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묘지명에 나타난 유민의 동향과 부흥운동
3. 묘지명에 나타난 유민의 동향과 부흥운동
새롭게 확인되고 있는 고구려 유민묘지명은 당의 고구려 고지 지배와 이에 대한 유민들의 대응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도 크다. 668년(보장왕 27, 총장 원년) 9월 평양성이 당군에 의해 점령되고 보장왕과 남건이 사로잡힘으로써 고구려는 끝내 멸망했다. 이적은 보장왕과 포로들을 데리고 장안으로 돌아갔다. 고종은 이적에게 포로들을 먼저 태종의 소릉에 바치게 했으며, 12월 함원전에서 보장왕을 비롯한 포로들을 맞았다. 이 자리에서 보장왕은 당 고종에게 고구려의 강역과 인민을 바치며 항복을 청하고, 고종은 고구려의 강역과 인민이 당으로 편입되었음을 선언하는 의식을 치렀을 것이다.
고구려 고지의 재편은 668년 12월 정식으로 항복을 받는 의식을 치르고 나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멸망을 전후해 안동도호를 역임한 위철(魏哲)과 설인귀(薛仁貴)가 임시적 성격의 ‘검교직’을 갖고 있었던 사실은 현지에서 전황이 지속되고 행정적 재편이 진행 중이었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김종복, 2009).
당 용삭 원년(661)에 이르러, 고종 황제가 칙을 내려 의로운 군대를 발해 요좌(고구려)의 죄를 문책하시니, 공은 군대를 이끌고 [황제의 군대에] 맞서 싸우다가 사로잡혔다. 황제는 저항한 허물을 묻지 않고 귀항(歸降)의 예를 허락했다. [용삭] 2년(662)에 우위·남전부절충장상에 제수되는 은혜를 입었다. 총장 원년(668)에 이르러, 고구려에서 정사가 어지러워지니 동토(東土)가 서조(西朝)로 천명을 돌렸다. 칙을 내려 공이 나라에 충성을 다했다고 여겨, 검교 본토 동주 장사를 맡게 했다. 함형 5년(674)에 이르러, 좌청도솔부·빈양부절충도위에 제수되는 은혜를 입었다. 대주(大周) 천수 2년(691)에 이르러 관군대장군이 더해졌고 나머지는 종전과 같았다. _ 고을덕묘지명
고을덕묘지명에는 661년 당에 귀부했던 고을덕이 고구려 멸망 직후인 668년 ‘검교’ 동주 장사에 임명된 사실이 나타난다. 동주 장사에 대해 신라와 접경한 고구려 고지 동쪽 지역에 설치된 기미부주의 장사로 보거나(葛繼勇, 2015), 고간의 동주도 행군총관부의 장사로 종군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이성제, 2015). 한편 지문에 명시된 연도가 당에서 묘주의 활동, 특히 관직을 역임한 시점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고, 고을덕이 고간의 동주도 행군총관부에 임명된 것이라면, ‘함형 원년(670)’의 연도를 명시했을 것이라는 지적이 있었다(장병진, 2016).
묘주 고을덕은 661년 당에 귀부하고, 이듬해인 662년 절충부 장상으로 임명되었으며, 668년 검교 동주 장사에 임명된 것이다. ‘본토’의 동주라고 표현한 것도 고구려 고지의 부주인 동주, 곧 요동주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된다. 양현기묘지명에는 묘주가 668년에 ‘검교’ 동책주(책성주) 장사에 임명되었고, 현지에서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고정문을 주살한 사실이 확인된다. 고을덕이나 양현기가 공통으로 668년 ‘검교직’에 임명된 것은 아직 본격적으로 고구려 고지의 재편이 진행되지 않은 사실을 반영한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669년 2월 이적과 남생이 부주현의 설치 계획을 상주하니, 유인궤에게 실행을 담당하게 해 부주현을 설치하고 모두 안동도호부에 예속시켰다고 전한다. 그러나 유민 중 떠나고 배반하는 자가 많아 인호를 대거 내지의 공광지(空曠地)로 이주시키고 안동도호부에는 빈약자만 남겨두었다는 『자치통감』의 기사처럼 유민의 반발이 상당했다. 『삼국사기』 지리지의 669년 안동도호부 관하 부주현 설치에 관한 기사에 이어진 압록수 이북의 ‘미항성(未降城)’, ‘이항성(已降城)’, ‘도성(逃城)’의 존재는 압록강 이북의 주요 성에서 당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고 있었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양병룡, 1997; 김현숙, 2004).주 011
마침내 견고한 병진(兵陣)의 어진 신하들로 하여금 끝내 적의 무서운 기세를 풀게 했다. 요새와 수차례의 저항이 갑자기 열리고, 적의 문을 겁박함에 앞에 적군이 없으니, 곧 평양을 함락시켰다. 옛 한사군 지역을 곧 [당의] 강역으로 들였으며 구이(九夷)를 포로로 삼았다. 정월 초하루에 다시 돌아와 이적을 따라 입조하니 특별히 수고롭고 힘씀에 우융위장군을 제수받았다. 곧 강유가 화란을 일으켜 다시 성도를 쳤듯이, 수혈(穟穴)에 요사스러운 기운이 길게 늘어뜨려 예(穢)의 경계에서 문득 나부꼈다. 공이 또 조를 받들고 부여로 나아가 토벌해 적의 우두머리를 거듭 베었다. 다시 관대를 올리고 개선해 돌아와 종묘에 고하고 경축하니 황제가 가상히 여겨 동정원 우령군장군으로 승진시켰다. _ 이타인묘지명
현경 3년(658)에 설인귀를 따라 거란을 평정하고, 용삭 원년(661)에 글필하력을 따라 고구려를 격파하니, 유격장군 좌효위 선신부의 과의에 제수했다. 총장 원년(668) 녹릉부의 장상 절충에 제수하고, 이내 검교동책주도독부 장사로 거듭 제수했다. 반역한 수령 고정문 등을 주살하니, 정양군공 식읍 2,000호에 봉했다. 군은 ‘호지담(瓠之膽)’과 같아서 호랑이 굴을 찾아도 놀람이 없고, 강철과 같은 마음을 지녀서 고구려부흥군의 진영에 들어가도 두려워함이 없었다. 갑자기 좌위익부 우낭장에 제수하고 선성진수에서 토번의 적(賊)을 자주 격파했다. _ 양현기묘지명
현경 3년(658)에 설인귀를 따라 거란을 평정하고, 용삭 원년(661)에 글필하력을 따라 고구려를 격파하니, 유격장군 좌효위 선신부의 과의에 제수했다. 총장 원년(668) 녹릉부의 장상 절충에 제수하고, 이내 검교동책주도독부 장사로 거듭 제수했다. 반역한 수령 고정문 등을 주살하니, 정양군공 식읍 2,000호에 봉했다. 군은 ‘호지담(瓠之膽)’과 같아서 호랑이 굴을 찾아도 놀람이 없고, 강철과 같은 마음을 지녀서 고구려부흥군의 진영에 들어가도 두려워함이 없었다. 갑자기 좌위익부 우낭장에 제수하고 선성진수에서 토번의 적(賊)을 자주 격파했다. _ 양현기묘지명
이타인묘지명에서는 평양성이 함락된 이듬해(669) 정월 이후, 고구려 고지인 부여 지역에서 유민들이 거병한 사실이 확인된다. 이타인은 황제의 명으로 출병해 유민의 군대를 진압했다. 또한 661년 고구려 원정에 참여했던 양현기는 총장 원년(668)에 검교 동책주도독부 장사에 제수되었는데, 고구려 책성 지역에 설치된 도독부의 속관직에 임명된 것이다(辛時代, 2013). 이때 반역한 수령 고정문 등을 주살했다고 하니, 책성 부근에서도 고구려 유민의 반발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유민의 묘지명을 통해서도 멸망 이후 압록강 이북, 요동 지역의 주요 성들이 이반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 고지에 부주현을 설치하는 일은 압록강을 경계로 남북으로 나누어 각각 현지 사정에 밝았던 유인궤와 설인귀가 주도했던 것으로 이해된다(김종복, 2009). 평양 주변, 그리고 웅진도독부와 그 예하 주현을 재편해 안동도호부에 배속시키는 일을 담당하던 유인궤는 669년 군대를 이끌고 장안으로 복귀한 후 670년 정월 면직되었다. 유인궤의 복귀에 즈음해 설인귀는 요동 지역(신성)으로 이동해 부주현의 설치를 계속 진행했고, 유인궤가 면직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요동 지역의 부주현 설치도 마무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동 지역에서 부주현의 설치를 진행했던 설인귀가 토번전선에 투입된 것은 전황의 위급함이 배경이었겠지만, 고구려 고지의 재편이 일단락되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당에서는 기미지배가 작동하는 속에서 멸망 이후 지속되었던 유민의 저항을 제어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장병진, 2016).
중국의 역대 왕조가 주변 이민족 사회와 군신 질서를 구체화하는 방법으로는 ‘영역화(내지화)’, ‘기미’, ‘책봉’, 그리고 ‘조공’이 있었는데, 각각의 사회가 처한 내외의 상황을 고려해 종속화의 정도를 달리 적용한 것이었다(栗原益男, 1979). 당의 기미지배는 이민족을 대상으로 내지와 같은 부주현을 설치하면서도 중앙에서 임명된 화인(華人) 관리가 그 행정장관으로 파견되는 것이 아니라, 종래의 지배구조를 용인하면서 토착 수령들에게 도독, 자사, 현령 등의 지방 관직을 수여해 활용하는 간접적인 지배방식이었다(김호동, 1993).
당은 고구려 고지에 부주현을 설치하고 현지 유력자를 지방관으로 임명하는 기미지배를 실시했다. 표면적으로는 당의 지방통치체제를 적용하면서도 고구려의 지배층 가운데 유공자를 발탁해 도독, 자사, 현령에 임명했다. 이들은 전쟁 과정에서 당에 협력하거나 투항한 지배층을 가리킬 것이다(김종복, 2009). 이때 돌궐의 부락을 서로 신속하지 못하도록 하려던 것처럼 개별 부주 사이의 통속관계는 인정하지 않고, 도호부를 두어 각각의 부주를 관리해 토착세력의 정치적 결집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장병진, 2016).
한편으로는 유민들을 대거 내지로 이주시켰다. 이주된 유민은 강회 이남의 농경지대와 서북 변경으로 나누어 안치되었는데, 호구 증대와 수취 증가를 도모하고 서북 변경의 번병으로 삼으려는 목적이었다. 아울러 이반하는 고구려 유민을 원주지에서 멀리 이격시키고, 고구려 고지의 호구를 열세화 시키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다(노태돈, 1981a). 내지로 이주된 유민들은 해당 주현의 주민으로 편입되었지만(김문경, 1984), 일반 편호와 구분되어 집단적으로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노태돈, 1981a). 별도의 부세 규정이 마련되었던 점이나 고현묘지명에 보이듯 주현에 흩어진 고구려의 병사를 따로 징발했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물론 내지로 이주된 유민과 고구려 고지의 기미부주에 편제된 유민들도 당의 민으로서 일정한 부세의 의무가 부과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고구려 멸망 이후 이루어진 당의 조치는 유민의 묘지명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요동의 자제를 나누어 예속시키고, 군현에 흩어져 살게 했다. 공의 가문은 자제가 으뜸이니 안동에 자리해 살게 했다. 조부 적은 황조의 마미주도독이었다. 부 우는 황조의 귀주자사였다. 형제는 넷이고, 단덕이 큰 아들이다. 대대로 변경에 복무했는데, 충성과 근면함이 날마다 들려왔다. _ 남단덕묘지명
남단덕묘지명에서는 고구려 멸망 이후 유민을 내지로 이주시킨 사실과 지배층이었던 묘주의 가문이 고구려 고지에 남게 된 사실이 전해진다. 당은 기미지배에 반발한 이반자(離叛者)를 내지로 강제 이주시키고, 협조한 유력자를 기미주의 장관으로 기용한 것이다(여호규·拜根興, 2017). 묘주의 조부가 당에서 마미주도독을 역임한 사실로 보아 조부는 고구려의 유력자로서 당에서 유공자로 인정받아 도독에 임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장병진, 2015). 남단덕 가문 외에도 고구려 유민이면서 기미부주의 장관을 역임한 사례로는 건안주도독을 역임한 고흠덕 가문의 사례가 있다. 특히 고원부터 고흠덕까지 4대에 걸쳐 도독의 지위를 승습한 사실이 주목되는데, 도독, 자사의 지위를 세습시켰다는 『신당서』지리지의 기사를 확인시켜 준다.
공의 휘는 흠덕이고, 자는 응휴이며, 발해인이다. 증조부는 원으로 건안주도독이었다. 조부는 회로 건안주도독을 습작했다. 부는 천으로 당의 좌옥검위중랑이었다. 공은 선친의 둘째 아들이다. _ 고흠덕묘지명
군의 휘는 원망이고, 자는 유민이며, 선조는 은나라 사람이다. …발해 고씨는 바로 그 종맹인데, 혹은 일부가 막남에 머물렀다. 증조할아버지 회는 당의 운휘장군 건안주도독이었고, 할아버지 천은 당의 좌옥검위중랑으로 건안주도독을 세습했다. 아버지 흠덕은 건[안]주도독을 세습하고 우무위장군 유주부절도지평로군사로서 높은 관직을 대대로 계승했다. _ 고원망묘지명
군의 휘는 원망이고, 자는 유민이며, 선조는 은나라 사람이다. …발해 고씨는 바로 그 종맹인데, 혹은 일부가 막남에 머물렀다. 증조할아버지 회는 당의 운휘장군 건안주도독이었고, 할아버지 천은 당의 좌옥검위중랑으로 건안주도독을 세습했다. 아버지 흠덕은 건[안]주도독을 세습하고 우무위장군 유주부절도지평로군사로서 높은 관직을 대대로 계승했다. _ 고원망묘지명
한편 잘 알려진 것처럼 안동도호부 예하 부주현을 설치해 고구려 고지를 기미지배하려던 당의 의도는 사실상 실패했다. 고구려 고지뿐만 아니라 북방 변경의 기미지배체제 역시 7세기 후반에 이르러 전면적으로 붕괴되고 있었다(김호동, 1993). 고구려 고지에서는 멸망 직후부터 유민들의 저항이 끊이질 않았고, 기미부주의 설치가 일단락된 670년 이후에도 검모잠의 거병을 비롯한 조직적인 부흥운동이 이어지면서 안동도호부 예하 기미부주의 운영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고구려 멸망을 전후해 당에 귀부했거나 평양 함락 이후 당의 지배에 순응한 지방세력들은 도독, 자사, 현령으로 임명되어 당의 기미지배에 참여했다. 당의 고구려 고지 지배 방식이 종래의 지배구조를 대체로 용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세력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당으로의 편입을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고구려에서의 당의 기미지배는 쉽게 균열이 발생할 여지를 남기고 있었다.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는 종래 지방관의 권한에 비교하면 당의 기미지배에서 부주의 장관에게 주어진 권한은 상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고(장병진, 2016), 그마저도 안동도호부와 당에서 파견한 휘하 속료의 감시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여호규·拜根興, 2017).
결국 추거이자 유공자로서 기미부주의 장관에 임명되었던 유민들도 안동도호부의 통치에서 이탈해 저항했다(이정빈, 2009). 태대형 고연무나 수림성 사람 대형 검모잠의 경우도 그 지위나 거병 시점을 고려할 때, 당의 기미지배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주목할 것은 이 시기 당에 대한 저항이 특정세력을 구심으로 조직적으로 나타나기 시작된 사실이다. 산발적 유민의 저항이 대규모의 고구려 부흥운동으로 나아간 것이다. 특히 이타인묘지명과 양현기묘지명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당시 부흥운동은 요동 지역이나 한반도 서북 지역뿐 아니라 부여 지역과 책성 지역에 이르기까지 거의 고구려 고지 전역에서 전개되었다(여호규·拜根興, 2017).
당이 유목민 부락에 대한 기미지배에서 가장 주의를 기울인 것은 부족 간의 통합으로 대세력이 출현하는 일이었다.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고구려 고지에서도 유민세력의 결합을 차단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였다. 그런데 멸망 이후 지속되었던 유민의 저항은 기미지배가 본격화된 이후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당이 우려했던 세력 간의 결집이 진행되었고, 당은 다시 고간과 이근행이 이끄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