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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당군의 고구려 공격 과정

2. 당군의 고구려 공격 과정

1) 당군의 고구려 공격
661년에 당은 35군으로 고구려에 대한 전면전을 실시했다. 이 전쟁에 대해서는 평양도행군만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나머지 행군에 대해서는 일부 사실만을 파악할 수 있다. 평양도행군에 대해서는 『구당서』 고종본기 용삭(龍朔)2년(662) 3월조에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위도(葦島)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다시 나아가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하였다. 『자치통감』에는 평양에서 고구려를 공격했던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퇴각한 것이 662년 2월 18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662년 3월조 기록은 당의 고구려 공격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였으므로, 당이 고구려의 위도를 공격한 것은 개전 초기 또는 대고구려전에서 특기할 만한 승리였을 것이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서는 661년 8월 평양도행군대총관인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고구려군을 패강(浿江)에서 격파하고, 잇단 전투에서 모두 이기고 마읍산(馬邑山)을 빼앗아 군영을 설치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고 한다. 이 패강전투는 『자치통감』에 661년 7월 11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위도는 평안북도 박천군의 대령강과 청천강 하구에 소재한 섬으로 보는 견해(손영종, 1997; 장창은, 2016)가 일반적이다.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은 서해 연안항로를 따라 남하하면서 대령강·청천강 하구의 전략적 거점이었던 위도를 공략한 후, 남진해서 대동강 하구로 진입해 강을 따라 평양성으로 동북진했을 것이다(장창은, 2016). 패강은 대동강을 말하므로 위도전투는 7~8월에 있었던 패강전투보다 먼저 시작되었을 것이다(김용만, 2003). 당군이 위도를 점거했다는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다시 연안을 따라 곧장 남진하여 패강 하구에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이민수, 2022a).
고구려 수군은 패강에서 당군에 패하면서 상륙을 저지하지 못하고 마읍산을 빼앗겼다. 마읍산의 소재지는 『삼국사기』에는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이라 하여 그 위치를 알 수 없는 곳으로 분류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평양성 서남쪽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위치는 대동강 하류 방면으로(이병도, 1996) 대체적으로 평양성 근교의 서남쪽으로 비정할 수 있다(村上四男, 1966). 소정방이 마읍산에 진영을 구축한 것은 평양성을 공격할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김병곤, 2013a). 전방에서 오는 적의 공격을 방어하고 후방으로 오는 아군의 병력과 물자를 집결시키기 용이한 지역에 해당하는, 평양에서 서남쪽으로 60리 떨어진 서학산(捿鶴山) 일대로 볼 수 있다(이상훈, 2017). 마읍산이 위치한 서학산은 병력과 군수물자를 집적하기 수월한 수륙교통의 결절지로, 고구려군은 이곳을 상실함으로써 패강 이서의 통제권을 당군에게 내어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이상훈, 2017; 이민수, 2022a).
한편, 당 수군에 대항한 고구려 수군의 활동이 어느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 방어라는 측면에서 해상에서의 비효율성과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는 등의 이유로 고구려는 당과 함대 건조 경쟁을 할 수 없어 성책 증설과 수리 등의 비대칭적 대항책으로 일관했다고 보는 견해(서영교, 2023)가 있다. 이로 인해 당에게 재해권을 장악당함으로써 고구려가 기울어지는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고 보았다.
당군은 육로와 수로로 길을 나누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자치통감』 권200). 소정방이 위도를 거쳐 배를 타고 대동강을 통해 평양으로 움직였다는 점에서 소정방의 평양도 행군은 수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선박을 이용해 고구려의 수도 평양으로 향한 부대는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만이 아니었다. 옥저도총관 방효태와 패강도총관 임아상 역시 각기 평양성에서 고구려군과의 격전이 있었으므로 이들은 소정방과 함께 평양성으로 가는 수군 대열이었을 것이다(김용만, 2004; 서영교, 2015a; 장창은, 2016; 이민수, 2021).
방효태가 이끄는 옥저도행군의 공격로를 육로로 보는 설(김복순, 1986; 임용한, 2012)도 있다. 그러나 방효태는 영남의 병사를 지휘했던 것으로 보아 수군으로 볼 수 있다(김병곤, 2013a). 한편, 방효태군이 662년 정월에 군선으로 상륙하려다 연개소문에게 패배한 것으로 보는 견해(윤명철, 2003)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평양도행군과 같이 편성된 옥저도행군이 뒤늦게 출발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김용만, 2004).
임아상이 이끄는 패강도행군 역시 육로를 통해 고구려로 이동했다고 보는 설(김복순, 1986; 민덕식, 2002; 임용한, 2012)이 있다. 그러나 오흠(仵欽)묘지명에서 임아상의 패강도행군은 배를 타고 수로를 따라 고구려군과 전투를 벌였다고 하였다. 이는 소정방군의 위도전투에 대한 내용으로 볼 수 있으므로, 임아상도 소정방군과 함께 수로를 통해 평양 방면으로 진군했을 것이다(이민수, 2021).
글필하력이 이끄는 요동도 행군은 압록수전투에서 확인된다. 글필하력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당군은 압록수에서 연남생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661년 9월 연개소문이 아들 연남생을 파견하여 정예군 수만 명으로 압록수를 지키게 해 당의 여러 군사들이 건널 수 없었다. 천남생(泉男生)묘지명에 의하면 연남생은 661년에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에 취임하였다. 이로 보아 연남생은 압록수 방어전의 야전군 사령관이었고(이정빈, 2016), 그 군대 구성은 중앙군이 다수 포함되었을 것이다(이문기, 2007).
이때 글필하력이 요동을 통과해 육로로 압록강에 이르렀다는 설(손영종, 2000; 민덕식, 2002; 劉矩·姜維東, 2006; 노태돈, 2009; 임용한, 2012; 김병곤, 2013a; 서영교, 2015a; 장창은, 2016)과 수로를 이용해 압록강 방면으로 이동했다고 보는 설(김용만, 2004; 이상훈, 2012b; 정원주, 2013; 우석훈, 2014; 이민수, 2021; 임기환, 2022a)이 있다. 육로설은 요동 지역의 고구려성들을 피해 신속히 통과했다고 보는 견해이다. 오랜 전쟁으로 인해 요동방어선이 크게 약화되었다고 보고(임용한, 2012), 심지어 무인지경이라 연개소문이 압록강 이북을 반포기 상태로 방치했다고 보기도 한다(劉矩·姜維東, 2006).
반면 글필하력을 수군으로 보는 경우는 글필하력군의 진군과 회군 당시 요동을 통과했다는 기록이 부재하며(우석훈, 2014), 더욱이 고구려는 계속해서 요동방어망을 보강·축조했으며, 당군은 666~668년 전쟁에서도 요동방어망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으므로 글필하력군이 아무런 피해 없이 요동을 육로로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김용만, 2004). 또한, 압록도행군부총관에 제수된 설만비가 출정을 위해 당 수군의 출항지인 내주로 향했으며, 계필숭(契苾嵩)묘지에서는 글필하력군이 배를 운용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존재한다(이민수, 2021).
글필하력의 본진이 압록수 이북에 상륙했을 무렵 예상치 못한 기상이변으로 압록수가 결빙되었다. 글필하력군이 얼음을 타고 강을 건너 진격하여 수만 명의 연남생군을 격파하였다. 달아나는 고구려군을 글필하력이 수십 리를 뒤쫓아 3만 명을 죽였으며, 나머지 무리는 모두 항복하고 연남생은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자치통감』 권200). 누경(婁敬)묘지에 의하면 연남생군을 격파한 글피하력군은 철산진(鐵山陣)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철산진은 평안북도 철산군으로 비정된다(이민수, 2022a).
소정방과 함께 행군대총관급에 해당하는 글필하력이 압록수전에 투입된 이유에 대해서는 요동 방면과 평양의 고구려군이 서로 연계하는 것을 차단하고(김용만, 2004) 보급기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645년 전쟁에서 당의 수군이 산동-고대인성-비사성-건안성으로 이어지는 해상 보급로 확보에 실패한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고자 새로운 보급기지의 후보로 요동과 평양의 중간지대인 압록수 방면을 선택한 것이다(이민수, 2021).
이들을 수군으로 본다면 육로로 진격한 당군은 누구이며, 실제 요동에서의 전투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정사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에서 발견된 고구려 유민인 고을덕(高乙德)의 묘지명에 따르면, 귀단도사(貴端道史)였던 고을덕은 661년 전투에서 생포되었다고 하였다. 귀단성은 일반적으로 요동 방어의 요충지인 신성으로 본다(池內宏, 1960; 田中俊明·東潮, 1994). 이와는 달리 657년 당과 고구려가 전투를 벌였던 귀단수전투에서 귀단성과 신성이 달리 쓰였던 기록을 토대로 귀단성이 신성 권역의 6개 성 중 한 곳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이민수, 2022a). 신성과 관련된 귀단성의 도사인 고을덕을 생포하게 된 정황은 당군의 신성 공략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이민수, 2021). 한편, 고을덕이 도사로 있던 귀단성의 병력을 빼내 압록수전투에 투입되었다고 보기도 한다(葛繼勇·이유표, 2015; 이성제, 2015).
또한, 이 전쟁에 참여했던 당 장수의 묘지명이나 당대 편찬된 문집을 통해 요동성과 신성, 부여성에서 전투가 있었음을 밝히기도 했다(이민수, 2021). 우선 당대에 편찬된 『집신주삼보감통록(集神州三寶感通錄)』에는 설인귀(薛仁貴)가 이 전쟁에 참여했으며 요동 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661년 10월경 낙양에 있었다는 기록(『신당서』 설인귀열전)으로 인해 이 문집에서 날짜를 혼동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면서도 모종의 이유로 장수가 교체되어 귀국했을 것으로 보았다. 또한 남곽생묘지명에서 남곽생이 661년 낙랑도를 통해 고구려를 정벌하자 구제(九梯)와 숙신(肅愼)이 고시(楉矢)를 바쳤다고 한다. 정사 기록에는 누락되었지만 낙랑도행군이 읍루, 숙신의 후신으로 인식된 말갈과도 전투를 치렀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주로 말갈이 요동 방면의 전투에 동원된 사례를 들어 남곽생이 속한 낙랑도행군도 요동 방면으로 진군했다고 보는 것이다.
정명진이 이끄는 누방도행군의 전장은 알 수 없다. 650년대 중후반 당의 동방 진출 거점인 영주(營州)도독 겸 동이도호(東夷都護)였던 이력으로 볼 때, 정명진은 영주를 경유해 신성으로 진군했을 것이다(이민수, 2021). 정명진은 662년 누방도행군총관을 마지막으로 역임하고 죽었다(『구당서』정무정열전). 그의 열전은 없고 자식인 정무정의 기록에 흔적을 남긴 것으로 보아 전쟁터에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김용만, 2004).
회홀 등을 거느리고 출정한 부여도행군총관 소사업 역시 요동 방면으로 진군한 것으로 보인다. 행군명처럼 부여성으로 진군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이민수, 2021). 당이 부여도행군을 편성한 목적을 고구려와 거란의 연계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기도 한다(김지영, 2011). 이와 달리 소사업이 이끄는 부여도행군이 육로를 통해 압록강으로 진격했다고 보는 견해(김병곤, 2013a)가 있다. 부여도행군은 661년 정월에 선발대로 고구려로 진군했는데, 육로로 요동을 통과하면서 교통로상에 위치한 고구려 산성들을 무시하고 진격하였으며, 압록강에서 방어선을 구축한 남생군의 저지를 받고 후발대로 출발한 글필하력군과 합류했다고 보는 것이다.
아사나충이 이끄는 당군 역시 회군할 때 거란과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부여성 방면으로 진군했을 가능성이 높다(이재성, 2016; 이민수, 2021). 육로를 통해 요동에서 출발하는 당군이나 수군으로 압록강에 진출한 당군 모두의 최종 목적지는 평양성이었을 것이다(이민수, 2021). 당 고종의 칙명에 따라 신라군 역시 평양성으로 모일 예정이었다.
 
2) 고구려의 반격과 당군의 퇴각
성공적으로 시작된 당군의 고구려 공격에 여러 변수가 발생하였다. 신라군은 완전히 진압되지 않은 백제부흥군으로 인해 북진이 막히게 되었다. 더욱이 서부 몽골 일대에 있던 철륵(鐵勒)이 당에 반기를 들면서 대고구려전에 참전했던 많은 당군이 회군해 고구려전선을 이탈하게 되었다.
철륵은 튀르크계 유목종족으로 구성(九姓)철륵이라고도 하며 이전 시대에는 정령(丁零) 또는 고차(高車)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유연의 지배하에 있었다가 다시 돌궐에 복속되기도 하였는데, 646년 철륵의 한 부락이었던 설연타(薛延陀)가 당에 반기를 들었다가 패한 뒤 나머지 부락들이 당에 복속되었다. 그 주요 부락은 15개 정도였으며, 당은 이들 부락을 기미주부로 나누어 연연도호(燕然都護)를 두어 통솔하게 하였다. 현경 연간(656~660)에 발야고(拔野古)가 사결(思結), 복골(僕骨), 동라(同羅)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신당서』회골전).
661년 10월 11일 당 고종은 철륵 공격 조서를 발표하였다. 좌무위대장군 정인태(鄭仁泰)를 철륵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연연도호 유심례(劉審禮)와 좌무위장군 설인귀를 부장으로 삼고, 홍려경 소사업을 선악도(仙萼道)행군총관으로, 우둔위장군 손인사를 부장(副將)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자치통감』 권200). 당은 663년 1월이 되어서야 이들을 완전히 평정할 수 있었다. 이 토벌전에는 글필하력도 철륵도안무사로 참여했는데, 그는 이들을 회유해 스스로 주모자급을 잡아와 목을 벰으로써 이곳을 안정시켰다. 글필하력은 본래 철륵의 한 무리인 글필부 출신으로 632년에 당에 귀순하였다(『신당서』회골전).
특히 이 철륵 토벌전에는 당시 고구려 공격에 참여했던 부여도행군총관이었던 소사업만이 아니라 『신당서』 고종본기에 따르면 좌효위대장군인 아사나충도 장잠도행군대총관으로 참가했다. 아사나충은 행군명의 변경 없이 철륵전선으로 차출되었는데, 이는 당이 철륵전선을 고구려 공격의 연장이라고 인식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민수, 2022a). 이들은 고구려전선에서 곧바로 철륵전선으로 이동하였을 것이다. 그 시기는 당에서 고구려전선까지 조서 내용을 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이나 군대를 이동시키기 위한 재정비 기간을 고려할 때, 10월 말이나 늦어도 11월 초였을 것이다(이민수, 2022a).
또 다른 고구려전선에 있던 글필하력의 이동은 철륵 공격에서의 문제점으로 뒤에 투입되었던 것으로 보아 이보다는 늦게 철륵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그 시기는 해를 넘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철륵으로 인한 일부 당군의 이탈은 당의 대고구려전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고구려에게 유리하게 전개된 정세 변화가 의도된 상황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정황상 철륵이 당에 저항하도록 연개소문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을 가능성이 있다(김용만, 2004; 김지영, 2008; 서영교, 2014a; 이재성, 2018; 이민수, 2022a).
아사나충묘지명에 의하면 아사나충은 철륵 방면으로 철군하는 도중에 거란의 공격을 받았는데, 거란이 ‘도이(島夷)’와 결탁하였다고 하였다. 이 ‘도이’는 고구려를 의미한다(윤용구, 2005; 최진열, 2012). 거란은 660년 이후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당의 대외공격에 동원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김지영, 2011)는 점에서도 고구려와 거란이 결탁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거란은 660년에 당의 지나친 병력 징발로 인해 반기를 들었다가 진압되었지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 고구려와 결탁하였다고 보는 것이다(이재성, 2011).
연개소문은 당에게 제압되었던 거란을 포섭하려는 외교전략을 구사하였을 것이다(서영교, 2014a). 고구려가 거란을 포섭하였다면, 철륵이 당을 공격한 661년 10월 전후로 볼 수 있다(이민수, 2022a). 거란과의 연계는 고구려가 거란의 서쪽에 소재한 철륵 여러 부와도 연계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이민수, 2022a). 반면에 고구려가 거란이나 해 등의 반당 움직임을 적극 활용하지 못했으며, 거란과의 연계가 미친 영향도 제한적이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이성제, 2016)도 제기되었다.
10월경에 소사업과 글필하력 등 요동과 압록강 유역의 당군이 퇴각한 뒤에도, 평양성을 에워싸고 고구려군을 상대하던 소정방 등의 당군은 661년 겨울을 보내야 했다. 이에 대해 철륵과의 전쟁을 위해 퇴각하는 당군이 무사히 돌아가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이미 당의 대고구려전은 마무리 단계인 것으로 보는 견해(김병곤, 2013a)가 있다. 일부 당군의 철군은 당의 대고구려전에 결정적 반전의 계기가 되었는데, 무엇보다 보급 문제가 심각해졌다. 이미 소정방은 10월 무렵 신라의 문무왕에게 군량이 부족하고 전황이 어렵다는 전갈을 보냈다. 더욱이 당 조정에서는 평양의 당군에게 군량을 보내라는 사신을 파견해, 10월 29일에 당의 사신이 신라의 국도인 서라벌에 당도해 있었다. 이는 당의 대고구려전이 마무리되고 있음을 의미하며, 다만 요동과 압록강에서의 철수가 완료될 때까지 고구려군을 잡아놓기 위해서는 군량이 해결되어야 했을 것이다(김병곤, 2013a).
『일본서기』에는 661년 12월에 당군이 운차(雲車)와 충팽(衝輣)을 동원하여 진격했지만 고구려의 반격으로 2개 보루를 함락당하고 2개 요새만이 남았으며, 당군은 추위와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인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는 당군이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과 추위로 인해 사기가 저하되었을 뿐 아니라, 추가적인 병력의 지원이 끊기면서 위기에 처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음 해인 662년 2월 방효태가 이끄는 당군이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크게 패해 방효태를 포함한 아들 13명과 수만 명이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책부원구』에 의하면 방효태는 영남(令南)의 수군을 이끌고 사수(蛇水) 가에 진영을 구축했는데, 연개소문에게 대패하였다. 포위를 뚫고 유백영과 조계숙(曹繼叔)의 진영에 갈 것을 권하자 이를 거절하였다. 연계소문이 재차 공격하자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을 비롯해 죽은 자가 수만 명이었다. 일명 ‘사수전’으로 알려진 이 전투는 사수에서 2차에 걸쳐 치른 전투였다.
사수는 일반적으로 합장강(合掌江)으로 비정하는 견해(津田左右吉, 1964; 이호영, 1997; 노태돈, 2009; 김병곤, 2013a)와 보통강으로 비정하는 견해(손영종, 2000; 김용만, 2004; 이상훈, 2021; 이민수, 2022a)로 나뉜다. 특히 사수를 평양성 서쪽의 보통강으로 추정하면서 당군이 평양성을 포위하기 위해 4곳에 진영을 편성했는데, 서남쪽의 적두산성(赤頭山城), 서쪽의 사수 일대, 북쪽의 병현(竝峴) 일대, 동북쪽의 청암리토성(靑巖里土城)이었을 것으로 보았다(이상훈, 2023). 더불어 방효태의 부대가 평양성 서쪽에, 그 왼쪽에는 유백영 부대가, 오른쪽에는 임아상과 조계숙 부대가 주둔하였으며, 소정방은 마읍산 일대에 주둔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1차 사수전에서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방효태가 데리고 온 향리 자제 5,000명을 죽이는 전과를 거두고 방효태군을 포위하였다. 이때 방효태의 측근이 유백영과 조계숙 진영으로 피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이를 거절한 것으로 보아 유백영과 조계숙은 임아상군 소속이었을 것이다(김용만, 2004; 이민수, 2022c). 『구당서』에서 임아상은 662년 2월 14일 평양의 군영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대총관인 임아상의 부재가 패강도행군의 전열이 와해되는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보는 견해(문안식, 2006)가 있다. 방효태가 패강도행군 소속인 유백영과 조계숙 진영으로 가지 않은 것은 최고지휘관의 부재만이 아니라 그를 구원해 줄 군사적인 여력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이민수, 2022c).
한편, 소정방군이 평양성의 포위를 풀고 철군하자 이 틈을 탄 고구려군이 방효태군을 공격하여 격파한 것으로 보는 견해(김복순, 1986)도 제기되었다. 임아상의 죽음과 방효태군의 전멸은 불과 4일 차이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보아 소정방군의 전멸 가능성도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고구려군의 대공세에 당군이 매우 위기에 빠져있는 상황이었다.
소정방군은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보급품을 건네자 곧이어 철군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구당서』 고종본기에 이 전쟁이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단순히 성과가 없는 것으로 전쟁이 종결된 것만이 아니라 당은 여러 측면에서 손실이 큰 전투였다고 볼 수 있다. 우선 고구려 공격에서 많은 전사자가 나오면서 전력에 큰 손실을 입게 되었다. 방효태와 그가 이끌던 군사들이 모두 전사하였다. 방효태가 힘겨운 싸움 중에도 다른 지원을 받지 못한 것은 이를 지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평양전에 참전했던 임아상의 죽음과도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이민수, 2022c).
또한, 실제 이 전쟁에 참여했던 주요 장수 가운데 정명진 역시 그의 아들의 열전에서 누방도행군총관을 마지막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정명진도 이 전쟁에서 전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김용만, 2004; 김영관, 2009a; 서영교, 2022b; 이민수, 2022c). 정명진은 요동전선에 파견된 것으로 보이며, 다른 기록에 요동전선에서의 전황에 대한 기술이 보이지 않은 것에서도 이곳에서의 전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645년 당 태종의 고구려 공격이 실패한 뒤 당에서 고구려와의 전쟁을 준비했던 것처럼, 고구려에서도 당과의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이를 방어하기 위한 요동방어망은 더 견고해졌을 것이다(이민수, 2021). 고구려 최후의 전쟁이었던 666년에서 668년까지의 전쟁에서 신성은 당군의 공격에 7개월간을 맞서 싸웠다. 또한 평양성이 함락되고 보장왕이 항복할 때까지도 요동의 주요 성들이 당에게 함락되지 않고 굳건하였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당시 고구려가 요동 방어에 많은 힘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이민수, 2021).
662년 7월에 당 고종은 옛 백제땅에 주둔 중인 당군에게 평양성을 공격하던 당군이 철군하였으니, 신라에 들어가거나 철군해도 좋다는 조서를 내렸다(『자치통감』 권200). 유인궤의 반대로 철군하지 않았지만, 패전의 여파가 백제 고지에 주둔한 당군의 철군을 논의할 정도로 컸기 때문이었다(이민수, 2022b).
또한, 어내전(御內殿)의 시신(侍臣)은 고종에게 해동의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이 노역으로 몹시 고통받고 있으며, 탐욕스러운 관리들의 비리가 극심함을 설파하였다. 더욱이 고구려와의 계속된 전쟁으로 멸망한 수를 당의 현 정국에 빗대는 현상까지 나오고 있음을 고종에게 전하였다. 그리고 한 무제의 대외원정으로 경제가 피폐해졌음을 상기시키며 함선 건조를 중지하라고 간언하였다(『책부원구』 제왕부142 미병). 663년 8월 27일에 고종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위해 오랫동안 진행해오던 36주의 선박 건조를 중지하는 조서를 발표하였다. 또한 관리를 10도에 보내 백성들의 병고를 묻게 하고 관리들을 내치거나 승진시키는 등 내치 안정에 주력하였다(『자치통감』 권200). 이는 당이 민생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전쟁 실패의 후유증을 심하게 겪었기 때문이었다(김용만, 2004).
지금까지 당의 대고구려전은 태종을 중심으로 이해하거나 무황후의 행적으로 보는 측면이 있었다. 이를 비판하며 2차 고당 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고종 대의 정치상황 변화와 연계시켜, 이 전쟁을 ‘황권제일주의’에 입각하여 황제의 독존적 위상을 확립한 고종 중심의 현경(顯慶) 정국의 종점이자 무주(武周)혁명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제공한 중대한 정치적 의의를 담고 있는 사건으로 보는 견해(장창익, 2021)가 제기되었다.
한편, 당과 신라는 백제부흥군과의 전쟁에서 성과를 보았다. 선박 건조 중지 조서를 발표한 다음 날인 663년 8월 28일 백제부흥군과 왜의 연합군을 백강에서 대파하였으며, 9월 1일에는 주류성(周留城)을 함락하였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임존성(任存城)을 함락함으로써 백제 고지를 평정하였다. 백제 부흥운동에 고구려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했던 이유를 당과의 전쟁에 대비해 요서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에서 찾기도 한다(이민수, 2022b).
반면에, 당은 고구려 공격을 재개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구자(龜玆)가 반기를 들어 12월에 평정해야 했으며, 토번(吐蕃)이 날로 강대해지면서 그 영향력이 서역과 서돌궐에까지 미치고 있었으나, 당은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다(정병준, 2013). 한편, 당의 번병으로 대고구려전에 투입되었던 거란과 해는 고구려가 멸망하기까지 더이상 당군 편에서 활약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김지영, 2011). 오히려 666년 연개소문의 죽음 이후 그 후계자인 남생이 휘하의 병사들과 함께 거란병과 말갈병을 거느리고 당에 귀부하였다. 이로 보아 당시 거란이 말갈과 더불어 고구려 군사력의 일부였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고구려는 650년대에 거란의 주 거주지였던 요서 지역에서 당과 군사적으로 충돌하였다. 결국 요서 지역에서 당군의 우세가 2차 고당전쟁을 위한 전초전이었다면, 전쟁에서 당이 또다시 패배하게 되면서 요서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우위가 확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상황이 고구려의 영역에 대해 『구당서』와 『신당서』에 서북쪽으로 영주에 이르며 동서의 거리가 3,100리라는 기록으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정원주, 2014b). 이처럼 661~662년 전쟁에서 패한 이후 당의 대내외적 상황과 대처로 보았을 때, 당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포기하였을 것이다(김용만, 2004; 정원주, 2014a; 임기환, 2023; 이민수, 2022c).
고구려 역시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전장이 고구려 전역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그 폐해가 적지 않았다. 특히 전쟁 기간에 평양성이 당군에게 몇 개월 간 포위되었으며, 신라군이 북상하여 평양 일대에 이르는 등 방어체계의 허점 또한 노출하였다. 이에 전쟁 직후부터 방어체계 재정비라는 과제와 전후 복구라는 문제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을 것이다(이영재, 2018). 또한 백제의 멸망은 고구려의 군사·외교적인 위기를 가져왔다. 이처럼 고구려와 당 두 나라는 새롭게 전쟁을 치를 계획을 세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두 나라는 군사적 긴장이 어느 정도 해소되고 새로운 관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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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군의 고구려 공격 과정 자료번호 : gt.d_0007_0010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