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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3. 임진강 이남 지역의 성곽 분포와 방어체계

3. 임진강 이남 지역의 성곽 분포와 방어체계

1) 한강~임진강 유역
임진강 이남 지역의 고구려 방어체계는 매우 독특하다. 이 지역에는 아미성과 태봉산보루, 도락산보루, 천보산보루, 수락산보루, 아차산보루, 용마산보루 등 20여 개의 고구려 성곽이 선상으로 분포하고 있다.
그림9 | 한강과 임진강 유역 고구려 성곽 분포도
장단에서 임진강을 건너면 감악산이 동서로 뻗으면서 길을 막고 있다. 이곳에서 양주로 가는 방법은 감악산의 설마치고개를 넘거나 우회하여 간파천로를 따라가는 방법이 있다. 간파천은 감악산과 마차산 사이에 형성된 협곡을 따라 흐르는 하천으로 이곳에는 375번 지방도가 있다. 이 협곡이 시작되는 지점에 고구려 성인 아미성이 있다.
이곳에서 375번 국도를 따라 9km 정도 가면 태봉보루가 있다. 이 보루에서 남동쪽으로 도락산보루군이 연결된다. 양주 지역의 고구려 성곽은 남북 간 교통로를 중심으로 밀집되어 있다. 천보산맥이 반원을 그리며 동서 교통을 차단하고 있으므로 불곡산과 감악산, 도락산 등의 높은 산맥과 지류 사이에 형성된 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는 곳에 성곽이 구축되어 있다.
천보산에서 남쪽으로 7km 지점에 사패산보루와 수락산보루가 있다. 이곳에서 7.5km 지점에 봉화산보루가 있고 망우산보루로 연결된다. 아차산과 용마산, 배봉산 일대에는 다른 지역에 비하여 고구려 성곽의 밀집도가 높다.
이 지역의 고구려 성곽은 남북을 기본축으로 한 직선적인 배치양상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둘레 200~300m 정도의 소규모 보루성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고구려 성곽의 분포양상은 1km 내외의 성곽이 방사상으로 분포하며 일정한 공간을 독립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신라나 백제 성곽과 다르다. 또, 대규모 거점성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는 예성강 이북 지역 고구려 성곽의 분포양상과도 다르다.
이 지역의 고구려 성곽들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라는 제한된 기간에 구축되어 사용되었다. 국경을 중심으로 하는 전연방어체계나, 종심방어체계, 도성방어체계와도 다르다. 성곽의 배치양상과 규모로 볼 때 소규모 인력으로 거점을 확보하면서 유사시 기마병에 의한 신속한 공격이 가능한 독특한 방어체계로 판단된다.
이러한 보루들은 군사작전을 위한 보급로 확보가 주목적일 수도 있다. 공격과 방어를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하면서도 장기간의 전투 시 보급이 끊어지지 않도록 주요 길목을 통제하는 기능도 함께 수행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축조시점과 폐기시점이 명확하므로 6세기대 고구려 성곽 축성기법의 특징을 알 수 있다. 고구려 후기의 축성법과 비교하는 표준유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축성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유적들이다.
465년부터 500년 전후까지 25년 정도 몽촌토성을 거점으로 주둔한 고구려군이 한강 이북으로 철수하여 아차산 일대의 보루를 축조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최종택, 2008). 이 지역 고구려 성곽의 축조와 경영 시기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남진과 이후 백제의 한강 유역 진출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이 서로 모순되지 않게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고구려 보루가 밀집된 아차산 일원이 고구려 남평양이라는 견해도 있다(최장열, 2001; 최종택, 2008). 아차산보루군과 배봉산, 용마산 보루로 둘러싸인 장안평 일대에 남평양이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장동과 장안평 일대의 평지에서는 고구려 유적이나 유물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소규모 보루들을 중심으로 거점방어체계를 구축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이 의문을 해결하려면 고고학적으로 새로운 근거가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2) 한강 이남 지역
고구려 장수왕은 475년 3만 군대를 이끌고 백제 한성을 공취하였다. 고구려군은 계속 남하하여 아산만에서 영일만에 이르는 지역까지 진출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백제가 점점 강성해져 503년에 고구려의 수곡성(황해북도 신계)까지 진출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후 안장왕이 529년 오곡전투에서 승리하고 여세를 몰아 금강 상류 지역까지 진출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장수왕 대 고구려 진출 이후 백제가 한강 유역을 회복하고, 안장왕 대에 고구려가 다시 한강 유역 일대로 진출했다는 견해도 있다(김영관, 2000; 장창은, 2014).
금강 상류 지역에서 확인되는 고구려 성곽은 안성 도기동산성, 세종 남성골산성, 대전 월평동산성 등이다. 진천 대모산성, 세종 나성 등에서도 고구려 토기편이 확인되었지만, 고구려 성곽 구조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안성 도기동산성은 안성천 남안의 해발 73m 야산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다. 백제 토성과 목책이 있던 곳을 고구려가 빼앗아 목책을 설치하였다. 목책은 구릉과 북동쪽 평지 구간을 아우르는 것으로 확인되어 전체 규모는 1km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목책은 남성골산성처럼 2중 목책렬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외부 목책렬의 하단에는 석축이 부가되어 있다(기남문화재연구원, 2018).
세종 남성골산성은 해발 106m의 야산 정상부와 평지를 아우르며 구축되어 있다. 전체 규모는 700m 정도로 추정된다. 목책은 2열로 구축되어 있으며, 목책렬의 간격은 3m 정도이다. 세종 남성골산성에서 웅진성(공산성)까지는 직선거리로 24km에 불과한 근거리에 있다. 따라서 이러한 고구려의 남진이 백제의 사비 천도와 관련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손영종, 2000; 심광주, 2006)
대전 월평동산성은 한반도의 가장 남쪽에서 확인된 고구려 성곽이다. 일부만 조사되어 전체 양상은 알 수 없다. 조사단에서는 석축성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2열의 목주열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목책일 가능성이 크다. 월평동산성도 성벽이 확인된 지점과 일대의 지형을 고려하면 1km 이상의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강 이남 지역의 고구려 성곽 밀집도는 한강 이북 지역보다 현저하게 낮다. 고구려 군대가 주둔했던 몽촌토성에서 안성 도기동 산성까지는 대략 80km 정도이며, 도기동산성에서 남성골산성까지도 약 80km 거리이다. 대전 월평동산성은 남성골산성에서 약 30km 정도 이격되어 있다. 임진강에서 한강 유역은 보루와 보루 간의 간격이 300~500m, 보루군의 간격이 대략 7km인 데 비하여 한강 이남 지역은 10분의 1 정도로 밀집도가 낮아지고 있다. 물론 그 사이사이에서 고구려 성곽이 추가로 발견될 가능성은 열려 있지만 성곽의 상대적인 밀집도가 매우 낮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 지역에는 거점과 거점을 연결하는 정도로만 성곽이 구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다른 특징은 모두 목책이라는 점이다. 비교적 짧은 기일 안에 구축할 수 있는 목책 위주의 성을 쌓았다는 것은 점령지역이 고구려의 영토에 안정적으로 편입되었다고 보기 어렵다(신광철, 2011).
금강 유역에서 확인되는 남성골산성이나 월평동산성은 5세기대에 구축되었으며, 한강 유역에서 남하하여 설치한 군사거점이 아니라 5세기 초중반 이미 안정된 영역화를 이룬 충주 지역에서 진출한 결과로 보기도 한다(이정범, 2015). 그러나 충주 지역에서 고구려 성곽이 확인되지 않고, 한강 유역과의 중간지점인 안성에 도기동산성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충주 지역에 별도의 고구려 세력이 있었음을 상정하기에는 아직 고고학적 조사자료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한강 이남 지역의 고구려 성곽은 존속기간이 길지 않았다. 입지적으로도 백제 웅진성과의 거리가 24km에 불과하다. 월평동산성은 고구려 유물이 빈약하고 성내에서 6세기 초중엽의 백제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한시적으로 점유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가 기세를 몰아 금강 상류의 백제 영역 깊숙한 곳까지 남진하였지만 몇 년 이내에 백제에 함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남성골산성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6세기 중엽을 중심으로 하는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성곽 출토유물에 선행하고 있다. 연천 호로고루의 발굴에서도 지상 성벽에 선행하는 목책 유구가 조사되었다. 이 유구에서 출토된 유물은 남성골산성 출토유물과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임진강 유역의 고성산보루와 은대리성, 전곡리토성, 몽촌토성, 안성 도기동산성은 같은 시기에 구축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금강 상류의 백제 지역까지 깊숙하게 진출한 사건은 문화적으로 큰 파급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축성법은 목책도 있지만 토심석축공법을 특징으로 하는 석성이 주류를 이룬다. 니질 태토에 가로띠손잡이가 달린 고구려 토기는 백제 토기와 기형이 전혀 다르다. 그러나 사비기 백제에는 부소산성이나 나성처럼 고구려 양식의 토심석축공법으로 쌓은 석축 성곽이 등장하고, 가로띠손잡이가 달린 고구려계 토기가 출현한다. 이는 고구려의 남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관방체계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려면 북한 지역의 고구려 성곽에 대한 조사성과가 진전되어야 한다. 개별 성곽유적의 초축시점과 수·개축 여부가 확인되어야 단계별 관방체계의 변화양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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