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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1. 고구려의 대신라정책과 남방전선

1. 고구려의 대신라정책과 남방전선

고구려는 7세기 중반 이후 대당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객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장기항전을 지속했다. 전쟁 이외의 기간도 상시적인 긴장상태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실질적인 전쟁 기간에 포함시킬 수 있기 때문에 645년 고당전쟁이 시작한 이후부터 668년 멸망할 때까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군사력은 물론 전체 국력에서 엄청난 열세에도 불구하고 장기항전을 지속할 수 있었던 동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군사작전에서 전략적·전술적인 원인도 있었겠지만, 대내적으로 전쟁과 관련하여 체제 정비가 진행되었던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고구려는 강력한 통일제국인 수·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국가적 총력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동원 가능한 모든 성인 남녀를 군역이나 역역에 동원할 필요성이 증대되었고, 이를 위해 호적제도를 정비하여 호구에 대한 파악을 더욱 촘촘히 진행함으로써 많은 병력자원과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대민지배방식도 전에 없이 강화되었다. 고구려는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사회체제가 군사체제로 변하였다. 상시적인 전쟁 상태에 있었던 고구려 사회가 군사편제화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초·중기에 평상시에는 평지성에 거주하다가 전쟁이 발생하였을 때에만 산성에서 생활하던 방식은 고구려 말기 상시전시체제에서 변모할 수밖에 없었다. 산성을 확대하여 수축하거나 평지성에 성곽을 축조함으로써 성에 대한 방어체제를 정비하고, 일반민은 군사적 체제로 편제되어 전쟁에 대비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군사화는 바로 중앙집권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전쟁은 일원화된 지휘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고구려는 수·당전쟁에서 강력한 중국 통일왕조와 오랫동안 대응해 나갈 수 있었다. 고구려 사회의 군사편제화는 중국 통일왕조의 침략에 대해 오랫동안 강력하게 대응해 나갈 수 있는 사회적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이동훈, 2019).
한편 645년 고구려 원정 실패 이후 소모전으로 전략을 변경한 당 태종은 647, 648년 연이어 고구려를 침략하고, 649년에는 또 다시 대규모 원정을 기획하여 양국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 태종의 사망으로 고구려와 당의 관계는 전기를 맞게 되었다. 당 고종은 즉위 초기에 내부 모반과 황후 교체 문제로 정신이 없었고, 또한 서북방에서 아사나하노(阿史那賀魯)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요동과 한반도 전선에 군대를 투입할 여력이 없었다. 이후 당의 내부 문제가 수습되고 이민족 반란이 해결되면서 661~662년 요동, 한반도 지역에 대한 전면전이 재기되기까지 고구려와 당 사이의 전쟁은 대체로 소강상태에 머물렀다. 655, 658, 659년에 변경에서 국지전이 발생한 것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안정적이었다(김진한, 2011). 하지만 당은 국내외 문제가 수습되자 내부 역량을 결집하여 고구려 정벌을 위한 전쟁을 개시했다. 660년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에 대한 공세를 본격화한 것이다.
고구려는 보장왕 11년(652) 정월 당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최대한 전쟁을 피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소극적으로 방어전만 진행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보장왕 13년(654) 10월에는 말갈과 함께 거란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655년에는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645년 당과의 대규모 전투 이후 고구려는 당의 공격에 대해서는 대체로 방어적으로 접근한 반면 신라에 대해서는 공세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신라에 공세가 집중된 이유는 무엇일까?
쿠데타 직후 내부적으로는 반대파를 일소하고 외부적으로는 당에 사신을 보내어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했던 연개소문에게 고당전쟁은 위기이자 기회였다.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지휘권을 확보한 연개소문은 전쟁이 승리로 귀결되면서 자신의 명망을 드높였고, 이로 인해 정권 장악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국왕의 권한을 대신하여 행사한 연개소문은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했다. 권력강화를 위하여 기존의 집권세력에 타격을 가했으며, 기존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을 따르는 새로운 신진세력도 등용했다. 그 결과 연개소문에게 권력을 탈취당한 왕은 유명무실해지고, 다른 지배세력은 몰락하게 되었다. 심지어 연개소문은 가문 내에서도 자신과 대적하는 대상은 모두 제거하였다. 이리하여 고구려 말기의 정치는 연개소문 가문의 전횡이라는 형태로 전개되어 갔다. 고구려 국내에서 독점적인 지배력을 누리게 된 연개소문 가문은 고당전쟁에서 전쟁을 지휘하는 거의 유일한 세력이 되었다(이동훈, 2019).
이렇게 독재권력을 행사하게 된 연개소문은 대외정책에 있어서 강경책을 고수했다. 당에 대해서는 상황에 따라 강온정책을 병행했지만, 그 밖의 세력에 대해서는 강경한 태도를 고수했다. 고구려 지배층은 시종일관 신라에 대해 강경책을 펼쳤는데(최호원, 2013), 이것은 고수전쟁 기간 동안 신라가 고구려의 남방 영역을 빼앗았기 때문이었다(노중국, 1981). 고구려는 6세기 중엽 신라에 의해 한강 유역을 빼앗기면서 온달에 의해 ‘고토회복론’이 제기되었는데, 이는 7세기 중반 연개소문 집권기까지 이어져 내려와 당시 고구려인들 사이에서 일정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고구려의 현실은 서북방과 남방에서의 위협이 상호 연동하며 존재하던 시기였다. 필요하다면 군사적 대처를 통해서라도 위기를 극복해야 했고, 이런 상황에서 신라를 응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현실적인 해결방안이었다. 당시 고구려의 대신라정책은 ‘고토회복’을 위한 필연적인 조치였으며. 이를 통해 신라를 무력화함으로써 대당전선에 전력을 집중해야 하는 전략적 필요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윤성환, 2011a).
한편 654년 고구려가 거란을 공격한 원인에 대해서는 당의 부용세력이었던 거란과 해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견(이재성, 2011), 궁극적으로는 당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는 견해(여호규, 2018)가 존재한다. 그런데 신라에 국한된 전략인 ‘고토회복론’을 대외적으로 확장시키면 과거 ‘독자 세력권의 회복’으로 확대된다. 654년 말갈과 연합하여 거란을 공격하고, 655년 백제,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전략에 근거한 것이며, 이것은 650년대 중반 고구려의 대외전략의 하나로 채택되고 있었다(윤성환, 2010).
642년 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정권을 공고히 하는 작업에 여념이 없던 연개소문은 그 와중에도 군대를 이끌고 남방전선으로 가서 신라를 상대로 군사작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에 신라가 당의 개입을 요청하자, 고구려의 상황도 염탐할 겸 644년 당의 상리현장이 사신으로 와서 연개소문을 만나 신라를 침략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연개소문은 이에 대해 “우리는 신라와 원한이 쌓여 틈이 벌어진 지 오래되었다. 이전에 수나라 사람이 쳐들어왔을 때 신라가 틈을 타서 우리 땅 500리를 빼앗고, 그 성읍을 모두 차지하였다. 스스로 우리에게 빼앗긴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전쟁은 아마 그치지 않을 것이다”(『삼국사기』 권5)라고 대답하였다. 신라 공격의 당위성을 설명하면서 고수전쟁 당시 신라가 고구려 남방 영역을 탈취했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다.
이 기록에 관해서는 6세기 중반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일을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견해도 있지만(노태돈, 1999), 다수는 역사적 사실로 긍정하는 편이다. 이때 고구려가 상실한 남쪽 영역에 대해서는 춘천을 중심으로 한 북한강 유역이 그 중심지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장창은, 2014). 고구려가 608년에 일시적으로 춘천이나 동해안 지역으로 남하했다가, 610년대 신라의 반격으로 인해 다시 북쪽으로 후퇴하였다는 것이다(윤성호, 2017). 해당 지역이 500리나 되는지 의심스럽지만, 고수전쟁 때 신라가 어느 정도 남쪽 영역을 잠식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고구려는 평원왕 대 이후 정국이 안정되면서 고토 회복에 나섰고 어느 정도 성과를 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고수전쟁 때 신라의 공세로 그동안의 노력이 허사가 되었다. 고수전쟁의 상처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고구려는 638년 마침내 신라에 대한 일제 공세에 나섰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고토회복론’과 신라의 북진정책이 전면적으로 충돌했다. 638년을 전후하여 고구려와 신라가 크게 충돌한 지점은 크게 네 군데인데, 서쪽부터 동쪽으로 칠중성, 낭비성, 우명산성, 비열홀 방향에서 각각 공방전이 벌어졌다. 먼저 고구려의 대공세 이전인 630년대 상황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명산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크게 경기도 동북부나 춘천을 중심으로 한 북한강 일대(서영일, 2001), 춘천 일대(윤성호, 2019)와 안변 일대(전덕재, 2014)로 보는 의견이 있다. 현재는 춘천으로 보는 견해가 좀 더 유력하다. 고구려는 608년 우명산성을 함락했다. 신라는 선덕여왕 6년(637)에 춘천을 중심으로 우수주(牛首州)를 설치했다. 이에 대해서는 629년에는 포천에 위치한 반월산성을 차지하고, 이를 근거로 다시 춘천을 공격하여 우수주를 설치한 것으로 이해한다(박종서, 2022).
낭비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청주 지역(이원근, 1976), 파주 칠중성(심광주, 2003), 포천 반월산성(서영일, 1995; 장창은, 2014)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 중 반월산성에서 삼국시대의 낭비성 지명인 ‘마홀(馬忽)’명 기와가 출토됨으로써, 현재는 반월산성을 낭비성에 비정하고 있다(서영일, 1995; 박종서, 2010). 반월산성이 위치한 포천 지역은 고대부터 교통의 요충지이며 북한강을 따라 춘천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신라가 임진강 유역으로 방어선을 북상하여 한강 유역의 북한산주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했다(윤성호, 2019). 고구려는 608년 우명산성(춘천)을 차지하고, 그 후 어느 시기에 낭비성(포천)을 차지한 것 같은데, 629년 신라에 다시 빼앗겼던 것이다(박종서, 2022).
칠중성은 경기도 파주군 적석면에 소재했는데, 임진강을 두고 신라와 고구려가 대치하는 상황에서 강의 남쪽을 방어한 거점성이다(정창은, 2021). 임진강에서 가장 도하하기 쉬운 지점인 가여울(戌灘)의 남안(南岸)에 위치하고 있어 고구려가 북한산성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충지였다(선봉조, 2017). 하지만 629년에서 638년 사이에 신라에 빼앗겼는데, 629년 낭비성을 빼앗긴 후 이를 기점으로 동쪽으로는 우명산성을, 서쪽으로는 칠중성을 빼앗긴 것으로 보인다(박종서, 2022).
이상 낭비성·우명산성·칠중성은 모두 630년을 전후하여 신라에게 빼앗긴 지역이었다. 이것은 고수전쟁 이후에도 고구려가 내부 정비에 여념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신라가 고구려의 남방 영역을 조금씩 잠식해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고수전쟁의 피해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국력을 회복한 고구려가 신라에 대해 반격에 나서 실지 회복을 도모하는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영류왕 21년(638) 고구려는 파주 임진강 남쪽에 위치한 칠중성을 공격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 후 신라가 642년 김유신이 무력시위를 할 때와 645년 당을 도와 고구려를 침입했을 때 임진강을 도하했을 가능성이 있지만(윤성호, 2022), 대체로 고구려 남방전선 서쪽에서 신라와의 접경은 임진강 유역에서 고착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660년 10월까지 계속 이어졌다(윤성호, 2022; 정동민, 2023).
다만 서부쪽 상황과 달리 동해안 지역에서 고구려의 공격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 지역에서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 변동은 671년 신라 문무왕이 당 설인귀에게 보낸 서한인 「답설인귀서」에서 답을 얻을 수 있다. 답서에는 “비열성(卑列城)은 본래 신라 땅이었는데 고구려가 쳐서 얻은 지 30여 년 만에 신라가 다시 이 성을 되찾아 백성을 옮기고 관리를 두어 수비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이] 이 성을 가져다 고구려에 주었습니다”(『삼국사기』 권7)라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비열성은 오늘날 원산만과 인접한 안변 지역으로 비정되는데, 신라가 비열홀 지역을 되찾은 것은 666년 12월 안정토가 12성을 들어 신라에 항복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박종서, 2022). 일각에서는 668년 고구려가 멸망할 때 차지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장창은, 2014). 그러므로 고구려가 비열성을 되찾은 것은 30여 년 전으로 638년 칠중성을 공격하던 무렵이다.
결국 638년 고구려의 공격은 동해안 방면에서 비열홀을 공격하여 차지한 것을 제외하면, 임진강 유역에서 신라에게 계속 패한 것으로 정리된다. 630년대 말 고구려와 신라는 서쪽 방면에서는 임진강 이남과 한탄강 유역을 중심으로, 동쪽 방면에서는 비열홀(안변)과 달홀(고성)의 중간지점에서 대치했던 것이다. 645년 당과의 전쟁 직전에도 연개소문이 대신라전선에 나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는 고토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렇지만 645년 고당전쟁과 그 후 이어진 일련의 전쟁으로 인해 고구려는 한동안 남방전선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당 고종 재위 초기인 650년대에 들어 당과의 관계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655년 신라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이 공격은 645년 고당전쟁 당시 신라의 공격에 대한 보복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또한 고구려는 당과의 전쟁으로 요동 지역이 황폐해지고 적지 않은 호구를 상실한 상태였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신라의 영역을 더 차지할 필요가 있었다. 아울러 고구려 원정에 실패한 당의 기세가 주춤한 틈을 타서 신라를 제압, 한반도 안의 세력권을 공고히 하려는 노력이기도 하였다(최호원, 2020).
이 공격으로 고구려는 신라의 북쪽 변경 33성을 차지했다. 이 전투에 대해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실인지 의심하기도 하지만(방용철, 2016), 대체로 사실로 인정하는 경향이 강하다(선봉조, 2017; 윤성호, 2017; 최호원, 2020). 33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충주, 보은 일대, 당항성 인근, 한강 유역, 소백산 이남과 한강 하류 지역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영서 내륙과 동해안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좀 더 강하다(윤성환, 2010; 고창민, 2021). 661년에 있었던 고구려의 술천성과 북한산성 공격이 죽령로를 통한 작전임을 고려하면, 영서 내륙과 동해안 쪽으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윤성환, 2010; 장창은, 2014). 지금의 경기도 여주로 생각되는 술천성에 이를 때까지 고구려군은 신라군의 특별한 저항을 받지 않았으므로, 655년의 공격을 통해 대략 화천과 춘천 등 북한강 유역을 거쳐 남으로 원주 일대까지 차지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최호원, 2020).
한편 신라는 선덕왕 8년(639) 하슬라주(何瑟羅州)를 북소경(北小京)으로 삼았는데, 태종무열왕 5년(658)에 하슬라 땅이 말갈과 접한 북쪽 변경이라 사람들이 편안치 못하다고 여겨 소경을 폐지하고 주를 설치하고 도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실직을 북진(北鎭)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이 기록을 통해 658년 무렵에 하슬라가 신라의 북경(北境)이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러므로 655년 정월 말갈, 백제와 함께 군사를 연합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여 33성을 탈취했을 때 고구려는 신라 북방을 공략하여 하슬라 근처까지 접근했던 것이다(박종서, 2022).
이와 같이 655년 고구려의 대신라 공세는 동해안 방면으로는 하슬라 근처까지, 영서 내륙 방면으로는 620년대 말부터 630년대까지 신라에 의해 상실되었던 춘천 지역에 대한 패권을 재탈환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것으로 연개소문을 비롯한 고구려 지배층이 남방전선인 신라를 대상으로 추진했던 ‘고토회복론’이 적어도 동부 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요컨대, 7세기 고구려와 신라의 남방전선은 서쪽에서는 한강과 임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공방을 이어가다가 630년 무렵부터 임진강 유역으로 고착화되었던 반면, 동쪽에서는 영서와 동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대립이 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최종적으로 신라가 북진하여 안변 일대를 차지한 것은 고구려 멸망 무렵 안정토가 12성을 들어 투항한 666년이다. 대략 강원도와 함경남도에 위치한 비열홀, 천정군(덕원), 각련군(회양) 일대이다(노태돈,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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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구려의 대신라정책과 남방전선 자료번호 : gt.d_0007_0010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