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천리장성의 경로와 축조 배경
3. 천리장성의 경로와 축조 배경
1) 천리장성의 경로에 대한 연구현황
고구려는 당과의 결전을 앞두고 631년부터 서북방 국경지대에 천리장성을 축조했다고 한다. 고구려가 실제 천리장성을 축조했다면 기존의 방어체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일찍부터 많은 연구자들이 천리장성의 경로나 축성 배경을 고찰했지만, 여전히 이를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하다. 천리장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도 하는데, 천리장성이라고 단정할 만한 유적이 아직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반 사료를 종합하면 천리장성은 631년 2월에 착공하여 16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한 것으로 파악된다. 장성의 동북 기점은 부여성(扶餘城)이고, 서남 종점은 바다(海)이며, 길이는 1,000여 리이다.주 021 동북 기점이 부여성이라는 사실을 기준으로 삼아 천리장성의 경로를 고찰할 필요가 있는데, 실제 종전 논의도 부여성의 위치 비정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가령 중국 학자들은 1980년대부터 요령성과 길림성으로 양분되어 장성의 경로를 각기 다르게 설정했는데, 부여성의 위치를 서풍 성자산산성과 농안 일대로 다르게 비정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림4 | 천리장성의 경로에 관한 견해 각 성곽의 명칭은 304쪽 그림1 참조
요령성 학자들은 부여성을 서풍 성자산산성으로 비정한 이문신의 견해를 바탕으로 천리장성의 경로를 설정했다(李文信, 1962; 王綿厚, 1990). 천리장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기존 성곽을 하나의 라인으로 연결했다는 산성연방선설(山城聯防線說), 이를 조금 수정한 중간방어선설(中間防禦線說)과 쌍중방어장새설(雙重防禦障塞說) 등으로 세분할 수 있다.
산성연방선설은 진대위가 주장한 것인데, 서풍 성자산산성에서 대련 대흑산성에 이르는 서부 국경지대의 기존 성곽을 연결해 천리장성을 구축했다고 보았다. 부여성 등의 대형 산성은 평원지대와 산간지대의 경계지역에 일직선으로 위치했는데, 이들은 천리장성의 방어선에서 중점 성보를 이루었다고 보았다(陳大爲, 1989).
양진정이 이러한 산성연방선설의 논리를 더 보완했다. 요하는 천연 해자로 방어시설을 축조할 필요가 없고, 요하와 산성연방선 사이도 장성을 축조하기에 불리한 평원이기 때문에 기존 산성을 연결하여 천리장성을 축조했다고 보았다. 장성의 서남단도 평지인 요하 하구보다 사방이 절벽인 대흑산성이 더 적합하다고 보았다. 특히 성자산산성과 철령 최진보산성 외곽의 토루(土壘)를 각 산성을 잇던 장성의 유적으로 보았다(梁振晶, 1994).주 022
중간방어선설은 산성연방선설을 약간 수정한 견해이다. 산성연방선설처럼 천리장성의 축조로 기존의 산성연방선이 완성되었다고 보면서도, 이와 별도로 산성연방선과 요하 사이의 평원지대에 장성을 새롭게 구축했다고 상정했다. 다만 황급히 축조해 기초가 견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군에게 부딪히자마자 붕괴되어 별다른 주의를 끌지 못했다고 보았다(陳大爲, 1995).
쌍중방어장새설도 중간방어선설처럼 천리장성의 축조로 산성 중심의 기존 방어체계가 완성되었다고 파악한다. 다만 기존 산성연방선 외에 새롭게 요하 양안에 두 줄기의 방어선을 구축했다며, 무려라(武厲邏: 通定鎭)를 요하 서안 방어선의 장새(障塞)로 파악했다. 천리장성의 축조로 요하의 양안에 쌍중의 방어장벽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王綿厚, 1990·1994).
이처럼 요령성 학자들은 서풍 성자산산성을 부여성으로 비정한 다음, 이를 기준으로 천리장성의 경로나 성격을 파악했다. 이들은 부여성을 길림합달령산맥 방면에 위치한 성자산산성으로 비정했기 때문에 천리장성을 기존 산성을 연결한 산성연방선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들이 부여성을 서풍 성자산산성으로 비정한 근거를 명확하게 제시한 것은 아니다. 대체로 산성의 규모가 크고 내부에 대규모 건물터가 있으며, 668년 당의 설인귀가 부여성을 공격하기 위해 출발했다는 신성(무순 고이산성)에서 가깝다는 정도가 논거의 전부이다(梁振晶, 1994).
한편 길림성 학자들은 부여성을 송료대평원 한복판의 농안(農安) 일대로 비정하고 천리장성의 경로를 설정했다. 이건재는 동북 기점인 부여성은 농안 일대, 서남 종점은 농안에서 천여 리인 요하 하구의 영구(營口)로 비정했다. 기점과 종점을 모두 송료대평원에 비정함에 따라 경로도 송료대평원을 종단하는 요하 동안(東岸)의 평원지대로 설정되었다. 천리장성은 송료대평원에 새롭게 축조한 평원토벽(平原土壁)인데, 송화강·요하의 분수령지대의 공주령시(公主嶺市: 구 懷德縣) 노변강유적을 장성 유적의 일부로 보았다(李健才, 1987).
왕건군도 부여성을 농안 일대로 비정한 다음, 공주령 노변강유적을 천리장성의 일부로 파악했다. 다만 천리장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건재와 다른 견해를 제기했는데, 고구려 국력이 쇠퇴한 상태에서 축조했기 때문에 장성은 이름일 뿐이고 토루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서남 종점도 요동반도 서남단(비사성: 대련 대흑산성)으로 설정하고 요령성 학자들처럼 주요 군사 중진을 연결한 보조시설로 파악했다. 이로 인해 천리장성은 당과의 전쟁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평원토벽설과 산성연방선설을 혼합한 절충설에 가깝다(王健群, 1987).
이처럼 천리장성의 경로에 대한 견해는 요령성과 길림성으로 양분되었는데, 1990년대 이후 수정설이 다수 제기되었다. 가령 요령성의 왕면후는 동북 기점을 송료분수령의 서쪽, 서남 종점도 요하 하구 동측의 개현(蓋縣) 진해부(鎭海府) 일대로 수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천리장성의 경로도 요하의 동안과 산지·평원의 산성을 연결한 복합적인 것으로 파악했다(王綿厚, 1996; 1999). 이건재도 공주령시 동북쪽의 덕혜시(德惠市) 경내에서 노변강유적이 확인되자, 동북 기점을 북류 송화강의 서안으로 변경했다. 이로 인해 부여성으로 비정했던 농안이 덕혜~공주령 노변강유적의 외곽에 위치하게 되자, 종전 견해를 수정하여 농안은 후기 부여의 왕성이고 고구려 후기 부여성은 부여의 원중심지였던 길림 지역이라고 파악했다(李健才, 1991; 2000).
신형식도 천리장성의 경로가 시대별로 변천했다는 견해를 제기했다. 천리장성의 구간이 처음에는 농안~영구였는데, 이때는 군사방어가 아니라 물자 수송로인 농안~영구의 하변로(河邊路)를 보호하던 시설이었다고 파악했다. 그런데 7세기 전반 수·당과의 전쟁 격화로 발해만~황해 등 해안방어선의 중요도가 높아지자, 신성에서 비사성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새롭게 구축했다고 보았다. 전기의 천리장성이 치마로(馳馬路)라면, 7세기 전반에 구축된 후기의 천리장성은 기존 산성을 이은 군사방어선이라는 것이다(申瀅植, 1997; 1999)
이상과 같이 천리장성의 경로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지만, 대체로 산성연방선설, 평원토벽설, 양자를 혼합한 절충설 등으로 대별할 수 있다. 산성연방선설이 부여성을 길림합달령산맥 방면의 서풍 성자산산성으로 비정한 데 따른 것이라면, 평원토벽설은 송료대평원 한복판의 농안 일대로 비정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 여러 견해 가운데 산성연방선설과 평원토벽설을 혼합한 절충설은 입론의 근거 자체에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다.
왕건군처럼 공주령~영구의 노변강유적을 천리장성의 일부로 파악하면서 그 성격을 기존 산성의 보조시설로 이해하는 절충설은 성립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요하 동안의 노변강유적과 기존 산성은 40~50km 이상 떨어져 있어 양자를 하나의 방어선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공주령 노변강유적은 대흑산맥의 서북쪽 40~50km 거리에 위치한 반면, 가장 가까운 고구려 산성은 반대편인 대흑산맥 동남쪽이나 서남단에 자리한 요원 용수산성, 개원 용담사산성이 있을 뿐이다. 공주령 노변강유적을 천리장성의 일부로 본다면, 이를 기존 산성을 연결하는 보조시설로 볼 수 없다. 천리장성의 경로를 요하의 동안과 산지·평원의 산성을 연결한 복합적인 것으로 파악한 왕면후의 수정 견해에서도 동일한 문제점이 발견된다.
산성연방선설의 변형인 중간방어선설도 이러한 측면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다. 물론 중간방어선설에서 제기한 바와 같이 요하 동안이나 요동평원에 천리장성을 축조하면서 기존의 산성연방선을 재정비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주 023 그렇지만 16년간이나 온 국력을 기울여 기존의 산성연방선과 다른 라인의 천리장성을 축조했다면, 보조방어시설을 구축하는 데 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쌍중방어장새설의 경우에는 요하 양안에 구축했다는 장성의 성격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았는데, 중간방어선설처럼 천리장성의 축조와 함께 기존의 산성방어체계가 완성되었고 이것이 말기까지 주요 방어체계를 이루었다고 이해했다. 이 견해도 중간방어선설처럼 천리장성은 보조방어시설에 불과하다고 보는 문제를 안고 있다.
신형식의 견해도 7세기 이전에 천리장성이 존재했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사료가 없다. 더욱이 현전하는 사료상 7세기 전반에 구축했다는 천리장성의 기점은 부여성이 명확한데, 별다른 근거 없이 신성으로 변경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이처럼 천리장성을 산성연방선과 평원토벽을 혼합한 것으로 보는 절충론, 그리고 기존 산성연방선의 보조방어시설로 이해하는 중간방어선설이나 쌍중방어장새설 등은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 종전 견해 가운데 자체적인 논리 모순에 빠지지 않은 것으로는 산성연방선설과 평원토벽설 정도를 들 수 있다.주 024
2) 천리장성의 경로와 축조 배경
천리장성 경로 설정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동북 기점인 부여성의 위치이다. 산성연방선설과 평원토벽설도 부여성의 위치를 각기 서풍 성자산산성과 농안 일대로 다르게 비정한 다음, 장성의 경로와 그 성격을 파악했다. 그럼 부여성은 과연 어디로 비정할 수 있을까?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발해는 고구려의 부여성에 부여부(扶餘府)를 두었다고 하며, 『요사(遼史)』 지리지에 따르면 발해 부여부는 요(遼)의 용주(龍州) 황룡부(黃龍府)라고 한다. 고구려 후기 부여성이 발해의 부여부를 거쳐 요의 황룡부로 변화한 것이다. 요의 황룡부는 1013년에 지금의 농안 지역에 다시 설치되지만, 요 태조 야율아보기 시기에는 농안 서남쪽의 이통하(伊通河)와 신개하(新開河) 사이에 위치했다(日野開三郞, 1951; 1952; 1991). 그러므로 고구려 후기 부여성은 농안의 서남쪽 일대로 비정할 수 있다(松井等, 1913; 노태돈, 1999a).주 025
농안 일대가 고구려 후기 부여성일 가능성은 부여사의 전개와 이 지역의 지형조건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부여의 원중심지는 북류 송화강 중류의 길림시 일대였는데, 4세기 전반 고구려의 침공을 받고 중심지를 서쪽으로 이동해 전연(前燕) 가까이로 옮겼으며, 5세기 말에는 물길(勿吉)의 압박을 피해 고구려에 투항했다. 고구려 후기 부여성은 바로 서쪽으로 옮긴 후부여의 중심지에 설치된 것이다(노태돈, 1999a).
그런데 송화강 일대의 지형상 부여인들이 고구려의 공격을 피해 이주했을 만한 지역으로는 이통하 연안의 농안 일대가 가장 유력하다. 농안보다 서쪽 지역은 저습지대나 초원지대로 농경민인 부여인들이 생활하기에 적합하지 않고, 남쪽의 대흑산맥~길림합달령산맥 일대는 고구려나 전연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농안 지역은 대흑산맥과 이통하·음마하(飮馬河) 연안의 저지대에 의해 송화강 중상류와 뚜렷이 구분된다. 특히 농안 지역은 연강수량 500~600mm의 경계선으로서 전업농경의 서쪽 한계선이다(여호규, 2022b). 이에 부여인들은 고구려에 의해 원거주지를 함락당하자 송화강 중상류 유역과 대흥안령산맥 초원지대의 중간지역인 농안 일대로 중심지를 옮겼다고 파악된다(여호규, 2000).
천리장성의 동북 기점인 ‘부여성’이 농안 일대라면, 서남 종점인 ‘바다’는 어디일까? 종래 서남 종점의 유력한 후보지로 요하 하구인 영구(營口)와 요동반도 서남단인 대련(大連)이 거론되었다. 천리장성은 기본적으로 군사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축조한 것이다. 그런데 영구보다 남쪽 지역은 요동반도의 해안지대로 천산산맥이 동북~서남 방향으로 서남단까지 뻗어 있고, 천산산맥과 요동만 사이에는 해안평야가 기다랗게 놓여 있다. 이 일대에 장성을 축조한다면 적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일 텐데, 내륙에 위치한 기존 산성을 연결하여 장성을 축조했다면 군사전략상 무용지물에 가깝다. 지형조건과 군사전략상 서남 종점은 요하 하구인 영구로 파악된다. 실제 부여성으로 비정되는 농안 일대에서 거리가 천여 리인 곳도 영구이다.
이처럼 천리장성의 동북 기점인 부여성은 농안의 서남쪽, 서남 종점인 바다는 요하 하구의 영구 일대로 비정할 수 있다. 장성의 경로는 길림성 학자들의 견해처럼 농안 일대에서 시작하여 송화강~요하 분수령지대의 송료대평원을 가로질러 동요하에 이른 다음, 요하 동안을 따라 요하 하구에 이르는 구간에 축조되었다고 파악된다. 요하 동안은 기존의 산성방어체계가 위치한 요동평원·산간지역의 접경지대에서 서쪽으로 50km 가까이 떨어져 있다.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축조하며 산성 중심의 기존 군사방어체계와 전혀 다른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한 것이다(손영종, 1997; 田中俊明, 1999; 여호규, 2000).
그런데 송료대평원 한복판인 공주령시 일대에서 동북~서남으로 기다랗게 뻗은 토벽인 노변강유적이 조사되었다(『懷德縣文物志』; 李健才, 1987; 王健群, 1987). 1990년대에는 공주령시 동북쪽의 덕혜시(德惠市) 일대에서도 노변강유적이 확인되었다(李健才, 1991). 이들 노변강유적은 연·진·한대, 요대, 금대, 명대, 청대 등 다른 시기의 장성과 겹치지 않고(馮永謙·何薄瀅, 1986; 馮永謙, 1992; 2002; 遼寧省 長城學會, 1996; 李健才·劉素雲, 1997),주 026 앞서 상정한 천리장성의 경로 가운데 송화강~요하 분수령지대에 해당한다. 이로 보아 덕혜~공주령 일대의 노변강유적은 천리장성의 일부일 가능성이 높다(馮永謙, 2002; 張福有·孫仁杰·遲勇, 2010a; 2010b; 오철민, 2011; 2012; 우석훈, 2014; 신광철, 2022).주 027
그럼 고구려가 왜 천리장성을 축조했을까? 앞서 예시한 『삼국사기』나 『구당서』 등의 사료에 따르면, 당이 고구려의 대수(對隋) 전승기념물인 경관(京觀)을 파괴하자, 고구려가 이에 두려움을 느껴 장성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당의 경관 파괴가 장성 축조의 직접적 배경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당이 경관을 파괴한 시점은 631년 8월이다(『구당서』 권3 정관5년 8월조). 『삼국사기』처럼 장성의 착공시점을 631년 2월로 본다면 경관 파괴를 축성의 직접적인 배경으로 보기 힘들다. 실제 연대 순으로 서술된 『자치통감』과 『책부원구』에는 경관 파괴와 장성 축조 가운데 어느 하나만 기록했다( 『책부원구』권957 고구려조).
물론 경관 파괴가 장성 축조의 직접적인 배경은 아니다 하더라도 ‘경관 파괴’로 상징되는 당의 군사적 위협이 주요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착공하기 직전인 630년에 동돌궐이 당에 의해 괴멸되고, 서북방의 거란·해(奚)·습(霫) 등이 당에 투항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을 견제할 수 있는 유력한 파트너가 사라졌을 뿐 아니라, 당의 예봉이 언제든지 고구려로 향할 수 있는 위기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수의 침공을 여러 차례 경험했던 고구려인들로서는 위기감에 휩싸여 군사방어를 강화할 필요성을 크게 느꼈을 것이다. 그러므로 천리장성은 동돌궐의 궤멸 등 정세 변화에 따른 당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에서 축조했다고 이해된다(노태돈, 2009).
전술한 바와 같이 요령성 학자들은 고구려가 천리장성의 축조를 통해 기존의 산성방어체계를 강화했다고 이해한다. 물론 고구려가 당의 침공에 대비하여 기존의 산성방어체계를 재정비했겠지만, 천리장성은 송료대평원에 축조한 평원토벽으로 기존의 산성방어체계와 명확히 구별된다. 천리장성은 기존의 산성방어체계 강화가 아니라, 그와 다른 새로운 방어체계를 확립하려는 목적에서 축조한 것이다.주 028 다만 천리장성의 경로 가운데 요하 하류 구간은 당군의 침공로에 해당하지만, 요하 중상류나 송료분수령 구간은 당의 침공 경로와 직접 연관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리장성의 축조 목적도 구간에 따라 달랐을 가능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여호규, 2000).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수는 612~613년에 한 갈래로만 요하를 건넌 반면, 당은 645년에 세 갈래의 도하로를 모두 이용하여 요하를 건넌 다음 요동 지역 각지의 고구려 성곽을 차례로 공략하는 전략·전술을 구사했다. 수군과 당군의 행보가 차이 나는 가장 큰 이유는 주력 병종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수만 하더라도 4세기 이래의 중장기병(重裝騎兵)이 주력 병종이었는데, 수·당 교체기의 농민란을 거치며 경기병(輕騎兵)과 보병이 주력 병종으로 부상했다.
이에 당은 경기병과 보병을 주력 병종으로 삼아 고구려 침공을 감행했다. 당은 월등히 향상된 기동력을 바탕으로 여러 도하로를 통해 요하를 건넌 다음 고구려 성곽을 차례로 공략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고구려는 중원 대륙의 정세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619년 이래 자주 당에 사신을 파견한 만큼 제반 정세 변화나 당의 전략·전술을 정확하게 파악했을 것이다. 이에 고구려가 기존의 산성방어체계를 강화하는 한편, 기동력이 향상된 당군의 도하를 방어하기 위해 요하 하류의 동안을 따라 천리장성이라는 새로운 군사방어선을 구축한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요하 중상류와 송료분수령 구간은 당의 침공로는 아니지만, 당의 침공을 예방하기 위해 새로운 방어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천리장성 착공 직전에 동돌궐이 당에게 궤멸되었을 뿐 아니라 거란·해·습 등이 당에 투항했다. 당이 거란·해·습을 동원해 요하 중상류나 송료분수령 일대를 침공할 위험이 높아진 것이다. 또 북류 송화강 일대에 고구려에 예속된 말갈이 산재해 있었는데, 당이 이들한테도 영향력을 뻗칠 수 있었다. 실제 당은 645년 고구려 침공 시에 거란을 동원했고, 6세기 말에는 말갈의 일부가 수에 투항하기도 하였다.
고구려로서는 당에 예속된 거란의 침공을 방어하면서, 예하의 말갈이 당의 영향권 아래로 이탈하는 것을 봉쇄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고구려는 농경과 유목의 점이지대로서 말갈과 거란의 접경지역인 요하 중상류~북류 송화강 일대의 송료대평원 한복판을 가로질러 천리장성을 구축했다. 이를 통해 고구려는 거란의 침공을 방어하는 한편, 말갈이 당으로 이탈하는 것을 봉쇄할 수 있었다. 실제 고구려는 645년뿐 아니라 667~668년에 벌어진 최후의 군사작전에서도 말갈병을 대거 동원했는데, 천리장성의 축조를 통해 말갈의 이탈을 방지한 결과로 파악된다.
이상과 같이 천리장성은 당의 군사전략과 외교정책에 맞서기 위해 축조한 군사방어선이다. 요하 하류 구간의 천리장성이 당의 새로운 군사전략에 맞서기 위해 축조한 것이라면, 요하 중상류~북류 송화강 일대의 천리장성은 당의 외교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천리장성의 축조를 통해 군사·외교적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천리장성에는 7세기 전반 고구려의 군사·외교정책이 스며 있는 것이다.주 029
- 각주 021)
- 각주 022)
- 각주 023)
- 각주 024)
- 각주 025)
- 각주 026)
- 각주 027)
- 각주 028)
- 각주 0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