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당의 고구려 고지 지배정책과 유민의 저항
1. 당의 고구려 고지 지배정책과 유민의 저항
668년 12월 당은 고구려 고지에 대한 지배방침을 결정하였다. 5부, 176성, 69만 7,000호로 이루어진 고구려 영역에 당의 지방제도를 도입하여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재편하고 상급통치기관으로 안동도호부를 평양성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그 책임자로 설인귀(薛仁貴)를 검교안동도호(檢校安東都護)에 임명하고 병력 2만 명으로 진수하게 하였다. 한편 고구려 지배층 가운데 공이 있는 자를 부, 주, 현의 장관인 도독, 자사, 현령으로 임명하고, 당 관리가 통치에 함께 참여하게 하였다. 이어서 669년 2월 이적(李勣)과 연남생(淵男生)은 구체적인 재편 계획을 상주하였으며, 당 고종(高宗)은 그 시행을 유인궤(劉仁軌)에게 담당하게 하였다. 당의 고구려 고지 지배정책은 1년여의 준비작업을 거쳐 670년 1월 정식으로 실행되었다(김종복, 2003; 여호규·拜根興, 2017).
당은 귀부한 이민족 부락이나 정복지에 당의 지방제도를 적용하면서 토착 수령에 의한 통치라는 간접지배방식을 취하였는데, 이를 기미지배(羈縻支配)라고 한다(金浩東, 1993). 기미지배에서 현지 유력자는 기미부주현(羈縻府州縣) 장관에 임명되고 그 직을 세습할 수 있는 등 자치적인 성격을 지녔다.
당은 기미지배의 일반적인 원칙을 고구려 고지에 적용하였다. 실제로 고구려 멸망 과정에서 당에 투항하거나 협력하였던 지배층을 발탁하여 기미부주의 장관에 임명한 사례가 최근 발견된 고구려 유민묘지명에서 확인된다(장병진, 2016; 이규호, 2016; 여호규·拜根興, 2017; 조영광, 2018).
부자 관계인 고흠덕(高欽德)과 고원망(高遠望)의 묘지명에 따르면, 그들의 가문은 고원(高瑗)-고회(高懷)-고천(高千)-고흠덕 4대에 걸쳐 건안주도독(建安州都督)을 역임한 사실이 확인된다. 고흠덕이 677년에 태어난 것을 고려하면, 고원과 고회는 고구려 멸망 이전에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들이 역임한 건안주도독은 실제로는 고구려 건안성의 지방관이었다. 따라서 고흠덕 가문은 고구려 멸망을 전후하여 건안성을 다스리는 고구려 지방관과 기미부주 장관을 승습(承襲)하였던 것이다. 또 남단덕(南單德)묘지명에는 남단덕의 가문이 ‘자제 중 으뜸’이며, 남단덕의 조부 남적(南狄)이 안동도호부 예하 마미주(磨米州)의 도독을 역임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이 고구려 유민 중 유력자를 기미부주의 장관에 임명하고 그 직을 세습시킨 대표적 사례다.
그런데 당은 당 관인을 기미부주에 파견하여 고구려 유민 출신 장관과 함께 다스리는 변형된 형식의 기미지배를 시행하고자 하였다(鄭炳俊, 2018). 이러한 기미지배방식이 다른 지역에서도 확인되기에, 고구려 고지에 당의 지배질서가 직접적으로 강요되지 않았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장병진, 2016). 그러나 당 관리는 장사(長史)나 사마(司馬) 등 최고위 속료에 임명되어 고구려 유민 출신 장관을 감시·통제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하였다(김종복, 2003). 또 양현기(陽玄基)묘지명에서 당 관리인 검교(檢校) 동책주도독부(東柵州都督府) 장사 양현기가 고정문(高定問) 등이 주도한 부흥운동을 진압한 사실이 확인된다(김강훈, 2017b). 따라서 고구려 유민의 자치는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였을 뿐이며, 당의 지배력이 직접적으로 발휘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온당하다(盧泰敦, 1981a; 金文經, 1984; 金賢淑, 2001). 이를 당이 고구려 고지에 대해 영역화를 추진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粟原益男, 1979; 김종복, 2003).
다만 모든 지역에 당 관리가 파견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고(津田左右吉, 1915), 양현기의 사례를 참고하면 도독부가 설치된 지역 등 주요 지배거점을 중심으로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당의 계획과 달리 고구려 고지에 9도독부, 42주, 100현이 모두 설치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는 당의 지배정책에 대한 고구려 유민의 반발을 고려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669년 4월 당 고종은 2만 8,200호에 달하는 고구려 유민을 장강(長江)·회수(淮水)의 남쪽과 산남(山南) 및 병주(幷州)·양주(凉州) 서쪽 여러 주(州)의 빈 땅으로 옮기라는 명령을 내렸다. 강제 이주는 다음 달 5월에 곧바로 개시되었다(李丙燾, 1964). 666년 연정토가 763호 3,543명을 이끌고 신라로 투항하였다는 기록에서 1호당 4.64명으로 환산되는 것을 적용한다면, 당의 변경지역으로 강제 이주된 고구려 유민은 최소 13만 명으로 추산된다(李文基, 2010).
당이 대규모 사민을 단행한 배경에 대하여 당의 고구려 고지 지배정책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찾는 견해가 있다. 당이 처음에는 고구려 고지 전체에 기미지배를 추진하였지만, 이를 변경하여 요동 지역에만 당의 지방제도를 적용하고 나머지 고구려 고지는 대규모 사민을 통해 무력화하는 방안을 채택하였다는 것이다(정원주, 2018). 그런데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유민 가운데 이반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강제 이주를 시행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에 항거하는 고구려 유민이 늘어나자, 이를 통제하기 위해 강제 이주를 시행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여호규·拜根興, 2017).
당은 강제 이주 이후 빈약자(貧弱者)들을 남겨 안동도호부를 지키게 하였다. 여기에서 강제 이주의 대상은 안동도호부 통치에 반발하여 이반할 만한 일정 수준 이상의 군사력과 경제력 등을 가지고 있었던 부강자(富强者) 내지 유력자였음을 알 수 있다(이규호, 2016). 강제 이주 대상자로 선별된 고구려 유민은 내주(萊州)와 영주(營州)를 중간 기착지로 하여 당 내지(內地)로 옮겨졌다. 내주는 지금의 산동반도에 있었는데, 평양성 방면의 고구려 유민은 해로를 통하여 내주로 향하였을 것이다. 영주는 지금의 요서 지역에 해당하므로 요동 지역의 고구려 유민은 육로를 이용하여 영주로 이동하였을 것이다(日野開三郞, 1955; 김종복, 2003). 강제 이주가 기본적으로 고구려 전역을 대상으로 실시되었겠지만(정원주, 2018), 이동경로를 고려하면 도성인 평양성과 수·당과 70여 년에 걸친 전쟁의 주무대였던 요동 지역에 거주하던 고구려 지배층과 재지세력이 강제 이주의 주된 대상이었다(盧泰敦, 1981b).
669년 전반 당의 지배에 항거하는 이반자가 존재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당이 대규모 강제 이주를 실시하던 즈음에, 시기가 분명하지 않지만 안동도호 설인귀는 평양성을 떠나 신성(新城)으로 옮겨 고구려 유민을 다스렸다. 신성은 중국 요령성(遼寧省) 무순시(撫順市)에 위치한 고이산성(高爾山城)으로 비정되는데, 고구려 서부 변경의 군사요충지이자 교통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당서(唐書)』 설인귀전에 따르면, 설인귀는 신성에서 고구려 유민을 안무하고 인재를 등용하는 등 적극적으로 통치행위를 하였다고 한다.
설인귀가 평양성에서 요동 지역의 신성으로 이동한 배경에 대하여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다. 고구려 유민의 저항과 이탈로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유지할 수 없었다고 보기도 하고(李丙燾, 1964; 전준현, 1982;梁炳龍, 1997), 669년 9월 토번(吐蕃)의 당 공격에 대응하여 설인귀가 토번 전선으로 투입되는 과정에서 신성으로 옮겨갔다고 파악하기도 한다(徐榮敎, 2002). 그러나 대체로 669년 5월 실시된 대규모 강제 이주를 수행하기 위해 신성으로 옮겼다고 이해하고 있다(盧泰敦, 1997; 임기환, 2003; 김종복, 2003; 여호규·拜根興, 2017; 방용철, 2018).
이는 669년 전반 고구려 고지의 정세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권37, 지리지4의 기록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와 관련된다. 여기에는 669년 2월 당이 고구려 고지를 안동도호부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고구려 원정군 총사령관이었던 이적(李勣)이 당 고종에게 올린 주청문과 당 고종의 조칙 일부가 실려 있다. 그리고 이어서 압록수 이북의 고구려 성을 ‘아직 항복하지 않은 성(未降城)’ 11성, ‘이미 항복한 성(已降城)’ 11성, ‘도망한 성(逃城)’ 7성, ‘공격하여 빼앗은 성(打得城)’ 3성으로 분류하고 각각 해당하는 구체적인 성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다. 이 기록을 ‘목록(目錄)’이라 지칭할 수 있다. 『삼국사기』 권37에 ‘목록’을 인용하며 “압록 이북에 ‘이미 항복한 성’이 열하나인데, 그중 하나가 국내성이다”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기재 순서를 보면 669년 2월 고구려 고지 재편과 관련한 당 조정의 공식 조치를 기록하고, 바로 이어서 압록수 이북 고구려 성의 현황을 기재하고 있다. 따라서 ‘목록’은 고구려 멸망 이후의 상황을 반영한다고 이해하는 입장이 있다(李丙燾, 1964; 李基白·李基東 1982; 전준현, 1982; 金甲周, 1987; 손영종, 1997; 김현숙, 2004).
그에 반해 ‘목록’은 고구려 멸망 이전의 상황을 반영한다는 연구가 일찍이 있었다. ‘아직 항복하지 않은 성’ 가운데 신성이 기재되어 있는데, 당군이 신성을 함락한 시기가 667년 9월이므로, ‘목록’은 그 이전에 작성된 기록에 근거하였다는 것이다(池內宏, 1941). 이를 구체화하여 ‘목록’은 당군이 신성을 포위한 667년 2월에서 신성을 함락하는 667년 9월 사이 작성한 일종의 전황표이며, ‘공격하여 빼앗은 성’이 3개에 불과하므로 개전 초기의 상황이 반영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盧泰敦, 1996). 이 연구는 ‘목록’에 기재되어 있는 각 성의 위치 및 분포범위, 자료의 전승 과정, 고구려 말기 지방제도와의 연관성 등을 치밀하게 검토하였고, 이후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근래 ‘목록’의 작성 시기를 두고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당이 평양을 중심으로 압록강 이남 지역을 먼저 재편하고 뒤이어 진행될 압록강 이북 지역의 부주현 설치를 위해 파악한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고 이해하거나(장병진, 2016), ‘목록’의 항목 설정, 각 항목의 배치, 표기방식 등 작성방식을 중심으로 분석하여, 669년 2월 이적과 연남생이 안동도호부체제를 구성하면서 작성한 1차 현황 보고서로 파악하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방용철, 2018). 한편 ‘아직 항복하지 않은 성’ 가운데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의 지배를 이탈한 경우가 확인된다는 점을 바탕으로, ‘목록’이 고구려 멸망 이후 상황을 반영한다고 해석하며 북부여성주(北扶餘城州: 부여성), 옥성주(屋城州: 오골성), 안시성(安市城)을 사례로 든 연구도 있다. 여기에서는 안동도호 설인귀가 당의 지배를 벗어나 있던 압록수 이북의 고구려 성을 공략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 ‘목록’이라고 이해한다(김강훈, 2018). 만약 ‘목록’이 고구려 멸망 이후 작성된 자료라는 추정이 타당하다면, 669년 전반 신성, 요동성, 안시성, 부여성 등 고구려 주요 성을 중심으로 요동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부흥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나 ‘목록’에서 사용된 용어나 표현에서 고구려 멸망 이후로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예컨대 신성은 667년 9월 당군에 항복하였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아직 항복하지 않은 성’으로 불리기에 어색하다(정원주, 2018). 또 당은 668년 12월에 고구려의 항복을 공식화하였기에, 그 이후에 작성된 문서라면 미항(未降)·타득(打得)보다 반(反)·토(討) 등의 표현이 적절하다(임기환, 2024). 그리고 당의 대응이라는 측면에서도 비판이 있다. ‘아직 항복하지 않은 성’에는 요동 일대 주요 거점이 망라되어 있는데, 669년 전반 요동 지역에서 당의 군사행동이 사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검모잠(劍牟岑)이 안승(安勝)을 왕으로 세우자 당 조정이 곧바로 고간, 이근행을 행군총관으로 삼아 군대를 파견하여 대응한 바와 비교가 된다(임기환, 2022a).
따라서 ‘목록’이 고구려 멸망 이후의 사정을 반영한다고 이해하기에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목록’의 작성 시기에 대해서는 앞으로 면밀한 검토와 논의가 진행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고구려 부흥운동의 시각에서 접근할 뿐만 아니라 고구려 지방제도(정호섭, 2019), 666~668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임기환, 2022b) 등 다각도로 ‘목록’의 내용, 작성 주체와 목적 등을 분석하여야 작성 시기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부흥운동을 이끈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이 문제는 그들이 왜 부흥운동을 일으켰는지와도 밀접히 연계되어 있다. 부흥운동의 주도층으로 재지 유력자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고구려 사회에서 세력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일부는 고구려가 멸망할 때 당에 협력하거나 투항하여 기존에 누려왔던 정치·사회적 지배력이 보장되기를 기대하였을 것이다. 당은 재지 유력자 중 공을 세운 자들을 도독, 자사, 현령에 임명하며 기득권을 인정해 주는 모양새를 취하였다. 그러나 앞서 서술하였듯이 당의 고구려 고지 지배정책은 당의 지배질서가 직접적으로 발휘되는 구조였다. 이에 유공자(有功者)로서 당의 기미지배에 참여하여 기미부주 장관에 임명된 현지 유력자들은 자신의 세력기반을 유지하고자 반당 투쟁을 일으켰을 것이다(김종복, 2003; 이정빈, 2009; 여호규·拜根興, 2017; 정원주, 2018).
고구려 지방관과 기미부주 장관의 권한 차이에 주목한 연구도 있다. 기미부주 장관에 임명된 유공자들은 고구려에서 지방관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고구려 지방관이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는 권한을 지녔던 것에 비하여, 당의 기미지배에서 지방관의 권한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저항에 나섰다고 이해하는 것이다(장병진, 2016).
한편 당의 지배정책이 본격적으로 실행되기 전부터 부흥운동이 일어났다고 이해하는 연구에서는 고구려 지방관을 부흥운동의 주도세력으로 상정한다. 고구려에서 지방통치체제와 군사제도는 밀접히 연계되어 있었으며, 고구려 후기 지방관은 민정과 군정에 관한 권한을 아우르면서 관할지역을 책임졌다는(金賢淑, 1997; 이문기, 2007) 점에서 착안한 것이다. 국왕이 부재(不在)하고 지배층 상당수가 당으로 끌려갔음에도 각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전개된 원동력을 고구려 후기의 지배체제에서 찾는 입장이다(김강훈, 2022). 다만 이들이 부흥운동을 일으킨 배경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이상의 견해에 따라 검모잠, 안승, 고연무(高延武), 고정문이 유공자 내지 지방관이었다고 추정하지만, 사료를 통해 명확히 드러나는 바는 없다. 다만 방증 사례는 있다. 고구려의 최고위 지방관이었다가 당에 투항하였던 이타인(李他仁)의 묘지명에 따르면, 그는 당에 항복하여 관직을 수여받은 후 부여 지역에서 발생한 고구려 유민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묘지명에는 당시 부여 지역의 상황을 강유(姜維)가 촉의 부흥을 시도한 바에 비유하고 있다. 강유는 중국 삼국시대 인물로, 위가 촉을 멸망시킬 때 투항하였다가 촉의 재건을 시도하였던 인물이다. 그렇다면 이타인묘지명의 찬자는 부여 지역 부흥운동의 지도자를 강유와 유사한 행적을 지닌 인물로 인식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즉 당의 기미지배에 협력했던 유력자가 부여 지역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고 해석할 수 있다(余昊奎·李明, 2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