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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3. 평양 천도와 군사방어체계의 재구축

3. 평양 천도와 군사방어체계의 재구축

1) 평양 천도와 도성방어체계의 재구축
고구려는 광개토왕 시기의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특히 오랜 숙원이었던 요동평원을 장악해 중원 왕조를 축출했다. 그런데 당시 수도였던 국내성은 산간에 위치해 광활한 판도를 경영하기에는 공간이 협소하고 교통도 불편했다. 더욱이 북위가 북중국을 석권하고 동방 진출을 노리고 있었는데, 국내성은 두 차례나 함락된 적이 있었다. 이에 고구려는 광활한 영토를 원활하게 운영하고 북위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427년).
435년(장수왕 23)에 고구려 평양성을 방문한 북위 사신 이오(李敖)에 따르면, “(도성은) 요동의 남쪽 1,000여 리에 위치했고, (영토는) 동쪽으로 책성(柵城), 남쪽으로 작은 바다(小海), 북쪽으로 옛 부여(舊夫餘)에 이르렀는데, 인구는 조위시기의 3배였고, 그 땅은 동서 2,000리, 남북 1,000리에 달했다”고 한다(『위서』 권100 고구려전). 이 가운데 책성은 두만강 하류의 혼춘(琿春), 옛 부여는 북류 송화강의 길림(吉林) 지역으로 비정된다. 고구려가 5세기 전반에 요동평원뿐 아니라 북쪽으로 북류 송화강, 동쪽으로 두만강에 이르는 영역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5세기 후반에 들어와 고구려는 북위와의 외교관계를 개선한 다음, 475년에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켜 한강 유역을 석권했고, 481년에는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 도성 북방까지 진격했다. 479년에는 유연(柔然)과 함께 대흥안령산맥 일대의 지두우(地豆于) 분할을 도모하는 한편, 494년에는 이통하(伊通河) 유역의 농안(農安) 일대에서 명맥을 유지하던 후부여의 투항을 받았다. 이를 통해 고구려는 한반도 중북부에서 만주 중남부에 이르는 광활한 영역을 확보했다.
5세기 이후 고구려가 영역을 크게 확장하고, 평양을 새로운 도성으로 삼은 것이다. 이에 고구려는 평양 도성을 중심으로 군사방어체계를 재구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고구려 영역은 크게 중심부인 평양과 서북한 일대, 압록강 유역, 요동평원-반도, 북류 송화강 유역, 두만강 유역과 동해안 방면, 한반도 중부지역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박경철, 1989; 여호규, 2020a; 신광철, 2022), 각 권역의 전략적 중요도를 고려하여 군사방어체계를 구축했을 것이다.
고구려는 평양 천도 이후에도 평지성·산성의 도성방어체계를 구축했는데, “도성은 평양성인데 … 성안에는 오직 양식과 무기만 비축했다가 적군이 침입하면 곧바로 들어가 지켰다. 왕은 별도로 그 곁에 궁실을 마련했으며, 평상시에는 거주하지 않았다”는 『주서(周書)』 고려전의 기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고구려는 평양 천도 직후에는 현재의 평양시 동북 일대를 도성으로 삼았다. 군사방어성은 대성산성으로 비정되는데, 둘레 7,076m인 포곡식산성으로 장대터, 병영터, 창고터 등이 확인되었다. 170여 개의 연못과 저수지를 조성해 대규모 인원이 장기간 농성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남쪽의 대동강, 서쪽의 합장강, 동쪽의 장수천이 천연해자를 이루며, 대동강변의 고방산성과 청호동토성이 방어성을 이루고 있다(『대성산성의 고구려 유적』).
대성산성과 짝을 이룬 평지성에 대해서는 안학궁설과 청암리토성설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안학궁지는 대성산성 남쪽 평지에 위치해 있는데, 마름모꼴로 둘레 2,488m이다. 5개 건물군 총 21개 건물이 확인되었는데, 모두 궁궐의 전각이나 부속시설로 궁성(宮城)의 성격이 강하다(『대성산성의 고구려 유적』). 다만 안학궁지 아래층에서 고구려 석실봉토분이 발견되었고(전제헌·손량구, 1985), 기와도 대부분 고구려 말기나 고려시기로 편년된다는 점에서(千田剛道, 1983) 대성산성과 짝을 이룬 평지성으로 보기 어렵다(關野貞, 1928; 田中俊明, 2004; 박순발, 2012).
청암리토성은 대동강에 면한 구릉을 따라 둥그스름하게 축조했는데, 둘레는 약 5km로 성문터와 구릉 남쪽에서 건물터가 발견되었다(小泉顯夫, 1986; 민덕식, 1989). 일찍부터 일본 학자들은 청암리토성을 평지 도성으로 추정했는데(關野貞, 1928), 최근 국내 학자들도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박순발, 2012; 여호규, 2014; 양시은, 2016). 다만 청암리토성의 건물터는 절터로 확인되었고, 궁궐이나 관아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전기 평양성 단계에서는 대성산성만 조영했다고 보기도 한다(기경량, 2017; 권순홍, 2018). 그렇지만 4세기에 국내성을 축조했던 고구려가 평양 천도 이후 평지도성을 조영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양시은, 2021).
그림4 | 평양 지역 고구려 유적 분포(『조선유적유물도감』 3)
6세기 중반 나제연합군이 북상하고 북제가 압력을 가하는 등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자, 고구려는 552년부터 현재의 평양 시가지에 장안성을 건설해 586년에 도성을 옮겼다. 대외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신수도를 건설한 것이다(田中俊明, 1984). 장안성(현 평양성)은 전체 둘레 23km의 초대형 성곽으로 동·남·서 3면은 대동강과 보통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모란봉으로 가로막힌 천혜의 요새이다. 각자성석(刻字城石)을 통해 42년의 공사 끝에 완공했음을 알 수 있다(기경량, 2017). 성문터와 장대 등 성곽시설과 함께 궁궐로 추정되는 건물지, 격자형 도로망 등이 확인되었다(최희림, 1967; 1978; 한인호·리호, 1993; 한인호, 1995).
그림5 | 서북한 지역의 고구려 성곽과 군사방어체계
- [압록강-청천강 유역] 1. 백마산성 2. 걸망성 3. 용골산성 4. 동림산성(통주성) 5. 능한산성 6. 니성 7. 농오리산성 8. 철옹성 9. 안주성 29. 관전 호산산성 30. 단동 애하첨고성
[대동강 유역과 그 주변] 10. 숙천읍성 11. 청룡산성 12. 흘골산성 13. 평양성 14. 대성산성 15. 황룡산성
[재령강 유역] 16. 황주성 17. 휴류산성 18. 대현산성 19. 고현리성 20. 구월산성 21. 장수산성 22. 신원도시유적
[황해도 해안과 예성강 유역] 23. 수양산성 24. 태백산성 25. 치악산성 26. 봉세산성 27. 옹진고성 28. 오누이성
장안성은 복곽식성곽으로 북성과 내성은 산성, 중성과 외성은 평지성인데,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되었다는 의미에서 평산성(平山城)으로 분류하기도 한다(공석구, 1998). 내성은 궁성, 중성은 관아와 귀족의 저택, 외성은 귀족이나 일반민의 거주지, 북성은 별궁이자 방어성으로 추정된다. 장안성은 종래 별개로 조영했던 평지도성과 군사방어성을 하나의 성곽으로 일체화시킨 형태로 고구려 도성방어체계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적군이 침입하더라도 평상시 도성의 시설물이나 물자를 온전히 보전한 채 장기간 항전할 수 있게 되었다(채희국, 1985).
고구려는 외부에서 도성으로 진입하는 적군을 차단하기 위해 도성 외곽의 방어망도 구축했다. 서북 방면만 차단하면 됐던 국내성과 달리, 평양 도성은 사방에서 침공을 받을 위험성이 있었다. 이에 평양에서 사방 30~50여 km 떨어진 거리에 환상(環狀)으로 위성방어체계를 확립하는 한편, 그 외곽에도 이중 삼중의 방어망을 구축했다.
위성방어체계는 각 방면에서 평양으로 진입하는 통로를 봉쇄하는 형태로 구축했는데, 서쪽의 황룡산성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적군, 서북쪽의 청룡산성은 압록강을 건너 연해를 따라 남진하는 적군, 동북쪽의 흘골산성은 내륙을 통해 남진하는 적군이나 동해안에서 낭림산맥을 넘어 서진하는 적군, 남쪽의 황주성은 재령강 유역을 거쳐 북상하는 적군 등을 각기 방어했다. 산복식인 황주성을 제외하면 모두 포곡식산성으로 둘레 5~6km에 이르는 대형 산성이다(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1975; 리지린·강인숙, 1976; 서일범, 1999; 이성제, 2011).
위성방어체계 너머로는 외곽방어성을 겹겹이 축조했다. 북쪽에는 청룡산성을 지나 숙천읍성, 안주성 등을 구축했다. 남쪽에는 황주성을 지난 20km 지점에 봉산 휴류산성, 휴류산성 동남쪽에 서흥 대현산성(오곡성)과 평산 태백산성, 서남쪽에 신원 장수산성(한성)과 해주 수양산성 등을 축조했다. 이들 성곽은 대부분 중대형 포곡식산성으로 지방 지배를 위한 거점성의 역할도 수행했다. 394년과 409년에 축조했다는 국남(國南) 7성과 국동(國東) 6성을 이러한 외곽방어성으로 보기도 한다(채희국, 1985; 최창빈, 1990).
 
2) 서북 방면(요하 유역~서북한 일대) 군사방어체계의 구축
고구려는 평양 천도 이후 중원 왕조나 유목 제국의 침공에 대비해 요하 유역에서 평양성에 이르는 서북 방면의 방어체계를 구축하는 데 가장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천산산맥(千山山脈)이나 압록강 등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해 이중 삼중의 방어망을 확립했다. 대체로 최전방의 전연방어선(前沿防禦線), 요동~압록강의 제1선 종심방어체계, 압록강~청천강의 제2선 종심방어체계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박창수, 1990; 남일룡, 1995; 여호규, 1999b; 양시은, 2016).
최전방의 전연방어선은 요하를 건넌 적군을 막기 위한 방어벽이었다. 이 방어선의 성곽은 대부분 요동평원에서 천산산맥으로 나아가는 진입로 입구에 위치해 있고, 산줄기에서 하곡평지로 돌출한 산에 위치한 포곡식산성이 많다. 산간지형에 익숙한 고구려인들이 요동평원 진출 이후에도 산성 중심의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대평원보다 지류 연안의 하곡평지를 더 중시한 것이다. 다만 요하를 건너는 적군을 저지하기 위해 무려라(武勵邏) 등의 성보를 요하 연안에 축조하고(이정빈, 2011; 2018; 이성제, 2013b), 말기에는 송료대평원주 005
각주 005)
송료대평원은 중국 동북평원, 요동대평원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데, 이 글에서는 송화강(松花江) 유역에서 요하(遼河) 하구에 이르는 대평원이라는 뜻에서 ‘송료대평원(松遼大平原)’으로 부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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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가로질러 천리장성을 축조하기도 했다(여호규, 2000).
전연방어선은 대흑산맥 서남단에서 천산산맥 서남단에 이르는 구간의 모든 지류 진입로를 봉쇄하며 거대한 방어벽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산성으로 연결된 방어선이라는 뜻에서 ‘산성연방선(山城聯防線)’이라 부르기도 한다(陳大爲, 1989). 이 가운데 대흑산맥~길림합달령산맥 구간은 구 도성인 국내성으로 진격하는 적군, 그리고 거란 등 서북방 족속을 방어하기 위해 구축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구간의 성곽 가운데 상당수는 평양 천도 이전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여호규, 1999a; 양시은, 2016; 홍밝음·강동석, 2021).
이에 비해 길림합달령산맥~천산산맥 구간의 성곽은 요하를 건넌 적군이 요동평원을 거쳐 평양성으로 진공하는 것을 막기 위해 축조한 것이다. 7세기 전반 수나 당이 침공했을 때 등장하는 개모성(심양 탑산산성), 요동성, 백암성, 안시성(해성 영성자산성), 건안성(개주 고려성산성)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들은 천산산맥을 넘어 압록강으로 향하는 진입로 입구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전연방어선인 동시에 요동평원~압록강 종심방어선의 출발점을 이룬다.
요동~압록강 구간의 제1선 종심방어체계는 천산산맥 횡단로를 따라 세 경로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의 본계~봉성로 종심방어선은 탑산산성이나 요동성에서 출발해 본계에서 합류한 다음 천산산맥을 넘어 애하 골짜기를 따라 봉황산성(오골성)에 이르는 구간, 중간의 해성~수암로는 영성자산성을 출발해 낭랑산성에 이르는 구간, 서쪽의 개주~장하로는 고려성산성을 출발해 벽류하 골짜기를 따라 성산산성에 이르는 구간에 각기 구축되어 있다.
각 경로는 천산산맥을 넘은 다음 요동반도 남쪽 해안을 따라가다가 압록강 하류에서 합쳐진다. 이에 요동반도 서남단의 대흑산성(비사성)을 중심으로 해안방어체계를 구축해 발해만을 건너온 수군(水軍)을 방어하는 한편, 제1선 종심방어체계를 보완했다. 제1선 종심방어체계가 합쳐지는 압록강 하류는 그 자체가 거대한 방어벽인데, “강폭이 300보에 이르러 고구려인들이 천혜의 해자(天塹)로 믿었다”는 『한원(翰苑)』 고려전의 기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압록강 하류에서 평양성으로 나아가는 교통로는 연해와 내륙 두 경로가 있다. 이에 고구려는 두 경로를 따라 제2선 종심방어체계를 구축했다. 연해의 종심방어선은 압록강 대안의 백마산성을 출발해 용골산성·동림산성·능한산성 등을 거쳐 청천강 하류의 안주성에 이르러 도성의 외곽방어선과 연결된다. 내륙의 종심방어선은 니성·농오리산성·철옹성 등을 거쳐 안주성으로 연결되거나 계속 내륙로를 따라 청룡산성·흘골산성으로 이어지며 도성의 위성방어체계로 전환된다.주 006
각주 006)
서북 방면 방어체계의 구성과 운용 양상에 대해서는 이 책 8장에서 보다 상세하게 고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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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반도 중남부 방면 방어체계의 구축
고구려는 남진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한반도 중남부 방면에도 방어체계를 구축했다. 전술한 황해도 일대의 성곽은 평양성의 외곽방어성이면서 남진을 위한 전초기지라 할 수 있다. 실제 대현산성·태백산성은 평양에서 서울로 나아가는 간선도로, 장수산성·수양산성은 멸악산맥을 넘어 해주만으로 나아가는 교통로에 위치해 있다. 또 황해도 해안에는 풍천성, 오누이산성, 옹천성 등을 일정 간격으로 배치해 해안방어체계를 구축했다(김경찬, 1992; 1993; 1996; 신형식 외, 2000).
고구려는 이러한 방어체계를 바탕으로 남진을 추진했다. 5세기 초에 임진강과 북한강 유역까지 진격한 다음, 475년에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키고 한강 유역을 석권했다. 481년에는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의 도성까지 압박했다. 고구려는 이때부터 6세기 중반까지 한반도 중부지역을 지배했고, 나제연합군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이후에도 임진강 일대를 계속 장악했다.
이로 보아 고구려는 중부지역에도 방어체계를 구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지역에서는 중대형 산성이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주로 소형 보루(堡壘)가 조사되었는데, 모든 지역에 골고루 분포하지 않고 임진강 유역, 양주분지, 한강 북안의 아차산 일대 등에 밀집 분포한다(최종택, 1999; 2013; 심광주, 2001; 2008; 백종오, 2006; 2014; 양시은, 2010b; 윤성호, 2019). 이에 고구려가 한반도 중부지역에 대해서는 전역을 지배하지 못하고, 전략적 거점만 장악했다고 보기도 한다(심광주, 2001; 서영일, 2002; 안신원, 2010; 신광철, 2011a; 2011b; 이정범, 2015).
고구려 보루의 분포양상만 본다면 이렇게 볼 수도 있지만, 475년 이후 상당 기간 임진강~아차산 일대가 최전방이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는 한성을 함락시킨 다음 백제를 차령산맥 남쪽으로 밀어내는 한편, 481년에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 도성까지 압박했다. 고구려가 백제와는 차령산맥, 신라와는 소백산맥 일대에서 대치한 것이다. 이에 고구려는 차령산맥과 소백산맥을 자연방어벽으로 삼는 한편, 백제와 치열한 각축전이 전개된 아산만과 미호강 일대에 안성 도기동산성(김진영, 2017), 청원 남성골산성(차용걸 외, 2004) 등 성곽을 비교적 조밀하게 축조하여 군사 방어를 도모했다(여호규, 2022a).
이때 고구려는 주로 종전의 백제 성곽을 재활용했는데, 서북 방면과 달리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을 투입하여 방어체계를 구축한 것이다. 중부지역에 대한 지방지배도 한강변에 남평양이나 국원성 등 평지거점을 구축해 한강 수로를 통해 각종 물자를 집하(集荷)한 다음, 해주만과 재령강 상류의 한성 별도(別都)를 경유해 평양 도성으로 운송했다. 고구려가 서북 방면과 달리 한반도 중부지역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을 투입해 방어체계를 구축하는 전략을 구사했는데, 임진강~한강 유역에 소형 보루를 축조한 것은 이와 연관된다(여호규, 2020b).
그런데 551년에 나제연합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함에 따라 상황이 급변했다. 이때 백제는 한강 남쪽의 옛 도성을 수복한 다음, 북안의 남평양을 공략했다. 아차산 일대가 순식간에 최전방으로 탈바꿈한 것인데(채희국, 1985; 최창빈, 1990), 구의동보루가 통째로 불타고 대부분의 보루에 유물이 다량 남은 것에서 보듯이 고구려군은 황급히 퇴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고구려군은 양주분지를 둘러싼 천보산맥을 방어벽으로 삼아 백제·신라의 북상을 저지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양주분지로 통하는 모든 교통로를 공제하는 형태로 보루를 축조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특히 630년대부터 임진강을 경계로 신라와 각축전을 벌임에 따라 임진강 북안에 더욱 촘촘히 보루를 배치했을 것이다. 임진강 연안의 보루가 최전방 방어선으로 바뀐 것이다(신광철, 2022). 이처럼 임진강~한강 북안의 보루는 고구려의 영역 변동과 함께 성격이 변화했다. 고구려가 한반도 중부지역으로 진출하거나 점령했을 때는 남진을 위한 전초기지나 중간기지 역할을 수행했지만,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퇴각할 때는 최전방 방어선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보루의 배치나 운용 양상도 변화했을 텐데, 향후 더욱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주 007
각주 007)
한반도 중남부 방면 방어체계에 대해서는 이 책 9장에서 상세히 고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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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동북 방면(두만강~송화강 유역)의 방어체계
고구려는 국가체제를 확립한 다음 주변지역 가운데 가장 먼저 함경도 동해안과 두만강 방면으로 진출했다. 고구려는 압록강 상류 연안과 함경북도 해안을 따라 두만강 방면의 북옥저로 진출한 다음, 1세기 중후반에 후한의 유화책을 틈타 개마고원을 넘어 함흥평야의 동옥저를 점령했다. 244~245년 조위가 침공했을 때, 동천왕이 동옥저를 거쳐 북옥저까지 피신한 데서 보듯이 고구려는 이 지역에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다만 3세기 중반까지는 대체로 토착세력을 매개로 간접지배를 시행했기 때문에 방어체계도 본격적으로 구축하지 못했다고 추정된다.
고구려는 3세기 후반부터 함경도 해안의 교통로를 활용해 지방통치조직을 본격적으로 정비했다. 〈광개토왕릉비〉 수묘인연호조에는 매구여민(賣句余民: 북옥저의 중심인 琿春 일대), 동해고(東海賈: 청진 일대), 돈성(敦城: ‘東北 新城’으로 길주 일대), 우성(于城: 동옥저 중심인 함흥 일대), 비리성(碑利城: 동예의 중심인 안변 일대) 등을 순차적으로 기술했는데, 함경도 해안지대를 하나의 권역으로 설정하여 지방통치조직을 정비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김영하, 1985; 임기환, 1987; 여호규, 2008). 함경도 지역에서는 청진 부거석성과 단천 가응산성을 비롯해 10여 개 전후의 고구려 성곽이 확인되었는데(양시은, 2016, 274~275쪽 도표 참조),주 008
각주 008)
채희국, 1985, 146쪽 도표에는 2개, 지승철, 2005, 250~251쪽 도표에는 함경북도 5개, 함경남도(북한의 강원도로 편성된 문천, 안변 포함) 20개 등 총 25개가 확인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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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경지역이 아니라는 점에서 대체로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으로 기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양상은 두만강 유역에서도 확인된다.주 009
각주 009)
두만강 유역 가운데 하류의 혼춘분지는 북옥저의 중심지로 고구려가 1세기경에 진출했고, 5세기에는 책성을 설치한 것으로 확인된다. 반면 포이합통하 유역으로 진출한 시기는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최근 고구려가 백두산 북쪽 경로를 거쳐 포이합통하 유역으로 진입했다거나(이성제, 2009), 도문 성자산산성을 3세기 후반의 동북 대진인 신성(新城)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임기환, 2012). 고구려가 일찍부터 포이합통하 유역으로 진출한 다음, 이곳을 경유해 두만강 하류로 진출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문헌 사료나 능비에는 동해안 방면의 신성(敦城)이나 해곡(海谷: 東海賈)을 경유해 두만강 유역으로 나아간 것으로 확인된다. 함경도 해안을 경유하는 경로가 국내성과 두만강 유역을 잇는 간선교통로였던 것이다(여호규, 2008). 이에 포이합통하 유역 일대를 광개토왕이 410년(영락 20년)에 정벌했다는 동부여로 비정하기도 한다(김현숙, 2000). 혼춘분지 일대와 포이합통하 유역이 지형상 별도의 권역을 이룬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높은 견해이지만, 명확한 논거가 제시된 상태는 아니다. 고구려의 포이합통하 유역 진출 시기는 향후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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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는 고구려시기 축조설이 제기된 성곽이 총 43기에 이르는데, 모두 고구려 성곽으로 보기는 어렵다(정영진, 1999). 고구려 멸망 직전에 책성욕살(褥薩: 都督)을 역임한 이타인(李他仁)이 “12주(州) 고려(高麗)를 관장하고, 37부(部) 말갈(靺鞨)을 통할했다”는 〈이타인묘지명〉을 참조하면, 고구려 말기에 두만강 유역에는 치소성(治所城)이 12개 존재했고, 그 외곽에 말갈이 산재한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그림6 | 두만강 유역의 지형과 고구려 성곽 분포도(여호규, 2017)
- [두만강 하류-琿春河 유역] 1. 琿春 水流蜂山城 2. 溫特赫部城 3. 圖們 亭巖山城 4. 琿春 石頭河子古城 5. 薩其城 6. 干溝子山城 7. 桃源洞南山城 8. 農坪山城 9. 營城子古城 10. 城墻砬子山城 11. 通肯山城
[嘎呀河 유역] 21. 圖們 滿臺城山城 22. 汪淸 河北古城[江北古城] 23. 廣興山城 24. 東四方臺山城
[布爾哈通河 유역] 31. 圖們 城子山山城[磨盤村山城] 32. 延吉 河龍古城[土城村古城] 33. 興安古城 34. 臺巖古城 35. 龍井 土城屯古城 36. 三山洞山城 37. 偏臉山城 38. 白石砬子山城 39. 城子溝山城 41. 安圖 楡樹川古城 42. 五虎山城 43. 大砬子山城 44. 五峰山城 45. 城門山城
[海蘭江 유역] 51. 龍井 仲坪古城 52. 金谷山城 53. 東興古城 54. 養參峰山城 55. 和龍 楊木頂子山城 56. 八家子山城 57. 松月山城
[두만강 본류 중상류] 61. 龍井 船口山城 62. 淸水山城 63. 朝東山城 64. 회령 운두산성 65. 和龍 三層嶺山城 66. 土城里古城 67. 古城里古城
이를 참조하여 고고자료를 재검토하면 고구려 기와가 출토된 성곽 9기 가운데 치소성 5기, 고구려 성곽인지 논란 중인 산성 가운데 치소성 8~9기를 상정할 수 있다. 그런데 치소성의 형태나 분포는 지역에 따라 다른 양상을 띤다. 평야가 넓게 펼쳐진 혼춘분지(琿春盆地)나 포이합통하(布爾哈通河)~해란강(海蘭江) 평원 일대에는 평지성을 조밀하게 축조한 반면, 그 주변의 구릉이나 산간지대에는 이들 지역을 에워싸는 형태로 포곡식산성을 축조했다. 반면 가장 외곽인 혼춘하(琿春河)나 알하하(嘎呀河) 중상류에는 치소성을 축조하지 않았다.
고구려는 평야가 넓게 발달한 두만강 유역 중심부에는 평지성을 조밀하게 축조하여 지방통치의 중핵지역으로 삼은 반면, 그 주변의 교통로나 하곡평지에는 중대형 산성을 축조해 지방통치와 더불어 말갈에 대한 통제를 도모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말갈의 집단거주구역으로 추정되는 혼춘하나 알하하 중상류 유역에는 치소성을 축조하지 않고 산성을 축조해 말갈을 통제하는 방어체계를 구축했다. 고구려는 두만강 유역을 중심부의 중핵지역과 주변부, 말갈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외곽지역으로 구분하여 군사방어체계를 구축한 것이다(여호규, 2017).주 010
각주 010)
두만강 유역에는 연길(延吉)평원의 동・북・서 3면을 감싼 연변장성이 100km 이상 뻗어 있는데, 일찍부터 고구려가 읍루나 말갈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延邊博物館, 1988; 정영진, 1990; 김현숙, 2000; 방학봉, 2002; 지승철, 2005). 이에 대해 장성이 연길을 바라보는 안쪽 사면에 축조되어 마치 연길평원을 포위하는 형국이므로 고구려가 축조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이성제, 2009; 양시은, 2012). 금(金)이나 동하국(東夏國)이 축조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李健才, 1987; 徐學毅,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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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구려는 북류 송화강 방면으로도 비교적 일찍 진출했다. 북류 송화강 유역은 크게 상류인 휘발하 유역과 북류 송화강 본류 연안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가운데 휘발하 유역은 고구려 초기 중심부에서 송화강 유역으로 나아가는 전략적 요충지인데, 늦어도 4세기 전반 부여의 중심지를 점령할 무렵에는 이곳으로 진출했다고 추정된다. 휘발하 유역에서는 고구려 성으로 거론되는 성곽이 총 12기 확인되는데, 모두산성이나 보루성, 차단성이며, 평지성은 확인된 바 없다. 송화강 중하류나 두만강 유역에서 평지성이 다수 확인되는 것과 뚜렷이 대조되는 현상이다. 이로 보아 고구려가 휘발하 일대에는 유하 나통산성(羅通山城)을 중심으로 각 성곽을 유기적으로 연관시켜 방어체계를 구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류 송화강 중류의 길림시 일대는 원부여의 중심지였는데, 고구려가 4세기 전반에 이 지역으로 진출했다고 추정된다(여호규, 1995). 길림 지역은 저산-구릉지대와 충적평원의 경계지대로 동남쪽으로는 구릉성산지가 펼쳐지고 서북방으로는 광활한 충적평원이 이어진다. 이에 고구려는 북류 송화강 유역으로 진출한 다음, 길림 등 중류 일대를 가장 중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북류 송화강 중류의 길림시와 교하시 일대에는 총 13기의 고구려 성곽이 밀집하여 분포한다. 특히 원부여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길림시 동쪽 일대에는 용담산성, 동단산성, 남성자고성 등이 밀집하여 분포하고 있다. 이 가운데 동단산성과 평지성인 남성자고성은 원부여의 도성으로 비정되는데, 고구려가 계속 사용한 것으로 파악된다(이종수, 2015).
길림 서북방의 농안~덕혜 일대는 연강수량 500~600mm로 전업농업의 서쪽 한계선이다. 이 지역에서는 천리장성 유적으로 추정되는 노변강유적을 제외하면 고구려 성곽이 발견된 바 없다. 다만 농안 서남쪽 일대는 후부여의 중심지로 고구려 후기 부여성이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농안 일대는 농경지구에서 초원-사막지구로 전환되는 점이지대인데, 고구려가 서북방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고, 유목민이나 말갈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해 부여성을 축조했다고 추정된다. 농안 일대의 후기 부여성은 서북 방면 방어체계 가운데 가장 동북단의 전략적 요충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고구려가 7세기 전반에 부여성에서 송료대평원을 가로질러 요하 하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축조한 것은 점점이 산재한 서북 방면 방어체계를 하나로 연결하여 완성하려는 국방정책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여호규, 2020a).
그림7 | 북류 송화강~목단강 유역의 지형과 고구려 성곽 분포 현황(여호규, 2020a)
- [북류 松花江 중류와 拉法河 유역] 1. 吉林 龍潭山城 2. 東團山山城/南城子古城 3. 三道嶺子山城 4. 架子山城 5. 三家子古城 6. 蛟河 六家子東山山城 7. 拉法小砬子山城 8. 新街古城 9. 福來東古城 10. 橫道河子南山山城
[輝發河 유역과 飲馬河 상류] 11. 磐石 後虎嘴子山城 12. 炮臺山城 13. 大馬宗嶺山城 14. 城子溝關隘 15. 紙房溝關隘 16. 輝南 小城子古城 17. 輝發城 18. 釣魚臺古城 19. 柳河 羅通山城 20. 釣魚臺古城 21. 東豊 城址山山城 22. 淸原 南山子山城
[북류 松花江 상류] 23. 靖宇 楡樹川古城 24. 撫松 大方頂子城址
[牧丹江 유역] 25. 敦化 城山子山城 26. 橫道河子古城 27. 大甸子古城
[飮馬河-伊通河 유역] 28. 德惠-農安 老邊崗遺蹟
북류 송화강과 두만강 유역 사이의 목단강은 서남에서 동북 방향으로 흘러 동류 송화강에 유입한다. 목단강 유역은 북류 송화강과는 장광재령산맥, 두만강과는 노야령산맥(老爺嶺山脈)이 분수령을 이룬다. 목단강 유역은 분수령 사이에 위치해 일찍부터 별도 문화권을 이루었는데, 대체로 읍루계 주민집단이 거주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이들 분수령에는 차별침식에 따른 협곡이 발달하여 북류 송화강에서 목단강을 경유해 두만강 유역으로 나아가는 교통로가 발달해 있다. 지금도 장춘~연길의 간선교통로로 활용되고 있는데, 고구려도 이를 활용했을 것이다.
목단강 유역에서는 상류의 돈화 지역에서만 고구려 성곽이 확인되었다. 돈화 지역은 목단강 하류 방면으로 나아가는 전략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북류 송화강과 두만강 유역을 잇는 가교이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목단강 하류 방면의 읍루계 주민집단(읍루-물길-말갈)을 통제하거나 이들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해 방어체계를 구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북류 송화강 방면과 두만강 방면을 모두 장악한 다음, 돈화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며 두 지역을 연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문헌사료나 고고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고구려가 언제 이 지역에 진출하여 방어체계를 구축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여호규, 2020a).

  • 각주 005)
    송료대평원은 중국 동북평원, 요동대평원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데, 이 글에서는 송화강(松花江) 유역에서 요하(遼河) 하구에 이르는 대평원이라는 뜻에서 ‘송료대평원(松遼大平原)’으로 부르고자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6)
    서북 방면 방어체계의 구성과 운용 양상에 대해서는 이 책 8장에서 보다 상세하게 고찰하겠다. 바로가기
  • 각주 007)
    한반도 중남부 방면 방어체계에 대해서는 이 책 9장에서 상세히 고찰하겠다. 바로가기
  • 각주 008)
    채희국, 1985, 146쪽 도표에는 2개, 지승철, 2005, 250~251쪽 도표에는 함경북도 5개, 함경남도(북한의 강원도로 편성된 문천, 안변 포함) 20개 등 총 25개가 확인된다고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9)
    두만강 유역 가운데 하류의 혼춘분지는 북옥저의 중심지로 고구려가 1세기경에 진출했고, 5세기에는 책성을 설치한 것으로 확인된다. 반면 포이합통하 유역으로 진출한 시기는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최근 고구려가 백두산 북쪽 경로를 거쳐 포이합통하 유역으로 진입했다거나(이성제, 2009), 도문 성자산산성을 3세기 후반의 동북 대진인 신성(新城)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임기환, 2012). 고구려가 일찍부터 포이합통하 유역으로 진출한 다음, 이곳을 경유해 두만강 하류로 진출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문헌 사료나 능비에는 동해안 방면의 신성(敦城)이나 해곡(海谷: 東海賈)을 경유해 두만강 유역으로 나아간 것으로 확인된다. 함경도 해안을 경유하는 경로가 국내성과 두만강 유역을 잇는 간선교통로였던 것이다(여호규, 2008). 이에 포이합통하 유역 일대를 광개토왕이 410년(영락 20년)에 정벌했다는 동부여로 비정하기도 한다(김현숙, 2000). 혼춘분지 일대와 포이합통하 유역이 지형상 별도의 권역을 이룬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높은 견해이지만, 명확한 논거가 제시된 상태는 아니다. 고구려의 포이합통하 유역 진출 시기는 향후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10)
    두만강 유역에는 연길(延吉)평원의 동・북・서 3면을 감싼 연변장성이 100km 이상 뻗어 있는데, 일찍부터 고구려가 읍루나 말갈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延邊博物館, 1988; 정영진, 1990; 김현숙, 2000; 방학봉, 2002; 지승철, 2005). 이에 대해 장성이 연길을 바라보는 안쪽 사면에 축조되어 마치 연길평원을 포위하는 형국이므로 고구려가 축조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이성제, 2009; 양시은, 2012). 금(金)이나 동하국(東夏國)이 축조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李健才, 1987; 徐學毅, 1986).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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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양 천도와 군사방어체계의 재구축 자료번호 : gt.d_0006_0030_001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