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661년 당군의 공세와 신라의 군량수송작전
1. 661년 당군의 공세와 신라의 군량수송작전
1) 당군의 고구려 공격 시기와 부대 편성
660년 당은 백제 멸망에 대한 논공행상이 끝난 후 곧이어 고구려 공격에 보낼 장수를 발표했다. 그리고 662년 초반 당군이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서 퇴각하기까지 전쟁이 이어졌다. 이 전쟁은 645년 당 태종의 고구려 공격에 이은 두 번째 전면전이라는 의미에서 2차 고당전쟁으로 불린다. 이 전쟁은 이미 645년 당의 고구려 공격이 실패하면서 예정되었으며, 이후 재개되기까지 두 나라가 꾸준히 준비해 온 전쟁이었다(김용만, 2004).
백제의 멸망은 당의 고구려 공격을 위한 선제작업이었다. 이는 당 태종의 생존 시에 구상되었던 전략으로, 식량 및 군사 지원을 위한 후방기지 확보를 위한 일이었다. 한편, 백제 선공책은 655년 장손무기(長孫無忌) 정권이 실각하고 허경종(許敬宗) 정권이 등장하면서 당의 대외정책이 강경책으로 선회하며 본격화되었다고 파악하기도 한다(여호규, 2018). 확정 시점은 당에서 서돌궐 방면의 토벌작전이 마무리 국면에 접어든 657년 말에서 658년 초로 추정하였다.
당은 660년 11월 헌부례(獻俘禮)를 거행해 백제 공격을 마무리한 후, 12월에 곧바로 대규모 고구려 공격군을 편성했다(『구당서』고종본기). 당의 고구려 공격에 대한 계획은 백제 공격에 착수했을 때 수립했을 것이다(여호규, 2018). 12월 15일 당은 글필하력(契苾何力)을 패강도(浿江道)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으로, 소정방(蘇定方)을 요동도(遼東道)행군대총관으로, 유백영(劉伯英)을 평양도(平壤道)행군대총관으로, 정명진(程名振)을 누방도(鏤方道)총관으로 삼아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661년 1월 19일에는 하남(河南), 하북(河北), 회남(淮南) 67주의 4만 4,000여 명을 모집해 평양과 누방 행영으로 가게 하였다. 이어 22일에는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扶餘道)행군총관으로 삼아 회흘(回紇) 등 여러 유목민집단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자치통감』권200).
이 기록을 근거로 당의 고구려 공격이 660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견해(이호영, 2002; 윤명철, 2003; 정원주, 2013)가 제기되었다. 한편, 661년 1월에 선발대인 부여도행군이 출병하고 이후 나머지 군대가 출병한 것으로 보는 견해(김병곤, 2013a; 서영교, 2014a)도 제기되었다. 이는 사료마다 시기를 달리해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 공격을 위한 부대 편성 기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660년과 661년 1월에 당군과 고구려군의 교전 기사가 없으므로 이때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장창은, 2016)가 제기되었다. 660년 12월에 발표된 고구려 공격의 주요 인물인 소정방이 661년 3월 1일에 낙양(洛陽)에서 당 고종이 베푸는 연회에서 일융대정악(一戎大定樂)을 참관하였다(이민수, 2021). 또한, 군대 모집을 위한 기간(김용만, 2004)과, 백제 공격에서 막 돌아온 군대의 전투력을 정리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拜根興, 2002)도 660년에 당군이 고구려로 출병할 수 없는 근거로 제시되었다.
661년 4월 16일에 당 고종은 고구려 공격을 위한 행군 편성을 새로이 했는데, 임아상(任雅相)을 패강도행군총관으로, 글필하력을 요동도행군총관으로, 소정방은 평양도행군총관으로, 소사업을 부여도행군총관으로, 정명진은 누방도행군총관으로, 방효태(龐孝泰)를 옥저도(沃沮道)행군총관으로 삼고 35개의 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다(『신당서』 고종본기). 이때, 당의 35개 군단이 고구려를 향해 출정한 것으로 보는 견해(여호규, 2018)가 있다. 반면에 4월에 발표된 고구려 공격을 위한 부대 편성 기사는, 직접 전쟁에 참전하려는 당 고종의 결정이 결국 신하들과 측천무후의 만류로 포기하면서 출발 기일이 늦추어져, 다음 달인 5월 16일 발표된 부대 편성 기사가 최종 결정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이민수, 2021). 이 편성 기사에는 글필하력, 소정방, 임아상이 모두 대총관으로 기록되어 있는데(『구당서』 고종본기), 4월 편성 기사에 오류가 있거나(김용만, 2004; 이재성, 2018; 이민수, 2021) 고종의 전쟁 불참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고구려 공격에 편성된 또 다른 인물로는, 아사나충비(阿史那忠碑)에 의하면 아사나충이 장잠도(長岑道)행군대총관으로 참여하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사서에 전하지 않는 일부 행군들이 묘지명과 『삼국사기』에 산재되어 있다. 당시장군정사초당비(唐柴將軍精舍草堂碑)에 시장군(柴將軍)인 철위(哲威)가 함자도(含資道)행군총관에 제수되었다고 하며, 장경(張脛)묘지명에는 장경이 660년 압록도총관에, 남곽생(南郭生)묘지명에는 남곽생이 662년에 낙랑도(樂浪道)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고 하였다. 이로써 함자·압록·낙랑도행군이 35군에 편재되었음을 알 수 있다(이민수, 2021). 설만비(薛萬備)묘지명에 따르면, 설만비가 660년 압록도행군부총관에 제수되어 내주(萊州)에 이르렀다가 병으로 661년 5월 11일에 관저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압록도행군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 함자도총관인 유덕민(劉德敏)의 존재가 확인되므로 함자도행군 역시 포함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이민수, 2021).
당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육군과 수군을 각각 4만 명씩으로 하여 8만~9만 명 정도로 추정하는 견해(김병곤, 2013a), 20여만 명으로 추정하는 견해(劉矩, 2018), 『당육전(唐六典)』을 근거로 1군을 5,000명으로 하여 35군의 규모를 17만 5,000명으로 파악하는 견해(呂思勉, 1984; 서인한, 1994)와 서주와 춘추전국시대 제(齊)의 1군 규모를 기준으로 1군을 최소 1만 명으로 보아 35만~44만 명으로 보는 견해(김용만, 2004)가 있다. 대개의 연구자들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35만 명으로 추정하는 견해(민덕식, 2002; 노중국, 2003; 이재성, 2016; 劉矩·姜維東, 2006)를 따른다. 또한, 660년 백제 공략 시 당군이 14개군 12만 2,711명이므로 그 2.5배에 해당하는 35개의 행군 규모를 대략 35만 명으로 보기도 한다(이민수, 2021).
662년 사수전투에서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패해 죽임을 당한 옥저도행군총관 방효태군의 전사자가 수만 명이었다는 점에서 1군의 규모는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당은 6개 행군에 35군이라는 대규모의 군사를 동원했는데, 고구려와의 교전이 확인되는 것은 661년 7~8월이었다.
2) 신라의 참전과 군량수송작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했지만, 신라와 당군이 점령한 지역은 사비성과 웅진성 등 백제의 중심부만이었다. 여전히 건재했던 다른 지역에서는 백제인들의 저항이 계속해서 일어났으며, 그러한 상황은 661년에도 이어졌다. 초기의 부흥운동은 백제의 서북부 지역과 사비성 인근 지역에서 시작해 661년에는 동부와 남부 지역으로 확대되어, 백제 고토 전역이 부흥운동군의 활동영역으로 편입되었다고 할 정도로 확산되었다(김영관, 2005).
더욱이 신라가 당과 군사동맹을 맺는 데 큰 공훈을 세움으로써 진골 출신으로 처음 왕위에 오른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가 이해 6월에 사망하였다. 그의 맏아들인 김법민(金法敏)이 문무왕이 되어 그가 미처 끝을 맺지 못한 삼국 통일 과업의 완수를 잇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와중에 당은 신라를 고구려 공격에 동원하였다. 661년 6월 당에서 숙위하던 김인문(金仁問)에게 당 황제의 칙서를 들고 신라로 귀국하게 하였다. 당 군대의 고구려 공격에 맞추어 신라도 군사를 동원하여 이에 호응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신라는 무열왕의 사망으로 장례의식만 치른 국상기간이었다. 더욱이 이해 초에는 전염병이 돌아 군사와 말을 징발할 상황이 아니었는데(장창은, 2016), 이는 당 전역에 유행하다가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신라에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는 두창(痘瘡: 천연두)이었다(이현숙, 2003).
문무왕은 상중임에도 다음 달인 7월 17일에 김유신(金庾信)을 대장군으로 삼고 인문, 진주(眞珠), 흠돌(欽突) 등을 대당(大幢)장군으로, 천존(天存) 등을 귀당(貴幢)총관으로, 품일(品日) 등을 상주(上州)총관, 진흠(眞欽) 등을 하주(下州)총관, 군관(軍官) 등을 남천주(南川州)총관, 술실(述實) 등을 수약주(首若州)총관, 문훈(文訓) 등을 하서주(河西州)총관, 진복(眞福)을 서당(誓幢)총관, 의광(義光)을 낭당(郎幢)총관, 위지(慰知)를 계금대감(罽衿大監)으로 하는 대규모 고구려 공격 부대를 편성하였다. 그리고 8월에 직접 문무왕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출발했다.
시이곡정(始飴谷停)에 이르렀을 때, 백제부흥군이 옹산성(甕山城)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돌려 9월 25일 옹산성을 포위했다. 9월 27일에는 성을 함락하였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1). 이때 유인원(劉仁願)도 일부 당군을 이끌고 사비에서 수로를 통해 혜포(鞋浦)로 와서 그곳에서 남천주로 나아가 신라군과 회합하였다(『삼국사기』 김유신전). 10개 군단으로 이루어진 신라군은 편성된 장군 수만 24명이었다. 장군 1명당 1,500명 내외의 병력을 인솔했다고 가정한다면 동원된 신라 병력 수는 3만 6,000명에 달하며, 여기에 전투 지원 부대 30%를 더해 총병력 수는 4만 6,800명으로 추산되고 있다(이상훈, 2012a).
문무왕이 이끄는 고구려 공격 부대의 이동경로와 도달한 곳에 대해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김유신열전은 서로 다르게 기술하였다. 문무왕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도착한 곳을 신라본기에는 시이곡정으로, 김유신열전에는 남천주로 표기하였다. 남천주는 경기도 이천으로 비정되는데(이상훈, 2015), 옹산성전투 등의 위치를 고려해 문무왕과 김유신의 군대가 남천주에 이르렀다는 기록을 두찬(杜撰)으로 보기도 한다(이병도, 1996; 정구복 외, 1997).
두 기록의 서술방식을 고려하여 고구려 공격의 주력부대는 김유신의 인솔하에 남천주에 도착해 유인원이 이끄는 당군과 합류하고, 문무왕은 주력부대와 떨어져 후방에서 전투 상황을 확인하고 지원하기 위해 시이곡정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는 견해(이상훈, 2015)도 제기되었다. 시이곡정의 위치를 대덕구 비래동으로 보는 견해(강헌규, 1996)와 다르게 삼년산성이 있는 보은 지역으로 추정하여, 문무왕은 웅진성에 고립되어 있던 당군을 구원하기 위해 출정했고, 김유신군은 평양성의 당군을 지원하기 위해 북진하였다는 견해(장창은, 2016)도 제기되었다.
고구려를 향해 북진하던 신라군은 백제부흥군이 점령하고 있던 옹산성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삼국사기』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에는 웅진으로 가는 길을 개통하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이에 옹산성전투의 발생 배경을 서쪽의 웅진성으로 향하는 길과 북쪽의 평양으로 북진하는 길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이호영, 1997; 노중국, 2003; 김용만, 2004). 최근에는 백제부흥세력과 당 사이의 교섭이 상당히 진척되자 신라가 위기감을 느끼고 백제와 당의 연결고리를 차단함으로써 나당의 연합관계를 재확립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견해(김병남, 2013)도 제시되었다.
신라군은 옹산성을 점령한 후 전공(戰功)을 포상하고 웅현성(熊峴城)을 쌓았다. 상주총관 품일이 일모산군(一牟山郡)의 태수 대당(大幢)과 사시산군(沙尸山郡)의 태수 철천(哲川)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백제부흥군이 지키던 우술성(雨述城)을 공격하여 1,000명의 목을 베었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1). 옹산성은 신라의 북진로와 웅진로를 모두 차단할 수 있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었다(이상훈, 2015). 이 옹산성은 대전시 대덕군 관내의 계족산성(鷄足山城)으로 보는 견해(심정보, 2007; 노태돈, 2009; 김병남, 2013; 이상훈, 2015)가 우세하지만, 인근의 회덕산성(노중국, 2003), 연축동산성(連丑洞山城)으로 보는 견해(강헌규, 1996)도 있다. 이와는 다르게 신라의 진군경로를 감안해 보은군 회인면 일대로도 보는데(장창은, 2016), 이를 구체화하여 주성산성(酒城山城)으로 비정하기도 한다(김영관, 2010).
신라군이 백제부흥군이 주둔하고 있던 옹산성과 우술성을 차례로 함락한 것으로 보아 두 성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였을 것이다. 이 우술성은 계족산성으로 비정하거나(노중국, 2003; 김영관, 2010; 장창은, 2016) 연축동산성으로 비정(문안식, 2006; 심정보, 2007; 김병남, 2013)한다. 계족산성에서는 고려시대 ‘우술(雨述)’명 기와가 출토되었다(최병식, 2007). 이 산성은 대전 지역의 진산인 해발 423.6m의 계족산에 위치한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산 정상부에서는 서쪽으로 대전 지역 전체가 조망되며, 동쪽으로는 충청북도 옥천과 보은 지역이 조망된다(심정보, 2000).
백제부흥군의 옹산성 주둔으로 인해 신라군은 고구려를 공격하려는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되었으며, 당군의 고구려 공격에도 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옹산성 공격 이후 신라군은 북진하지 않았다. 이를 신라가 시간을 지체하면서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 것으로 보는 견해(김용만, 2004)가 있다. 백제 지역이 완전히 진압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라 본토 방위에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점(이상훈, 2015)과 고구려와 당군이 소모전을 벌이는 사이 백제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목적(이호영, 1997; 이상훈, 2015)이 제시되었다. 반면 김유신군은 원래대로 북진을 계속해 당군과 합류하고자 하였다는 견해(장창은, 2016)가 있으나 이는 기록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10월 29일까지 문무왕과 신라군이 옹산성 일대에 주둔하고 있을 무렵 경주에 당의 사신이 당도하였다. 당 사신은 왕을 조문하고 무열왕의 부음을 애도하고 부주하였다. 그리고 당 함자도총관 유덕민이 와서 고종의 칙서를 전하며 평양의 당군에게 군량을 수송하게 하였다. 이에 문무왕은 662년 정월에 김유신에게 명하여 인문, 양도(良圖) 등 9명의 장군과 함께 수레 2,000여 대에 쌀(米) 4,000석과 벼(租) 2만 2,000여 석을 싣고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2). 벼는 『삼국사기』 열기열전에는 2만 2,250석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 김유신 부대가 지고 간 군량은 5만 명의 병사가 한 달 정도 먹을 수 있는 군량이었다(이상훈, 2012b).
『삼국사기』김유신열전에는 661년 12월 10일에 고구려로 출발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어 김유신이 지휘한 보급부대의 출발이 이때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김병곤, 2013a). 이에 대해 김유신열전의 기록이 날짜별로 더 자세하지만, 신라본기에 1월 23일에서야 칠중하를 건너 고구려 강역 안으로 들어갔다고 기술되어 있어서 실현되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다(장창은, 2016). 신라의 보급이 늦어진 것에 대해 왜의 지원을 받은 백제부흥군의 방해로 보기도 한다(서영교, 2014b).
이 수송작전은 김유신의 자발적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김유신군의 규모는 장군 9명이 참여하였으므로 적어도 1만 5,000명 내외였을 것이다(이상훈, 2012b). 김유신은 영실(靈室)에 들어가 여러 날 밤낮으로 분향한 후에 나와서 “내가 이번 길에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삼국사기』 김유신열전). 그동안 김유신은 수송작전에 대한 시뮬레이션, 즉 병력이동, 행군경로, 수송수단, 중간기착지 등에 대한 구상을 마치고 작전 성공을 예감했던 것으로 보인다(김주성, 2011).
평양의 당군은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고구려의 반격으로 전멸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이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고구려인의 말로는 “12월에 고려국에서는 추위가 매우 심해 패수가 얼어 붙었다. …고려의 사졸들이 용감하고 씩씩하였으므로 다시 당의 진지 2개를 빼앗았다. 2개의 요새만이 남았으므로, 다시 밤에 빼앗을 계책을 마련하였다. 당의 군사들이 무릎을 끌어안고 곡을 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을 통해 당시 평양에서는 고구려군의 총공세에 당군이 위기에 처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군이 신라에 군량을 요청했던 것은 추운 날씨로 인해 패수가 얼어붙어 수로로 운반되던 군량을 공급받기 어려운 처지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김유신 부대의 군량 수송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풍수촌(楓樹村) → 칠중하(七重河) → 산양(蒜壤) → 이현(梨峴) → 장새(獐塞) → 양오(楊隩) → 평양으로 이어지고 있다. 칠중하는 당시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선에 해당하는 임진강이므로 풍수촌은 신라 국경 안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정확한 지명은 알 수 없다. 김유신이 이끄는 군량 수송 부대는 고구려군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주요 거점이나 큰 성읍은 배제되고 험하고 좁은 길로 행군하였을 것이다. 이는 정확한 지명은 알 수 없지만 산양, 이현, 양오 등의 지명이 달래나무가 많은 평지, 배나무가 많은 고개, 버드나무가 많은 물길로 해석되는 것에서 알 수 있다(이상훈, 2012b).
장새는 현재의 황해도 수안으로(津田左右吉, 1964), 김유신의 부대가 경기도 적성에 위치한 칠중하를 거쳐 황해도 수안으로 가는 위치 사이에 산양과 이현이 위치함을 알 수 있다. 칠중하를 건너 수안으로 가는 길은 서쪽으로 개성을 지나 북상하는 방법과 동북쪽 방면으로 삭녕-토산-신계-수안을 통해 북상하는 방법이 있다(서영일, 2004). 김유신은 이현에서 고구려군과 접전을 했는데, 귀당제감(貴幢弟監) 성천(星川)과 군사(軍師) 술천(述川) 등이 공격해 죽였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2).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김유신의 부대는 고구려군과 대규모 접촉이 예상되는 곳을 배제하고 개성과 삭녕 사이의 마식령산맥을 넘어 북상했을 것이다(이상훈, 2012b).
김유신 부대는 2월 1일에 장새에 이르렀다. 먼저 보기감(歩騎監) 열기(裂起)와 군사 구근(仇近) 등 15명을 소정방군 진영으로 보내 군량이 도착했음을 알리게 하였다(『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2). 고구려군은 열기 등과 마주쳤으나 이날 몰아닥친 강추위와 눈보라로 저지하지 못하였다(임용한, 2012; 이민수, 2022c). 6일에 양오에 이르러 진을 치고 아찬 양도와 대감 인선(仁仙) 등을 보내 당 군영에 군량을 가져다 주었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2). 양오의 위치에 대해서는 평양 동쪽의 강동(江東)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96; 김주성, 2011)가 있다. 반면에 강동을 통해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대동강과 합장강 등을 건너야 하므로 수송로가 복잡하여 비효율적이므로 대동강 연안의 유포리(柳浦里)로 보는 견해(이상훈, 2012b)가 제기되었다.
양도는 군사 800명과 함께 바닷길로 귀국하였다(『삼국사기』 김인문전). 이때 김유신군은 육로를 통해서 평양성으로 갔으므로 양도가 이용한 선박은 장거리 철수를 해야 하는 소정방 수군의 배를 양도받았을 가능성은 적으며(이상훈, 2012b), 사수전투 이후 남은 당군의 병선이었을 것이다(김병곤, 2013a).
신라군으로부터 식량을 공급받은 당군은 퇴로를 확보하여 바닷길로 철군하였다. 군량 수송을 완료한 김유신의 부대도 철수하였는데, 소정방군과 김유신군의 철군시기가 사료마다 달리 기술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소정방군이 보급품을 받은 2월 6일 직후에 철군하자 뒤이어 김유신의 보급군이 철군하였다고 하였다. 『자치통감』에는 방효태군이 전몰한 2월 18일 이후 큰 눈이 내려 평양성 포위를 풀고 철군하였다고 하였다. 소정방이 철군하기까지 약 2주 정도의 준비기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이민수, 2022c).
김유신군이 평양성에 이를 때까지 고구려군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은 가장 큰 원인으로는 당시 고구려의 남부전선 병력이 평양성 방어에 차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김용만, 2004). 황해도 일대에는 신라군을 견제할 만한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두었을 것이다(이민수, 2022c). 김유신군의 철수로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행군 속도를 높이고 고구려군과의 접전을 피하고자 가장 빠른 자비령로(다곡도)를 이용했을 것이다(이상훈, 2012b). 김유신의 부대는 임진강에 이르기까지 고구려군과 큰 접전이 없었다.
김유신군은 표하(瓢河)에 이르러서 급히 물을 건너 언덕에서 휴식하는데, 고구려군이 뒤를 쫓아오자 만노(萬弩)를 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우선 퇴각하자 여러 부대의 장수와 병졸을 독려하여 그들을 패퇴시켰다. 이 전투로 고구려 군사 1만 명을 죽이고 포로 5,000명을 생포하였다(『삼국사기』 김유신열전). 신라본기에는 “1만여 급의 목을 베었으며, 소형(小兄) 아달혜(阿逹兮) 등을 사로잡았고, 병계(兵械)를 얻은 것이 만을 헤아릴 정도였다”고 하였다. 임진강전투에서 신라에 사로잡힌 아달혜가 14관등 중 11위인 소형에 불과하므로 승전 내용이 과장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김용만, 2004). 그러나 김유신군은 무사히 신라로 귀환하였을 뿐 아니라 추격하는 고구려군에게 역공을 가함으로써 후방의 안전까지 도모하였다는 점에서 이 군량수송작전은 성공적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