子古城 74. 輝南 輝發山古城 81. 新賓 太子城 82. 新賓 杉松山城 83. 本溪 下堡村山城 84. 本溪 有官山城 85. 本溪 邊牛山城 91. 丹東 靉河尖古城 92. 寬甸 虎山山城 93. 寬甸 挂房子村東山山城 94. 寬甸 老孤山山城
혼강 유역에서 노령산맥을 넘어 집안분지로 향하는 모든 교통로에 산성이나 관애를 축조한 것이다. 이 가운데 규모가 비교적 큰 패왕조산성, 성장립자산성, 와방구산성은 혼강 연안에서 집안 지역으로 진입하는 교통로의 길목에 위치해 있고, 다른 소형 관애나 초소는 집안분지로 향하는 교통로의 요충지에 위치해 있다. 특히 석호관애나 관마장관애는 하류 방면에만 참호시설이 있어 혼강 지류를 거슬러 집안분지로 향하는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구축했음을 잘 보여준다(『通化縣文物志』; 吉林省博物館輯安考古隊 외, 1964).
또한 칠개정자관애와 노변장관애가 위치한 압록강 구간은 사행천(蛇行川)으로 암초가 많아 항해하기에 위험하다. 이에 압록강을 항해하는 배들은 이들 관애가 위치한 양수하(凉水河)나 외차구하(外岔溝河)에 정박한 다음 육로를 이용해 집안분지로 나아갔다(『集安縣文物志』). 노변장관애와 칠개정자관애는 이러한 상륙로를 봉쇄하던 방어시설인 것이다. 따라서 노령산맥 일대의 산성과 관애는 국내성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도성 외곽의 방어시설이라 할 수 있다.
둘째 그룹은 혼강 우안(右岸)의 성곽인데, 평지성을 제외하면 대략 3개 소그룹으로 묶인다. 먼저 태자하(太子河)나 소자하 유역에서 환인 서부로 진입하는 교통로에 위치한 고검지산성과 마안산성이다. 다음으로는 소자하 상류에서 부이강(富爾江) 연안을 따라 혼강으로 향하는 교통로에 위치한 전수호산성, 흑구산성 등이다. 소자하에서 부이강 상류를 거쳐 통화 방면으로 향하는 교통로의 의목수고성, 영과포산성도 하나의 그룹으로 묶을 수 있다. 통화 자안산성은 둘레 2.7km의 대형 석성으로 상기 교통로의 끝단에 위치해 있으면서 휘발하(輝發河)에서 용강산맥(龍崗山脈)을 넘어 집안분지로 나아가는 교통로를 봉쇄할 수 있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산 정상에 위치해 있고, 절벽이나 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는 등 축성법도 유사하다. 또한 소자하나 태자하 등에서 혼강 유역으로 진입하는 교통로의 요충지에 위치해 있다. 신빈 전수호산성에 올라서면 부이강 상류에서 하류로 향하는 적군의 동태를 한눈에 감시할 수 있고(撫順市博物館·新賓縣文化局, 1991), 환인 고검지산성에 올라서면 태자하·혼강 분수령을 넘어 혼강 유역으로 진입하는 적군의 움직임을 세세히 파악할 수 있다(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12a).주 002 둘째 그룹은 요동 방면에서 태자하나 소자하 등을 거쳐 혼강 곧 압록강 중류 일대로 진입하던 적군을 방어하던 시설로 파악된다. 노령산맥 일대의 성곽이 도성 외곽의 방어시설이었다면, 이들은 압록강 중류 일대 전체를 방어하기 위한 군사방어선인 것이다.
셋째 그룹은 요동평원에서 혼강 유역으로 나아가는 하천 연안에 위치한 성곽으로 4개 소그룹으로 묶인다. 먼저 혼하~소자하 연안의 성곽으로 무순 고이산성과 철배산성, 신빈 오룡산성과 이도하자구노성 등이 매우 조밀하게 분포해 있다. 이는 혼하~소자하 연안로가 요동과 국내성을 잇는 가장 중요한 간선교통로였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다음으로 태자성, 하보촌산성 등 태자하 중상류의 산성을 하나로 묶을 수 있고, 압록강 하류 방면의 관전 호산산성과 괘방자촌산성도 하나의 권역을 이룬다. 마지막으로 청원 산성자산성과 유하 나통산성 등도 혼하 상류와 휘발하 유역을 거쳐 압록강 유역으로 진입하는 교통로상의 성곽으로 묶을 수 있다.
이들은 요동평원에서 여러 하천 연안로를 거쳐 혼강 유역으로 진격하는 적군을 방어하던 군사시설이다. 고구려가 요동평원으로 진출하기 이전에는 이곳이 최전방이었다는 점에서 국경지대의 방어체계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들은 고구려가 요동평원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기지의 역할도 수행했다. 이들 성곽도 기본적으로는 군사방어성의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상기와 같이 요동에서 국내성에 이르는 지역의 성곽은 세 그룹으로 분류된다. 먼저 요동평원과 혼강 유역 사이의 성곽은 하천 연안로를 따라 줄지어 분포한다는 점에서 종심(縱深, 軸線)방어체계라 할 수 있다. 요동 방면의 적군이 혼강 유역으로 진입하려면 특정한 하천 연안로를 따라 진군해야 했는데, 이를 방어하기 위해 종심(축선)방어체계를 구축한 것이다.
혼강 우안의 성곽은 각 지류 연안을 따라 종심을 이루며 전체적으로는 호형(弧形)을 띤다. 이는 혼강 유역으로 진입한 적군이 어느 지류를 따라 혼강 본류 방면으로 진격하더라도 모두 방어하기 위한 전략과 연관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노령산맥 일대의 성곽은 국내성을 중심으로 호형을 이루는데, 도성으로 향하는 모든 교통로를 봉쇄하기 위한 전략과 연관되어 있다.
이처럼 국내성기의 군사방어체계는 국경지대의 종심방어체계, 혼강 우안의 호형·종심방어체계, 도성 외곽의 호형방어체계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혼강 우안의 호형·종심방어체계는 국경지대의 종심방어체계를 도성 외곽의 호형방어체계로 전환하면서 양자를 결합시키고 있다. 국내성기에는 여러 계통의 성곽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입체적 군사방어체계를 구성한 것이다.주 003
2) 전쟁 양상의 변화와 군사방어체계의 구축 과정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는 군사방어성의 성격이 강한 산정식산성이 많이 분포하는 반면, 요동 방면으로 나아가면서 포곡식산성이 점차 증가한다(여호규, 1999a; 양시은, 2016). 이는 4세기 이후 지방제도 정비로 인해 성곽의 거점적 기능이 강화된 결과이다(임기환, 1998). 신빈 오룡산성과 태자성, 무순 고이산성 등이 군사방어성과 함께 거점성의 기능을 겸비한 대표적인 산성이다. 이로 보아 거점성의 기능이 강한 이들 성곽은 대체로 4세기 이후에 축조되었다고 추정된다. 국내성기의 군사방어체계는 여러 차례에 걸쳐 단계적으로 구축된 것이다.
1~4세기의 전쟁 양상은 군사방어체계가 단계적으로 구축되었을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 전투지역의 경우, 1~2세기에는 고구려나 후한 모두 상대방의 정치적 중심지로 바로 진공했기 때문에 중간지대에서 전투하는 양상이 잘 찾아지지 않는다. 반면 3세기에는 고구려가 조위의 관구검 군대를 비류수(沸流水: 혼강)나 양맥(梁貊: 태자하 상류)에서 방어한 데서 보듯이 전투지역이 국경과 도성의 중간지대로 변모했다. 그러다가 4세기 전연과의 전쟁에서는 혼하 연안의 신성이나 소자하 연안의 남소성·목저성 등 국경지대의 성곽이 주요 전장으로 등장한다.
전투 장소와 함께 고구려가 동원한 병력 규모도 변화했다. 가령 고구려가 1~2세기에는 불과 5,000~1만 명 전후를 동원했지만, 3세기 중엽에는 2만 명으로 증가했다가 4세기에는 5만 명을 상회하게 된다. 이로 보아 국내성기 고구려의 군사방어체계는 단계적으로 구축되었을 뿐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고 운영하던 병력동원체계도 함께 변화했다고 여겨진다(여호규, 1998c; 2007).
앞서 서술했듯이 고구려는 건국 초부터 평상시 거점과 산성을 세트로 하는 도성방어체계를 구축했다. 다만 1~2세기에는 적군이 곧바로 도성까지 진격하거나, 고구려군도 주로 험준한 자연지형을 이용해 적군을 물리쳤다. 고구려가 1~2세기에는 국경에서 도성에 이르는 중간지대에 별다른 방어시설을 구축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로 인해 1~2세기만 하더라도 도성의 군사방어성에서 농성하는 수성전(守城戰)이 주요 전술로 채택되었고, 3세기 전반에는 외침의 위협이 상존하자 군사방어성을 임시 왕성으로 삼았다.주 004
1~2세기에 평상시 거점과 산성을 세트로 하는 도성방어체계 외에 다른 방어체계를 구축하지 못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병력 동원체계가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당시 고구려는 계루부 왕실이 자치권을 보유한 여러 나부(那部)와 함께 국정을 운영했는데, 전쟁도 각 나부의 전사단(戰士團)을 동원해 수행했다. 이로 인해 상시 운용하는 병력 규모는 시위대나 종자단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고, 인공방어시설을 대대적으로 구축하여 상시 운용하기가 힘들었다.
3세기 이후 전사 중심의 병력 동원방식은 점차 공민(公民)을 징발하는 형태로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병력 동원 규모도 2~4배 증가했다. 더욱이 3세기 전반에는 공손씨와 조위의 잇따른 침공으로 항상 군사적 긴장이 감돌았다. 이에 고구려는 도성 외곽인 노령산맥과 혼강 우안 일대에 본격적으로 방어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동천왕이 비류수·양맥에서 조위의 관구검 군대와 격전을 치른 것에서 보듯이 방어전술도 국경과 도성의 중간지대에서 적군을 저지하는 방식으로 전환하였다.
3세기 말 이후에는 정복지역에도 성곽을 축조해 민정과 군정을 아우르는 지방관을 파견해 지방제도와 방어체계를 정비했다(여호규, 1995; 김현숙, 2005). 혼하~소자하 연안로나 태자하 중상류 등 국경지대의 성곽은 대체로 이 무렵부터 축조되었다(임기환, 1998). 이로써 국경지대의 성곽을 거점으로 삼아 적군을 방어했는데, 4세기 전반 신성(新城: 고이산성), 남소성(南蘇城: 철배산성), 목저성(木底城: 목기진 일대) 등에서 전연과 격전을 벌인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국경지대의 종심방어체계는 4세기 전반부터 구축되었고, 이에 따라 국경지대에서 도성에 이르는 입체적 군사방어체계가 완비되었다(여호규, 1998b).
이러한 입체적 군사방어체계는 대규모 상비병을 바탕으로 구축할 수 있었다. 고구려는 342년 전연과의 전쟁에 5만 명을 상회하는 대군을 동원했다. 4세기 중반에 일정 연령 이상의 모든 성인 남자를 징발하는 징병제가 확립되었다고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최소한 입체적 군사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운용할 정도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고 파악된다. 이는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더불어 지방제도를 정비하여 정복지역의 백성까지 고구려민으로 편입한 결과이다.
이처럼 국내성기의 군사방어체계는 평상시 거점·산성의 도성방어체계, 도성 외곽의 호형방어선, 혼강 우안의 호형·종심방어체계, 국경지대의 종심방어체계 등 여러 계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방어체계는 일시에 확립된 것이 아니라 각 시기별 병력동원체계를 바탕으로 단계적으로 구축되었다. 특히 4세기 전반에는 지방제도의 정비로 정복지역의 백성까지 고구려민으로 편입하여 병력을 대규모로 징병하는 군사동원체계를 갖추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국경지대에서 도성에 이르는 입체적 군사방어체계를 완비할 수 있었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