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구려 부흥운동과 신라로의 내투
2. 고구려 부흥운동과 신라로의 내투
1) 고구려 부흥운동의 전개
앞서 신라와 당 사이의 전쟁 전개 과정을 개략적으로 확인하면서 신라의 요동 선제공격 당시 고구려 유민들이 작전을 함께 수행하고 있었다는 점을 언급하였다. 이를 비롯하여 신라는 급박하게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고구려 유민들에 대해 때로는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때로는 압박하면서 이득을 취하고자 하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자국의 영토에 더 이상 머물지 못하고 떠난 유민들의 삶은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발생한 유민들은 당의 내지로 강제 이주된 경우를 비롯해 신라와 돌궐, 일본 등으로 건너가게 되었다(김현숙, 2004; 노태돈, 2009). 이 중 당으로 이주한 유민들의 경우 그들의 묘지명이 지속적으로 발견되면서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관련 연구가 꾸준하게 진행되어 왔다. 그에 비해 신라로 유입된 고구려 유민은 그 수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당으로 이주한 유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다. 그런데 신라로 유입된 고구려 유민은 전쟁 과정에서 신라로 투항하거나, 혹은 그 전후한 시점에 소규모로 망명해 온 인물들이었다. 이들의 경우 당으로 이주한 유민들에 비해 자신의 의지로 이주한 경우가 많았고, 또한 고구려 부흥운동과 연결되어 있었다(김수태, 1994). 또한 짧지만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를 건설하며 상당히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했다는 특징을 지닌다.
먼저 고구려가 멸망하기 이전인 666년, 연개소문의 동생이자 최고위층 귀족이었던 연정토(淵淨土)가 신라로 망명해 왔다. 665년에 연개소문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권력투쟁이 발생하자 이를 빌미로 당은 고구려에 대규모 인원을 파병하였는데, 당시 긴박한 국제정세 속에서 연정토는 자신을 따르던 부하 및 자신에게 속했던 12개 성과 3,500명의 백성을 들어 신라에 귀부한 것이다. 이에 신라는 연정토와 그를 따르던 자들을 수도 및 주·부에 안치하고, 함께 온 대부분의 주민들은 그들이 거주하던 성에 그대로 머무르게 하였다(정선여, 2010).
이후 고구려 주요 지역 거점 세력의 투항이 이어졌다. 668년 6월에는 웅진부성의 유인원이 귀간(貴干) 미힐(未肹)을 보내 고구려의 대곡성 등 2군 12성이 항복하였음을 알렸다. 이 성들은 한성 소속이었는데(임기환, 2004), 한성은 고구려 후기 3경(京)의 하나로 5세기 이래로 정치적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지방통치의 핵심거점으로서의 역할을 하던 지역이었다. 즉, 고구려 남부 지역의 중요 거점이었던 한성이 나당연합군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기 전인 668년경 투항하였던 것이다.
고구려 멸망 후인 669년 보장왕의 외손이자 연정토의 아들인 안승(安勝)도 신라로 넘어왔다. 그는 고구려부흥군의 지도자였던 검모잠에 의해 왕으로 옹립된 인물이다. 앞서 언급한 사례가 주로 영역을 바탕으로 한 귀부였던 것에 반해 안승은 직접 4,000호를 이끌고 투항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대규모 주민집단의 이동이 수반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안승의 신라 귀부는 이미 신라로 귀부하였던 연정토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것으로, 고구려 부흥운동과 연동된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김수태, 1994). 고구려 부흥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검모잠은 한성에서 안승을 맞아 왕으로 추대하며 고구려국을 건설하였다(김수진, 2020). 이 외에 고구려 부흥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고연무도 신라로 이주한 유민세력이었다. 고연무는 한성 지역에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로서, 정병(精兵) 1만의 군사도 소유하고 있었다(이정빈, 2009).
신라군에 사로잡힌 포로집단도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8년(668) 11월조에는 “왕이 사로잡은 고구려인 7,000명을 데리고 왕경으로 들어왔다”는 기사가 보이는데, 이들 이외에도 전쟁 중에 사로잡혀 신라로 유입된 경우가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에 대한 신라의 처분은 기록으로 확인하기 어렵지만, 대규모 인원이었던 만큼 신라는 이들의 원활한 통제방안을 마련해야 했을 것이다. 그럴 경우 후술하는 안승과 함께 금마저로 이주시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정선여, 2010; 조법종, 2015). 아울러, 신라가 백제 포로를 처분하였던 사례를 참고해보면, 고구려 포로 중에서도 주요 인사의 경우에는 그 지위와 능력 등을 헤아려 관리로 등용하는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노중국, 1988).
고구려 유민의 부흥운동 및 신라 유입은 당의 안동도호부 설치 및 기미주체제 확립과 연계되는 움직임이기도 했다. 실제 668년부터 670년 사이 기록에는 기미주체제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는 ‘추거(酋渠)·추수(酋帥)’ 등이 안동도호부의 통제하에서 대거 이탈하기 시작했음이 확인된다. 또한 669년 8월 당 조정 내부에서는 고구려의 ‘여구(餘寇)’가 주요 문제로 논의되기도 했다. 특히 670년 초반 검모잠의 봉기는 요동뿐 아니라 평양 일대에 이르기까지 고구려 고지 전역에서 부흥운동이 확산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검모잠은 670년 6월경 패강 유역으로 남하한 후 한성 일대에서 안승을 옹립하고 신라와의 연계를 꾀하였다. 신라 역시 호응하여 670년 8월 사절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는 한편, 이들에게 상당한 물자를 지원하였다. 검모잠 최초 봉기, 당의 토벌군 파견(670년 4월) → 검모잠 남하, 신라와의 연계(670년 6월) → 신라의 고구려왕 책봉(670년 8월) 순으로 일련의 사건이 진행된 것이다(조법종, 2015; 권창혁, 2021).
이상에서 언급한 일련의 움직임은 고구려 유민들의 활동과 이를 지원하면서 당과의 전쟁을 준비하던 신라의 움직임이 서로 연동되고 있음을 말해준다(김수태, 1994). 즉, 검모잠이 남하한 것 자체가 애초에 신라의 지원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고구려 부흥운동의 전개는 신라-당 전쟁의 배경이 된 측면이 있고, 역으로 신라와 당의 전쟁 상황은 고구려 부흥운동 주도세력에게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호간의 복합적인 전략적 안배 속에서 일련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권창혁, 2021).
2) 고구려 부흥운동의 소멸과 신라 내투
신라와의 연계하에 국가의 재건을 이룬 안승 등 고구려 유민세력은 초기에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관련한 정황을 고려해보면 672년 무렵을 전후한 시점에 이들은 평양 인근 지역까지 진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최재도, 2015; 권창혁, 2021). 특히 672년 후반 평양 지역으로 침공해 온 고간(高侃) 등 당군은 ‘마읍성(馬邑城)’을 첫 번째 공격 목표로 삼았는데, 이를 통해 적어도 그 인근 지역까지는 적대세력, 즉 고구려부흥군이 진출한 상태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672년 후반 석문전투에서 신라·고구려 연합군은 크게 패배하였다. 석문전투 이후에도 한동안 고구려 세력은 당군의 공세에 저항하였으나, 673년 무렵을 전후하여 결국 이근행 등의 공세를 버티지 못했다. 차츰 밀리던 고구려부흥군은 호로하(瓠濾河)를 지키지 못하고, 마지막 거점이었던 우잠성(牛岑城), 대양성(大楊城), 동자성(童子城)을 빼앗기면서 고구려 고지를 떠나 신라 땅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672~673년 사이 고구려 고지에서의 부흥운동을 둘러싼 당과 신라 사이의 갈등은 점차 고조되어 양국의 직접적인 대규모 군사 대결로 격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신당서』에서는 “평양성의 패잔병들은 다시 군열(軍列)을 정비할 수 없자, 신라로 함께 망명하였다. 그리하여 무려 4년 만에 평정되었다”고 표현하였다. 670년 안승과 검모잠의 고구려국 재건 이후 4년 동안 지속된 고구려 유민의 대당항쟁이 이로써 종식된 것이다. 신라-당 전쟁 과정에서 나름의 또 다른 목적을 위해 항쟁을 벌였던 고구려 유민의 활동은 이후 신라 정부로 하여금 보덕국과 고구려 유민에 대해 우호적인 조치를 취하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임기환, 2003).
고구려부흥군의 저항력이 약화되고 신라가 단독으로 전쟁을 수행하게 되자, 고구려부흥군의 입지와 신라의 대우도 달라졌다. 674년 9월 신라는 안승을 보덕국왕으로 책봉하였다. 기존과 달리 고구려의 계승성을 인정하지 않고, 신라왕의 덕에 보답하라는 의미의 ‘보덕’이라는 의미를 통해 신라에 대한 복속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전략적인 측면에서 고구려 유민들의 군사적인 지원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된 신라가 취할 수밖에 없는 조치이기도 했다(이미경, 2015).
보덕국은 신라가 허용한 범위 내에서만 자존을 지킬 수 있는 부용국의 처지였다. 그런데 보덕국에서 671년부터 683년에 이르기까지 총 8차례에 걸쳐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 사실이 확인된다. 이를 보덕국의 독자성을 반영하는 증거로 파악할 수도 있겠으나, 실상을 보면 671년과 673년의 경우에만 보덕국 단독으로 사신을 파견하고 있고 나머지는 신라 관리와 동행하고 있다. 671년의 경우 한성 고구려국의 재건과 연관하여 그 사실을 일본 측에 알리고 청병(請兵)하는 것이 사신 파견의 목적이지 않았을까 추측한다(노태돈, 1985; 김수진, 2020). 673년 5월 사신 파견의 경우에도 청병이 목적이었을 것으로 짐작하는데, 당시는 아직 고구려국이 한성에서 당군의 공세를 견디던 때이기에, 그와 관련한 절박한 상황이 반영되었을 것이다(임기환, 2003).
그 외 보덕국의 사신 파견은 신라의 외교정책과 연관하여 살필 필요가 있다. 특히 673년 이후에는 신라가 보덕국을 통해 일본과의 외교적 관계를 강화했다고 해석되며, 보덕국에서는 신라를 지원하는 외교활동을 전개했다고 파악하는 것이 자연스럽다(이재석, 2010). 다만, 대일본 외교활동 관련 사료를 분석해보면 보덕국의 관인 기록에서 기존 고구려식의 부명과 관등명을 칭하고 있음도 확인된다. 형식적일지라도 보덕국이 고구려의 관료체제를 계승하여 운영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며, 그중에는 대장군(大將軍), 장군(將軍) 등의 무관직도 확인되는 바 독자적인 무력기반을 일부 유지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후술하는 바와 같이 684년 보덕국민의 반란 당시 이들의 저항에 신라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고 있음을 보면 자체적인 무력기반이 있었을 것이며, 이들이 이후 9서당으로 편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임기환, 2003).
674년 문무왕이 고구려왕 안승을 보덕왕으로 다시 책봉할 당시 보덕국의 종말은 예견되어 있는 것이었지만, 신문왕 즉위 후 그러한 움직임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신문왕이 즉위한 직후 벌어진 김흠돌의 반란이 진압되자 안승은 소형 수덕개(首德皆)를 파견하여 ‘역적을 평정한 일’을 축하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결과적으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683년 10월 신문왕은 안승을 경주로 불러 소판(蘇判)으로 삼고, 김씨 성을 내렸다. 또한 경주에 머물게 하면서 저택과 토지를 내려주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에 대해 금마저의 보덕국인들은 저항하며 봉기했다(정선여, 2013).
684년 11월 보덕국은 최후를 맞이하였다. 안승의 조카뻘 되는 장군 대문(大文)이 금마저에서 ‘반란’을 꾀하다가 처형당한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대문의 죽음을 보면서 남은 사람들은 관리들을 죽이고 읍성을 장악하면서 ‘반란’을 이어갔다. 신문왕은 장사(將士)들에게 명하여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당주(幢主) 핍실(逼實)이 전사하였다. 보덕군민들의 마지막 저항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보덕국의 마지막 저항을 진압할 수 있었고, 보덕국민들을 남쪽 주·군에 사거시켰다. 보덕국이 자리잡고 있던 땅은 금마군으로 편제되었다. 보덕국의 소멸 후 그 핵심세력들은 새롭게 신라의 관인층이나 무력기반으로 편제되었다. 686년 고구려 관인층에게 신라의 관등을 수여하는 기준을 마련하였고, 같은 해에 보덕성민들을 9서당 중 벽금서당(碧衿誓幢)과 적금서당(赤衿誓幢)으로 구성한 것이다(김철준, 1978). 이렇게 보면 고구려 유민들 중 상당수는 보덕국이라는 중간 단계를 거친 후 최종적으로 신라에 편제된 셈이다. 그리고 보덕국과 신라가 맺었던 특수한 관계로 인해 이들은 같은 유민임에도 불구하고 백제 유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고 평가된다(노중국, 198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