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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수·당과의 전쟁에 나타난 군사방어체계의 운용 양상

2. 수·당과의 전쟁에 나타난 군사방어체계의 운용 양상

1) 수와의 전쟁에 나타난 군사방어체계의 운용 양상
〈표2〉는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로를 도표화한 것이다. 〈표2〉에서 보듯이 수는 5차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 가운데 『수서(隋書)』 이경(李景)전에 기술된 611년 요하 서안의 무려라 공격은 612년 제2차 침공의 전초전이었는데, 『수서』 고려전에서는 612년 수군(隋軍)의 유일한 전과로 무려라를 빼앗아 요동군과 통정진(通定鎭)을 설치한 것을 들고 있다. 611년 무려라 공격을 제외하면 수군은 네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대규모로 침공했다(松井等, 1913; 徐仁漢, 1991; 임기환, 1994; 이호영, 1996; 이정빈, 2018; 정동민, 2022).
그림2 | 수군의 고구려 침공로
표2 | 7세기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로
분류연도수·당
지휘관
전쟁로 및 교통로전쟁로 및 교통로고구려
지휘관
대수전598위세충육로요서 ←영양왕
양양육로→ 요수(遼水)
주라후해로동래 → 평양성
611이경육로→ 무려성(무려라)
612양제육로주력군→ 요수 → 요동성
별동대→ 오골성 → 압록수 ↔ 살수 ↔ 평양성을지문덕
내호아해로→ 패수 → 평양성고건무
613양제육로주력군→ 요수 → 요동성 → 백애성(백암성)
우문술→ 오골성 → 압록수
왕인공→ [부여도] → 신성
614양제육로→ 회원진
내호아해로→ 비사성 → [평양성]
대당전645태종육로이적통정진 → 현도성 → 신성 → 개모성손대음, 고돌발,
고연수, 고혜진
태종요택(遼澤) → 요동성 → 백암성 → 안시성
장검? → 요수 → 건안성
장량해로동래 → 사비성 → 건안성
647이적육로→ 요수 → [신성도(新城道)] → 남소성 → 목저성
우진달해로→ 석성(石城) → 적리성(積利城)
648설만철해로→ 내주(萊州) → 역산(易山) → 압록수 → 대행성 → 박작성소부손, 고문
654거란
이굴가
육로신성(서요하 유역) ←안고
655정명진,
소정방
육로→ 요수 → 6성 함락 → 귀단수(貴端水) → 귀단성(貴端城, 新城)
658정명진육로→ 귀단성(신성)
설인귀육로→ 적봉진(赤烽鎭)두방루
658글필하력,
설인귀
육로→ 횡산(橫山)・석성(石城)온사문
659글필하력육로→ 요동
660글필하력,
소정방
육로→ [패강도(浿江道)・요동도(遼東道)・평양도(平壤道)]
661소정방해로→ 패강(浿江) → 마읍산(馬邑山) → 평양성
글필하력육로→ 압록수(결빙을 이용하여 도강)연남생
662방효태육로→ 사수(蛇水)연개소문
소정방해로→ 위도(葦島) → 평양성
666글필하력,
방동선
육로→ 국내성의 남생과 회합
국내성 등 6성, 목저성 등 3성 투항
667이적육로→ 요수 → 신성(주변 16성)(사부구)
글필하력육로신성 → 금산(金山) → 남소성(주변 7성) → 목저성 → 창암성 → 가물성 → 국내성
668설인귀육로→ 부여성(주변 40성)
이적육로(부여성 방면) → 살하수 → 대행성 → 압록책 → 욕이성(諸城 투항) → 평양성연남건
이 가운데 수군이 요하를 넘은 것은 612년과 613년 두 차례뿐인데, 진공로가 거의 일치한다. 수군은 612년과 613년 모두 3~4월에 회원진(懷遠鎭)에서주 012
각주 012)
수는 612년 고구려 공격에 앞서 노하진(瀘河鎭)과 회원진(懷遠鎭)에 군량미를 옮긴 다음, 이곳에서 별동대에게 100일분 군량미를 나누어 주었다(『자치통감』 권181 수기6 대업 7년 및 8년 5월조). 613년에는 요하를 건너 퇴각할 때 설세웅(薛世雄)이 회원진을 진수(鎭守)했다(『수서』 열전30 설세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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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갈래의 요하 도하로 가운데 중로(中路)인 태안(台安) 손성자(孫城子)~안산(鞍山) 경로를 이용해 요하를 건넌 다음(王綿厚·李建才, 1990), 곧바로 요동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갖가지 공성무기를 동원하여 요동성을 공격하다가 여의치 않으면,주 013
각주 013)
최근 수가 여러 경로를 통해 고구려로 진군했으며, 요동성 이외의 다른 성에서도 전투가 많이 벌어졌다고 보기도 한다(이정빈, 2018; 정동민, 20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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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동대를 편성하여 평양성으로 곧바로 진공했다(여호규, 1999b; 노태돈, 2009; 이동준, 2009).
612년에 수 양제는 요동성 공격이 여의치 않자, 우문술(宇文述)과 우중문(于仲文)으로 하여금 별동대 30만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략하도록 했다.주 014
각주 014)
일반적으로 수가 군수 보급기지인 노하진이나 회원진에서 별동대를 편성해 고구려로 출발했다고 보지만(서인한, 1991), 요하를 건너 각 방면으로 진군하던 수군이 별동대의 임무를 부여받고 압록강 서쪽에서 만나 평양성으로 진공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정동민,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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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별동대는 오골성을 지나 동쪽으로 압록강을 건넌 다음, 살수(薩水: 청천강)를 거쳐 평양성 북쪽 30리 지점까지 진공했다가 군량미가 떨어지고 병사의 사기도 저하되자 을지문덕의 거짓 항복을 명분 삼아 퇴각했다. 이때 고구려는 사방에서 수군을 압박하다가 살수에서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괴멸시켰다.
613년에도 수 양제는 4월에 요하를 건넌 다음 요동성을 공격하는 한편, 우문술·양의신(楊義臣)으로 하여금 평양성을 공취하도록 했다. 612년과 마찬가지로 오골성을 지나 압록수로 진공하다가 양현감의 반란으로 퇴각했다(『수서』 우문술전 및 양의신전). 이때 왕인공(王仁恭)을 부여도(夫餘道)로 보내 신성(新城)을 공략하기도 했지만(『수서』 왕인공전), 전략상 근본적인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특히 『수서』 염비(閻毗)전에서 보듯이 613년에 양현감과 내통한 곡사정(斛斯政)은 백애성(栢崖城) 곧 백암성으로 망명했는데, 수의 별동대가 백암성을 경유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수의 별동대는 요동성에서 평양성으로 나아가는 최단코스인 요양~본계~봉성로를 경유해 천산산맥을 넘은 다음,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으로 진공한 것이다.
그럼 수군이 평양성 직공책을 구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수군의 최대 약점은 긴 병참선이었다. 수군은 610년부터 요서의 노하진(瀘河鎭)과 회원진으로 군량미를 운반하며 고구려 침공을 준비했는데, 길이 험난하여 운송하기 힘들었다. 이에 수는 612년에 전투 병력의 2배에 해당하는 치중병(輜重兵)을 동원했다. 더욱이 별동대 30만은 요하를 건너기 전에 100일분의 군량미를 분급받았는데, 군장이 너무 무거워 도중에 몰래 군량미를 버렸다. 양현감도 613년에 군량미 운반을 감독하다가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612년 단문진(段文振)은 수 양제에게 “장맛비가 곧 내릴 것이니 지체할 수 없다며 불의에 평양성을 기습 공격할 것을” 건의했다((『수서』 단문진전). 수가 병참 보급의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요동평원에서 서북한으로 나아가는 최단코스를 경유해 평양성으로 진공하는 직공책을 택한 것이다. 그렇지만 612년 수의 별동대 30만이 살수에서 궤멸된 것에서 보듯이 수의 이러한 작전은 패배로 끝났다.
고구려는 수군의 최대 약점이 긴 병참선에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다음, 성 중심의 군사방어체계를 바탕으로 청야수성전(淸野守城戰)을 전개했다. 612년에 수군이 요동성을 포위하고 각 방면으로 공격했으나, 고구려가 성문을 닫고 견고하게 지켰기 때문에 함락시킬 수 없었다.주 015
각주 015)
『수서』 권3 본기3 대업 8년 5월 임오조, “于時 諸將各奉旨, 不敢赴機. 旣而高麗各城守,攻之不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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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년 수의 왕인공이 신성을 공격하자, 고구려가 처음에는 수만 대군을 동원하여 성을 등지고 진을 결성하여 수군과 맞섰다. 그러나 왕인공에게 격파되자 성문을 굳게 닫고 지구전을 벌여 왕인공이 사면에서 신성을 에워쌌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수서』왕인공전).
612년 을지문덕의 유인전술도 성 중심의 방어체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수의 별동대가 경유한 요양~본계~봉성로에는 백암성이나 오골성 등 무수한 성곽이 버티고 있었다. 그렇지만 수군은 을지문덕의 유인전술에 휘말려 평양성 부근까지 진격하는 동안 단 하나의 성곽도 공격하지 않았다. 각 성곽에 웅거한 고구려군도 별동대 후미의 치중병만 공격하고(『수서』 우중문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수군이 평양성에서 퇴각하기 시작하자 사방에서 수군을 압박하기 시작해 살수에서 대승을 거두었다(김복순, 1986; 정동민, 2020; 2022).
이상과 같이 고구려는 성 중심 방어체계에 바탕을 둔 청야수성전과 유인전술을 구사하여 거듭된 수의 침공을 물리쳤다. 다만 612년이나 613년 모두 수의 전술이 너무 단조로웠기 때문에 고구려 각 성곽의 움직임은 거의 포착되지 않는다. 고구려가 성 중심의 군사방어체계를 운용한 양상은 당과의 전쟁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2) 당과의 전쟁에 나타난 군사방어체계의 운용 양상
〈표2〉에서 보듯이 고구려와 당은 645년 이래 빈번하게 전쟁을 했다. 다만 당이 618년에 건국된 사실을 상기하면, 양국의 전쟁은 다소 늦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의 고구려 원정이 늦어진 데에는 크게 두 요인이 작용했다. 먼저 당 건국 초기에는 중원 대륙 곳곳에 할거한 독자세력을 통합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강경한 정복정책을 추진하기 힘들었다. 다음으로 수·당 교체기에 돌궐이나 토욕혼 등이 부흥했는데, 당으로서는 도성인 장안 가까이에 위치한 이들을 제압하는 것이 고구려 원정보다 더 급선무였다.
이에 당은 628년 중원 대륙을 재통합한 다음, 629~640년에 동돌궐, 토욕혼, 고창국 등을 제압하고 고구려 원정에 본격 착수했다. 이때 당은 고구려 원정의 후유증으로 멸망한 수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했는데, 641년에 군사지리정보를 총괄하는 진대덕(陳大德)을 사신으로 파견해 고구려의 지리와 방어체계를 정탐했다. 당은 진대덕의 정탐 내용을 바탕으로 『고려기(高麗記)』를 편찬했는데, 일부 내용이 『한원(翰苑)』 번이부 고려조에 전한다(吉田光男, 1977). 그 내용을 보면 남소성과 오골성 등 주요 성곽의 위치와 군사적 특징, 압록수와 마다산 등 주요 산천의 지형과 군사적 활용도 등을 상세히 기술했다(나유정, 2021).
당은 이러한 정탐 내용을 바탕으로 전략·전술을 새롭게 짜서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이러한 사실은 645년 당의 침공로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표2〉에서 보듯이 당은 645년에 해로와 함께 여러 경로를 통해 요하를 건넌 다음 고구려 공략에 나섰다. 요하를 건너는 도하로는 가장 북쪽의 신민(新民) 고대산(高臺山)~심양(瀋陽)의 북로(北路), 회원진에서 시작하는 태안(台安) 손성자(孫城子)~안산(鞍山)의 중로(中路), 가장 남쪽의 반산(盤山)~고평(高平)~우장(牛莊)~해성(海城)의 남로(南路) 등 세 갈래가 있었다(王綿厚, 1986; 王綿厚·李健才, 1990).
그림3 | 645년 당군의 고구려 침공로
이 가운데 이적(李勣)은 통정진에서 북로를 통해 요하를 건넌 다음 현도성과 신성을 공격하다가 여의치 않자, 개모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당 태종은 회원진에서 중로를 통해 요택(遼澤)이라 불리는 거대한 늪지대를 건넌 다음, 이적의 군대와 합세하여 요동성과 백암성을 함락시키고 안시성으로 향했다. 영주도독 장검(張儉)은 번병(蕃兵)을 거느리고 선두에서 진공했다.주 016
각주 016)
장검(張儉)은 당의 주력군에 앞서 644년에 영주와 유주의 군사 및 거란과 해(奚)의 병졸을 거느리고 요서로 진군했으나 요수의 범람으로 진공하지 못했다. 다만 장검은 이때 요수의 수초와 물길, 주변 산천의 지형 등을 상세히 관찰하여 당 태종에게 보고했다(『구당서』 권83 열전33 장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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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검은 처음에 연개소문이 요동에 온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북로인 신성도(新城道)를 통해 요하를 건너려다가, 연개소문이 나타나지 않자 요수를 건넌 다음 건안성(개주 고려성산성)으로 진격했다(『구당서』 장검전). 장검이 요하를 건넌 다음 요하 하구 동쪽의 건안성으로 진격했다는 점에서 남로를 통해 요하를 도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군이 회원진에서 중로를 통해서만 요하를 도하한 것과 달리, 당은 세 갈래의 요하 도하로를 모두 이용한 것이다(여호규, 1999b; 노태돈, 2009). 당은 요하를 건넌 다음에 ① 현도성 → 신성, ② 개모성, ③요동성 → 백암성, ④안시성, ⑤건안성 등을 차례로 공략했다. 이 가운데 신성(무순 고이산성)은 국내성으로 향하는 혼하~소자하 연안로 길목에 자리한 반면, ②~⑤는 평양성으로 향하는 천산산맥 횡단로의 입구에 위치했다. 개모성과 요동성·백암성은 본계~봉성로의 북쪽과 남쪽 입구, 안시성은 해성~수암로의 입구, 건안성은 개주~장하로의 입구에 자리한 것이다.
이로 보아 당군은 천산산맥 횡단로의 입구에 위치한 주요 성곽을 차례로 함락시킨 다음, 평양성으로 진공하는 전술을 채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은 645년에 고구려를 공격해 ‘현도(玄菟), 횡산(橫山), 개모(蓋牟), 마미(磨米), 요동(遼東), 백암(白巖), 비사(卑沙), 맥곡(麥谷), 은산(銀山), 후황(後黃)’ 등 10성을 함락시켰다고 하는데(『자치통감』 권198 정관19년 10월조), 이적의 진공로와 비교하면 함락 순서에 따라 기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네 번째의 마미성은 개모성을 점령한 다음, 요동성·백암성 공격에 앞서 함락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점에서 마미성을 본계 변우산성으로 비정한 견해가 주목된다(孫進己·馮永謙, 1989; 王綿厚, 1994). 본계 변우산성은 심양 탑산산성(개모성)에서 본계로 나아가는 길목에 위치했다. 따라서 당군이 개모성(탑산산성)과 마미성(변우산성), 요동성과 백암성 등을 순차적으로 함락한 것은 본계~봉성로의 북쪽과 남쪽 진입로를 차례로 공격하는 전술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동성과 백암성을 함락시킨 다음 해성~수암로 입구의 안시성(영성자산성)을 공격한 것도 이러한 전술에 따른 것이다.
결국 당군이 세 갈래의 도하로를 모두 이용하여 요하를 건넌 다음, 요동평원에서 천산산맥으로 향하는 진입로 입구를 동북쪽에서부터 서남쪽으로 차례로 공략한 것이다. 이는 당이 수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고구려 방어체계를 정확하게 파악한 다음 전략·전술을 수립한 결과이다. 당 태종이 안시성을 건너뛰고 건안성을 공격하자고 제의하거나, 고연수·고혜진이 오골성을 함락시키고 평양성으로 진공하자고 제의했을 때, 이적이나 장손무기가 어느 한 성이라도 그냥 두고 다른 성을 공격하면 배후에서 공격받을 수 있다며 반대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실제 고구려는 645년에 신성과 국내성의 4만 대군을 동원해 요동성을 지원했고, 오골성의 군대 1만을 파견해 백암성을 지원했다. 고구려가 각 성곽을 상호 유기적으로 연관시켜 당의 침공에 맞선 것이다(이문기, 2007). 이로 인해 당군은 개모성·마미성·요동성·백암성 등 본계~봉성로 입구의 여러 성곽을 함락하고, 안시성 부근 평원대회전에서 고구려 15만 대군을 격파했지만, 해성~수암로 입구의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함에 따라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여호규, 1999b).
이에 당은 647년 2월 고구려 정벌을 위한 전략회의를 개최하여 성곽의 견고함 때문에 645년 원정이 실패했다고 진단하고, 소규모 부대를 자주 보내 요동 지역을 황폐화시키는 국지전(장기 소모전)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池內宏, 1941; 김영하, 2000). 실제 당은 647년에 해로를 통해 만여 명을 파견해 요동반도 남쪽 연안의 석성(石城)을 함락시키고, 적리성(積利城)까지 진공했다. 648년에도 해로를 통해 압록강 하류의 대행성(大行城)을 함락시키고 박작성(泊灼城: 관전 호산산성)까지 진격했다. 육로로는 647년에 이적이 3,000명을 이끌고 신성도를 거쳐 남소성과 목저성을 공략했다. 이를 통해 당이 한두 성을 함락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전략회의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천리를 쑥대밭으로 만들 만큼’ 고구려 방어체계를 무력화시키지는 못했다.
고구려 멸망 직전인 667년의 상황을 반영하는 『삼국사기』 지리지4 목록에 따르면,주 017
각주 017)
『삼국사기』 지리지4 목록(目錄)에는 압록강 북쪽의 고구려 성곽을 미항성(未降城), 이항성(已降城), 도성(逃城), 타득성(打得城) 등으로 분류했는데, 대체로 667년에 당이 신성 공격에 앞서 남생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전황표로 파악된다(池內宏, 1941; 1960; 노태돈, 1999a). 이에 대해 당이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부흥군을 진압한 상황을 정리한 것이라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다(김강훈,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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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고구려가 요동성과 백암성 등을 장악한 것으로 나온다. 고구려가 645년 이후 당에 함락되었던 요동성과 백암성 등을 수복하여 군사방어체계를 재정비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방어체계를 완전히 돌파하지 못하는 한 당군의 전과는 일부 지역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고, 당군이 퇴각한 다음에는 고구려가 이를 신속하게 접수하여 방어체계를 복구할 수 있었다.
이에 당은 백제 멸망 직후인 661~662년에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하여 육로와 수로를 통해 요동 지역, 압록강 하류 일대, 평양성 등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했다(이민수, 2021). 이때 당은 신라로부터 군량미를 보급받았지만, 혹한기에 장기간 버티기는 쉽지 않았다. 실제 당은 661~662년에 평양성을 오랫동안 포위하다가 신라로부터 군량미를 보급받은 다음 곧바로 퇴각했다.주 018
각주 018)
661~662년 당이 고구려 원정에 실패한 이유는 거란과 철륵(鐵勒)의 흥기로 원정군을 요서나 몽골초원 방면으로 대거 이동시켰기 때문인데, 고구려가 거란이나 철륵과 연계했을 가능성이 있다(여호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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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군을 지휘했던 소정방에 대해 “여러 차례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모두 큰 공을 세우지 못했다”고 한 평가는 이를 잘 보여준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10 보장왕 21년조).
그런데 665년 연개소문 사망 이후 형제 사이의 권력투쟁에서 실각한 남생이 당에 투항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당은 남생으로부터 최고급 군사정보를 제공받아 전략·전술을 새롭게 짰다. 남생 투항 이후의 전황에 대해서는 사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전하는데, 제반 사료를 종합하면, 당이 666년에는 국내성에 웅거한 남생의 구출 작전, 667~668년에는 최후의 고구려 원정을 전개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여호규, 1999b).
당은 남생의 투항 요청을 받은 다음, 666년 6월에 글필하력(契苾何力)과 방동선(龐同善)을 파견해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당군이 고구려군을 대파하자, 남생은 국내성 부근의 6성 10여만 호를 거느리고 당에 투항했고, 소자하 연안의 창암성(椋嵓城), 목저성, 남소성 등 3성도 투항했다(〈천남생묘지명〉). 당이 혼하~소자하 연안로를 장악함에 따라 최전방의 신성은 고립무원에 처했다. 다만 666년 당의 목표는 남생을 탈출시키는 것이었기에 이들 성을 점령하여 군대를 주둔시키지는 않았다. 이로 인해 667년 이후 이 지역의 고구려 성들은 당의 수중에서 벗어났고, 당은 그 이후 이 성들을 다시 함락시켜야 했다. 신성~국내성에 이르는 당의 군사작전은 〈표2〉처럼 666년과 667~668년 두 차례 진행된 것이다(노태돈, 1999a; 2009).
당은 남생을 탈출시킨 다음 최후의 고구려 원정에 착수했다. 666년 12월에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에 임명하여 고구려 원정군을 편성하는 한편, 하북(河北) 여러 주에서 거둔 세금을 모두 군량으로 공급하는 등 준비를 하였다. 그런 다음 667년 2월에 이적이 요수를 건넌 다음 신성으로 향했다. 이때 고구려가 요하 일대에 15만 대군을 배치했지만(『구당서』 글필하력전), 당군의 도하를 저지하지 못했다. 이적은 신성 공격에 앞서 “신성은 고구려 서쪽 국경의 진성(鎭城)으로 가장 중요한 요해처이다. 이를 먼저 도모하지 않으면 나머지 성을 함락시킬 수 없다”고 했다(『구당서』 고려전). 이적이 신성의 군사적 위상을 정확하게 간파한 것인데, 남생이 제공한 군사정보 덕분이었을 것이다.주 019
각주 019)
신라는 당과 공동작전을 수행하며 고구려에 대한 군사정보를 공유하였다. 677년 7월에 신라의 장군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이 요동에 파견되어 당의 군사작전에 참여했고, 당으로부터 평양성 공략전에 합류해줄 것을 요청받았다(『삼국사기』 신라본기6 문무왕 7년 7월조). 이 과정에서 당이 작성한 요동 지역의 전황 문건이 신라에 전달되었는데, 『삼국사기』 지리지4에 실린 목록은 이 전황표에 해당한다(노태돈, 1999a;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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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신성은 요하 하류와 중상류를 가르는 경계지대일 뿐 아니라, 요동평원에서 압록강 중류나 송화강 방면으로 나아가는 진입로의 길목에 위치했다. 신성은 각 방면의 군사방어체계를 연결하는 핵심고리인 것이다. 이에 신성 공격을 쉽게 포기했던 645년 달리, 이적은 667년 2월부터 수개월 동안 신성을 집요하게 공략하여 9월에 내부 투항자의 도움으로 함락시키고, 주변 16성까지 점령했다. 이적은 신성 함락의 여세를 몰아 666년에 투항했다가 반기를 든 신성~국내성 일대를 공략했다. 이때 고구려는 금산(金山)전투에서 당군을 물리치고 말갈병 수만을 남소성에 주둔시키는 등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당의 설인귀 등이 고구려의 저항을 물리치고 국내성까지 진격하여 남생 군대와 합류했다(寺內威太郞, 1994).
이로써 신성~국내성의 여러 성곽이 당군의 수중에 장악되었고, 요하 하류와 중상류의 방어체계를 잇는 중간 허리가 잘리게 되었다. 고구려는 더 이상 요하 하류와 중상류 일대 나아가 송화강 일대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송화강 일대의 말갈병도 원활하게 동원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의 방어체계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적은 신성~국내성의 방어체계를 무력화시킨 다음 668년 2월 설인귀를 요하 중상류와 북류 송화강으로 파견하여 부여성을 공략하는 한편, 본인은 남으로 기수를 돌려 부여성 지원에 나선 고구려군을 살하수에서 격파했다. 그리고 국내성 방면 군사작전을 마무리한 글필하력의 군대와 합류하여 대행성 → 압록책 → 욕이성을 거쳐 평양성으로 진공하여 668년 9월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이상과 같이 666~668년경 당군의 군사작전을 통해 신성이 서북방 방어체계의 핵심고리임을 알 수 있다. 신성은 지역적으로 요하 하류와 중상류, 요동 동부 산간지대, 북류 송화강 일대의 방어체계를 유기적으로 연관시키는 역할을 했다. 고구려는 667년에 요수 연안에 15만 대군을 주둔시키고, 남소성에 말갈병 수만 명을 주둔시켜 당군에 맞서는 최후의 군사작전을 전개했는데, 요수와 남소성 사이에 자리한 신성이 핵심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군의 집요한 공격으로 신성이 무너지자 주변의 위성산성은 물론이고 각 방면의 성곽도 차례대로 함락되었다. 서북방 방어체계의 핵심고리인 신성이 함락된 지 불과 1년 만에 고구려가 멸망한 것이다.주 020
각주 020)
수・당과의 전쟁과 군사방어체계의 운용 양상에 대한 상기 기술은 여호규, 1999b를 수정, 보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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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수는 612년 고구려 공격에 앞서 노하진(瀘河鎭)과 회원진(懷遠鎭)에 군량미를 옮긴 다음, 이곳에서 별동대에게 100일분 군량미를 나누어 주었다(『자치통감』 권181 수기6 대업 7년 및 8년 5월조). 613년에는 요하를 건너 퇴각할 때 설세웅(薛世雄)이 회원진을 진수(鎭守)했다(『수서』 열전30 설세웅전). 바로가기
  • 각주 013)
    최근 수가 여러 경로를 통해 고구려로 진군했으며, 요동성 이외의 다른 성에서도 전투가 많이 벌어졌다고 보기도 한다(이정빈, 2018; 정동민, 2020・2022). 바로가기
  • 각주 014)
    일반적으로 수가 군수 보급기지인 노하진이나 회원진에서 별동대를 편성해 고구려로 출발했다고 보지만(서인한, 1991), 요하를 건너 각 방면으로 진군하던 수군이 별동대의 임무를 부여받고 압록강 서쪽에서 만나 평양성으로 진공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정동민, 2022). 바로가기
  • 각주 015)
    『수서』 권3 본기3 대업 8년 5월 임오조, “于時 諸將各奉旨, 不敢赴機. 旣而高麗各城守,攻之不下.” 바로가기
  • 각주 016)
    장검(張儉)은 당의 주력군에 앞서 644년에 영주와 유주의 군사 및 거란과 해(奚)의 병졸을 거느리고 요서로 진군했으나 요수의 범람으로 진공하지 못했다. 다만 장검은 이때 요수의 수초와 물길, 주변 산천의 지형 등을 상세히 관찰하여 당 태종에게 보고했다(『구당서』 권83 열전33 장검전). 바로가기
  • 각주 017)
    『삼국사기』 지리지4 목록(目錄)에는 압록강 북쪽의 고구려 성곽을 미항성(未降城), 이항성(已降城), 도성(逃城), 타득성(打得城) 등으로 분류했는데, 대체로 667년에 당이 신성 공격에 앞서 남생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전황표로 파악된다(池內宏, 1941; 1960; 노태돈, 1999a). 이에 대해 당이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부흥군을 진압한 상황을 정리한 것이라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다(김강훈, 2017). 바로가기
  • 각주 018)
    661~662년 당이 고구려 원정에 실패한 이유는 거란과 철륵(鐵勒)의 흥기로 원정군을 요서나 몽골초원 방면으로 대거 이동시켰기 때문인데, 고구려가 거란이나 철륵과 연계했을 가능성이 있다(여호규, 2018). 바로가기
  • 각주 019)
    신라는 당과 공동작전을 수행하며 고구려에 대한 군사정보를 공유하였다. 677년 7월에 신라의 장군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이 요동에 파견되어 당의 군사작전에 참여했고, 당으로부터 평양성 공략전에 합류해줄 것을 요청받았다(『삼국사기』 신라본기6 문무왕 7년 7월조). 이 과정에서 당이 작성한 요동 지역의 전황 문건이 신라에 전달되었는데, 『삼국사기』 지리지4에 실린 목록은 이 전황표에 해당한다(노태돈, 1999a; 2009). 바로가기
  • 각주 020)
    수・당과의 전쟁과 군사방어체계의 운용 양상에 대한 상기 기술은 여호규, 1999b를 수정, 보완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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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당과의 전쟁에 나타난 군사방어체계의 운용 양상 자료번호 : gt.d_0006_0030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