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연남생의 투항 및 고구려 지배층의 동향
4. 연남생의 투항 및 고구려 지배층의 동향
666년에 시작되어 668년 9월 고구려의 국도인 평양성이 함락되기까지 약 2년여에 걸친 고구려와 당의 전쟁은 3차 고당전쟁이자 최후의 전쟁으로 그 결과는 고구려의 멸망이었다. 이 전쟁의 시작은 연개소문을 이어 최고 집정권자가 된 연남생이 당에 구원을 요청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전쟁 과정에 대한 기록은 소략할 뿐 아니라 전황의 공백이 많으며, 무엇보다 각 사서기록 사이에 충돌되는 부분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이 전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도 빈약할 뿐 아니라 연구자마다 전쟁 과정을 달리 기술하고 있다(임기환, 2022b). 또한, 이 전쟁에서 승리한 당과 신라 측의 입장에서 쓰여진 기록으로 인해 전쟁 진행 과정마저도 서로 뒤섞여 있어 사건 발생시기와 상황을 추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에 따라 먼저 666년 6월 연남생의 구원 요청에 의해 파견된 당군이 연남생과 합류하는 시점이 언제였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더불어 남생과 함께했다던 소자하 유역의 남소성, 목저성, 창암성 등의 투항 및 공략 과정에 대해서도 다루고자 한다. 다음으로 666년 9월에 방동선이 고구려군과 접전해 이겼다는 전투는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다. 마지막으로 연남생의 당 귀부가 언제였으며 이로 인한 고구려 지배층의 동향에 대해 지금까지 연구결과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연남생의 구원 요청과 당군의 파병
666년 6월에 연남생이 내부(內附)를 청하자 당에서는 우효위대장군 글필하력을 요동도안무대사로 삼아 군사를 인솔해 연남생을 구원하게 했다. 요동도행군총관으로는 방동선(龐同善)과 영주(營州)도독 고간(高偘)을 파견하는 한편 설인귀와 이근행(李謹行)을 후속부대로 뒤따르게 하였다(『신당서』 고종본기). 연헌성을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으로 삼아 길을 인도하게 하였다(『자치통감』 권201). 천남생묘지명과 『신당서』 천남생열전에 의하면 당 고종이 연남생을 평양도행군대총관 겸 사지절(使持節) 안무대사로 제수하고 고구려 병사(蕃兵)를 거느리고 함께 경략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이 공격군의 규모와 파견 시기 및 경로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9월에 방동선이 고구려군과 접전을 벌여 승리했다는 기록만이 전한다. 『신당서』 고종본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기록에 따르면 방동선이 이끄는 당군은 고구려군을 크게 쳐부수고 연남생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당에서는 연남생에게 특진(特進)요동대도독 겸 평양도안무대사를 제수하고 현도군공에 책봉했다. 기록에 따른다면 당군과 연남생이 합류한 시기는 666년 9월로 볼 수 있다(노태돈, 2009; 정원주, 2014a; 김진한, 2016; 서영교, 2021). 그러나 이 기사들은 시간을 구분하지 않고 발생한 사건과 그 결과에 중점을 두어 9월 기사에 모두 함축해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각 사건을 개별적으로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 기록은 ① 방동선과 고구려군의 접전, ② 연남생과의 합류, ③현도군공으로 책봉하는 세 기사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방동선이 승리한 전투는 여러 기록에 언급된 것으로 보아 666년 파견된 당군의 최대 전과이자 이후 당의 대고구려전을 결정 짓는 주요한 전투였을 것이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이때 참전했던 당군의 장수인 글필하력과 설인귀의 열전을 통해 당시 이들의 행로를 살펴보겠다.
『구당서』 글필하력열전에서 요동도행군대총관 겸 안무대사가 된 글필하력의 이동경로가 ⓐ요수(遼水)에서 주둔해 있던 15만 명의 고구려군을 격파한 뒤 ⓑ말갈 수만 명이 웅거해 있던 남소성(南蘇城)을 깨뜨리고 ⓒ7개의 성을 함락한 후, ⓓ압록수에서 이적이 이끄는 당군을 만나 ⓔ욕이성(辱夷城)과 대행성(大行城) 2성을 함락한 후 ⓕ평양성에 이르고 있다. 이적이 압록수에 이른 것은 다음 해인 667년 신성을 함락한 9월 이후였다. 따라서 ⓐ~ⓒ까지의 전황은 666년에서 667년 9월 이후 압록수에서 이적의 군대와 합류할 때까지라 할 수 있다. 이동경로는 요수에서 남소성을 따라 압록수에 이르는 길이다. 남소성은 천남생열전에 연남생과 함께 귀순하였던 세 성 가운데 하나임에도 글필하력은 남소성을 공격해 함락했다고 하여 기록의 모순을 보인다.
『구당서』 설인귀열전을 통해 전쟁의 경과를 살펴보면, ㉠연남생을 맞이하기 위해 파견된 방동선을 연남건이 국인(國人)을 거느리고 맞받아 공격하자 설인귀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후원하도록 조칙을 내렸으며, ㉡방동선 등이 신성에서 고구려군의 습격을 받자 설인귀가 구원하였고, ㉢금산(金山)에서 방동선이 고구려군에게 패하자 설인귀가 측면에서 공격해 대승을 거둔 뒤, ㉣남소·목저(木底)·창암(倉巖) 등 3성을 함락한 후 연남생과 합류하였다. 이 열전에 따르면 666년 고구려로 진격한 당군이 연남생과 합류하기까지 여러 번 고구려군과의 충돌이 있었으며, ㉡, ㉢은 방동선의 패전이었고, ㉠은 고전하고 있던 방동선군을 설인귀가 후원했다고 하여 실제 전황은 알 수 없다.
이 기록에 글필하력열전을 대입해보면 당군과 남건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처음 교전한 곳이 요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정원주, 2023). 글필하력이 남건이 이끄는 15만 명의 고구려군을 격퇴한 시기에 대해 667년 신성전투가 진행되던 시기로 보는 견해(서영교, 2021)가 있지만, 이적군이 요수에서 15만 명에 이르는 고구려군의 저항을 받았다면 2월에 신성에 도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정원주, 2023). 설인귀의 경로를 보면, 요수-신성-금산-남소성 등 3성-연남생과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열전이 주인공의 공적을 위주로 작성되었다는 특수성을 감안한다면 당군과 고구려군이 접전한 요수전은 설인귀가 참전한 계기에 해당하고 ㉡신성에서의 전투와 ㉢금산에서의 전투는 설인귀의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주기 위해 쓰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신성과 금산에서 설인귀의 활약은 『자치통감』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9월 신성 함락 기사 뒤에 언급되어 있다. 이 신성에서의 당군에 대한 기습은 667년 9월 신성을 함락한 뒤 총사령관 이적이 당의 주력군을 이끌고 떠나자 연남건이 고구려군과 말갈군을 동원해 신성 탈환을 시도한 것으로 보고 있다(노태돈, 2009; 서영교, 2021).
반면에 신성에서의 당군에 대한 기습과 금산전투, 그리고 남생과의 만남이 2월에서 신성이 함락된 9월 사이의 일로 보는 견해(정원주, 2023)가 있다. 방동선과 글필하력은 2차로 파병될 때 요동도행군부대총관 겸 안무대사로 참전했다. 행군대총관의 임무는 이적이 대신하게 되었지만, 부대총관으로서 이전 안무대사의 임무는 여전히 그들에게 주어졌다. 이들의 임무는 666년 1차로 파병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남생을 지원하는 동시에 그와 합류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특히 이 전쟁의 명분이자 승리를 위해서는 남생의 확보가 가장 우선시되어야 했으므로 신성이 함락되는 9월까지 미뤄지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설인귀의 가장 큰 공적은 금산전투였다. 설인귀열전에 의하면 당 고종은 설인귀에게 금산전투의 공훈을 칭찬하는 친필로 쓴 칙서를 내렸다고 한다. 금산전투에서 설인귀는 고구려 병사 5만 명의 목을 베었다고 할 정도로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군사전략적으로도 의미가 큰 전투였다. 이러한 전략적 가치로 인해 666년 9월 방동선이 승리한 전투를 금산전투로 보기도 한다(임기환, 2022b). 그러나 이 전투는 방동선이 패한 뒤 설인귀가 세운 공적이며, 대부분의 기록에서 667년 전투로 보고 있다.
㉡신성에서 고구려군의 방동선 피습사건과 ㉢금산에서의 전투 모두 667년의 전투로 볼 수 있으며, 모두 방동선이 연관되어 있지만 패배한 전투였다. 따라서 666년 9월 방동선이 승리한 전투는 ㉠연남건이 국인을 거느리고 방동선군과 벌인 전투에서의 성과였으며(김진한, 2016) 이는 ⓐ요수에 주둔해 있던 15만 명의 고구려군과 대치한 전투일 것이다(정원주, 2023).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당 조정에서 고구려와의 전면전을 위해 이적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대규모 공격군을 편성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임기환, 2022b; 정원주, 2023).
한편, 방동선군이 연남생과 합류한 시기를 666년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연남생과 함께 남소성, 목저성, 창암성도 이때 당에 투항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세 성은 소자하 유역에 위치한 주요 성으로 신성에서 국내성으로 통하는 주된 교통로이다(노태돈, 1999). 남소성의 위치는 혼하(渾河)와 소자하(蘇子河)가 합류하는 지점의 철배산성(鐵背山城)으로 비정(佟達, 1994; 여호규, 1995; 기경량, 2016)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신빈현(新賓縣) 서북쪽에 위치한 오룡산성(五龍山城)으로 보기도 한다(佟達, 1993; 정원철, 2017). 목저성의 위치는 목기진(木奇鎭) 일대(箭內桓, 1913; 今西春秋, 1935; 여호규, 1995)가 유력하나 오룡산성(張德玉, 1989; 王綿厚·李健才, 1990)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창암성은 영릉진(永陵鎭) 일대의 두목립자산성(頭木砬子山城)(王綿厚, 1986; 孫進己·馮永謙, 1989) 또는 이도하자(二道河子)의 구노성(舊老城)(張正岩·王平魯, 1994)으로 비정된다.
그런데, 이 세 성은 『자치통감』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667년에 방동선, 고간, 설인귀의 군대가 연남생과 합류할 때 공격해 함락했다고 한다. 이를 합리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연남생이 당군과 합류하면서 국내성을 비롯한 6성과 목저성 등 3성이 함께 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건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탈환되었다가, 667년 다시 당이 공격해 함락했다고 보는 것이다(池內宏, 1960; 노태돈, 1999; 여호규, 1999b; 노태돈, 2009; 정원주, 2014a; 김진한, 2016).
그러나 연남생이 있는 국내성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최전방인 신성에서 소자하 일대의 여러 방어망을 거치는 긴 교통로를 장악해야 하는데, 666년 파견된 당군에 대한 기록에서는 고구려성을 함락했다는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이를 근거로 666년에는 당군이 연남생과 합류할 수 없었으며, 당군은 겨울을 앞두고 당으로 돌아가 다음 해인 667년 이적군과 함께 고구려로 향했다고 보는 견해(임기환, 2022b)가 제기되었다.
『자치통감』에는 연남생이 방동선군과 합류하자 당 고종은 조서를 내려 연남생에게 특진요동대도독 겸 평양도안무대사를 제수하고 현도군공에 봉하였다고 하였다. 『구당서』와 『신당서』 고려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천남생묘지명에서는 “건봉 원년(666)에 헌성을 입조시키니 황제가 연남생에게 특진을 제수하고 태대형을 예전과 같이 하였으며, 평양도행군대총관 겸 사지절 안무대사를 제수하여 그의 군사들을 이끌고 글필하력과 함께 경략을 책임지게 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총장(總章) 원년인 668년에 그를 사지절 요동대도독 상주국(上柱國) 현도군개국공(開國公)으로 봉하고 식읍 2,000호를 주고 나머지 관직은 예전대로 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신당서』 천남생열전에서도 유사하게 기록되어 있다. 즉 특진과 평양도안무대사는 666년에 제수되었지만 요동대도독과 현도군공 임명은 668년 연남생이 당에 입조한 뒤에 책봉된 것이다(정원주, 2023).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연남생의 당 투항이 처음부터 결정된 것으로 보지만 이와는 다른 견해(정원주, 2023)가 제기되었다. 666년 고구려로 진격했던 당군의 총사령관인 글필하력이 요동도안무대사였고, 이때, 연남생에게 내린 직책도 평양도행군대총관 겸 안무대사였다. 당에서 안무대사를 파견하는 것은 돌궐이나 철륵 등 당의 지배체제 안으로 편입된 국가에서의 분쟁을 바로잡고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를 번국으로 보고, 그 질서를 무너뜨린 남건과 남산을 토벌하는 임무의 선봉장으로서 고구려에서는 연남생에게, 당군에서는 글필하력에게 동일하게 안무대사라는 직위를 제수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666년 출병한 글필하력이 이끄는 당군의 가장 우선적인 임무는 연남생과의 합류였으며, 그를 확보함으로써 당이 고구려 국내 문제에 끼어들 수 있는 확고한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연남생이 처음부터 당에 투항을 결심했다고 볼 수 없으며 고구려 국내에서의 위기를 당의 군사적 도움을 통해 벗어나려 했다고 보는 것이다(정원주, 2023).
그리고 천남생묘지명에서 그에게 처음 준 관작으로 “태대형을 예전과 같이 하였다”고 하여 고구려에서 그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는 점도 제시되었다. 연남생은 이후 당군의 공격에 대한 고구려의 저항이 거세지고 더불어 연남생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게 되면서 입지가 좁아지자 귀순을 결심하게 된 것으로 보았다.
2) 고구려 지배층의 이반
연남생의 요청으로 당군이 고구려로 진입하게 되면서 고구려 유력자들의 이반이 시작되었다. 연정토는 666년 12월에 12성 763호 3,543명을 이끌고 신라로 투항하였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6). 『신당서』 고려전에 의하면 연정토는 연개소문의 아우다. 연정토가 투항할 때 함께한 12성에 대해서는 남한강 이북 철령 이남 지역으로 추정(池內宏, 1960)하기도 했으나, 비열홀군(比列忽郡: 현 안변), 천정군(泉井郡: 현 덕원), 각련군(各連郡: 현 회양)에 속한 지역으로, 강원도 북부와 함경남도 남부 일대로 보는 견해(노태돈, 1999; 방용철, 2017; 임기환, 2023)가 일반적이다.
신라의 영역이었던 안변 일대의 비열성 지역은 630년대 말 고구려가 공격해 빼앗았다가 다시 신라가 차지한 곳으로, 그 계기를 연정토가 12성을 들어 신라에 투항한 것에서 찾는다. 당은 고구려 멸망 후 그 땅에 기미주를 설치하여 안동도호부 예하에 두려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삼국사기』 「답설인귀서」에는 당이 비열홀 지역을 신라로부터 빼앗아 고구려에 주려고 한다는 문무왕의 항의가 있었다. 당 측에서 비열홀을 고구려의 옛 영토라고 한 것은 이 지역이 신라의 영역이 된 지 오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연정토가 668년 봄에 당으로 건너가 그곳에 머물렀기 때문이다(노태돈, 1999). 또한, 667년 7월 당 고종이 유인원과 김인태에게 비열도를 따라 징병하도록 명한 일이나, 사신으로 갔던 연정토가 당에서 돌아오지 않자 3월에 비열홀주를 설치한 일을 고려할 때 연정토의 관할범위는 비열홀로 볼 수 있다(방용철, 2017).
연남생이 당에 투항할 때 함께했던 인물도 있었다. 고현(高玄)묘지명에 따르면 고현은 연남생과 함께 당에 귀순하였다가 668년 연남생이 당에 회유되어 고구려전선에 투입될 때 함께 돌아왔으며 평양성 함락전에서 최선봉으로 활약했다고 한다(송기호, 1999). 천남생묘지명에 의하면, 남생은 국내 등 6성 10여만 호의 호적 문서(書籍)와 원문(轅門)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목저 등 3성과 함께 당에 귀순했다고 하였다. 『신당서』 천남생열전에는 가물, 남소, 창암 등의 성을 바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가물성은 요령성 환인의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비정(여호규, 1999)된다. 이로 보아 연남생이 당에 투항할 때, 국내성 권역의 6성과 소자하 유역의 남소, 목저, 창암 등의 유력자들도 당에 투항했음을 알 수 있다. 고현은 이 유력자 가운데 한 명이었을 것이다. 함께 투항했던 이들 가운데에는 고현처럼 전공을 통해 당에서의 지위를 높이려고 고구려전선에서 활약한 인물도 다수 존재했을 것이다.
본격적인 당으로의 투항은 667년 9월에 신성이 함락되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667년 2월에 시작된 당의 공격을 막아내던 신성은 성 사람 사부구(師夫仇) 등이 성주를 결박한 뒤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668년 2월에 부여성이 함락되자 부여주 안의 40여 성도 모두 항복을 청하였다(『자치통감』권201).
또한, 최후의 전장이었던 평양성전에서는 신성(信誠)이 소장(小將)인 오사(烏沙), 요묘(饒苗)와 함께 당군과 내통해 평양성문을 열고 투항하였다. 고요묘(高鐃苗)묘지명의 주인공이 바로 평양성 문을 열어준 소장 요묘와 동일인으로 추정되고 있다(김영관, 2009b). 묘지명에 따르면 그는 종3품의 좌령군원외장군(左領軍員外將軍)으로 673년 11월 11일 사저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그가 받은 관품에 대해서는 입당 직후 받은 관품으로 보는 견해(김영관, 2009b; 이기천, 2014)가 있는 반면에 고요묘가 멸망 당시 신성 휘하의 소장에 불과하므로 그와 동급의 종3품에 제수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견해(이민수, 2018)도 있다.
신성 함락과 부여성 함락 그리고 국내성 권역 성들의 투항으로 당과 고구려는 압록강을 두고 대치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많은 고구려의 유력 인사들의 투항이 이어졌다. 고질(高質)묘지명에 의하면 고질은 고구려가 멸망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형제들과 함께 당 조정에 귀화하였다고 한다. 고질의 자는 성문(性文)으로 고자(高慈)묘지명에 나오는 고자의 부친인 고문(高文)이다(閔庚三, 2007).
고질은 고구려에서 3품인 위두대형(位頭大兄) 겸 대장군의 지위에 있었다. 묘지명에 의하면 그의 증조인 전(前)은 3품 위두대형에 등용되었고, 조부인 식(式)은 2품인 막리지를 지냈으며, 부친인 양(量)은 책성도독 위두대형으로 대상(大相)을 겸하였다고 한다(閔庚三, 2007; 拜根興, 2009). 묘지명에 따르면 고질의 19대 선조 고밀(高密)이 당시 국왕을 도와 큰 공을 세웠으며, 그로 인해 후손이 대대로 재상의 지위를 누리게 된 것이다. 후손에 대한 신분의 보장이 금문철권(金文鐵券)이라는 신표로써 이루어질 정도로 고구려에서 높은 지위를 대대로 이어온 집안이었다(閔庚三, 2009).
고구려 유력자들의 투항은 고구려와 당이 격돌하는 전선과 떨어진 곳에서도 나왔다. 이타인(李他仁)묘지명에 의하면 이타인은 책주(柵州)도독으로 고구려가 멸망할 것으로 생각해 당에 투항할 결심을 하였다고 한다. 책주는 책성(柵城)으로 다수의 백산말갈인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책성욕살이 이들을 별도의 행정적 편제하에 두고 관할했던 곳이다(안정준, 2013). 묘지명에 따르면 12주를 관할하고 말갈의 37부를 통솔하였다고 하였다.
이타인의 투항시기에 대해서는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했던 시기로 보기도 하지만(孫鐵山, 1998; 윤용구, 2003), 최근에는 고구려가 멸망하는 666년에서 668년 설(김종복, 2005; 拜根興, 2010; 안정준, 2013)을 따른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667년 신성 함락 이후부터 668년 부여성 구원 전후로 보는 견해(余昊奎·李明, 2017; 김강훈, 2017)가 있다. 한편, 고구려의 부여성 구원군 패전 소식을 접한 시점에 당에 투항할 것을 결정해 휘하집단을 거느리고 4월경 책성을 떠나 5 ~6월경 요동성 일대에서 이적군에 투항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이민수, 2018).
그는 투항 이후 적극적으로 고구려군을 공격했는데, 석성(石城)의 9번에 걸친 저항에도 결국 항복하게 만들었으며, 평양성 공격에는 ‘도(屠)’라는 단어가 쓰일 정도로 적극적으로 전투를 벌였다. 이는 전공을 세움으로써 전쟁이 끝난 후 논공행상에서 더 좋은 대우와 지위를 받기 위한 것이었다. 이타인은 당으로의 투항 이후 종3품인 우융위장군(右戎衛將軍)이라는 무관직에 제수되어 부여성 일대에서 당에 저항하는 고구려 유민 진압에 동원되었다(이민수, 2018).
이타인이 공격한 석성에 대해서는 단순한 수사적인 문구로 파악해 ‘금진(金陳)’으로 해석하거나(拜根興, 2010) 견고한 요새(안정준, 2013)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와는 달리 특정 성곽을 지칭한다고 보아 백암성(白巖城)으로 파악하는 견해(孫鐵山, 1998), 요동반도 남단에 위치한 성산산성(城山山城)으로 파악하는 견해(余昊奎·李明, 2017), 요동 평원에서 천산산맥 일대로 진입하는 교통로상의 요충지로서 고수산성(姑嫂山城)으로 비정하는 견해(이민수, 2018), 박작성(泊灼城)으로 보는 견해(임기환, 2022b) 등이 있다.
책성도독이었던 이타인의 투항으로 고구려는 후방기지를 상실함으로써 전쟁 지속 능력이 감소되었음과 최후 방어선이 당에게 넘어갔다는 심리적인 타격이 심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김강훈, 2017). 한편, 이타인의 투항은 당군의 최후 공격에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하였는데, 후방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였을 뿐 아니라 이타인의 병력이 말갈병을 통한 상당수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아 당군의 병력을 증강시키게 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이민수, 2018)도 제기되었다.
고흠덕(高欽德)묘지명과 고원망(高遠望)묘지명을 통해 고구려 멸망 즈음에 당에 투항한 또 다른 인물을 알 수 있다. 고흠덕과 고원망은 부자 관계로 이들의 직계 가계는 고흠덕의 증조부인 원(瑗)부터 확인이 되며, 고구려 당시부터 건안주(建安州)도독을 세습하는 유력한 가문이었다(권은주, 2014; 이규호, 2016).
이 건안주도독을 당이 설치한 것으로 보아 입당을 증조인 원이 주도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김현숙, 2004; 程尼那, 2005), 건안주도독 외에 당의 관직을 겸하고 있어 조부인 회(懷)로 보는 견해(바이건싱, 2008)도 제기되었다. 한편, 건안주라는 표현은 고구려 멸망 이후의 표현이므로 당이 설치한 건안주로만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보아 부친인 천(千)의 주도로 당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권은주, 2014). 부친인 천은 당 좌옥검위중랑(左玉鈐衛中郞)이며, 고흠덕은 둘째 아들이고, 고원망은 고흠덕의 장자이다.
고구려가 멸망의 위기에 직면하자 당에 투항함으로써 살길을 도모했던 이들 가운데에는 당시 전황을 고구려에 더 불리하도록 만들었던 이도 많았다. 두선부(豆善富)묘지명에 의하면 두선부는 683년에 태어난 고구려 유민 2세대로 그의 아버지인 졸(卒)(권은주 외, 2015) 혹은 두부(豆夫)(안정준, 2015)는 당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변경 요새의 고구려 장수를 제거하고 일부 주민을 이끌고 당에 귀의했다고 한다. 이로 보아 그는 고구려에 있을 당시에 어느 정도의 정치적·군사적 지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당에 귀부한 뒤 당의 서역 지역에서 기미주(羈縻州) 통치와 관련한 직무를 수행했던 고관이었다. 그가 당으로 귀부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당에서의 활동 내용을 통해 고구려 멸망기로 볼 수 있다(안정준, 2015).
또한, 고모(高牟)묘지명에는 고모의 투항시기가 언급되지 않았지만 666년에서 평양성이 함락된 668년 사이로 볼 수 있다(樓正豪, 2013). 고구려에서 그가 역임한 관직에 대한 기술은 없지만 “평양에서 명망이 높았다”고 하여 평양의 중앙관료였을 가능성이 있다. 긴급문서가 담긴 봉투를 들고 귀순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멸망 시 기회를 틈타 당과 내통하여 중요한 군사정보를 당에 넘겨 공을 세웠을 것이다(樓正豪, 2013). 묘지명이 발견된 고족유(高足酉) 역시 고구려 멸망 직전에 당으로 투항하여 종2품에 해당하는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까지 승진한 인물이다(이문기, 2001; 拜根興, 2001).
남단덕(南單德)묘지명에서 남단덕은 고구려 멸망 후에 태어난 유민 3세대로, 그의 집안은 고구려 멸망 이후 줄곧 안동도호부 지역에 거주하였으며, 조부인 적(狄)은 마미주(磨米州)도독을 지냈다고 하였다. 마미주는 고구려 멸망 후 당이 설치한 14개 기미주 가운데 하나로 고구려의 마미성에 해당한다. 그 위치는 요령성 본계시의 하보산성(下堡山城)으로 비정된다(王錦厚, 2002).
남단덕의 가문은 고구려 멸망 당시 일정한 세력을 거느린 유력가문으로, 그의 조부인 적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안동도호부가 설치되는 과정에서 당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공으로 마미주도독에 임명되었을 것이다(장병진, 2015). 그의 묘지명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설인귀의 증손자인 설기(薛夔)가 작성하였다. 묘지명에서 고구려 멸망 이전부터 설인귀 가문과 남단덕 가문이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안동도호였던 설인귀의 발탁으로 남적이 마미주도독에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김영관, 2017).
『삼국사기』에는 668년 당군이 압록강을 뚫고 욕이성(辱夷城)을 함락한 이후 여러 성에서 도망하거나 항복하는 자들이 이어졌다고 한다. 이 무렵인 6월 22일에 대곡성(大谷城)과 한성(漢城) 등 2군 12성이 이탈해 웅진도독부에 항복하였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8). 이를 웅진도독부의 유인원 군대가 668년 5월 이전에 고구려로 진격하여 항복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견해(임기환, 2023)도 있다. 이 시기 고구려 군민의 항전 의지가 이전에 비해 크게 약화되고 지배층의 이탈이 현저해졌다고 볼 수 있다(이문기, 2008). 668년 4월에 뜬 혜성이 고구려가 멸망할 불길한 전조로 고구려인에게 받아들여져 당으로의 투항이 이어졌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이민수, 2018; 서영교, 2022b).
연남생과 함께 당으로 내투했던 인물들을 제외한 다른 투항자들은 연남생과의 연관성을 언급하지 않았다. 더욱이 연남생을 통해 당에 항복했던 인물들이 누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다. 당에서는 그에게 높은 지위와 수도 장안에 저택을 마련해 주는 등 좋은 대우를 해 주었다. 이러한 사실이 당에 항복해서 공적을 세워 그와 같은 영화를 누리고 싶어하는 고구려인의 마음을 부추기는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