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서북한 지역의 부흥운동
2. 서북한 지역의 부흥운동
서북한 지역에서 부흥운동과 관련하여 사료에 등장하는 인물은 안승, 검모잠, 고연무이다.
먼저 안승은 가장 이른 시기에 당의 지배로부터 이탈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는데, 669년 2월 4,000여 호를 이끌고 신라로 투항하였다고 한다. 안승의 출자부터 살펴보면,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외손, 보장왕의 서자,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의 아들 등 기록마다 다르다. 연정토의 아들이자 동시에 보장왕의 외손(李丙燾, 1964; 村上四男, 1966; 金壽泰, 1994; 盧泰敦, 1997; 임기환, 2003; 井上直樹, 2016; 정원주, 2018; 김수진, 2020)으로 이해하는 입장이 다수이지만, 보장왕의 서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도 있다(池內宏, 1930; 李丙燾, 1977; 李基白·李基東, 1982; 손영종, 1997; 최호원, 2020; 김강훈, 2022). 무엇이든 안승이 고구려 최고위 지배층에 속한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안승이 신라로 투항한 시기는 당이 고구려 고지 지배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하기 시작한 때이다. 따라서 안승의 신라 투항은 당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이해된다. 다만 타국으로 집단 이주하는 형태는 소극적인 저항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669년 2월에 안승이 신라로 투항한 것이 실재한 사건인지 의문이 제기되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검모잠은 신라로 남하하던 중 서해 사야도(史也島)에서 안승을 만났다. 그런데 서해안에는 4,000여 호가 머물 수 있는 섬을 찾기 어렵다. 그리고 신라 문무왕이 안승을 책봉하며 내린 책문에는 “공이…홀몸으로 이웃나라에 의탁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고려한다면 안승은 홀로 신라에 투항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임기환, 2003; 임기환, 2024). 또는 안승이 4,000여 호를 이끌고 신라에 투항을 타진하였지만 신라는 당과의 갈등을 회피하고자 하였고, 결국 안승은 신라로 투항하지 못하고 사야도로 피신하였다고 보기도 한다(김강훈, 2022).
고연무는 태대형(太大兄)이라는 고위 관등을 소지한 인물이었다. 그는 670년 3월 신라의 설오유(薛烏儒)와 함께 각각 정병(精兵) 1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옥골(屋骨)에 이르렀다. 그리고 먼저 개돈양(皆敦壤)에서 기다리고 있던 말갈병과 4월 4일 싸워서 크게 이겼다. 그런데 당 군사가 계속 이르자 고연무와 설오유는 군사를 이끌고 백성(白城)으로 물러났다고 한다. 옥골은 중국 요령성 봉성시 동남에 위치한 봉황산성(鳳凰山城)으로 비정되는 오골성(烏骨城)을 가리킨다(盧泰敦, 1997). 따라서 고구려의 고연무와 신라의 설오유가 연합하여 압록강을 건너 말갈과 충돌한 사건을 오골성전투라고 부를 수 있다.
신라군과 합동작전을 펼쳤던 고연무에 대해 신라에 귀순하였거나 복속되어 있던 고구려 장수라고 보기도 한다(池內宏, 1930; 村上四男, 1966; 金壽泰, 1994; 최호원, 2020). 이러한 입장에서 신라가 귀순한 고구려 유민세력을 활용하여 고구려 부흥세력과 연결된 말갈과 전투를 벌인 사건으로 오골성전투를 이해하기도 한다(金壽泰, 1994; 최호원 2020). 그렇다면 고연무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주도한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편에 섰던 인물이 된다.
반면에 고구려부흥군을 이끌던 인물로 파악하기도 한다(전준현, 1982). 고연무와 설오유가 각각 1만 명의 군사를 이끌었기에 고연무는 독자적으로 군대를 지휘하였다는 점, 그의 지위를 ‘고구려 태대형’으로 밝히고 있다는 점, 고연무가 이끈 정병은 특별히 선발된 날랜 군사를 의미하므로 고연무가 고구려 멸망 이전부터 지휘하였던 부대를 가리킬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고연무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이끈 지도자로 이해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이정빈, 2009).
그렇다면 오골성전투는 고구려 부흥세력과 신라가 연합하여 압록강 이북 지역에서 군사활동을 펼친 것이 된다. 오골성전투를 준비하는 과정과 이동거리 등을 고려할 때, 서북한 지역의 고구려 유민과 신라의 군사협력은 늦어도 669년 하반기부터 이루어졌을 것이다(盧泰敦, 1997; 이상훈, 2010). 오골성전투는 고구려 유민과 신라의 적대관계가 우호관계 내지 공생관계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서북한 지역에서 부흥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은 검모잠이었다. 그의 행적과 당의 대응은 한·중 사서에 상대적으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수림성(水臨城) 사람으로 대형(大兄) 관등을 지니고 있던 검모잠은 잔민(殘民)을 모아 궁모성(窮牟城)으로부터 패강(浿江) 남쪽에 이르러 당 관리와 당 승려 법안(法安)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그런데 도중에 사야도에서 안승을 만나 한성(漢城)으로 맞아들여 임금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를 신라에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니 신라는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였다.
검모잠은 수림성 출신인데, 수림성의 위치는 비정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그가 도성 출신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가 소지한 대형 관등은 7세기 고구려 관등제에서 7위에 해당한다. 따라서 검모잠은 지방 출신의 중급 귀족으로 볼 수 있다(조인성, 2007; 방용철, 2021).
검모잠이 부흥운동을 일으킨 시기와 배경 그리고 부흥운동의 존속 시기에 대한 견해는 엇갈린다. 먼저 거병시기부터 살펴보자. 중국 측 기록에는 670년 4월 검모잠이 반란을 일으켜 안승을 세워 임금으로 삼으니 당은 고간을 동주도행군총관(東州道行軍總管), 이근행을 연산도행군총관(燕山道行軍總管)으로 임명하여 검모잠을 토벌하게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670년 4월은 당 고종이 고간과 이근행의 파견을 명령한 시기로 보아야 하므로, 검모잠은 이보다 이른 시기에 거병하였을 것이다(전준현, 1982; 盧泰敦, 1997). 따라서 670년 초에 거병하였을 수 있다(池內宏, 1930; 金壽泰, 1994; 방용철, 2018). 또는 669년 5월 대규모 강제 이주의 배경이 된 이반자 중 하나에 검모잠을 포함시켜, 669년 4월 이전에 거병하였다고 보기도 한다(李丙燾, 1964; 전준현, 1982; 손영종, 1997). 대규모 사민이 고구려 유민의 반발을 초래하였고 그 속에서 검모잠이 거병하였다고 보면서, 거병시기를 669년 5월~670년 3월(이정빈, 2009), 669년 5월경(김강훈, 2016) 등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거병 목적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록이 유의된다. 검모잠은 국가를 부흥시키고자 당에 반하여 안승을 왕으로 세웠다고 한다. 그는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며 “우리나라의 선왕(先王)이 도를 잃어 멸망하였다”고 하였다. 즉 고구려가 이미 멸망하였다고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검모잠은 당에 의해 멸망한 고구려를 다시 일으키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당의 지배체제에 맞서며 안승을 고구려의 왕으로 옹립하였던 것이다.
검모잠이 부흥운동을 일으킬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국제정세와 연관하여 살핀 연구가 있다. 당이 한반도보다 서역을 중시하는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대규모 병력이 토번 전선에 투입되었는데, 그 일환으로 670년 4월 안동도호 설인귀가 토번 전선의 당군 사령관으로 파견되면서 안동도호부 병력이 설인귀와 함께 토번 전선으로 이동하였다는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 고지에서 당의 감시와 압력이 약화되었고, 이를 계기로 검모잠이 거병하였다고 이해한다(서영교, 2006; 菅沼愛語, 2013). 이에 대하여 당의 군사제도에서 설인귀가 토번 전선으로 차출되더라도 안동도호부 병력이 함께 이동하지 않으며(노태돈, 2009), 670년 당은 한반도 전선과 토번 전선을 동시에 유지하며 병력 운영에 차질을 빚지 않았다는(이상훈, 2006) 반론이 있다.
따라서 국제정세에 유의해야 하지만, 검모잠이 부흥운동을 전개한 서북한 지역의 정세 변동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안동도호 설인귀는 평양성을 떠나 신성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평양성에는 유인궤가 남아 주현 재편 등의 업무를 맡고 있었다(김종복, 2003). 그런데 유인궤는 669년 후반 당으로 돌아갔으며 곧 질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평양 일대에서 당의 정치·군사적 지배력이 일시적으로 크게 약화되었다(池內宏, 1930; 梁炳龍, 1997; 임기환, 2003). 이를 틈타 검모잠은 평양 일대에서 당과 충돌하고 한성에서 안승을 왕으로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670년 3·4월 고연무의 고구려부흥군과 설오유가 이끄는 신라군이 서북한 지역을 지나 압록강 이북으로 진군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가능하였을 것이다.
검모잠은 다른 부흥운동과 달리 안승을 국왕으로 세우면서 고구려의 부흥을 실현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고구려 유민들은 서북한 지역에서 재건한 국가를 ‘고구려’로 인식하였다. 이들이 일본에 외교사절을 파견하면서 스스로를 ‘고려(高麗)’라고 한 바에서 확인된다(盧泰敦, 1985). 그런데 연구자들은 668년 9월 멸망한 고구려와 안승을 국왕으로 하는 부흥세력을 구분하기 위하여, ‘한성의 소고구려국’(村上四男, 1966), ‘고구려국’(전준현, 1982), ‘한성의 고구려국’(임기환, 2003; 최재도, 2015; 정원주, 2018; 김수진, 2020), ‘안승의 고구려국’(이재석, 2010), ‘부흥고구려국’(김강훈, 2022) 등으로 부르고 있다. 이 글에서는 ‘한성 고구려국’이라 하겠다.
검모잠이 안승을 맞아들여 왕으로 세운 곳은 한성이었다. 한성은 황해도 신원군에 위치한 장수산성과 그 주변의 도시유적으로 비정된다. 검모잠이 부흥운동의 거점으로 한성을 선택한 배경에는 고구려 후기 한성의 위상이 고려되었다. 한성은 평양성, 국내성과 함께 3경(京) 중 하나이자 별도(別都)였다. 관청 등 국가시설과 5부의 행정구역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많은 인구와 넓은 곡창지대를 보유한 지역이었다(김수진, 2020). 그리고 고구려 멸망기에 큰 전투를 치르지 않아 전쟁의 피해가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정원주, 2019). 따라서 부흥운동의 거점으로 충분히 기능할 수 있는 곳이었다. 또한 정치적 측면에서 분석하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한성은 ‘한성 고구려국’ 성립 이전부터 고연무가 이끄는 유민세력의 거점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검모잠은 황해도 일대에 세력기반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기에 안승을 국왕으로 내세우며 한성 지역의 고연무와 결합을 추진하였다는 것이다(이정빈, 2009).
검모잠은 670년 6월 다식(多式)을 신라에 파견하여 안승을 왕으로 세운 사실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때 신라를 대국(大國)이라 칭하며 ‘한성 고구려국’이 신라의 울타리(藩屛)가 되기를 자청하였다. 검모잠이 안승을 왕으로 세우자 당은 두 개의 행군을 파견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따라서 ‘한성 고구려국’은 당의 침공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고, 이것이 신라에 원조를 요청하는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신라는 670년 7월 웅진도독부가 파견한 사마(司馬) 예군(禰軍)을 감금하고 백제 고지를 공격하여 82성을 공취하였다. 신라는 백제 고지를 둘러싸고 당과 본격적인 대결을 시작하면서, 육로를 통한 당군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것이 신라가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책봉하고 ‘한성 고구려국’을 지원한 이유였다(권창혁, 2021). 즉 ‘한성 고구려국’의 등장은 신라와 당의 대립이라는 국제정세의 변동 속에서 가능하였던 것이다(임기환, 2003). ‘한성 고구려국’과 신라의 결합은 서북한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3년여 동안 이어지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훗날 고구려 유민이 신라로 이주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런데 ‘한성 고구려국’에서 내분이 발생하여,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들어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문제는 ‘한성 고구려국’의 존속기간, 670~673년 서북한 지역 부흥운동의 주도세력, 안승의 위상 등과 관련되는데,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먼저 안승이 검모잠을 죽인 이유와 시기부터 살펴보자.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670년 4월 당이 행군을 파견하자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고 한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670년 6월 신라가 안승 세력을 지금의 익산 지역인 금마저(金馬渚)에 살게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안승과 검모잠이 대립하게 된 배경을 당군의 공세에 대한 대응전략의 차이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신라로 투항하려는 안승과 부흥운동을 지속하려는 검모잠의 입장 차이를 갈등의 배경으로 지목하는 것이다(李基白·李基東, 1982; 손영종, 1997).
더불어 ‘한성 고구려국’의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도 고려해봄 직하다(金壽泰, 1994; 조인성, 2007; 이정빈, 2009). 구체적으로 검모잠은 군사지휘권과 외교권을 쥐고 있는 실권자였던 데 비하여 안승은 상징적인 존재에 머물러 있었는데, 안승이 국왕의 권위를 내세우며 주도권 다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최호원, 2020). 신라에 의해 검모잠과 안승의 갈등이 촉발되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신라가 ‘한성 고구려국’에게 금마저로의 이주를 먼저 제안하면서, 한성을 기반으로 부흥운동을 추진하려는 검모잠과 신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금마저로 이주하려는 안승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을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정원주, 2019; 김수진, 2020).
만약 670년 6월 안승을 따르는 고구려 유민세력이 금마저로 옮겨갔다면, ‘한성 고구려국’의 존속기간은 1~2개월가량이 된다. 그런데 서북한 지역의 부흥운동은 673년까지 지속되었다. 671년 9월 고간 등이 이끄는 당군 4만 명이 평양에 도착하여 방어시설을 정비한 후 대방(帶方)을 침입하였다. 대방은 한성이 위치한 황해도 일대를 가리킨다(임기환, 2003). 따라서 671년 당군은 한성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부흥세력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672년 7월 고간과 이근행이 이끄는 당군이 평양에 이르러 군영을 짓고 주둔하였으며, 8월에는 평양 인근의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이어서 당군은 백수성(白水城) 인근에 군영을 설치하였다. 백수성은 황해도 재령 일대로 비정되고 있는데, 재령은 ‘한성 고구려국’의 중심지인 한성이 위치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672년 고구려 부흥세력은 당군과 평양 인근 및 황해도 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이상훈, 2012). 안승이 670년에 검모잠을 제거하고 신라로 투항하였다면, 670년 후반~673년 당군에 맞서 싸웠던 고구려 유민세력은 누구일까. 검모잠의 잔여세력(池內宏, 1930; 정원주, 2019; 김수진, 2020) 또는 고연무(이정빈, 2009)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안승의 신라 투항 시점을 670년으로 보기에 어려운 점도 있다. 당은 ‘한성 고구려국’ 성립에 대응하여 670년 4월에 고간과 이근행의 파견을 결정하였다. 그런데 고구려 고지에 파견된 당 행군은 671년까지 요동 지역 고구려 부흥세력에 막혀 한반도로 진입하지 못하였다. 671년 9월 당군이 안시성의 부흥세력을 격파하고 나서야 서북한 지역에 당군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계림도행군총관 설인귀가 671년 7월 신라 문무왕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안승이 황해도 일대에 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더불어 672년 고구려 부흥세력과 당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 기록을 참고한다면, 안승의 신라 투항 시점은 672년 말~673년 초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성 고구려국’은 2년 반여에 걸쳐 당의 침입에 맞서 전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고, 그 중심에는 안승과 검모잠이 있었던 것이다(임기환, 2003; 임기환, 2024). 673년 윤5월 고구려 유민세력은 호로하 서쪽에서 이근행이 지휘하는 당군과 격전을 치른 끝에 큰 피해를 입고, 살아남은 자들은 신라로 도망치게 되었다. 이로써 서북한 지역의 부흥운동은 종결되는데, 이때 안승이 신라로 들어갔다고 이해하기도 한다(최재도, 2015; 최호원, 2020; 방용철, 2021; 김강훈, 2022).
이러한 견해 차이는 안승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평가로 연결된다. 안승이 검모잠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지 얼마되지 않아 신라로 귀부하였다고 본다면, 그는 고구려 부흥에 대한 자발적 의지가 없었던 인물일 수 있다(김수진, 2020). 반면에 안승의 신라 투항 시기를 673년경으로 본다면, 그는 ‘한성 고구려국’의 국왕으로서 최후의 항전까지 지휘한 인물로 이해할 수 있다(최재도, 2015).
‘한성 고구려국’은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무장봉기하는 데서 벗어나 고구려를 재건하는 데까지 이르렀다는 점에서 다른 부흥운동과 차별성을 지닌다. 반면 한계점도 지적되고 있다. 다른 부흥세력 내지 유민집단과 결집하거나 연대하는 모습이 드러나지 않으며, 신라에 의지하여 반당 항쟁을 전개하였다는 점이다. 이에 고구려 유민의 동참을 이끌어 내기 어려웠고 결국은 고구려의 부흥이 아닌 신라로 편입되는 과정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컸다는 것이다(방용철, 2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