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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임진강에서 평양까지의 성곽 분포와 방어체계

2. 임진강에서 평양까지의 성곽 분포와 방어체계

1) 황해남도 일원
황해남도 일원은 대동강 남안에서 황해 연안을 따라 남쪽 멸악산맥으로 이어지는 산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재령평야를 둘러싸고 있다. 이 연해 산지를 따라 고구려 산성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이 지역의 대형 산성으로는 구월산성, 양산성, 풍천산성, 성미산성, 오누이성, 웅천산성, 수양산성이 있다. 이 산성들의 중심에 장수산성이 있다.
평양 진출로 국경이 확대되면서, 고구려의 전연방어체계는 남쪽으로 확장되어 갔다. 369년의 치양전투는 대방 지역의 영유권을 둘러싼 쟁탈전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371년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고국원왕이 전사한 평양은 현재의 평양이 아니라 신원 지방에 있었던 남평양으로 보고 있다(안병찬, 1990; 리승혁, 2004). 황해도 일대에서 가장 핵심적인 곳은 장수산성으로 국내성과 함께 고구려의 별도인 한성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장수산성이 위치한 신원 일대에서는 고구려 당시의 도시유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양시은, 2016).
이후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하여 청목령에서 팔곤성에 이르고 서쪽으로 바다에 이르는 장성을 구축하였다. 이는 당시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이 예성강 이북 지역에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392년 고구려 광개토왕은 4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북방으로 쳐들어가 석현성을 비롯한 10개의 성과 관미성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 작전을 개시하여 관미성을 빼앗았다. 이 성은 백제의 북변에 있던 요충지로서 네 면이 절벽이고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광개토왕이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공격해야 했다.
관미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파주 오두산성이라는 견해도 있고(윤일영, 1990), 강화 교동의 화개산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이병도, 1976). 그 외 개풍군 백마산 고성(손영종, 1990), 예성강 남안(이도학, 1988b) 등 견해가 분분하다. 다만 당시 백제 서북 국경이 예성강 유역이었음을 고려하면 관미성은 임진강보다는 예성강 일대에 있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많은 연구자들이 여전히 파주 오두산성을 관미성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오두산성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고구려 성곽이나 유물은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성벽은 세장방형 성돌로 정연하게 쌓았으며 보축 성벽이 확인되어 6세기대에 쌓은 신라 성으로 밝혀졌다. 성내에서 ‘泉’, ‘泉井’ 등의 명문이 확인되어 오두산성은 675년 신라와 당군이 격돌한 천성 또는 백수성이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박종서, 2022).
관미성전투 후 고구려는 394년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여 나라의 남쪽에 7성을 쌓았다. 이 ‘국남 7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예성강 서남지역 황해남도 남부해안지대를 강화하기 위하여 쌓은 성일 가능성이 있다. 광개토왕 대에 구축한 국남 7성은 치악산성, 봉세산성, 수양산성, 옹천성, 오누이성, 연안읍성, 강령읍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지승철, 2005). 국남 7성으로 비정되는 성들은 대부분 전형적인 석축산성이다. 장수산성은 4세기 초에 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군사적 위계가 국내성, 평양성과 대등한 지방통치거점이었다는 견해도 있다(신광철, 2011).
396년 고구려는 백제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여 58개의 백제 성을 공취하였다. 백제는 항복하고 많은 공물과 함께 58개 성, 700촌을 떼어주고 왕의 아우와 대신 10명을 볼모로 보내는 데 동의하였다. 고구려는 409년 나라의 동쪽에 독산성 등 6개의 성을 쌓고 평양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이때 고구려가 쌓은 ‘국동 6성’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지만, 임진강 상류 지역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철원의 거성과 노기산성, 만경산성, 삭령산성, 이천의 심동리산성, 성산고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지승철, 2005; 최창빈, 1990; 손영종, 2008). 철원의 거성, 만경산성, 삭령산성, 연천의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을 국동 6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최승택, 2008).
그러나 붉은색을 띠는 고구려 기와 출토양상을 고려하면, 이 지역의 성들은 551년 나제연합군의 공격으로 고구려가 임진강 이북 지역으로 퇴각한 이후에 구축되어 고구려의 전연방어체계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국동 6성이 수안-신계-토산-연천으로 연결되는 방원령로를 방어하기 위한 성곽이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서영일, 2008). 고구려가 백제의 수곡성을 빼앗은 후 유지해 왔던 방원령로에 대한 방어망을 공고히 함으로써 백제군이 예성강 상류 유역으로 우회하여 오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조치였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장창은, 2014).
장수산성은 황해남도 신원군의 장수산(710m)에 있다. 장수산은 평지에 돌출된 산이며 재령강의 지류가 동쪽을 감돌고 있다. 재령벌을 관장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이다. 장수산성은 평양성의 남쪽 위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산성은 내성과 외성, 겹성, 철성, 차단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둘레는 10.5km에 이른다. 성벽에 사용된 성돌은 외성 동벽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부정형의 할석으로 구축되어 고구려 성곽을 고려, 조선 시대에 수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 내에서는 고구려 기와 조각과 고려시대 기와, 회색 벽돌 등이 출토되고 있다.
구월산성은 황해남도 은천군과 은율군, 삼천군의 접경지대에 구월산 상황봉(해발 954m)을 중심으로 축조되어 있다. 성벽을 쌓은 산릉선과 봉우리들은 절벽이거나 급한 경사로 지세가 험하다. 성은 평면 형태가 장타원형이며 전체 둘레는 5.2km에 달한다. 성벽은 편축과 협축 구간이 확인되며, 화강암을 사각추 모양으로 가공하여 정교하게 쌓았다. 발굴조사 결과 붉은색 기와가 출토되는 고구려문화층, 청자와 청회색 기와가 출토되는 고려문화층, 그리고 조선문화층이 확인되었다. 가공 성돌로 쌓은 수직성벽과 퇴물림쌓기 한 성벽, 부정형의 할석으로 쌓은 성벽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구월산성은 고려, 조선 시대에 계속 수축된 것으로 보인다(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2009).
옹천성은 황해남도 옹진군 본영리에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수군의 본영이 있었으며, 옹진군의 소재지가 현재의 옹진읍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군 소재지였다. 성은 평지와 노적봉(110m)을 아우르며 쌓은 평산성이다. 둘레는 4.3km이며, 성벽은 진흙과 막돌로 쌓은 곳도 있고 화강암을 사각추형으로 가공하여 정연하게 쌓은 곳도 있다. 성내에서 붉은색의 고구려 기와편이 출토된다.
오누이성은 황해남도 대탄군 성남리에 있다. 성은 능선과 봉우리(해발 280m)를 따라 쌓았으며 둘레는 약 3.5km이다. 성벽은 편축과 협축이 모두 확인되며, 내외벽은 편암계의 석재를 장방형으로 가공하여 쌓고 안쪽에는 막돌을 넣었다. 성벽 상부에는 집안의 환도산성이나 패왕조산성 등에서 보이는 네모난 돌구멍이 있다.
수양산성은 황해남도 해주시 수양산의 해발 252m 봉우리에 있으며 자성산성이라고도 불린다. 수양산은 멸악산의 지봉이며 장수산성에서 남쪽으로 20km 지점이다. 성곽의 둘레는 8km에 달한다. 성벽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암벽 위에 쌓았다. 성벽은 하단에는 큰 돌을 놓고 상부에는 납작한 돌로 쌓았다. 입지나 규모, 축조기법으로 등으로 볼 때 고려시대의 입보용 성곽으로 추정된다.
봉세산성은 황해남도 연안읍의 봉세산(해발 281.6m)에 있으며 성의 둘레는 2.26km이다. 성벽은 규암질의 다듬은 돌과 진흙, 막돌이 사용되었다. 하단은 석축 성벽을 쌓았고, 상부는 진흙과 막돌로 쌓았다. 외관상 토석혼축성으로 보인다. 붉은색의 고구려 기와가 확인되었다.
연안읍성은 황해남도 연안읍에 있으며 고려 고영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 시기 동음홀이라 부르던 지역이다. 서북쪽에 봉세산성이 있다. 성의 둘레는 2km이며 성벽은 다듬은 성돌로 면을 맞추어 치밀하게 쌓았다. 성벽 외부에는 해자가 조성되었다.
휴류산성은 황해북도 봉산군 휴류산(해발 127.7m)에 있다. 둘레가 2.9km이며 석성이다.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반달 모양으로 쌓았으며 평양성의 남쪽을 방어하는 중요한 위성이었다. 정방산은 험준한 산줄기가 동쪽의 산악지대에서 서쪽으로 예성강까지 뻗어내려 남북 교통을 차단하고 있다. 휴류산성은 이 산줄기를 통과하는 길목에 있었으며,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다.
표3 | 황해도 일대의 주요 고구려 성곽 현황
명칭위치규모(km)해발(m)특징
장수산성신원10.5710동벽 일부 고구려 성벽, 고구려 기와
구월산성은율5.2954사각추형 성돌, 통일신라 수축
옹천성옹진4.3110평산성, 사각추형 성돌, 고구려 기와
오누이성대탄3.5280장방형 가공 성돌, 상부 사각기둥홈
수양산성해주8252자성산성, 고려 성(?)
봉세산성연안2.26281.6토심석축공법, 고구려 기와
연안읍성연안2 배후에 봉세산성, 가공 성돌, 해자
휴류산성봉산2.9127.7평양성 남쪽 위성, 멸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임진강 이북 지역으로 진출하여 우봉군과 송악군을 설치하는 것은 694년이다. 황해북도 금천 지역에 우봉군을 설치하고 장단현과 임단현을 속현으로 두었다. 이후 경덕왕 21년(762년) 신라는 오곡, 휴암, 한성, 장새, 지성, 덕곡에 6성을 쌓았다. 이곳은 서흥, 봉산, 신원, 수안, 해주, 곡산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오곡은 황해도 서흥, 휴암은 황해도 봉산, 한성은 황해도 신원, 장새는 황해도 수안, 지성은 황해도 해주, 곡산은 황해도 곡산으로 비정되고 있다. 이 지역에 있는 고구려 산성 중 휴류산성, 대현산성, 장수산성, 수양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쌓은 6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정구복 외 역주, 1997).
 
2) 예성강 유역
예성강은 황해북도 수안에서 발원하여 개성시 개풍군을 거쳐 강화만을 통해 황해로 유입된다. 371년 백제가 군사 3만 명을 동원하여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백제는 이 전투 후 373년 청목령(개성 부근)에 성을 쌓아 고구려의 공격에서 대비하였다. 386년에는 청목령에서 팔곤성, 서쪽으로 바다에 이르는 장성을 구축하고 고구려의 남하에 대응하였다. 392년 고구려는 4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 북방의 석현성을 비롯한 10개 성과 관미성을 공취하였다.
이러한 역사기록을 근거로 하면 예성강 하류 지역과 신계, 평산, 서흥, 금천 등 황해북도의 남부지역이 고구려의 관방체계에 편입된 것은 4세기 후반 광개토왕이 관미성을 공취한 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예성강 일원의 고구려 성곽은 황해도 일원의 고구려 성곽보다 늦은 시기에 구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예성강 유역에서 고구려 산성은 대현산성과 태백산성, 백치성, 치악산성 등이 확인된다.
대현산성은 황해북도 서흥군 고성리 대현산(해발 607m)에 있다. 5개의 골짜기를 끼고 있으므로 오곡성이라고도 불렸으며 둘레는 7km에 달한다.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협축식성벽과 편축식성벽이 확인된다. 부정형의 할석과 편암계의 석재를 장방형으로 가공하여 쌓은 성벽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성을 고려시대 이후에 수축한 것으로 보인다. 성내에서 붉은색의 고구려 기와편이 확인되고 있다. 광대토대왕 때 남방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쌓은 국남 7성 중 하나로 추정하고 있다(채희국·전재헌, 1966).
태백산성은 예성강의 서안, 황해북도 평산군 산성리의 태백산(해발 101m)에 있다. 동쪽으로는 임진강 유역의 파주, 연천, 철원 방면에서 서흥을 거쳐, 봉산-황주-평양으로 가는 중심도로의 결절점에 해당하는 지점이다. 임진강 북안의 전연방어체계를 지나 평양으로 향하는 종심방어체계의 관문에 해당하는 성곽이다.
산성의 둘레는 2.4km이다. 성벽은 사각추형으로 잘 가공된 석재로 정연하게 쌓았으며, 하단부에 굽도리기단이 있는 전형적인 고구려 성곽이다. 성내에서는 붉은색의 고구려 기와편이 확인되고 있다. 예성강으로 흘러드는 샛강으로 남쪽 일부를 제외하면 전 구간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러한 지형적인 여건으로 태백산성은 관미성으로 추정되기도 한다(손영종, 1990).
치악산성은 황해남도 배천의 서북쪽 치악산(해발 360.7m)에 있다. 연백벌판을 끼고 있으며, 수륙교통의 요충지이다. 산성의 둘레는 3.6km이며 성벽은 화강암 가공 성돌로 쌓았다. 성벽은 지세가 높은 곳에는 외벽만 쌓고, 지세가 낮은 곳에는 내외벽을 모두 쌓았다. 성벽에는 11개의 치가 남아있다. 붉은색의 격자문 고구려 기와 조각이 확인되었다.
표4 | 예성강 일대의 주요 고구려 성곽 현황
명칭위치규모(km)해발(m)특징
대현산성서흥7607오곡성, 가공 성돌, 고구려 기와
태백산성평산2.4101관미성, 사면초절, 가공 성돌, 고구려 기와
치악산성배천3.6360.7화강암 가공 성돌, 고구려 기와
백치성장풍0.5 외벽만 석축, 고구려 성(?)
백치성은 황해북도 장풍군의 수룡산에 있다. 백치진성이라고도 하며 황해도에서 경기도로 통하는 주요 길목에 있다. 둘레는 500m이고 장타원형이며 외벽만 석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축성기법과 규모로 볼 때 백치성은 임진강 일원의 고구려 성곽처럼 보루성일 가능성이 있다.
그림7 | 관미성으로 추정되는 평산 태백산성과 배천 치악산성 위치도(미육군공병대, 1952, 〈한반도 1:5만 지도〉)
예성강에서 황해도 일대에는 2~10km에 달하는 대규모 성곽이 20~40km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배치되어 있다. 각각의 성들은 평양으로 이어지는 종심방어체계를 유지하면서 지역의 거점방어체계를 구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일대의 성곽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도성 방어를 위한 중요 방어체계에 포함되어 수·개축이 이루어지면서 고구려 성곽의 원형은 찾기 어렵다.
 
3) 임진강 이북 지역
임진강은 함경남도와 평안남도, 강원도가 접하는 두류산에서 발원하여 연천을 가로질러 황해로 흘러든다. 임진강은 양안에 수십 km에 걸쳐 현무암 수직절벽이 형성되어 있어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를 제공하고 있다.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에 밀려 임진강 유역으로 후퇴한 고구려는 임진강의 자연지세를 활용하여 여러 성을 쌓아 전연방어체계를 구축하였다. 임진강 유역의 고구려 성들은 이후 약 120년 동안 신라의 공격을 막아내는 국경성으로 기능하였다.
임진강의 가장 하류 쪽에 있는 고구려 성은 파주 덕진산성이다. 이곳은 하중도인 초평도가 교두보 역할을 하여 임진강을 건너기 수월한 곳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고구려 오아홀(烏阿忽)이었으며 신라 효소왕 3년(694년)에 임진현(臨津縣)을 설치한 곳이다. 발굴조사 결과 토심석축공법으로 구축된 고구려 성을 신라가 수축하였으며, 조선시대에 토성을 덧붙여 쌓은 것으로 확인되었다(심광주, 2018).
덕진산성에서 동북쪽으로 11km 지점에 연천 호로고루가 있다. 호로고루는 황해 감조(感潮)구간의 상류에 있다. 이곳은 걸어서 임진강을 건널 수 있는 최남단 도하지점이었으므로, 한강 유역에서 개성을 지나 금천-평산-황주를 거쳐 평양으로 가는 빠른 길이었다.
호로고루는 이 길목을 통제하는 지점에 쌓은 삼각형의 강안 평지성이다. 전체 둘레는 405m로 임진강 일대의 다른 보루들과 비슷한 규모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호로고루는 고구려 야야홀(耶耶忽), 또는 야아홀(夜牙忽)이라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호로고루라는 명칭은 일대의 임진강을 호로하(瓠濾河)라 하였으므로 후대에 붙인 명칭이다. 신라 효소왕 3년(694년) 고구려 성곽을 수축하여 장단현(長湍縣)의 치소를 설치하였다(심광주, 2019).
발굴조사 결과 호로고루의 성벽은 고구려의 토심석축공법으로 구축되었으며, 중간벽에서 대성산성과 동일한 기둥홈이 확인되었다. 성내에서는 고구려 초석 건물지와 집수시설, 치미와 연화문와당, 호자, 북으로 사용하던 상고(相鼓)명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입지나 출토유물로 볼 때 호로고루는 고구려 남쪽 전연방어체계를 관장하던 중심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호로고루에서 동북쪽으로 12km 지점에 당포성이 있다. 당포성 앞의 당개나루는 적성에서 마전-토산-신계로 가는 주요 길목이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당포성은 고구려 이사파홀(泥沙波忽)이라 하였으며, 효소왕 3년 고구려 성을 수축하여 임단현의 치소를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심광주, 2019). 발굴조사 결과 당포성도 석축부의 중간 벽에서 기둥홈이 확인되었으며, 기저부와 내부는 판축하여 쌓고 외벽은 석축으로 마감하는 토심석축공법이 적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7km 지점에는 무등리1·2보루가 있다. 무등리1·2보루는 연천에서 평산과 서흥, 황주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는 위치에 있다. 발굴조사 결과 무등리 1·2보루 역시 토심석축공법으로 구축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무등리2보루에서는 거의 완전한 형태의 고구려 갑주와 단면 삼각형의 쇠뇌 화살촉, 다량의 탄화곡물 등이 출토되었다.
고구려 성곽은 임진강 상류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최근 북한에서 현지조사를 통하여 강원도 철원군의 거성, 노기산성, 만경산성, 삭령산성을 조사하였는데, 붉은색의 고구려 기와 조각이 출토되어 고구려 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철원군의 북편으로 이어지는 강원도 이천군의 심동리산성과 성산고성도 고구려 성이라 하였다(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2009).
표5 | 임진강 유역의 주요 고구려 성곽 현황
명칭위치규모(m)해발(m)특징
덕진산성파주60082기둥홈, 토심석축공법, 고구려 토기
호로고루연천40522석심토축공법, 기둥홈, 고구려 토기, 기와・와당
당포성연천45027석심토축공법, 기둥홈, 고구려 토기, 기와
무등리1보루연천20585석심토축공법, 고구려 토기, 기와
무등리2보루연천35085석심토축공법, 고구려 토기, 기와
거성철원900200임진강 동편, 흙과 돌로 쌓음, 고구려 기와
만경산성철원450408임진강 동편, 고구려 기와
삭령산성철원570100임진강 동편, 선조문・격자문 기와
노기산성철원400140임진강 동편, 고구려 기와
심동리산성이천600172임진강 서편, 고구려 기와, 막새
성산고성이천350671임진강 동편, 고구려 기와
거성은 철원군 거성리에 있다. 서남쪽에 임진강이 흐르고 거성과 마주하여 구룡천 남쪽에는 노기산성이 있다. 성은 저평한 구릉지의 능선을 따라 쌓았으며 둘레는 900m이다. 돌과 흙을 섞어 쌓았으며, 성안에서 붉은색의 고구려 기와들이 출토되었고 북쪽에는 고구려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2009).
만경산성은 거성 북쪽으로 2km 지점의 만경산(해발 408m)에 있다. 성 밑으로는 철원~이천 간 도로가 지나고 서남 방향으로 임진강이 흐른다. 산성의 북쪽은 벼랑이며 서남쪽은 급경사를 이룬다. 성은 산봉우리와 능선을 따라 쌓았으며 둘레는 450m이다. 붉은색의 고구려 기와가 출토되었다(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2009).
그림8 | 철원 만경산성·거성·노기산성과 이천 심동리산성 위치도(미육군공병대, 1952, 〈한반도 1:5만 지도〉)
노기산성은 거성 남쪽 노기산(해발 140m)에 있으며 서쪽으로 임진강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임진강을 따라 올라오는 적과 이천 쪽으로 가는 길을 통제하는 데 유리한 지형이다. 성의 둘레는 400m 정도이며, 성안에 장대터와 건물터가 있다. 성안에서 노끈 문양의 붉은색 고구려 기와가 출토되고 있다(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2009).
삭령산성은 철원군 삭령리의 임진강과 역곡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다. 경기도 연천 방면에서 임진강 뱃길과 육로로 오는 적을 방어하기 좋은 위치이다. 둘레는 570m이며 성내의 건물지에서 선조문과 격자문 기와가 출토되고 있다(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2009).
심동리산성은 이천시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3km 지점에 있다. 이 산성은 황해북도로 통하는 길목에 있으며 임진강을 건너면 이천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성벽은 산릉선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쌓았으며 둘레는 약 600m이다. 성내의 건물지에서 붉은색의 고구려 기와 조각과 막새가 출토되었다(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2009).
성산고성은 강원도 이천읍 성산(해발 671m)에 있다. 이곳에서는 철원까지 조망된다. 둘레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740척이라 하였으므로 포백척으로 환산하면 약 350m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성내에서는 붉은색의 고구려 기와가 출토되었다(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2009).
6세기 중엽 이후 고구려는 임진강을 경계로 신라와 국경이 나뉘었다. 그런데 철원의 거성과 만경산성, 삭령산성, 노기산성 등은 모두 임진강의 동안에 있어 임진강 상류 쪽으로 가면서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이 내륙 쪽으로 옮겨졌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임진강 일대의 고구려 성곽은 둘레 300~600m 정도의 보루급 성곽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성의 규모가 작은 만큼 성내에 주둔하는 군사들의 수도 수백 명 단위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중국 전연방어체계에 속하는 요동 지역의 성곽에 비하여 대신라 전연방어체계에 속하는 임진강 유역의 성곽은 현저하게 규모가 작다. 이는 당과 신라의 군사적인 위협에 대한 고구려의 판단에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루급 성곽으로 남쪽 국경을 막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662년 김유신이 수만 석의 군량미를 평양의 당군에게 수송하러 가면서, 임진강을 건넌 이후에도 고구려군의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던 기록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호로고루를 포함한 임진강 유역 전연방어체계를 통제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지점에 있는 대규모 거점성은 평산의 태백산성이다. 호로고루에서 태백산성까지는 직선거리로 47km에 달하고 있다. 하루나 하루 반나절 정도의 이동거리에 해당한다.
고구려는 보루 규모의 성으로 대신라 전연방어체계를 구축했지만, 신라의 대고구려 방어체계는 고구려와 현저하게 달랐다. 임진강 이남 지역에 쌓은 신라 성은 파주 오두산성, 봉서리산성, 칠중성, 연천 대전리산성, 옥계리성 등이다. 모두 둘레 1km 내외의 대규모 성곽이다. 임진강 이북 지역의 고구려 성곽에 대응하는 신라 성곽은 규모도 크고 보다 많은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진강 이북 지역의 고구려 성곽은 가장 늦은 시기에 구축된 고구려 성에 속한다. 대부분 임진강 유역의 전연방어체계가 구축되는 6세기 중엽 이후에 초축되거나 수·개축된 성이다. 이 성들은 고구려 장안성이 축조되는 시점과 거의 유사하다. 이는 고구려의 가장 발달한 축성법이 적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향후 밝혀내야 할 것은 한강 유역 고구려 성곽의 축성법과의 차이이다. 아차산 일대에 고구려 성곽이 구축될 당시 임진강 유역에도 이미 방어시스템이 정비되어 한강 유역 고구려 성에 대한 배후 거점성 역할을 했는지 아니면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상실한 이후 임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방어시스템이 전면 개편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자료가 된다.
고구려는 임진강 이북 지역을 멸망 때까지 지켜낼 수 있었다. 임진강 이북 지역의 고구려 성곽 중 덕진산성, 호로고루, 당포성 등은 수축되어 신라의 군현성으로 재사용되었지만, 대체로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고구려 후기의 축성법 연구에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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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임진강에서 평양까지의 성곽 분포와 방어체계 자료번호 : gt.d_0006_0030_00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