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압록강에서 평양까지의 성곽 분포와 방어체계
1. 압록강에서 평양까지의 성곽 분포와 방어체계
1) 압록강~청천강 유역
요동 지역에서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가는 길은 서해안교통로와 내륙교통로가 있다. 서해안교통로는 의주-용천-선천-정주-안주-숙천-평양으로 이어진다. 의주에서 구성을 거쳐 정주로 가는 길도 있지만 천마산맥을 가로지르는 산악지대를 통과해야 한다.

그림1 | 서북한 지역 고구려 성곽의 분포와 방어체계
서해안교통로는 평야지역을 통과하므로 내륙교통로보다 대규모 병력이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수와 평양성을 공격한 당의 군대는 물론, 거란과 몽골, 청의 군사들도 모두 이 교통로를 이용하였다. 따라서 이 길목에는 대규모 고구려 성곽이 밀집되어 있었다. 대표적인 고구려 성곽은 피현의 백마산성과 걸망성, 염주의 동림산성, 곽산 능한산성, 안주성 등이다.
내륙교통로는 고구려 국내성에서 압록강을 건너 강계를 거쳐 남하하는 교통로다. 이 경로는 강계-전천-회천-영변-개천-순천-평성-평양으로 이어진다. 만포에서 향산에 이르는 산악지대에는 성곽이 구축되지 않았다. 산악지대를 지나 평지로 이어지는 영변에 이르러서야 농오리산성과 철옹성이 구축되어 있다.
평안북도에 분포하는 고구려 성은 서해안교통로나 내륙교통로 모두 청천강 남쪽에 있는 안주성을 거쳐야 했다. 안주성에서 평양으로 가는 길은 크게 두 가지다. 안주-숙천-순안-평양으로 이어지는 길과 개천으로 우회하여 순천-평성-평양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두 길 모두 평성의 청룡산성(자모산성)을 통과해야 했으므로 이 산성에 방어력이 집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순천에서 은산으로 우회하는 길목에는 흘골산성을 배치하여 평양의 동북지역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그중 평야지역을 통과하는 안주-숙천-순안-평양에 이르는 길이 중심도로로 이용되었다. 수의 침공 당시 우문술도 이 길을 통해 안주에서 평양까지 접근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상훈, 2020).
피현의 백마산성은 의주에서 평양으로 이어지는 종심방어체계의 관문에 해당하는 가장 중요한 성곽이었다. 현재의 백마산성은 해발 409m 봉우리를 중심으로 내성과 우마성(고성),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내성(둘레 2.6km)과 외성(둘레 2.4km)은 고려시대에 확장하여 쌓은 성이다. 고성이라고도 불리는 둘레 1.4km의 우마성이 고구려 성이다. 우마성의 평면 형태는 사다리꼴이며 가운데를 볼록하게 가공한 성돌로 정연하게 쌓았다. 성벽 안쪽은 막돌과 흙을 채웠으며 내탁하였다는 것으로 보아(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2009), 외벽만 돌로 쌓고 안쪽은 흙으로 쌓는 ‘토심석축공법’으로 구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 걸망성은 피현의 흥화진성으로 추정되며 백마산성에서 남쪽으로 약 40km 정도 거리에 있다. 이곳은 피현벌과 삼교천을 끼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행정중심지로 적합한 지점이다. 삼교천이 성을 감싸고 돌아 해자 역할을 하며 해발 138m 정도의 낮은 봉우리 5개를 연결하여 성을 쌓았다. 성의 둘레는 2.8km에 달하며 성벽은 화강암과 사암을 사각추 형태로 가공하여 쌓았다. 대부분 편축식이고 곡간부만 협축식으로 쌓았다. 성내에서 고구려의 붉은 기와편이 출토되었다(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2009).
용골산성은 피현과 염주의 경계에 있는 해발 476m 용골산 서남쪽 능선상에 있다. 이곳에서는 황해와 신의주 일대가 한눈에 조망된다.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구려 성인 내성은 둘레 670m, 조선시대 쌓은 외성은 둘레 2.5km에 달한다. 내성 벽은 잘 가공한 사각추형 돌로 외면만 쌓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2009) 용골산성에도 토심석축공법이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동림의 동주성은 고구려 통주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장대봉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평지를 아우르도록 쌓은 평산성이다. 둘레 4.1km에 달하는 대형 성곽이다. 평지에 쌓은 남쪽 성벽은 잘 남아있으며 사각추 형태로 가공한 성돌로 정연하게 쌓았다. 조선시대에 대대적으로 수·개축되어 고구려 당시의 원형을 알기는 어렵다(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2009).
능한산성은 곽산의 능한산(해발 412m)에 있다.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쌓았으며, 둘레는 2.8km에 이른다. 성벽은 가공 성돌로 정연하게 쌓았다. 조선시대에 수축하였으나 고구려 석축성의 특징이 잘 남아 있다. 성내에서는 붉은색의 고구려 기와가 출토되고 있다.
태천 농오리산성은 해발 392m 산성산에 있다. 이곳은 남북 교통의 요충지로서 서북으로는 구성-대관-순천, 동쪽으로 동창-창성을 거쳐 요동으로 통하며, 남으로는 영변-개천, 박천-안주길을 거쳐 평양으로 이어진다. 성벽의 둘레는 2km이고 사각추형 성돌로 정연하게 쌓았다. 성의 동남쪽 경사면에 있는 바위에는 “乙亥年 八月 前部 小大使者 於九婁 治城 六百八十四間(을해년 8월 전부 소대사자 어구루가 684칸의 성을 쌓았다)”라는 명문이 있다(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2009). 1칸은 6척이므로 이를 고구려척으로 환산하면 소대사자 어구루가 쌓은 성의 규모는 1.46km에 달한다.
철옹성은 영변 약산에 있다. 이곳은 구룡강이 청천강과 합류되는 삼각지점으로 수륙교통의 결절점이다. 서북쪽이나 동북쪽에서 오는 적들이 이 성을 점령하지 않고는 더 남진할 수 없는 군사상 요충지이다. 본성과 북성, 신성, 약산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성과 약산성은 고구 려성이며, 북성과 신성은 고려시대 이후에 쌓은 성들이다. 본성의 둘레는 14km로 고구려 성곽 중 평양성 다음으로 큰 규모이다. 성벽은 사각추형으로 잘 가공한 성돌로 정연하게 쌓았다. 약산성은 동, 북, 서쪽은 자연절벽을 그대로 이용하였고, 남쪽에만 성을 쌓았다(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2009).
안주성은 청천강 남안에 있으며 수륙교통의 결절점으로서 평양으로 오는 적을 차단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성곽이다. 주변에 넓고 기름진 평야를 끼고 있다. 안주성은 내성과 외성, 신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성만 고구려 성이고 외성과 신성은 조선시대에 쌓은 성이다.
내성은 청천강 기슭에서 구릉(해발 169m)을 연결하여 쌓은 평산성이며 둘레는 2.28km이다. 성벽은 사각추형으로 가공한 성돌로 정연하게 쌓았으며, 퇴물림쌓기를 하여 조성한 굽도리 기단을 특징으로 한다. 성벽은 편축과 협축이 확인되는데, 외벽만 석재로 하고 안쪽에는 막돌과 흙을 채워 넣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전형적인 토심석축공법으로 구축된 것으로 보인다.
청룡산성은 평성시에 있으며 자모산성이라고도 불린다. 안주에서 평양으로 가는 중간지점에 있으며, 평양에서 약 70km 정도 거리에 있어 평양을 방어하는 북쪽 위성에 해당한다. 이 성은 안주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은 청룡산 줄기의 험한 지세를 이용하여 쌓았다.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성의 둘레는 5.3km에 달한다. 외벽은 막돌을 잘 가공하여 쌓았으며, 안쪽은 막돌과 진흙을 섞어서 다지면서 쌓았다는 것으로 보아 청룡산성 역시 토심석축공법으로 구축된 것으로 보인다.
표1 | 압록강~청천강 유역의 주요 고구려 성곽 현황
| 명칭 | 소재지 | 둘레(km) | 해발(m) | 특징 |
| 백마산성 | 피현 | 1.4 | 409 | 내성, 고성, 외성 |
| 걸망성 | 피현 | 2.8 | 138 | 삼교천변, 흥화진성 |
| 용골산성 | 염주 | 0.67 | 476 | 토심석축공법 |
| 능한산성 | 곽산 | 2.8 | 412 | 가공 성돌, 고구려 기와 |
| 농오리산성 | 태천 | 2 | 392 | 고구려 축성명문 |
| 철옹성 | 영변 | 14 | 489 | 사각추형 성돌 |
| 안주성 | 안주 | 2.28 | 169 | 토심석축공법, 평산성 |
| 청룡산성 | 평성 | 5.3 | 토심석축공법, 내성, 외성 |
압록강에서 청천강에 이르는 성곽들은 평양을 방어하는 대표적인 종심방어체계에 속한다. 특히 의주에서 안주에 이르는 서해안교통로상에 대규모 성곽이 20~30km 간격으로 집중 분포되어 다른 지역에 비하여 밀집도가 높은 편이다. 규모도 1~14km에 달할 정도로 대규모 성곽들이다. 주변에 중소 규모의 여러 성곽을 거느리고 있었다.
고구려 성곽은 교통로를 방어하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인구가 밀집된 군현의 중심지에 있었다. 지방군사조직은 이러한 거점성을 중심으로 지방행정조직과 하나의 체계로 짜여 있었다. 하나의 거점성에 중소규모 위성이 다수 포함되어 지역을 방어하고 군과 현의 행정단위로 기능하였다.
성곽은 강기슭의 단애면이나 자연절벽 등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쌓은 석축산성이 대부분이다. 성벽은 잘 가공된 성돌로 정연하게 쌓았다. 성내에서 붉은색을 띠는 고구려 기와가 확인되는 것이 고구려 성으로 추정하는 주요 근거가 되고 있다. 약식으로 조사되고 도면이 소략하여 축성법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외벽만 석축으로 하고 안쪽에 흙과 돌을 섞어 쌓았다는 표현이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전형적인 축성법인 토심석축공법이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림2 | 고구려 토심석축공법 모식도(심광주, 2018)
토심석축공법은 성벽 기저부와 중심부는 토성을 쌓듯이 판축을 하고 외벽부만 석축으로 쌓는 축성법이다. 고구려 국내성과 평양 대성산성, 평양성 등에서도 동일한 공법이 확인된다. 따라서 5세기대 이후 고구려의 핵심적인 축성법일 가능성이 있다(심광주, 2018). 이러한 축성법으로 볼 때 서북한 지역에 있는 토심석축공법으로 쌓은 고구려 성 대부분은 평양 천도 이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의 성곽들은 북쪽에서 오는 이민족들의 침입을 방어하는 요충지에 있었으므로 고려, 조선시대에도 계속 수·개축되었다. 수·개축 방법은 주로 기존 성곽에 외성을 덧붙여 쌓아 성곽의 규모를 확장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수·개축 성벽에서 확인되는 축성법의 특징으로 볼 때 수·개축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인다.
2) 대동강 유역
고구려 도성인 평양성 주변의 성곽은 대성산성과 안학궁성, 청암동토성, 고방산성, 덕산산성 등이 있다. 평양 외곽의 성곽으로는 북쪽에 평성의 청룡산성과 성천의 흘골산성, 서쪽에 용강의 황룡산성, 남쪽에 황주성 등이 있었다.
이 중 청암동토성과 고방산성, 청호동토성 등은 고구려가 집안에 도읍하였던 시기에 구축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구려가 평양 지역을 장악한 4세기 초부터 평양으로 천도하는 427년까지 상당 기간 평양을 비롯한 서북한 지역의 고구려 성곽은 대부분 토성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평양성은 대동강과 보통강으로 둘러싸인 요충지에 있다. 성곽은 모란봉(해발 96m)을 중심으로 내성과 중성, 외성, 북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약 16km이고, 성벽의 총연장은 23km에 달한다. 기초부는 판석과 진흙을 번갈아 쌓아올렸으며, 개흙층이 있는 곳에서는 통나무를 가로세로 일정한 간격으로 올려놓고 자갈과 흙으로 다진 다음 성돌을 쌓았다.
1990년대에 이루어진 중성 서벽에 대한 발굴조사에 의하면 고조선의 토축 성벽 위에 고구려 성벽이 구축되었는데, 고구려 성벽은 바깥면은 석축이고, 안쪽 면은 황색 진흙층과 석비례층을 번갈아 축조했다고 한다(안병찬·최승택, 1998). 이 조사 결과에 따르면 고구려 평양성도 성벽 내부는 판축하고, 외벽만 석축으로 마감하는 토심석축공법이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552년 장안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여 586년에 천도를 단행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평양성은 정점에 이른 고구려 토목기술의 수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성산성은 평양시 동북쪽 8km 지점의 대성산(해발 270m)에 있다. 6개의 산봉을 연결하여 있었으며 전체 둘레는 9.28km에 달하는 대규모 성이다. 성벽은 사각추형으로 가공한 성돌이 사용되었으며 소문봉 성벽의 중간벽에서는 기둥홈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기둥홈은 연천 호로고루와 당포성에서도 확인되어 석축부를 견고하게 쌓은 고구려의 축성공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심광주, 2018).

그림3 | 고구려 성벽의 기둥홈 - 1. 평양 대성산성 중간벽

그림3 | 고구려 성벽의 기둥홈 - 2. 연천 호로고루 중간벽

그림3 | 고구려 성벽의 기둥홈 - 3. 연천 당포성
주작봉 성벽은 외벽만 석재로 하였으며, 남문터 부근의 성벽은 내외벽은 석재로 하고 중간은 흙과 돌을 다져서 쌓았다. 국내성에서도 확인된 이러한 축성법이 대성산성에서도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5세기를 전후하는 시기에 이미 토심석축공법은 고구려의 전 영역에서 핵심적인 축성법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안학궁성은 대성산 남쪽 평지에 있다. 평면 형태가 마름모꼴에 가까운 방형 토성이며 둘레는 2,488m이다. 안학궁성은 대성산성과 함께 427년 평양 천도 이후의 고구려 도성이라는 것이 북한 학계의 일관된 견해이다(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73). 국내성 도읍기의 국내성과 환도산성처럼 안학궁성과 대성산성이 평지성과 산성의 세트관계를 이루며 고대 도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학궁성 성벽은 축성법이 매우 독특하다. 보고서에 따르면 안학궁성은 잘 가공된 석재를 사용하여 너비 8~10m, 높이 1~2m로 내외벽 석축을 먼저 들여쌓기 하여 쌓고 그 위에 흙으로 판축하여 토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5m, 석축부의 기울기는 60~70。, 토축부의 기울기는 70~80。로 토축부가 더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전제헌·손양구, 1985).
즉, 안학궁성 성벽은 낮은 석축 기단 위에 수직에 가깝게 쌓은 3~4m 높이의 토벽으로 내외벽을 마감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축성법은 국내성, 환도산성, 대성산성, 평양성 등 고구려 도성의 축성법과 전혀 다르다. 고구려의 산성에서도 이러한 축성법의 사례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축성법으로 보면 안학궁성은 전형적인 기단식 판축토성이다. 기저부에 2열의 기단석렬을 조성하고 판축공법으로 중심 토루를 쌓고 내외피 토루를 덧붙여 쌓았다. 외피 토루의 기저부에서는 와적층(瓦積層)도 확인되고 있다. 이것은 대부분의 기단식 판축토성에서 확인되는 공통적인 속성이다.
우리나라 축성사에서 기단식 판축토성은 9세기 중엽 이후에 등장하는 새로운 축성법이다. 이 신기술은 고려시대에는 더욱 보편화되어 개성 나성(羅城)과 강화 중성 등 도성뿐 아니라 전국 군현의 읍치를 새로 쌓거나 수축하는 주된 축성법으로 자리 잡았다.
안학궁성의 성벽 단면도는 개성 나성의 단면도와 매우 유사하다. 모두 기저부에 2열의 기단석렬을 5~6단 정도로 들여쌓기 하여 쌓고, 중심 토루를 판축하여 쌓고, 내외피 토루를 덧붙여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안학궁성은 고구려의 전형적인 축성법인 전면석축이나 토심석축공법이 아니라 9세기 중엽 이후에 새롭게 출현하는 ‘기단식 판축공법’으로 구축된 토성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즉, 안학궁성 건물지 내부에서 5세기대의 고구려 고분이 확인되었으나, 출토유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고려시대의 기와 조각이다. 성내 건물지의 배치구조나 주간거리 등은 국내성이나 환도산성의 왕궁 건물지와 공통점을 찾기 어렵다. 따라서 안학궁성은 고구려가 아니라 고려시대에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안학궁성의 축성시기가 고려시대라고 한다면, 안학궁을 중심으로 설정한 고구려 중기 도성방어체계에 대한 기존의 견해는 전면 재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림4 | 평양 대성산성 성벽 단면도(사회과학원출판사, 1964 일부 편집)

그림5 | 평양 안학궁성 성벽 단면도(사회과학원출판사, 1964)와 개성 나성 성벽 단면도(ICOMOS한국위원회, 2004)
안학궁성은 청암동토성이나 고방산성, 청호동토성, 덕산토성과 같은 기법이라고 한다. 그중 보고서에서 성벽 단면 확인이 가능한 것은 덕산토성이다. 이 토성은 청암동토성에서 북쪽으로 20km 거리의 평양시 은정구역에 있으며 둘레는 1,560m이다. 리정남은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덕산토성이 고조선시기에 북쪽 방어를 위하여 쌓은 판축토성이며, 고구려와 고려시기까지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였다(리정남, 2007).
보고서에서도 기술하였듯이 덕산토성은 판축토성이다. 그림5의 안학궁성 성벽 단면을 보면 기저부에 2열의 기단석렬이 배치되어 있다. 그림6의 1지점 토성 중심기저부의 할석은 판축토성의 기초공정에 해당하는 석축으로 볼 수 있다. 판축층 안에서 붉은색의 고구려 기와편과 회색 기와편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발굴 결과는 덕산토성이 고조선의 성이 아니라 기단식 판축공법으로 쌓은 고려시대의 토성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림6 | 평양 덕산토성 성벽 단면도(리정남, 2007)
청암동토성은 대성구역 청암동의 해발 62m 지점에 있다. 동으로 4km 지점에 대성산성, 안학궁성, 청호동토성이 있고, 주변에 많은 고구려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성의 남쪽으로는 대동강이, 동쪽으로는 합장강이 흐른다. 성은 주암산에서 시작하여 모란봉과 연결된다. 성의 둘레는 3.45km에 달한다. 성벽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북문지 부근 성벽의 너비는 17m이다. 토성은 고구려 이전에 쌓은 성벽을 고구려가 3차에 걸쳐 수축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벽은 토성이며 기저부에 다듬은 돌을 몇 단 쌓고 그 위에 돌과 흙을 성토했다고 한다. 청암동토성은 평양 지역의 고구려 성곽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구축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축성기법을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흘골산성은 평양성 동쪽 40km 지점에 있는 위성이며 평안남도 성천군 흘골산에 있다. 성곽은 본성과 남쪽의 고당봉을 연결하여 쌓은 철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성의 둘레는 1,140m이다. 외벽만 가공된 성돌로 쌓았으며, 후대에 수축하였다. 성내에서 붉은색의 고구려 기와가 출토되고 있다.
황룡산성은 평안남도 용강군 오석산(해발 565m)에 있으며 평양성의 서쪽 위성이다. 둘레는 6.6km에 달하며 평면은 타원형에 가깝다. 황룡산성은 고구려 중후기에 구축되어 지방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며, 황해~대동강 연안로를 통제하는 주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근에는 우산성, 동진성, 늑명산성, 보산성 등의 위성이 분포하고 있다. 성벽은 잘 가공한 성돌을 협축식으로 쌓았다. 성 내부에서는 붉은색의 고구려 기와가 출토되며, 성 주변에 수백 기의 고구려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황룡산성은 고려시대에 대대적으로 수축되어 원형을 알기 어렵다.
황주성은 평양성의 남쪽 40km 지점에 있는 위성으로 황주군 덕월산(해발 140m)에 있다. 이곳은 황주벌을 끼고 있으며 황주천이 휘돌아 흐르고 있다.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며 둘레는 4km에 달한다. 평지와 산지를 아우르는 평산성이다. 성벽은 사각추형으로 가공한 성돌로 정연하게 쌓았으며 굽도리기단이 확인된다. 평지 구간에는 해자를 돌리고 산지에는 물 없는 해자인 황을 설치하였다. 성내에서 붉은색의 고구려 기와가 출토되고 있다.
표2 | 평양 일대의 주요 고구려 성곽 현황
| 명칭 | 위치 | 규모(km) | 해발(m) | 특징 |
| 평양성 | 평양 | 16 | 96 | 사각추형 성돌, 토심석축공법 |
| 대성산성 | 평양 | 9.28 | 270 | 사각추형 성돌, 중간벽 기둥홈, 토심석축공법 |
| 안학궁성 | 평양 | 2.488 | 20 | 기단식 판축토성, 고구려 토기・기와, 고려 기와 |
| 청암동토성 | 평양 | 3.45 | 62 | 고조선 토성 위에 축조 |
| 흘골산성 | 성천 | 1.14 | 비류강변 | |
| 황룡산성 | 용강 | 6.6 | 565 | 사각추형 성돌, 고구려 기와, 고구려 고분군 |
| 황주성 | 황주 | 4 | 140 | 평산성, 사각추형 성돌, 굽도리기단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