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당군사동맹과 당의 ‘고구려 선공’ 전략 폐기
2. 나당군사동맹과 당의 ‘고구려 선공’ 전략 폐기
6세기 중엽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고구려와 백제의 지속적인 침략에 시달렸던 신라는 군사상의 열세를 외교로 극복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수와 당에 사절을 파견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분쟁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했다.
하지만 당은 신라가 원한 만큼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국초부터 관중본위정책을 시행한 당의 입장에서는 동북 지역보다는 수도인 장안이 위치해 있는 관중과 인접한 서북방의 안정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陳寅恪, 2011). 당 전기에 설치된 상설 군부인 절충부만 하더라도 전국적으로 630여 개가 설치되었는데, 그 중 80%가 관내도(44.9%), 하동도(24.9%), 하남도(11.2%)에 집중되어 있을 정도였다(谷霽光, 1962). 당의 수도가 위치한 장안과 당의 발흥지인 태원, 낙양 주변 지역에 병력이 집중되었던 것이다. 당의 동북 변경지역은 당 전체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당은 한반도 삼국의 분쟁에 대해 조서를 내려 화해를 권유하는 방식으로 삼국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리하여 신라의 거듭된 삼국 분쟁에 대한 적극적 개입 요청을 거절한 채 소극적으로 중재에 나섰을 뿐이었다.
아울러 당은 건국한 이래 백제와 줄곧 평온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 편만 들어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백제는 당에 대해 조공의 의무를 다했는데, 외부로부터 오는 압력을 감소시키는 한편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당이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권유하면 신라를 침략한 행위에 대해 사죄하는 한편 개선하겠다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여 당과 직접적으로 맞서는 것을 피했다. 그러므로 당은 외견상 조공의 의무를 다하는 백제를 저버릴 명분이 없었다.
그런데 645년 고구려 침략에 즈음하여 당의 정책에 변화가 생겼다. 당은 수륙 양면에서 고구려를 공격하는 작전을 수립했다. 당 태종이 이끄는 주력군이 요동 전선으로 향하고, 수군이 평양을 공격하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백제와 신라로 하여금 당과 협력하여 고구려의 남쪽에 제2의 전선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약조와 달리 백제는 파병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신라의 서쪽을 공격하여 7개 성을 차지했다. 신라는 고당전쟁 초기에 군사 5만을 동원하여 수구성을 함락시키기도 했지만, 이로 인해 더 이상의 전과를 거둘 수 없었다. 다만 이때 보여준 백제와 신라의 상반된 태도는 이후 당이 대고구려전쟁에서 신라만을 우호세력으로 삼겠다는 내부 결정을 하도록 하였다(주보돈, 2017).
645년 고당전쟁의 결과는 백제의 대당외교에도 영향을 주었다. 당의 거듭된 실패 때문인지는 몰라도 백제는 당과의 협력관계에서 이탈하여 친고구려적인 성향을 보였다(김수태, 2004). 백제에 의한 신라 공격이 계속되면서 양국의 대립은 다시 격화되었다. 645년 제1차 고당전쟁 이후 640년대 후반기에도 한반도·요동 지역의 북쪽에서는 당의 연이은 침략으로 고구려와 당이 계속 맞붙는 전황이 펼쳐졌다. 남쪽에서도 백제의 도발로 신라와 백제 양국이 치열한 각축을 벌이는 형세가 전개되었다. 당 조정은 645년 고당전쟁 이후 지속적인 소규모 전투를 통해 고구려를 피폐하게 한 다음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 전면전을 벌일 계획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당 태종은 645년 원정의 실패를 교훈 삼아 고구려 남부에 제2의 전선을 구축하여 고구려의 방어력을 분산시키는 한편 보급품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신라의 존재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648년 신라 김춘추가 당에 사절로 방문하자 당 태종은 극진히 환대하였다. 이것은 당 태종이 직접 고구려를 원정할 때 병력을 보내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 행위였다(주보돈, 2017). 김춘추는 다른 사신과 달리 먼저 태학에서 석존과 강론 참관을 요청하여 중국의 유학을 받아들일 것을 천명하여 당 태종의 환심을 샀다(김덕원, 2022a). 이에 태종은 본인이 쓴 ‘온탕비’와 ‘진사비’를 하사하고, 새로 편찬된 『진서(晉書)』를 선물하여 본인의 통치이념을 알렸다. 김춘추는 649년 하정지례(賀正之禮) 이후 두 차례의 면담을 통해 태종에게 한반도 정세에 대해 논의했다(김덕원, 2022a). 당이 이렇게 신라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한 것은 신라의 전략적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에 수록된 「답설인귀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선왕(무열왕)께서 정관 22년(648)에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를 직접 뵙고서 은혜로운 칙명을 받았는데,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서 두려워하여 매번 침략을 당하여 편안할 때가 없음을 가엽게 여기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바가 아니고 보배와 사람들은 나도 가지고 있다.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 백제 토지(平壤已南 百濟土地)’는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겠다” 하시고는 계책을 내려주시고 군사행동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_ 『삼국사기』권7
648년 김춘추가 당 태종을 만났을 때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후 ‘평양 이남 백제 토지’는 신라에 귀속시킨다는 묵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평양 이남, 백제 토지’의 경우, 어디에 방점을 두는지에 따라 ‘평양 이남의 고구려 고지와 백제 고지’(이호영, 1997; 노태돈, 2009) 혹은 ‘평양 이남에 해당하는 백제 고지’(김영하, 2010; 윤경진, 2016)로 해석이 가능하다. 관점의 차이에 따라 신라의 통일에 의미를 부여함에 있어 ‘일통삼한론’ 혹은 ‘백제병합론’으로 평가가 달라지기 때문에 학계의 논쟁이 되어왔다.
한편 이 사료의 사실성에 대해서는 부정론과 긍정론이 교차한다. 부정론은 과거 김춘추가 당 태종과 만나서 백제 영토를 신라에 귀속시키겠다는 신라 문무왕의 글이 다른 사서에는 없는 귀중한 자료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본문의 전체 내용에 사실인 점도 많지만 사실을 왜곡하고 신라의 입장을 강조한 것도 섞여 있어서 사실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의견이다(黃約瑟, 1995). 하지만 문서의 내용이 사실성과 구체성을 띤다는 점에서 해당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주보돈, 2017), 660년대 당과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 멸망에 연합군사작전을 전개한 사실을 보면 부정할 수만은 없다고 보인다(노태돈, 2009).
「답설인귀서」의 관련 내용은 당 태종이 김춘추에게 문서 형태가 아닌 구두로 표명한 것을 김춘추가 사후 보고를 하고, 신라가 이를 공식 기록으로 남긴 것으로 이해된다(주보돈, 2017). 그런데 최근 「답설인귀서」에 김춘추가 당 태종을 ‘직접 뵙고 칙명을 받았다’는 구절에 주목하여 구두약속이 아닌 공식적인 외교문서 형식으로 받은 것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에 따르면 648년 나당동맹에서 적어도 군사동원의 방법과 시기, 그리고 전후 처리에 대한 문제도 논의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김덕원, 2022a).
하지만 649년 7월 당 태종이 사망하고, 죽기 전에 고구려 원정 준비를 취소하라는 유언을 남기면서 당의 동방정책은 일대 변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태종의 죽음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에 영향을 주었고, 나당동맹 역시 변화가 불가피했다. 하지만 내부 문제로 인해 대외적으로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당과 달리 당의 협력이 절실했던 신라는 지속적으로 나당동맹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649년 귀국한 김춘추는 당복(唐服)으로 의관을 정비하여 당과의 외교적 관계를 대내외에 천명하였다. 이 때문에 왜를 방문했던 신라 사신과 왜가 외교적으로 마찰이 생길 정도였다. 651년에는 대신들에게 아홀(牙笏)을 들게 하고, 같은 해 신라의 독자적인 연호를 포기하고 당 고종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사용하였다. 652년 정월에는 하정지례를 처음 실시하는 관례를 만들고, 뒤이어 품주를 집사부로 명칭을 바꾸고, 그 장관을 중시(中侍)로 명명하였다. 당제를 모방한 이러한 일련의 제도 정비는 당의 환심을 사기 위한 외교적 목적도 담겨 있었다(주보돈, 2017). 신라는 자국의 예복과 연호를 포기하는 적극적인 귀속의식을 표방한 결과 당을 유인하는 데 성공하였다(이도학, 2014). 신라의 정치개혁은 당과의 동맹과 상호 인과관계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당동맹은 기본적으로 정치동맹과 군사동맹의 성격뿐만 아니라 문화동맹이라는 성격도 겸하고 있었다(김덕원, 2022a). 654년 당은 신라왕 김춘추를 개부의동삼사 신라왕에 책봉하였는데, 이는 고구려왕과 백제왕에게 책봉한 관위보다 높아 당이 신라를 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655년 고구려가 신라 변경을 침입하여 33성을 빼앗아 가자 신라는 당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당은 정명진과 소정방을 파견하여 귀단수에서 고구려를 격파하였다. 당의 귀단수 공격과 신라의 요청과의 상관성을 부인하는 견해도 있지만(정원주, 2014), 이것은 649년 나당동맹이 성립한 이후에 양국 사이에 처음으로 이루어진 군사적인 협력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 태종의 죽음 이후에 신라의 구원 요청에 당이 처음으로 보인 반응이었다(김덕원, 2022b). 그 전까지 신라가 청병을 하였을 때 외교적으로 중재했던 것과는 달라진 모습이었다. 한반도 문제에서 이익이 일치한 신라와 당의 관계는 외교적인 협력 차원에서 나아가 군사적 동맹관계로 점차 발전하였던 것이다.
한편 신라가 나당동맹에서 가장 주안점을 둔 것은 군사동맹이고, 그 중에서도 백제에 대한 군사작전에 확답을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건국 초부터 당의 대요동·한반도 군사작전의 주된 목표는 고구려 정벌이었다. 대외정책의 순위에서 백제는 후순위에 머물렀다. 그렇지만, 660년대 먼저 백제를 멸망시키고 다음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어느 순간 ‘백제 선공’으로 전략이 바뀌었다. 당이 군사전략을 바꾼 시기와 원인 등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바 없지만, ‘고구려 선공’에서 ‘백제 선공’으로 정책이 변환한 시기에 대해서는 648년설과 659년설이 있다.
648년설은 김춘추와 당 태종의 회담에서 백제를 선제공격하는 방향이 정해졌다는 견해이다(이호영, 1997). 「답설인귀서」에 등장하는 ‘평양 이남 백제 토지’를 신라령으로 한다고 약속했다면 그것은 곧 당군이 대고구려전을 수행하기 위해 백제 공격을 감행하는 데 동의했다는 것이다(노태돈, 2009). 659년설은 신라의 지속적인 외교적 교섭과 거듭된 청병 요구에 마침내 당이 화답함으로서 ‘고구려 선공’ 정책에서 ‘백제 선공’ 정책으로 전략을 변경했다는 것이다(김덕원, 2022b). 한편, 당의 대외환경 변화에서 그 이유를 찾기도 하는데, 648년에 백제 공략 방안과 신라의 고구려 이남 지역에서의 군사작전이 논의되기는 했지만, 658년 서돌궐 멸망을 계기로 백제선공책이 확정되었다는 것이다(여호규, 2020). 659년에 ‘백제 선공’으로의 전략 변경이 당 내부의 정치적 상황 변화로 사전에 결정된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되었다(주보돈, 2017).
이 연구에 의하면 659년은 당 고종이 즉위한 지 10년이 되어가던 시기이다. 그런데 이 당시 당 조정의 권력구도는 태종 시기와 많은 차이가 있었다. 태종의 고구려 원정 때 참여했던 공신집단은 655년 황후를 측천무후로 교체하는 사안에 대해 각기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서 분열되었다. 황후 교체를 두고 장손무기와 저수량은 반대, 허경종은 찬성, 이적은 표면적으로는 집안일이니 스스로 결정하라는 중립을 표시했지만, 사실상 황제의 뜻을 지지했다. 이를 계기로 측천무후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반대파들이 숙청되고 허경종 일파가 득세했다. 장손무기를 대표로 하는 관롱집단(關隴集團)이 쇠퇴하고, 산동사족(山東士族)을 대표로 하는 비주류가 부상한 것이다. 지역적인 관계로 관롱집단이 서역 실크로드에 이권이 많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면, 산동사족은 상대적으로 만주,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서영교, 2021). 그런데 이적은 산동 지역과 관련이 있었고, 허경종은 그 조상이 남조 출신이지만 널리 보면 산동 귀족집단에 포함시킬 수 있는 부류였다(黃永年, 1995). 그리하여 측천무후를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된 세력들은 기존의 정책을 재검토한 끝에 백제 선공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의 청병 요구가 있자 최종적으로 ‘백제 선공’쪽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대동방정책에 있어서 관롱집단은 ‘고구려 선공’파, 산동사족은 ‘백제 선공’파에 해당한다.
하지만 당 고종 초기 집권세력이었던 장손무기나 저수량은 대외관계에서 온건파였다. 오히려 나중에 고구려 원정군 총사령관이 된 이적 같은 이가 대외강경파에 해당했다. 그러므로 측천무후의 대외정책 조정은 온건파인 장손무기나 저수량의 사망과 강경파인 이적 같은 인물의 득세와 관련이 있었다. 새롭게 재편된 이들은 대외정책에서 강경책을 주도했고, 그 결과 650년부터 반란을 일으켜 당제국의 골칫거리가 되었던 서돌궐 세력을 강경 진압하였고, 대고구려 원정도 주도했던 것이다(여호규, 2018). 당은 659년 백제 원정을 결정하기까지 단독작전에 의한 요동 공략을 지속적으로 시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듭된 실패로 전략적 한계가 드러남에 따라 새로운 전략적 변화가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이때 신라의 백제 원정 요청으로 당의 백제에 대한 입장은 적극적인 방향으로 선회했던 것이다(김영하, 2000). 요컨데 당의 정치적·군사적 요인도 있었지만, 당이 군사전략을 ‘고구려 선공’에서 ‘백제 선공’으로 전환하는 데 신라의 외교적 노력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나당동맹은 시간이 지나면서 신라와 당의 여러 변화된 상황과 궤를 같이하였고, 다시 나당동맹에 반영이 되면서 새롭게 변화했다(김덕원, 2022a). 이로 인해 어느 수준을 동맹으로 볼 건가에 따라 나당동맹의 성립 시기나 군사동맹의 체결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고 있다. 나당동맹의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648년으로 보는 견해가 대부분이다(최현화, 2004; 이기동 2005; 김은숙, 2007; 선봉조, 2017). 그밖에 648년을 수정하여 649년으로 보는 견해(김덕원, 2022a), 659년으로 보는 견해(주보돈, 2017) 등이 있다. 648년 또는 649년 동맹과 659년 동맹의 성격 차이에 주목하여 시기별로 나당동맹의 성격을 분류하기도 한다. 648년은 동맹의 단초를 열었지만 연합군 편성이 성사되는 단계는 아니었고, 백제 공격을 목표로 한 659년에야 합동작전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나당동맹은 659년에 성립되었다는 것이다(주보돈, 2017). 이에 대해 649년에 이미 군사동맹이 체결되었지만 당 태종의 죽음 등으로 사실상 중단되어 명목상 유지되다가 659년에 재성립된 것으로 보고, 649년은 제1차 나당동맹, 659년은 제2차 나당동맹으로 구분하면서, 그 군사전략은 제1차는 ‘고구려 선공’이었지만, 제2차는 ‘백제 선공’으로 차이가 있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김덕원, 2022b).
640년대에 격화된 백제의 대신라 공세 및 고구려와 당의 전면전쟁의 결과에 입각한 대응책으로 648년 무렵 성립된 나당동맹은 7세기 중반 삼국의 관계를 대결적 동맹구도라는 형태로 재편시켰다. 개별 국가 간의 국지적인 분쟁 형태에서 탈피하여 커다란 두 세력 간 대결로 변모함으로써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파급력을 가져왔다. 동맹구도의 성립으로 삼국의 역학관계는 현상을 유지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타파하는 새로운 단계로 발전될 수밖에 없었다. 백제와 고구려는 신라를 고립시켜 지속적인 소모전을 종식시키려 했고,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위협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당과의 동맹을 통한 백제·고구려의 제거를 추진했다.
백제 역시 당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653년 왜와 통호하고, 655년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의 33개 성을 빼앗은 후 다시 왜에 사신을 보내 백제 편으로 끌어들였다. 왜 역시 수·당 제국의 침입을 격파한 고구려의 군사력에 대한 신뢰와 함께 신라의 고압적 자세에 대한 반감 등을 이유로 백제와 고구려 진영에 합류하였다.
왜는 전통적으로 한반도 삼국의 주요 외교 대상 중 하나였는데, 백제와 고구려의 대왜외교 기조는 일찍이 630년을 기점으로 점차 변화했다. 고구려는 왜에 대하여 그 이전에는 문화적 교류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630년대부터는 정치·경제적 교섭으로까지 확대하고 있었다. 백제 역시 630년대부터 군사외교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개했다(김지영, 2016). 650년대 이후 백제, 고구려와 왜의 협력은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를 배경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본래 한반도의 고구려·백제·신라 사이의 전쟁에 국한되었던 삼국 항쟁은, 신라가 당을 끌어들이고 백제가 왜를 끌어들이면서 국제전쟁으로 비화하였다. 여기에 고구려와 연계된 돌궐, 설연타까지 포함하면 그 범위는 더욱 확대된다. 이런 식으로 형성된 고구려-백제-왜-(돌궐-설연타)로 구성된 진영과 신라-당으로 구성된 양대 진영은 이후 한반도 및 동북아시아의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삼국항쟁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규모와 범위가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북아 지역의 국제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로 고구려와 백제는 멸망했고 신라는 부분적이지만 삼국을 아우르는 통일국가를 수립할 수 있었다. 따라서 나당군사동맹과 이에 대응하는 고구려, 백제, 왜 진영의 대립구도 성립은 7세기 중후반 동아시아 정세를 요동치게 한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