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당으로 이주한 고구려 유민의 존재 양상
3. 당으로 이주한 고구려 유민의 존재 양상
1) 당 내지로 이주한 유민
고구려 멸망 직후 이적이 보장왕과 왕족,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으로 돌아갔다는 것이 유민이 된 고구려인의 첫 강제 이주 기록이다. 요동도행군대총관 이적이 중심이 되어 667년 9월 신성(新城) 함락부터 668년 9월 평양성 함락까지 1년간, 신성과 주변의 16성, 남소성(南蘇城), 목저성(木底城), 창암성(倉巖城) 그리고 부여성(扶餘城)과 주변의 40여 성, 대행성(大行城), 욕이성(辱夷城) 등을 빼앗고 마지막으로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20여만 명은 이 1년간 발생한 포로의 규모를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645년 7만 명 포로의 강제 사민 역시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을 보면, 실제로 한번에 20여만 명의 사민을 단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인귀는 669년까지 안동도호로 재직하면서 고구려 유민의 강제 사민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盧泰敦, 1997b). 669년의 강제 이주 정황은 남단덕묘지명(南單德墓誌銘)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요동의 자제(子弟)를 나누어서 예속시켰다”는 내용은 669년의 강제 사민 조치와 부합한다(장병진, 2015). 이때 이주 대상이 된 자제는 귀족자제(貴族子弟)의 줄임말 또는 부노(父老)에 대비되는 청장년을 지칭하는 용어로, 당의 지배정책에 항거하거나 협조하지 않는 유력자층의 청장년, 즉 자제를 대거 당의 내지로 강제 이주시켰던 것이다(여호규·拜根興, 2017).
669년 강제 사민된 고구려 유민은 평양 일대와 요동 지역의 호강한 민호가 그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육로와 해로를 통해 강·회 이남 및 산남, 병주·양주 이서의 여러 주로 이주되었다. 해로는 내주(萊州)를 거쳐서, 육로는 영주(營州)를 거쳐서 당 내지로 옮겨졌는데, 영주는 강제 사민을 할 때 1차 집결지로 일부 유민은 이곳에 그대로 잔류하거나 소규모 사민의 경우 이곳에 정주시킨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盧泰敦, 1981). 강·회 지역은 당대 수운교통의 중심지이자, 수대에 이어 당대에도 수군의 운영을 지원한 지역으로 인구가 많고 물산이 풍부하여 수군을 징발하고 전쟁물자의 공급을 담당하였다. 산남, 병주와 양주 이서의 공광지(空曠地)는 변경 내지는 준변경 지역에 속한다(정병준, 2009).
677년 2월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기고 보장왕을 요동도독에 임명하면서 이전에 여러 주에 (옮겼던) 고구려 사람들을 모두 보장왕과 함께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얼마 후 보장왕이 모반(謀叛)을 일으키면서 신성의 고구려 유민들은 또다시 하남(河南)과 농우(隴右)의 여러 주로 분산되었다. 이처럼 고구려 유민 중 일부는 당으로 강제 천사된 이후에도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당조의 정책에 따라 언제든지 거처를 옮겨야 했다.
이후 당 내지의 고구려 유민 집단의 동향이나 이들에 대한 당의 정책에 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가, 716년 왕준(王晙)의 상소에서 고구려 유민에 관한 단편적인 언급이 보인다. 왕준은 715년 오르도스 지역으로 내항해 온 일부 돌궐족이 다시 동요하여 이탈해 나가려는 움직임이 있자 이에 대한 대책으로 그들을 남부로 옮길 것을 주장하면서 고구려의 부로(俘虜)를 사막의 서쪽에 옮겨 살게 한 것은 오직 이롭기만 했다고 하였다. 여기서 고구려 유민을 옮긴 사막의 서쪽은 대체로 고비사막 서쪽에 해당하는 당대 농우도 지역으로, 고구려 유민을 이 지역에 옮긴 것을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한 것이다. 고구려 유민은 농우도 지역에서 주요 병력원이 된 것으로 보이는데, 단결병의 주둔지역을 설명하면서 진주(秦州)·성주(成州)·민주(岷州)·위주(渭州)·하주(河州)·난주(蘭州)의 6주에 고려병(高麗兵)과 강병(羌兵)이 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진주 등 6주는 당대 농우도에 속했는데, 단결병은 무측천 대부터 조직되기 시작한 지방의 자위를 위한 부대로 그 지역의 주민을 농한기에 징집해 군에 복무시키고 농번기에 귀농시키는 지방병이었다. 따라서 고려병은 이 지역에 옮겨진 고구려 유민집단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정병준, 2009).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高舍鷄)는 하서군(河西軍) 소속이었는데, 하서군은 양주(涼州)에 설치되었으므로 역시 토번과의 경계 지역에 안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盧泰敦, 1981). 고구려의 병사들은 부병으로 존재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농우도에만 37곳의 군부(軍府)가 설치되었고 부병은 정예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趙超, 2015).
왕준의 상소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내용은 고구려 포로는 사막의 서쪽에 옮겨 살게 하였고 바로 이어 편맹(編氓), 즉 백성은 청주(靑州)와 서주(徐州)의 우측에 안치하였다는 것이다. 당은 고구려 유민을 포로와 백성으로 구분하고 사민 대상의 직역을 고려하여 필요에 따라 적절한 지역을 선정해 안치한 것으로 보인다. 즉 군사적 능력이나 저항성 여부, 경제적 기반 등에 따라 사민지역을 나눈 것이다(이규호, 2016).
고현묘지명(高玄墓誌銘)에는 689년 돌궐이 당을 공격했을 때 고현이 칙명을 받들어 사신으로 가서 여러 주로 하여금 고구려의 병사를 가리게 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고구려 병사들을 여러 주에 분산 안치하였고 이들이 집단으로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宋基豪, 1998). 고현은 각 주에 배치된 고구려 유민 출신 병사를 선발해 돌궐 방어전을 수행한 것이다(여호규·拜根興, 2017).
이상의 내용을 통해 고구려 유민이 당의 정책에 따라 집단적으로 안치된 정황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고구려 유민은 변경에만 안치된 것은 아니었다. 당의 경사(京師) 장안(長安)에도 고구려 유민은 존재하였다. 보장왕을 비롯한 왕족들, 천남생 일가와 같은 최상위 지배층 출신, 고구려 멸망 과정에서 당에 협력한 자들도 당조의 유공자로서 장안에 편적되었다. 또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군공을 세운 당장(唐將)과 관료들에게 분급된 고구려 백성들은 가노(家奴)로 전락하여 이들과 함께 장안에 거주하였다. 다음으로는 당경에 거주하면서 당조에 출사한 고구려 유민들의 삶의 궤적을 묘지명을 통해 살펴보겠다.
2) 유민의 당조 출사 유형과 변화주 001
고구려 유민이 당조에 출사한 것은 멸망을 전후한 시기로, 고구려에서 당으로의 이탈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고구려 멸망 과정에서 천남생은 두 아우인 남건, 남산과 불화를 겪고, 당에 협력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천헌성은 아버지 남생을 대신해 당과 제휴하고 여러 가지 문제들을 조율하면서 당에 협력하였는데, 666년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에 제수되었다. 고종은 668년 12월 함원전의 헌부례(獻俘禮)에서 포로를 받고 논공을 하였는데, 보장왕 이하 고구려 포로들에 대한 사면과 처벌, 협력자들에 대한 관직 제수가 있었다.
고종은 보장왕을 사면하고 사평태상백(司平太常伯)을 제수하였고 천남생에게는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을 제수하였다. 포로가 되기 전 먼저 항복한 천남산은 사재소경(司宰少卿)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제수되었고, 끝까지 저항은 천남건은 검중(黔中)에 유배되었다. 고구려 멸망 전부터 당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천헌성은 사위경(司衛卿)에 제수되었다. 이적과 내응하여 성문을 연 신성에게는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를 제수하였다. 함원전의 헌부례 현장에서 보장왕 이하 고위급 포로들과 협력자들은 직사관 3품 또는 산관 3품에 제수되었다. 헌부례 현장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이타인 역시 평양성을 함락하고 이적과 함께 입조하여 우융위장군(右戎衛將軍)에 제수하였다고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고(余昊奎·李明, 2017), 고요묘도 신성과 함께 평양성 성문을 열었던 인물로 좌령군원외장군(左領軍員外將軍)에 제수되었음이 묘지명을 통해 확인된다(김영관, 2009).
당의 관료 신분은 정1품에서 종9품하까지 30계(階)이고, 율령관제의 서계(叙階) 규정에서 5품과 3품에 들어가는 것은 상당히 엄격한 자격 제약이 있었다. 특히 5품과 6품의 간극은 품계 하나의 차이지만 자손에 대한 대우에 있어서 극명한 차이를 보였는데, 5품 이상의 자손은 자음(資蔭)에 의한 유리한 출신계(出身階)를 가졌다(池田温, 1967). 당대의 용음(用蔭) 규정을 보면, 5품 이상의 관직을 가진 자는 아들과 손자까지 문음(門蔭)의 대상이 되었고 3품 이상의 관직자는 아들, 손자, 증손까지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이러한 당대 율령관제의 구조 속에서 당조가 상층의 고구려 유민들에게 3품의 관직을 수여한 것은 원칙적으로는 증손까지 관직 신분을 보장하겠다는 위무의 차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목민족 수령에게도 3품의 관직을 수여하는 경우가 나타나는데, 태종 대 돌궐제일제국(突厥第一帝國)의 멸망과 현종 대 돌궐제이제국(突厥第二帝國)의 몰락을 계기로 부락을 이끌고 당에 입사한 유목계 번장(蕃將)들이 3품의 제위장군(諸衛將軍)으로 기가(起家)하는 사례가 다수 확인된다. 유목민족 수령들이 상당한 규모의 부락민을 이끌고 당에 귀부했고 이들에 대한 적절한 포상과 함께 군사적으로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李基天, 2014). 이처럼 당은 이민족 중 유력자에게 3품의 고위 관직을 제수하여 당에 안정적으로 정착하도록 하고 후대까지 출사를 보장함으로써 당에 영속적으로 긴박시키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유민도 반란의 진압이나 대외 원정에 참여하면서 군공을 통해 점차 제위장군호(諸衛將軍號)를 취득해 나갔다. 유민 1세대의 지위 상승에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은 군공을 세우는 것이었다(金賢淑, 2001). 이타인은 동정원(同正員) 우령군장군(右領軍將軍)에 제수되었는데, 이는 원래는 원외(員外)에서 부흥운동을 평정한 후 동정원으로 승격된 것으로 보인다(余昊奎·李明, 2017). 고질은 좌옥검위대장군(左玉鈐衛大將軍), 고흠덕은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고족유와 고모는 좌표도위대장군(左豹韜衛大將軍), 왕경요는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남단덕은 좌금오위대장군(左金吾衛大將軍)으로 관직을 마쳤다. 이들은 3품 이상이었으므로 원칙적으로 아들, 손자, 증손까지 문음의 대상이었다.
고자묘지명(高慈墓誌銘)을 통해 고질, 고자, 고숭덕으로 이어지는 3대의 출사 경로를 확인할 수 있는데, 문음 출사의 구체적인 정황이 나타난다. 훈관(勳官)은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자에게 주는 것으로 고자는 어려서 아버지 고질의 훈공으로 상주국(훈 정2품)에 회수(迴授)되었고 우무위장상(右武衛長上), 즉 우무위사계(右武衛司階)에 제수된 것으로 보인다. 훈관으로 출사할 경우 상주국에게는 정6품상의 관직이 제수되어야 하는데 규정대로 제수된 것이다. 697년 5월 고자는 아버지와 함께 포로가 되어 마미성에서 죽임을 당하고 그의 아들 고숭덕이 고자의 생전 마지막 관직이었던 좌표도위익부낭장(左豹韜衛翊府郞將)을 계수하였다. 고자의 출사는 고질의 훈공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고숭덕의 출사는 조부와 부의 훈공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질 3대는 군공으로 출사하여 전공을 쌓고 문음을 통해 관직에 진출하여 신분을 이어간 것이다. 문음의 규정대로라면 고숭덕의 아들까지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고질·고자 부자는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이타인의 묘지명에는 677년 두 아들 이을손과 이준무가 각각 우위위평고부과의(右威衛平皐府果毅), 우효위안신부과의(右驍衛安信府果毅)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유민 1.5세대로 추정되는데, 이타인은 종3품이었으므로 자식이 문음 출사를 한다면 종7품하의 관직에 해당한다. 두 아들은 입당 직후에는 규정대로 절충부 중 하부(下府)에 해당하는 종7품하의 별장(別將)으로 출사했다가 10년 정도 흐른 시점인 677년에는 절충과의(종5품하~종6품하)로 복무 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흠덕은 도성부과의(陶城府果毅)로 출사하였는데, 아버지 고천이 왕사(王事)로 죽으면서 아들 한 명에게 증관(贈官)을 할 수 있었고 고흠덕이 수혜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고흠덕의 아들 고원망은 출사하기 전 도이(島夷)를 평정한 공으로 황제가 별제(別制)를 내려 정번부과의(凈蕃府果毅) 겸 보색군부사(保塞軍副使)로 제수하였는데, 규정된 등급을 넘겨 임명했음을 밝히고 있다. 적어도 최소 6품관으로 임명하면서 무장으로서의 관직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김수진, 2023). 남단덕은 좌금오위대장군(左金吾衛大將軍)이었으므로 아들인 남진공(南珎貢)은 종7품상으로 추정되는 순주녹사참군(順州錄事參軍)에 제수된 것으로 보인다. 묘지명 자료를 통해 후속 세대의 문음 출사의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 유민과 후속 세대가 무관(武官)으로서 절충부에서 근무하거나 번장으로 출사한 사례를 살펴보았는데, 고구려 유민은 물론 대체로 비한인(非漢人), 즉 이민족 출신들이 당조에 무관으로 출사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고구려 유민 1세대가 번장으로 출사한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 지배층 중에서 유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들은 멸망 이후 당에서 번장이 아닌 문관(文官) 출사를 모색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천남산의 사례가 주목된다.
천남산은 천남생과 달리 당에 들어온 이후 출정한 기록이 없다(바이건싱, 2008). 고구려에서도 천남산의 출정 기록은 찾아볼 수 없는데, 남생이 당에 귀순한 후 군사의 일은 천남건이 맡았고 당군과의 교전 기록에도 천남건만 등장한다. 또한 천남생은 장군직을 역임한 반면 천남산은 장군직을 역임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고, 중리대활(中裏大活)과 중군주활(中軍主活)만을 역임하였다. 중리대활과 중군주활은 천남산묘지명(泉男産墓誌銘) 이외에는 확인되지 않아 직임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지만 중리(中裏)는 국왕 측근에서 국왕과 왕실의 사적 업무를 수행하는 근시직일 가능성이 높다(李文基, 2003; 여호규, 2014).
앞서 살펴본 것처럼 668년 12월 헌부례에서 천남산은 종4품상의 사재소경에 제수되었고, 문산 정3품인 금자광록대부도 받았다. 당제에 의하면 관원의 장복(章服)은 산관의 품계에 따르므로 천남산은 3품과 같은 자색의 관복을 입었을 것이고 3품 이상의 산관은 정관의 봉록과 같았으므로 천남산에게 종4품의 직사관을 주었지만 3품으로 대우한 것이다. 당조가 천남산을 특별히 우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杜文玉, 2002).
천남생의 묘지명에는 군사를 움직여 몇 달 만에 개선의 노래로 돌아왔다든지 활이나 칼과 갑옷, 투구가 등장하여 번장으로서의 활약상과 고단함이 드러나는 반면 천남산의 묘지명에는 “군은 홀로 고가(藁街)에서 옥소리를 울리고, 극서(棘署)에서 금을 차고, 새벽에는 북궐(北闕)로 향하여 황제의 가까이에서 붓을 들고 저녁에는 남린(南鄰)에서 머물며 가까이에서 생황을 불고 노래를 불렀다”라고 하였다(장병진, 2016). 여기서 고가는 뒤 구절의 “상서(象胥)의 적을 가진 자 중 이보다 앞선 이는 없었다”와 연결되는데, 상서의 상은 이적의 말과 통하는 것을 이르고, 서는 그러한 재주를 가진 자를 말하는 것으로 상서는 고대에 사방의 사자를 접대하는 관원이나 번역을 하는 관원을 의미한다. 남산이 고가, 즉 한 공간에 있었던 홍려객관과 홍려시에서 사신 영접과 통역(지배선, 2006)의 임무를 맡은 적이 있었고 출중한 능력을 발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극서는 태상시(太常寺)로 태상시에서도 업무를 맡았고, 잠필(簪筆)을 통해 북궐(北闕)에서 황제의 근신(近臣)으로서 기록을 담당한 적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모두 남산이 맡았던 업무와 관련된 내용으로 그의 관력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묘지명의 사(詞)에는 “승명에서 아침에 알현하다(承明旦謁)”라는 내용이 있는데, 승명은 한대(漢代) 시종신(侍從臣)의 입직소인 승명려(承明廬)를 가리키므로 역시 황제의 시신(侍臣)이었던 남산을 묘사한 것이다. 통역을 단순히 이직(吏職)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관인 중 통역 능력이 있는 경우 황제의 시신으로 활약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소그드인 안원수(安元壽)는 태종의 돌궐 친정 과정에서 힐리가한이 항복했을 때 태종이 장중(帳中)에 유일하게 데리고 있었던 인물이었다(崔宰榮, 2005).
천남산이 당조에서 근시의 임무를 담당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에서 맡았던 직임 역시 근시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평양성이 포위되자 보장왕이 남산을 보내 항복을 요청한 것도 남산이 측근에서 시위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천남산은 당조에서 통역과 기록의 임무를 맡은 것으로 보인다. 소그드계인 사가탐(史訶耽)도 중서성(中書省)에서 근무하며 조회에서 통역을 담당하였다. 또한 문서를 취급하는 중서성에 근무했기 때문에 문서를 번역하는 역할을 담당했을 가능성도 있다(石見淸裕, 2016). 천남산은 한어 능력을 바탕으로 당조와 고구려 유민 1세대 관료들의 매개 역할을 하였고, 황제의 근시로서 기록을 담당할 정도로 뛰어난 제술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번장이 아닌 문관으로 출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경에 편제된 고위의 고구려 유민 후속 세대 중에는 세대가 거듭될수록 번장이 아닌 문관 출사를 지망하는 경우도 나타나는데, 천비를 통해 구체적인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金賢淑, 2001).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하더라도 번장 이외의 방향으로 출사를 모색하는 것이다. 천비는 천남생의 증손으로 2세에 문음으로 치천현개국남(淄川縣開國男)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치천자(淄川子), 효기위(驍騎尉)의 작과 훈을 받았다. 천비의 이력 중 주목되는 것은 태묘재랑(太廟齋郎)이다. 재랑은 교제(郊祭)나 묘제(廟祭)와 같은 국가적인 제례의식이나 상시의 제장(祭場)에 필요한 여러 가지 일을 담당하였다(愛宕元, 1976). 천비의 묘지명에는 음보(蔭補)로 태묘재랑이 되었다고 하였다. 태묘재랑은 5품 이상의 자와 손 및 직사관 6품의 자, 청관(淸官)의 자를 대상으로 한 문음이었다. 교사와 태묘 제사의 실무를 주관하는 재랑은 문음 중에서도 가문의 배경이 상당히 중시되었다.
태묘재랑에 대응되는 천우비신(千牛備身)과 비신좌우(備身左右), 태자천우비신(太子千牛備身)은 문음을 통해 무관으로 진출하는 방법으로, 3품 이상의 직사관의 자와 손, 4품 청관의 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천헌성이 690년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원외치동정원(員外置同正員)에 제수되었기 때문에 천비는 이 조건도 충족하였다. 그러나 천비는 태묘재랑을 통해 무관이 아닌 문관 진출을 시도하였고, 번장 출사라는 전형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다. 유력한 이민족 출신의 후손들 중에는 유학의 학습과 문음을 통한 문관 출사의 지향, 한인과의 통혼 현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이들의 한화(漢化)를 가속화하는 수단이었다.
3) 안사의 난 전후 유민의 활동
8세기를 중심으로 활동한 고구려 유민 후속 세대도 주목해야 한다. 안사의 난을 전후로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 중 왕모중, 왕사례, 고선지, 이정기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고구려 유민의 후예로 8세기 당조에서 황제의 최측근으로서, 또는 장군으로서, 또는 절도사로서 당의 중앙과 지방, 변경에서 활약하였다. 1세대 유민들이 대체로 번장으로, 주로 변경지역의 전쟁에 참여하면서 군공을 쌓아갔던 것과 비교하면 안사의 난을 전후로 활동한 고구려 유민 출신 인물들은 좀 더 당조의 권력 중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왕모중열전은 왕모중이 본래 고구려인(本高麗人)이라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왕모중의 아버지는 유격장군(游擊將軍)이었으나 모종의 일에 연좌되어 몰관된 왕구루(王求婁)였고 관노 신분일 때 왕모중이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어릴 때부터 왕모중은 뒤에 현종이 되는 이융기(李隆基)에 예속되었는데, 이융기의 잠저(潛邸) 시절에는 뜻을 살피고 매우 삼가면서 옆에서 보필하였고 이융기도 영민한 왕모중을 곁에 두면서 총애하였다. 이융기는 정변을 통해 현종으로 등극하였는데, 위후를 제거한 첫 번째 정변에서는 왕모중이 자취를 감추었다가 수일 만에 돌아왔으나 이융기는 질책하지 않았고, 오히려 규정을 초월하여 장군에 제수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3품의 대장군에 이르렀다. 이융기는 현종으로 등극하고 713년 7월 태평공주까지 주살함으로써 방해 요소를 제거하였고 이때 왕모중도 소지충(蕭至忠)과 잠희(岑羲) 등을 죽인 공으로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검교내외한구겸지감목사(檢校內外閑廏兼知監牧使)에 제수되고 곽국공(霍國公)의 작위와 실봉(實封) 500호를 받았다.
태평공주의 모반을 진압한 공으로 왕모중보다 많은 실봉을 받은 경우는 1,000호를 받은 송왕(宋王) 이성기(李成器)와 신왕(申王) 이성의(李成義), 700호를 받은 기왕(岐王) 이범(李範)과 설왕(薛王) 이업(李業)으로, 이들은 모두 현종의 형제이다. 이를 제외하면 왕모중보다 실봉을 많이 받은 인물은 없는데, 이를 통해 현종이 태평공주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왕모중의 공이 가장 컸다고 평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내외한구의 관직은 이융기가 위후를 평정한 공으로 평왕에 봉해졌을 때 역임했던 관직이었다(지배선, 2006). 왕모중은 이융기의 직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현종은 이씨(李氏) 여성을 왕모중의 처로 삼게 하고 국부인(國夫人)에 봉하였는데, 아들을 낳자 5품을 제수하였고 황태자와 함께 놀게 하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하였다.
719년에는 특진(特進)과 태복경(太僕卿)에 제수되었고 721년에는 삭방도방어토격대사(朔方道防禦討擊大使)가 되어 활약하였다. 725년 현종이 태산봉선을 할 당시 수만 필의 말을 동원해 같은 색으로 하나의 대열을 이루게 하여 마치 구름 비단과 같이 보였다고 하니 이를 본 현종이 더욱 기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산봉선 이후 왕모중은 종1품의 문산관인 개부의동삼사가 더해졌는데, 현종이 즉위한 이후 15년간 개부에 이른 인물은 황후의 아버지와 요숭(姚崇), 송경(宋璟), 왕모중까지 네 명밖에 없었다. 현종은 장열(張說)에게 감목송(監牧頌)을 짓도록 하여 왕모중의 업적을 칭찬하였다.
군마의 확보는 군사력의 증강과 직결되는 것으로 이른바 현종의 ‘개원의 치(開元之治)’도 현종이 목마(牧馬)를 중시했고, 그에 따라 왕모중이 군마를 위시한 군수물자를 원활하게 공급하면서 이루어진 측면도 있을 것이다. 태종의 정관의 치(貞觀之治) 당시 말의 수가 70만 필에 이르렀으나 현종이 즉위한 초기에는 24만 필에 불과하였고, 725년 왕모중이 내외한구사로 있으면서 말은 43만 필이 되었다(지배선, 2006). 왕모중이 마정에 탁월했음을 보여주는데, 그는 현종의 잠저 시절부터 동궁의 낙타·말·송골매·개 등을 관리하였고 내외한구와 태복경을 역임하면서 현종 대 초반의 마정을 장악하였다.
왕모중이 현종에게 병부상서를 요구하면서 둘 사이에 균열이 발생하였다. 현종은 그 자신이 두 차례의 정변을 일으켰기 때문에 병권에 대하여 더욱 민감하였고, 이로 인하여 왕모중에 대한 의심이 생기게 되었다. 현종은 왕모중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왕모중이 태원(太原) 군기감(軍器監)의 무기를 요구한다는 보고를 받고 왕모중과 그 무리가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이들에 대하여 폄적하고 멀리 유배를 보냈는데, 왕모중의 네 아들도 포함되었다. 여기에 연루된 사람이 수십 명으로, 그중 우위위장군 왕경요(王景耀)는 당주원외별가(黨州員外別駕)로 폄적되었는데, 그가 바로 왕경요묘지명(王景曜墓誌銘)의 주인공으로 추정된다. 왕경요의 묘지명에는 “갑자기 친족에 연루되어 당주별가로 내쫓겼다(頃緣親累 出爲黨州別駕)”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왕모중 사건에 연루된 것을 의미한다(姜淸波, 2010).
왕모중은 연좌되어 몰관된 고구려 출신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관노의 신분에서 종1품의 개부의동삼사까지 올랐다. 현종은 자신이 등극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 중 한 명으로 왕모중을 꼽았고 극진히 대우했다. 왕모중의 마정 운영은 당의 군사력 증강에 큰 역할을 했지만 정변을 경계했던 현종의 의심을 사면서 제거 대상이 된 것이다. 결국 왕모중은 731년 폄적되어 유배를 가던 중 영주(永州)에서 죽었다.
왕사례의 출자는 영주성방(營州城傍) 고구려인(高麗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방은 이민족 군사집단으로, 영주성방은 영주성 부근에 거주하면서 당의 일반 편호와는 달리 원래의 조직 원리를 보존하면서 영주도독부의 지휘를 받던 고구려인들로 구성된 군사집단을 의미한다. 왕사례의 아버지 왕건위(王虔威)는 삭방군(朔方軍)의 장수로 전투에 능했고 왕사례도 어려서부터 병사(兵事)를 익히는 등 무장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왕사례는 절도사 왕충사(王忠嗣)를 따라 하서로 가서, 가서한(哥舒翰)과 함께 압아(押衙)가 되었다. 압아는 절도사 아내(牙內)의 일을 모두 관장하였다고 하는데, 절도사부(節度使府)의 사무를 총괄하는 직책뿐만 아니라 무관으로서의 군장을 의미했으므로 왕사례와 가서한은 절도사 직속의 유력 군장으로서 번병(蕃兵)을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鄭炳俊, 2005a).
749년 가서한은 토번의 석보성(石堡城)을 공격하였는데, 당군의 피해도 컸지만 왕사례는 압아로 참전하여 석보성을 빼앗는 데 전공을 세워 우금오위장군(右金吾衛將軍) 충관서병마사겸하원군사(充關西兵馬使兼河源軍使)가 되었고 752년에는 문산 정2품의 특진과 무산 종3품의 운휘장군(雲麾將軍)이 더해졌다. 이듬해 가서한이 하서구곡(河西九曲)을 정벌할 때 왕사례가 기일을 지키지 못하자 참하려다 풀어주니, 평온하게 참할 것은 참해야 한다며 무슨 이유인지를 되묻는 모습을 보고 여러 장수들이 모두 그를 훌륭히 여겼다는 일화가 있다. 754년에는 금성태수(金城太守)가 더해졌다. 안녹산(安祿山)의 난 이전까지 왕사례는 주로 토번 지역에 대한 정벌에 참여하면서 관력을 쌓았다.
755년 11월 9일 유주에서 거병한 안녹산은 범양(范陽)·평로(平盧)·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휘하의 군대, 동라(同羅)·해(奚)·거란(契丹)·실위(室韋)·예락하(曳落河)라 불린 기마유목민을 중심으로 15만 명을 이끌고, 이들을 부자군(父子軍)이라 칭하며 무서운 속도로 진격하였다. 그 명목은 재상 양국충(楊國忠)을 주살한다는 것이었다(森部豊, 2013). 현종은 가서한을 원수로 삼았는데, 가서한이 왕사례에게 개부의동삼사를 더해주고 태상경동정원(太常卿同正員)을 겸하고 원수부마군도장(元帥府馬軍都將)으로 임명해주기를 주청하였다. 가서한은 모든 일을 오직 왕사례와 더불어 결정하였다고 할 정도로 왕사례를 신임하고 의지하였다.
가서한이 하서·농우의 제번(諸蕃) 부락의 번병과 한병(漢兵)을 거느리고 동관(潼關)에 진주하였는데, 왕사례는 원수부 휘하의 기병들을 총괄하는 원수부마군도장으로 동관의 번병은 거의 왕사례의 지휘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영주성방 출신으로 번병을 지휘하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동관전투에서 가서한이 사로잡히자 현종은 왕사례를 하서·농우절도사로 임명하여 남은 군사를 모으게 하였고 이어 다시 행재도지병마사(行在都知兵馬使)에 임명하였다. 동관의 패전에 대한 문책으로 이승광(李承光)은 참수되었으나 왕사례는 방관(房琯)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였고 병부상서에 제수되었다. 숙종은 양경(兩京)의 수복을 위하여 방관을 원수에 임명하고 왕사례를 부사로 삼았다. 왕사례는 직접 군사를 지휘하지는 않았지만 방관과 함께 종군하였으나 패하였다. 756년 12월 관내행영절도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2월에도 반란군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4월과 5월에도 당군의 패배는 이어졌는데, 9월에 이르러서 당군은 장안 서쪽의 향적사(香積寺) 북쪽의 농수(濃水) 북방에 진을 쳤고, 반란군 10만 명도 그 북쪽에 진을 치고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는데 당군이 반란군을 궤멸시키고 경사에 입성하였다. 이때 왕사례는 선봉에서 적과 싸웠을 뿐 아니라 먼저 장안성의 경청궁(景淸宮)으로 들어가는 공을 세웠고, 10월 낙양을 수복하는 과정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鄭炳俊, 2005a).
757년 12월 현종과 숙종이 대명궁으로 돌아왔다. 사면령을 내리고 논공행상(論功行賞)과 단죄가 행해졌다. 상황이 전국보(傳國寶)를 숙종에게 전하면서 정식으로 제위가 승계되었다. 『구당서』에는 이때의 논공으로 왕사례가 관내절도에서 호부상서로 옮기고 곽국공(霍國公)의 작위와 실봉 300호가 더해졌다고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에는 병부상서로 옮기고, 곽국공과 실봉 500호에 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복양경대사문(收復兩京大赦文)」에는 개부의동삼사 행공부상서 겸 어사대부를 더하고 곽국공과 실봉 600호에 봉한다(可開府儀同三司行工部尚書兼御史大夫 封霍國公 實封六百户)고 되어 있어 기록마다 차이를 보인다.주 002
이러한 가운데 안녹산이 안경서(安慶緖)에게 살해되자 12월, 사사명(史思明)은 하북의 13주와 병사 8만을 거느리고 당조에 투항하였다. 당조는 사사명을 귀의왕(歸義王) 범양절도사에 임명하고 낙양 수복 당시 하북으로 도망쳤던 안경서를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758년 6월, 사사명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8월 숙종은 곽자의(郭子儀)를 중서령(中書令), 이광필(李光弼)을 시중, 왕사례를 병부상서에 임명하였고, 9월에는 대대적인 군사동원령을 내려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 곽자의 등 7명의 절도사와 평로병마사(平盧兵馬使) 동진(董秦)에게 보기(步騎) 20만으로 안경서를 토벌하게 하고, 하동절도사 이광필과 관내·택로절도사(關內·澤潞節度使) 왕사례에게 명하여 돕도록 하였다. 왕사례는 10월 상주(相州)에서 적 2만을 깨뜨렸다. 안경서는 사사명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사사명은 13만 명을 발동하였는데, 12월에 위주(魏州)를 함락시키고 3만 명을 죽였다.
759년 정월 초하루 사사명은 위주의 성 북쪽에 제단을 쌓고 스스로 대성연왕(大聖燕王)이라 칭하였다. 3월에는 관군의 보병과 기병 60만 명이 안양하(安陽河)의 북쪽에 포진하자 사사명도 정예병 5만 명을 이끌고 공격하였는데, 이광필, 왕사례, 허숙기(許叔冀), 노경(魯炅)이 앞장서 싸웠다. 쌍방 모두 죽거나 부상을 당한 자가 반이나 되었다. 곽자의가 삭방군으로 하양교(河陽橋)를 끊고 동경(東京)을 지켰으나 1만 필의 전마는 3,000필만 남았고 갑옷과 병장기는 10만이었는데, 거의 모두 없어지는 등 피해가 상당히 컸다. 유수(留守) 최원(崔圓)과 하남윤(河南尹) 소진(蘇震) 등은 남쪽으로 도망갔고 여러 절도사들도 각각 궤멸되어 본진으로 돌아갔다. 사졸들은 지나는 길에 약탈을 자행하였는데, 통제할 수 없었고 열흘이 지나서야 안정되었다. 곽자의와 9절도사가 크게 궤멸되었지만 오직 이광필과 왕사례만 부대의 대오를 정돈하여 돌아왔다.
안경서는 곽자의의 군영에 있던 식량 6, 7만 석을 얻자 다시 사사명을 배반하였고, 사사명은 안경서가 아버지 안녹산을 죽인 것을 꾸짖으면서 안경서와 네 명의 아우들, 그리고 그를 보좌했던 인물들을 죽이고 안경서가 관할하고 있던 주현과 군대를 모두 거두었다. 4월에 왕사례는 사사명의 장수 양민(楊旻)을 노성(潞城)의 동쪽에서 격파하였다. 사사명은 스스로 대연황제(大燕皇帝)라 칭하고 순천(順天)으로 개원하고, 범양을 연경(燕京)이라 하였다.
숙종은 7월 곽자의를 경사로 돌아오라 하고, 이광필을 대신 삭방절도사·병마원수로 삼았다. 왕사례는 이광필을 대신하여 태원윤(太原尹)을 겸하고 북경유수(北京留守)·하동절도부대사(河東節度副大使)에 충임되었다. 당시 하동은 당군과 반란군이 각축을 벌이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던 대번(大藩)으로 하동절도부대사는 실질적인 번수(藩帥)였다(鄭炳俊, 2005b). 왕사례는 하동절도사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임하자마자 군량 100만을 확보하고 무기를 정비하면서 철저히 대비하였다. 『자치통감』에는 왕사례가 하동절도사로 부임한 후의 일화를 정사의 열전보다도 상세히 기술하면서 그의 인품과 능력을 특기하였다.주 003 760년 윤4월 숙종은 왕사례에게 사공(司空)을 더하여 제수하였는데, 무덕(武德) 연간 이래 재상을 역임하지 않고 삼공(三公)에 임명된 것은 왕사례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당대 최고위직인 태사(太師)·태부(太傅)·태보(太保)와 태위(太尉)·사도(司徒)·사공, 즉 삼사(三師)와 삼공에 오른 사람은 종실 친왕을 합해 모두 71명으로, 『신당서』 재상세계표(宰相世系表)에 왕사례는 이정기와 함께 군공으로써 그 지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대의 삼사는 대부분 사후에 수여하는 증관인 반면 삼공은 대부분 생전에 그 지위에 올랐는데, 재상을 거치지 않고 삼공에 오른 것은 왕사례가 처음이었고 숙종은 왕사례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파격적으로 사공에 임명하였던 것이다(鄭炳俊, 2005b). 왕사례는 하동절도사로 부임한 후 물자를 저축한 것이 풍부하고 넘쳐서 군대를 넉넉하게 하고, 이를 제외하고도 여유가 있어 쌓아놓은 쌀이 100곡(斛)이 되자 경사로 절반을 보내겠다고 주청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재정을 탄탄히 하였고, 또한 법을 집행하는 데 있어 엄정하였다고 하여 원칙을 중시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도와준 이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지 않는 인간적인 면모도 갖고 있었다. 왕사례 사후 관숭사(管崇嗣)가 하동절도사가 되었는데, 몇 달 사이에 재정이 바닥나 버렸고 다시 이어 하동절도사가 된 등경산(鄧景山) 역시 원칙 없는 법 집행으로 하동이 혼란에 빠지면서 왕사례의 빈자리는 더욱 크게 부각되었다.
다만 왕사례의 용병에 대하여 “지키는 계략에는 능했지만 전투에는 약했다(四禮善守計 短攻戰)”고 평가하였다.주 004 병부상서까지 역임한 왕사례의 군사적 능력이 상당히 낮게 평가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관전투는 안사의 난 초기 향방을 결정했던 중대한 전투로, 왕사례의 동관에서의 패배에 대한 인상이 양 당서(唐書)의 찬자에게 강하게 남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던 것과 같이 왕사례뿐만 아니라 곽자의와 9절도사가 함께 패배한 전투가 있었고 다른 전투에서도 왕사례 개인적 차원보다는 대세적인 차원에서 논해야 할 것이다(鄭炳俊, 2005a). 동관 패전 후에도 현종과 숙종은 왕사례를 절도사, 병마사, 병부상서로 계속해서 중용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평가는 적절치 않다.
761년 왕사례가 죽자,주 005 숙종은 철조(輟朝) 1일, 그리고 태위로 추증하고 무열(武烈)의 시호를 내렸으며 홍려경(鴻臚卿)에게 명하여 상사(喪事)를 감호하도록 하고, 조장(詔葬)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하여 충신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황제가 신하의 죽음에 표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를 보인 것이다. 이후 왕사례는 지덕공신(至德功臣) 265명에 이름을 올려 하동절도부대사, 사공 겸 병부상서, 곽국공으로서, 공신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다음으로 고선지에 대하여 살펴보면, 고선지도 양 당서에 모두 입전된 인물로 그 출자를 본래 고구려인이라 밝히고 있다. 아버지 고사계는 하서군에 예속된 장군이었다. 20대가 된 고선지는 아버지의 공으로 유격장군에 제수되었는데, 음보로 무직에 진출한 것이다. 이후 고선지의 평생은 전쟁으로 점철되었는데, 특히 당의 서역 진출과 토번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고 할 수 있다.
고선지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안서절도사(安西節度使) 부몽영찰(夫蒙靈詧)에 의해 여러 번 발탁되면서부터였다. 『구당서』 고선지전에 부몽영찰의 전임이었던 개가운(蓋嘉運)과 전인완(田仁琬)의 휘하에서는 중용되지 못하다 부몽영찰에 의해 발탁되어 개원(開元) 말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사진도지병마사(四鎭都知兵馬使)가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부몽영찰은 고선지를 발탁한 인물이기도 했지만 뒤에 고선지의 승첩을 시기하여 고선지 관련 일화에서 자주 언급되는 “고려노(高麗奴)”주 006를 내뱉은 장본인이기도 했다.
고선지가 세운 수많은 전공 중에서 처음 나타나는 것은 개원 말 달해부(達奚部)에 대한 토벌이다. 현종이 부몽영찰에게 달해부를 칠 것을 명하자, 부몽영찰은 고선지에게 2,000명의 기병을 주고 달해부를 토벌하도록 하였는데, 능령(綾嶺) 아래에 이르러 달해부의 병사를 만나 거의 다 죽이는 전공을 세웠다. 이것이 고선지가 주도하여 승리한 첫 번째 전공으로, 이를 계기로 현종이 고선지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747년 현종은 고선지를 행영절도사로 삼고, 기병과 보병 1만으로 토번을 치라는 칙서를 내렸다. 이미 전인완, 개가운, 부몽영찰이 함께 토번 토벌을 시도했으나 이기지 못한 상태였고, 이에 현종은 고선지에게 특칙(特勅)을 내렸던 것이다. 당의 서북 20여 국은 모두 토번의 통제를 받게 되면서 당에 조공하지 않았고, 토번은 파미르고원과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동진하려는 사라센제국과 연합하여 당의 서역 진출을 봉쇄하고자 하였다. 서역에 대한 지배권과 경제권을 두고 당과 토번이 대립하게 되면서 당은 동서 교역의 독점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군사적인 조치를 통해 서역에 대한 주도권을 다시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池培善, 2000). 고선지가 지휘한 1만 명의 원정군은 연운보(連雲堡)전투에서 토번을 격파하였는데, 『구당서』 고선지전에는 전과에 대하여 5,000명을 죽이고, 1,000명을 생포하였으며 말 1,000여 필을 노획하였고 군량과 병기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빼앗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종이 보낸 술사(術士)와 중사(中使) 변영성(邊令誠)이 더 진격하는 것을 두려워하자 고선지는 그들은 남겨두고 탄구령(坦駒嶺)을 넘어 소발율국(小勃律國)으로 향했다. 연운보전투와 탄구령을 넘어 소발율국을 정벌한 대원정은 세계전쟁사에서 주목되었는데, 해발 4,600여 미터나 되는 파미르고원을 횡단하여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기 때문이다(지배선, 2008).
연운보는 토번 서북의 군사전략 요새로 소발율국과 대발율국(大勃律國)으로 통하는 길목이고, 천축국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李東輝, 2008). 토번이 동서 교역의 상권을 배타적으로 관장하기 위해 이곳에 요새를 만들어 군사를 배치하여 당이 차지하였던 독점적인 서역의 이권을 배제하고 토번만이 서방과 통하는 관문을 장악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다. 따라서 고선지의 토번 정벌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가 연운보 점령이었다. 그 결과 당은 서역에서 잃어버린 주도권을 찾았고, 토번이 서역 제국과 제휴하는 길을 끊었다. 또한 동서 교섭로를 장악하게 되면서 당은 서방세계와 연결할 수 있었다. 고선지는 소발율국까지 평정하였고 그에 따라 불름(拂菻)·대식(大食) 등 72국이 모두 당에 조공하면서 서역에 대한 주도권은 당에 귀속되었다(池培善, 2000).
토번 원정과 소발율국 평정에 대한 공으로 747년 12월 현종은 고선지를 홍려경(鴻臚卿)·섭어사중승(攝御史中丞)에 제수하고 부몽영찰을 대신해 사진절도사(四鎭節度使)로 삼았다. 749년에는 입조한 고선지에게 특진을 더하고, 좌금오위대장군동정원(左金吾衞大將軍同正員)을 겸하게 하였으며 아들 한 명에게는 5품관을 주었다. 현종이 고선지의 토번 원정 성과를 높이 평가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타슈켄트 지방에 있던 석국(石國)은 천보(天寶) 초까지 여러 번 조공을 바쳤다. 당은 746년 석국의 왕자 나구차비시(那俱車鼻施)를 회화왕(懷化王)으로 봉하면서 철권(鐵券)을 내렸고, 이에 석국은 당에 마필과 방물을 바쳤다. 석국은 대식의 압박을 받고 있었는데, 대식을 토벌해줄 것을 당에 요청했지만 방책을 세워주지 않았고, 그러면서 석국도 신하의 예를 갖추지 못한 시기도 있었다. 750년 12월 안서도호 고선지는 석국에 대하여 군사적인 제재를 단행하였다. 당의 석국 정벌은 토번을 중심으로 다시 세력이 재편되어 가려는 움직임이 감지되면서 이를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파미르고원 서쪽 걸사(朅師)가 토번과 연합하여 토화라(吐火羅)를 공격하자 토화라는 당에 구원을 요청했고, 고선지는 걸사를 공격하여 그 왕을 생포하였다. 석국을 정벌한 이유도 장차 토번과 이슬람 세력이 연합하여 당에 대항할 전선이 구축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즉 중앙아시아에서 당 중심의 헤게모니가 이슬람 세력으로 변동될 조짐을 보이자 이를 제동하기 위한 조치가 석국 정벌이었던 것이다(지배선, 2008). 고선지는 석국을 평정한 공으로 개부의동삼사에 제수되었고, 곧 무위태수(武威太守)·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에 제수되었다.
생포한 석국 왕을 장안에서 참수하였는데, 석국 왕자가 대식, 즉 사라센제국으로 가 군사를 요청하여 달라사(怛羅斯)성에서 대식과 고선지의 군대가 교전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탈라스(Talas)전투이다. 달라사는 여러 책에서 다양하게 표기되었다(呾邏斯, 怛邏私, 塔拉斯, 呾邏私, 答剌速). 751년 7월 고선지가 군사를 지휘하여 달라사성에서 대식과 싸웠으나, 사졸이 거의 죽고 남은 자는 겨우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고 할 정도로 5일에 걸친 전투를 통하여 고선지의 군사는 크게 패하였다(李東輝, 2008). 탈라스강에서 벌어진 당군과 대식의 일전에서 고선지 부대가 패배하면서 당은 서역에서의 패권을 대식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당군이 탈라스강에서 패배하기 이전 서역은 중국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이 지역에서는 불교가 신봉되었다. 사라센은 서역이 당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자 이슬람교를 강제로 믿도록 하여 서역에서 신봉하는 종교를 바꾸어 놓았다는 점도 탈라스전의 파장이었다. 또한 탈라스의 패전으로 당의 제지 기술자들이 대식의 포로가 되어 제지법이 서방으로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지배선, 2008). 전쟁에서 포로가 된 당군 가운데에는 화가 번숙(樊淑)과 직조공 여례(呂禮)를 비롯한 많은 공장(工匠)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제지 기술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주 007 이들 기술자에 의해 서역에서는 처음으로 강국(康國)의 수도 사마르칸트에 제지소가 생겨났고 ‘사마르칸트지’라는 종이가 만들어졌다(정수일, 2008). 서역 지역에서 불교에서 이슬람교로의 변화, 종이의 서방 전파 등은 탈라스전을 통한 종교와 문명교류사적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고선지 군대가 탈라스전에 패배하면서 중앙아시아에서 당의 영향력이 축소된 것은 물론 종교, 문화 등 모든 분야를 아랍 세력이 대체하였다. 탈라스전 이후 당은 내부 질서마저 동요되어 이민족 출신 절도사들이 당 제국에 반기를 들었고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다(지배선, 2008). 탈라스전 패배 이후 고선지가 다시 등장하는 것도 안녹산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서였다. 현종은 경조목(京兆牧)·영왕(榮王) 이완(李琬)을 토적원수(討賊元帥)로 삼고, 고선지를 부원수로 삼았다. 755년 12월 11일 범양절도사 봉상청(封常淸)이 범수(氾水)에서 패하고, 13일 안녹산은 동경을 함락시켰다. 고선지는 현종의 명으로 섬주(陝州)에 주둔해 있었는데, 봉상청은 나머지 무리와 섬주로 달아나 고선지에게 동관에 적이 들어오면 장안이 위험해지므로 섬주를 포기하고 동관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고선지는 동관으로 가기 전 군수기지인 태원창(太原倉)으로 가서 돈과 비단을 군사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 물자는 모두 태워버리고 동관으로 향했다. 반란군의 수중에 태원창의 물품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 반란군들이 태원창에서 재물을 얻게 되면 장안에서 더 많은 물자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사기가 높아져 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고선지는 동관에 도착하자마자 방어용 무기를 정비하고 태세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반란군이 공격할 수 없어 퇴각하였다(지배선, 2011).
감군(監軍)은 황제가 파견한 환관으로 황제의 밀사(密使)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었다. 감문장군 변영성과 고선지는 반군과의 전투에 있어 의견 차이가 있었고 고선지는 대부분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변영성은 고선지가 섬주의 땅 수백 리를 버렸고, 태원창의 관물을 훔쳤다고 고발하였다(李東輝, 2008). 현종은 크게 노하여 변영성이 고발한 고선지와 봉상청의 목을 베라고 하였고, 고선지는 안사의 난의 혼란 속에서 토적부원수가 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12월 18일에 목숨을 잃었다. 토번 원정에서 고선지가 쌓았던 군공을 생각하면 허무한 죽음이었다.
758년 사사명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는 혼란한 상황에서 또 한 명의 고구려 유민 출신 인물 이회옥(李懷玉), 바로 이정기주 008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12월, 평로절도사 왕현지(王玄志)가 죽자, 숙종은 중사를 파견하여 장사들을 안무하고 군중(軍中)에서 세우려고 하는 사람을 살펴 정기(旌旗)와 부절(符節)을 주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때 이회옥이 왕현지의 아들을 죽이고 군인들과 함께 후희일을 세우자 군수(軍帥), 즉 평로군사(平盧軍使)로 삼고, 이어 조정에서 정식으로 절도부사(節度副使)로 삼았다. 후희일의 어머니가 이회옥의 고모이므로 이회옥이 그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이하, 이회옥은 이정기로 통일하여 지칭).
그런데 이정기가 후희일을 옹립한 것은 당조가 평로를 인위적으로 개편하려고 했기 때문으로 보기도 하는데, 평로 지역 자체에 거란, 해, 고구려 유민, 소그드인 등 이민족이 많이 살고 있었고 안녹산도 영주에서 등장하였다. 안녹산은 736년 평로장군, 741년 영주도독·평로군사·압양번발해흑수사부경략사(押兩蕃渤海黑水四府經略使)가 되었다가 742년 초대 평로절도사가 되었다. 744년에는 범양절도사를 겸하면서 범양으로 치소를 옮기고, 751년에는 하동절도사까지 겸하였다. 755년 11월 범양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756년 정월 낙양에서 연국황제(燕國皇帝)를 칭했다. 그러나 하동을 장악하지 못했고 하북에서도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였으며 본거지인 평로에서도 이반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756년 4월, 안녹산이 평로절도사 여지회(呂知誨)를 시켜 안동부대도호(安東府大都護) 마영찰(馬靈詧, 앞의 부몽영찰)을 죽였다. 그러자 평로유혁사(平盧遊弈使) 유객노(劉客奴), 선봉사(先鋒使) 동진과 안동장(安東將) 왕현지가 공모하여 여지회를 쳐서 죽이고, 하북의 안진경에게 소식을 전해 범양을 취하여 정성을 다하겠다고 청하였다. 이에 안진경이 양식과 의복, 또 10여 세의 아들을 유객노에게 인질로 보내면서 협력하였다. 당조는 유객노에게 정신(正臣)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평로절도·평로군사 등에 임명하였고 왕현지는 안동부대도호, 동진은 평로병마사에 임명하였다. 이로써 평로는 안녹산을 이반하고 당군의 일원이 되어 싸우게 되었다. 평로는 안녹산을 이반한 이래로 외부 원리보다는 자율적 원리에 의해 유지되어 왔고, 평로군에는 이민족의 기풍이 강하게 존재했는데 당조가 왕현지 사후 일거에 평로를 통제하려 하자 이정기가 후희일을 옹립하고 당조의 통제를 거부한 것이다(鄭炳俊, 2002).
『자치통감』에는 이정기와 군인들에 의한 후희일의 평로군사 추대와 조정의 후희일 절도부사 승인에 대하여 “절도사가 군사(軍士)로 말미암아 폐립된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고, 바로 이어진 사마광(司馬光)의 긴 논찬에서도 숙종이 후희일을 추대한 이회옥과 군사들에 대한 처벌 없이 그들의 뜻대로 평로절도사를 임명한 것에서 재앙과 혼란이 200여 년 이어져 결국 송(宋)이 천명을 받은 것이라 평가하였다.주 009
각주 009)

사마광은 당 후기와 오대(五代) 약 200년 동안 전쟁이 끊이지 않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원인은 번진의 군인들이 일으킨 하극상에 있고, 그 하극상의 시원을 이정기가 후희일을 옹립했을 때 징벌하지 않은 것으로 본 것이다(鄭炳俊, 2002).『자치통감』 권220 당기36 숙종 건원 원년(758), “高麗人李懷玉爲裨將, 殺玄志之子, 推希逸爲平盧軍使. 希逸之母, 懷玉姑也, 故懷玉立之. 朝廷因以希逸爲節度副使. 節度使由軍士廢立自此始. 臣光曰…肅宗遭唐中衰, 幸而復國, 是宜正上下之禮以綱紀四方. 而偸取一時之安, 不思永久之患.…乃至偏裨士卒, 殺逐主帥, 亦不治其罪, 因以其位任授之. 然則爵祿廢置殺生予奪, 皆不出於上而出於下, 亂之生也, 庸有極乎.…彼爲人下而殺逐其上, 惡孰大焉. 乃使之擁旄秉鉞, 師長一方, 是賞之也. 賞以勸惡, 惡其何所不至乎.…由是禍亂繼起, 兵革不息, 民墜塗炭, 無所控訴, 凡二百餘年, 然後大宋受命.…”
후희일은 758년 12월 평로절도사가 된 이후 당조의 지원 없이 사조의(史朝義)가 접수한 범양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761년 12월 북쪽에서 해가 침략해오자 이정기와 휘하 군사 2만여 명을 이끌고 남하하여 산동으로 이동하였다. 762년 5월 후희일이 청주를 함락시키자 대종은 후희일을 평로치청절도사(平盧淄靑節度使)로 임명하였다. 후희일은 산동에서 새로운 근거지를 확보하였는데, 당시 평로치청절도사가 관할한 지역은 청주·치주(淄州)·제주(齊州)·기주(沂州)·밀주(密州)·해주(海州)의 6주였고 치소는 치주에 두었다(鄭炳俊, 2002). 평로치청절도사라는 명칭은 이때 새로 등장하여 이정기 일가가 세습하였고, 이사도(李師道)가 제거되어 이정기 일가의 치청(淄靑) 번진이 당조에 의해 제압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용되었는데, 치청 지역의 관할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평로군에 대한 권리를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박유정, 2023).
762년 5월은 안사의 난이 이미 고비를 지나 마무리를 향하던 때였다. 762년 9월 대종은 낙양의 사조의에 대해 대규모의 공격을 준비하였는데, 사조의는 낙양을 빼앗긴 후 도망하다 11월 막주(莫州)에서 포위되었다. 763년 정월 사조의가 정병 5,000명을 뽑아 유주(幽州)에 가서 군사를 징발하러 가자 전승사(田承嗣)가 항복하고 사조의의 모친, 처, 자식을 관군에 압송하였다. 복고창(僕固瑒), 후희일, 설겸훈(薛兼訓) 등은 무리 3만 명을 이끌고 사조의를 추격하였고 범양을 지키던 이회선(李懷仙)도 투항하였다. 사조의는 해와 거란으로 들어가려다 이회선이 보낸 추격병에 쫓겨 목을 매 자살하고 이회선은 사조의의 머리를 가져다 바쳤다. 사조의의 수급이 경사에 도착했고 안사의 난이 종결되었다(鄭炳俊, 2002).
이정기도 군후(軍候)로서 사조의를 토벌하는 데 내내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762년 당군을 원조하기 위해 참전한 회흘 대추(大酋)의 방자한 행동에 대하여 혼을 낸 것도 다름 아닌 이정기였다. 763년 7월 대종은 천하를 사면하고 세금을 면제해주고 개원하면서 사조의 토벌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관계(官階)를 올려주고 작읍을 차등하여 주었다. 후희일에게 검교공부상서(檢校工部尙書)를 더하고, 실봉과 철권을 내렸다. 또 태묘에 이름을 올리고 보응공신(寶應功臣)이 되어 능연각(凌煙閣)에 화상이 그려졌다. 이때 이정기가 어떠한 보상을 받았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차등적으로 논공이 행해졌기 때문에 후희일보다는 낮은 등급이었을 것이다.
후희일은 점점 방종하고 정무에 태만해졌고 불교 숭배가 지나쳤으며 전렵을 다니는 것을 좋아하면서 군대와 사람들을 괴롭게 하였다. 반면 이정기는 군대의 인심을 얻었는데, 후희일은 이를 시기하여 이정기를 군직, 즉 병마사(兵馬使)에서 해직시켰다. 급기야 후희일은 무당과 성 밖에서 묵었는데, 군사들이 성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고 이정기를 우두머리로 받들었다. 후희일은 활주(滑州)로 달아나 표문을 올려 죄를 받기를 기다렸으나 조서를 내려 사면하였고 경사로 들어가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尚書右僕射)·지성사(知省事)에 제수되었다.
이정기가 후희일을 쫓아내고 두 달 후인 765년 7월 대종이 조서를 내려 황자인 정왕(鄭王) 이막(李邈)을 평로치청절도대사에 임명하고, 이정기를 절도유후(節度留後)에 임명하였다. 유후는 실제 절도사에 임명되었지만 아직 정절(旌節)을 받지 않은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실상 이정기는 평로치청절도사에 임명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왕 이막은 766년 겨울에 천하병마원수가 되었다가 773년에 사망하였는데, 다른 인물이 평로치청절도대사에 임명되었다는 기사는 보이지 않으므로 이정기는 늦어도 766년에는 정식 절도사가 되었을 것이다(鄭炳俊, 2002). 그런데 765년 7월 이정기가 압신라발해양번사(押新羅渤海兩蕃使)도 받았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정기는 평로치청절도사와 함께 압신라발해양번사도 겸직하였는데, 이는 이후 이정기의 뒤를 이은 이납, 이사고, 이사도 등에게도 세습되었다. 『신당서』에는 765년에 “치청평로절도사에 압신라발해양번사를 새로 설치하였다(淄靑平盧節度使增領押新羅渤海兩蕃使)”라고 했으므로 이때부터 발해는 신라와 함께 산동의 평로 번진의 관리를 받게 되었다(鄭炳俊, 2007; 박유정, 2023).
등주(登州)가 속한 산동 지역은 신라 및 발해와 통교하기에 편리한 위치로 신라와 발해의 견당사는 산동을 경유하였고 발해로 향한 당의 사신도 등주를 거친 바 있다. 따라서 평로치청절도사가 신라와 발해 양국 사신이나 상인들이 주로 통행하는 주요 교통로인 산동, 즉 치청 지역을 장악하면서 압신라발해양번사를 겸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박유정, 2023). 이정기 일가는 압신라발해양번사로서 평로 번진을 경유하는 사신을 잘 관리하면서 사신을 통해 당 조정은 물론 주변국에 대한 정보, 교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구당서』와 『신당서』 이정기전에는 “발해의 명마를 거래하는 것이 해마다 끊이지 않았다(貨市渤海名馬 歲歲不節)”라고 하였다. 번진은 다른 국가 혹은 정치 세력과 교역을 할 수 없었는데, 이정기의 치청 번진이 발해와 교역을 진행한 것은 이례적이었고 당 조정의 제재를 받지 않을 만큼 강대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은 이정기의 손자 대까지도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鄭炳俊, 2007; 박유정, 2023).
발해 명마의 거래에 이어지는 내용은 법령을 갖추고 부세를 균등하게 하여 가장 강대한 번진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역시 치청 번진이 중앙의 직접 통제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갖고 독자적으로 운영되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 생각한다. 이정기 일가의 치청 번진은 교역으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고 이를 통해 군사적 기반을 공고히 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나갔을 것이다. 이것이 이정기가 후희일을 축출한 765년 이후 819년까지, 이정기 일가가 하남도의 치주와 청주를 중심으로 15주를 영유(뒤에 12주로 변동)하며 숙종, 대종, 덕종, 순종, 헌종 시기 최강의 번진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원인일 것이다(盧泰敦, 1981; 金文經, 1984).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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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9)
『자치통감』 권220 당기36 숙종 건원 원년(758), “高麗人李懷玉爲裨將, 殺玄志之子, 推希逸爲平盧軍使. 希逸之母, 懷玉姑也, 故懷玉立之. 朝廷因以希逸爲節度副使. 節度使由軍士廢立自此始. 臣光曰…肅宗遭唐中衰, 幸而復國, 是宜正上下之禮以綱紀四方. 而偸取一時之安, 不思永久之患.…乃至偏裨士卒, 殺逐主帥, 亦不治其罪, 因以其位任授之. 然則爵祿廢置殺生予奪, 皆不出於上而出於下, 亂之生也, 庸有極乎.…彼爲人下而殺逐其上, 惡孰大焉. 乃使之擁旄秉鉞, 師長一方, 是賞之也. 賞以勸惡, 惡其何所不至乎.…由是禍亂繼起, 兵革不息, 民墜塗炭, 無所控訴, 凡二百餘年, 然後大宋受命.…”
