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구려의 국세 팽창과 전쟁
1. 고구려의 국세 팽창과 전쟁
국가형성기(기원전 1세기~1세기) 고구려의 주된 경제 행위는 농업·교역·전쟁으로 집약된다. 당시의 농업생산성은 열악한 생태환경적 제약 조건으로 인하여 그 사회의 기본적 소요마저 충족시킬 수 없을 정도로 저급하였다. 따라서 당시 고구려는 경제적 취약성을 군사력으로 상쇄하려는 정책을 의도적으로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고구려에 있어서 전쟁은 농경과 교역에 갈음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제 부문의 수요·공급을 창출함으로써 모든 사회에 있어서의 역동성을 끌어올리는 기능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국가형성기 고구려의 국가 성격은 국가형성론적 측면에서 전제적 군사국가(專制的 軍事國家, despotic military state)적 성격이 매우 짙었다. 여기서 전제적 군사국가란 지속적인 군사력 조성정책, 노골적인 군사적 팽창정책, 피정복주민의 집단예속민화정책, 강제적 사민(徙民)정책 등을 자국의 생존·발전을 위한 전략으로 선택하고, 이를 관철하는 국가를 말한다(Elman R.Service, 1968).
다음으로 고구려는 국가 지배구조의 인적 기반이라는 측면에서 군사귀족제(militocracy) 사회에 바탕을 둔 국가였다. 당시 고구려는 주요 지배계층이 군사귀족으로 충원되는, 언제나 무관이 문관보다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는 사회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배질서의 측면에서 신분제를 기축으로 하여 운영되는 신분국가였다. 고구려는 애당초부터 신분제를 근간으로 물리적 폭력에 바탕한 전일적인 통제력이 지배·생산·일상의례에 관철되는 국가로 출발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형성기 고구려는 전제적 군사국가에서 출발한 군사귀족제에 바탕한 신분국가로서 우리 민족사 인식의 지평에 그 첫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러한 형성기 고구려의 전사국가(李基白·李基東, 1982) 혹은 병영국가(garrison state)로서의 국가적 성격은 이후 고구려사의 전개에 있어 그 내재적 속성으로 작용하였다(朴京哲, 1996).
국가형성기 이래 고구려는 당시 우리 민족사에 대하여 언제나 강요항으로서 주어지고 있던 내륙아시아 유목 여러 세력 및 동북아시아 지역의 말갈(靺鞨)·선비(鮮卑)·거란(契丹) 등과 연관된 ‘대륙관계사’ 전개의 향방을 능동적으로 주도하면서 적극적으로 대처해 갔다.
이 사실은 중원의 한족(漢族)이 위진남북조시대(3~6세기 말) 동안 북아시아 초원지대에서 흥기한 여러 유목민족에게 위축·압도·정복되고 있었다는 점에 비추어 매우 주목을 요하는 문제다. 고구려는 다양한 종족과 그들의 다기한 문화권과의 만남 속에서 그 발전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유목사회와 영농정착제국의 중간지대인 변경지역에서 발흥하여, 양측의 사회·정치 구조를 숙지하고 있는 세력만이 유목제국(遊牧帝國, imperial nomads)을 건설할 수 있다”라는 주장은(Owen Lattimore, 1962), 비단 유목제국의 흥기뿐만 아니라 고구려가 전제적 군사국가에서 제국으로 웅비하는 과정을 해명함에 있어서도 재음미해볼 만한 가설일 수 있다(박경철, 1988).
고구려는 국가형성기 이래 환인(桓仁)·집안(集安) 지방을 중심 전략·군사 거점화하여 두만강·대동강·요하·송화강선(豆滿江·大同江·遼河·松花江線)을 지향하는 전방위적 군사 팽창정책을 수행해 나갔다. 이렇게 고구려의 변방은 국초부터 적대적 국가·집단과 접속·교전하는 전선(前線, limes)을 형성하면서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갔다. 또 이는 요하선을 지향한 고구려 변방 공간의 확대 과정이기도 했다. 따라서 고구려는 4세기 말 요동(遼東) 지방을 그들의 전략거점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를 계기로 고구려는 전제적 군사국가에서 제국화한 동북아시아 패권국가로서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다.
5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고구려, 북조의 북위(北魏), 남조의 제왕조들, 유연(柔然), 토욕혼(土谷渾)이라는 5대 강국(major power)에 의한 세력균형체제(Balance of Power International System)가 성립되어 상대적 안정을 누리게 되었다.
이런 정세하에서 남조·유연·토욕혼은 동아시아 세계에 대한 북위의 독점적 지배권 실현을 저지하기 위하여 서로를 잠재적 동맹 대상국으로 인식하고, 대북위 공동행동을 취하는 경향이 현저하였다. 반면 북위는 고구려가 이들과 더불어 대북위 봉쇄연환(封鎖連環)을 형성할 가능성을 저어하여 고구려의 적극적인 군사적 팽창정책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동아시아 세력균형체제의 5대 열강 간 역학 관계의 구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를 거머쥔 존재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결국 북위는 동북아시아에서 고구려 패권을 인정함으로써 동아시아 세계에서 궁극적으로 자국의 지배권을 공고화시키려는 세계경영정책, 곧 세계정책을 채택하고 있었다.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 이러한 고구려의 위상은 전방위적 국세 팽창정책을 관철함에 있어 많은 선택지를 가질 수 있게 만들었던 셈이다.
이처럼 5세기 이래 고구려는 동북아 최강의 무장세력(armed force)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강성은 당시 고구려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으로 설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세계 정책을 관철해 나가게 할 수 있었다. 즉 고구려는 이러한 천하관에 따라 중원과 유목 문화권을 자국의 천하와 분별하면서, 동북아에서 패권 장악을 도모하고 이를 누리고자 하였던 것이다(盧泰敦, 1988; 朴京哲, 1989; 朴京哲, 2007).
국가형성기 이래 고구려의 전방위적 군사팽창의 동선은 당시 가장 중요한 전략물자인 말과 철의 안정적 확보 노력과 무관하지 않았다. 따라서 고구려가 6세기 이상의 기간에 걸쳐 축차적으로 확보한 압록강·두만강·대동강·요하 및 송화강 유역은 제국화된 고구려의 전선을 뒷받침하는 동원기지가 되었다.
또한 고구려는 세력팽창 과정에서 한인(漢人) 및 말갈·선비·거란·실위(室韋)·지두우(地豆于) 등 변방 이종족집단을 군사력으로 제압하면서 이들에 대한 실효적인 지배권을 확립하여 나갔다. 따라서 고구려는 광개토왕 대 이래 급팽창한 자국 세력권 안팎에서 영위되는 여러 기저사회의 다양한 존재양식에 대응하여 여러 지배형태의 병존을 허용하는 다종족국가의 경영, 곧 제국적 지배구조의 실효적 운용을 꾀하였던 것이다.
고구려는 말갈·선비·거란·지두우 등과 같은 이종족에 대해서는 그들 본래의 공동체적 질서와 생산양식, 즉 그들 고유의 생존영역을 비호·보장해주는 대가로 그들로부터 조부(租賦), 특히 노력(勞力)과 군력을 수탈하였다. 이렇게 고구려는 힘을 통한 제압과 이익을 미끼로 한 ‘초무(招撫)’를 매개 기제로 하여 이종족집단을 부용(附庸)세력화함으로써 국가 군사잠재력의 기반을 확대·강화시켜 나갔다(武田幸男, 1979; 朴京哲, 1988; 朴京哲, 1989; 김현숙, 2005; 朴京哲, 2005a).
한편, 고구려 국세 팽창의 진전에 따라 고구려 지배구조 내 중심의 폭이 확장되어 간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과정은 지배구조 내의 중심과 변방 간 차별성이 심화되어 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고구려 지배구조의 인적 기반은 예맥계(濊貊系) 주민들로 구성된 고구려인이었다. 물론 소수의 상층 신분인 한인(漢人) 등 이종족 역시 각자의 역량에 힘입어 일정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으나, 그들은 언제나 이방인으로서 자리매김됨이 상례였다. 고구려 세력권 내에서도 지배구조로 진입할 수 없는 인간 군상은 가상적 변방공간의 주민으로서의 삶을 힘겹게 꾸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사의 전개는 통시적인 변방 공간 확대 과정이며. 공시적으로는 지배구조 내에서의 ‘중심-변방’이라는 차별성의 심화 과정이기도 하였다. 특히 제국화된 고구려가 누렸던 패권이 전방위적 군사팽창정책의 소산이었기 때문에 그 변방 공간은 항시적으로 전선화되어서 구조적인 불안정성을 가진 채 경영되고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고구려 변방 구조의 중층성은 힘을 바탕으로 구축된 제국적 지배구조가 갖는 허실의 한 단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고구려가 애당초부터 군사귀족제와 신분국가에 바탕한 전제적 군사국가로서 출발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수긍 가는 측면이 없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점이 고구려의 제국적 미숙성을 드러내는 한 측면이라고 볼 수도 있다(朴京哲, 2005a).
고구려의 제국화는 보다 많은 자원과 권력의 집적을 가능케 하였지만, 그 과실의 배분을 둘러싼 내부 여러 집단 사이의 경합상을 유발하게 되고, 거기에 상술한 제국적 미숙성까지 더하여 내부에서 제반 갈등이 증폭·만연하게 되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장수왕(長壽王) 대를 전기(轉機)로 보다 집중적 권력행사가 가능한 지배구조로의 이행을 지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구려 국가 지배구조의 근간은 권력 엘리트가 주로 군사 엘리트로써 충원되는 군사귀족제였다. 따라서 장수왕은 선왕의 무훈으로 고양된 왕권을 배경으로 국내 지배집단의 심한 반발과 정치적 갈등을 감내하면서 국왕에게 국가권력이 집중되도록 도모함으로써 집권적 지배체제의 확립을 꾀하였다. 무엇보다도 그가 단행하였던 427년 평양으로의 천도는 이후 고구려 국가 지배구조 성격의 변화와 그 정치사 전개에 있어 하나의 획선을 그었던 것이다.
이러한 집권적 지배구조의 정립은 고구려가 보다 강력한 국가권력을 매개로 여러 갈등을 수렴·조정함으로써 국가·사회적 통합을 유지하고, 나아가 국가의 생존과 이익을 담보코자 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지배구조의 변환은 곧 국가의 기존 지배집단을 길들이는 과정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이 와중에서 국가권력의 표상인 국왕과 기득권집단 및 새로운 지배구조 형성 과정에서 대두한 신흥 지배집단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고 내연화되어 가고 있었다(林起煥, 1992; 盧泰敦, 1993; 鄭媛珠, 2012; 박경철, 2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