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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3.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의 대응

3.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의 대응

백제는 647~649년 연속으로 신라의 서쪽 변경을 침략했지만, 김유신 등의 활약으로 격파당하고, 도리어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따라 650년대 전반기에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한동안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집권 후 친정체제 구축과 친고구려정책으로 왕권강화를 도모했던 의자왕은 655년에 고구려와 힘을 합쳐 신라의 30여 성을 빼앗았다. 하지만 그 후 초심을 잃고 사치와 향락에 빠지면서 실정을 거듭하였다. 게다가 귀족들의 내분으로 인해 백제는 대내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 이런 현실을 파악한 신라는 임자 등 백제 최고위층을 첩자로 포섭하였고, 이들이 제공하는 정보를 통해서 백제의 대내적 상황을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였다(김덕원, 2022b). 이와 같은 상황에서 무열왕은 백제를 병합할 계획을 수립했다(고창민, 2021).
659년 백제가 자주 변경을 침입하자 이를 기회로 신라는 당에 사신을 보내어 군사를 요청했다. 이때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인물은 무열왕의 아들인 김인문이었다. 무열왕은 자신의 아들인 김인문을 당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명목적인 상태로 유지되었던 나당동맹을 다시 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김덕원, 2022b). 신라의 지속적인 대당외교의 노력이 효과를 본 것인지 마침내 당은 출병을 결정했다. 고구려 선공에서 백제 선공으로 전략을 바꾼 당은 즉각 군대를 편성하고, 소정방을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전쟁이 결정되자, 659년 왜가 당에 보낸 사신을 억류하고, 당에 체류하던 왜인들을 대상으로 귀국금지령을 내렸다(주보돈, 2017). 당은 고구려, 백제와 연관된 왜인을 억류하면서까지 백제침공계획을 비밀로 한 것이다. 당시 왜는 649~653년 무렵 친백제 세력이 실권을 잡으면서 신라·당과는 관계가 소원해졌기 때문에 백제정벌계획이 왜를 통해 백제와 고구려에 전달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김지영, 2014).
당은 출병 이전에 ‘백제 선공’으로 전략을 변경하면서 백제를 정벌한 이후 전후 처리에 대한 문제도 논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김덕원, 2022b). 이렇게 백제 침략에 만전을 기한 나당연합군은 660년 7월 10일 백제 수도에서 양군이 합류하기로 약정하고 공격을 단행하였다. 중국 산동성에서 출발한 당의 군대는 덕물도를 거쳐 7월 9일 기벌포로 진입했다. 신라도 김유신이 이끈 5만 정병이 탄현을 넘어 황산벌에서 계백이 이끌던 백제결사대를 격파하고 백제 왕성으로 쳐들어왔다.
645년 고당전쟁 이후 고구려 일변의 외교를 펼쳤던 백제는 652년을 마지막으로 당에 대한 사신 파견을 중단하였다. 당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백제는 양국의 계획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에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대해 당황하였다. 그리하여 7월 18일 전쟁 개시 10여 일 만에 항복하였다.
그러나 신라군과 당군이 점령한 지역은 사비성과 웅진성 등 백제의 중심부에 국한되었다. 이 지역을 제외한 다른 곳은 온전히 남아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백제인의 봉기가 계속해서 일어났다. 백제부흥군이 진압되지 않은 상태에서 당군은 9월 3일 유인원을 진장으로 하는 1만 명과 신라 왕자 김인태가 이끄는 신라 군대 7,000명을 주둔군으로 남겨놓고 철수하였다. 당에게 백제는 고구려 정벌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 대상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한편,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기까지 고구려의 역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불과 5년 전인 655년만 해도 양국은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와 중국 정사에는 고구려와 백제는 통화(通和), 화친(和親), 연합(聯合) 등 표현은 달리하지만 연화(連和)한 기록이 있다(선봉조, 2017). 그러므로 고구려, 백제의 연화 시기나 연화의 정도에 대해 견해차가 있기는 하지만, 양국이 일시적이라도 연화를 했다는 사실은 인정하는 입장이다. 연화를 긍정하는 견해에서는 그 시기를 연개소문이 집권한 642년이나 의자왕 즉위 초인 643년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노중국, 1981; 김수태, 1994; 정동준, 2002).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일본서기』에 두 나라가 화친했다는 기록이 있고 공동으로 군사행동을 하는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이다(선봉조, 2017). 실제 고구려와 백제 관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개선되는 양상을 보였으며, 화친을 전하는 기사도 보인다. 이에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를 ‘연화’를 넘어 ‘연합군 결성’으로 보는 견해도 등장하였다. 아울러 양국의 관계를 시기별로 파악해 접근 → 화친 → 연합군 결성으로 단계적인 발전을 거쳤다고 이해하기도 한다(윤성환, 2011b).
하지만 백제 멸망 과정에서 보여준 백제와 고구려의 태도는 여·제연화설을 부인하는 주요 근거가 되었다. 백제 집권층은 멸망을 앞둔 상태에서 다양한 대책을 내세우면서도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리고 백제가 멸망한 직후 봉기한 백제부흥군은 왜에게 지원군 파견을 요청하는 등 적극적으로 교류를 전개하였지만, 고구려에는 어떠한 교섭도 진행하지 않았다(이영재, 2018). 연화설을 부인하는 근거 중 하나는 신라가 당과 외교하는 과정에서 교묘한 말로써 여·제연화설을 당에 전한 결과라고 보는 것인데(이호영, 1982), 백제와 고구려의 실질적·잠재적 침략 위험에 처해 있던 신라가 위급함을 강조하는 가운데 연화설이 출현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박윤선, 2007).
그런데, 신라의 무열왕은 백제의 독산성, 동잠성 공격에 대응하여 659년 4월 당에 군사 원조를 요청했는데, 백제 멸망을 초래한 이 청병 요구에서 더 이상 여·제연화설을 주장하지 않았다. 이것은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더라도 고구려가 돕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고구려는 일련의 신라의 외교공작에 대응하지 않고 오히려 ‘여·제연화설’에 대한 당의 의구심을 지속시킴으로써 일정한 수혜를 입었다. 이를 통해 신라와 백제의 상쟁을 부추기는 한편 당의 공격력을 분산시킨다는 측면에서 고구려식 이이제이(以夷制夷) 책략으로 평가할 여지가 있는데, 백제 멸망 과정에서 보여준 고구려의 태도는 이에 부합한다(방용철, 2016).
하지만 여·제연화설을 견지하는 입장에서는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의 대응에 관해 달리 분석한다. 앞서 의자왕의 실정과 대당외교의 부재에 대해 언급했지만, 이를 포함하여 그 외 요인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구려의 당에 대한 정보 부재이다. 백제는 신라 일변도인 당의 한반도정책에 실망하여 653년 이후 대당외교를 단절하였다. 고구려 역시 656년 이후 10년 동안 견당사를 중지하는 강경책을 실시하여 당 내부의 정세 변화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고구려와 백제 모두 당의 백제 공격 정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김지영, 2016).
둘째, 고구려와 백제의 영역이 신라에 의해 분리되어 있는 지정학적 요인이다. 육상은 한강 유역을 점령한 신라에 의해 단절되어 있었고, 해상으로는 650년대 이후 해상제해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도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셋째, 군사적인 측면에서 당시 나당연합군의 기만적인 군사전략에 당했다. 660년에 백제를 공격하기 직전까지 중국은 대돌궐 군사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구려로 하여금 서북방전선에 집중하도록 하였다. 이는 당의 백제 공격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게 하였다. 10여 일 만에 끝난 군사작전으로 인해 물리적으로 도울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물론 나당연합군의 압도적인 군사역량도 무시할 수 없다.
넷째, 여·제연화의 한계성이다. 양자의 주 공격대상은 신라였지만 중국 방면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륙 방면에서 오는 군사 압력에 대한 대응에는 태생적으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선봉조, 2017).
이렇게 나당연합군의 백제 공격에 대한 백제와 고구려의 대응 실패는 지정학적 요인 이외에도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인 방면에서의 총체적 역량 부재에서 기인한 것으로 분석한 것이다.
백제의 급작스런 멸망은 나당연합군의 압도적 화력에 대응하기에 부족한 군사력의 열세가 원인이었다. 하지만 단기간의 공격에 의한 멸망은 상대적으로 이후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인적·물적 자원을 남겨놓았다. 그리하여 멸망 이후 백제 지역에서는 부흥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김지영, 2016).
백제 부흥운동이 거세게 일어나 신라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던 660년 11월 1일 고구려가 신라의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백제가 멸망한 지 3개월이 지났을 때이다. 칠중성의 함락은 7세기대 신라의 한강 이북 방어와 북진의 거점성 역할을 했던 북한산성을 최단거리로 남진해 공격할 수 있는 요충지를 확보하는 의미가 있었다(장창은, 2014). 이후 칠중성이 고구려의 영유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서영일, 2001; 백종오, 2007), 662년 김유신이 평양성 부근에 있던 당의 소정방군에게 식량을 보급하기 위해 칠중성을 거쳐 칠중하(임진강)에 이르기까지 고구려군의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얼마 후 고구려가 칠중성을 포기하고 임진강 이북으로 퇴각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장창은, 2016). 당의 침공과 칠중성의 입지조건으로 인해 고구려가 이 성을 유지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즉 임진강 남쪽에 위치한 칠중성은 신라에게는 천혜의 방어선을 앞에 둔 셈이지만 고구려에게는 배수의 진을 친 형세였다. 그러므로 칠중성을 차지한 후 임진강 남안 신라의 방어체계를 무너뜨리고 북한산성까지 장악해야 이를 토대로 남진의 거점성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술하듯이 북한산성 공략의 실패로 인해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힘들게 확보한 성을 포기해야만 했던 것이다.
고구려는 다음 해인 661년 5월 말갈과 더불어 한강 이북 지역의 거점성인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신라가 백제부흥군 진압에 전력을 기울이면서 신라의 북쪽 경계에 힘의 공백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백제를 멸망시킨 여세를 이용하여 당 고종이 고구려 친정 조서를 발표하여 장차 고구려 침공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산성에 대한 공격을 단행한 것이다(이상훈, 2016).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5월 9일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 장군 생해(生偕)와 함께 군사를 합해 술천성(述川城)을 공격해 이기지 못하자 북한산성으로 옮겨가 공격하였다고 한다. 고구려군은 투석기인 포차를 벌여 놓고 돌을 날려 성가퀴와 건물을 부수었다. 『삼국유사』 기이 편 태종춘추공전에 따르면 30여 곳의 고구려군 포차가 부서졌다고 되어 있어 대규모 공성장비가 투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이상훈, 2016). 당시 북한산성에는 성주 동타천(冬陀川)의 지휘하에 남녀 2,800명이 고구려·말갈 연합군의 공세를 20여 일 동안 방어하고 있었다. 식량이 바닥나고 힘도 다하면서 신라군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하늘에 지극한 정성으로 빌었더니 갑자기 큰 별이 고구려·말갈 연합군의 진영으로 떨어지고 천둥과 비가 내리며 벼락이 치자 두려워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고 한다.
고구려와 말갈 연합군의 북한산성 진출경로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다. 이때, 고구려가 먼저 공격한 술천성을 여주시 홍천면 일대로 보는 견해와 여주 파사산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는데, 모두 경기도 여주시 관내로 추정하고 있다(여호규, 2012; 장창은, 2014). 고구려군의 남진경로에 대해서는 죽령로를 이용하여 춘천-홍천-원주까지 내려온 후 서진하거나, 홍천에서 양평 방면으로 나아가 남진해 술천성에 이른 것으로 파악한 견해(여호규, 2012; 서영일, 2014; 장창은, 2016)가 일반적이다.
고구려·말갈 연합군은 술천성을 함락하지 못한 채 북한산성을 공략하였다. 이때 고구려군은 육로로의 이동이 쉽지 않기 때문에 술천성에서 북한산성까지 배를 타고 이동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황보경, 2015).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 의하면 고구려군과 말갈군이 수륙으로 함께 진군하여 북한산성을 포위하였는데, 고구려는 서쪽에, 말갈은 그 동쪽에 주둔하였다고 한다. 수군과 육군이 동원되었는데, 육군의 주력은 말갈군, 수군의 주력은 고구려군으로 보는 견해(장창은, 2016)가 있다. 이와 달리 고구려군과 말갈군이 함께 육로로 이동해 술천성전투를 치렀고, 전투에서 패한 후 고구려군이 술천성에서 북한산성까지 배를 타고 이동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황보경, 2015). 하지만 여주 인근의 남한강에 고구려 배가 미리 정박할 가능성을 희박하게 보고, 고구려 수군이 평양성에서 출발해 한강 하류를 거슬러서 북한산성까지 이동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장창은, 2016).
나당연합군과 백제부흥군이 한창 교전하던 시기에 진행된 고구려의 신라 북변에 대한 공격은 당군의 북상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런데 이것이 백제 부흥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전략에서 비롯된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연화론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이를 백제 부흥운동을 위한 지원으로 해석하고, 백제 멸망 이후 부흥운동이 진행되는 663년까지 고구려·백제·왜의 지속적인 군사 연계가 고구려의 남방전선을 중심으로 보다 긴밀하게 드러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김지영, 2016).
최근에는 고구려가 당과 신라의 비밀 엄수로 나당연합군의 백제 원정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지만, 그 후 고구려가 구축한 국제적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거란을 위시한 중국 주변 여러 나라와 왜를 이용하여 당의 군사활동을 견제했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에 따르면 고구려는 645년 고당전쟁의 승리로 제고된 국제사회에서의 자국의 위상을 최대한 활용하여 당에 대항하는 국제적인 연결망을 조직하였고, 이를 활용하여 당이 자국을 침략할 때마다 배후에서 공격하는 식으로 해서 당의 침략을 제어했다는 것이다. 백제를 멸망시킨 여세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침략한 당에 대해 거란의 공격을 유발해서 당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도록 했고, 또 왜와 함께 백제 구원과 관련한 대책을 논의하여 백제부흥군을 지원했다는 것이다(여호규, 2018).
그리하여 부흥운동 시기에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에서 전개된 공성전은 당의 북상을 막는 한편 부흥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았다(여호규, 2018). 따라서 고구려는 신라가 백제 부흥운동 진압에 몰두하고, 당의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속전속결로 신라를 선제 타격함으로서 남쪽 방어선을 확보하고 백제 부흥운동에 도움이 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고구려의 신라 북변에 대한 공격은 신라가 확고히 막아내면서 중단되었다. 이와 동시에 당은 계속하여 편사를 파견하여 고구려를 공략하였는데, 이로 인해 고구려는 서북방에 신경 쓰느라 백제 부흥운동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고 전체적으로 수세적인 형세에 처해 있었다. 663년 백제 부흥운동이 실패하면서 고구려의 고립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백제의 멸망으로 고구려는 북부와 남부 두 전선에서 나당연합군을 상대하게 되어 방어에 더욱 어려움이 배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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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의 대응 자료번호 : gt.d_0007_0010_001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