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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3. 연개소문의 죽음과 자식들의 분열

3. 연개소문의 죽음과 자식들의 분열

661~662년의 전쟁에서 당군이 패한 이후, 고구려와 당 사이에는 군사적 충돌을 자제하면서 외교적으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당 고종은 664년 7월 봉선(封禪) 계획을 발표하였으며, 665년 8월에 고구려 태자 복남(福男)을 보내 시사(侍祠)하도록 하였다, 태자 복남은 665년 10월 당에 입조하여 당 고종을 수행하며, 666년 정월 태산에서 행해진 봉선의식에 참석하였다(『자치통감』권201).
이 제전에는 돌궐, 우전(于闐), 파사(波斯), 천축(天竺), 곤륜(崑崙)을 비롯해 동쪽으로는 고구려·백제·신라·왜가 모두 참가하였다(『책부원구』 제왕부 봉선2). 중국 왕조의 봉선의식은 진 시황제에 의해 처음 시도된 이래 황제가 조정의 문무백관과 더불어 제국의 영향 아래에 있는 제후국, 즉 여러 번국(蕃國)을 거느리고 천하를 통일해 통치에 성공했음을 널리 알리고 하늘에 감사드리기 위해 태산에서 지내는 제사의례였다(하워드 J. 웨슬러 지음, 임대희 옮김, 2005).
당 고종이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의 태자를 봉선의식에 참여하게 하고 고구려에서 태자를 보냈다는 것은 당이 양국 관계의 현안 해결에 필요한 조치를 취했음을 알려준다(이성제, 2019). 이 사건은 두 나라 간 오랜 적대관계의 극적인 전환을 의미하는데, 당이 기존의 강경책이 아닌 고구려와의 공존을 위한 관계 개선으로 전환했다고 볼 수 있다(이민수, 2022c). 당이 고구려에 대한 전략을 전쟁보다는 외교에 의한 복속으로 전환했다고 보거나(김영하, 2000), 혹은 당이 고구려 태자의 봉선의례 참여로 고구려에 대한 무력도발을 철회하고자 하였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채미하, 2017).
이처럼 고구려와 당 사이에 새로운 관계 변화가 보이는 가운데 666년 당과 고구려의 세 번째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5월에 연개소문이 죽고 장자인 연남생이 막리지(莫離支)가 되었지만 동생들과의 불화로 당에 구원을 요청했다. 당은 6월 7일에 우효위(右驍衞)대장군 글필하력을 요동도안무대사(安撫大使)로 삼아 연남생을 구원하게 하였다(『자치통감』권201).
이렇게 시작된 전쟁은 668년 9월 국도인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 멸망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의 배경과 사건 전개 과정에 대한 이해는 연개소문의 사망시점과 연남생이 권력을 승계한 시점, 연남생 형제들이 분열한 시점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시작된다. 이는 고구려 태자 복남을 당의 봉선의례에 파견한 주체를 누구로 볼 것인가와 연관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이 시기 고구려의 정치상황과 대외정책을 바라보는 시각과 연계되어 있다.
연개소문의 사망시점에 대해서는 663~ 666년으로 다양하게 논의되고 있다. 먼저 『자치통감』 기록을 토대로 666년 5월로 보는 것이다(김현구 외, 2004). 『구당서』나 『신당서』, 『책부원구』등의 중국 측 사료에는 위 모든 내용이 건봉 원년 6월조에 기재되어 있다. 한국 측 사료인 『삼국사기』에도 연개소문의 죽음과 연남생의 태막리지(太莫離支) 취임 그리고 형제들과의 권력다툼으로 인한 내홍이 모두 666년 기사에 실려 있고, 6월조에 연남생을 구원하기 위한 당군의 파견이 기술되어 있어, 그의 죽음이 666년에 발생했다는 견해(지배선, 2006)를 뒷받침하였다.
그러나 666년 5월에는 연개소문의 죽음이 국제사회에 공인되었을 뿐이며(방용철, 2018), 시간 배분이라는 측면(連劭名, 1999)에서도 문제가 제기되었다. 연개소문의 죽음과 탈상, 연남생의 권력 승계와 형제 간의 갈등으로 촉발된 내분, 여러 차례에 걸쳐 행해진 대당 구원 요청 및 내전, 그리고 당군의 출병이라는 여러 사건이 5월에서 6월이라는 기간 내에 발생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연개소문의 죽음을 664년 10월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665년설이 제기되었다. 『일본서기』 기사에 1년 정도의 착오가 있다고 보고 연개소문이 665년 10월에 사망했다고 보는 것이다(池內宏, 1960). 『일본서기』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해 664년 10월에 연개소문이 사망했다고 보기도 한다(연민수 외, 2013).
천남생묘지명에 의하면 연남생은 28세에 막리지 겸 삼군(三軍) 대장군이 되고 32세에 태막리지가 되었다고 한다. 태막리지를 “군국(軍國)을 총괄하는 아형원수(阿衡元首)”라 하였는데, 이는 군사와 국사를 모두 관장하는 재상이자 통치권자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고구려의 국권을 장악했던 연개소문의 권력을 연남생이 차지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더욱이 “선조의 유업(遺業)을 이으니 선비들이 알고 진심으로 따랐으며, 위태로운 나라의 권력을 잡으니 논박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표현에서도 부친의 권력을 승계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연개소문의 사망과 연결 지을 수 있다. 연개소문이 아버지인 연태조(淵太祚)의 사망 후 권력을 잇는 과정에서 국인들의 반발에 직면했던 상황과는 달리 표현되었지만, 부친의 사망에 따른 권력 승계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이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했던 661년 전쟁에서 압록강 방어에 나섰던 연남생은 당시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이었다(천남생묘지명). 이 당시 연남생의 나이가 28세이므로 32세가 되는 해는 665년이다. 이해에 연개소문이 사망하고 그의 권력을 이어 연남생이 태막리지에 오른 것이다(池內宏, 1960; 이홍직, 1971; 정원주, 2013; 김진한, 2016).
한편, 연개소문이 죽은 후 곧바로 연남생이 부친의 직위를 계승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이므로, 고구려의 최고 권력자였던 연개소문의 죽음에 따른 장례 절차를 고려하기도 한다. 3년상을 고려해 663년 10월로 보는 설(김용만, 2003; 이민수, 2024)과 664년 10월로 보는 설(서영교, 2015b)이 있다. 한편, 당시 고구려의 대외적 상황에 의해 장례절차가 생략되었다고 보고 665년설(김진한, 2016)에 힘을 싣기도 한다.
연개소문의 사망시기는 연남생이 권력을 승계한 시점과 형제 간의 권력다툼으로 고구려 국내가 분열된 시점과도 연결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연개소문이 사망한 뒤에 연남생이 권력을 이은 것으로 보지만, 연개소문의 병환 중에 권력을 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또한, 연개소문의 죽음을 둘러싼 논의는 고구려 태자의 봉선의식 참여를 주도한 정치세력을 누구로 볼 것인가와도 연계되어 있다. 이는 당시 정국을 주도했던 인물을 누구로 볼 것인가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데, 여기에는 연개소문의 사망시점은 물론 그의 아들 간에 권력을 두고 벌어진 내전 발발 시기를 언제로 보는가와도 연결되어 있다.
우선 연개소문의 사망을 665년 10월 무렵으로 보는 경우, 고구려 태자의 봉선의식 참여가 연개소문 주도로 추진되었으며, 그 후속 문제들이 연남생에게 주어졌다고 본다(이성제, 2019). 특히, 이 봉선 의식에의 참여를 통해 고구려가 의도했던 양국 관계는 당군의 재침 여부에 대한 적절한 조치로, 당은 이를 통해 고구려의 봉선의식 참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이는 외신(外臣)으로서 보장왕의 지위를 통해 조공·책봉관계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한편, 연개소문의 사망연도는 665년이지만, 구체적인 시점은 태자 복남이 당으로 파견된 이후로 파악하는 견해(여호규, 2018)가 있다. 태자 복남을 당에 파견한 것은 연개소문의 마지막 외교적 움직임으로 볼 수 있으며, 고구려가 태산 봉선을 계기로 당과의 화친을 모색했다고 보는 것이다.
연개소문의 사망을 665년 10월 이전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봉선의식 참가가 그의 죽음 이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해서 권력을 승계한 연남생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김수태, 1994; 김영하, 2000; 拜根興, 2002; 정원주, 2013; 서영교, 2015b; 채미하, 2017; 김진한, 2016; 방용철, 2018). 태자 복남의 입조가 665년 10월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을 때, 연개소문이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병이 깊어 이미 연남생에게 권력이 넘어간 상태였기 때문에 역시 연남생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연남생을 파견 주체로 보는 이유는 그가 동생들에게 권력을 잃고 결국 당에 망명하는 선택을 하면서 고구려 멸망에 적극 기여했다는 사실과 천남생묘지명에서 “공은 내심 내관(內款)을 생각하였으나 일이 중앙에서 집권적으로 되지 않아, 바야흐로 나가서 변방의 백성을 위무하고 밖으로 황전(荒甸)을 순시하였으니, 우이(嵎夷)의 옛 땅을 살펴 희중(羲仲)의 새로운 관직을 요청하고자 하였다”라는 구절을 통해서였다. 그러므로 그가 권력을 이은 후 지방 순시를 떠난 목적이 당과의 관계 개선을 염두에 두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을 회유하기 위해서였다고 보는 것이다. 연남생은 661년 압록강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그 지도력을 의심받고(이문기, 2008; 이강래, 2015), 집권층 내에서 책임론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당으로부터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받아 권력기반을 강화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김수태, 1994; 김진한, 2011).
연남생 형제들의 불화로 내전이 일어난 시기를 태자 복남의 파견시기보다 이전에 발생된 사건으로 보는 경우에는 남건과 남산이 파견 주체이며(서영교, 2015b), 보장왕이 이에 동참한 것으로 보았다. 보장왕을 파견 주체로 보기도 하는데, 여기에 동조한 세력을 연남생으로 보는 경우와 남건과 남산으로 보는 경우로 나뉜다. 먼저, 연개소문 사망 이후 왕권을 회복한 보장왕이 당과의 적대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추진하였으며, 연남생은 국내의 정세 변화에 따라 보장왕의 온건책에 동조한 것으로 보았다(김영하, 2000). 이는 보장왕 또는 구 귀족세력을 상대로 당이 벌인 공작으로, 봉선의식 참여를 통해 고구려 내부의 갈등을 획책하였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보장왕이 연남생 형제의 갈등을 조장하였으며, 연남생을 축출한 뒤 남건, 남산과 함께 대당외교를 추진했다는 것이다(정원주, 2013). 보장왕이 당의 봉선의식에 태자 복남을 보낸 것은 왕권 회복을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정원주, 2014a).
이와 달리 당 측천무후는 고구려의 내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집권을 천명할 수 있는 봉선에만 집중했다고 보기도 한다(서영교, 2015b). 한편, 당이 신라, 백제와 맺은 취리산회맹(就利山會盟)을 백제의 옛 영토를 지배함으로써 신라를 견제하고 고구려 공격의 전진기지로 삼으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보고, 이를 통해 고구려를 압박하면서 봉선의례 참여를 유도했다고 보는 견해(채미하, 2017)도 제기되었다.
연남생이 당에 구원을 요청하게 된 배경이 된 형제 간의 다툼은 연개소문의 죽음 이후 그의 권력을 이은 연남생이 지방 순시를 떠나면서였다. 그의 묘지명에 따르면 그는 태막리지에 올랐다고 한다. 이는 막리지에 ‘태(太)’를 가호한 것으로서 관등으로는 태대형(太大兄)에 해당한다(이문기, 2003). 그는 국정을 맡게 되면서 지방의 여러 성을 순행하였는데, 그 아우인 남건과 남산에게 수도에서의 뒷일을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의 순행 목적은 지방의 반대세력 회유와 자신의 새로운 세력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임기환, 1992; 이문기, 2008).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때 두 동생에게 연남생이 그들을 제거하려는 속셈이 있으니 먼저 계책을 세워야 한다며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 연남생에게도 두 동생이 형이 자신들의 권력을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돌아오지 못하게 할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에 연남생이 두 동생을 살피기 위해 몰래 평양으로 사람을 보냈는데, 남건과 남산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남건과 남산은 왕명으로 연남생을 수도 평양으로 불렀으나 연남생은 두려워하며 돌아가지 못하였다. 남건은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내어 그를 토벌하였다.
『일본서기』에도 두 아우가 측근 사대부들의 꾐을 듣고서 연남생을 성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고 하였다. 이처럼 연남생 형제 사이의 다툼에는 또 다른 세력이 개입되어 있었다. 그 세력을 연개소문의 권력 독점에서 소외되어 온 귀족세력으로 보고 연개소문 사후에 일을 도모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기백·이기동, 1982; 김미경, 1992; 지배선, 2006)가 제기되었다. 특히, 대당정책을 둘러싼 국내 정치세력 간의 대립으로 형제들 간의 난이 일어났다고 보았다(김수태, 1994; 김진한, 2016).
한편, 연씨가 내부의 인물로 권력에 대한 야심을 품은 연정토(淵淨土)와 왕권 회복을 획책하는 보장왕의 동맹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였다(정원주, 2014a). 이와 달리 연개소문이 사망하기 전부터 후계 구도를 둘러싸고 연남생 형제 간에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이문기, 2008). 이러한 내분의 국제적 배경으로서 고구려 태자인 복남의 당 봉선의식 참여를 획책하여 분열을 가속화하려는 당의 공작이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김영하, 2000)도 제기되었다.
연남생 형제 간의 내분 발생시기에 대해서는 『자치통감』을 비롯한 중국 측 기록과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일반적으로 666년으로 본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연남생의 구원을 위한 당군의 파견이라는 사건을 기점으로 개별적인 여러 사건을 하나로 정리하였다는 점에서 이를 달리 바라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천헌성(泉獻誠)묘지명에서는 연남생의 장자인 헌성이 연남생을 따라 순행길에 나섰으며 남건, 남산의 흉악함이 미쳤을 때 그의 나이가 열여섯이었다고 하였다. 또한, 헌성은 691년 2월 4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출생년은 649년이므로 연남생 형제 간의 다툼이 있었다는 16세는 665년이라는 것이다(連劭名, 1999; 서영교, 2015a). 반면, 『신당서』나 『자치통감』에서는 연헌성이 모함을 받아 692년 1월에 죽었다고 전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출생연도는 651년이므로 내분 발생시기를 666년 초로 보는 견해를 뒷받침하였다(김진한, 2016).
천남생묘지명에 의하면 그는 격문을 사방으로 보내 동맹세력을 불러 오골(烏骨)의 교외에 이르러 평양으로 진격하고자 하였다. 또한, 대형(大兄) 불덕(佛德)을 당 조정에 보내 일의 전말을 알리고자 하였으나 이반이 있어(屬有離叛) 머무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연남생 형제들의 다툼은 내전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 ‘屬有離叛’에 대한 해석을 연남생이 불러 모은 동맹세력에서 이반이 있어 불덕이 당에 파견되지 못하였다고 보는 견해(지배선, 2006; 김진한, 2016)와 불덕이 고구려로 돌아오지 못하고 당에 체류하게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즉 ‘屬有離叛’을 이반에 속하는 일이라 당에서 받아주지 않아 당에 머무르게 되었다고 해석한 것이다(이홍직, 1971).
대형 불덕을 통해 당에 구원을 요청하는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남건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쫓기게 되자 연남생은 현도의 성(玄免之城)에 웅거하게 되었다. 이때 연남생이 달아난 곳에 대해 『자치통감』, 『구당서』, 『신당서』 등 중국 측 문헌에서는 국내성(國內城)으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별성(別城)이라 하여 일반적으로 국내성에 웅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노태돈, 2009; 김진한, 2016; 방용철, 2017). 반면, 현도의 성을 645년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 시 이적(李勣)이 이끄는 당군이 신성(新城) 공략에 앞서 요수(遼水)를 건너 공격한 현도성으로 보는 견해(김용만, 2003; 정원주, 2014a; 서영교, 2021; 오진석, 2021)가 있다.
이에 대해 묘지명에서 보이는 요동, 해북(海北), 현도 등의 지명이 특정 지명을 가리키기보다는 고구려 영역에 대한 관용적인 표현으로 보아야 하며, 667년 연남생이 국내성 유력자들과 함께 당에 입조했을 때 ‘현도군공(玄菟郡公)’에 봉해진 사실 등을 들어 국내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임기환, 2022b)가 제기되었다. 그리고 동생들에게 쫓긴 남생이 국내성을 근거지로 삼은 이유에 대해 국내성 지역의 정치세력이 평소에도 평양의 중앙권력과 대립적이었기 때문으로 보았다(임기환, 2022a).
연남생의 아들인 헌성의 묘지명에서는 “손꼽아 적을 헤아리고서 맞서 싸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고 하여 당시 연남생이 처한 위기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정원주, 2023). 이때 헌성은 국내성에 의탁할 것을 권유하는 한편 당에 병력을 요청하는 사신을 입조시켜 함께 연합해 남건 등을 토벌할 것을 권유하였다고 한다. 국내성에 머물면서 연남생은 다시 대형 염유(冉有)를 당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건봉 원년인 666년 또다시 아들 헌성을 당에 입조시켰다(천남생묘지명).
「좌무위장군성안자최헌행장(左武衛將軍成安子崔獻行狀)」에 따르면 당 고종은 사자가 계속해서 이어지자 최헌(崔獻)을 국내성으로 보내 연남생에게 영접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시자(侍子)를 당 장안에 입궐하도록 하였다(『전당문』 양형7). 이는 연남생의 계속적인 청병 요청에 당 고종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최헌을 보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시자는 헌성을 가리키며, 최헌은 헌성의 입조와 고구려성의 투항을 청병에 대한 조건으로 내걸었을 것이다(김진한, 2016). 이로써 고구려 최고 권력자였던 연남생의 구원 요청이 받아들여지면서 글필하력을 요동도안무대사로 하는 당군이 고구려로 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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