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라의 백제 고지 장악과 신라 -당 전쟁
1. 신라의 백제 고지 장악과 신라 -당 전쟁
1) 신라의 백제 고지 장악 과정
660년 7월 백제 패망 직후, 백제부흥군의 봉기가 시작되었다.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이 중심이 된 부흥군은 주류성을 거점으로 삼아 나당연합군에 대한 보급로를 끊으며 이들을 고립시켰다. 이어서 왜에 체류하던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왕으로 옹립하여 왕통을 회복하였고, 왜에 사신을 보내 신라 공격을 요청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왜는 663년 3월과 6월에 신라를 공격하면서 백제부흥군을 지원하였다. 하지만 백제부흥군의 지도부에서 내분이 일어나 세력이 급격하게 약화되었고, 유인궤(劉仁軌)의 원군 요청에 응하여 당 고종이 손인사(孫仁師)와 7,000명의 군사를 파견하면서 전세는 완전히 기울었다. 결국 백제부흥군은 백강전투에서 패배하고 주류성과 두량윤성 등 주요 거점을 함락당하였다. 이들은 임존성에서 마지막 항거를 하였지만, 이 전투에서 흑치상지와 사타상여가 항복하면서 백제 부흥운동은 막을 내렸다. 약 3년 이상 지속된 백제부흥군의 항쟁 기간 동안 당군은 사비 및 웅진 지역에 발이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백제 고지를 발판으로 삼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했던 당의 의도가 지연되는 결과로 이어졌다(노중국, 2003; 심정보, 2007).
한편, 백제 고지를 사이에 둔 당과 신라의 갈등은 백제 부흥운동이 진행되던 기간 중에도 종종 수면 위로 떠올랐다. 신라는 백제가 멸망하기 10여 년 전인 648년, 김춘추가 입당하여 당 태종에게 칙명으로 받은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은 너희 신라에게 주겠다”는 내용을 여전히 중시했지만, 당의 입장에서는 그 약속을 그대로 유지할 생각이 없었다(김영관, 2009; 정운용, 2010). 실제 당은 백제가 멸망한 후 이 지역에 5도독부와 주현을 설치하고 백제의 유력세력을 발탁해 활용하려는 계획을 마련하였다. 다만 부흥군의 저항이 이어지자 현지에서 관리를 발탁하려던 계획을 바꿔 660년 9월 왕문도(王文度)를 웅진도독으로 임명하면서 백제로 보냈는데, 수정된 당의 계획 역시 삼년산성에서 왕문도가 급사하면서 실행되지 못했다.
소정방(蘇定方)은 백제 정벌에 참여했다가 귀국한 이후, 고구려와의 전쟁을 위해 다시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받아 출병하였다. 당시 신라는 661년 6월 태종무열왕 사후 문무왕이 즉위하면서 큰 변화를 겪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당군을 위한 보급에 나섰다. 그렇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고, 신라군은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소정방이 거느린 당군 역시 661년 8월 패강전투에서 패배하고, 662년 2월 옥저도행군총관(沃沮道行軍摠管)으로 출병한 방효태(龐孝泰)마저 전사하게 되면서 회군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를 공략하는 데 실패한 이후 당 고종은 유인궤에게 칙서를 내려 웅진에서의 철군을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백제부흥군의 부여풍과 복신은 이때 사신을 보내 당 장군 유인원에게 “철군을 원한다면 마땅히 보내드리겠다”는 내용을 전달했다. 전쟁에 지친 당 병사들이 철군을 원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심리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노중국, 2003), 결국 유인궤가 나서서 “백제가 다시 살아난다면 고구려를 멸망시킬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우며 철군하지 않는 방향으로 군사들을 설득했다. 이로 인해 당군의 철군 논의는 일단락되었지만 재차 고구려에 대한 공세를 취하는 데까지는 시일이 필요했다.
고구려 원정을 잠시 멈춘 시점에서 당은 다시 백제 고토 지배를 위한 정지작업을 본격화했다. 662년 2월 웅진도독부체제를 만들면서 유인원(劉仁願)을 초대 웅진도독으로 삼은 것이다. 당은 이때 신라에 대해서도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삼는 조치를 취하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으로 임명하였다. 백제와 함께 신라에 대해서도 도독부체제를 적용한 것인데, 이로 인해 승전국과 패전국의 관계였던 신라와 백제는 당이 중심이 된 세계질서 내에 편입된 계림대도독부와 웅진도독부로서, 즉 동등한 위치에서 당의 기미주에 불과한 처지가 되었다(김종복, 2010).
갈등이 더욱 깊어지게 된 것은 부여융이 왜에서 귀환한 이후였다. 부여융을 웅진도독부로 불러오자는 제안을 한 것은 유인궤였다. 이는 백제 유민을 위무한다는 현실적인 목적에 더해, 명목상의 백제를 재건함으로써 신라가 백제 고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정략적 판단이 더해진 조치였다(김수미, 2008; 김영관, 2012). 당은 백제 고지에 대한 신라의 권리를 배제하기 위해 백제와 신라가 참여하는 회맹을 추진하였다. 당이 회맹 추진에 적극적이었다는 점은 다음 기사에서 확인된다.
[문무왕 11년(671)] 남쪽이 이미 평정되자 군사를 돌려 북쪽을 정벌하였는데, 임존성(任存城) 하나만이 헛되이 고집을 부리고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두 나라 군대가 힘을 합하여 함께 하나의 성을 쳤으나, 그들이 굳게 지키고 반항했으므로 깨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신라가 곧 돌아오려 할 때 두 대부(杜大夫)가 “칙명에 의거하면 평정을 마친 후 함께 모여 맹약을 맺으라고 하였으니, 비록 임존성 하나가 아직 항복하지 않았지만 곧바로 함께 맹세를 하는 것이 옳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기사를 보면 당은 칙명을 언급하면서 신라에게 강한 어조로 회맹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백제의 부흥운동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백제 고지에 대해 신라가 간여하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한 당의 전략이었다(노중국, 2003). 이러한 당의 의도를 모를리 없었던 신라 역시 당의 강경한 요구를 회피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임존성이 항복하지 않았으니 이미 평정됐다고 할 수 없으며’, ‘백제는 간사하고 속임수가 한이 없기 때문에 훗날 반드시 걱정이 생길 것’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임존성은 결국 함락되었고, 당은 더욱 강하게 회맹 촉구에 나섰다. “다시 엄한 칙명을 내려 맹약하지 않은 것을 꾸짖었다”라는 표현은 이러한 당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당은 신라와의 군사충돌을 피하면서 자연스럽게 신라군이 백제 고지에서 철군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김영관, 2009). 신라 역시 이 점을 간취하고 있었지만 기존의 명분이 사라진 상황에서 더 이상의 강한 저항을 할 수는 없었다. 신라는 ‘모여서 맹세하는 것이 비록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감히 칙명을 어길 수 없었’고 결국 백제와 신라 사이의 ‘화해를 중재한다’는 명분의 회맹이 진행되었다.
1차 웅령회맹(664)은 신라의 입장에서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회맹이 진행된 웅령이 현재의 어느 지역에 해당하는지 명확하게 비정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아마도 웅진 지역이 아니라 신라의 영역 쪽에 보다 가까운 곳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기에 더더욱 신라로서는 이 회맹에 불만이 쌓였을 것이다. 당의 입장에서도 1차 회맹은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신라 측에서 문무왕이 참가하지 않고 왕의 동생인 김인문을 보내 그 역할을 대신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양쪽 모두 불만스러운 상황에서, 이듬해인 665년 8월에 다시 2차 취리산회맹이 추진되었다. 취리산회맹이 진행된 위치는 현재 공주시 서북쪽에 위치한 연미산이 유력하다. 취리산회맹은 전통적인 중국의 격식을 갖춰 엄중하게 거행되었다. 백마로 희생을 삼아 서로 피를 나눠 마셨고, 회맹문을 작성한 후 금서철권을 만들어 종묘에 보관토록 했다. 또한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이를 재차 맹세하였다. 취리산회맹에는 왜와 탐라의 사신도 참여하였는데, 당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신라가 맹세를 어기고 군사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외교적 압박의 차원이었다.
웅령회맹 당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취리산회맹에서도 “경계를 긋고 푯말을 세워 영원히 국경으로”을 삼았다는 표현이 나온다. 취리산회맹이 이뤄진 곳이 연미산이라 한다면, 이를 기준으로 다시 경계가 획정된 것이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앞선 웅령회맹과 비교해볼 때 백제 고지에 대한 지배권을 보다 많이 인정받은 것이었지만, 평양 이남의 백제 토지를 받기로 한 648년의 밀약과 비교해보면 오히려 당에게 백제 고지의 절반을 빼앗긴 셈이었다. 신라는 여전히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겠지만 고구려가 북쪽에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더 이상 적극적으로 반발하지 못했다. 당의 입장에서도 백제 고지 전체를 범위로 세웠던 계획과 비교해보면 절반의 땅만 차지하게 된 아쉬운 결과였다(김영관, 2010; 이준성, 2021).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 부흥운동이 종식되고 당의 한반도 지배정책이 구체화되면서 신라와 당 사이의 갈등은 본격적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정운용, 2010). 하지만 두 차례 회맹을 통해 경계 문제가 임시적으로 봉합되면서 신라와 당은 당면과제였던 고구려 공략에 집중하였다. 신라가 다시 웅진도독부를 공략하여 백제 고지를 점유하기 시작한 것은 나당연합군에 의해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였다. 고구려 멸망 후 백제 고지에 대한 신라의 공략 과정에 대해서는 사료상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아 그 실상을 자세하게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669년 5월 문무왕이 각간(角干) 흠순(欽純)과 파진찬(波珍飡) 양도(良圖)를 보내 “신라가 마음대로 백제 토지와 유민을 빼앗아 차지한 것에 대해 당에 사죄”한다는 기사를 참고해보면 669년경 신라가 백제 고지 편입을 시도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한편, 신라는 백제 고지 편입을 시도하였을 뿐 아니라 당에 대해서도 공세를 취하였다. 670년 3월 설오유(薛烏儒) 부대를 요동으로 파견하여 당에 선제공격을 한 것이다(이상훈, 2010). 후술하는 바와 같이 설오유 부대는 고구려 포로를 근간으로 하는 부대였다. 신라가 고구려부흥군을 지원하여 태대형 고연무 부대와 연합하여 당에 대한 공격작전을 수행한 것이다. 요동 선제공격을 단행한 후인 670년 7월 신라는 다시 백제 고지 쪽으로 눈을 돌려 품일, 천존, 군관 등으로 하여금 82성을 점령케 하면서 웅진도독부를 본격적으로 공략하였다. 당은 신라의 군사 행동을 견제하기 위해 671년 설인귀를 계림도행군총관(雞林道行軍摠管)으로 삼아 해로를 통해 웅진도독부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같은 해 6월에 장군 죽지 등으로 하여금 가림성 일대에 설치된 당군의 둔전을 공격하고 부여석성에서 백제인을 포함한 당군 5,200명을 참수하였다. 이어서 10월에는 신라 해군이 당의 군량 운반선 70여 척을 격파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공세로 인해 당군은 웅진도독부가 설치되어 있었던 백제 고지에서 전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는 이듬해 봄까지 이 지역에 대한 공격을 지속하여 백제 고지 대부분을 점령할 수 있었다. 신라는 이 지역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아찬(阿飡) 진왕(眞王)을 도독으로 임명하면서 지배권을 공고히 하였다.
이어서 신라는 현재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에 해당하는 범주의 지역을 완산주(完山州)와 무진주(武珍州)로 편제하였다. 먼저 현재의 전라북도에 해당하는 지역은 대체로 가야 지역을 회복하는 연장선상에서 점령이 이루어졌다. 673년 3월 고구려 유민 안승(安勝) 집단을 금마저에 정착시켜 이 지역의 안정을 도모하였고(조법종, 2015), 684년 이후 안승을 다시 왕경으로 이주시키면서 거열주를 분할하여 이 지역을 완산주로 편제하였다. 다음으로 현재의 전라남도 지역은 대체로 무진주(武珍州)로 편제되었는데, 그 과정을 알 수 있는 사료가 거의 없다. 다만 678년에는 무진주도독의 존재가 확인되는데, 이것이 최초의 임명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명확한 시점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문무왕 15년 “백제 땅을 많이 빼앗아 드디어 고구려 남쪽 경계 지역에 이르기까지를 주와 군으로 삼았다”는 기사를 보면 늦어도 675년에는 백제 전역에 대한 점령과 편제를 완료한 것으로 볼 수 있다(변동명, 2012).
이상과 같이 신라가 웅진도독부를 한반도에서 축출해가는 과정을 통해 옛 백제 지역에 대한 통치를 본격화하였음을 살폈다. 궁극적으로 신라는 백제 고지를 3주로 편성하였고, 백제인들은 이제 신라 국왕의 신민(臣民)으로 편입되었다(최희준, 2020).
2) 신라-당 전쟁의 경과
신라의 백제 지역 장악 과정은 다른 한편으로 신라와 당 사이의 전쟁 과정이기도 했다. 7세기 후반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양자의 동맹관계는 와해되었고, 이제 영토와 백성을 둘러싼 갈등만이 남았다.
신라와 당의 전쟁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연구성과가 축적되어 왔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매우 큰 편차가 있다.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등 중국 측 사료에서는 신라의 복속을 얻어냈다는 측면에서 당의 승리를 말하지만, 『삼국사기(三國史記)』 등 국내 사료에서는 강대국 당의 세력을 무력으로 몰아낸 신라의 승리라는 점을 강조한다. 전쟁이 시작된 시기에 대해서도 668년(양병룡, 1997)을 시작으로 669년(노태돈, 1997; 이상훈, 20012), 670년 3월(허중권, 1995; 서영교, 2006; 주보돈, 2911; 권창혁, 2019), 670년 7~8월(임기환, 2004), 671년(민덕식, 1989; 김병희, 2021) 등 여러 가지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 중 신라·고구려 연합군이 요동의 옥골(屋骨: 오골성)·개돈양(皆敦壤)을 공격한 670년 3월 혹은 신라가 웅진도독부를 직접 공격한 670년 7월을 전쟁의 발발 시점으로 설정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신라와 당의 동맹이 깨지고 양자가 전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 역시 다양하게 제시되어 왔다. 하지만 이는 결국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 영토 처리를 둘러싼 문제로 귀결된다. 특히 신라 입장에서는 전략요충지인 비열홀(比列忽)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불만이 큰 상황이었다(이상훈, 2012). 약자의 입장이었던 신라는 당과의 전쟁을 결심하는 669년경부터 외교사절을 통해 기만작전을 펼치면서 정보수집을 진행하였고, 사면령을 내려 민심을 수습하며 내부 안정을 꾀하는 등 본격적으로 전쟁 준비를 하였다.
670년 3월 신라는 요동의 옥골을 선제공격했다. 이즈음 안승 등은 한성(漢城)을 중심으로 고구려를 재건하고 평양 인근까지 진출하였는데(김수진, 2020), 신라는 수군의 활동을 바탕으로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고 당군의 남하를 견제하면서 고구려부흥군을 지원하였다. 신라의 전략은 검모잠·안승 등 고구려 유민들과의 연계를 매개로 하여 당의 기미주(羈縻州)체제에 균열을 가하고, 패강(浿江) 이남~비열홀 일대에 대한 직·간접적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신라의 전략은 전쟁 발발 초반인 672년 무렵까지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시기 신라는 백제 고지로 전력을 집중하고 신속하게 평정을 완료하면서 두 곳에 전선이 만들어지는 위험성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권창혁, 2021).
한편 신라와 고구려 부흥운동세력의 연합공격에 대응하여 당은 말갈 및 거란 기병과 함께 안시성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세력을 진압하고 평양으로 남하해 왔다. 하지만 당 설인귀의 구원군이 671년 6월 석성전투에서 신라군에 패배하였고, 같은 해 10월 신라 수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산동반도 일대에 있던 지원부대를 통해 군수물자를 보내려던 계획도 무산되었다. 이 사건은 신라 명랑법사가 채색 비단으로 절을 짓고, 풀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면서 ‘문두루 비법’을 시행하였다는 설화적 내용으로 각색되어 지금에 전한다. 아마도 외침을 막아내고자 했던 신라군과 신라민들의 바램이 확대되고 과장되면서 만들어진 것이겠다. 이때부터 673년에 이르기까지 당의 수군이 별다른 활동을 하고 있지 못하였음을 상기해보면, 671년경 신라 수군의 활동은 나당전쟁 초기 신라의 해상교통로 장악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이상훈, 2012).
신라와 당 사이에 본격적으로 대규모 충돌이 발생한 것은 당군이 교두보를 마련하고 본격적인 공세에 나선 672년 후반부터였다. 672년 8월 석문전투에서 신라는 7명의 장수가 사망하는 참패를 당하고 사죄사를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신라는 전국적인 규모의 축성작업을 단행하면서 공세에서 방어로 전략을 전환한다. 신라군과 연합하여 싸우던 고구려 부흥운동세력이 힘을 잃고 그 지도부가 신라로 망명하면서 고구려 고지 방면 방어선이 크게 후퇴하였던 것 역시 이때였다(권창혁, 2021).
673년 무렵 신라의 방어선은 임진강선까지 밀렸다. 그러나 신라군의 결전 회피로 인해 당군 역시 보급 문제가 야기되었고, 장기간 신라 전선에 투입되었던 당군의 병력 수급 문제 등이 겹치면서 전선은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당은 고간·이근행이 이끄는 4만 명만으로는 신라를 더 강하게 압박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674년 유인궤의 인솔 하에 대규모 신라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유인궤는 이듬해 신라 전선에 도착하여 2월 칠중성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유인궤는 당으로 돌아갔지만, 이근행이 병력을 충원받으면서 한반도 경략을 이어갔다.
674년 9월 설인귀의 수군은 천성을 공격하였다. 설인귀 함대의 천성 공격은 한강 하류 일대를 장악함으로써 임진강을 경계로 형성되었던 기존의 전선을 한강 유역으로 재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첫 번째 시도는 실패하였고, 이를 만회하기 위한 과정에서 매소성전투가 진행되었다. 매소성에서 집결한 당은 임진강과 한강 사이 내륙 거점의 역할을 하던 칠중성 및 석현성을 공격하였으며, 아달성·적목성을 함락하면서 강원 북부 지역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당의 두 번째 시도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매소성 전역에서 신라가 성공적으로 방어를 수행함에 따라, 당군은 임진강선을 돌파하지 못하였고, 신라는 한강 이북 지역을 지킬 수 있었다(이상훈, 2012).
676년 윤3월 토번의 공격으로 인해 당 내지가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되자, 당은 고착상태에 빠져 있던 신라 전선을 포기하고 토번에서 형성된 새로운 전선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서영교, 2006). 이러한 배경 속에서 매소성전투 이후 별다른 움직임이 없던 당은 676년 11월 급작스럽게 백제 고지 기벌포 공격을 단행하였다. 당시 주 전선이 형성되어 있던 임진강 일대가 아니라 백제 고지인 기벌포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 것은 당군이 전략을 바꿔 철수작전에 돌입하였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기벌포전투는 철수를 시도하던 당의 군사들과 백제고지에 잔류하던 군사들, 그리고 이에 더해 일부 백제 유민이 기벌포로 집결하는 과정에서, 이를 신라 수군이 공격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676년 11월 무렵에 당은 전면 철수를 결정하였고, 그에 따라 한반도에 있던 당군 전체가 철수를 시작하였으며, 그 주요 철수 장소가 바로 금강 하구의 기벌포였다(이상훈, 2012).
신라-당 전쟁은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강국이었던 당과 동북의 변방국이라 할 수 있는 신라 사이에 벌어진 것이었다. 이 전쟁은 신라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고, 당은 대규모 원정군을 투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라를 ‘정벌’하지 못했다. 당시 상황을 종합해보면 당은 공세를 지속하였지만 신라가 이를 효과적으로 방어하면서 당 군대의 보급 문제를 야기시켰다. 당은 보급 문제와 더불어 국내의 여론 악화, 그리고 토번의 서북 변경 위협 등이 겹치면서 한반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서영교, 2006). 아울러 신라와 당의 전쟁 결과 요동과 한반도 지역에 대한 당의 정치적, 군사적 간섭이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또한 그로 인해 신라 및 발해, 일본 등은 각각의 독자적인 생존 권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신라-당 전쟁이 일국사적인 의의를 넘어, 7세기 이래 새롭게 형성된 동아시아 전반의 향방을 결정 짓는 과정에서 의의를 가진 세계사적 사건으로 규정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권창혁, 2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